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수생각

   
박광수
ǻ
북클라우드
   
15000
2020�� 02��



■ 책 소개

 

1990년대 말부터 2020년까지,
버티며 사는 인생에 희망과 용기를 줬던 광수생각!

 

국내에 IMF 금융위기가 불어 닥친 1990년대 말부터 3년간 신문에 연재됐던 만화 ‘광수생각’. 유난히 힘들었던 그 시절, ‘광수생각’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감동적으로 담아내며 많은 이들에게 웃음과 눈물을 선사했다. 폭넓은 공감으로 250만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광수생각’이 어느덧 23년간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이야기로 돌아왔다.

 

‘광수생각’의 팬이라면 책 표지에 등장한 캐릭터 ‘신뽀리’를 보고 반가움을 느꼈을 것이다. 어리버리한 표정을 한 채 촌철살인 멘트를 날리고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던 신뽀리. 23년의 세월 동안 저자와 신뽀리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 책에서 신뽀리는 여전히 버티며 살고 있지만, 힘내라고 쉽게 말하지 않는다. 더 이상 요동치는 마음을 극복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저 ‘이만하니 다행이다’라고 지난날의 상처와 아픔을 감싸 안는다. 별다른 위로는 없지만 억지스러운 격려가 아니라서 더 위로가 된다. 이번 책에서는 1990년대부터 최근 2020년까지의 ‘광수생각’을 함께 엮었다.

 

■ 저자 박광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광수생각’으로 250만 독자를 울고 웃게 만든 만화가이자 작가. 세상의 따뜻한 이야기를 소재로 행복과 희망을 그리는 만화가로 유명하다. 우리 이웃이 느끼는 서러움, 삶의 버거움, 가족에 대한 사랑을 따뜻하고 유쾌한 글과 그림으로 전하며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1969년생으로 단국대학교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했다. 1997년부터 주인공 ‘신뽀리’가 등장하는 만화 ‘광수생각’을 그리고 있으며, 신문사에서 3년 반 동안 연재한 바 있다. 이를 책으로 엮은 《광수생각》이 250만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저서로는 《광수생각(1~5)》, 《참 잘했어요》, 《러브》, 《문득 사람이 그리운 날에는 시를 읽는다(1~2)》, 《살면서 쉬웠던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광수 광수씨 광수놈》, 《해피엔딩》, 《참 서툰 사람들》 등이 있다.

 

■ 차례
1장. 안녕, 그때의 우리
우리는 우리가 창피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꿈의 주인|대운이 들다|내가 기억하는|단지|상처투성이의 마음|믿거나 말거나|섬과 섬 사이|그 봄이 오면|후회를 먹고 사는|봄을 기다리며|신세|어머니|내 안에서 부는 바람|그대라는 등대|그때 우리는|한 번의 승리를 위해서|깃발|채집|우리가 지금은 헤어져도|성냥의 사명|역지사지|나는 지금|박광수 D|바보들의 선긋기|그것으로 되었다|길을 나서는 이유|빈자리의 크기|직방|겨울을 나는 방법|약손

 

2장. 모자라지만 따뜻한 날들
그러니까 당신|내가 만들고 싶은 컴퓨터|철모르던 시절|내 꿈은|카지노에서 돈 따는 방법|투박한 당신의 목소리|걱정을 키우며 산다|눈사람|만족스런 삶|배우고 또 배운다|의도치 아니하다|정치인의 그릇|눈이 부시게|따뜻한 연수|선생님들에게 부탁|이상한 일|소문의 주인공|나도 모르게|별이 되는 사람들|못생긴 내 얼굴|나의 바다|완벽한 사람|당신이라는 꽃|화창하지 않은 날|딱이와 쑥이|아름다운 우정|계절의 정류장|엄마의 꽃|그날의 반찬

 

3장. 조금 천천히 같이 걸어요
겸손한 마음|고백|사랑하는 마음|진짜 속마음|말할 수 있는 기회|늘 이쁜 당신|싱거운 소원|영원하자던 약속|당신의 신발|비나이다|심심풀이 땅콩|당신과의 일들|당신 생각|밥벌이의 지겨움|세상 풍경|더 외로워라|꿈에서 만나는 당신|당신을 위한 눈물|어쩌면 몰라도 되는 일|침잠|안녕, 스무 살|늙은이가 늙은이에게|외길|흔들리는 별|우리의 속도|소박한 당부|묘비명|대물림|잔향|이정금 여사|반짝반짝|소멸되어지는 모든 것들|당신의 세상

 

에필로그_ 끝 혹은 시작
별책부록_ 만화 만두군

 




광수 생각


안녕, 그때의 우리

우리는 우리가 창피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때의 우리는 그랬다.

빈털터리였으므로 늘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세상의 모든 고민을 안고 사는 우리의 안주는

언제나 새우깡뿐이었다.

젊은 우리는 새우만큼이나 깡다구 있게 살자며

환하게 웃었고, 365일 무릎이 늘어난 바지를 입었다.

늦은 밤 포장마차에서 술에 취해 친구들과 어깨동무를 한 채

가수 봄여름가을겨울의 노래인 ‘아웃사이더’를 목청껏 부르다가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런 우리를 누구는 부끄럽게 여기기도 했지만

정작 우리는 우리가 창피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나이가 든 지금

그때를 돌이켜 생각해 봐도

나는 그때의 우리가 창피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때의 젊음을 걸고

희망을 향해 최선을 다해 달렸으니까.



꿈의 주인

세상을 살면서

바보들만 넘어지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장애물이나 돌부리에 걸려

한 번쯤은 넘어지기 마련이다.


많은 사람들이 넘어져도

아픔을 딛고 다시 일어서지만,

넘어진 채로 가만히 누워서

세상을 원망하는 이를 우리는

‘바보’ 혹은 ‘어리석은 이’라고 말한다.


꿈이란,

언제나 꿈꾸는

이들의 것이다.



대운이 들다.

무엇을 위한 촬영이었는지 지금은 기억이 불문명하나

촬영을 하기 위해 민속촌에 갔었다.

그날은 일 년에 한 번 민속촌 초가집의 낡은 지붕을 교체하는 날이었다.

촬영 장소에 도착해 어리둥절한 나만 빼고 모두가 분주한 모습으로

초가집 지붕의 낡은 이엉을 밑으로 내리고 있었다.

(‘이엉’은 초가집의 지붕을 이기 위해 짚으로 엮은 물건이다.)

지붕 위에서 땅으로 습기를 가득 머금은 낡은 이엉이 내려오고,

땅에서 지붕 위로 새 짚으로 엮은 이엉이 올라갔다.

어리둥절한 내가 보기에도 이미 수년간 해 본 숙련된 솜씨였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니,

어린 시절 운동장 구석에 있던 작은 모래밭에 앉아

한 손을 모랫바닥에 깔고 모래로 덮어 토닥토닥 두드리며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라는

노래를 부르던 어린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게 추억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 내 다리를 툭툭 치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아, 저리 좀 비켜”

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옆을 보니, 족히 여든 살이 넘어 보이는

꼬부랑 할머니가 낡은 이엉을 뒤적이며 무언가를 줍고 있었다.

할머니의 손을 본 나는 그만 “으악!” 하며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할머니가 가슴 앞으로 받쳐 든 손에는

살아있는 굼벵이 이십여 마리가 꿈틀대고 있었고,

다른 손에도 내 새끼손가락만 한 굼벵이가 들려 있었다.

내 비명소리에 장난기가 발동한 할머니는 굼벵이를 내 눈앞에 들이대며 말했다.

“뭘 그리 놀라누? 이게 얼마나 좋은 건데?”


할머니 손에 들린 굼벵이는 마치 줌바 댄스를 추는 것처럼

몸을 이리저리 재빠르게 움직였다.

나는 오만상을 쓴 채 굼벵이를 손으로 가리키며 “이걸 먹어요?”라고 묻자,

할머니는 손에 들고 있던 굼벵이 한 마리를 보란 듯이 입에 털어 넣었다.


카메라 감독과 PD는 할머니가 굼벵이를 드시는 모습을 찍다가

갑자기 카메라를 내 쪽으로 돌리며 어서 받아먹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나는 세상에서 벌레를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다.

그럼 내게 줌바 댄스를 추는 굼벵이를 먹으라니!

나는 그 자리에서 혀를 콱 깨물어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할머니는 내 속을 모르고 입 앞으로 굼벵이를 들이대며

좋은 거니 먹으라고 종용했다.

카메라 감독의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과 입을 벙긋거리며

“빨리 먹어!”라고 외치는 PD의 분위기에 그만,

나는 입으로 굼벵이를 받아먹고 말았다.

입안으로 들어온 굼벵이는 마치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치는

한국의 비보이 같았다.

나는 그 느낌을 그냥 둘 수 없어서 대충 두세 번 씹고 꿀꺽 삼켰다.

(입안에서 폭죽이 터지는 느낌을 글로 적지 않으련다.)


나는 해냈다는 성취감과 안도감을 느끼며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굼벵이를 먹으면 어디에 좋은 거예요?”

피부에 좋다거나, 단백질이 풍부하니까 근력 회복에 좋다거나,

혹은 체내에 있는 독성 배출에

좋다는 대답을 기대하며 물은 말이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밝게 웃으며 내 기대와 다른 대답을 했다.


“응? 이거? 먹으면 운이 좋아.”



상처투성이의 마음

내가 너에게

아무런 위로를 건네지 않는 것은

너의 마음을 몰라서가 아니야.


힘내라는 말,

잘 할 수 있다는 말,

서투른 위로는 지금 너에게

더 큰 상처가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그래서 가만히

그래서 조용히

옆에서 지켜볼 뿐이야.

너의 상처가 덧나지 않고


더 깊어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야.



믿거나 말거나.

세상에는 별의별 미신이 있다.

여자 친구에게 신발을 선물하면 헤어지게 된다는 미신.

밤에 휘파람을 불면 뱀이 나온다는 미신.

연인과 덕수궁 돌담길을 함께 걸으면 헤어지게 된다는 미신.

빨간색 펜으로 이름을 쓰면 죽는다는 미신.

문지방을 밟고 방을 넘어가면 복이 달아난다는 미신.

시험 보는 날 미역국을 먹으면 낙제한다는 미신.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미신.

과학적으로 증명되지도 않고

믿기 힘은 터무니없는 미신들이 우리 삶 곳곳에 퍼져 있다.

미신을 안 믿는 나는 ‘그런 걸 믿어?’ 미신은 나이 든 노인네나 믿는 거야‘

라고 생각하다가도, 안 지키면 왠지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일부러는 하지 않는다.


아주 오래된 어느 날 밤이었다.

마루에 앉아 손발톱을 깎고 있는데

나를 발견한 엄마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얘, 왜 밤에 손발톱을 깎는 거니?”

엄마의 말에 나는 동작을 멈췄다. 밤에 손발톱을 깎으면 안 되는

미신이라도 있는 건지 마음을 졸이며 엄마에게 되물었다.

“왜... 왜요? 밤에 손발톱을 깎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내 물음에 엄마가 빙긋 웃으며 답을 하셨다.

“밤에 깎으면 잘 안 보이잖아.”


쓸데없는 걱정들이 미신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바보들의 선긋기.

“난 실패할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 중

성공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물론 “난 성공할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 중

실패한 사람을 본 적도 있다.


하지만 세상의 일들 대부분이

입 밖으로 꺼낸 말처럼 되는 경우를 많이 봤다.

‘못한다’고 스스로 선을 긋는 사람은

못하는 것이 당연하고, ‘할 수 있어’라며

자신을 믿는 사람은 끝끝내 해내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나에게 재능이 있다고 말하지만

정작 내가 가진 재능을 ‘부단히 노력하는 재능’이다.


자신의 가치는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운동 경기 중에

마음을 다잡으며 ‘할 수 있어!’를 외치는 것이다.

할 수 있다는 그 마음이

모든 것을 이기게 만드는 것이다.


경기도

인생도.



빈자리의 크기.

살면서 이가 빠졌던 경험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

저절로 빠졌거나, 아파서 뺐거나,

혹은 사고로 빠졌거나 말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가 몸에서 떨어져 나오면

혀로 그 부분을 더듬어 본다. 그리고선 깜짝 놀란다.

깜짝 놀라는 이유는 아마도 떨어져 나온 이의 크기보다

혀가 닿는 빈 공간이 훨씬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나 예상치 못한 일로 이가 하나쯤 빠졌을 때,

놀란 마음에 혀로 그 부분을 더듬으면 마치 두서너 개쯤

빠진 것이 아닌가 싶어 당황한다. 그러나 놀란 마음과 달리

내 손바닥 위에 올려진 이의 개수는 혀로 느껴졌던

것보다 적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랜 시간 내 곁에 머물다 떠난 이의 자리가

그리 크게 느껴지는 이유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무엇이든 비워진 자리는

크게 느껴진다.



모자라지만 따뜻한 날들

아름다운 우정.

관계를 쌓아가는 일이란

집을 짓는 일과 같다.

허름한 집을 대충 짓기란 아주 간단하지만

오랫동안 머물고 싶고

포근한 느낌이 드는 집을 짓기란

공도 많이 들고 정성을 다해야 가능한 일이다.


곧고 좋은 나무를 골라 기둥을 세워야 한다.

빨리 완성하겠다는 조급한 마음으로 안이 곪아 있거나

썩은 나무를 기둥 삼아 집을 지으면

그 집이 오랜 시간 동안 굳건히 버틸 수 없다.


문과 창문 하나도 어느 방향으로 낼지 고심해서 지은 집은

그 집에 사는 이로 하여금 살면 살수록

집을 만든 이의 마음을 저절로 알게 한다.


반면 허투루 만든 집에 사는 사람은

사는 내내 불편하다.

옆집 담과 마주하여 낸 창은 답답하고

도로보다 낮게 만들어진 문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덥다.


수령이 오래되지 않은 나무로

집을 지은 탓에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나무들이 뒤틀리어

집이 비명을 지르니

그 집의 사는 이의 건강도 온전할 리가 없다.


사람 사이에 관계를 쌓아 나가는 일은

집을 짓는 일처럼

정성스러워야 한다.

조금 시간이 걸려도 내 안에 머무는 이들이

불편함은 없는지 세심히 살펴야 한다.

그렇게 좋은 집을 만드는 마음으로

사람과의 관계를 쌓아 간다면

세상의 어떤 역경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법이다.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으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든다고 상상하자.



그 날의 반찬

내가 뚱뚱하다는 이유로 어린 시절부터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었을 거라고 짐작하겠지만,

나는 이미지와 달리 반찬 투정이 심하고 입도 짧은 아이였다.


멸치는 비리다고 안 먹고

청국장은 고린내가 나서 안 먹고

엄마가 즐겨 드시던 매운 닭발은 무서워서 쳐다보지도 못했으며,

보리쌀은 입 안에서 동글동글 맴도는

식감이 싫다며 먹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혐오스럽거나

내 입에 익숙하지 않은 음식들은

마치 비장한 마음으로 단식을 선언한 정치인처럼

먹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그런 나를 위해 엄마는 마치 축구선수 메시가 현란한 움직임으로

수비수를 절묘하게 따돌리는 것처럼 내가 싫어하는 음식들을 피해

쇠고기 장조림, 계란말이, 김치찌개, 잡채, 오징어볶음 등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정성스럽게 상을 차리셨다.

그러나 입이 짧고 변덕이 심한 내가 먹기 싫다는 이유로

숟가락을 들었다 내려놓으면 엄마의 노력은 허사가 되었다.

그런 내가 엄마는 얼마나 입고 얄미웠을지를 생각하면

보통의 인내를 가지고서는 나를 키우기 참 쉽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아마 내가 당시의 엄마였더라면 몇 번 더 음식을 권하다가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을 뾰족한 형태로 만들어 내 정수리를 콱 쥐어박고야

말았으리라.


나와 달리 식성이 까탈스럽지 않은 형들은 그런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배가 불러서 그런다고, 그냥 내버려두면 지가 배고파서

알아서 먹을 거라고 엄마에게 더 이상 애쓰지 말라고 만류했다.

형들의 말이 정답이었지만, 엄마는 뚱뚱한 나를 가리키며

“얘 요즘 너무 야위었어. 그런 말 하지 마라.”라고 하시며

지치지도 않고 웃으며 내게 밥 먹기를 권하셨다.


“아이고 우리 날씬하고

세상에서 제일 자알 생긴 아들,

밥 먹기 싫어도 재미로라도 먹어야지”라고.


그렇게 엄마는 숟가락으로 큼지막하게 뜬 밥 한술 위에

맛있는 반찬으로 농담 하나를 올려 주셨다.



조금 천천히 같이 걸어요

말할 수 있는 기회.

엄마가 치매로 요양병원에

들어가신 지가 벌써 햇수로 9년이 흘렀다.

조금씩 기억을 잃으시고, 조금은 움직이시던 엄마가 이제 늘 침상에 누워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하신다.

하필 왜 이런 병이 우리 엄마에게 찾아왔는지 하늘을 원망해 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더 많이 찾아뵙고

더 자주 안아드리는 것이 최선일 뿐이다.


건강한 부모님을 둔 후배를 만날 때면

마치 내 안에 녹음기가 저절로 재생되는 것처럼 말한다.

“건강하실 때 더 자주 찾아뵙고, 사랑한다고 말씀드리고, 자주 안아드리렴.”

내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아직 건강한 부모님을 둔 후배는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네네, 그래야죠”라고 건성으로 답한다.


그러고 보니 십수 년 전, 친한 선배가 나와 같은 조언을 나에게 건넸을 때도 나 역시 지금의 후배처럼 건성으로 대답했던 것이 기억난다. 아마 당시의 나는 지금의 후배처럼

나에게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중에는 후회해도 늦는다는 말,

너무나도 맞는 말이다.


기회는 오직 지금뿐이다.

많이 안아드리며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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