코로나에 걸려버렸다

   
김지호
ǻ
더난출판
   
14500
2020�� 10��



■ 책 소개


코로나 확진자의 투병과 완치 후 사회 복귀를 통해 들여다본 팬데믹 시대의 자화상 

코로나19로 많은 이들의 삶이 달라졌다. 가장 큰 변화를 겪은 건 역시 당사자들이다. 확진자와 그들의 가족, 친구, 동료들 그리고 의료진까지. 그들의 삶은 코로나19 이후 어떻게 달라졌을까? 확진자들은 확진되는 순간부터 낙인이 찍힌다. 

“확진자 번호 몇 번이에요?”, “어쩌다 걸렸어?”, “좀 조심하지 그랬어.” 심지어 바이러스와의 힘겨운 사투를 끝내고 완치 후 사회에 돌아와도 무섭다고, 부주의했다고, 이기적이었다고, 신뢰를 잃었다며 비난을 받는다. 완치자들은 교묘하게, 때론 적극적으로 사회에서 또 다시 격리된다. 그들은 여전히 확진자일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건 백신이나 치료제 개발을 통해 바이러스를 물리치는 일이지만, 보다 궁극적으로는 완치자들이 사회에 복귀하여 가능한 한 모두가 예전의 일상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배제와 차별, 혐오 없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이 사회가 정말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코로나에 걸려버렸다》에는 저자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코로나19로 고통받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전 지구적 위기인 탓에 세계 곳곳에 있는 저자의 친구들이 공감의 이야기를 전했다. 코로나 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항공업계 종사자 친구들과 마스크 대란을 온몸으로 경험한 약사까지, 주변 곳곳에 코로나로 인한 크고 작은 어려움을 버티고 있는 이들이 있다. 이 위기는 모두의 위기다. 내 위기가 당신의 위기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서로의 고통에 귀 기울여주고, 공감해줘야 한다. 그래야 힘들지만 조금씩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 저자 김지호
코로나19 완치자. 서울에서 태어나 초, 중,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나온 찐 서울 토박이. 면역력이 약해서 생긴 건강염려증 덕에 사스와 메르스에도 무탈했지만 코로나19는 그냥 넘기지 못했다. 코로나19로 생애 첫 입원 경험을 하게 됐고, 병원에서의 단조로운 일상을 기록하던 것이 책으로 완성됐다. 50일간의 격리 치료라는 대장정의 투병을 마치고 건강하게 사회에 복귀해 적응 중이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들로부터 큰 에너지를 받는 성격 탓에 코로나 시대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요즘은 코로나19 이전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인간’에 대한 철학적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 차례
머리말: 선생님, 코로나 양성 판정 받으셨어요 

1부 50일간의 입원 생활 
코로나 양성 판정, 그럼에도 해야 할 일들 
나는 죄인이 되었다 
아이스팩과 해열제 한 알, 코로나에 대항하기 위한 모든 것 
입원 중 반복되는 코로나 검사 
코로나는 방심한 틈을 놓치지 않았다 
가족들의 자가격리 
완전히 변해버린 일상, 아니 빼앗겨버린 걸지도… 
확진자 동기의 이야기 
자가격리된 엄마에게 꽃을 보내드렸다 
격리 입원하면 유급휴가 처리된다고요? 
나를 버티게 하는 힘 
병실을 옮겼다 

2부 기다리던 퇴원, 그리고 일상으로의 복귀 
50일간의 입원, 드디어 퇴원 
진료비 총 2,500만 원, 내가 낸 돈은 0원 
바이러스와의 싸움 뒤, 이제는 세상과 싸워야 했다 
나 때문에 격리된 사람들과 그들의 배려 
코로나19에 관한 궁금증 
코로나 블루 
후유증 

맺음말: 우리를 버티게 하는 우리 

 




코로나에 걸려버렸다


선생님, 코로나 양성 판정 받으셨어요

일요일 아침 8시.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정체 모를 여성분은 자신을 강남구 보건소 담당자라고 소개한 후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은 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애써 침착하게 말씀하셨다. “선생님, 지금 많이 놀라셨을 것 같아요. 오늘 입원도 진행해야 하고, 이것저것 준비해야 할 게 있으니 말씀드리는 것들 차근차근 준비해주셔야 해요.”


“알겠습니다.” 라고 답했다. 그리고 마른 침을 삼켰다. 목이 따가웠다. 눈을 살짝 감으니 눈꺼풀로 열기가 느껴졌다. 분명 어제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다. ‘아, 내가 코로나에 걸린 게 맞구나.’ 싶었다. 보건소 담당자의 질문과 공지사항은 대강 다음과 같았다.


ㆍ거주하고 있는 지역은 어디인가?

ㆍ함께 살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ㆍ함께 거주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우선 마스크를 착용한다.

ㆍ병원은 서울시에서 지정해주는 병원으로 배정된다.

ㆍ기저질환이나 먹는 약이 있는가?

ㆍ거주하는 집의 경우 방역이 어렵기 때문에 별도의 방역용 소독 스프레이를 제공할 예정이다.

ㆍ집 안에 있는 물건 중 폐기할 것들이 있다면 봉투에 이중으로 포장해서 따로 빼둔다.

ㆍ병원 생활에 필요한 옷, 수건, 세면도구 등을 챙기되 퇴원시 폐기할 것들로 챙긴다.

ㆍ확진자들이 산발적으로 발생하고 있어 언제 구급차가 배정될지 모르니 대기한다.

ㆍ본 통화 이후에는 역학조사관이 연락을 할 것이니 통화를 대기한다.


20분 남짓 통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생각이 많아졌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

이 책을 쓰게 된 것은 코로나에 걸려 입원한 뒤 가장 친한 친구와 대화를 나누던 중 친구가 권유했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써 본 적도 없고, 그렇다고 본업이 글과 가까운 것도, 평소 책을 가까이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어 글을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브런치와 네이버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누가 볼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비슷한 두려움과 걱정의 시간을 헤쳐나가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양성 판정을 받은 순간부터 입원, 입원 생활, 검사, 퇴원, 사회로의 복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목격한 우리의 민낯까지 최대한 상세하게, 가감없이 작성했다.



50일간의 입원 생활

코로나 양성 판정, 그럼에도 해야 할 일들

코로나 검사

양성 판정을 받기 사흘 전 친구의 코로나 검사 소식을 듣자마자 강남구 보건소에 전화를 걸었다. 담당자에게 코로나 검사를 받은 친구와 며칠 전 식사를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담당자는 ‘검사 결과가 나온 후 역학조사관이 역학 관계를 추적해 연락하면 선별진료소에 방문해 검사를 받을 수 있고, 그전에 받으려면 자비로 검사를 받은 후 양성이 나오면 환불받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일단 재택근무로 전환해 집에서 대기하며 어떤 연락이든 기다리기로 했다.


이후 역학조사관의 연락을 받아 지시에 따라 보건소의 선별진료소에 방문해 검사를 받았다. 집에서 강남구 보건소까지 왕복 4킬로미터, 그 길을 혼자 걸어갔다. 그날은 비가 왔다. 날씨도 마치 내 운명을 아는 듯 을씨년스러웠다.


입원, 긴장감, 그리고 락스 냄새

구급차가 국립중앙의료원에 도착했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의료진이 내려 주변의 다른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더니 내가 타고 있는 칸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고는 차에 있던 내 지들을 철제 카트 위에 올리고 대형 분무통에 든 액체를 잔뜩 뿌렸다. 곧 코를 찌르는 락스 냄새가 사방에 퍼졌다.


CT 촬영을 마친 후 밖으로 나오니 간호사 두 분이 비닐로 된 간이 방호복 같은 걸 입혀주고, 발에는 하얀 발싸개를 씌워주었다. 그리고 도착한 316호. 1인실로 배정된 병실에는 창문과 연결된 내 몸만 한 기계 하나와 냉장고, 환자용 침대, 혈압 측정기, 옷장, 그리고 서랍장이 배치되어 있었다. 간호사는 병실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는 간단한 안내 사항 설명과 함께 갈아입으라며 환자복 한 벌과 수건 한 장을 주고 나갔다.


나는 죄인이 되었다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양성 판정을 받은 뒤 우선 문자메시지로 가족과 회사에 이 사실을 알렸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전화가 빗발쳤다. 나는 성실히 설명했지만 겁에 질린 그들은 나에게 어떻게 하냐고 물었다. 나도 무섭고 모르기는 마찬가지인데….


가족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의 목소리에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끊임없이 내 걱정을 해주셨다. 나는 애써 괜찮다고 말하며 엄마의 걱정을 달랬다. 엄마한테 괜한 걱정거리를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은 회사였다. 우선 내 소속 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괜찮냐는 말을 시작으로 질문이 쏟아졌다. 나는 역학조사관에게 들은 이야기를 차분히 설명해드렸다. 나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선제적으로 정보를 조사하고, 확인된 정보를 회사에 공유했다. 하지만 여전히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당혹스러움은 괜히 나까지 덩달아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다.


잠시 뒤 전화가 왔다. 다른 본부의 본부장이었다. 현재 내 상태를 물어보시기에 앞선 전화에서 공유한 내용을 다시 설명해드렸다. 그러자 ‘환진 소식을 듣고 우리 사무실이 위치한 코워킹스페이스 담당자가 통화를 하고 싶어 한다’고 했다. ‘코워킹스페이스 담당자와 통화를 해야 한다고? 복도에서 지나치면서 간간히 인사를 한 정도의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서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니. 또 나에 대한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오고 가겠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대체 몇 시간을 얼마나 더 통화해야 하는 것인가, 억울하지만 아무도 관심 없을 내 사정을 누구에게까지 객관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할까? 힘들고 겁에 질린 건 난데, 그들은 나를 계속 추궁한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

전화 통화를 하면 할수록 죄책감이 들었다. 아니 어느새 나는 죄인이 되었다. 가족에게 전염병을 옮기는 죄인. 회사에 전염병을 옮기는 죄인. 지역사회에 전염병을 옮기는 죄인. 통화를 할 때마다 마치 변명처럼 상황을 설명해야 했고, 설명이 끝나면 모두 하나같이 “어쩌다 걸렸냐?”, “조심하지 그랬어” 라며 걱정해주는 듯 나를 원망했다.


나는 그저 죄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직 명확한 건 내가 피해자라는 사실 하나인데, 주변인들은 자신을 잠정적 피해자로 여기며 나를 가해자로 몰아가는 듯했다. 그들에게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전화 너무 내 귓속을 파고드는 그들의 말은 나를 죄인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코로나는 방심한 틈을 놓치지 않았다

친구가 감염됐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할머니의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연휴의 저녁, 일산까지 할머니의 장례식에 찾아와준 친구들과 못 왔지만 마음으로 함께해준 친구들에게 답례 식사 자리를 가졌다. 코로나가 잠잠하던 시기였고, 마친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에서 일상 속 방역 단계로 경계 수준도 어느 정도 낮아진 터였다. 여섯 명 정도 모인 식사 자리에 우리는 언제나처럼 쓰고 온 마스크를 벗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이틀 뒤, 그 식사 자리에 온 친구에게 밤늦게 카톡이 왔다. “지호야, 혹시 자니?” 친구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지호야 미안한데, 나 코로나 양성인 것 같아. 오늘 검사하고 왔는데 지금 열도 나고 목도 아픈 거 보이 맞는 거 같아.” ‘아차’ 싶었다. 이내 ‘에이, 설마’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는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친구의 목소리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전화를 끊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대체 뭐부터 해야 하지?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봐야 했다.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그러다 우선 자가격리라도 해야겠다 싶어 본부장에게 전화를 걸까 했는데 이미 시간이 12시가 가까워져서 다음 날 아침에 전화를 걸기로 했다.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음, 그래? 알겠어. 진행 상황 알려줘.” 전화를 끊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중이었다. 30분쯤 지나 또 전화를 걸었으나 역시나 통화 중이었다. 불안한 마음이 더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역학조사 중. 양성 판정 받았어. 연락할게.” 귓속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운이 나빴던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그럼에도 여전히 손가락은 나에게, 확진자에게, 우리에게 향한다. 자신도 걸릴까 봐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두려움’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죄를 병마와 싸우고 있는 확진자들에게 씌운다. 아픔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확진자는 자신이 소속된 곳의 구성원들에 의해 이해할 수 없는 문책과 비난을 당한다. 심하게는 회사와 사회에서 매도 당하기까지 한다.


이태원 클럽발 확산이 문제가 됐을 때도 사람들은 66번 확진자가 어디서 어떻게 걸려왔는지 원인을 찾는 게 아니라 그의 신상을 찾아 사회에서 매장시키기 바빴다. 그렇게 한 사람이 매장되는 것을 보고 겁에 질린 인천 학원 강사는 자신도 그렇게 될까 봐 역학조사관에게 거짓으로 말했을 것이다. 나조차도 회사에 보고해야 할 때, 어떤 원성을 들을지 걱정되고 무서웠다. 내가 처음 양성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글자와 전화 통화로 전달되는 주변의 시선과 원망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런 의미에서 거짓말을 했던 인천 학원 강사의 잘못된 선택이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했다.


이태원 클럽발 감염은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몇 가지 교훈을 주었다. 지난 경험을 확실히 학습하고 체화한 정부는 바이러스의 확산 초기부터 빠르고 정확한 방역과 치료를 위해 3T(Test(검사) - Trace(추적) - Treatment(치료))를 강조했다. 지금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이는 사실 엄청난 노력과 희생을 필요로 한다. 특히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함으로써 많은 국민들이 자신이 확진자와 접촉한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염려와 불안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효과적인 방역을 위한 정부와의 두터운 신뢰를 쌓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태원 클럽발 감염을 기점으로 적극적인 신상정보 공개가 가져올 수 있는 역효과를 똑똑히 보았다. 한 개인이 두려움 해소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개인의 인권은 다수에 의해 짓밟히기도 했다. 적극적인 신상정보 공개가 특정 개인의 마녀사냥으로 이어지는 모습은 우리 사회의 개인에 대한 낙인찍기가 얼마나 만연한지를 피부로 느끼게 해줬다. 하지만 동시에 개인이 자신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내던진 순간의 거짓말로 얼마나 수많은 이들의 일상이 무너져내릴 수 있는지도 여실히 보여주었다.


확진자가 동선 추적을 마친 뒤 입원까지 마쳤다면 그에게는 ‘완치’가 어떤 것보다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병상 위에서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이는 환자는 자신의 사회적 안위와 일자리, 사회적 평판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잇다. 병원 밖에서는 자신들을 불안하게 만든 것에 대한 마녀사냥과 손가락질이 자행되고 있다. 과연 나 같은 확진자가 힘든 시기를 지나 일상으로 복귀할 때, 걱정 없이 돌아갈 곳이 있을까?


우리가 아픈 이유는 의학적 역학관계를 따져 잘잘못을 가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운이 나빴던 내 친구는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는 걸 모른 채로 식사 자리에 나타났다. 친구는 나와 다른 친구들에게 바이러스를 옮길 의도가 전혀 없었다. 그저 친구들은 운이 좋았는지 걸리지 않았고, 나는 운이 억세게 좋지 않았는지 그 망할 바이러스에 걸려버렸다.


내가, 우리가 아픈 건 운이 나빴기 때문이다. 아니 나 하나쯤 괜찮을 거라고 방심했기 때문이다. 서로를 배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확진자 개인 신상에 낙인을 찍고 손가락질하기 바빴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위한 배려와 양보의 마음보다 자신의 자유와 이익을 우선했기 때문이다.



기다리던 퇴원, 그리고 일상으로의 복귀

50일간의 입원, 드디어 퇴원

바뀐 퇴원 기준, 내게는 해당 사항이 아니었다

입원 후 첫 2주 동안은 고열과 오한에 시달렸지만, 이후에는 관련 증상이 모두 호전되었다. 3주 차부터는 이렇다 할 증세가 없었음에도 코로나 검사 결과는 항상 양성으로 나왔다. 그러던 중 입원한 지 45일이 되던 6월 25일, 질병관리청 브리핑을 통해 변경된 퇴원 기준을 알게 되었다.

퇴원 및 격리 해제 기준(20년 6월 25일 기준)

ㆍ무증상자

- 확진 후 10일 경과,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임상증상이 발생하지 않음

- 확진 후 7일 경과, 그리고 그 후 PCR 검사 결과 24시간 이상의 간격 연속 2회 음성


ㆍ유증상자

- 발병 후 10일 경과, 그리고 그 후 최소 72시간 동안 1)해열제 복용 없이 발열이 없고, 2)임상증상이 호전되는 추세

- 발병 후 7일 경과, 그리고 해열제 복용 없이 발열이 없고 임상증상이 호전되는 추세, 그리고 그 후 PCR 검사 결과 24시간 이상의 간격으로 연속 2회 음성

* 각각 한 가지 기준 충족 시 퇴원 및 격리 해제


그렇다고 바로 퇴원할 수 없었다. 입원 43일 차부터 갑자기 인후통으로 힘들어져 진통제를 먹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코로나 검사에서 양성이 나온 이유가 분명 내 몸 안에 있긴 한 것이었다. 하지만 진통제 복약으로 인해 46일 차부터 새롭게 바뀐 퇴원 기준을 적용할 수 없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나 다를까 입원 46일 차 목요일 오전에 회진을 들어온 의사 선생님은 내가 예상한 말을 그대로 하셨다. “오늘 점심부터 해열진통제 처방 없이 발열이 있는지 지켜보고 72시간이 지난 후에도 문제가 없다면, 월요일에 퇴원을 하는 것으로 할게요.” 잘 알겠다고 대답하고, 그날 점심식사부터는 더 이상 약을 먹지 않았다.


72시간의 기다림 뒤 맞이한 쉰 번째 아침

72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렀다. 퇴원이 코앞으로 다가오니 입원 생활을 정리하느라 바빠서 그랬던 것 같다. 지난 49일과 다를 것 없이 맞이한 쉰 번째 아침도 어김없이 새벽 5시 반에 시작되었다. 혈압과 혈중 산소포화도, 체온을 측정하신 선생님은 “오늘 퇴원하게 된다면 가장 먼저 퇴원시켜드릴게요!” 라는 말을 남기고 병실을 나가셨다.


한 네 시간쯤 지나자 침대 옆 스피커에서 간호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렷다. “주치의 선생님께서 퇴원하라고 하시네요! 자세한 내용은 곧 알려드릴게요! 우선 들고 나가실 물건가 버리실 물건, 구분해주시겠어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바이러스와의 싸움 뒤, 이제는 세상과 싸워야 했다

퇴원 후 첫 식사를 마친 뒤, 집으로 향하기 위해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할까 고민했다. 평소 같았으면 별 고민도 안 했을 것을 한동안 길 한복판에 서서 고민하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역 입구, 택시 정류장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끝내 버스를 선택했다. 두 달 가까이 보지 못했던 한강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침 날씨도 좋았다. 마치 내 퇴원을 축하하는 것처럼…. 버스가 한강을 반쯤 지났을 때 그간의 고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문득 내가 대견했다. ‘퇴원해서 다행이다. 고생했다’며 나를 칭찬했다.


퇴원했지만 사회가 여전히 나를 격리시켰다

이제 일상에 복귀하기 위한 나름의 절차를 밟아야 했다. 먼저 인사팀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병원에서 고생하셨어요. 그런데 회사에 있는 사람들이 지호씨로 인해 코로나에 옮을까 봐 두려워하네요. 그래서 말인데 우선 재택근무를 3주 정도 더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멍해졌다. 나오지 말라고? 일상을 꿈꾸며, 다시 출근길에 오르는 것을 기대하며 퇴원했다. 7주 넘는 기간 동안 사회에서 단절되어 있으면서 치료에 전념했고, 이제 의학적으로 사회로 돌아갈 수 있는 조건에 부합했다.


억울했다. 7주간의 지리멸렬했던 병원 생활의 끝에 이른 그날, 나는 또 다른 절벽 위로 떠밀린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 마땅한 지침도 없고, 정부의 가이드라인이 없기 때문에 회사에서 마련한 지침은 이러하니 양해해주세요.” 궁금해졌다. 도대체 누가, 왜,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그래서 물어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다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 “회사 내 임산부들이나 아이가 있는 분들이 대표적이에요. 심지어 지호 씨가 복귀하면 휴가를 가겠다는 분들도 있어요.” 눈물이 고였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재수 없게 이성적인 내 머리는 ‘사람들의 두려움을 어쩌겠냐?’라며 내 어깨를 토닥였지만 내 마음은 갈기갈기 찢긴 기분이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이해가 되었다. 부모의 마음. 그건 어떤 마음보다 더 크고 깊기에 그 걱정이 십분 이해가 되었다. 알겠다고 말하고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허탈했다. 머리가 복잡해져서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거울을 보았다. 통통하게 불어난 내 얼굴을 보았다. 긍정회로를 돌려야 했다. 이렇게 된 김에 재택근무를 하면서 운동도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몇 년째 함께 운동하던 퍼스널트레이너에게 카톡을 보냈다. “선생님! 저 드디어 퇴원했어요.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살이 쪄서 좀 빼야 할 것 같아요. 운동 일정 좀 잡아주시겠어요?” 한참 답을 기다리다 카톡 대화장을 보니 1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또 한참이 지나서야 답장이 왔다. “확진지의 운동 가능 여부를 경영진과 확인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워낙 민감한 시기이고, 최대한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 가능 여부 확인 후 연락드리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이성에 부하가 걸렸다. 이렇게 연속으로 맞으니 화산이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스마트폰을 침대로 던져버렸다. 억울한 마음에 베개도 던지고, 매트리스도 주먹으로 연신 쳐댔다. 사회가 또 날 밀쳐내고 있었다. 이번에는 절벽 아래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서러웠다. 하지만 아까 그 재수 없는 이성은 또다시 내 등을 토닥이며 ‘저들도 두려운 걸 어쩌겠냐. 네가 참아’라고 말한다. 내가 미웠다. 그 와중에도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내가 덜 상처받기 위함이지만…. 내가 그들의 마음에 공감해주어도 그들은 내 선의를 알아주기는커녕 자신들의 안위만 생각하고 있다는 현실에 화가 나고 슬펐다.


최대한 차분하게 예의를 갖춰 이성적으로 답장을 보낸 후 어떠한 답변을 받기도 싫고, 두렵고, 짜증이 나 스마트폰을 비행기 모드로 맞춰놓았다. 그리고 옷장과 서랍을 보두 뒤집어엎었다. 그리고 나는 그 물건들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주가 지나서야 겨우 스케줄을 잡아 오랜 기간 굳은 몸을 풀고 다시 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에 덧붙여 나에게 재택근무를 3주간 진행하라던 회사는 나에게 조심스레 ‘회사 밖에서 조금 더 자유롭게 일해볼 것’을 권했다. 나는 긴 고민 끝에 그렇게 하기로 하고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나 때문에 격리된 사람들과 그들의 배려

병원에 있는 동안 내가 유독 먹고 싶었던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맛있는 술이었다. 술 마시는 것을 즐기지는 않지만 왠지 모르게 술이 당겼다. 사람이 그리웠기 때문일까? 퇴원한지 이틀째 되는 날 저녁, 내가 제일 좋아하는 집 근처의 바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반기는 바텐더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몰랐던 이야기

“저 사실은 코로나로 50일 동안 입원해 있다 왔어요.” 이 이야기를 하면 ‘코로나’라는 말에 놀랄 줄 알았는데, 바텐더는 다른 지점에서 놀라는 듯했다. “벌써 50일씩이나 됐나요? 고생하셨네요!” 마치 내가 코로나에 걸렸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의연하게 답했다. “제가 코로나에 걸린 거 아셨나요?” 그랬더니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나는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아 그게, 저희 중 일부가 자가격리되었거든요. 저를 포함해서요, 하하하.” 마음이 바닥에 내려앉다 못해 땅 밑을 꺼지는 기분이었다. 설마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인가 싶었다. 추적했던 동선에 바가 있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당시에도 주문할 때와 마실 때를 빼고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기에 바텐더분들에게는 큰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었을 뿐 내가 그들을 곤란에 빠트린 셈이다.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미안해졌다. 그들은 나로 인해 자가격리를 해야 했지만 나에게는 어떤 원망 섞인 말 한마디도 없었다. 그래서 더 미안해졌다. “에이, 그럴려고 그런 것도 아닐 텐데요. 고생하셨어요.” 예상치 못한 따뜻한 어조였다.


고마웠다. 퇴원하고 나서 며칠동안 나는 사방에서 나를 밀쳐내고 자신들의 바운더리에서 배제시키기 바쁜 이들의 차가운 말을 감당해야 했다. 하지만 이 조그만 바의 사람들은 전과 다를 것 없이 나를 대해주고 있었다. 나로 인해 자신들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후유증

나의 후유증

나는 운이 나빠 코로나에 걸렸지만, 다행히 운이 좋아 큰 후유증이 없다. 정말 다행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체적 후유증은 없지만 마음의 후유증은 조금 남았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사람을 마주할 때 사람의 눈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조금 버거워졌다. 사람을 마주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졌다. 아니, 두려워진 것 같다.


코로나가 퍼지며 드러나는 우리의 민낯을 보며 사람에 대한 환멸이 더욱 짙어진다. 그럴수록 나는 점점 더 사람의 눈을 마주하기 힘들어지는 것 같다. 그 짙은 색 눈동자 안에 어떤 생각이 자리하고 있을지 두려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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