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이솜
ǻ
필름(Feelm)
   
13800
2020�� 04��



■ 책 소개

 

세상이 바라는 메뉴가 아닌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당당하게 외칠 것

 

나를 괴롭히고 아프게 하는 사람은 과감하게 끊어내고 다시 보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나’는 아니다. 아무리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결국 그조차 ‘나’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있는 그대로의 ‘민낯의 나’를 마주하는 과정을 겪어야만 온전한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결국 모든 시작은 ‘나’를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세상이, 부모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바라는 내가 아니라, 정말로 내가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바라는 메뉴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자신만의 고집스러움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 저자 이솜
사소한 것을 좋아하고
사소한 것에 쉽게 예민해진다.
언제까지고 그러한 것들을 끌어안고 싶다.
오늘을 부지런히 채우고 있을
당신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 차례
프롤로그

 

1장.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혼자만의 고요함
타인과의 관계
제자리
그냥 있는 그대로
내가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어
나인 척
의문을 질문으로
만족하지 못하면 외롭다
오롯이 혼자이기 어려운 사람
주소록을 정리해야 사람이 남는다
누군가 머물다 떠난 자리
관계 정리
인생의 맛
나를 함부로 재단하게 두지 말 것

 

2장. 지나갈 것은 지나간다
그땐 알지 못했다
인연 끝에 남겨지는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놓아야 할 때 잡아야 할 때
온전히 나를 이해하는 것부터
지나갈 것은 지나간다
잠시라도
운다는 것
쉬는 것을 잊어버리다
무작정 떠나버리고 싶었다
돌아보면 울적하고 눈을 감으면 슬퍼지는 날
거짓 자아
기억을 미련이라 착각하지 말 것
자존심이라 말하고 열등감이라 쓰는
그해 여름
기대하지 않음으로
지금에서야

 

3장. 행복은 특별한 게 아니야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
단짝 친구 1호
사소한 것들에 관심 가지기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을
잠시 멈출 수만 있다면
바탕체 같은 사람
순간의 행복
내 남자의 외조
환상과 경험의 차이
깨고 싶지 않은 꿈
세상에 빚을 지고 살아간다
함께라서 행복해
세 가지 약속
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4장. 결국 모든 건 괜찮아질 거야
상실을 인정하는 것
찬란한 우리의 봄을 위해
미련
이불 킥
불만은 대개 쓸모가 없다
내 안에 밑밥 깔기
관계의 권태
가까운 관계일수록
걱정이 많아 걱정인 사람
그래서 다행이야
행복한 순간에는 사진을 찍는다
좋은 사람 곁에 좋은 사람이 모인다
결국은 잘될 거야

 

엔딩 크레딧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혼자만의 고요함

점점 어른이 되면서 최선이라 여겼던 관계들은 낯설 만큼 멀어졌고 점점 혼자가 되는 시간이 늘어났다. 주변 사람들은 넘쳐나는 사람들과 잘도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 같은데 나만 외톨이가 된 것 같아 울적해졌다.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고 혼자만의 고요함을 버텨야 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나’에 대해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절대 나를 위해 쓰지 않았던 시간이다. 이를테면 마음에 드는 시집 한 권을 펼쳐 읽으며 좋아하는 구절을 곱씹는 일이나 따뜻한 오후의 볕을 받으며 생각과 감정을 잠시 내려놓고 무작정 시간을 내버려 두는 일.


혼자만의 시간을 온전히 즐기지 못한다면 누군가와의 관계에 치우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관계라기보다 집착이며 의존이기 때문에 멀어지려 하면 할수록 두려워진다.


누구나 혼자만의 고요함을

충분히 누릴 시간이 필요하다.

 

제자리

‘제자리’의 사전적 의미는 ‘위치 변화가 거의 없는 자리,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이다. 나는 늘 내가 있어야 할 ‘제자리’는 어디일까 생각했다. 밥솥은 싱크대 왼쪽에, 옷은 옷장 안에, 침대는 안방에,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저 물건들도 모두 제자리가 있었다.


모든 것이 각자에게 꼭 맞는 자리가 하나쯤은 있다던데 나의 제자리는 어디인지, 내가 마땅히 있어야 할 그 자리는 어디인지 항상 궁금했다. 그건 어쩌면 내 존재의 이유이기도 했다. 부모님에 대한 원망과 생각보다 쓸모없어 보이는 나 자신에 대한 분노 때문에 그렇게라도 해서 ‘그럼에도’ 여기에 두 다리 붙이고 숨 쉬고 있어야 할 이유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렇게 끊임없이 이유를 묻다 보니 오히려 자꾸만 답답해졌다.


이 세상에서 내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내가 떠나면 그 자리가 그리워지길 바라는 마음에 누구보다 독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가 떠나고 나면 그 자리가 어색해지기는커녕 누가 그랬냐는 듯 보란 듯이 채워졌다. 날 보며 열심히 산다고 칭찬했던 그들은 내가 등을 돌린 그 순간, 나를 잊어버린 것 같았다. 내가 떠나면 다음 사람은 나보다 못한 사람이기를, 그래서 떠난 뒤에도 내가 돋보이기를 은근히 바랐는데... 어느새 그 자리에는 나보다 훨씬 더 나아 보이는 사람이 대신했다.


그들은 내가 부단히도 애썼다는 것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나 없이도 잘만 굴러가는, 아니 훨씬 더 잘 굴러가는 순간들을 바라보며 아무리 애써도 거기까지인 나의 한계를 보는 것 같아 아려왔다.


그런 건 없다고, 나만의 자리, 나만 할 수 있는 자리, 내게 꼭 맞는 자리란 어쩌면 애초부터 없는 것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포기했다. 누가 보아도 욕하지 않을 만큼 적당히 그렇게 저렇게 대충 시간을 때우고 마음을 버리고 억지로 버티며 하루하루를 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기대하지 않으니 잃을 것도 없어 참 효율적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힘들어졌다. 내게 닿는 모든 인연이 그냥 의미 없이 스치는 누군가에 불과했으니, “안녕히 가세요”하며 인사하고 돌아서면 모든 것이 쓸모없게 느껴졌다. 함께 웃고 떠들며 나눴던 이야기들이 그저 그와 나 사이의 애매한 공간을 메울 정이 없어서 그저 의미 없이 채우기 바빴던 가십거리에 불과했다는 것을, 등을 돌려 한 걸음 떼는 순간 깨달았다.


어쨌든 낭비되는 감정과 열정이 없으니 괴롭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평생을 살아간다면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내가 지나온 길이 너무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아무것도 남지 않을 테니... 덜컥 겁이 났다.


밥솥도 옷도 침대도 모두 저마다의 쓰임이 있고 자신에게 맞는 적당한 위치가 있다. 배가 고프면 밥솥에 밥을 짓고, 추우면 옷을 입고 그러다가 지치면 침대에 누워서 잘 수 있는, 평소에는 알지 못하다가 정말로 간절해지면 거기 그대로 있음에 안도할 수 있는 분명한 위치 말이다.


이제는 안다. 결국 내게 있어 제자리는 내가 숨 쉬고 있는, 그러다가 웃고 울며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곳’이라는 것을.


굳이 정하지 않아도 내가 선택한 순간들이, 누군가 나를 부르면 “왜?”라고 답할 수 있는 이 순간들이 나의 제자리라는 것을.



지나갈 것은 지나간다

돌아보면 울적하고 눈을 감으면 슬퍼지는 날

유난히 감수성이 풍부했던 탓일까, 아니면 욕심과 달리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좌절이 오래 묵어서일까. 무작정 반짝일 것 같던 미래는 이제 희미한 꿈이 되었지만 자꾸만 아른거렸다.


뭐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던 막연한 기대감은 도대체 할 수 있는 게 뭐냐며 도리어 내게 삿대질했다. 나는 그저 입 안에 해묵은 말들을 웅얼거리다가 삼켜버렸다. 그 당시 내겐 주춤거리는 것만큼 편리한 것이 없었고, 그것만큼 잘 하는 것도 없어보였기에.


돌아보면 울적하고 그렇다고 눈을 감으면 슬퍼지는 그런 날을, 아니 미래를 바란 적은 없었다. 호기롭게 독립을 선언할 때만 해도 나는 부모님과 다르게, 뭔가 대단한 일이라도 이룰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잘한다고 생각했던 일들은 지나고 보니 하지 않는 편이 나을 때가 많았고, 애써 노력하는데도 풍요와 고운 결을 타고난 친구들 곁에 서면 자연스레 비교가 되어, 마음이 자꾸만 쪼그라들었다


제대로 하지 못했음을 확인하는 일, 생각했던 것보다 역량이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는 일, 내겐 그런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 그럴 때마다 크게 휘둘렸고 못난 자존심에 숨어들 곳도 마땅치 않았다. 찬바람을 맞다 보면 강해지는 게 아니라 추워질 뿐이었다. 그리고 움츠려 떨다 보니 어느새 그 꼴이 처량해졌다.


감당이 되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당장 먹고살아야만 했다. 그러한 이유로 억지로 덮어두었던 슬픔들은 차곡차곡 쌓여 나를 푸르게 물들였다. 그런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는 시선이 싫어 뾰족한 가시로 무장해야 했다. 그럴수록 더욱 외로워졌고 내 곁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잘 건너왔다고 토닥여줘도 될 법한데, 왜 나에게만큼은 유독 더 예민하고 까칠한 건지.


스스로를 돌볼 줄 모르는 마음은 꽤 살 만해진 지금에도 날 선 말들을 쏟아부었다. 나 자신을 살뜰히 아껴 본 적이 없던 터라, 스스로에게 내뱉는 비난은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그러다 밤이 되면 꿈속에서 영문도 모르는 고통에 울부짖다가, 누군가 건네는 손길에 미소 짓다가, 또 혼자 덩그러니 남으면 목 놓아 울어버렸다. 그렇게 아직 햇볕조차 들지 않는 이른 새벽, 모든 것이 조용한 그 시간에 나는 이유도 없이 눈뜨곤 했다. 하필이면 울다가 또 울다가 우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울고 있는 그때에 말이다.


눈을 떠서 먹먹한 가슴을 손이 뜨거워질 때까지 슥슥 문질렀다. 먹먹함에 마음이 저려오고 눈가에는 눈물이 차올랐다. 눈물이 마르다가도 자꾸만 눈물이 다시 나와 앞을 가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자리에서는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차라리 일어나서 물 한잔 마실까 아니면 찬바람을 좀 쐬어볼까 싶었지만,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울고 싶어지는 날엔 오히려 펑펑 울음을 쏟아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걸로 마음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다면.


자존심이라 말하고 열등감이라 쓰는

내게 있어 가난은 이제 벗어났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단어는 아니었다. 내게 있어 가난은, 턱이 아려올 때까지 어적어적 소리 내어 과자를 씹어대도 부서지지 않는 곰팡이 냄새 같은 것이어서, 도배를 새로 하는 것조차 삶의 사치처럼 느껴지던 그런 것이어서, 생각만 해도 여전히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자꾸만 마음 한 구석에서 울음이 몰려왔다. 이 언덕 저 언덕이 누군가에겐 관광 상품이겠지만, 또 누군가에겐 숨통 그 자체일 수도 있다.


결국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추억으로 기억될 장소가, 누군가에게는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아픈 기억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그러니 삶이란 글자 앞에서 지나치게 엄숙할 필요도, 지나치게 들뜰 필요도 없다.



행복은 특별한 게 아니야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행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안감에 행복하려고 발버둥치다가 괴로워진다. 그래서 기를 쓰고 행복하려 노력했다. 맛있다고 하는 맛집을 찾아가고, 옛날에 좋아하던 그림을 그리고 행복한 순간들을 기록했다.


사실은 불행하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행복하지 않다고 해서 불행한 것도 아닌데 참 무던히도 강박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괴롭혔다.


잘 살고 있다는 건, 평범한 일상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소소한 순간을 그대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고, 푸른 하늘을 눈에 담을 수 있고, 당장 해야 할 일들이 있다는 것. 나를 정말로 움직이는 것은 아주 가끔 신물처럼 찾아오는 가슴 벅찬 순간이 아니라 지금의 이 일상과 해야 할 일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매일이 축제같이 행복하지는 않아도 나는 아주 잘 살고 있다.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순간의 행복

습관적으로 찾아오는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들은 이미 내 삶의 일부 같다. 심지어 행복한 지금 이 순간마저, 눈꼴이 시려 가만히 지켜볼 수 없다는 듯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온다.


때로는 과거에 했던 많은 실패를 근거로 한 섣부른 부정적 기대로 지금 이 순간이 무너질 것이라 내게 속삭인다. 넌 그럴지도 모른다고, 지금의 이 따스함은 내겐 어울리지 않는다고, 아주 잠시 잠깐 머물렀다 흩어지는 꽃잎 같다고, 그러니 너무 좋아하지 말고 긴장하라고.


또다시 어두운 생각들과 그로 인한 불안이 지금 이 순간을 덮치려 할 때, 나는 그런 내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 옛날 붓다가 마라에게 “마라여, 내가 너를 본다” 하며 잠시 머물다 가게 한 것처럼.


나의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봄으로써 부정적인 생각들을 나와는 별개의 것으로 분리했다. 그러자 헛된 고통의 순간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부정적인 생각들이 차지했었던 공간에 서둘러 내 눈앞에 놓인, 하마터면 놓칠 뻔 했던 ‘지금’을 담기 시작했다.


아이가 잠들고 찾아온 잠깐의 휴식, 얼굴에 내리쬐는 오후의 따뜻한 햇살, 달콤한 시럽을 잔뜩 뿌린 캐러멜마키아토 한 잔... 소소한 순간이 행복으로 물든다.


세상에 빚을 지고 살아간다

문득 세상에 내 편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자의이든 타의이든, 스스로를 고립시킨 삶 혹은 지나치게 밖으로만 내몬 삶은, 채우기 위해 무엇이든 한다. 누군가는 술로 채우고 또 누군가는 알맹이 없는 스케줄로 빼곡하게 채운다. 이때는 생각이란 걸 하면 할수록 자기원망밖에 되지 않으니, 그 틈을 내어주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가끔 벌려진 틈새로 울적해질 때면, 작게 중얼거린다. 나는 세상에 빚을 지고 살아간다고. 그리고 고개를 돌려 너무 사소해서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빚들을 하나둘 세어 본다. 집 앞에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다거나 따뜻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출근을 한다거나 하는 것들. 권리처럼 받아들였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느껴질 때쯤, 울적한 기분도 한결 가벼워진다.


그렇게 부지런히 고마운 것들은 찾다 보면, 우연히 눈이 마주친 낮선 타인도 조금은 가깝게 느껴진다. 그렇게 하나둘 엉킨 타래를 풀다 보면 어느덧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이 풀리면서 따뜻해진다.



결국 모든 건 괜찮아질 거야

상실을 인정하는 것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주변 사람들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어쩌면 정리되는 게 아니라, 정리될 관계였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의 일상에 대한 지분이 사실은 상실되었음을 인정하는 것, 그게 참 어렵다. 여전히 나는 가까웠던 누군가와의 기억을 현재라 믿고 부질없는 미련을 놓지 못하고 있다. 관계에 있어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또 망각했다.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가 보고 싶은 건 어쩌면 그가 나를 다 안다는 착각이 그립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실은 그렇지도 않은데 그렇다고 믿고 싶을 만큼 지쳤는지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기울이는 술잔에 고개를 끄덕여 줄 것만 같은 환상, 나에게도 어딘가엔 그런 이가 있다고 믿고 싶은 어린아이 같은 착각.


살며시 기대를 품고 ‘잘 지내냐’는 안부로 넌지시 마음을 떠보지만, 그와 나의 온도가 같지 않음을 인지하는 순간 실망은 상처가 되어 마음을 후벼 판다. 연락하지 말 걸 뒤늦게 후회하면서.


몇 번의 ‘오랜만’이라는 시도 끝에 가까스로 기억의 추를 지금으로 돌리고 나면 유난히 허전해졌다. 어느덧 정리되어 버린 관계들에 슬퍼져서 그 미련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 관계를 놓는다고 행복했던 기억들마저 날아가는 건 아닌데. 마치 그 모든 것이 부정될 것만 같아서.


의도치 않았더라도 지나버린 관계는 그대로 둘 수밖에 없다. 결국 상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미련

미련이 남는다는 말은, 한때는 뜨거웠지만 그럼에도 아직도 태우지 못한 게 남았다는 걸 의미한다. 그저 아쉽다고 단정 짓기엔 너무 가볍고, 서글프다고 토해내기엔 무거운 것.


매 순간 최선이라 믿었고 이것이 나의 한계라 생각했기에 후회도 미련도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지나온 사람, 장소, 사건 중 어느 것 하나 미련이 남지 않는 것이 없었다. 결국 미련이란 스치는 기억의 한순간을 잡아 내 앞에 앉혀놓고 그때 왜 그랬냐고 채찍질하는 일이며, 이제 좀 놓으라고 뿌리치는 그 녀석 목에 밧줄을 옭아매고 정말 미안하지만 방법을 알지 못한다며 용서하라고 울부짖는 일이다. 그야말로 부질없는 일.


지난날을 돌아보며 그때 왜 그 정도밖에 하지 못했는지를 되뇌면 답답해지고, 자꾸만 돌아보며 괴로워하는 내 모습이 갑갑해졌다.


후회와 그로 인해 미움으로 시퍼렇게 물든 내게도 반짝이던 순간이 있었을 텐데... 결국엔 후회였을지라도 어쨌든 그때만큼은 기특하다며 마음이 몰랑거리던 순간 말이다. 그 순간이 스쳐온 기억 어디 한군데에서 웅크리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자, 못난 마음을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이 탁 풀렸다.


어설프지만 용기를 내어 마침표를 찍던 그 순간의 용기를 잊어버린 거냐고. 어쩌면 그 한때를 넘기기 위한 변명이었다 할지라도 어떻게든 버티기 위한 위로였음을 정말 잊은 거냐고.


공중에 붕 떠버린 슬픈 마음에 ‘훠이’ 하고 손을 내저었다.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인정한다는 말과 동격은 아니지만, 인정할 수 없지만 부정하지는 않음으로써 조금은 덜 슬프고 조금은 더 예쁘게 쳐다볼 수도 있다.


마음을 다하던 그때의 최선을 이제 와서 미숙하다고 탓할 수 없고, 결단을 내리던 그때의 떨림을 어리석다고 깎아내릴 수도 없다. 아직 여물지 못해 유난히 떫은 열매 같은 그때의 내겐 그것이 용기였고 의지였으며 위로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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