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는 게 아니라 낭만적인 거예요

   
응켱
ǻ
필름
   
14000
2020�� 09��



 ■ 책 소개


SNS 인기 작가 ‘응켱’의 첫 번째 에세이! 
“한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야지!”  

이 책은 타인의 시선과 부모님의 기대, 세상의 잣대에 자신을 내버려 두지 않고, 오로지 내가 원하는 것, 나를 향한 믿음에 집중하며 자족감으로 채워가는 1년 차 프리랜서의 일상과 단단하게 성장해가는 과정을 저자 특유의 위트 있는 시선과 그림으로 담아내고 있다. 내가 나인 것 같지 않을 때, 남들은 다 행복한 것 같은데 나만 불행한 것 같을 때, 무엇보다 나에 대한 믿음과 용기가 필요한 순간, 이 책이 그 시작의 작은 용기가 되어 줄 것이다. 

■ 저자 응켱
이제야 나를 조금씩 알아가는 둥글고 모난 사람. 
사람과 사랑에 관심이 많다. 
좋은 시선을 선택하며 명랑하게 살아가고 싶다. 
모두의 마이웨이를 응원하며.

■ 차례
프롤로그 

1장 낭만과 현실 사이의 균형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존재의 불완전함과 이것을 받아들이는 완벽한 방법 
-일상과 이상 사이 
-본투비 아웃사이더 
-애매한 나이 
-무뎌짐에 대한 두려움과 평안함 
-위로가 어려웠던 밤 
-내가 나로서 존재하기 위해 
-취향의 이해 
-어른이 되어가는 순간들 
-버티는 일 
-이른 퇴직, 그리고 귀향 

2장 특별하지 않아도 충분히 낭만적인 삶 
-백수와 갓족 
-아파트의 삶 
-오늘의 날씨 
-시간 한 움큼 
-작업실 가는 길 
-해가 긴 계절 
-엄마와 요리 
-그때 그 노래 
-엄마의 일기장 
-아빠와 딸 
-혼자 일한다는 것 
-제대로 나이 들어가기 

3장 오만과 편견, 그리고 잘못된 낭만 
-일요일의 심정 
-의연한 관계 
-‘존버’의 새로운 미학 
-나의 인생 권태기 
-성공의 지표 
-좀 어때 
-시간을 쌓는 중 
-평범에 대한 강박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나태의 힘 
-어떤 변화 
-운동의 목적 
-오만과 편견, 그리고 잘못된 낭만 
-마음을 다한다는 것 
-결혼에 때가 있나요 

4장 낭만적인 할머니가 되고 싶어 
-거절하는 힘 
-엄마의 ‘하면 된다’ 
-행복한 지속 
-철모르고 살래 
-외할머니 
-좋음과 싫음 사이 
-행복을 찾는 일 
-삶을 살아가는 태도 
-SNS시대의 관계를 받아들이며 
-두려움 없이 오만하자 
-표류 중인 연애와 어떤 결론 
-내 꿈은 낭만적인 할머니 

엔딩크레딧  

 




철없는 게 아니라 낭만적인 거예요


낭만과 현실 사이의 균형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퇴사와 함께 십여 년의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부모님이 계신 지방의 본가로 내려오게 되었다. 퇴사부터 본가로 내려오게 되기까지, 놀라울 만큼 속전속결이었다. 2019년 5월 29일이 나의 공식 퇴사일이었는데(참으로 잊혀지지 않는 이 숫자), 그보다 앞선 5월 26일쯤 본가로 이사를 했으니, 이 얼마나 엄청난 추진력의 행보인가. 일찍이 직장에서는 자리와 짐을 모두 빼고 송별회까지 마친 상태였다. 남은 연차를 소진하느라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그 여유로운 아침과 동네를 활보할 수 있는 대낮의 자유가 낯설고 설레던 백수였던 것이다(이때를 좀 더 즐겼어야···).


남들 좋다는 회사까지 때려치우고 하려는 일에는 대체 어떤 절실함이 있었을까.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회사 생활에 대한 흔한 회의감, 동시에 어쩌면 지금이 내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겠다는 절박함. 해가 갈수록 살아가는 대로 생각해버리는 내가 두려웠다. 이대로 시간을 흘려보내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점점 더 커질 후회가 두려웠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결정을 말렸다. 젊어서 그런다고. 회사 안이 전쟁터라면 회사 밖이 지옥이라는 걸 몰라서 저런다고. 자꾸 모른다길래 오히려 알고 싶어지더라. 얼마나 지옥이길래.


결국 내가 사랑하는 이 삶의 형태를 지속하고 싶다는 마음만큼 항상 통장 잔고도 있어 줘야 했다. 그렇게 퇴사 후 세계여행이라도 떠난 법한데 본가에 들어앉아 매일매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운이 좋았다고 생각되지만, 퇴사 후 2개월 정도가 지나고부터 외주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티끌 모아 태산 정신으로 그 와중에 아무튼 저축도 하게 되었다. 현재 내 마음을 넉넉하게 해 주는 잔고의 마지노선을 정해 두고 그에 따라 놀고먹거나 노동하는 삶을 살아가는 중이다.


지금의 삶이 무조건 좋다거나 만족스럽다는 걸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삶의 일부를 부모님에게 반쯤 위탁하고 있는 이 상태에 대해, 성인으로서 어찌 마음이 편할 수 있을까. 가끔, 아니 종종 이런 내가 무슨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고 설치고 있는 건가란 생각에 마음이 요란해지는 순간도 왕왕 찾아온다. 자신의 생활과 살림의 독립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고 있는 이로서 느껴야 하는 마음의 부채감이나 자괴감 역시, 결국 내가 감당해야 할 내 몫인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살림을 일구어 나가겠단 의지 자체를 버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N포니 몇 포니 하며 포기가 당연하다는 듯, 은근히 그것을 권유하는 이런저런 사태를 마주하며 열심히 발악 중이다. 본디 나는 ‘유교걸’인지라 의리와 도리에 대한 강박은 언제나 마음 깊이 품고 있는 걸(이걸 인정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것이 무겁다고 포기하고 싶진 않다. 다만 그것을 위한 방식을 조금 바꿨을 뿐, 싫은 삶을 버텨 내면서가 아닌, 애정하는 형태의 삶을 일구며 나아가 보고 싶다.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고 잘 다니던 회사를 관두게 되면서, 철없어 보이는 행보로 사촌 팔촌 온 가족을 충격에 빠뜨린 장본인이지만, 의리와 도리를 다하는 삶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모두가 이야기하듯 내가 거슬러야 할 앞으로의 물길이 험난할지라도, 어디 한번 가보자는 마음으로 힘차게 나아가 보고 싶다. 기왕이면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일상과 이상 사이

퇴사하고 막 본가에 내려왔을 당시 부모님은 내게 개명을 하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내 이름 석 자에 우울과 번뇌의 수가 많다나. 쩝.


이름.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었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내게 주어진 이 이름에 나름 만족하고 애정하며 살아오고 있었거늘. 사실은 너무 갑작스러웠던 것이다. 이 이름을 내게 붙여 줬던 이들이 오히려 이제는 그 이름을 바꾸고 싶어 하는 상황이 아이러니였다. 이름 자체에는 불만이 없었다. 사실 나의 이런 의지와는 무관하게 꼭 바꿔야만 할 것 같은, 왠지 안 바꾸면 무언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그 상황이 나를 더 깊은 번뇌에 들게 했다.


다 나 잘되라고 하는 이야기니까. 이름 한 번 바꾸는 거 뭐, 눈 딱 감고 바꿀 만도 했겠지만 중요한건 아무튼 마음이 그러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퇴사가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우울이나 번뇌 역시 꼭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에 그 모든 것들이 큰일이라 하더라도 이름을 탓할 순 없었다. 그래서 결국 ‘개명하지 않음’을 선택했다.


우울의 이유는 사실 이름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상이 높은 사람은 우울해지기 쉽다고 하지 않는가. 또 우울이 지성의 산물이자 동시에 체력이 약해진 순간에 찾아오는 것이라고도 하고. 나의 우울은 오히려 그런 이유들이 적합했다.


오히려 내가 우울을 타개할 수 있었던 계기는, 퇴사였다. 그것을 통해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생활을 전복시키고,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반복적인 상황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나아졌다. 이토록 단순한 문제였다니.


그래서 삶이 슬퍼진다. 바꿀 수 없는 상황이나, 벗어날 수 없는 환경이 존재하니까. 하지만 다시 일상을 지낸다. 내가 바라는 모습대로 나의 일상을 제대로 지켜내겠노라는 다부진 마음을 쫓으면서.


일상과 이상 사이 언제나 흔들릴 테지만,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살아가 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일상에서 부지런히 균형을 찾아가면서 말이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기 위해

나는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것은 언제나 중요했다. 개인의 성장은 늘 주요 관심사였고, 경제적 자유 역시 중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일’이 중요했다. 일이야말로 자신의 성장과 동시에 경제적 자유를 이뤄 나갈 수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이 모든 것이 꼭 자신을 마모해 나가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쌓여 가는 시간 속에서 ‘나로서 존재할 자유’는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어째서 점점 더 희미해져만 가는지. 부모님도, 상사도, 모두가 나에게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너 그러면 안 돼!”라고. 어째서 나답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이토록 사치스럽게 느껴져야만 하는 건가. 문득 억울해졌다.


늘 갈증을 느끼던 그 지점에 크나큰 결핍의 구멍이 생긴 삶, 이내 그 구멍은 자기연민, 우울 그리고 불안 등으로 채워졌다. 나다울 자유가 사라져버린 미래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어느새 나조차 그것을 사치 또는 유난스러움으로 치부하고 있던 현재는 서글픔의 대상이 되었다. 월급을 향한 믿음을 지켜보겠노라는 어른다운 다짐을 해 본 적도 있다. 월급을 믿고 이 불안과 두려움, 공허 자체에 대해 조금씩 무뎌지다 보면, 아마도 허황된 바람들을 포기하거나 내려놓거나 타협할 수 있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그게 잘 안됐다. ‘나이고 싶은 나’와 ‘직장 생활하는 나’를 지혜롭게 양립해 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야 한 가지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토록 싫어했던, 언제나 나를 흔들던 말들에 대해. 꼰대가 되어 가는 사람, 또는 아집으로 가득 찬 사람 모두 ‘내가 옳다는 믿음’을 공통점으로 하고 있었다. 사는데 나에 대한 믿음 정도는 분명 필요하다. 그런 믿음 하나 없이 이 삶을 지탱해 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 될 테니.


다만, 나는 그런 내가 되고 싶다. 상대와 나의 다름을 받아들이는 아량이 있는 사람, 뭔가를 서둘러 판단하거나 결론 내리지 않으려는 인내심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 줄 것이다.


“나는 그랬지만, 당신은 더 나은 길을 발견할 수도 있겠지.”

“나는 그랬지만, 당신은 다를 수도 있지.”


버티는 일

‘한’이란 기본적으로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 싫은 것을 버텨야 하는 과정에서 발현된다. 버티는 것조차 더 이상 버틸 수 없겠다는 지긋지긋한 마음이 더해지면 완벽한 ‘한’이 된다.


“싫으면 하지 마.”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되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 거 아닌가.”


살며 한 번쯤은 들어 볼 법한 말일 것이다. 이것이 ‘NO’을 뱉기 위한 용기를 주려는 말인지, 아니면 불난 집에 부채질하려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오히려 쿨하지 못한 내가 뭔가 미안해지는 말이기도 하고.


나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었다. 자신의 고달픔을 절대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상대적으로 파악하는데 익숙해져 있던 사람. 그것이 미덕인 줄 알았다. 삼십여 년을 그렇게 여기며 살아온 것 같다.


타인의 고달픔을 헤아리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그에 비해 나는’이라는 생각의 습관이 아마도 문제였다. 자신의 고달픔을 자신에게조차 별것 아닌 일쯤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홀로 속이 곪았다. 자신의 고달픔에만 집중하지 않는 멋진 어른이고 싶었을 뿐인데, 결국 자신의 고달픔조차 제대로 돌보지 못한 청승맞은 사람이 될 줄은 몰랐다.


결론적으로 절이 싫어 중은 떠났다. 그러나 아주 가끔 생각한다. 미리미리 내 마음을, 고달픔을 부지런히 돌아보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절 생활을 적당히 연명해 나가고 있지 않았을까 하고. 이 단언할 수 없는 대안의 삶을 가끔 생각하곤 한다.


‘적당한 연명’은 결국 삶의 지혜인 것 같다. 선을 지킬 줄 아는 자만이 행할 수 있는 궁극의 균형 감각 같은 거. 나는 직장을 다니며 그러질 못했다. 홀로 너무 뜨거웠다. 너무 뜨거워서 그 온도를 스스로도 감당해 내지 못했다. 결국 적당한 균형 감각과 고요함을 유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큰 범위 안에서도 ‘진정 하고 싶은 일’과 그 일을 지속하기 위해 ‘해야 하니까 하는 일’의 구분이 생겼다. 그리고 보통 후자의 경우가 ‘하기 싫은 일’이 되는 듯했다. 결국 그랬다. 모든 일에는 좋고 싫은 구석이 생기기 마련이고, 이 위계를 기꺼이 감내하며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참 대단한 일이라고. 마냥 좋은 일이 이 세상에 과연 존재할까. 만약 있다면 아마도 조금 더 가슴이 뛰고, 시간을 온통 쏟아도 아깝지 않은 것뿐이지 않을까.


앞으로 버틸 날이 더 많아 보이는 고작 1년 차 프리랜서에게 바라는 게 몇 가지 있다면, 청승 대신 명랑하길. 지난 시간들의 회한에 머물지 않고, 별거 아니란 듯 툭툭 털고 나아가길.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제나 가난한 마음을 채우는 일에 게으름 없이, 온돌처럼 뜨뜻미지근한 온도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해 내길. 딱 그 정도면 좋겠다.


이른 퇴직, 그리고 귀향

사실 일 년 전 퇴사를 하고 본가로 내려왔던 그 시점보다, 요즈음 더 제대로 느끼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지금의 내 현생이야말로 모든 영겁의 굴레와 속박을 벗어 던진 삶의 전형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도 이른 나이의 퇴직과 귀향의 조합이 바로 그러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마치 세상에 신물이 날 대로 나서, 끝끝내 속세를 등지고 고향의 낭만을 찾아 떠나온 바로 그 모습이지 않겠는가.


밝히자면 퇴사와 귀향은 어떤 섣부른 달관이나 포기, 화해 같은 것들의 결론은 아니었다. 오히려 포기하거나 화해할 수 있었다면, 나는 아마도 회사생활을 지속하길 선택했을 것이다. 포기하지 못했고 화해하지 못했다. 그 결과, 현실을 인정하고 마주하고 해결해야 했다.


퇴사는 하기 싫은 일을 계속 참아 내는 과정에서, 자기연민과 염세주의에 나 자신을 더 이상 담아두고 싶지 않았던 마음에서 시작된 결심이었다. 동시에 최소한 나만이라도 행복할 수 있는 일을 하며, 그러한 일에 나의 일상과 시간을 헌신하고 싶었던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선택의 결과이기도 했다. 뭐가 됐든 일단 내가 행복해야 내 주변도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무릇, 퇴직이라 하면 그런 이미지가 있었다. 아빠와 큰아빠, 또는 고모나 고모부처럼 자녀 사업을 어느 정도 일궈 낸 뒤에야, 그제야 한평생을 몸 담았던 일선에서 물러나는 명예로운 이미지가 있었다. 그러나 나의 퇴직이란 그들의 그것과는 달랐다. 명예로운 이미지 대신,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이미지가 더 적합했다.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불이 뜨거운 줄도 모르고 달려드는 불나방 같은 거였다.


귀향 역시 속세에 큰 욕심이 없는, 또는 물질주의에 대해 궁극의 달관과 통찰에 다다른 이들이 행하는 선택의 이미지가 있었다. 소풍하듯 사는 삶의 방식인 줄 알았다. 마음만큼은 미니멀리즘을 앞세워 인생을 유랑하듯 살고 싶었지만, 이런 상황에서야 역으로 더 명확히 알게 되었다. 나는 카드기에 카드가 긁히는 그 순간 짜릿한 활력이 돋아나는 사람이라는 것을. 원한다면 언제든 활력 충전이 가능하도록, 만약을 대비하며 저금을 하고 적금을 붓는다. 그렇다. 여행보다는 여생이 더 큰 관심사랄까.


현실적인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내려왔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을 한다. 이곳에 머물고 싶다고. 이곳에 머물러도 좋을 것 같다고. 종종 부모님한테 이런 생각을 스리슬쩍 꺼내 보곤 하는데 꽤 좋아하시는 눈치. 이사 내려오던 당시에는 1도 없던 그 귀향의 낭만이 이제야 내 마음에 움트고 있는 듯하다.


이제야 영겁의 굴레와 속박 속에서 미처 발견치 못했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이 풍경들을 찬찬히 바라보고 싶다. 조금 더 고요해진 이 시선으로 마주해 나가 보려 한다.



낭만적인 할머니가 되고 싶어

거절하는 힘

요즘 나는 거절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거절하지 못하고 떠안았던 일이 결국에는 ‘거절할 걸’ 하는 후회로 이어지는 일을 종종 경험하게 되면서 거절의 필요성과 중요성, 그리고 거절의 어려움 역시 절절히 느끼고 있다.


특히나 최근 다양한 외주 작업을 경험하게 되면서 ‘제대로 된 거절’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작업비가 영 맞지 않거나 작업 일정이 도통 맞지 않는 경우가 대표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하고 단호하게 거절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물론 상대에게도 이유는 있을 것이다. 예산이 적게 책정되었거나 부득이하게 일정이 조율되어 여유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상황에 내가 눈치 볼 필요가 무엇일까. 무리하게 일을 맡는 경우, 상황에 대한 감사함보다 억울함을 느끼게 된다는 걸 이제는 잘 알고 있다. 일이 바쁘면, 사람 마음이 괜히 옹졸해지니까. 결국 옹졸해지면 마음을 넉넉하게 쓰지 못하게 된다. 세상 모든 일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숨은 저변을 찾으려 들거나 비꼬아 해석하려 들고만 싶어지기도 했다. 지드래곤처럼 멋지게 삐딱하면 좋은데 나는 지드래곤이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제대로 된 거절’이 중요하다. 온전한 나를 지켜 내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프리랜서의 거절이란 여러모로 녹록지는 않다. 앞으로 다시는 그곳으로부터 일이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는 미래를 감당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불안하지만, 단호한 거절의 의사를 밝히되 친절한 마음은 지키려고 노력할 뿐이다.


제대로 거절하고 싶다. 상대와의 갈등이 두려워 먼저 저자세를 취하면 관계 안으로 파고 들어갔던 삶 대신, 어떤 갈등이라도 잘 풀어나가겠다는 의지와 어떤 관계든 기꺼이 솔직하고 진실되게 대하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 그런 삶을 살아가고 싶다. 싫은 일 앞에서 단호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갈등 앞에서 기꺼이 친절함과 차분함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힘을 단련해 나갈 것이다.


엄마의 ‘하면 된다’

나의 엄마, 최은겸 여사님에게는 그녀의 삶을 지탱해 내는 한 가지 강한 신념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하면 된다’는 믿음.


나이를 먹을수록 그 믿음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해도 안돼’라는 마음이 더 이해되는 순간들이 많아지기 마련이거든. 그래서 엄마의 ‘하면 된다’에 대한 한결같은, 어찌 보면 무조건적인 그 믿음이 존경스럽게 느껴지고야 만다.


그렇다고 해서 대책 없는 낙관주의는 아니었다. 희망을 품고 그만큼 치열히 노력한다. 그들의 삶은 언제나 치열했다. 그렇게 엄마는 테이블이 채 15석도 안 되던 콩나물 국밥집을 지금은 100석이 넘는 해산물 요리집으로 일궈 냈다. 물론 그 10여 년을 아빠도 함께해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테지만.


그래서인지, 엄마의 ‘하면 된다’는 가끔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당당하다. 뭐든 시작해 일이 진행되도록 만드는 일련의 과정에서는 치열한 노력, 경험의 반복, 성공이든 실패든 쌓이는 결과들이 있었다. 엄마를 보며 사람을 긍정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생각보다 단순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꼭 거창한 일이 아니어도 좋다. 작은 일부터 시작해볼 수 있다. 일찍 일어나기, 방 깨끗하게 청소하고 유지하기, 시들지 않도록 식물 관리하기, 9시까지는 작업실 가기 등 작은 일에 대한 성공, 성취를  늘려 가다 보면, 그렇게 쌓인 긍정적 경험이 삶의 습관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생긴 삶의 습관을 활용하여 일상 속에서 또 성공과 성취를 늘려간다. 여기서 포인트는 성취감의 크기가 아니라, 빈도수의 문제인 것 같다. 작더라도 잦은 성취! 잦은 성취로 끊임없이 에너지를 채우며 나아가 보는 것이다.


좋음과 싫음 사이

‘좋은 게 좋은 것만은 아니고, 또 나쁜 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평소 좋아하는 말이다. 그렇다. 나는 좋음과 싫음을 판단하는 일 앞에 신중하고 싶은 편이다. 좋고 싫음을 결정할 수 있다면, 그것을 최대한 보류하고 싶다. 모든 ‘좋고 싫음’이 동전을 뒤집는 일과 같이 양면적인 일 같아서. 지금 이 순간의 좋고 싫음조차 영원할 수가 없는걸. 그러니 덜 성급해도 좋았다. 성급하게 자신을 결정과 판단의 순간으로 밀어 넣지 않아도 좋았다. 힘을 빼고 상황을 관망해도 괜찮았다.


섣부른 입장 선택과 결정이 우리네 삶에서 많은 것들을 놓치게 하고, 마음을 가난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럼에도 매 순간 우리는 모든 일에 선택과 입장 정리를 강요받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냥 흐르면 흐르는 대로의 지혜,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있게 머무르는 감각으로 살아 나가고 싶다.


좋은 것을 주제로 이야기할 때보다 싫은 것을 주제로 이야기할 때 더 큰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긴 했다. 그렇지만 싫은 것을 이야기할 때마다 비어 가는 마음은 더디게 채워졌고, 또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 방법을 몰라, 좋은 것을 쓰고 그리며 애정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으로써 마음을 채웠다. 그러다가도 이 세상에 좋은 것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모르지 않는 이가 이러는 것이 위선적이라고 느껴져서, 나는 또 싫은 것을 이야기하고야 말았다. 결국에는 반복되는 이 과정 속에서 ‘현타’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었다.


여태껏 ‘좋고 싫음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 ‘자기 의견이 없는 사람’, ‘애매한 사람’, ‘회색분자 같은 사람’, ‘눈치만 보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왔다. 사실 그것들을 꽤 신경 써 왔다. 두려웠으니까. 아마도 나 역시 좋고 싫음의 양 극단에 있는 의견만이 뚜렷하고 선명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뭔가 그 사이에 서 있는 사람들은 자기 의견이나 소신 하나 없이 맹맹하고 멋없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이제서야 앞으로 가져 가고 싶은 삶의 태도가 한결 명확해졌다. 더 애매모호하게 살아야지. 애매모호한 사람으로서의 줏대와 고집을 지켜야지. 그렇게 살아가 보려 한다.


삶을 살아가는 태도

언제나 명랑할 수 있다면 좋겠다. 비록 눈물짓더라도 금세 별일 아니란 듯 털고 일어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 자신뿐 아니라 주변에도 아량을 갖는 사람이면 좋겠다. 늘 좋은 시선을 선택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결코 ‘낭만’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가 뭐래도 나는 철없는 게 아니라 낭만적인 거니까.


내 꿈은 낭만적인 할머니

미래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사실 퇴사 후 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잔뜩 긴장하여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미래를 그리는 일 자체가 겁이 나니, 그것을 그릴 여유도 용기도 많지 않았다. 그저 현재에 충실하자는 생활 모토로 하루하루 지내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 그랬다.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고 회사를 관둔 나였지만, 새로운 현생과 당장 코앞의 마감에 쫓겨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오히려 당시의 나는 ‘미래에는 이럴 것이다’ 또는 ‘이랬으면 좋겠다’와 같은 생각들에 대해 ‘부질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더 냉엄하고 살벌해진 현실 앞에 ‘무의미한 감각’ 또는 머나먼 ‘환상’처럼 느끼고 있었다.


내 인생에 낭만은 중요하다. 낭만 없이 어찌 이 현실을 지속하고 지탱해 낼 수 있겠는가.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오만은 아닐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겠다. 아무튼 질문을 마주하던 그 순간에서야 ‘자신을 믿는 행복한 어른’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어졌다. 그게 아마 내가 최종적으로 도달하고 싶은 삶의 모습이 될 것 같다. 이름을 붙이자면 ‘꿈’ 정도가 적합하겠고.


50년 뒤의 나는 어느덧 여든둘이 되어 있을 것이다(아직 감이 잘 안 오는 나이). 그러니 일단 건강했으면 좋겠다···. 친절이란 결국 건강에서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뭐니 뭐니 해도 건강한 할머니가 꼭 되어야 할 것 같다. 다양한 사람들과 언제나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젊은 친구들에게 잔소리 대신 친절한 응원을 퍼붓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딱 외할머니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기왕이면 낭만과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

그렇게 나이 들어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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