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평 반의 행복

   
유선진
ǻ
지성사
   
15000
2020�� 12��



■ 책 소개


아내와 남편이 되어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헌사(獻辭)’! 

화사한 햇살을 받으며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노부부가 걸어간다. 내딛는 보폭이 그리 크지 않은 두 노인의 걸음이 여유롭고, 비록 대화는 나누지 않아도 가끔씩 살피는 눈빛에 살풋한 정이 스며 있다. 노부부가 겪은 삶의 궤적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지만, 저렇듯 서로 의지하면서 여생을 보내는 모습이 왠지 부럽기만 하다. 

1987년 〈월간문학〉 수필 부문에 당선된 후 담담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힘을 지닌 글로 두터운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는 유선진 작가가 산문집 『한 평 반의 행복 _저문 날의 어느 노부부 이야기』를 펴냈다. 

작가가 막 80대로 접어든 2015년, 85세 노령의 남편이 극한 스트레스로 쓰러져 4개월 7개월 동안 병원에서 지낸 이후 집으로 돌아와 남편을 돌보면서 지난날의 회한과 지금에 이르러 감사하기까지, 틈틈이 일상의 일들을 써내려간 글에는 작가의 부끄러운 고백과 반성이 진솔하게 담겨 있다. 

산문집 『한 평 반의 행복』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헌사(獻辭)’이다. 아내든, 남편이든 입장의 차이가 있을 뿐, ‘나’가 아닌 ‘우리’로 살면서 엮어내는 삶의 변주곡은 그래서 더욱 치열하다. 

그 치열함을 거쳐 인생의 끝자락에 이르면 애틋하고, 비록 병고의 배우자라 할지라도 곁에 있음이 감사하고 축복이라는 것을, 부부가 아니면 그 감사와 축복을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그래서 노환의 남편을 돌보는 일상의 이야기를 때로는 투정 부리듯, 때로는 따뜻하게 풀어내는 작가의 시선이 참 고맙다. 

■ 저자 유선진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미동초등학교, 경기여중 · 고를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였고 1987년 [월간문학] 수필 부문에서 신인상에 당선되며 등단하였다. 2002년에 발표한 첫 수필집 『섬이 말한다』는 같은 해 한국문예진흥원 우수도서로 선정되었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회원이며, 2009년 산문집 『사람 참 따뜻하다』, 2014년 수필선집 『쓴맛 단맛』을 출간하였다. 

■ 차례
작가의 말 

1부 그이의 인생 _남편의 마음으로 아내가 쓴 이야기 
아빠가 뿔났다 | 어떤 월급날 

2부 네가 있어 행복해 
그의 묘비명 | 해로(偕老) | 내 남편이 먼저 손을 들었다네 | 삽화 하나 | 미라클! 
| 아이고, 아닙니다요 | 네가 있어 행복해 

3부 또 하나의 고개 
소식을 전합니다 | 함께 있는 것이 둘 다 사는 길 | 삼부합창 | 과거라는 이름의 보물 상자 
| 고소한 참깨 냄새 그리고 평강의 연둣빛 | 등이 말한다 | 무전기 교신 | 기사회생의 명약 
| 바깥은 겨울 | 나는 아이처럼 끌어안았다 | 또 하나의 고개 

4부 다정이 병이 되어 
종점 전 정류장 | 아홉수 | 놋수저 | 천국에서 산다 | 야래향 | 교회 가는 길 
| 두 노처(老妻) 이야기 | 멈추며 흐른다 | 모처럼의 나들이 | 뒤늦은 동행 | 한 평 반의 행복 
| 다정이 병이 되어 | 구름 위로 나는 새는 비를 맞지 않는다 | 행운목 꽃이 피다

 




한 평 반의 행복


그이의 인생 _남편의 마음으로 아내가 쓴 이야기

아빠가 뿔났다

부엌에서 아내가 그릇을 씻는 달그닥 소리가 난다. 시계를 보니 6시. 저녁밥을 지으려는가 보다. 퇴직하고 들어앉은 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리가 부엌에서 들리는 소리다. 수돗물 좔좔 틀어놓고 채소를 씻는 소리도 좋고 칼질하는 도마 소리도 좋다. 그래서 부엌에서 식사 준비하는 기색이 보이면 나는 슬그머니 식탁에 나와 앉는다.


전화벨이 울린다. 십중팔구는 아내에게 오는 거겠지만, 가까이에 있는 내가 받는다. “여보세요…….” 큰녀석이다. 제 어미를 찾는다. 엄마가 밥을 하고 있는 중이니까 내게 말하라고 하니 그래도 엄마를 바꾸란다.


큰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말에, 아내의 몸에서 쌩쌩 기운이 넘친다. 큰애라면 껌뻑 죽는 사람이라 그러려니 하지만, 쪼끔 감정이 삐딱 선을 탄다. “그래? 호호……. 알았어. 밥하기 귀찮은데, 잘 되었네~.” 톤이 올라간다. 집에서 지하철로 가는 중간에 논골집이 있다. 갈비를 사준다는 것이다.


슬슬 부아가 인다. 못된 녀석. 그 정도 말을 하려고 굳이 지 어미를 바꾸래? 애비한테 말하면 안 돼? 이번만이 아냐. 전화를 해서 지 어미가 없으면 “나중에 또 할게요” 하면서 금방 끊기 일쑤다.


갈비도 먹었고, 냉면도 먹었다. “여보옹, 울 아들 효자죠? 이런 아들 누가 낳았지? 나 아니었음 누가 당신에게 갈비 사주나?” 아내는 연신 헤헤거리며 농을 한다. 왠지 심통이 났다. 나는 콩나물국이라도 아내가 끓여주는 것이 좋다. 밥상을 받을 때면 아내의 사랑을 받고 있는 느낌이다.


눈치가 9단인 아내다. “잘 잡숫고 와서 왜 기분이 언짢으신댜?” “큰녀석 말이야. 아니 큰애만 그런 게 아냐. 애들 말이야…….” 나는 그동안 말 못 하고 쌓여 있던 유감을 털어놓는다. 전화를 걸면 내게는 인사만 하고 엄마하고만 말을 한다는 둥, 막내 녀석도 어제 전화가 왔기에 엄마 없다고 했더니 “나중에 다시 걸게요” 했다는 둥…….


“그러게 애들 어렸을 때 좀 살갑게 굴지 그랬어요?” 마누라쟁이는 한 술 더 뜬다. 애들 어렸을 때? 그때 나는 젊은 가장(家長)이었다. 박봉의 월급쟁이였고 가족 부양에 휴일도 없었다. 유능하지 못한 가장이 해야 할 일은 직장이 끝나도 다른 일거리가 있을까 하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일이었다. 통행금지 시간 안에 귀가한 적이 없다.


남들이 피하는 오지의 출장도 도맡았다. 기차표 이등석의 출장비를 받으면 삼등석에서 서서 갔다. 그러면서도 아내에게 생활비를 조금 더 줄 수 있다는 기쁨에 힘든지도 몰랐다.


그렇게 50년 가까이 지내다 보니, 놀 줄도 모르고, 살가운 것이 무언지도 모르고, 자식들하고 속말 한번 못 해보고, 팔십 노인이 되어 버렸다. “살갑게 굴지 그랬냐고?” 야속해서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네가 있어 행복해

해로(偕老)

몇 년째 시간을 정해놓고 남편과 둘이 기도를 드리고 있다. 기도는 각자가 자기 편리대로 하는데, 목적이 있는 기도는 시간을 정해놓고 둘이 한다.


가장 열심히 간절하게 했던 때가 1999년에서 2000년 때이다. IMF로 사무실 문을 닫기 일보직전인 때이기도 하고, 큰 아들이 시간 강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의 고통을 지켜보는 일이 너무 힘들어 같이 기도를 시작했다.


부모로서 우리의 힘으로 해줄 수 없는 상황이 많이 있다. 육신으로 도와줄 일이나, 집을 사주는 일 같은 것은 무리를 해서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것, 그때는 기도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대부분 응답받는 것을 체험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왜 그것이 기도의 응답이냐고 한심해한다. 그것은 당연히 되어야 할 것이 순리대로 된 것이지 기도 때문이 아니라고 한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 하고 감사해한다. 순리대로 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감사가 없다. 허나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하면 매사가 감사하다.


우리 두 내외가 하는 기도의 원제목은 고 3 손자의 대학입시를 위한 기도이다. 아이가 지원한 학교에 최상의 컨디션으로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마음이 편안하고, 긍정적이고, 지치지 않는 힘을 주십사 하고 기도한다. 그 가정이 화목하여 아이의 심정이 안정되기를 기도한다. 결과가 좋기를 기도한다. 우리 내외는 딱히 입시보다 넓은 영역으로 기도를 한다.


남편은 기도의 말문이 열리지 않는 사람이다. 보통의 말도 눌변이라 말을 하는 것이 아주 서툴다. 둘이 기도를 시작한 이래 남편은 책상에 앉아서 그날 드릴 기도문을 종이에 쓴다. 이 책 저 책을 읽어가며 정성껏 기도문을 쓴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는 이 작업이 뇌의 쇠퇴를 조금쯤 막을 거라는 기대를 가져본다. 그래서 내가 같이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지도 모른다.


남편이 쓴 기도문을 들을 때면 나는 번번이 감동을 하는데, 그가 원하는 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로서의 기도는 그의 기도가 바로 나의 기도다. 내가 원하는 것을 똑같이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이 나이에도 존재한다는 것.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일인가.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이것은 부부가 해로할 때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다.


해로(偕老)는 부부가 함께 살며 같이 늙어간다는 말이다. 자식들이 다 떠나가고 없을 때도 같이 살고 있는 것, 이것을 해로라고 말하고 싶다.


젊은 시절, 부부관계를 청산하려고 하지 않은 사람이 있던가. 같이 있음으로써 더 외롭고 괴로운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해보았으리라. 그래도 고비를 넘기고 넘겨 ‘해로’하는 고지에 올라와 보면 비로소 넘고 넘어온 고갯길에 대한 위안과 축복을 느끼게 된다.


결혼 생활은 장거리 경주다. 그것도 이인삼각(二人三脚)의 경주이다. 넘어지고 쓰러지곤 한다. 힘들다. 경주 도중에 묶여 있는 다리의 끈을 풀고 훌훌 혼자 뛰어 고지에 오르면 편할 수도 있다. 힘들게 함께 보조를 맞추며 인내하고 오른 사람들이 더 지칠 수도 있다.


그러나 고지는 혼자 있기에 너무도 외로운 곳이다. 바람막이도 없고 지붕도 없다. 옆에 있는 사람만이 비바람을 막아줄 보호막이다. 이것이 해로의 미덕이고, 결혼한 자의 마지막 은총이다.



또 하나의 고개

소식을 전합니다

2015년 초, 여든다섯 살의 남편에게 큰 병고가 생겼다. 파킨슨 증상, 파킨슨 증후군이라는 병명으로 통원하면서 치료받기를 10년이 되는 시점이다.


손발의 떨림이 심하고 보행이 어려웠지만 경기도 인근에 작은 사무실을 마련하고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던 때였다. 걷는 일이 힘든 노인은 지하철 갈아타고, 또 버스로 20분을 가야하는 사무실행이 어려워 자주 결근하게 되었고, 그사이 여러 가지 일에 휘말려 소송까지 가는 일이 생겼다.


재판이 진행되는 6개월 동안 지병이 악화되어 결국 남편이 쓰러지고 말았다. 우선 3차 상급병원에 입원했다. 2개월 동안 소아과와 부인과를 뺀 전 과에서 몸을 샅샅이 훑는 검사를 했다. 뇌신경 고장으로 인해 온몸의 장기 기능이 온전치 못하다는 소견이 나왔다.


상급병원에서는 병명을 찾아내고 처방전이 나오면 퇴원을 종용한다. 인근 요양병원을 소개해주었다. 입원 치료만 요양병원에서 하고 치료 처방은 상급병원에서 받아갔다. 요양병원에 2개월 10일 입원했다.


남편의 총 입원 기간인 4개월 20일 동안 나는 지인들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스마트폰을 쓰지 않아 카톡으로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내가 간병인이 되어 병원에서 같이 지냈기에 소식이 단절되었다. 입원 사실만 알렸을 뿐이다.


퇴원하여 집으로 와 컴퓨터를 켜니 염려하는, 궁금해 하는, 쾌유를 비는, 간절한 메일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눈물 나게 고마운 일. 나는 감사의 편지를 써야 할 것 같아 퇴원 후의 나의 일상을 알려드리는 메일을 보냈다.


삼부합창

남편이 집으로 돌아왔다. 한 달이 된다. 그가 병상에 눕게 되자 오직 나의 간절한 기도는 그의 쾌유였고, 그리고 일구월심 회복을 돕는 일에 전념했다.


오늘은 2016년 1월 1일이다. 오늘 나는 내 생애 최고의 새날을 맞이했다. 아마 절망의 끝에 서보지 않았다면 이런 감격은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새해 첫날에 가족들이 다 같이 집에 모였다는 사실. 병원이 아니고 집이라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이 일이, 이처럼 기적같이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은 잔칫날이다. 어제부터 음식 장만을 나 혼자 해가며 그동안 애쓴 식구들에게 대접할 준비를 했다. 온 가족의 얼굴에 희색이 만연하다. 희희낙락이다.


병색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건강을 회복해가는 아버지. 아무리 해도 그 일이 믿기지 않는 아들과 며느리와 손자 손녀들. 조금도 힘든 줄 모르고 부엌으로 방으로 거실로 뛰어다니는 팔순이 넘은 엄마. 이 세 파트가 부르는, 더할 수 없는 화음의 삼부합창이었다. 감사의 삼중창이었다.


사노라면 또 어려운 일이 닥칠 것이다. 그래도 이제는 요동하지 않을 것 같다. 그마저도 감사하면서 담담히 순응할 것 같다. 신이 나를 길들이셨고, 나는 그 길들임이 지극한 사랑임을 이제 100퍼센트 신뢰하기 때문이다.


기사회생의 명약

날씨가 무척 덥다. 비교적 더위를 덜 타는 체질인데 오랜 더위에 몸이 지친다. “추위는 긴장감을 주는데, 더위에는 이렇게 무력감이 느껴지네요.” 매일 아침 서로 편지를 주고받는 문우가 이런 말을 한다. “선생님이 그러시면 나는 오죽하겠어요?” 내가 대답을 한다.


구입한 지 27년이 된 에어컨을 켜면 실외기 쪽에 불꽃이 튀면서 작동이 멈추고 만다. 그래서 아예 틀지 않고 산다. 얼마나 덥겠는가, 40년 만의 더위라는 이 한여름에……? 다행히 공간이 넓고 집 구조가 남북이 탁 트여서 맞바람이 불어오면 견딜만하다. 비록 더운 바람이라도 바람은 좋다.


그러나 내가 “오죽하겠어요?”라고 말한 그 ‘오죽’은 날씨의 더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삼시 세끼와 화장실 갈 때를 빼고 주야장천 침대로 올라가 누워 있는 노부(老夫)를 바라보는 마음의 답답함이다. 거기서 오는 무력감이다.


사람에게는 생기(生氣)라는 것이 있어서 서로 상통하고 교환해야 어떤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는데, 작동을 하지 않고 꽉 막힌 한쪽의 생기가 다른 쪽의 생기마저 위축되게 한다.


내가 무력감을 느끼고 지쳐서 기진맥진 증상이 일어날 때면 나는 기운을 회복하기 위해 탕약 한 봉지를 마신다. 나의 비상 탕약은 파는 것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우리 집 부엌 선반에만 있다. 내가 큰 솥에서 끓여서 봉지 봉지에 담아 힘들고 지칠 때 하나씩 뜯어서 마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약 재료 두 가지를 푹 곤 것이다.


만 3년 전, 남편의 온몸이 반란을 일으켰다. 육체, 정신, 마음, 모두……. 반 폐인이 되어 모든 기능이 마비되었다. 대책이 서지 않았다. 망가지는 것은 환자만이 아니었다. 나도 무너졌다. 악몽의 시기였다. 그 암담함, 절망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첫 번째 재료이다.


지금은 인지력이 떨어지고 바깥출입이 어려울 뿐, 그리고 낮이나 밤이나 침상에서 내려오지 않을 뿐 내과적 질환 없이 양호하다. 잘 소화하고, 배설하고, 단잠을 잔다. 무엇보다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다. 이게 어딘가. 웬 은혜랴. 그래서 두 번째 재료는 ‘감사’이다.


악몽의 기억과 현재의 감사로 끓인 탕약. 그것을 마시면 환자 수발의 어려움은 더 이상 어려움이 되지 않는다. 지쳐가던 내 기운이 기사회생한다. 거기에 나는 약재 하나를 더 첨가한다. 긴 세월 참으로 고약한 아내였던 나. ‘후회와 반성’이라는 약재도 잊지 않고 넣는다. 나는 하루에 몇 봉지의 이 기사회생의 명약을 마신다. 그것은 하루에 몇 번씩 힘이 든다는 의미도 된다.


내 나이 팔십이 넘어, 남편이 중병을 앓는 것이 나쁜 일만은 아니다. 그 일이 아니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지루한 일상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몰랐을 것이다. 보잘것없이 미소한 것이 얼마나 큰 감사인지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못되고 고약한 아내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노환이란 치유의 길이 멀고 조금씩 점점 더 나빠지시겠지만 3년 전 입원 생활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이다. 거기에 ‘감사’와 ‘후회와 반성’이라는 회생의 명약이 늘 가까이 준비되어 있으니 나는 꽤 복 많은 노후를 보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정이 병이 되어

한 평 반의 행복

기온이 섭씨 10도로 내려가면 해마다 침대 위에 전기장판을 깐다. 저온에 맞춰놓으면 아랫목같이 따뜻해서 좋다. 오늘은 초겨울 날씨 같다. 침대 밑에 보관하고 있던 전기장판을 꺼낸다. 옆에서 남편이 참견을 한다.


“여보, 올해는 전기장판 없이 지내봅시다. 저 남 선생 댁…….”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린다. 며칠 전 가깝게 지내는 지인 댁에 화재가 났다. 이불 속에 늘 찜질기를 넣고 자는데 이것이 폭발하면서 침대에 불이 붙었다. 다행히 다친 사람 없이 진화 되었다. “겨울철 온열기는 위험합니다”라는 전화 속의 그분 말을 남편이 기억한 것이다.


전기장판이 없는 대신 솜이불을 꺼내 엎고 잠을 청한다. 환자인 노인에게 서늘할까 싶어 염려하는데 바닥에 마치 군불을 지피고 있는 듯 서서히 기분 좋은 온기가 올라온다.


이게 뭐지? 남편에게 묻는다. “당신 자리도 따뜻해져요?” “응. 당신이 혹시 뭐 넣었어?” 아닌데? 무슨 일일까? 25센티미터 두께의 라텍스 매트리스가 체온을 빼앗지 않고 몸을 따뜻하게 보존해주는 모양이다. 그동안 전기장판 때문에 몰랐던 것이다.


“와, 좋다. 이 침대 참 좋다. 나는 이 침대가 좋아. 너무 좋아.” 새삼스럽게 남편이 이 말을 또 한다. 이 침대는 병원에서 퇴원하기로 작정한 날 아들이 마련해준 것이다. 아들의 지인이 해외 카탈로그만 보고 주문했는데 자기 집 방에는 들여놓을 수 없어 싼값에 아들이 인수하여 우리에게 준 것이다. 평수로 따지면 1.46평, 한 평 반이나 되는 크기의 침대다.


원래 우리는 같은 방을 쓰기에는 무리인 부부였다. 나는 야행성이라 새벽 두세 시에 잠이 들었고, 남편은 불이 켜져 있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공부하는 방 한 귀퉁이에서 책을 읽곤 했었다.


1984년에 이사를 왔으니 남편이 병을 얻은 2015년까지 30년을 남편은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쓸쓸해하면서 살았다. 생활은 안방에서 같이 하고 있으니 각방을 쓰는 것은 아니다. 그가 원한 것은 아내와 한방을 쓰는 것이 아니라 같은 침대를 쓰는 것이었다.


환자를 낫게 할 책임과 의무에 잠자는 시간까지 환자 곁에서 지내야 했다. 다행히 둘이 누워도 넉넉한 크기의 침대를 만나서 남편은 그토록 원했던 ‘아내와 같은 침대’를 원도 한도 없이 누리고 있는 것이다.


남편이 “나는 이 침대가 좋아, 너무 좋아”를 입에 달고 사는 것은 ‘침대’라는 물건이 아니라 아내와의 ‘동상(同床)’을 말하는 것이다. 이 한 평 반이 그의 행복의 원천이다.


요즈음은 하루 열다섯 시간 이상을 잔다. 여덟 시간 이상의 잠은 뇌세포를 죽이는 일이라지만 나는 그대로 곤히 자도록 방해하지 않는다. 언제 이 남자가 이렇게 편하게 잠든 적이 있었던가? 늘 쫓기듯 살았고, 유난한 열등감, 가장(家長)이 되어서는 책임감에 눌려서 언제나 힘에 겹던 날들. 마음 놓고 편히 자보지 못했다.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병자의 몸이 되어서야 비로소 근심 없이 깊게 잠을 자는 노인. 이 가엾은 노인의 편안한 잠을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토닥여준다. 그리고 그가 눈을 떴을 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아내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도록 내 안에 가득가득 행복을 채운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