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싱 인 더 레인

   
가스 스테인(역:공경희)
ǻ
쌤앤파커스
   
14000
2020�� 02��



■ 책 소개


삶이란, 빗속을 질주하는 법을 배우는 것! 개의 눈으로 인간의 삶을 바라본 휴먼 감동 스토리


엔조라는 개의 시선으로 펼쳐지는 《레이싱 인 더 레인》은 주인 데니와 그의 카레이싱, 그리고 주변 사람들 간의 갈등 관계를 들여다보는 엔조의 이야기다. 레이싱의 짜릿한 전율, 가슴 뭉클한 스토리 라인, 인생의 시련과 고통 속에서 발견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은 엔조의 시각을 통해 세상과 인생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현명하고 지혜롭지만 때로는 엉뚱하고 유머러스한 엔조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는 읽는 내내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떠나지 않게 한다. 개의 시각을 통해 인간세상의 이면을 새롭게 바라본다는 발상 자체도 이채롭고, 거기에 곁들여진 풍성한 이야기도 깊이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 엔조는 그저 귀엽고 앙증맞은 애완견으로서의 존재 의미를 뛰어넘어 인간과 진정한 교감을 이루어내는 철학자 개로 그려진다.


■ 저자 가스 스테인
저자 가스 스테인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1987년 컬럼비아대학교를 졸업했으며, 1990년에 동대학원에서 영화를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다큐멘터리 영화제작자로 일하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레이싱 인 더 레인The Art of Racing in the Rain(2008)》은 세 번째 소설을 출간한 신예작가의 작품으로는 보기 드물게 눈에 띄는 주목을 받았다. 이 책은 런던도서전에 출품되어 세계 20여 개국에 판권이 팔렸으며, 2008년 첫 출간 이후 3년간 아마존 베스트셀러 상단에 랭크됐다. 또한 무려 100주 동안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로 기록되었다.


이 소설은 ‘엔조’라는 개가 화자로 등장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속 깊은 어른 같은 엔조의 눈을 통해, 우리가 감추고 싶은 인간세상의 단면이 고스란히 그려진다. 엔조와 그 가족들이 역경 속에서도 잃지 않는 따뜻한 사랑, 인간의 열정과 도전 정신을 그리는 카레이싱 이야기가 깊은 울림을 전한다. 이 소설은 시련에 맞서는 인간의 용기, 신뢰를 바탕으로 한 사랑의 의미를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가스 스타인은 2006년 퍼시픽 노스웨스트 출판인협회상을 수상한 《How Evan Broke His Head and Other Secrets(2005)》, 《Raven Stole the Moon(1998)》 등의 소설을 썼으며, 현재는 가족과 사랑스러운 개 코메트와 함께 시애틀에서 살고 있다.


■ 역자 공경희
역자 공경희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번역대학원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어린이 책에서 성인 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와 연령을 넘나들며 지금까지 수백 여 종의 책을 우리말로 번역한 전문 번역가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파이 이야기》, 《우리는 사랑일까》, 《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 《보이지 않는 세계》, 《내가 알던 그 사람》, 《곰 사냥을 떠나자》, 《무지개 물고기》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지은 책으로 북에세이 《아직도 거기, 머물다》가 있다. 

 




레이싱 인 더 레인


나는 늘 인간과 비슷하다고 느끼며 살았다. 내겐 다른 개와 다른 뭔가가 있었다. 개의 몸을 입고 있지만 그건 껍데기에 불과하다. 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가 중요하다. 영혼, 내 영혼은 인간인 것을.


문이 열리고 “엔조!”라고 부르는 데니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평소라면 통증을 밀어내고 일어서서, 꼬리를 치고 혀를 빼물고 그의 가랑이에 주둥이를 비벼댈 것이다. 이런 경우 인간의 의지가 있어야 가만히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난 그렇게 한다. 가만히 있는다. 일어나지 않는다. 연기를 한다.


그가 나를 일으켜서 품에 안자, 그의 하루 냄새가 밀려든다. 그가 한 일을 냄새로 죄다 알 수 있다. 종일 차 정비소의 카운터를 지키는 게 그의 일이다. 그는 거기 서서 BMW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고, 수리비가 너무 많이 든다고 신경질 내는 손님들을 친절하게 상대해야 한다. 그들은 부아가 나서 누군가에게 소리를 질러대야 직성이 풀린다.


“늦어서 미안해. 곧장 집으로 왔어야 하는데 동료들이 우겨서 말이지. 크레이그에게 그만두겠다고 말했거든. 그래서…….”


그는 말끝을 흐린다. 그는 내가 소변을 실수한 게 자신의 늦은 귀가 때문인 줄 안다. 아,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라고 한 짓이 아닌데.


일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기 일쑤여서 의사소통이 너무 어렵다. 겉으로 드러나는 의미와 해석한 의미가 서로 다르고, 두 가지가 얽혀서 이야기가 아주 복잡해진다. 데니를 자책하게 만들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저 엄연한 현실을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이제 그만 나를 보내도 괜찮다는 걸 알게 해주려던 것뿐인데.


데니가 전화기를 들고 통화한다.


“모르겠어.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그가 말했다. 나는 말은 못해도 알아들을 수는 있다. 내가 세운 계획이지만, 데니의 말을 들으니 놀랍다. 한순간 내 작전대로 풀리는 데 깜짝 놀란다. 모두에게 최선임을 안다. 데니는 이제 편안해질 자격이 있다. 평생토록 내게 정말 잘해주었다. 난 그에게 자유를 선물할 빚을 지고 있다. 데니를 날아오르게 해야 한다. 우린 너무나 잘 뛰었고, 이제 다 끝났다. 그러니 그렇게 하는 게 뭐가 나쁠까?


데니는 다리, 귀, 꼬리 할 것 없이 엉겨서 뒹구는 새끼 강아지들 중에서 날 골랐다. 워싱턴주 동부 스팽글 타운 인근이었다. 냄새나는 들판에 헛간이 있었고, 새끼 강아지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었다.


농장을 떠나던 날이 기억난다. 스팽글은 하루가 멀다 하고 더웠고, 나는 추위를 몰랐기에 세상이 다 더운 줄 알았다. 비가 내리는 걸 본 적이 없었고, 물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물이란 그저 늙은 개들이 마시는 양동이에 담긴 것이었고, 못된 주인이 싸움을 거는 개의 얼굴에 호스로 뿌려대는 것일 뿐이었다.

“이 강아지로 하지요.”


남자가 말했다. 내 나머지 삶을 힐끗 본 순간이었다. 길고 가는 근육을 가진 호리호리한 사람이었다. 덩치가 크지는 않지만 단단해 보였다. 얼음처럼 파란 눈에 머리가 엉클어지고, 짧고 지저분한 수염은 아이리시 테리어처럼 짙고 뻣뻣했다.


데니는 늘 말했다.


“아주 살짝…… 페달이 달걀 껍데기인 것처럼 살며시 밟아야 해. 달걀을 깨면 안 되니까. 빗속에서는 그렇게 운전해야 하는 거야.”


둘이 비디오테이프를 볼 때면 –처음 만난 날 이후 쭉– 그는 내게 이런 설명을 해주었다(나한테!). 균형, 예상, 인내심,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 주변시(주변에 있는 것들에 대한 시력: 옮긴이), 즉 전에 못 본 것들을 봐야 한다. 근운동 감각, 직감으로 운전해야 한다.


기억하지 말아야 한다는 대목이 항상 맘에 든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조금 전에 한 일들을 기억하지 말 것. 기억이 시간을 뒤로 잡아당기니까. 기억하면 현재를 놓치게 된다. 레이싱에서 성공하고 싶은 드라이버라면 기억해선 안 된다.


데니는 레이싱을 움직임이라고 말한다. 한순간의 일부이며, 그 순간을 제외한 어떤 것도 인식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은 나중에 해야 한다.


난 쑥쑥 자랐고, 첫해부터 데니와 나는 서로 믿고 좋아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가 이브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을 때 솔직히 난 무척 놀랐다.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해도 되겠니? 둘 사이에 끼어들지는 않을게.”


이브가 친절하게 물어봐준 건 고마웠지만, 난 그녀가 끼어들리라는 걸 알았다. 안 그러겠다고 한 건 솔직하지 않았다.


데니가 이브에게 얼마나 반했는지 잘 알기에 난 불쾌하게 굴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솔직히 이브의 존재가 마뜩찮았다. 그녀와 나는 데니라는 태양 주위를 돌며 주도권을 차지하려고 애쓰는 위성들이었다. 물론 혀와 엄지손가락을 가진 이브가 유리했다.


이브는 아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기에게 온 마음을 바쳤다. 팽팽하게 나온 배를 계속 쓰다듬었고, 배 속 아기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음악을 틀고 함께 춤을 추었다. 그녀는 오렌지주스를 자주 마셨고, 주스를 마시면 빈혈에 좋은 엽산이 섭취된다고 건강잡지에 나온다며 내게 말했다. 하지만 배속 아기를 시원하게 해주려고 마신다는 건 둘 다 알았다.


어느 날, 이브는 아기가 발로 차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으냐고 내게 물었다. 난 정말 알고 싶었다. 이브가 주스를 마시고 나서 내 얼굴을 자기 배에 갖다 댔다. 정말로 아기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아기가 팔꿈치를 찔렀던 것 같다. 무덤에서 뭔가 쑥 나오는 것 같았다. 장막 뒤에서, 작은 토끼가 만들어지는 이브의 마법 주머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상상이 잘 안 되었다. 그곳은 이브와 따로 떨어진 세계임을 알 수 있었다. 아기는 움직이고 싶을 때 –혹은 산에 자극받으면- 움직였고, 그건 이브도 통제할 수 없었다.


이브는 하필 아이를 낳는 달에 대회가 열린다며 낙심했다. 데니는 큰 기회가 생긴 걸 자축했고, 인생에서 바랄 수 있는 걸 다 얻었다고 느꼈다.


“내가 그이에게 가라고 했다는 건 알아. 가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나였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그이가 지금 여기 있었으면 좋겠어!”


그녀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어쩌면 좋을지 난감했지만,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는 건 알았다. 이브에게는 내가 거기 있는 게 필요할 테니까.


“언제나 아이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할거지?”


하지만 그 순간 내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필요한 걸 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데니가 없을 때 이브를 위로할 수 있었다. 이브의 아기를 지켜줄 수도 있었다. 늘 더 많이 갈구했지만, 어떤 면에서 이제 출발점을 찾은 셈이었다.


다음 날 데니가 플로리다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속상해했다. 딸을 품에 안자 그의 기분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부부는 이브의 할머니 이름을 따 아기 이름을 조위로 지었다.


“내 아기 천사가 보이지, 엔조?”


데니가 내게 물었다. 아기가 보이냐고? 내가 아기를 받았는데!


데니와 이브가 출근하고 조위도 어린이집에 가고 나면 나 혼자 집에 남았다. 그런 날이면 혼자 아파트를 어슬렁대거나 자리를 옮겨가며 낮잠을 잤다. 몇 시간씩 창밖을 내다보며 도로를 지나는 버스들의 시간을 가늠하며 시간표를 파악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데니는 퇴근해서 집에 오면 딸과 아내에게 인사하고는 나를 데리고 마당에 나가 공을 던졌다. 나는 신이 나서 데니가 던진 공을 가져왔다. 조위가 좀 더 자라자 내가 쫓아가는 체하면 아이는 소리를 지르면서 도망다녔다. 그러면 이브가 딸을 나무랐다.


“그렇게 뛰면 안 돼. 엔조가 물지 몰라.”


초기에 이브는 그런 말을 많이 했다. 나를 그렇고 그런 개라고 의심하다니.


한 번은 데니가 얼른 그녀에게 몸을 돌리고 말했다.


“엔조는 조위를 해치지 않아. 절대로!”


맞는 말이었다. 다른 개들과 다르다는 걸 난 안다. 나에겐 원초적 본능을 극복할 정도로 의지가 강하다. 이브의 말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개들은 자기도 어쩌지 못하고 사람을 무니까. 개들은 동물이 뛰는 걸 보면 덩달아 쫓아간다. 하지만 그런 특징은 내게 해당하지 않는다.


이브는 그런 사실을 몰랐고, 나로서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조위와 놀 때는 각별히 살살 다루었다. 이브에게 불필요한 걱정을 시키는 건 나 역시 싫었으니까. 그 몹쓸 냄새를 맡았기 때문에 더욱더.


데니가 외출하면 이브가 사료를 챙겨주었다. 그녀가 몸을 굽혀 사료 그릇을 내밀 때, 내 코가 그녀의 머리 근처에 있게 된다. 그 순간 나쁜 냄새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나무 썩는 냄새, 버섯 상한 냄새, 축축하고 질펀하게 썩는 내. 이브의 귀와 코에서 나는 냄새였다.


이브의 머릿속에 이상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말할 수 있었다면 데니와 이브에게 경고할 수 있으련만. 병이 발견되기 한참 전에.


하지만 내 혀는 말할 수 있는 혀가 아닌 것을.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지켜보면서 가슴앓이 하는 것뿐. 이브는 자주 내게 조위를 지키는 일을 맡겼지만, 정작 자신을 지키는 일은 아무에게도 맡기지 않았다. 내가 그녀를 도울 수 있는 방도가 전혀 없기도 했고.


여름 어느 토요일, 우리는 알키 해변에서 수영하고 스퍼드에서 피시 앤 칩시를 먹은 후, 오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햇볕에 살이 빨갛게 익었고 고단했다. 이브는 조위를 재웠고, 데니와 나는 ‘공부를 위해’ TV 앞에 앉았다.


차량 내부에서 촬영한 비디오로 레이스를 보는 건 언제나 기막힌 경험이다. 여러 대의 카메라와 차량이 뒤따르는 TV 중계에서 놓치기 쉬운 멋진 장면을 포착할 수 있으니까.


이브가 물었다.


“당신은 트랙이 조금도 젖지 않은 것처럼 운전하는데, 다른 선수들은 젖은 것처럼 운전하는 게 마냥 신기해.”


“열아홉 살 때 처음으로 시어스 포인트에 있는 드라이빙 스쿨에 가게 되었어. 비가 내렸고, 교관들은 빗속을 운전하는 법을 가르쳐주었지. 교관들이 각종 방법을 동원해서 설명했는데도 학생들은 난감했어.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거든. 나는 옆에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지. 아직도 그를 기억해. 프랑스에서 왔는데 아주 빨랐어. 가브리엘 풀루레, 그가 웃으면서 말했어. ‘내가 증명할 것은 앞에 있다’라고.”


나는 데니가 방금 한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아주 간단하지만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운명을 만드는 건 바로 자신이다. 의도하든 안 하든, 알든 모르든 결국 성공과 실패는 자기 자신이 가져온다는 말이지.


이브는 몇 주간이나 입원했다. 데니는 나와 조위를 보살피면서 이브의 문병을 다니느라 바빴다. 그는 평소처럼 되는 대로 생활하지 않고 시간표를 짜두고 계획대로 움직였다.


다채로운 생활은 아니었지만 효율적이었다. 이브의 위중한 상태를 고려할 때 효율성이야말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산책을 자주 하지 못했고, 개 공원에 가는 일은 중단되었다. 데니나 조위가 전처럼 내게 큰 관심을 주지 못했지만 나는 이브의 회복과 가정을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삐걱대는 바퀴는 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그런 식으로 2주가 흘렀다. 맥스웰과 트리시는 주말에 데니가 한숨 돌리도록 조위를 돌봐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들이 데니가 아파 보인다면서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하자 이브도 선뜻 동의했다.

난 낙심했다. 쌍둥이 부부가 데니에게 주말 휴가를 준 데 분명 다른 의도가 있어 보였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감이 잡혔다.

쌍둥이 부부는 그 주말에 작업을 했다. 작전을 개시한 것이다. 그들이 지어낸 이야기로 씨를 뿌리고, 홍보라는 실을 물레질했다. 그들이 실현되기 바라는 미래를 내다본 것이다.

데니가 나를 데리고 이브를 면회하러 병원에 간 저녁이었다. 난 병원 건물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문병이 끝나자 조위와 나는 차에서 기다렸고, 쌍둥이 부부와 데니가 길에서 뭔가 의논했다.


데니는 확신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차에 올라탔고 우리는 출발했다. 조위가 물었다.

“엄마는 언제 집에 와?”

“엄마는 한동안 할머니, 할아버지랑 지낼 거야. 몸이 좋아질 때까지. 그래도 괜찮겠지?”

며칠 후 토요일이 되어 조위와 데니, 나는 쌍둥이 부부네 집에 갔다. 거실에 침대가 놓여 있었다. 아래위로 움직이고 세울 수 있는 병실용 침대였다. 리모컨으로 작동할 수 있었고, 침대의 발치에 테이블이 달려 있었다.

“우린 조위가 여기서 지내야 한다고 생각한다네. 때가 될 때까지…….”

“어떤 때 말입니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압니까? 어찌 될지 모르는데 벌써 이브에게 불치 선고를 내리시는 건가요?”

“조위는 아직 어린애야. 지금은 어느 때보다 소중한 시간이지……. 조위가 엄마와 함께 지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네. 자네가 반대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네. 그런 생각은 눈곱만큼도 해보지 않았어.”


트리시가 옆에서 거들었다. 나는 데니가 덫에 걸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브가 친정에 머무는 데 동의했다. 이제 처부모는 조위까지 원했다. 반대하면 엄마와 딸을 갈라놓는 셈이었다. 장인, 장모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이 바라는 대로 되는 셈이었다. 데니는 처자식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홀아비 신세가 되어야 했다.

“아빠가 매일 만나러 올게. 또 주말이면 아빠랑 지낼 거야. 지금은 엄마가 너랑 같이 있고 싶어 하니까.”

“괜찮아, 아빠. 아빠가 날 여기 영영 있게 하지 않을 거잖아.”

나는 두 사람에게 감탄했다. 사람으로 살면 얼마나 힘들까. 계속 욕망과는 반대로 살아야 하니까. 자기에게 가장 좋은 것보다는 옳은 결정을 내리려고 근심해야 하니까. 나라면 그런 수준까지 감당할 능력이 될지 무척 의심스러웠다. 내가 되고 싶은 인간이 될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해 겨우내 혹독한 한파에 시달리다가 4월이 되자 비로소 따듯한 봄날이 찾아왔다. 나무와 꽃과 풀에 강한 생명의 기운이 감돌았고, TV 뉴스에서는 알레르기가 심할 거라고 예상했다.

데니는 레이싱 스쿨로부터 특별한 제안을 받았다. 레이싱 스쿨에서는 TV 광고에 출연할 드라이버를 소개해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데니에게 광고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캘리포니아의 선더힐 레이스웨이 파크라는 곳에 레이스 코스가 있었다. 그는 무척 흥분했다. 나는 그가 10시간 거리인 그곳까지 직접 운전해갈 계획인 줄은 미처 몰랐다. 그가 나를 데려갈 계획인 줄은 더더욱 몰랐다.


“이봐, 짐. 이분이 개한테 드라이브를 시켜주려고 보호 용구가 필요하다고 하시네.”

데니가 차의 앞 좌석에 올라가 앉으라고 말했고, 난 시키는 대로 했다. 그들이 내 몸에 시트를 말아 머리만 밖으로 나오고 몸통은 의자에 붙이더니 뒤쪽에서 시트를 단단히 묶었다.

“너무 조이니?”

데니가 물었다. 나는 흥분한 나머지 대답을 못했다. 데니가 나를 레이싱카에 태워주다니!

“천천히 달리고 싶으면 한 번, 빨리 달리고 싶으면 두 번 짖어라. 알았지?”

나는 두 번 짖었고, 데니를 비롯해 팻과 짐이 동시에 놀란 눈치였다. 두 사람은 조수석 창에 기대 서 있던 참이었다.

데니는 가속의 정점에서 운전대를 풀었고, 차는 턴을 빠져나가는 지점을 향했다. 그가 가속페달을 힘껏 밟으면 우리는 코너를 날듯이 빠져나와 다음 턴, 그다음 턴을 향해 내달렸다. 선더힐의 열다섯 코너를 돌았다. 열다섯 군데의 코너 모두 하나같이 맘에 들었다. 각각 다르고 느낌이 특별했지만 하나같이 근사했다.


“눈을 크게 뜨고 멀리 봐.”


데니가 내게 말했다. 트랙을 걸을 때 그가 눈여겨봐 두었던 시각 정보들이 휙휙 스쳐 지나갔다.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려 데니가 그 지점들을 보지도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의 머리에는 이미 레이스 코스 지도가 입력되어 있었다. 마치 GPS 내비게이션이 입력된 듯했다. 턴을 도느라 속도가 느려질 때면 데니는 고개를 들고 다음 턴 지점을 내다봤다. 그는 차가 지나는 코너의 정점을 보지 않았다. 코너는 그에게 단순히 존재하는 상태에 불과했다. 우리는 거기에 있었고 행복했다. 그가 뿜어내는 환희, 생에 대한 사랑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저 멀리, 다음 턴 지점과 그 너머에 있었다. 그는 호흡할 때마다 속도를 조정하고 재평가해서 수정했지만, 모든 걸 무의식적으로 해냈다.

그때 나는 알았다. 그가 레이스를 하면서 어떻게 서너 바퀴 후에 다른 선수를 제칠 계획을 세울 수 있는지를. 그의 생각, 전략, 마음을. 그날 데니는 내게 모든 것을 펼쳐 보였다.

그동안 6개월이 지나갔다. 이브는 아직 살아 있었다. 7개월, 8개월이 지났다. 5월 1일, 데니와 나는 쌍둥이 부부에게 저녁 초대를 받았다. 그날은 월요일 밤이었고 전에 없던 일이었다.

이브는 근사한 진청색 원피스를 입었고, 정말 예뻤다. 목에는 일본산 담수 진주목걸이를 걸었다. 데니가 결혼 5주년 때 선물한 목걸이였다. 화장한 얼굴에 머리까지 가다듬었다. 이제 머리카락이 모양을 낼 만큼 많이 자랐다. 이브가 환하게 웃었다. 보조 도구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녀는 걸었고, 데니는 일어나서 박수를 쳤다.

떠날 시간이 되자 데니는 이브에게 긴 입맞춤을 했다.

지친 이브가 소파에 기대앉아 내게 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그녀가 귀를 문지르도록 가만히 있었다. 데니는 조위의 잠자리 준비를 도왔고, 쌍둥이 부부는 웬일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브가 내게 말했다.

“데니가 실망하고 있다는 걸 알아. 모두들 내가 랜스 암스트롱처럼 이겨내길 바라겠지. 나도 내 앞에 놓인 걸 잡고 견딜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만 난 잡을 수 없구나, 엔조. 그게 나보다 크거든. 그게 사방에 널려 있거든.”

“일이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는 게 아니었어. 우린 함께 살았어야 해. 집에 가겠다고 우겼어야 하는 건데. 다 내 잘못이야. 더 강해질 수 있었는데. 데니는 이미 벌어진 일이니까 걱정해봐야 소용없다고 하겠지. 그러니까……. 나 대신 데니와 조위를 잘 보살펴줘, 엔조. 두 사람은 함께 있어야 해.”

“넌 이미 알고 있었지? 넌 모든 걸 아니까.”

내가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브가 제대로 알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아침까지도 데니는 이브가 운명한 걸 몰랐다. 난 안개가 낀 것 같은 꿈에서 깬 즉시 알았지만…….


이브는 죽음으로 고통스러운 싸움의 종지부를 찍었다. 데니에게는 새로운 싸움의 시작이었다.


“자네가 변호사가 있는지 모르겠군, 아직 없으면 당장 변호사를 구해야 할걸세. 우리가 법원에 양육권 청구 소송을 낼 테니까.”

`

경험상 드라이버는 차가 한계에 가까워지면 어떤 상태인지 금세 느낌으로 알게 된다. 그런 까닭에 드라이버는 극한의 경계에서 운전하면서도 편안함을 느낀다. 타이어가 점착력을 잃기 시작하면, 얼른 교정해서 한숨 돌린다. 언제 어디서 좀 더 몰아붙일 수 있을지 본능으로 안다.


압박이 심하고 레이스가 반이나 남았다면 경쟁 차에 줄기차게 추격당하며 앞서 달리기보다는 뒤에서 밀어붙이는 편이 낫다는 걸 안다. 그 경우에는 뒤따라오는 차에 자리를 내주는 게 현명한 대처법이다. 추격당하는 상황에서 벗어난 드라이버는 아까 당했던 것처럼 앞차를 밀어붙일 수 있다.


이런 상상을 해보기를. 아내가 갑자기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상상해보라. 그 후 처부모가 딸의 양육권을 차지하려고 맹렬히 달려드는 걸 상상해보라.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누명을 썼다고 상상해보라. 그들이 돈이 많아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했다고 상상해보라. 그들이 여섯 살 먹은 딸과 접촉을 몇 달이나 원천 봉쇄했다고 상상해보라. 그들이 생활비와 딸을 부양할 돈을 못 벌게 막았다고 상상해보라.


아무리 의지가 강한 사람도 그런 입장에 처하면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그러나 그들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데니는 절대로 섣불리 무릎 꿇을 사람이 아니었다. 절대로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데니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의지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데니가 나를 치료할 수의사에게 달려갈 때,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세상에 오면서 받은 소임을 다했다면, 배워야 할 것을 다 배웠다면 그보다 1초 전에 차도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차에 치여 즉사했을 테지. 그런데 난 죽지 않았다. 왜냐면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아직은 할 일이 남아 있기에.


“고소 내용을 철회하시겠습니까?”


“그러겠습니다. 모두에게 고통을 안겨줘서 정말 미안해요. 철회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개가 말을 해 진실을 밝혔습니다. 본 소송 건은 기각합니다. 스위프트 씨는 가셔도 좋고 딸의 양육권을 얻었습니다.”


나는 증인석에서 뛰어 내려와 데니와 조위를 껴안았다. 마침내 우리는 한 가족이 되었다. 다시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며칠 새 모든 게 변했다. 데니는 조위와 다시 살게 될 것이다. 그 순간을 보고 싶다. 그들은 같이 이탈리아로 간다. 마라넬로라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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