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자살했다

   
곽경희
ǻ
센시오
   
14800
2020�� 11��



■ 책 소개


그럼에도 살아야 하기에 나는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나는 마흔아홉 살에 죽을 거야.” 남편이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다. 공교롭게도 남편은 마흔아홉 살을 한 달 앞두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선택한 남편, 그리고 하루아침에 자살자 유가족으로, 네 아이의 가장으로 힘겨운 싸움을 시작하게 된 저자. 슬퍼야 하는데 화가 났고,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평범한 일상은 더 이상 사치였고, 아픔을 극복하려 할수록 ‘남편이 죽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지?’ 하는 시선들을 온몸으로 받아내야만 했다. 그러나 저자는 절망과 우울을 딛고 일어섰다. 오랜 시간 상담치료와 글쓰기를 통한 회복의 길을 걸으며 자신의 인생을 희망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사람들, 상실의 공허함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의 이야기를 전해주고자 이 책을 썼다.

상실의 공허함에 빠진 이들에게, 다시금 희망을 안겨주는 위로의 말들
누군가의 죽음 뒤 남겨진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를 입 밖으로 꺼내기가 어렵다. 슬픔을 느끼기 전에 죄책감, 분노, 원망 등 차례대로 밀려오는 감정과 싸우면서도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 자신을 탓하는 것만 같은 사람들의 시선들에 그저 홀로 그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간다. 저자는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를 온전히 떠나보내기까지 “서러워도 참아야 했고, 눈물겨워도 눈물을 삼켜야 했다”고 고백하며, 그 과정들을 어떠한 포장도 없이 자신이 느끼는 감정들과 부딪히게 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들려준다.

그리고 문득 혼자라는 생각에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인가 싶은 절망감이 찾아오겠지만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며 세상은 마냥 힘겹고 절망적인 곳만은 아니라고 말하며 위로와 희망의 손을 내민다.

■ 저자 곽경희
갑작스러운 남편의 자살로 하루아침에 자살자 유가족이 되었다. 슬픔과 고통에 빠져 있기에는 책임져야 할 네 아이가 있었다. 이 끔찍한 현실 속에서 도와줄 이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깊은 우울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럼에도 살아야 하기에 ‘내가 나를 도와야겠다고’ 마음먹고, 상담 치료를 시작했다. 내면 깊은 곳에 응어리져 있던 자신의 마음을 하나둘씩 꺼내 놓기 시작하면서 고통의 무게도 조금씩 줄어갔다. 그렇게 죄책감, 분노, 서러움… 상실의 고통을 넘어 애도의 마음에 이르기까지 더디지만 한 걸음 한 걸음 회복의 길을 걸었다.

포기하고 싶던 순간에도 막연한 빛을 좇으며, 결국 어둠에서 벗어나게 된 자신의 극복 경험을 통해 소중한 사람의 죽음, 상실로 고통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아픔을 딛고, 헤쳐가는 길을 함께해주기 위해, “이제 행복해져도 된다”는 응원의 메시지를 전해주고자 이 책을 썼다.

대학교에서 간호학을, 대학원에서 상담심리를 전공했으며, 대학상담실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상담을 하기도, 보건소, 재활요양병원 중환자실 병동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이후 경북교육청 교육 철학 분야 강사에 선정되었으며, ALP ‘삶의 질 향상센터’에서 강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 차례
프롤로그 _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Chapter 1 어느 날, 남편이 자살했다
그날은 이혼하기 하루 전날이었다
자살, 가장 잔인한 한 방?
제가 용의자라고요??
나는 가능한 더 불쌍하게 보여야 했다
비록 껍데기뿐일지라도 살아만 있지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째 이혼
상처가 배우자를 고른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법
죽음보다 더 두려운 삶

Chapter 2 당신은 떠났지만 나는 밥을 먹는다
그때 그 전화를 받았더라면
웃는 것도 죄가 되는 사람들
전업주부에서 다시 일터로
살고 싶다, 살아야겠다!
고통이 또 다른 고통을 치유한다
살아 있는 소나무가 들려준 이야기
셀프허그라도 괜찮아
모든 걸 내려놓는 시간
그래야 우리는 오늘을 살 수 있다
나를 가두는 얕은 시냇물에서 벗어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여행의 시작

Chapter 3 상실을 넘어 애도의 마음으로
미처 보지 못했던 그의 아픔들
이제야 사랑이 보인다
다시 치른 장례식
나와 엄마, 다시 맺는 관계
나는 바보 같은 엄마가 되고 싶다
다하지 못한 용서를 받아준 아이들
다시 피어난 일상의 소소한 행복
그럼에도 채울 수 없는 빈 자리
새아빠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Chapter 4 준비하지 못한 이별에 대하여
어설픈 위로의 말은 상처를 준다
인생은 짧은 순간순간이 모여 완성된다
내 삶의 체리 향기를 찾아서
그러니 일단은 살고 볼 일
내가 존재해야 세상도 존재한다
살아 있는 자만이 생방송을 시작할 수 있다
손을 내밀어야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살기 위해 우리는 이야기해야 한다
나를 이끄는 아름다운 별

에필로그 _ 이 이야기가 당신에게 작은 숨구멍이 되기를

 




남편이 자살했다


어느 날, 남편이 자살했다

그날은 이혼하기 하루 전날이었다

남편이 자살했다. 그날은 우리가 이혼하기로 한 전날이자 나의 생일이었다. 남편의 자살은 그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이혼에 대한 가장 강력한 거부였으며, 생에 잊히지 않을 가장 엽기적인 생일선물이었다.


그날 남편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혼자 아침을 챙겨 먹고 출근 준비를 하는가 싶더니 나에게 토치를 찾아달라고 했다. 가뜩이나 바쁜 아침 시간에 토치를 챙겨달라니 짜증이 밀려왔다. 직접 찾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집 안 모든 서랍을 다 헤집어놓을 게 뻔한 일이라 어디에 있는지 아는 내가 꺼내주는 편이 더 나았다.


토치를 건네주며 나는 대낮부터 술판을 벌일 그의 모습에 진저리를 쳤다. 가족 없이는 살아도 술 없이는 못 살 것 같던 남편은 대낮부터 사무실에서 술판을 벌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의 사무실에 들를 때면 술에 취해 코까지 골며 잠든 모습을 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늘 그랬듯이 그날도 당연히 대낮부터 술판을 벌이는 것이려니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걸려왔다. 경찰이었다.


"000 씨 배우자 되십니까?" "네!" “차 안에서 사망하셨습니다. 사망한 지는 얼마 안 된 것 같습니다. 자살한 것 같고요. 번개탄을 피우셨네요. 술병도 바닥에 뒹굴고 있고요. 찾아봤지만 유서로 보이는 건 없었습니다.”


경찰은 건조하고 사무적인 말투로 설명을 이어갔다. 근처 어느 병원으로 옮길지를 내게 물었고, 이따가 경찰서로 와서 몇 가지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설명이 1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끝났다.


“차라리 술판을 벌이지! 왜? 왜!”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비통함에 악다구니를 내지르며 혼절했고, 다시 깨어난 후에도 반쯤은 정신이 나간 상태로 병원과 경찰서를 오갔다.


자살, 가장 잔인한 한 방

“네가 떠나면 나는 자살할 거야.”


남편은 나와 함께 보낸 25년의 세월 동안 내가 자신을 떠나려 할 때마다 ‘자살’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연애한 지 3개월쯤 됐을 때 남편과 성격이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서 내가 일방적으로 헤어지자고 했었다. 그러자 그는 너와 헤어지느니 차라리 자살하겠다며 집에 가는 나를 계속 따라왔다. 경제 사범으로 억울하게 교도소에 들어갔다 나왔을 때도 내가 떠났으면 자살하려 했다며 고백했다. 그저 나를 붙잡아두려고 하는 말이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그의 진심이었고, 나와 이혼하기로 한 전날 그는 자살을 선택했다.


우리 부부의 불화, 그리고 자살이라는 남편의 극단적인 선택을 설명하려면 ‘술’이 빠질 수 없다. 연애 시절부터 술을 과하게 마신다 싶었던 그는 결혼 후 매 순간 술에 의지했고, 급기야 술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됐다. 나는 25년을 함께했지만 그런 그의 모습이 이해가 안 됐고 너무나 싫었다.


“애들은 어떡할 거냐고! 나는 뭐냐고! 이 바보야! 이 등신아!”


병원이 가까워지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병원에서 마주해야 할 일들을 생각해보니 눈앞이 캄캄했다. 택시에서 내려 병원 안으로 들어가는 한 발 한 발이 마치 가시덤불 위를 걷는 듯 힘겹고 고통스러웠다.


열림 버튼을 누르자 응급실 문이 열렸다. 조용한 시골 마을 병원이라 응급실은 한산했다. 그래서인지 문이 열리자 간호사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 와중에도 나는 창피함이 밀려왔다. 자살한 남자의 아내를 고운 시선으로 바라볼 이가 누가 있겠는가. 죄인 중의 죄인이 된 기분이 들어 차라리 얼굴을 가리고 말하고 싶었다. 사람들의 눈에 나는 남편이 죽는 것을 보고만 있었던 냉혈한이거나 아예 눈치조차 채지 못한 둔한 바보로 보일 것만 같았다. 그도 아니면, 자살이라도 해서 벗어나고 싶었을 만큼 엄청난 문제를 가진 부부라고 여길 것만 같았다.


우는 것도 잠시, 또 가야 할 곳이 있었다. 경찰서에 가서 남편의 죽음과 관련한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야말로 지칠 대로 지쳐 있었지만 미루거나 피할 수 없었다. 그저 빨리 이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남편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제멋대로 하고는 언제나처럼 뒷감당은 나의 몫으로 던져두었다. 아이들 때문에 간신히 버티고 있는 내게 폭탄을 안겨주고 간 느낌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화가 나도 따지고 싸울 수도 없다. 그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으니 말이다. 감당할 수도 없을 만큼 무거운 짐을 내게 모두 던져놓고 그는 혼자 훌훌 떠나버렸다.



당신은 떠났지만 나는 밥을 먹는다

그때 그 전화를 받았더라면

남편을 떠나보내고 꽤 오랫동안 그의 죽음이 내 탓이 아닌가를 자책해야 했다. 무엇보다 나는 그가 자살 직전에 지푸라기처럼 매달렸을 마지막 전화를 받지 못한 데 대한 죄책감이 컸다. 남편은 죽기 직전에 내게 여러 통의 전화를 했지만, 나는 대학원 수업을 듣던 중이라 받지 못했다.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곤 쉬는 시간에 다시 전화했을 때는 그가 받지 않았다. 그냥 강의실로 들어가려다 왠지 찜찜한 기분이 들어 한 번 더 걸어 봤지만 받지 않았다. 그는 고객과 상담하거나 술을 마시고 있을 때는 내가 몇 번을 진화해도 받지 않을 사람이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게 그의 마지막 전화일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자살 소식을 듣고, 장례를 치르고, 그가 없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나는 내게 물었다. 그날, 그의 전화가 마지막 전화인 줄 알았다면 받았을까? 내가 좀 더 참고 수용해주었더라면 그가 자살까지는 하지 않았을까? 이번 한 번만 더 참아주고 넘어갈 테니 잘해보자고 했다면 그가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바꿨을까? 그리고 지금 우리는 행복할까?


나는 무언가 함께할 때 행복감을 느끼고 사랑을 느낀다. 그런 성격을 가진 나로서는 남편의 부재로 자주 혼자 방치되는 듯한 상황 속에서 불행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은 혼자 감당하면서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작은 일에도 화가 났고, 급기야 아이들이 ‘엄마’하며 부르기만 해도 화가 났다. 이러다가는 자식 농사까지 망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힘듦이 이처럼 극으로 치닫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점점 더 많이, 더 자주 술을 마셨다. 죽기 2~3년 전부터는 낮에도 소주를 2병 정도씩 마시기 시작했으며, 저녁에는 4병 정도나 마셨다. 급기야 나는 계속 이렇게 살 거라면 남편이 죽어 없어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편이 떠나고 꽤 오래도록, 잠시나마 내가 남편이 죽기를 바랐다는 사실이 너무나 미안했다. 내가 그런 못된 마음을 품었기에 남편이 떠난 듯하여 괴롭기만 했다. 그가 용서해 달라며 내 앞에서 무릎 꿇고 빌던 장면이 수시로 떠올랐다. 첫 번째 이혼을 하던 날에 둥그런 그의 어깨가 힘없이 무너지던 모습, 마지막 날 아침에 그가 토치를 찾던 모습도 떠올랐다. 그 모든 순간에 그가 얼마나 슬프고 아프고 절망스러웠을지 생각하니 미안함에 목이 메었다. 낮에도 문득문득 그 기억들이 떠오르면 저절로 고개가 떨구어졌다.


살고 싶다, 살아야겠다!

죽고 싶단 생각만 들 정도로 힘든 엄마의 처지를 알 리 없는 아이는 자신들을 제대로 돌보지도 못할 거면서 왜 낳았느냐고 울면서 대들었다. 나는 대꾸할 힘조차 없어 그저 눈물만 흘렸다. 그러던 어느 날, 급기야 아이는 엄마인 나에게 하지 말아야 했을 말을 내뱉었다.


“엄마 때문에 아빠가 돌아가신 거 아니에요?”


물론 둘째와 내가 이런저런 일로 언쟁이 오가다가 아이가 화가 나서 한 말이긴 하다. 그럼에도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큰 충격에 휩싸였다. 안 그래도 나 때문에 남편이 죽은 것 같다는 생각에 괴로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누군가가 그 말을 소리 내어 입 밖으로 꺼내 내게 들려주니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마음이 일순간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나의 자식이 그런 말을 하니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져서 말이 안 나왔다.


그날 이후로 나는 거의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마침 여러 문제로 회의감이 들던 직장도 사표를 냈다. 직장에서는 조금 쉬었다 나오라고 했지만 나는 조금이 아니라 오래 쉬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때부터는 밥을 먹을 때도 눈물이 났다. 그래서 어린 두 딸 앞에서는 밥도 함께 먹을 수가 없었다. 둘째는 내가 우는 것을 봐도 시비를 걸듯이 말했다. 그때마다 나는 설움에 어깨를 들썩이며 발간 눈으로 아이를 쏘아보았다.


아이는 아이일 뿐이라며,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며 엄마인 내가 보듬고 품어줘야 하는데 생각대로 되질 않았다. 도무지 아이를 받아줄 수가 없었다. 아이의 말에 공감도 안 되고 다독여주기도 싫었다. 나는 파도에 떠밀려가는 작은 잎사귀처럼 아무 방향도 잡을 수가 없었다. 죽고만 싶었다. 어린 두 딸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드는지 내가 우는 모습에 같이 따라 울기 시작했다.


“엄마, 죽으면 안 돼요! 우리랑 오래오래 천 년 동안 살아야 해요!”


나는 딸들을 껴안고 또다시 평펑 울었다. 아이들 눈에도 엄마가 곧 죽을 것처럼 보였는지, 힘내라는 말이 아니라 왜 우냐고 묻는 게 아니라 죽으면 안 된다고 말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하루아침에 아빠를 잃은 아이들이 이제 엄마까지 없어지면 어떻게 하냐며 걱정을 하고 있었다. 너무도 미안했고 아이들이 안쓰러웠다. 이러다간 어린 두 딸까지 우울증에 빠질까 봐 겁이 났다.


조금 정신이 차려지면 간혹 상담심리학 강의를 듣기도 했는데, 하루는 존경하는 교수님의 강의를 유튜브를 통해 우연히 듣게 되었다. 마침 내가 좋아하는 정신분석학자의 이론을 설명하고 있었는데, “청소년 시절에는 부모에게 대들기도 해야 한다. 그리고 부모가 아이와 싸워주기도 해야 아이의 공격성이 밖으로 표출돼 건강한 성인으로 자랄 수 있다. 그런데 아이는 엄마가 불쌍해 보이면 대들지를 못한다. 그래서 엄마가 행복해 보여야 하고 엄마가 힘이 있어 보여야 아이가 맘 놓고 대든다”라는 내용이었다.


강의를 들은 이후로, 나는 정말 신기할 정도로 정신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둘째가 학교에서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나는 아이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둘째야! 고맙다. 엄마가 힘이 있다는 걸 네가 알려줬어! 엄마는 이제 괜찮아!” “엄마 저도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둘째야, 우리 힘내서 다시 시작해보자!”


다시 힘을 내자는 내 말에 둘째도 그러겠노라고 약속했다. 왠지 나도 힘을 내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기한 일이다. 죽고 싶다던 마음으로 가득 찼던 내 마음이 신기하게도 살고 싶다,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채워졌다. 어린 두 딸의 눈에서 눈물이 아닌 웃음꽃이 피어나게 하고 싶었다.



상실을 넘어 애도의 마음으로

다시 치른 장례식

남편과 나는 제대로 이별하지 못했다. 그 흔한, 잘 가라는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남편이 일방적으로 도망쳤고, 나는 그런 그를 원망만 했다. 그것이 우리의 이별 아닌 이별의 모습이었다. 남편의 죽음을 확인하던 병원에서도, 심지어 장례식장에서조차 나는 그의 모습을 마주하지 않았다. 당시엔 그저 남편을 향한 미움과 원망 때문이겠거니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나는 그렇게 떠나버린 그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듯하다.


집단상담 심리치료 때 선생님께서 내게 물어보셨다.


“남편분의 입관식은 보셨나요?”

“아니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장례식을 다시 치러야겠네요!”


“이 분을 죽은 남편이라고 생각하시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보세요.”


방에 불까지 끄고 나니 주변의 모든 사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남편과 나만 남은 기분이었다. 상황에 깊이 빠져드니 나도 모르게 죽기 전날에 그에게 했던 말이 다시 튀어나왔다.


“죽지만 말라고 했잖아. 죽지만 말라고! 죽지만 말고 살아 있으라고 했잖아. 그것도 못 하냐고! 그게 그렇게 어려웠냐고. 야 이 등신아! 그것도 못 하냐고. 네가 우리 애들을 아버지 없는 애들로 만들어 놨잖아. 이제 어떡할 거냐고.”


나는 남아 있는 악을 다 쏟아내기라도 하듯 소리치며 통곡을 했다. 그건 나의 진심이었고 마지막 부탁이었다. 남편은 그 마지막 부탁을 져버렸고, 나는 엄청난 상처를 받고 말았다.


“그게 남편분의 입장에서는 최선인 선택이었을 겁니다. 이젠 그 선택을 인정해주고 받아주세요.”


내 울음소리가 사그라들자 선생님께서는 그것이 남편으로선 최선인 선택이었을 거라며, 이제 그 선택을 인정해주고 받아주라고 하셨다. 그 말에 다시 터져 나온 눈물은 그칠 줄을 모르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인정해줄 게 없어서 그런 죽음을 인정해주고 받아줘야 하나 싶어서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이어서 선생님은 남편에게 “나를 아내로 맞이해주고 사랑해줘서 고마웠다”라고 말하라고 하셨다. 이제껏 남편을 향한 고마움은 내 무의식에 존재하던 감정이었다. 그것을 의식으로 끌어올려 말로 표현하려니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질 않았다. 울음을 삼키며 간신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해봤을까. 처음이라 그런지 어색하고 미안했으나, 꼭 해야 했고 그도 들어야 하는 말이었다.


언젠가 남편의 수첩 겉표지가 내 사진인 걸 보곤 당장 그 사진을 떼라고 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내 마누라 사진을 내 수첩에 붙이고 다니는 게 뭐 어때서 그러냐며 끝내 떼지 않았다. 친구들이 놀려도 상관하지 않았다. 오래전에 남편과 함께 고속버스를 타고 가다가 속이 좋지 않아서 결국 터미널에 도착할 즈음에 버스 바닥에 토한 일이 있다. 남편은 나더러 먼저 내리라고 하고 다른 승객들이 내리자 바닥을 다 닦아내 주었다. 이렇듯 남편과 나의 시간 곳곳에 숨어 있던 감사한 기억이 하나, 둘 마치 영화 속 한 장면들처럼 떠오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고맙단 인사가 터져 나왔다.


“고마워, 여보. 너무 고마워. 나를 사랑해줘서 너무너무 고마워, 잘 가요. 이제 그곳에선 절대 아프지 말고 힘들지 말고 행복하기만 해요. 여보, 그동안 너무 고마웠어.”


선생님 덕분에 나는 남편의 장례식을 다시 치르며 그와 제대로 된 이별을 할 수 있었다. 내 안에 똘똘 뭉친 한들을 하나둘 실타래 풀듯이 풀어냈고, 미처 하지 못한 고맙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도 원 없이 했다. 이제야 그와 진짜 이별을 하는 듯하여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하지만 그 눈물은 그의 장례식장에서 악다구니처럼 튀어나오던 원망과 분노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를 향한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뒤늦은 사랑의 눈물이었다. 늦게나마 그를 제대로 보낼 수 있었음에 나는 지금도 감사한다.



준비하지 못한 이별에 대하여

어설픈 위로의 말은 상처를 준다

누가 내게 “아이들을 봐서라도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야지”라고 하면, 맞는 말임에도 나는 불쑥 화가 났다. “왜 꼭 나는 그래야 되느냐!”라고 묻고 싶었다. 남편 없는 여자는 늘 정신을 차려야 하고 늘 씩씩해야 하고 늘 명랑해야 하냐고 따지고 싶었다. 나는 억울했다. 울어도 안 되고 우울해도 안 되고 슬퍼도 안 되냐고 따지고 싶었다. 아무도 내 마음을 모르는 것 같았다. 많이 힘들지 않냐고, 고생한다고 그 두 마디면 될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말을 못 한다.


고통과 절망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설명도 필요 없고 충고도 필요 없다. 게다가 너의 고통 못지않은 아픔을 나도 이미 겪었노라며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나의 고통과는 별개의 것이기에 그저 지루할 뿐이다. 어설픈 위로나 조언보다는 그저 내가 버틸 수 있도록 지켜봐 주길 바랐다. 그리고 내가 느끼는 것을 느끼도록 놔두길 바랐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나는 제 자리로 돌아온다. 그러나 주변의 지인들은 내가 멀리 갔다가 부서지기라도 할까 봐 지레 겁을 냈다. 설사 그렇더라도 그건 나의 선택이다.


어떤 분은 나의 이야기를 듣더니 뜬금없이 ‘와! 젊다’라고 했다. 다소 웃기긴 하지만 차라리 그게 기억에 남는 위로였다. 아직은 얼마든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말로 들렸다.


병원의 심리상담실에서 툭하면 울기만 하던 내가 언제부턴가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기 시작하자 선생님은 “이제 졸업입니다!”라고 하셨다. 전문가가 졸업이라고 하니 마치 입원 중이던 환자에게 “이제 퇴원입니다!”라고 하는 것 같았다. 순간 내가 어느덧 이렇게 됐구나 싶은 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서러워도 참고 가야 했고, 눈물겨워도 눈물을 삼키며 가야 했다. 누가 수군거려도 못 들은 척해야 했다. 하지만 끝나는 날이 있다. 그 길을 누군가가 함께 걸어주면 된다. 괜찮다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말해주며, 망가진 모습에도 떠나지 않고 함께 해줄 한두 사람이면 족하다.


손을 내밀어야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내 안의 왜곡된 신념들은 오랜 세월 동안 노출된 수많은 상처와 부정적인 자극들이 가져온 결과물이었다. 삐뚤어진 자아상과 낮은 자존감은 어릴 때는 부모와 같은 주 양육자들을 통해서 만들어졌을 확률이 매우 높고, 성인이 되어서는 연인이나 배우자로부터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그런 과정을 통해 낮은 자존감과 극도의 무기력감에 빠졌다.


이미 굳어질 대로 굳어진 그것들을 깨부수고 진짜 나를 만나는 것은 혼자서는 힘든 일이었다. 오랫동안 강력하게 쌓여 온 부정적 체계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리고 새롭게 삶을 바꾸는 일을 혼자서 해내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시는 선생님들은 물론이고 이미 그 길을 걸어가셨던 수많은 선배도 있다. 나는 상담 관련 공부를 하고 있었기에 다행히 정신과 방문에 대해 큰 거부감이 없었고, 스스로 도움이 필요하단 판단에 병원에 갔다. 감사하게도 훌륭하신 선생님들을 만나 큰 위로와 힘을 얻었다.


길을 모를 땐 그 길을 잘 아는 분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현명한 일이다. 나 역시 그러한 분들의 도움과 가르침으로 여기까지 왔다. 바닥까지 추락한 자존감을 서서히 회복하고 삐뚤어진 자아상도 다시 반듯하게 잡으며, 세상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때는, 자살이란 허망한 선택을 한 남편을 어리석다고 욕하면서도 나 역시 남편과 같은 선택을 하고 싶단 강한 유혹을 떨치기가 힘들었다. 물론 실제로 시도를 한 적은 없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내가 늘 한 일들이 있다. 그것은 오래된 습관인데 독서와 강연 듣기이다. 하루도 하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다. 나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책을 읽고 전문가들의 강연을 들었다. 저자나 강연가들은 오랜 세월 공부하고 연구한 것들을 단시간 내에 터득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내놓는다. 비록 저자나 강연가가 각자에게 처한 문제나 상황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닐지라도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작은 물꼬 정도는 틔워줄 수 있다. 좀 더 여유를 가지고 다른 관점으로 그 문제와 상황을 바라볼 수 있는 통찰을 주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진심 어린 토닥임이 내게 전해질 때면 이 역시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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