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의 휴직

   
이지영
ǻ
서사원
   
15000
2020�� 08��



■ 책 소개


“너를 위해서 살아, 너의 삶이야. 
누구도 대신 살아주지 않는, 너의 삶을 사는 거야.” 

사람들은 스물셋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그녀에게 성공한 이십 대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 켜켜이 쌓인 억울함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매일 같이 적어 내려갔던 그녀의 일기장엔 지나간 시간에 대한 후회와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 언젠가 이루고 싶은 미래에 대한 소망들로 가득했다. 

오롯이 그녀 자신으로서 살아본 시간보다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살아내려고 애쓴 시간과 조직의 일원으로서 버텨온 시간만이 그저 똑같은 매일의 하루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 스물여섯부터 시작된 짧은 여행들은 일상을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었고, 새로운 목표이자 그녀가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하는 그 무엇이 되었다. 

하지만 여행이 거듭될수록, 그녀 자신을 들여다볼수록 그녀가 원했던 꿈이 공무원이었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느껴지는 공허함에도 괴로워해야 했다. 그 공허함은 지난날 그녀가 포기해야 했던 꿈들이었고 후회였다. 이십 대에 포기해야 했던 수많은 것들 중 하나였던 영어 공부와 어학연수에 대한 갈망 또한 여행을 할수록 커져만 갔다.
 
결국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일기장엔 새로운 꿈이 적히기 시작했다. 삼십 대엔 지난 날 이루지 못했던 꿈을 이루러 떠나겠노라고. 그리하여 그녀는 그날을 위해서 학비를 모으기 시작했고, 출근 전 한 시간, 퇴근 후 두 시간, 주말 모두를 할애해 영어 공부에 전념했다. 

물론 보수와 경력이 일절 인정되지 않는 휴직을 결정하기에 앞서, 그녀가 돌봐야 할 가족과 앞으로의 커리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똑같은 고민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지만 늘 돌아오는 대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에서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이기에, 돈이 들더라도 살고 싶은 나라에서 살아보자고, 아무런 대가 없이 인생의 새로운 페이지는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런던에서 6개월을 살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런던에 두 발을 딛고 서기까지 무수한 날들을 고민과 걱정으로 보냈는데, 막상 적응을 시작하니 그 모든 시간들이 별거 아니었던 것으로, 모든 것은 자신이 만들어낸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괴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또한 용기와 스스로에 대한 믿음으로 그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온 자신이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아직 용기를 못 내고 있다면, 뭔가 결정을 못 내리고 있다면, 그녀의 경험을 먼저 들여다보자. 아마도 책의 맨 뒷장을 덮을 쯤엔 당신의 마음속에 작은 소용돌이가 일고 있을 것이다. 

■ 저자 이지영
자의 반 타의 반 스물한 살에 공시생 대열에 합류, 스물셋에 공무원에 합격하여 10년차 지방직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집안의 가장으로서 당장 먹고사는 게 급했기에 꿈이라든지 행복이라는 건 생각해볼 겨를도 없었다. 그렇게 이십 대 청춘 전부를 공직을 위해 보내고, 어느 날 문득 돌이켜보니 후회와 이루지 못한 꿈만 가득한 이십 대가 아쉬워 서른 살에 무급 휴직을 결심했다. 

그리고 런던에서 학생 신분으로 살면서 그토록 하고 싶었던 영어 공부와 대학 생활을 원 없이 즐기고, 스스로도 몰랐던 나 자신을 마주하고 돌아왔다. 지금은 일상으로 돌아와서 다음 꿈을 이루기 위해 준비 중이다. 

2015년부터 카카오 브런치 작가 AMARANTH로 글쓰기 활동을 꾸준히 해왔으며, 9,600여 명의 구독자와 소통하고 있다, 2018년 11월부터 2019년 1월까지 런던에서의 휴직 생활을 매주 토요일, 브런치 위클리매거진으로 연재했다. 

■ 차례
Prologue 

‘언젠가’를 꿈꾸던 날들 
장래희망 공무원 
아빠라고 부르지 않는 사람 
스물셋의 사회생활 
나에게 여행 
스물아홉에서 서른이 된다는 것 
휴직을 결심하다 

서른, 내 인생의 봄날 
런던에서 만난 새로운 일상 
워털루 따뜻한 우리 집 
내가 선택한 오늘 
문화충격 
지구 반대편 나의 선생님, 나의 친구 
서른 번째 생일 

그 계절 너와 나의 꿈 
네덜란드, 집 떠나 보면 알게 될 거야 
베르겐, 그 아늑함에 이끌려 
너의 소울 시티, 스톡홀름 
크로아티아, 행복을 찾아서 
이탈리아, 추억을 여행하다 

6개월의 기쁨, 슬픔 그리고 성장 
정해진 시간 속의 삶 
비행기 옆자리 독일남자 
이기적인 딸 
런던에서 얻은 것 
가까운 미래에 다시 만나 
다시 돌아온 일상 

Epilogue 

 




서른의 휴직


‘언젠가’를 꿈꾸던 날들

스물아홉에서 서른이 된다는 것

2016년에 들어서면서부터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바로 올해가 이십 대 마지막이라는 사실이었다. 주변에서 그러더라. ‘스물아홉 살에서 서른 살로 넘어갈 때 너무 싫었다고. 반대로 스물아홉 살에서 서른 살이 될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마흔이 될 때 정말 죽겠더라고.’


내가 전자에 속하게 될 줄이야. 미치도록 싫었다. 서른 살이 된다는 것이. 정말로. 세상이 다 무너지는 것 같았다. 시간을 잡아보려고 애를 써봐도 손가락 사이로 하나둘 새어나가버렸다.


가장으로서 먹고살기 위해 앞만 보고 쉼 없이 달려온 덕분에 이제 엄마와 함께 먹고 살만해졌고, 더 이상 돈 문제로 크게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야 여행도 다니고 넒은 세상에 대해서 알아가는 중인데, 아직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곧 있으면 서른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돌이켜보니 나의 이십 대 전부가 공무원 조직에서 순식간에 지나가버렸고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특별한 기술을 배운 것도 아니었고, 엄청난 업무적 성과를 거둔 것도 아니었다. 매년 새로운 해는 시작되었지만, 이곳에서 그저 똑같은 일 년을 여섯 번째로 맞이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한마디로 허무했고 억울했다.


나이 먹는 것도 싫었고 직장생활 햇수로 6년 차였던 그때, 일을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이 더 먹기 전에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해야 하는 건지도 고민이었다. 더 답답한 것은 딱히 잘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변화를 시도할 용기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저 시간이 흘러가는 걸 바라볼 수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 나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


알 수 없는 초조함과 불안함이 나를 잠시도 가만두지 않았다. 십대에도 겪지 않았던 사춘기를 지금 겪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생각이 많아지고 감정의 기복도 심해졌다.


나처럼 사춘기를 겪는 사람을 주변에서 한 명 더 발견할 수 있었다. 입사 당시부터 우수한 성적으로 주목받고, 착실한 성격으로 소위 주요 부서로만 옮겨 다니며 인정받고 있던 동기 언니였다. 남들이 보기엔 조직에서 인정도 받고 승승장구하고 있는 언니가 작년부터 사춘기를 겪고 있다고 하니 의외였다.


“나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는데 지금 그 길을 가지 못한 게 너무 후회되네. 여기서 맞지도 않는 일 억지로 하는 것도 힘들고, 원치 않는 인간관계를 주변이 신경 쓰여서 계속 유지해야 하는 것도 싫고, 눈치보고 비위 맞추는 것도 싫어. 회식도 너무 싫고. 작년부터 주변에서 결혼 안 하냐고 닦달하는 것도 부담스러워. 아직까지 결혼 생각이 전혀 없거든. 결혼하기엔 하고 싶은 게 아직 많아. 그것도 스트레스고 이것저것 일도 스트레스고. 그래서 나도 작년부터 사춘기야.”


“근데 언니, 세상에 과연,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물론 현실과 이상은 다르지. 원하는 걸 하면서 사는 사람은 몇 명 안 될 거야. 근데 말이야. 친하게 지내는 대학교 동창 두 명이 있는데 그 둘은 정말 하고 싶었던 꿈의 직장이라서 정말 만족하면서 살더라.


초등학교 선생님 친구는 애들이 자기를 좋아해줘서 너무 좋고, 자기가 원했던 직업이라서 항상 출근이 즐겁대. 학원 영어 선생님도 가르침을 주는 일이 정말 뿌듯하대. 그래서 어떻게 하면 더 잘 가르칠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한대.


근데 내가 더 부러운 건 뭔지 아니? 그 둘과 직장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그 둘은 정말로 행복해서 눈이 반짝반짝거려. 그걸 보면 아,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왜 이러고 사는 건지 의문이 들어. 그래서 그 둘한테는 내가 하는 일 이야기는 거의 안 해. 내가 초라해져서.


그리고 또 다른 친구는 승무원이 꿈이었어. 하지만 다른 길을 가게 되었고, 결혼도 했지만 승무원이 되지 못한 걸 계속 후회했지. 그래서 서른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열심히 준비하더니 승무원 시험에 드디어 합격했어. 정말 좋아하더라. 나는 아마 선생님이 되지 못한 걸 평생 후회하며 살 것 같아. 항상 가슴속에 품고 살겠지.”


어른이 되어버린 나에게 더 이상 장래희망을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장래를 꿈꾸기엔 너무 늦은 나이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 장래를 고민하고 있는 내가 비정상이라고 생각했다. 십 대에도 겪지 않았던 사춘기였기에, 나에게 닥친 스물아홉의 사춘기는 꽤나 혼란스러웠다. 서른이 되기 전에 진짜 나의 장래희망을 찾지 못하면 내 인생은 곧 끝나는 시한폭탄이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며, 내가 하는 고민이 옳은 고민이라는 정당화를 시켜야만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겉보기엔 아무렇지 않게 사회생활 잘 하는 사람이라도 저마다 가슴속에 후회는 하나씩 품고 산다는 사실은 스물아홉에서 서른으로 넘어가던 나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다.


휴직을 결심하다

스물아홉에서 서른이 넘어가는 것이 싫어 발버둥 치던 그해 6월. 런던으로 여행을 떠났다. 런던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남들이 다들 좋다고 하니까 직접 가보고 판단해보겠다는 단순한 이유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영국 문화가 무엇인지 유명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게 거의 없었다.


하지만 런던에 도착한 첫날 밤. 그때 알아버렸다. 나와 이 도시의 인연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어쩌면 나의 못 다한 꿈을 이루게 될 곳이 어떤 선택지에도 없었던 런던이라는 것을 말이다. 지금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날 밤 적은 일기엔 ‘서른 살에 꼭 이곳으로 공부하러 돌아오겠다.’고 적혀 있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선 늘 수면제에 취한 듯 숙면을 하는 게 다반사였지만 이번엔 잠도 오지 않았다. 계속해서 이렇게 일상과 탈출을 반복하며 사는 게 맞는지 지금이라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과감히 하는 게 나은지, 이십 대에 이루지 못했던 꿈을 삼십 대 언젠가에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서른 살에 당장 실행해야 하는 건 아닌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출근하자마자 예전에 같은 부서에서 일했던 상사를 만나러 갔다. 3년차의 슬럼프를 겪던 그때 나를 이끌어준 상사. 보통의 상사는 그저 멀리하고 싶은 존재였지만, 그녀는 상사라기보다는 또 다른 엄마이자 친구이자 멋진 동료였다. 동갑내기 친구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엄마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들, 그 모든 것들을 그녀에겐 스스럼없이 털어놓을 수 있었으니까.


나는 그녀에게 런던을 여행하면서 했던 생각들을, 오랫동안 가져온 고민들을 털어놓았다. “여행을 다닐수록 공부가 다시 하고 싶어져요.


사실 말씀은 못 드렸는데, 뭐 눈치 채고 계셨겠지만 대학교 다닐 때 부모님이 이혼을 하셨어요. 그땐 제가 진짜 하고 싶은 거랑 상관없이 일단 빨리 어디라도 들어가서 돈 버는 게 제일 급했어요. 운 좋게 자리는 잡았죠. 지금 같은 취업난에 어찌 보면 다행이기도 해요.


그런데 요즘 들어서 부쩍 다시 이십 대 초반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학교 다닐 때 교환학생 한 번 가보는 게 소원이었어요. 정말 그게 소원이었는데, 사건 사고가 있었고 결국 이루지 못한 꿈이 되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후회로 남아요.


여행을 다니면 그 후회가 조금은 사그라질 줄 알았어요. 그런데 더 심해져요. 그리고 더 괴로운 건 이제야 제가 진짜 뭘 하고 싶은지 알겠다는 거예요. 그걸 알고 나니까 제가 계속해서 이 조직에서 일을 하는 게 맞나 하는 의문까지 들더라고요. 사춘기 때나 했어야 할 진로 고민을 이제야 하고 있으니.


그런데 내일모레면 서른이에요. 새로운 도전을 하기에는 포기해야 하는 것도 많고 두려움도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른에라도 가지 않으면 정말 평생 후회할 것 같아요. 지금이라도 도전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제가 너무 터무니없는 꿈을 꾸는 걸까요?”


돌아온 그녀의 대답은 예상 그대로 따뜻했다. “가. 안 늦었어. 나도 가려고 생각 중인데? 작년에 딸들 따라 필리핀에서 한 달 영어 공부했는데 너무 좋더라. 그냥 뭔가 새로운 걸 배운다는 게, 도전하는 그 자체가 재미있더라. 배운다는 건 좋은 거 아니니? 나이 든 나도 지금 설레는데 너는 오죽하겠니. 그리고 너는 아직 젊어.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은데 뭐가 걱정이야. 오히려 공부하러 가서 다른 길로 성공할지 누가 아니?”


알면서도 나는 왜 그토록 망설였던 걸까. 늦었다고 생각했다. 다시 새로운 걸 시작하기엔. 그런 걸 꿈꾸기엔 너무 늦은 나이라고. 꿈을 이루기 위해 포기해야 할 것도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공부를 위해 휴직하는 제도가 있지만 활성화되어 있지는 않고 단체장의 재량이기에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운 좋게 허가를 받아 휴직이 되면 백수가 되지는 않겠다 싶었다. 책임져야 할 가족은 엄마뿐인데, 마침 동생이 집으로 돌아왔으니 걱정은 덜었다. 돈은 갔다 와서 또 벌면 되니까 잠깐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평생 벌어야 하는 것이 돈인데.


내가 두려웠던 건 휴직을 한 사이에 입사 동기들이 나를 앞질러 가는 것. 기대를 안고 공부하러 간 그곳에서 아무 것도 얻는 것 없이 평생 모은 돈만 실컷 버리고 실망할까 두려운 것. 단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책임져야 하고 포기해야 할 것들에 비하면 시도하지 못하고 그저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겨두고 평생 후회하며 살아갈 시간이 더 고통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이루지 못한 꿈으로 후회를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결심했다. 서른이 되면 런던으로 떠나겠노라고. 이루지 못했던 지난날의 꿈이었던 학생으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더 이상 내 인생에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서른, 내 인생의 봄날

문화충격

런던은 말 그대로 다문화의 도시이다. 다양한 인종, 다양한 국가에서 온 사람들, 길을 걸으면서도 영어가 아닌 다른 나라 언어를 더 많이 들을 수 있다. 그래서 가끔은 내가 영어를 배우러 왔는데 스쳐가는 일상 속에서 영어를 듣는 일이 너무 적은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 적도 있다.


어학원 수업이 보통 이른 아침에 시작해서 점심시간쯤 끝이 나는데, 아침을 거르고 오거나 적게 먹고 오는 친구들은 늘 간식을 준비해 와서 쉬는 시간에 먹곤 했다. 하루는 독일인 친구가 늘 그렇듯 쉬는 시간에 홈스테이 엄마가 도시락으로 싸준 팬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 스위스인 친구는 아까부터 배가 고프다며 중얼거렸다. 한국 사람의 관점에서는 맞은편 친구가 배가 고프다고 이야기하면 예의상이라도 “이거라도 먹어볼래?” 하고 권해볼 텐데 독일 친구는 아랑곳하지 않고 꾸준히 간식을 먹었고, 스위스인 친구도 절대 그 친구의 음식에 손을 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처음 이 광경을 접했던 날은 사실 이게 서양에서 말하는 진짜 개인주인가라는 생각에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처음엔 그 독일인 친구가 개인주의가 유독 심한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대부분의 유럽인 친구들이 그랬다.


반면에 남아메리카 친구들은 달랐다. 그들은 과자 한 조각이라도 옆 친구와 나눠 먹으려 했고, 식당을 가든 카페를 가든, 늘 함께 있는 사람을 챙겼다.


가끔은 개인주의의 긍정적인 점을 발견할 때도 있다. 한국에서는 당일 약속을 잡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는 그날 급작스럽게 만들어지는 무엇인가가 많았다. 처음엔 친구들이 하나둘 이벤트에 모이기 시작하고, 나도 초대를 받으면 덜컥 겁부터 났다. 바로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한국에서는 거절을 한다는 것이 정말 쉬운 것이 아니다. 거절을 하더라도 이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나중에 다른 이벤트에서 배제당하지 않을지 등 온갖 상황들을 가정하며 걱정한다. 그러나 이곳의 친구들은 있는 그대로 자신의 기분과 상황을 이야기했고, 초대를 한 사람도 거절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거절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다음에 다시 초대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고, 상대방이 기분 나빠 하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너는 너고 나는 나였다. 실제로 이 문화에 익숙해지고 나서는 있는 그대로 나의 기분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엄청난 권리를 획득한 것만 같았다.


17살 스위스인 친구 C가 그랬다. “난 하루도 쉴 틈 없이 새로움을 주는 런던이 너무 매력적이야. 다양한 국적과 각양각색 성격의 사람들, 그들이 만들어내는 문화가 나한테는 신선해. 그래서 난 어린 나이에 이런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선물해준 부모님께 너무 감사해. 내가 언제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을 사귀어 보겠어? 난 십 대에 이곳에 와서 보낸 시간들을 평생 기억할 거야.”


그녀의 말대로 우리는 똑같은 지구라는 행성에 살고 있는데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다른 삶의 방식으로, 다른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은 런던에서 지내는 동안 아주 손쉽게 접할 수 있는 배움이기도 했다.


나와 다른 이들을 통해서 그동안 내가 알아온 다양성의 의미를 새로 적립할 수 있었고, 나도 몰랐던 나의 편협한 사고와 마주하고, 있는 그대로 나와 다른 이들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었다. 그들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늘 어떻게 살지를 고민하는 나에게 적지 않은 영감을 주었다.


나는 이 넓은 세상 속 아주 작은 존재이며, 나보다 잘난 사람도 많고, 못난 사람도 많지만, 나와 같은 사람은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 그러니 남들 시선 신경 쓰지 말고 당당하게 나로서 살아도 괜찮다고 말이다.



6개월의 기쁨, 슬픔 그리고 성장

다시 돌아온 일상

귀에 들리는 나의 모국어, 6개월을 비웠음에도 변한 것 없는 내 방도 그대로. 무섭도록 익숙한 것들은 나를 안락하게 만들면서도 짜증나게 만들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내가 매일 걸어 다니던 거리들, 내가 설레던 날들이 하나둘 정말로 잊혀져갔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져야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이 멀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이 현실이. 이것이 바로 런던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들이 말하던 상실감이었다.


귀국 3일 만에 사무실에 출근했다. 새로운 부서였지만 원래 하던 일이니 진작 이 부서에 있었던 사람처럼 빠르게 적응해나갔다. 조직은 변한 것이 없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일하기 싫다고 호소하는 동료 친구들도 여전했다.


사람들은 6개월이라는 잣대로 나를 평가하려고 들었다. 외국에 살고 있는 자신의 친척도 영어가 어렵다는데 6개월 만에 영어가 얼마나 늘었겠냐며 비웃는 상사도 있었고, 내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잘 놀고 왔냐며 인사하는 무례한 사람들도 많았다. 예전 같으면 그들의 발언에 상처 받고 의기소침해졌겠지만 이제는 그저 한귀로 듣고 흘릴 수 있었다.


오롯이 나로서 중심이 잡혀 있었고 나 스스로가 그들이 평가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고 당당했기에. 그리고 내가 휴직을 하고 도망갔다고 소문을 내고 다닌 그분을 찾아가 그가 무례했음을 표현했다.


내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가 이제 더 이상 승진이라든지 사회생활에서의 승승장구라든지 그런 것이 아니었기에, 평생직장이라는 건 사회가 정한 분류이지 나에게는 평생직장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에, 나는 더 이상 예전처럼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표현하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다고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부터 색안경을 끼고 나를 판단하거나, 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굳이 나를 입증해보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노력을 쏟을 시간에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들에게 온전히 정성을 들이는 게 나았기에. 그렇게 가치관을 확고하게 적립하고 나니, 사무실 생활이 한결 편해졌고, 상처받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일도 줄어들었다.


예전과 달라진 내가 예전과 똑같은 이곳에서 느끼는 새로운 감정들도 꽤나 많았다. 내가 지금 한국에서 누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한국에서도 정말 부족함 없이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보고 싶었던 나라를 모두 여행으로 가보았기에 여한이 없고, 외국에서도 살아봤고, 하고 싶었던 공부도 했기에 여한이 없었다.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나의 삶을 바라보니 부자는 아니지만 전혀 부족함이 없어보였다.


그리고 나이에 대한 불안감이 없어졌다. 물론 한 살이라도 어리면 지식 습득력과 적응력도 훨씬 좋아서 목표에 도달하는 시간이 빨라지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쌓이는 인생 경험과 강한 목표의식 그리고 끈기는 한 살 더 먹어가면서 얻게 되는 선물이기에, 이제는 삼십 대라는 단어도 더 이상 낯설지가 않다.


한 때는 후회와 미련이 남는 과거가 있었고, 거기에 스스로 얽매여 현재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 과거로 인해 슬픔을 극복하고,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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