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큐 마이 펫

   
안나 가요(역:김유경)
ǻ
빅북
   
15000
2020�� 04��



■ 책 소개


외로움에 지친 펫팸족을 위한
셀럽들이 전해주는 소소하고도 진솔한 영혼의 메시지


우리 인간 세태가 복잡다단하고 각박해질수록 사람들은 잉여시간을 소비하기 위한 수단을 찾게 되고, 또 의지할 무언가를 찾게 된다. 그 대상이 유명한 연예인이든, 스포츠스타든, 아니면 반려동물이든 말이다. 오늘날 반려동물은 우리 인간들에게 둘도 없을 만큼 친숙한 벗이고, 영혼의 짝이 되었다. 비교적 몸집이 작고 귀여우면서도 사람을 잘 따르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정서적으로 친근감과 안정감을 주기 때문에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구의 추이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국내에는 아직까지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이나 관념이 미흡한 편이나 실제로 최근에는 반려동물 관련 산업이 급증하고 있는 추세이다. 특히 관련 책이나 전문서가 부족한 편이다. 따라서 이 책의 출간을 통하여 반려동물에 대한 관심과 반려동물의 가치와 중요성을 간접적으로 일깨워 주게 될 것이다.


수 세기 동안 인간과 동물은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도 반려동물들과 영혼의 단짝으로 삶뿐만 아니라 마음을 나누곤 했다. 피카소는 럼프라는 이름의 닥스훈트에게 늘 마음이 약했고, 모차르트는 기르던 찌르레기를 무척 사랑했고, 프리다 칼로는 자신을 정원에서 뛰노는 새끼 사슴으로 표현했다. 또, 정신분석가가 키운 차우차우인 조피는 프로이트가 상담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자신의 강아지 핀카를 바탕으로 유명한 작품을 썼다.


■ 저자 안나 가요


■ 그린이 캐서린 퀸(Katherine Quinn)
뉴질랜드 일러스트레이터로 전통적인 일러스트와 디지털 일러스트 영역 모두 조화를 이루며 작업을 하고 있다. 주로 다양한 빈티지 종이를 사용해 아크릴과 수채화 연필로 주로 작업을 하며 그녀의 독특하고 매력적인 예술 세계는 숲, 동물과 시골에서 영감을 얻었다. 뉴질랜드 여러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최근에는 패턴 디자인 쪽에서도 왕성히 활동하고 있다.


■ 역자 김유경
멕시코 ITESM 대학과 스페인 카밀로호세셀라 대학에서 조직심리학을 공부했다. 인사 관련 업무를 하다가 지금은 통·번역가로 활동 중이며, 스페인어권 작품을 독자들이 더욱 자주 만났으면 하는 꿈을 갖고 있다. 번역한 작품으로는 한·서 번역서인 『EL TECHO ROJO DEL CHALCO(찰코의 붉은 지붕)』와 『행복의 편지』『세상을 버리기로 한 날 밤』『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기술』『여기 용이 있다』『경이감을 느끼는 아이로 키우기』『카를로스 슬림』『가끔은, 상상』『공주는 왜 페미니스트가 되었을까』『꿈꾸는 교사, 세사르 보나의 교실 혁명』『동물들의 인간 심판』『어느 칠레 선생님의 물리학 산책』『나는 커서 행복한 사람이 될 거야』『엄마가 한 말이 모두 사실일까』『1000마리 공룡을 찾아라』『돈은 어디에서 자랄까?』『공주는 왜 페미니스트가 되었을까?』『언어 천재의 생각법 (출간 예정)』등이 있다.


■ 차례
01 호크니의 삶을 풍성하게 채워준 또 하나의 가족, 스텐리와 부기


02 프리다 칼로가 사랑했던 파란집의 꽃사슴, 그라니소


03 앤디 워홀 말년까지 떨어질 수 없었던 친구, 아치


04 클림트의 쌍둥이영혼, 캇츠


05 버지니아 울프의 영감을 채워준, 핀카


06 에드가 앨런포의 시에 영감을 준 디킨스의 까마귀, 그립


07 도로시 파커의 기행이 빚어낸 선물, 카이만


08 살바도르 달리의 표범무늬 고양이, 바부


09 아인슈타인의 이색적인 생일 선물 소포, 비보


10 정신분석가인 프로이트의 조수, 조피


11 너무나 저명한 뉴턴의 보석, 다이아몬드


12 피카소의 개구쟁이 친구, 럼프


13 모차르트가 베풀어준 성대한 장례식의 주인공, 미스 빔


14 헤밍웨이의 행운의 고양이, 스노우볼


15 엘리엇의 특별한 존재, 버스토퍼 존스, 몽고제리, 젤리로럼


16 색의 마술사 마티스를 탄생시킨 검은 암코양이, 푸체


17 조각가 프로이트의 완벽한 두 모델, 플루토와 엘리


18 라거펠트에 버금가는 매스컴의 유명 인사, 슈페트


19 조지아 오키프에게 예술적 영감을 준, 보와 치아


20 파울 클레와 그의 백의의 천사, 빔보 


 




땡큐 마이 펫


호크니의 삶을 풍성하게 채워준 또 하나의 가족, 스탠리와 부기

“남다르게 보고, 남다르게 생각하라!”


호크니와 그들은 그냥 평범한 가족이었고, 그들은 그 예술가의 눈에 따라 수영장, 풍경 및 사람들이 예술 작품으로 변해가는 세계에 살고 있을 뿐이었다.


1993년 드디어 스탠리와 부기가 예술 작품으로 변신할 차례가 돌아왔다. 이 화가는 웅크린 채 눈을 한쪽만 뜨고 있는 강아지들을 그리기 위해 집 마당에 이젤을 놓았다.


하지만 여느 할리우드 개들처럼 호크니가 바라보는 특별한 시선에 익숙해진 그들은 지루한 표정으로 포즈를 취하였다.


조금씩 호크니의 집은 여기저기 화려한 ‘닥스훈트의 전당’으로 변해갔다. 이들의 사진에서부터 유명한 닥스훈트의 초상화 또는 액세서리, 그리고 딱 봐도 닥스훈트인 긴 몸매의 작은 조각상들까지 매우 다양했다. 이 개들은 음식과 사랑을 과분할 정도로 받으면서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할리우드의 다른 반려동물들만큼 부유하게 지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들에게 개들을 위한 별자리를 읽어주지 않았고, 개를 위해 마사지를 해주거나 개들을 위한 채식주의 음식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의 팝 아티스트이자 무대연출가인 데이비드 호크니는 이웃집 닥스훈트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물론 그는 개를 좋아했지만, 여행을 너무 자주 가는 바람에 한 마리도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 그러던 중 그는 개를 키우면 여행을 덜 가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결과 그의 집에 스탠리(Stanley)라는 개를 먼저 입양하였고, 2년 후 독립적인 성격의 부기(Boodgie)도 들여오게 되었다.


1980년 무렵에 호크니는 할리우드 힐스에 살게 되었는데 그는 가깝게 지내던 친구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 개들은 그가 안 좋은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또한 많은 위로의 시간을 함께 보내주었다. 그는 개들과 함께 해변이나 인근 공원으로 나가거나 작업실에서 몇 시간씩 함께 보내곤 했다. 그렇게 늘 셋이서 함께하곤 했다.


스탠리는 주인이 일어나면 스프링처럼 곧바로 일어났지만, 부기는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다가 먹거나 산책하거나 잠을 잘 준비를 할 때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외가 있다면 스탠리는 비가 올 때엔 발도 보이지 않고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1937-생존)

데이비드 호크니는 존재 자체가 하나의 장르가 될 만큼 현대 미술의 거장으로 널리 알려져 왔으며, 다큐멘터리 영화 <호크니>로도 연출되기도 하였다.


그의 예술 세계를 들여다보면 그림부터 사진, 콜라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법이 사용되는 것이 놀랍다.


그러나 그의 시리즈 <개의 날들(1995)>을 보면 그의 기법에서가 아니라 주제에 놀라게 된다.


그림 속에서 스탠리와 부기는 마흔 다섯 가지 다양한 형태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물론 이 그림은 판매용이 아니었다. 이 예술가는 어떻게 그의 멋진 친구들과 이런 친밀감 있는 순간들을 포착하고 만들 수 있었을까?



프리다 칼로가 사랑했던 파란집의 꽃사슴, 그라니소

“나는 나 자신을 그린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도 자주 외롭고 또 무엇보다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가 나이기 때문이다.”


프리다 칼로는 독특한 화풍뿐만 아니라, 생활 방식과 머리 장식, 옷차림에서도 특이함을 보여주는 멕시코 화가다.


그녀는 특히 자화상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짙고 긴 눈썹과 십 대 때 교통하고를 당해 수술 받은 상처가 가득한 자신의 형상을 많이 그렸다.


프리다 칼로는 영감의 원천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았다. 그래서 자신을 모델로 삼아 수많은 자화상을 남겼다.


칼로가 키웠던 반려동물에는 고양이, 개, 앵무새, 독수리, 사슴, 거미원숭이, 다람쥐 등 다양하였는데 그녀가 동물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마치 낙원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그녀는 멕시코시티의 카사 아술에 있는 ‘파란색의 집’에서 태어났으며, 평생 그곳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세계적인 여류 화가의 집에 이보다 어울리는 이름이 또 있을까! 교통사고로 인하여 자유롭게 움직이기 어려웠던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곳은 집 안뜰이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화가였던 남편 디에고 리베라는 그곳을 이국적인 반려동물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자연이 가득한 공간으로 바꾸어주었다. 디에고는 그 안뜰에 작은 아즈텍 피라미드 모형을 지어주었는데, 그곳에 그녀가 키우던 물수리의 배설물이 쌓여 지저분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는 화가 나서 그 물수리를 ‘헤르트루디스 흰 똥’이라고 불렀다.


프리다는 그곳에 있는 모든 동물을 잘 돌봐주었다. 버릇없는 원숭이들을 교육하거나 작은 앵무새들에게 먹이를 주거나, 아즈텍 종족의 희귀한 개 중 하나인 솔로틀(아즈텍 언어로 ‘개’라는 뜻이고, 번개와 불의 신이며 개의 머리를 한 신으로 그려진다)과 함께 놀았다.


그리고 특히 집에서 키우던 애교가 많은 작은 꽃사슴인 그라니소(Granizo, 스페인어로 ‘우박’이라는 뜻)에게 많은 애정을 쏟았다.


그라니소가 자라면서 뿔이 생겼지만 그녀가 침대 곁에 두고 안아주는 데는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동물들은 프리다의 친구일 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서 그녀의 감정을 표현하는 대상으로서의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다. 특히 그라니소는 그녀의 가장 중요한 두 작품에 나온다.

<상처받은 탁자>에서는 흰점이 난 새끼 사슴으로, 6년 후 <상처 입은 사슴>에서는 성장한 사슴으로 등장한다. 더는 의학적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 그녀는 이 그림에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자신의 모습을 상처 입은 사슴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프리다는 디에고와의 결혼생활에 항상 허기졌지만 그리움 그 자체일 뿐이었다. 그래도 디에고의 아내가 된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디에고가 다른 여자들과 관계를 맺더라도 그냥 내버려두었다. 사실 디에고는 그 어떤 여자의 남자도 아니었고 그렇게 될 수도 없었으니까! 프리다에게 사랑은 증오였고 한편으로는 기쁨이기도 했다.


디에고는 한 여름의 폭설이었다. 황당하고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이 흠뻑 젖어 떨고 있어야 하는. 난 그저 쏟아지는 눈을 맞고 서 있었다. 피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 눈보라를 사랑했으니까!


삶의 고통의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그림으로 그 고통의 순간을 치유했던 프리다 칼로, 1954년 폐렴 악화로 죽어가던 칼로는 죽음을 예감하듯 마지막 날 일기장에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이라고 썼다.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나면서 다시 한 번 세계인들에게 재발견되곤 했으며, 그녀의 그림이 표현하는 솔직 담백한 여성성과 섹슈얼리티는 후세의 페미니스트들이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녀의 삶은 다양한 책과 2003년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제 59회 베니스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

그녀는 6살이 되던 해에 소아마비에 걸렸으며, 열여덟 살이 되던 1925년 그녀의 첫사랑과 함께 탄 버스 안에서 대형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 사고는 너무 중상이어서 그녀에게 평생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걷고 움직이기가 힘들어졌고, 아이도 가질 수 없게 되었으며, 서른두 번의 수술을 해야 할 정도였다. 그녀는 늘 그림을 그렸던 그 침대에서 그렇게 점점 쇠약해져 갔다. 그러나 그녀의 그림과 수많은 동물들은 그녀가 고통을 견디는 데 가장 큰 자양분이 되어주었다.



앤디 워홀 말년까지 떨어질 수 없었던 친구, 아치

“대통령과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마시는 코카콜라도, 부랑자가 마시는 코카콜라도 모두 같은 것이며, 똑같이 맛있다.”


팝아트의 아버지인 앤디 워홀은 피츠버그에서 보낸 어린 시절부터 고양이만 키웠기 때문에, 개를 키우는 일에 큰 확신이 없었다.


그러나 1973년 크리스마스, 검고 짧은 털이 난 닥스훈트인 아치(Archie, 오소리 사냥꾼‘이라는 뜻)가 그의 삶으로 들어와 그의 인생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당시 앤디 워홀은 이미 미국 문화계에서 삽화와 예술작품을 대중화시킨 팝아트계의 혁명적인 예술가였다.


그는 하나의 소재를 다양한 면과 색으로 표현한 이미지를 대량으로 그렸다.


캠벨 수프 통조림, 코카콜라 병, 코믹 스트립(서사 만화, 이야기 만화)등 주로 제품이었지만, 할리우드 배우, 예술가 또는 수많은 동물들도 그림의 소재였다. 그것들은 전통 회화와는 전혀 달랐지만 매우 친근하고 이해하기 쉬워서 많은 사람들이 집에 그의 그림을 걸어두고 싶어 했다.


유명한 예술가로서 그는 많은 행사에 초대를 받았는데, 그럴 때마다 절대 떨어질 수 없는 분신처럼 작은 아치를 팔에 안고 다녔다. 고급 식당에 갈 때는 아치를 무릎에 두고 냅킨으로 덮어두었고, 인터뷰할 때는 대답하기 싫은 질문이 나올 때마다 그를 쳐다보며 “말해보렴, 아치? 말하란 말이야.”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치는 앤디처럼 말이 많지 않아서, 그럴 때마다 작고 긴 주둥이를 꼭 다물고 있었다. 매우 고급스러운 뉴욕 보석 매장인 티파니의 금패 목걸이까지 한 아치는 주인만큼이나 카메라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앤디는 1976년까지 아치의 친구를 찾다가 마침내 갈색 털의 닥스훈트견인 아모스(Amos)를 만났다. 하지만 아치와 달리 아모스는 앤디의 사교 행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개들의 친구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했다.


그래서 아치는 유명한 개로서의 삶을 내려놓고 아모스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해 이 화가는 <아치와 아모스>라는 작품을 그려 그 반려동물들을 그림 속에서 영원히 살게 해주었다. 이 닥스훈트 두 마리는 앤디 워홀 말년에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미술가란 단지 하나의 직업일 뿐이다. 어떻게 이름이 나더라도 명성은 무조건 좋은 것이다. 나는 똑같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좋다.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매일 캠벨수프 깡통을 그리겠다. 그건 너무 쉬운 일이고 생각할 필요조차 없으니까 생각하는 일은 도무지 너무나 힘이 든다.”


앤디 워홀이 살아가는 이유와 방식을 대변해주는 말인데 그가 철저한 상업주의자로서 평생 명성과 부를 쫓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미술가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지나친 상업주의와 출세지상주의라는 비판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학적 가치에 배치되는 이러한 워홀의 인식에서 팝아트의 성공적인 데뷔를 엿볼 수 있으리라 짐작이 된다.


“의미가 없는 그림은 감상자들은 강요받는 느낌 없이 그림을 볼 수 있어 더 많은 해석과 더 많은 관심을 불러왔다.”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

유독 동물을 사랑한 앤디 워홀은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들 시리즈를 그렸고, 작업 영역을 넓혀 고객들의 반려동물을 그려주기도 했다. 고양이 애호가였던 워홀은 실제 16마리의 고양이를 키웠는데 나중에 취향이 바뀌어 강아지만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팝아트의 선구자로서 상업미술 영역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로서 미국을 상징하는 소재와 인기 있는 유명한 인물을 미술에 접목하여 1960년대 미국 문화와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클림트의 쌍둥이 영혼, 캇츠

오스트리아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는 어렸을 때부터 예술적 감성을 드러냈다. 비록 초기 작품에서는 당시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어두운 색상의 사실적인 장면들을 그렸지만, 독립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면서는 빛이 잘 들어오고 자연으로 둘러싸인 작업실에서 창조적 자유를 마음껏 누렸다.


그는 복잡한 도시 중심가에서 벗어나 경직된 예술 규칙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잎이 우거진 작업실 정원에는 여기저기 나무를 타고 오르는 고양이들이 살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의 작업실에 자유로이 드나들거나, 여성 모델들 위를 지나다니거나, 클림트가 사방에 흐트러뜨린 수백 장의 스케치 작품과 놀았다.


이 화가는 그들의 응석을 받아주고 자주 쓰다듬어 주었는데, 특히 그곳의 또 다른 주인이었던 캇츠(Katze, 독일어로 ‘고양이’라는 뜻)를 유독 아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 사이에는 비슷한 점이 많았다. 검은 털에 흰 얼룩점이 있던 캇츠는 스스럼없이 여성 모델들 몸 위를 자유롭게 지나다녔고, 클림트는 작업실에 도착하면 옷을 다 벗고, 헐렁한 작업복만 입고 지냈다. 고양이의 자유분방한 모습 덕분에 그는 기존의 기하학적 모양과 표현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새로운 이미지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한편, 이 예술가는 고양이들처럼 자기만의 영역을 정해 놓아서 그 작업실에 들어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또, 그의 작품에는 고양이 오줌 냄새가 지독했는데, 클림트가 고양이 오줌을 스케치에 스며들게 해서 정착액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한 마리의 고양이처럼 예민하고 매혹적인 그는 맑은 눈으로 그와 작업한 여러 여성 모델들을 유혹했고, 그는 그녀들에게서 영감을 얻어 부드럽고 매력적이며 마법같은 세상을 그렸다. 또, 캇츠처럼 클림트도 많은 자손을 남겼다.


이 고양이는 꽤 오랫동안 클림트와 함께하면서, 그가 화가로서 성공을 거두게 된 <키스(연인)>와 같은 위대한 작품들을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특권을 누렸다.


에밀레 플뢰게는 클림트에게 아직까지도 영원한 뮤즈로 남아 있다. 앤디 워홀에게 에디 세즈익이, 모딜리아니에게 잔 에뷔테른이, 살바도르 달리에게 갈라 달리가, 존 레논에게 오노 요코가 있었다면 클림트에게는 에밀레가 있었던 것이다.


클림트에게 에밀레 플뢰게는 정신적 지주로서 영혼의 동반자(소울 메이트)이고, 플라토닉 사랑의 대상이었다. 사돈처녀인 플뢰게는 17세 연하였지만 사랑, 그림, 예술, 삶 등에 관하여 고민을 털어놓았으며, 400통이 넘는 편지와 엽서를 보냈다. 죽기 직전까지도 함께 하였으며, 사후에도 클림트가 남긴 사생아에게 재산을 골고루 분배해주었다고 한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소탈하고 내성적이었던 이 위대한 예술가는 단 한 번도 자화상이나 키우던 고양이를 그린 적이 없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작품으로만 자신을 표현하길 바랐고, 글을 쓰거나 인터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사생활을 노출하지 않았기에 후세의 사람들은 클림트를 ‘수수께끼 같은 화가’라고 불렀다.


클림트는 비잔티움의 미술과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서 모티브를 얻었으며, 또한 니체의 심미주의와 미학지상주의에 깊은 공감을 표하기도 했다. 현대의 대표적인 디자이너인 디올, 샤넬, 이브 생로랑은 클림트의 작품세계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영감을 채워준, 핀카

버지니아 울프는 20세기 문학의 대표적인 모더니스트의 한 명이자, 삶의 모든 분야에서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웠던 페미니즘의 선구자요, 혁명가였다! 이미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두 가지 일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글쓰기와 개를 키우는 일이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사냥개의 일종인 셰그(Shag), 제리(Jerry), 양치기 개의 일종인 구르스(Gurth)라는 개들을 잇달아 키웠다. 어른이 되어서는 보호센터에서 한스(Hans)라는 복서(싸울 때 권투선수처럼 앞발을 씀)를 입양했고, 이후에는 <델러웨이 부인>에 등장하는 그리즐(Grizzle)이라는 테리어종(‘땅이나 흙’이라는 뜻)인 혼혈견을 키웠으며, 그 다음으로 핀카(Pinka)를 키우게 되었다.


핀카는 작가인 비타 색빌웨스트가 1926년에 선물로 준 혈통서가 있는 코커스페니얼(‘도요새를 잡는 개’라는 뜻)이었다.


버지니아는 그 귀족적인 개들이 런던 사회의 거만한 귀족들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핀카가 귀족 같은 생활 대신 보통의 개처럼 생활하면 더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들판에서 산책시키고 진흙으로 몸을 더럽히거나, 강에서 몸을 씻겼다.


한동안 이 작가는 깊은 슬픔의 기간을 보냈다. 의욕없이 하루하루를 누워만 보내던 시기에 그녀 곁에는 늘 핀카가 있었다.


그녀는 핀카가 가까이 있을 때 마음에 안정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서서히 건강을 회복하게 되자 몽크스 하우스라는 시골집과 런던을 오가며 지냈으며, 비가 오는 날이나 추운 날이나 상관없이 핀카와 함께 오랫동안 산책을 하곤 했다.


이러한 시간들은 그녀가 책을 쓰는 데 큰 영감을 주었고 삶에 힘이 되어주었다.


심지어, 핀카는 그녀의 한 작품에서는 뮤즈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버지니아는 시인인 엘리자베스 배릿이 키우는 코커스패니얼 종인 플러시(Flush)의 관점에서 그 시인의 전기를 재미있게 쓰고 싶었다. 하지만, 그 개에 대한 정보가 적어서, 거의 자신의 개를 바탕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 결국, 플러시라는 캐릭터에 핀카에 대한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표지에는 핀카의 사진이 들어갔다. 이것은 그녀가 기존에 출간했던 책들처럼 깊이가 있는 작품은 아니었지만, 놀랍게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2년 후, 1935년 핀카가 갑자기 죽게 되었다. 그녀에게 핀카는 절대 잊을 수 없는 사랑이자 8년간 함께 했던 친구 자체였다. 또한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핀카는 글을 쓰는데 너무나도 큰 역할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버지니아는 그 당시 일기에 그녀의 삶의 일부가 몽크스 하우스의 정원에 묻혔다고 썼고, 같은 해 1941년 그녀도 한 줌의 재로 돌아갔다.


열세 살이 되던 1895년 어머니를 잃은 충격으로 인하여 처음 신경증 증세를 보인 후 수차례의 정신 질환과 자살 기도를 경험한 버지니아 울프는 20세기 영국 문학의 대표적인 모더니스트로서 뛰어난 작품 세계를 일궈놓은 페미니스트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조이스, 프루스트와 함께 ‘의식의 흐름’의 대가라 불리는 울프는 이 실험적인 기법을 통해 인간 심리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든 작가로 오늘날까지 칭송받고 있다.


남편 레너드 울프는 아내를 위해 출판사를 차렸고 아내의 작품 대부분을 출간해 주었다. 그는 공무원생활을 그만두고 오로지 버지니아 울프를 위해 사랑도 포기한 셈이었으니까! 버지니아 울프의 유서에는 자신이 정신질환이 악화되어 남편인 레너드에게 짐을 덜어주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과 레너드 울프를 사랑한다는 말을 남겨두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삶과 문학에서 남편인 레너드 울프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아델린 버지니아 스티븐 울프(Adeline Virginia Stephen Woolf, 1882-1941)

반려동물 핀카와 함께한 많은 산책은 그녀가 생각하고 그것들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걸을 때마다 큰 목소리로 긴 문장을 읊조렸고, 이후에 그것을 타자기로 옮겼다. 케임브리지 대학 뉴넘 칼리지에서의 강연을 토대로 한 에세이 <자기만의 방>(1929)은 큰 반향을 일으키며 훗날 페미니즘의 교과서로 추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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