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으로 가는 당신

   
주현미 외
ǻ
쌤앤파커스
   
15000
2020�� 05��



■ 책 소개

 

‘비 내리는 영동교’, ‘짝사랑’, ‘추억으로 가는 당신’ 등
가수 주현미의 히트곡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 최초 공개

 

≪추억으로 가는 당신≫은 주현미가 한국 대중가요의 태동기였던 1920년대부터 2020년까지 한국가요 100년 사를 들려주고 자신의 음악 인생을 들려주기 위해 쓴 첫 에세이다. 명곡들은 공통적으로 애틋한 사연을 담고 있다.

 

이 책의 특 장점은 주현미가 데뷔 35주년을 맞이해 ‘비 내리는 영동교’, ‘신사동 그 사람’, ‘짝사랑’, ‘추억으로 가는 당신’ 등 히트곡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최초로 공개한다는 것이다.

 

전통가요는 개인의 추억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6ㆍ25전쟁, 8ㆍ15광복 등 대한민국의 굵직한 역사를 담아내며 오랜 시간 발전해왔다. 주현미는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 옛 노래와 그에 얽힌 사연을 읽고 더 단단해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전한다.

 

“이제 ‘주현미’의 노래가 아니라 ‘여러분’의 노래가 되어 함께 감상하고 따라 불렀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바람대로 책에는 원곡 가사 전문과 노래 50곡이 수록되어 있다. 소중한 사람에게 이 책을 선물하면 주현미의 노래 50곡이 수록된 QR코드와 함께 책을 읽으면서 노래도 감상할 수 있다.

 

■ 저자 주현미
어렸을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듣고 곧잘 따라 불렀다. 11살에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MBC 이미자 모창대회에 출연해 최우수상을 받았다. 1975년, 중학교 2학년 때 작곡가 정종택에게 노래 레슨을 받으며 가수를 꿈꿨지만 어머니 의 반대로 학업에 집중한다.

 

중앙대 약대를 졸업하고 약국을 개업해 운영하던 중 흘러간 히트곡을 녹음한 앨범 ‘쌍쌍파티’를 내 며 가수로 데뷔한다. 하루 평균 1만 장이 넘게 팔리며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진다.

 

‘비 내리는 영동교’(1985)와 ‘신사동 그 사람’(1988), ‘짝사랑’(1989), ‘잠깐만’(1990) 등 수많은 히트곡으로 당대 연말 가요시상식 대상 을 휩쓴다. 1980년대 대한민국 가요계에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 가며 정통 트로트의 계보를 잇고 있다. 데뷔하고 35년 간 정규앨범 19집을 낸 그녀는 명실상부 한국가요의 살아 있는 역사이자 전설이 되었다.

 

■ 저자 이반석 (정리)
‘주현미밴드’ 음악감독, 유튜브 ‘주현미TV’ 프로듀서 및 베이시스트


시끄러운 록 음악에 심취해 있던 10대를 지나 방황의 시기를 거쳐 30대 늦은 나이에 음악의 길을 선택했다. 음악 앞에 선 자신이 부끄럽지 않도록 좋은 음악을 만들고 싶었다. 선배들의 음악을 들으며 받은 감동을 누군가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뮤지션으로서 반은 성공한 것이라 생각했다.

 

2016년 가수 주현미를 만나 밴드마스터로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다. 팬들에게 받은 사랑을 보답하고 싶다고, 잊혀져가는 우리 옛 노래들을 보전하고 싶다고, 그렇게 유튜브 채널을 통해 노래들을 하나하나 기록해가기 시작했다.

 

함께 노래를 고르고, 원곡이 훼손되지 않도록 그 노래의 본디 형태와 가사를 복원하고, 그것 에 얽힌 이야기들을 찾아 나섰다. 누군가 잊고 지냈던 추억의 한 페이지를 열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저서로는 『tbs 상담받고 대학가자 결정적 코치 6,7,8』, 『지방학생들의 반란』, 『스토리로 승부하는 학종사용설명서』, 『경영·인문·사회계열 진로 로드맵』 등이 있다.
  
■ 차례
추천사
프롤로그

 

1장 청춘은 봄 맞더이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봄날은 간다│
눈물이 돌아 번질 것 같은 내 청춘에 대하여 │찔레꽃│
소쩍새 울 때만을 기다립니다 │낭랑 18세│
개나리 우물가에 사랑 찾는 │개나리 처녀│
밤비 내리는 영동교를 홀로 걷는 이 마음 │비 내리는 영동교│
희미한 불빛 사이로 마주치는 그 눈길 │신사동 그 사람│
처녀의 하소연이 물결 속에 꺼져간다 │삼다도 소식│
손수건 손에 들고 마음껏 흔들었소 │아내의 노래│
행주치마 씻은 손에 받은 님 소식은 │향기 품은 군사우편│
열여덟 딸기 같은 어린 내 순정 │소양강 처녀│
달래주는 복돌이에 이쁜이는 울었네 │앵두나무 처녀│
오라비 제대하면 누이동생 시집보내마 │처녀 뱃사공│
목숨보다 더 귀한 사랑이건만 │님│

 

2장 목이 메일 정도로 사랑했다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사의 찬미│
매일 밤 당신이 오기만을 기다립니다 │마포종점│
오작교 허물어진 두 쪽 하늘 │직녀성│
고향에 가시거든 봄소식 전해주소서 │이별의 부산 정거장│
목이 메일 정도로 사랑했다오 │짝사랑(고복수)│
내가 몰라주면 누가 아나요 │알뜰한 당신│
마주치는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짝사랑(주현미)│
당신이 얼마나 사랑하는지 나는 알아요 │추억으로 가는 당신│
젊은 화가와 아름다운 기생의 사랑 이야기 │강남달│
사나이의 첫 순정 │선창│
상처 주고 얄밉게 떠난 님아 │배신자│
운다고 아니 가고 잡는다고 머물쏘냐 │무정한 그 사람│

 

3장 어머니의 품을 닮은 노래
빛바랜 이야기 속 나의 어머니 │비 내리는 고모령│
부두로 들어오는 귀국선을 바라보며 │귀국선│
남쪽 나라 십자성은 어머니 얼굴 │고향 만리│
불러봐도 울어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불효자는 웁니다│
일상을 털고 바람처럼 떠나고 싶은 날 │방랑시인 김삿갓│
금강에 흐르는 슬픈 전설 │백마강│
조선인은 한때 엽전으로 불렸소 │엽전 열닷 냥│
피리를 불어주마 울지 마라 아가야 │아주까리 등불│
한 송이 눈을 봐도 고향 눈이요│고향설│
삶이 힘들 때 잠시 쉬어가세요 │물방아 도는 내력│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유화│

 

4장 추억으로 가는 당신
열아홉 처녀 가슴이 타네요 │산처녀│
노래를 부르면 그리움과 만난다 │월악산│
인생은 한 조각 구름 같은 것 │여정│
바다새의 노래 │해조곡│
환희에 빛나는 숨 쉬는 거리 │감격시대│
꽃 서울은 본디 하루삔이었소 │꽃마차│
떨어지는 꽃은 강물 위에서 세상을 안다 │낙화유수│
헤어지던 그 인사가 야속도 하더란다 │비 내리는 호남선│
님의 바람 살랑 품에 스며드네 │봄바람 님 바람│
신사의 품격을 보여준 위키리의 탄생 │눈물을 감추고│
가버린 그 사람을 못 잊어 웁니다 │파도│

 

찾아보기
저자 소개 

 




추억으로 가는 당신


청춘은 봄 맞더이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봄날은 간다│

“이 노래를 들으면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과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어린 시절 장터에 나가 계신 어머님을 그리며 부르던 노래입니다.”, “오래 전 고국을 떠나와 멀리 호주에서 살고 있는데요, 이 노래 한 소절, 한 소절에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위로받곤 합니다.”


유튜브 채널 ‘주현미TV’를 통해 많은 구독자 분이 이 곡을 신청했습니다.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지나간 청춘을 떠오르게 하는 이 곡, ‘봄날은 간다’는 6·25전쟁이 휴전으로 멈춘 뒤 슬프고도 암울했던 시기에 탄생했습니다. 아름다운 노랫말 속에 슬픔을 감추고 있어서인지,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대중가요의 노랫말로 선정되기도 했지요. 서정적이면서 한이 서린 가사는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아련하게 적셔옵니다.


가사를 쓰신 손로원 선생님의 일생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미술을 좋아했던 한 청년이 작사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40년대 말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어수선한 시국을 피해 조선 팔도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시를 썼습니다.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한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방랑을 이해하면서도 아들을 늘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결국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유언처럼 남긴 말이 이 노래의 모티프가 되었습니다.


“로원이 장가드는 날 나도 연분홍 저고리와 치마를 장롱에서 꺼내서 입을 거야. 내가 열아홉에 시집오면서 입었던 그 연분홍 저고리와 치마를….”


손로원 선생님은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통한의 눈물을 흘리다가 1953년 전쟁 막바지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봄날은 간다’의 가사를 완성하게 됩니다.


이 노래를 부른 백설희 선생님은 가수 전영록 선배님의 어머님으로 195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셨던 분입니다. ‘물새 우는 강 언덕’,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청포도 피는 밤’등의 히트곡을 남겼고, 1953년 작곡가 박시춘 선생님을 만나 최대 히트곡인 이 곡을 발표하게 되었지요.


슬프고 허탈한 감정을 체념한 듯 담담하게 풀어내 노래를 더욱 빛나게 했습니다.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후배 가수들에 의해 여러 차례 리메이크되기도 했지요.


아주 오래 전부터 저도 이 노래를 부를 기회가 참 많았습니다. 숱하게 불렀던 이 노래가 이제야 마음속 깊이 다가오는 것 같아요. 젊은 날엔 봄인 줄도 모르고 바쁘게 살았던 저 자신을 돌이켜보면 이 노래의 가사가 더 애잔하게 다가옵니다.


연분홍 치마, 새파란 풀잎, 열아홉 시절은 세월 따라 흘러갑니다. 우리는 그 빛나던 청춘을 슬픈 마음으로 떠나보냈지만, 다시 꽃이 피고, 별이 뜨고 새가 날 때를 기다립니다. 봄은 가지만 또 다시 봄은 오니까요. 우리 가요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봄날은 간다’, 눈을 감고 따라 불러보면 좋겠습니다.


밤비 내리는 영동교를 홀로 걷는 이 마음 │비 내리는 영동교│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겠지만, 어느 가수든지 데뷔곡에 대한 애정은 남다를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준 노래이자 데뷔곡인 ‘비 내리는 영동교’를 이야기하자면 앞서 발표된 앨범인 ‘쌍쌍파티’를 짚고 넘어가야겠네요.


1984년에 대학을 졸업한 후 서울시 중구 필동에 한울약국을 개업하고 정식으로 약사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작곡가 정종택 선생님께서 저를 찾아오셨어요. 어렸을 때 저를 음악의 길로 인도해준 분이시고, 1975년 중학교 1학년 학생일 때 선생님의 곡들로 앨범을 제작하기도 했답니다.


그렇게 정종택 선생님의 권유로 따라간 녹음실에서는 ‘쌍쌍파티’를 작업하고 있었는데 원래 노래를 부르기로 예정되었던 조미미 선배님이 못 오시는 바람에 제가 대타로 투입되었지요.


그날 제가 녹음실에 따라가지 않았더라면 가수 주현미의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었을지 몰라요. 그렇게 하루 만에 20여 곡을 부르고 밤늦게 집에 들어가니 가족들은 제가 갑자기 사라졌다고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고 합니다.


얼마 후 남대문시장을 지나던 중 우연히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와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들어보니 제 목소리가 리어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어요. 장사하던 아저씨는 요즘 유행하는 노래라며 저한테도 사서 들어보라고 하셨지요. 제가 부른 노래라고 설명해주자 못 믿겠다는 말에 그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1984년 말 ‘쌍쌍파티’가 큰 인기를 끌게 되고 오아시스레코드로부터 신곡 취입을 제안 받았습니다. 이듬해 3월에 ‘비 내리는 영동교’, ‘그 정을 어이해요’등이 실린 첫 정규앨범을 발표하면서 공식적인 가수로서 활동을 시작하게 되지요.


오아시스레코드의 전속 작곡가로 계셨던 남국인 선생님께서 작곡을, 부인인 정은이 선생님께서 가사를 붙여주신 ‘비 내리는 영동교’는 3/4박자 왈츠 형태의 트로트 곡으로 서울의 강남 일대가 개발되던 시대의 배경을 담고 있는 노래입니다.


성동구 성수동과 강남구 청담동을 이어주는 영동대교를 소재로 한 곡이에요. 1973년 영동대교가 지어질 당시 ‘강남’이라는 명칭은 없었고, 한강 아래에 유일하게 개발되어 있던 영등포의 동쪽을 ‘영동’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가사 내용을 보면 강남의 발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연인과 이별한 여인이 슬퍼하며 밤비 내리는 영동대교 위를 걷고 있는 내용이니까요.


‘비 내리는 영동교’를 부르면서 제게는 믿지 못할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감사하게도 그해 연말 KBS, MBC에서 여자 신인가수 상을 수상하게 되었지요. 데뷔 앨범을 발표할 때만 해도 얼마 안가서 가수 주현미는 잊혀질 테니 약국 일을 놓지 않고 병행할 계획이었어요. 하지만 예상 외로 많은 사랑을 받은 덕분에 3월에 앨범을 발표하고 그해 9월에 학교 후배에게 약국을 넘겨주고 전업 가수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참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많은 분들로부터 응원을 받으며 가슴이 벅차올라 잠 못 이루는 나날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3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크나큰 사랑에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까요? 슬플 때는 위로해주고 기쁠 때는 같이 기뻐해줄 수 있는 친구 같은 가수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목숨보다 더 귀한 사랑이건만 │님│

영화의 삽입곡이 히트하는 경우는 아주 많습니다. 하지만 노래를 토대로 영화가 만들어지는 경우는 드문데요. 여기서 소개할 노래 ‘님’은 가사에 나오는 구절을 제목으로 가져와 ‘창살 없는 감옥’(1963)이라는 영화로 제작됩니다. 물론 노래 ‘님’이 영화의 주제곡이 되지요.


노래 속 이야기는 작사가인 차경철 선생님의 경험담입니다.


선생님의 고향은 경상남도 울주입니다. 소꿉친구인 윤희와 함께 초등학교를 다니며 풋풋한 사랑을 키웠어요.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떨어지게 된 두 사람은 방학 때마다 만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집안에서 혼사를 결정하는 일이 자연스러웠기에 차경철 선생님의 할아버지는 일찍부터 친구의 손녀를 손자와 혼인시키기로 점찍어두고 있었다고 해요. 두 사람은 괴로워하며 동반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합니다.


차경철 선생님은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도망칠 방법을 찾다가 결국 자원입대합니다. 입영열차에 오르기 전날 밤, 윤희에 대한 그리움을 적어 내려가고 그렇게 ‘님’의 가사가 탄생했습니다. 이 가사를 부산에 있는 도미도레코드에 보내놓고 입대하지요. 도미도레코드의 사장인 한복남 선생님은 그 노랫말에 멜로디를 입히고 박재란 선생님의 노래로 음반을 취입합니다.


박재란 선생님은 당시 ‘꾀꼬리 가수’, ‘삼천만의 연인’이라는 칭호를 얻으며 1960년대 우리 가요의 격을 끌어 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한 분입니다. 가창력과 미모에다가 뛰어난 곡이라는 삼박자가 모두 갖추어지자 ‘님’은 그야말로 대히트하게 됩니다.


어느 날 군부대 위문공연차 전방의 한 부대를 찾은 박재란 선생님은 무대에서 예정에 없던 이야기를 꺼냅니다.


신곡 ‘님’을 들려드리기 앞서 이 노래의 가사를 써주신 차경철 선생님을 꼭 찾고 싶습니다. 2년 전 입대하면서 이 노래의 가사를 써서 작곡가 한복남 선생님께 보내셨다고 합니다.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상병이 되셨을 텐데 이 부대에서 근무하신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같은 시간 상병 계급장을 달고 있던 차경철 선생님은 보초 근무를 서며 벽에 걸린 스피커를 통해 자신의 노래 ‘님’을 듣게 됩니다. 얼마나 슬프고 애달팠을까요. 노래에 담긴 동화 같은 사연은 진심을 담은 노래였기에 우리의 심금을 더욱 울립니다.



어머니의 품을 닮은 노래

불러봐도 울어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불효자는 웁니다│

‘불효자는 웁니다’를 다시 부른다고 하니 참 많은 분이 좋아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5세에 어머니를 잃고 지금 중년의 나이가 되었는데 흐릿하게 기억나는 어머니의 얼굴이 이 노래만 들으면 더욱 사무치게 그립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은 효도하겠다고 돈을 끌어 모아 가게를 차렸는데 결국 빈털터리가 되어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다고 고백했어요. 이 노래만 들으면 부모님이 생각나 가슴이 먹먹해진다고요.


광복 이전에 ‘어머님’이란 단어가 들어간 노래는 몇 곡 되지 않았음에도 1940년에 발표된 진방남(반야월 선생님의 예명 중 하나) 선생님의 ‘불효자는 웁니다’는 세월이 흘러도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애달픈 사모곡(思母曲)으로 남았습니다.


실제로 진방남 선생님의 초기 녹음 레코드를 들어보면 슬픔이 섞인 목소리를 그대로 들을 수 있는데요. 녹음하러 일본에 갔던 선생님은 그곳에서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습니다. 스튜디오 밖으로 나와 펑펑 울던 선생님은 녹음을 중단하고, 그 다음날 울음 섞인 목소리로 녹음을 마쳤다고 해요.


선생님의 진심 어린 노래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훗날 저를 포함해 많은 후배 가수들에 의해 다시 불렸어요. 1998년에는 악극으로 제작되어 세종문화회관에서 초연되었을 때 24회 전회 매진이라는 놀랄 만한 기록을 세웁니다.


3절에서 “이국에 우는 자식 내 몰라라 가셨나요.”는 원래 작사 되었을 때에는 “청산의 진흙으로 변하신 어머니여.”였다고 합니다. 바다 건너 일본에서 어머니의 타계 소식을 들은 진방남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가사를 바꿔 불렀습니다. 고향을 떠나는 아들을 배웅하기 위해 마산역에서 손을 흔들어주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열창했을 선생님의 마음이 애절하게 전해집니다.


독일의 속담에 “한 아버지는 열 아들을 키울 수 있으나 열 아들은 한 아버지를 봉양키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의 효성이 아무리 지극해도 부모님에게는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이 노래와 함께 어머니의 품을 떠올리며 소중한 기억을 곱씹어보면 좋겠습니다.


삶이 힘들 때 잠시 쉬어가세요 │물방아 도는 내력│

6·25전쟁 직후 1954년에 발표된 ‘물방아 도는 내력’은 지금까지도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곡입니다. 그 당시 우리 국민들의 좌절과 슬픔을 간결하고 소박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공감을 끌어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작곡가인 이재호 선생님은 경쾌하고 친숙한 곡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매만져주는 분이셨습니다.


모두가 동경하던 서울의 삶, 상경해서 인생 역전을 꿈꾸던 사람이 많던 시절이었습니다. 반면에 벼슬도, 명예도, 서울도 싫다며 고향에서 편안한 삶을 누리고 싶어 하던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 시대상을 반영한 노래들은 고향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을 안고 있습니다.


이 노래를 부르신 박재홍 선생님은 1924년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나 해방 후 1947년 오케레코드가 주최한 콩쿠르를 통해 가수로 데뷔했습니다. 선생님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20대 청년기에 6·25전쟁을 겪으며 남북이 갈라지는 것을 볼 때까지 숱한 고초와 슬픔 속에서 노래를 불러야 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고 부산으로 피난을 간 선생님은 도미도레코드가 ‘백마강’을 성공시킨 그 해에 이 노래 ‘물방아 도는 내력’을 물방아라는 단어가 맞춤법 개정을 거치면서 물레방아로 바뀌게 되고, 이후에 발매되는 앨범에는 제목이 바뀌어 표기됩니다. 그래서 지금도 두 가지 제목을 모두 사용하고 있습니다.


1절 가사에는 ‘기심’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우리가 흔히 ‘길쌈’이라고 잘못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 가사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문맥을 따져 볼 때 기심으로 부르는 것이 옳습니다. 길쌈이라는 말은 무명, 모시 등의 직물을 짜는 것을 말하는데 낮에 밭에 나가서 할 일이 아닌 것이지요.


이 노래가 발표되고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현실에 쫓겨 살다보니 지나간 삶이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네요. 우리에게는 저마다 꿈꾸는 삶의 모습이 있잖아요? 여러분들은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 언제였나요?


자연을 벗 삶아 풍류를 즐기며 유유자적하는 삶이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지나요? 이 노래를 부르며 가사 속에 담긴 삶의 향기와 여유를 느껴보세요. 노래와 노랫말을 감상하면서 우리 모두 잠시나마 작은 위안을 얻기를 바랍니다.



추억으로 가는 당신

가버린 그 사람을 못 잊어 웁니다 │파도│

‘파도’는 참으로 슬픈 곡입니다. 노랫말이 주는 정서가 그렇기도 하고 이 노래를 부른 배호 선배님의 삶 또한 우리를 눈물짓게 하거든요. 강릉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주문진 끝자락에서 소돌어촌 마을을 만나게 됩니다.


마을 전체가 소가 누워 있는 형상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곳에는 바위를 만지며 소원을 빌면 아들이 생긴다는 ‘아들바위’가 있는데요. 바다와 맞닿는 아들바위 공원에는 ‘파도’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배만금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중학교 시절 배신웅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배호 선배님은 1942년 중국 산둥성에서 출생했습니다. 광복군에서 활동하던 아버지를 따라 1945년 광복 후 고국으로 왔는데, 줄곧 가난에 시달리며 힘든 유년 시절을 보내야 했어요.


인천 수용소에서 1년을 보낸 후 서울 창신동의 한 적산가옥(敵産家屋)에 머물며 창신 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적산가옥은 전쟁 후 버려진 일본인 소유의 주택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빼앗긴 재산을 되찾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네요.


선배님은 1955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부산에서 중학교 시절을 보내다 이듬해 다시 상경하여 외삼촌인 김광빈 선생님의 밑에서 음악 인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MBC의 초대 악단장 역임하기도 했던 김광빈 선생님의 악단에서 드럼을 연주하며 음악적인 자질을 키우기 시작했고, 이후 12인조 ‘배호와 그 악단’을 결성하며 낙원동의 프린스 카바레에서 활동합니다.


1963년 21세의 나이에 배호라는 이름으로 가수 활동을 시작하며 데뷔곡 ‘굿바이’, ‘사랑의 화살’을 발표한 후, 1966년 신장염이 발병해 병석에 누워서 발표한 ‘누가 울어’,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람’, ‘돌아가는 삼각지’ 등은 큰 사랑을 받게 되지요.


1967년부터 3년 동안 각 방송사에서 가수상을 휩쓸며 명실공히 당대 최고의 가수로 우뚝 서게 됩니다. 그러나 1971년 29세의 젊은 나이로 ‘마지막 잎새’를 발표한 후 그 해 11월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아직까지도 11월이 되면 용산 삼각지역에 있는 ‘돌아가는 삼각지’ 노래비를 찾아 그를 추모하는 팬들이 많다고 합니다. “서양에는 베토벤, 동양에는 배호”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짧은 인생 동안 한국 가요계에 큰 획을 그은 불멸의 가수로 남아 있습니다.


‘파도’는 마치 배호 선배님의 인생을 함축적으로 그려낸 노래처럼 느껴지기에 더욱 슬프게 다가옵니다. ‘파도’와 얽힌 수많은 이야기 중에 저를 울린 사연이 있어 소개 합니다.


80년대 초반, 제가 20대이던 시절 첫 사랑과 함께 송도 해수욕장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이루지 못한 사랑에 긴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후회가 남네요. 진심을 전하지 못한 채로 서서히 이별을 하게 되었고, 몇 년 후 그녀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또 다시 시간이 흘러 성격 차이로 이혼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마음이 깨지는 것 같이 아팠답니다. 최근에는 그녀가 병마와 싸우고 있다고 들었는데, ‘운명이란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찢는구나.’한탄하게 되었지요.


슬픈 사랑에 혼자서 술잔을 기울이던 젊은 시절, 늘 즐겨듣던 배호의 ‘파도’를 주현미 씨의 목소리로 듣고 싶습니다. 제 마음을 대변하는 노래 같아 지금도 즐겨 부르고 있답니다. 그 사람이 꼭 건강했으면 좋겠네요.


감히 제가 그분의 마음을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슬픈 운명, 슬픈 사랑의 마지막은 해피엔딩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누군가 “소설책의 마지막 페이지는 책 한 권의 무게와도 같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거친 파도 같은 인생 속에서 행복의 의미를 단정 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 모두의 마지막 페이지는 지나온 삶의 무게를 견디고도 남을 만큼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