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돌보는 법을 잊어버린 나에게

   
장재희
ǻ
나무와열매
   
13500
2020�� 10��



■ 책 소개


내 안에 있는 ‘진정한 나’가 원하는 삶은 어떤 삶일까?

이 책은 채워도 채울 수 없는 ‘껍데기의 나’에서 벗어나 자기 사랑에 메마른 ‘진정한 나’를 만나는 저자의 경험을 통해 독자들에게 내면의 위로와 자신감을 갖게 해 준다. 그리고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항상 나와 대화하고, 꾸준히 나를 보는 연습으로 ‘진정한 나’로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나눈다.

아침에 일어나도 행복하지 않고, 제일 좋아하는 캐러멜 마키아토를 마셔도 울고 싶은 이들에게 전한다. 번아웃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번아웃을 극복하기 위해 걷고, 호흡하고, 마시고, 위로받는 시간을 통해 ‘진정한 나’를 만나보자.

■ 저자 장재희
남을 돌보는 사람에서 나를 돌보는 사람이 되어가는 간호사 & 티 소믈리에.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의 임상 간호사로 근무하던 중 인간 본연의 아름다움과 예방적 간호에 대한 호기심으로 대학원에서 향장학을 전공했다. 학교, 회사, 병원의 다양한 분야에서 간호사로 활동하다가 번아웃을 경험했다.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나를 보는 연습을 시작했다. 나를 보는 연습을 통해 아픔을 치유하고, 삶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번 아웃된 나를 돌보는 법과 삶이 점점 더 좋아지는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글을 썼다.

■ 차례
프롤로그

| 제1장 | 채워도 채울 수 없는 ‘껍데기의 나’
혜화역 3번 출구
병원이라는 무대의 주연배우
임종 환자와 본능 피자
탈임상,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
뉴욕 안 가본 뉴욕 간호사
암을 통해 앎을 배울 때
캐러멜 마키아토 샷 추가
여행,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
번아웃 감염
내가 나를 태우다. 번아웃

| 제2장 | 나를 보는 연습으로 만난 ‘진정한 나’
번아웃의 처방약
나를 보기 위한 첫걸음
나를 해부하는 시간
말의 힘
공존의 균형
내향의 소용돌이
뼈가 가루가 되는 그날
10개월, 새로운 생명을 품는 마음으로

| 제3장 | ‘진정한 나’로 살아가는 삶의 지혜
오묘한 붉은 빛, 감미로운 위로
감사함이 세포에 스밀 때
삶의 마스터키, 기분
자연을 걷다 보면
내가 보이고, 삶이 보이는
사랑에게 그리고 그 사람에게
전통, 그 자연스러움
나의 마지막 순간을 경험할 때
새로운 세상을 여는 열쇠
점점 더 좋아지는 선한 우리

에필로그

 




나를 돌보는 법을 잊어버린 나에게


채워도 채울 수 없는 ‘껍데기의 나’

캐러멜 마키아토 샷 추가

커피를 마실 때면 카페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공간감과 한층 부드러워진 나를 보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나도 카페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전해지는 여유와 느슨함을 갖고 싶었다. 그곳에 가면 나도 그런 사람이 된 것처럼 보였다. 출근 전 카페에 들러 잠깐이라도 그곳에서 커피 한 모금을 음미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바리스타를 찾아가 내가 마시고 싶은 커피를 주문했다.


"캐러멜 마키아토로 주세요. 캐러멜의 달콤함과 커피의 쓰면서 고소한 맛이 섞이지 않아야 해요. 바닐라 시럽은 하나 빼고, 캐러멜은 많이 주세요. 찐하게 마셔야 하니까 샷은 하나 추가해 주세요.”


친절한 바리스타는 내가 까다롭게 주문을 해도 내 이야기를 언제나 잘 들어주었다. 바리스타가 내가 원하는 대로 커피를 만들어주면 그날 아침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전에는 달달해서 맛있다고 느꼈던 커피가 너무 달아서 맛이 없고, 우유가 많아서 부드럽게 느껴졌던 커피가 우유 때문에 싱거웠다. 이제는 다른 주문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다음 날 아침, 바리스타를 찾아갔다.


“캐러멜 마키아토로 주세요. 지난번에 캐러멜이 많아서 너무 달고, 우유가 많아서 커피가 싱거웠어요. 오늘은 캐러멜과 우유 모두 적게 주세요. 그리고 샷은 하나 추가해 주세요.”


그렇게 나온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이번에는 너무 쓰고 진해서 도저히 마실 수가 없었다. 점점 까다롭게 주문할수록 그 커피는 마실 수 없는 이상한 커피가 되어버렸다. 내가 기대할수록 기대하는 맛은 찾기 어려워졌고, 전보다 더 강한 자극에 위는 점점 더 아파했다.


이런 예민한 아침을 반복하던 어느 날, 내가 진짜 커피를 좋아해서 마시는 건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해달라고 요구하며 그대로 결과가 나왔을 때 만족하는 욕구 충족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나는 병원의 구성원이 되어 조직에 맞게 주어진 일만 해야 한다는 게 힘들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개성을 발휘하며 일하고 싶었지만, 조직 내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그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저 내 까다로운 주문을 묵묵하게 받아주는 사람에게 까탈을 부리고 싶었던 것이다.


어딜 가도 환경에 적응이 되고 나면 나를 힘들게 하는 물음들이 내 안에서 올라왔다. 그 물음을 따라가자 나에게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그동안 직장을 옮길 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또 옮기냐며 나에게 물어왔다. 첫 직장에서 지금까지 근속하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 정말 부럽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그대로 다닐 수 있는 건지, 그들은 나처럼 우왕좌왕하지 않아도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친구들이 정상이고 내가 비정상으로 보였다. 이러다 평생 무엇을 해도 만족하지 못할까 봐 불안했다. 일상에서 불안이 나를 감싸는 일이 많아지자 조금씩 두려움이 찾아왔다.

무엇을 해도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 불안한 마음, 두려운 마음이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


나는 내 안의 물음들이 올라올 때마다 새로운 환경에 가면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새로운 곳에 가서 찾아도 그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열심히 제자리를 빙빙 돌고 있었다.


여행,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

나는 기회만 되면 떠나고 싶었다. 어디든 상관없이 멀리 가고 싶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가 모든 걸 다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면 연기처럼 흩어지고 싶었다. 아무런 흔적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하지만 일과 가족, 그리고 관계 속에서 내가 사라진다는 건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대신 짧게라도 내가 있는 현실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유일한 방법은 여행이었다. 그 당시 나에게 여행이란 낯선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진정한 여행이 아닌 현재를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여행지에 도착한 첫날의 자유로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는 계획한 일정에 맞춰 무리한 여행을 시작했다. 계획한 대로 하루를 보내야 만족할 수 있었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늦은 밤 호텔로 돌아와서도 다음 날 일정을 확인하며 계획을 수정했다. 점점 오늘의 여행을 즐기기보다 내일의 여행 일정을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여행을 일처럼 하고 있었다. 짧은 여행 일정이 계획한 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책임감이 여행지에서도 작동했다. 다음 예약 장소에 잘 찾아갈 수 있을지, 시간 안에 다음 여행지로 이동할 수 있을지, 여행 중 변수가 나타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여행을 했다. 그러고 나면 여행은 어느덧 끝날 때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즐기지 못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마지막 날이 되면 ‘아, 현실로 돌아가는구나! 진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이젠 무슨 낙으로 살지?’ 이런 생각들이 올라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현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을 애써 달래기 위해 또 다음 여행은 어디로 갈지 계획하기 시작했다.


나는 살면서 종종 과거로 가서 나를 비난하고 다그치는 것에 에너지를 쏟았다. 또 어떤 때는 미래로 가서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에너지를 쏟았다. 나는 지나간 날을 후회하느라 오지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느라 현재를 놓치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내가 있는 곳에 있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현실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을 나는 느낄 수 없었다.


내가 나를 태우다. 번아웃

숨을 쉬고 살아온 시간만큼 앞만 보며 달리다 보니 내 가 어디에 와 있는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도 모른 채 서서히 방향을 잃어갔다. 안정된 병원 안에서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찾고 싶었지만 안정과 도전, 이 두 개의 단어는 내 삶에서 공존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마음의 방황을 그대로 둔 채로 병원에 출근해서 가운을 입을 때면 내 안에 있는 사회생활 모드가 자동으로 켜졌다.


시키는 일을 잘하는 척, 둥글둥글 사교적인 척, 윗사람 말을 잘 듣는 척, 척하는 모드가 아침이면 잘도 켜졌다. 나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누르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힘든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지냈다. 주체적인 삶을 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나를 다그치며 일상을 보냈다. 어느 순간이 되자 그동안 눌러놓았던 감정이 쌓여 더는 내 안에 감정을 담아둘 공간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다. 내 안에서 오래된 생각과 묵었던 감정이 서로 뒤엉켜 용수철처럼 한꺼번에 내 몸 밖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나에게 있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하나씩 앗아가는 듯 나는 그렇게 점점 숨을 쉴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게 되었다. 몸이 나에게 보내는 격렬한 신호였지만 나는 그 경고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겉으로는 다른 동료들처럼 건강하게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다. 그리고 내 안에서는 번아웃된 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번아웃을 인정하면 그동안 애를 쓰며 쌓아 왔던 내 모든 걸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걸 인정하면 내가 속한 사회에서 낙오되는 것 같았다. 점점 더 아프다고 소리치는 나를 저 깊은 어딘가 한쪽 구석으로 밀어두고 싶었다.



나를 보는 연습으로 만난 ‘진정한 나’

나를 보기 위한 첫걸음

마음을 열어 나를 보기 위해 우선 긴장감에 꽁꽁 묶여 있었던 몸부터 먼저 열기로 했다. 몸을 열기 위해서 내 몸에 붙어있는 지방과 노폐물부터 걷어내기로 했다. 몸이 가벼워지면 내 안을 보기 쉬워지고, 불필요한 것들을 걷어내야 필요한 것들이 수면 위로 올라올 테니까. 이전에는 외적인 미를 얻고 싶어서 했던 다이어트였다면 지금은 내면의 나를 위한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번아웃이 심해지기 전까지는 점심을 먹고 나면 항상 달콤한 커피를 마셨다. 또한 스트레스가 쌓이면 예전처럼 매운 떡볶이와 양념치킨을 자주 먹었다. 퇴근하면 아작아작한 옥수수칩 한 봉지를 입에 털어 넣고, 쉴 새 없이 씹어야 스트레스가 풀렸다. 그렇게 생활한지 1년 정도 지나자 내 살들은 야금야금 불어났다.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은 여전해서 잦은 회식에 고열량 음식을 먹으면 다이어트 보조제를 먹어야 안심하고 잘 수 있었다. 이런 음식들이 내 몸 안에서 연소되지 못하고 체내에 쌓이자 몸은 무겁고 피로감은 심해졌다. 그런 날은 온종일 생각에 휘둘리고, 감정이 올라와 기복이 심했다.


그래서 ‘진정한 나’를 만나기 위한 다이어트를 결심하고, 식후에 마시는 커피부터 줄였다. 몸을 가볍게 만들기 위해 커피 대신 히비스커스 티와 따뜻한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격렬한 운동을 할 에너지가 없어서 운동 대신 가볍게 할 수 있는 스트레칭과 호흡을 시작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부터 엄마와 가끔 사찰에 갔다. 그곳에 가면 엄마는 항상 절을 하셨다. 나도 따라서 자연스럽게 절을 했다. 예법은 잘 모르지만, 절을 하는 동안 잡념이 많이 올라오기도 하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기도 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절을 할수록 몸이 조금씩 활기로 채워졌다. 힘들지 않을 만큼 절을 하고 앉아서 차오르는 숨을 차분히 가라앉힐 때면 바람과 함께 숨을 쉬는 그 시간이 참 좋았다.


그렇게 출근 전이나 퇴근 후 시간을 내서 절을 했다. 횟수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날 컨디션에 따라 내가 하고 싶은 만큼 했다. 대신 매일 습관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꾸준히 절을 하자 양측 머리를 망치로 내리치는 깊은 두통이 점차 옅어졌다. 입에서 뜨거운 불을 뿜는 증상도 점점 약해졌다. 절을 하고 나면 머리는 점차 맑고 시원해졌고, 아랫배는 따뜻하고 묵직해졌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절을 하고 나면 온종일 쌓였던 스트레스와 부정적인 감정들이 어느새 사라졌다. 절을 하면 할수록 나는 조금씩 숨통이 트였다.


절을 시작한 지 3개월 정도 지나자 몸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굽히고 펴는 반복적인 동작으로 딱딱하게 굳었던 몸이 부드러워졌다. 몸이 조금씩 열리면서 통증이 나타나는 횟수도 줄었다. 다이어트를 위해 절 스트레칭을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절을 시작한 후 운동 효과도 얻게 되면서 더 이상 다이어트 보조제를 찾지 않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일상에서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에 빠져 있는 시간이 줄면서 한결 가볍고 부드러워진 나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내향의 소용돌이

나는 변화를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간절히 변하고 싶었다. 다이어트를 해서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새롭게 시작하고 싶을 때도 있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습관을 버리고 싶을 때도 많았다. 새로운 직장에 가서 다시 시작하고 싶거나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해서 환경을 변화시키면 내가 달라질 것 같은 기대를 품기도 했다.


하지만, 나를 보는 연습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외부에 시선이 고정된 채로 나의 내면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다이어트로 내 외모가 달라진다고 해서 내가 바뀌는 게 아니라 는 것을. 또한, 내 안을 보지 않고 예전에 했던 생각과 감정을 여전히 품은 채로 새로운 직장에 가고, 다른 집으로 이사를 한다고 해도 내가 변화되지 않는다는 걸.


그러던 어느 날, 정신이 번쩍 드는 일이 발생했다. 퇴근길이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하루를 돌아보며 ‘그땐 이렇게 했어야지!’ 하며 나를 다그치던 중이었다. 나는 사거리에서 좌회전 신호를 받고 있었다. 곧 파란불이 켜지고 앞차를 따라 좌회전을 했다. 교차로를 지나 진입한 도로는 약간 비탈길이어서 바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퍽” 하는 소리가 났다. 충격을 받은 차와 나는 앞뒤로 심하게 흔들렸다. 나는 브레이크를 꽉 밟고 있었지만, 뒤에서 들이받는 세기와 경사로 때문에 밀려서 내 앞에 있는 용달차를 순식간에 “퍽” 하고 들이받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른 채 넋이 나갔다. 큰 차들 사이에 끼어서 내 차는 앞뒤로 크게 파손됐지만, 다행히 내 몸은 벌렁거리는 가슴 외에 다른 외상은 없었다. 제법 큰 교통사고였음에도 불구하고 내 몸은 다치지 않은 걸 보며 감사하면서 누군가가 나에게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내향으로 삶의 시선을 바꾸는 과정에서 내 안의 혼란스러운 상황이 고스란히 밖으로 펼쳐졌다. 사고 이후 한동안은 운전대를 잡으면 또 사고가 날 것 같아 불안했지만, 사고를 통해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곧 외부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만약 내 안이 평온하다면 평온한 삶이 펼쳐지고, 내 안이 기쁘다면 기쁜 삶이 펼쳐질까? 라는 생각이 들자 내 안을 보는 연습에 더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안에 고정된 생각과 부정적인 감정, 오래된 습관이 밖으로 나올 때까지…… 앞으로 또 어떤 소용돌이가 나를 찾아올지 모르겠지만, 그 소용돌이가 내가 바라던 삶으로 데려다줄 때까지 나를 보고 나부터 변하는 내향의 바른길을 계속 걷기로 했다.



‘진정한 나’로 살아가는 삶의 지혜

삶의 마스터키, 기분

하루를 내가 의도한 대로 감사로 채울 수만 있다면, 채워진 감사로 온종일 기분이 좋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일상에서 감사를 찾는 연습을 시작한 이유는 머릿속에 고정된 부정적인 생각을 유연하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고 싶었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부정적인 생각 속에 빠져 있다 보면 내 감정을, 만나는 사람에게 옮겨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기분이 좋을 때는 만나는 사람도 함께 기분이 좋아져서 다행이었지만, 내가 기분이 나쁠 때는 불만을 쏟아내면서 뿜어져 나오는 감정이 다른 사람에게 전이 되는 줄 몰랐다. 그리고 긍정의 감정보다 부정의 감정이 훨씬 더 빠르게 옮겨진다는 것도 사실 일상에서 기분이 좋을 때보다 좋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았기에 그동안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내가 그동안 부정적인 감정이 많이 들었던 이유는 내가 기대했던 삶의 방향이 아니었고, 나의 내면과도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결과였다. 이제는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멈추고, 내 감정을 누군가에게 옮기지 않기 위해 일상에서 긍정과 감사를 찾는 연습을 계속하기로 했다.


뷔페를 가면 수많은 음식 중에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선택하는 것처럼 생각도 뷔페같이 떠다니는 수많은 생각 중에 내가 긍정의 생각을 선택하고, 좋은 기분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일상에서 자동으로 긍정 모드가 켜지면 좋겠지만 그동안 내 안에 자동으로 부정 모드만 세팅되어 있었기에 긍정 모드로 전환하려면 부단한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수시로 떠오르는 많은 생각 중에 긍정의 생각을 선택하려면 내가 하는 생각을 지켜볼 힘이 필요했다.


잠자기 전에 했던 생각이 다음 날 눈을 뜨면 연결되어 그날 기분에 영향을 준다는 걸 알게 되고, 기분 좋은 생각으로 잠자기 위해 밤에 감사 노트를 쓰는 습관을 연습했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면 일어나기 전에 의식적으로 기분 좋은 생각을 찾는 연습을 했다. 그동안 눈을 뜨자마자 벌떡벌떡 일어나는 습관 때문에 처음에는 잘 안 될 때도 많았다. 기분 좋은 생각이 바로 들지 않고 전처럼 걱정과 불안이 올라올 때도 많았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기분 좋은 생각이 들면 그 순간 ‘생각나는 대로 생각하지 않고, 내 생각을 의도적으로 바꿨구나. 잘했어!’라고 나에게 칭찬을 해주려고 노력했다.


내가 보이고, 삶이 보이는

홍차를 마시며 쉼을 알게 되고, 자연을 걸으며 숨을 쉬면서 알게 되었다. 자연이 나에게 준 치유 에너지를 고갈되지 않게 하려면 충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상을 차와 함께 하면서 약을 찾는 횟수가 줄었고 많이 편안해졌다. 따뜻한 차로 인해 순환이 좋아지면서 몸에 나타났던 여러 통증도 줄었다. 차는 추위를 잘 타고 손발이 냉한 나에게 가장 빠른 혈액 순환제가 되어주었다. 차는 나에게 커피 대용이나 단순한 기호식품이 아닌 약을 대체하고, 나를 스스로 간호할 수 있는 안전한 케어 방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과는 또 다른 새로운 차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친구와 함께 보이차 티룸에 간 날이었다. 보이 차 선생님이 내려주시는 차에서 흙 내음이 물씬 풍겼다. 처음 맡아본 낯선 차향이었지만 그 맛이 궁금해졌다. 따라주는 차를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낯설게 느껴졌던 차가 조금씩 친근해졌다.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천천히 차를 마셨다.


그러던 중 땀이 잘 나지 않는 내 얼굴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곧 온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손은 핫팩을 쥐고 있는 것처럼 따뜻해졌다. 땀이 나고 더운데 시원한 이 느낌은 뭐지? 다른 차와는 몸의 반응이 확연히 달랐다. 그렇게 한 시간쯤 차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꼭 사우나를 하고 나온 것처럼 온몸이 개운하고 가벼운 느낌이었다. 집에 도착해서도 머리가 맑고 개운해지자 처음 경험한 이 느낌을 계속 느끼고 싶었다.


그 후로 보이차와 함께 하루를 시작했다. 대신 바쁜 일상에서 다도보다는 커피처럼 쉽고 편하게 즐기기로 했다. 차를 내리는 형식보다 차를 마시는 그 자체가 더 중요했기에 원두를 내리듯 캐주얼하게 차를 대하기로 했다. 차를 약처럼 생각하며 아침 호흡과 함께 차를 마셨다.


건강이 좋아지자 내 관심이 점차 몸에서 삶으로 옮겨 갔다. 내가 다시 건강해지면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동안 잊고 있었던 미래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자 나는 다시 주춤거렸다. 껍데기의 나로 살면서 껍데기를 위한 목표를 바라봤던 나는 앞으로 '진정한 나가 원하는 길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깊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러던 중 오랜만에 티룸을 다시 찾았다. 선생님은 그동안 차를 내려주시면서 삶에 대한 나의 엉뚱한 질문에도 답을 해 주고, 덤으로 지혜까지 나누어주실 때가 많았다. 그 날도 나는 차를 내려주시는 선생님께 지금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선생님, 저는 그동안 종종거리며 살고, 삶에 만족한 적이 없었어요. 학위도 일치하지 않고, 직장도 자주 옮겼는데 저는 왜 그렇게 살아온 거죠? 요즘 드는 생각인데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해야 했나 봐요.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질문하면서 그동안 차와 호흡으로 안정되었던 마음이 또 일렁이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나에게 정성스럽게 우려낸 차를 따라주시면서 말씀하셨다.


“그동안 해 온 일들이 점이라면, 그 점이 곧 선으로 연결될 거예요”


그 말을 듣자 마음이 툭 하고 내려갔다. 선생님의 한 마디에 요동쳤던 마음이 잔잔해졌다. 정성으로 우려낸 차의 향을 마시면서 내가 그동안 선택한 일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그 점들이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는 과정에 지금 내가 서 있는 거라고 나를 다독였다.


"다른 사람이 아닌 너를 먼저 챙겨야 해. 그건 이기적인 것이 아니야. 너를 먼저 돌봐주고 난 다음에 다른 사람을 챙기렴, 그래야 네가 지치지 않고, 기쁘게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 너는 무엇을 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사랑스러운 아이야. 귀하고 소중한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어.”


점점 더 좋아지는 선한 우리

어린 시절에 누군가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면 살아오면서 내가 나를 괴롭히지 않고, 나에게 사랑을 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어릴 적부터 나를 먼저 챙기는 게 이기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항상 당신을 먼저 챙기지 않고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먼저 챙기는 아빠를 보고 자라면서 내 머릿속에서는 항상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우선이었다. 나를 먼저 챙기지 못하고, 지쳐가면서도 나를 먼저 돌보지 않았다. 내 감정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이 우선이었고, 누군가의 기분을 살피는 데 익숙해서 나에게도 기분이란 게 있는지 잊을 때가 많았다. 내가 채워져야 다른 사람에게 나눌 수 있다는 걸 모른 채 텅 비어있는 나로 있으면서 무조건 주려고 했다.


살면서 겪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우선순위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임을 알게 되고,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나에게 적용하고, 삶에 적용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임산부처럼 새로운 생명을 품는 마음으로 긍정적인 생각과 건강한 습관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내 몸과 마음을 스스로 간호하면서 나는 이전과는 다른 삶을 만나게 되었고, 이전보다 더 건강한 나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나와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걸 전해 줄 수 있을까? 오랜 시간 동안 고민했지만 내가 전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이고, 그런 내가 나를 돌보는 방법만이 최선이다. 살면서 우리는 힘든 일이 찾아오면 사람을 통해 위로받고 싶어 한다. 누군가에게 받는 위로가 필요하긴 하지만 언제나 내가 원 하는 만큼의 위로를 받을 수는 없다. 누군가는 내가 지금 얼마만큼의 위로가 필요한지 알지 못하니까.


누구도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또 나도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 내가 누군가의 아픔을 이해한다고 할 수 없고, 감히 위로라는 걸 할 수 없다. 내가 얼마만큼 힘든지 나만이 알 수 있고, 얼마만큼 위로가 필요한지 도 나만이 알 수 있다. 스스로 내가 무엇이 힘든지 나를 보고 자신을 위로하는 것만이 진정한 위로이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이 진정한 사랑이기에 나는 내가 사는 간호사의 삶을 통해 나의 아픔을 얘기하고 나누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다.


"눈을 감으면 당신의 선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제 이야기를 전하기로 마음을 먹고 저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용기를 내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내 안의 두려움과 마주하지만 그래도 나를 사랑하고, ‘진정한 나’로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지금부터 내 안을 들여다볼 용기를 내고, 나를 사랑하기로 선택한다면 앞으로의 삶은 분명히 좋아질 겁니다. 내 안에 있는 진정한 나와 당신 안에 존재하는 진정한 나에게 감사함을 전합니다. 나의 간절한 마음이 당신의 마음속 깊은 그곳까지 전해지길 바랍니다. 나도 당신도 점점 더 좋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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