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를 생각한다

   
존 코널(역:노승영)
ǻ
쌤앤파커스
   
14000
2019�� 12��



■ 책 소개

 

소 키우는 소설가가 들려주는 생명과 자연의 목가

 

우리가 자연과 단절되었기 때문에 누추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새롭게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모두가 알다시피 그 말은 여전히 진실을 향하고 있다. 우리는 물질적 편익을 누리는 대신 자연이 주는 감동과 생명의 경이를 잊어간다. 자연을 복제한 공원의 산책로를 걸으며 자연을 느낀다고 생각하지만 그곳의 생명들은 정교하게 관리되고 통제된 것일 뿐이다. 이 행성에서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연과의 관계를 상실한 대가로 고독을 얻었다.

 

《소를 생각한다》는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고향 아일랜드의 가족 농장으로 귀농하여 아버지를 도와 소 치는 일을 했던 1월부터 6월까지의 경험, 그로부터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 사유와 성찰을 담아낸 책이다. 소의 분만을 돕고, 갓 태어난 송아지를 돌보고, 소 젖을 짜고, 병든 새끼 양을 돌보고, 더러워진 우사를 청소하는 등 엄청난 육체노동의 나날들을 보내면서 저자는 지난 1만 년 동안 우리 인간과 함께해온 소의 운명과 역사를 되돌아보고, 더 나아가 인간과 자연의 연결, 마침내 살아간다는 것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 저자 존 코널
아일랜드의 작가. 소 치는 농부의 아들. 롱퍼드 Longford주에 있는 버치뷰Birchview 농장에서 아버지를 도와 농장일을 하고 있다.

 

■ 역자 노승영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인지과학 협동과정을 수료했다. 컴퓨터 회사에서 번역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환경 단체에서 일했다. ‘내가 깨끗해질수록 세상이 더러워진다’고 생각한다. 번역가 박산호와 함께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을 썼으며,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동물에게 배우는 노년의 삶》, 《책이었고 책이며 책이 될 무엇에 관한, 책》, 《위대한 호수》, 《나무의 노래》, 《새의 감각》, 《먹고 마시는 것들의 자연사》 등의 책을 한국어로 옮겼다. 홈페이지(www.socoop.net)에서 번역한 책들의 정보와 정오표를 볼 수 있다.

 

■ 차례
1월
2월
3월
4월
5~6월
감사의 글

 




소를 생각한다


1월

시작

나는 스물아홉 살이고 송아지를 직접 받아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이제 그러지 않을 참이다. 지금 산도(産道)에 팔을 넣어 송아지의 발을 찾고 있으니까. 농사꾼의 아들로 송아지가 태어나는 것을 많이 봐왔지만, 주로 어미소 꼬리를 들고 있거나 마지막 순간에 송아지를 끄집어내는 조수 노릇만 했다. 그동안 외국에서 지내다가 소설을 써서 작가로 성공해보려고 고향 아일랜드의 시골에 돌아왔는데, 먹고 자는 대가로 농장일을 돕기로 했다.


레드 어미소가 움찔하니 힘이 얼마나 센지 실감 난다. 서둘러야 한다. 양수에 손과 팔이 젖는다. 사람들이 해준 이야기가 기억난다. 조금 있으면 손이 젖고, 그러면 어미소의 자궁 수축이 힘을 받을 거라고, 송아지가 죽지 않게 하려면 몸을 잽싸게 놀려야 한다.


내가 혼자라서, 이 일을 직접 하고 있어서 다행이다. 몰론 도움을 청할 수도 있지만, 그랬다가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 스스로 해낼 수 있음을 입증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도 부르지 않겠다. 반대쪽 발을 잡았다. 문간에서 두 번째 분만줄을 가져다 송아지의 다리에 두른다. 분만줄이 미끄러져 떨어지자 욕이 터져 나온다. 집중해야 한다. 몸을 낮게 숙여 분만줄을 잡고 다시 도전한다. 두 번째 발에 분만줄을 묶었다. 살살 잡아당기지만 송아지가 너무 크다.


“그렇지, 그렇지.”어미소를 달랜다. 다시 손잡이를 당기니 주둥이가 보인다. 너무 납작하다. 머리가 눌렸나 보다. 어미소가 다시 신음 소리를 낸다. 발이 떨리는 게 느껴진다. 송아지의 덩치가 너무 크다. 무를 수도 없다. 한 번 더 손잡이를 당기자 어미소가 울부짖는다. 기도를 올린다. 적어도 생각은 그렇다. 송아지의 머리가 나온다. 있는 힘껏 손잡이를 당겨 몸뚱이가 계속 빠져나오게 해야 한다. 어미소가 지쳐 포기하면 송아지는 죽을 수도 있다. 당기고 당기자 이제 나온다. 축축하고 튼튼하다. 우리 씨소(種牛)의 새끼이다. 아비 얼굴을 닮은 것이 틀림없다.


새끼를 비틀어 엉덩이를 빼내라던 아버지의 말대로, 그렇게 완전히 끄집어내어 녀석을 두 팔에 안는다. 아드레날린이 분출해서인지 하나도 안 무겁다. 녀석을 새로 깐 깔짚에 데려간다. 귀에 물을 붓자 녀석이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린다. 나는 안도의 미소를 짓는다. 배꼽을 소독하고 한숨 돌리고는 농장 부엌으로 향한다. 팔과 얼굴에 피가 묻었지만 이건 기분 좋은 피, 생명의 피다.


하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 새끼에게 젖을 먹여야 한다. 어미소가 분만하면 ‘초유’라는 특별한 젖이 나온다. 걸쭉하고 노란색의 초유를 송아지에게 곧장 먹여야 목숨이 유지되고 감염과 질병을 예방하는 항체가 생긴다. 송아지의 삶에서 처음 몇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 갓 태어난 송아지에게 젖을 먹일 때는 언제나 튜브를 쓴다. 경관(頸管)은 플라스틱 튜브로, 주머니에 연결되어 있다.


경관 주머니가 꽉 찼으니 송아지에게 먹일 차례다. 이 일도 내겐 처음이어서 긴장해야 한다. 녀석이 몸을 뒤치지 못하도록 등을 가볍게 깔고 앉는다. 그런 다음 녀석의 머리를 들어 한 손으로 입을 비틀어 벌리고 다른 손으로 튜브를 집어넣는다. “됐어”라는 말이 흘러나온다. 송아지에게 하는 말인지 내게 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우린 함께 이 일을 하고 있다. 남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 이 구절이 저절로 흘러나와 기쁘다.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실한 말이니까.


송아지를 놓아주고 분만사(分娩舍) 회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쉰다. 그때 쪽문이 열린다. 아버지가 환하게 웃으며 서 있다. “송아지를 낳았구나.” “방금 저기 데려다 놨어요.” “형을 불렀어야지.” “늘 사람을 부를 순 없잖아요. 직접 해야 할 때도 있다고요.” “그래. 그럴 때도 있지.” 아버지가 미소 짓는다. 나는 무언가가 일어났다는 것을 안다. 드디어 시험에 통과한 것이다. 뿌듯하다.


나는 어미소를 풀어 새끼 곁에 있게 한다. 덩치에 걸맞지 않게 다정하고 부드럽게 새끼를 핥는다. 나머지는 자연이 알아서 할 것이다. 나는 스물아홉 살이다. 하지만 오늘 밤 훌쩍 나이를 먹은 것 같다.


조상

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인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1만 500년 가까이 인류의 동반자였기 때문이다. 유전학자들에 따르면 집소의 기원은 이란의 들소 한 무리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록스(auroch) 또는 위르(ure)라 불리는 이 들소 품종은 현재 멸종했지만, 한때는 위풍당당했을 것이다. 선키가 2미터를 넘어 고대인과 현생종 소보다 훨씬 컸던 이 거우들은 인류의 조상들에게는 딴 세상의 존재로 보였을 것이다.


오록스가 유럽에 도달한 것은 약 27만 년 전이므로 유럽은 인류의 것이기 전에 오록스의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유럽 대륙은 오록스의 드넓은 목초지였다. 고대의 숲은 오록스에게 보금자리를 선사했으며 탄생과 삶과 죽음의 순환을 지켜보았다.


오록스의 거대한 뿔은 귀족들에게 술잔으로 애용되었으며 이는 틀림없이 오록스의 멸종을 앞당겼을 것이다. 오록스 사냥은 당시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그 뒤로 수세기에 걸쳐 오록스 개체 수가 서서히 줄었다. 결국 오록스 사냥은 귀족의 전유물이 되었고 밀렵꾼은 사형에 처해졌다.


이름

우리는 소들에게 사람 같은 이름을 지어주지 않는다. 소들은 특징이나 출신 지역에 따라 이름을 부여받는다. 사람처럼 소도 저마다 사연이 있다. 오후에 우사를 돌며 어느 암소가 분만이 가까웠는지 확인하려고 뼈를 만져보노라면 녀석들의 내력을 생각하게 된다.


블랙 화이트헤드는 나이 든 암소로, 우리 농정의 여사님이다. 부실한 송아지를 낳은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조용하고 차분하며, 젖을 짤 때 한 번도 내게 발길질을 한 적이 없다. 옆구리를 쓰다듬으니 한두 주 뒤면 새끼를 낳을 모양이다. 리무진(Limousin)들과 블랙들도 손으로 쓸어본다. 녀석들은 귀찮다는 듯 슬렁슬렁 내게 꼬리를 휘두른다. 내가 사연을 모르는 소도 많다. 어머니도 모른다. 소를 사는 건 아버지가 도맡기 때문이다.


마지막 리무진을 쓰다듬어보니 분만이 가까웠다. 분만사로 옮겨가야겠다. 녀석은 나이가 많지만 가죽이 매끈하고 반짝거려서 겉으로 봐서는 모른다. 리무진은 프랑스 품종으로, 처음에는 짐소였다. 19세기까지도 프랑스 바깥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아일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품종 중 하나이다.


3월

오늘 아침은 대청소를 해야 한다. 식품 품질 검사관이 오기로 했다. 이것은 아일랜드 식품국의 새 정책에 따른 것으로 아일랜드 내 모든 육류의 이력을 추적하기 위한 것이다. 구제역이 마지막으로 발생한 지 15년이 지났지만, 학교를 소독하고 소독약에 발을 담그던 일이 아직도 생각나다. 정부는 구제역 대처에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영국이 얼마나 큰 피해를 입는지 똑똑히 보았다. 결국 영국에서는 30만 마리 가까운 소가 살처분 당했으나 아일랜드에서는 발병 사례가 단 한 건에 불과했다. 우리는 오늘날까지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아버지는 안에서 서류와 의약품 병을 정리하고 있다. 오래된 정보를 최근 것으로 고쳐야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점검을 받는다고 호들갑 떨지 않는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우리가 받는 보조금에는 영향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 말마따나 승인 도장을 받으면 나쁠 건 없다. 조만간 의무 사항이 될 테니까.


유럽의 농업은 공동농업정책에 따라 유럽연합으로부터 보조금을 받는다. 이 정책은 전쟁으로 식량 보족을 겪고 난 1950년대에 수립되었다. 보조금 때문에 유럽의 농업이 현대화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대다수 유럽인이 미국식 또는 기업형 농업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지역 농가에서 재배한 음식을 먹고 싶어 한다.


한낮에 검사관이 도착한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며 진짜 관료의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이다. 아버지는 환심을 사려고 내가 동네 상점에서 구입한 티케이크와 커피를 대접한다. 나는 겁이 나서 마당에 못 나가겠다. 클로핀에 가서 소들이나 살펴보련다.


집에 돌아가니 검사가 끝나 있다. 아버지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두르며 검사관을 ‘연필 모가지 계집’이라고 부른다. 사소한 문제 하나 때문에 검사에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커피를 마시면서 어머니가 말한다. “다시 신청해야죠.” “그래야겠지.” 내가 말한다. “그자가 농장일에 대해 뭘 알겠어요?” “그렇지. 다음번에는 통과할 거야.” 나는 신문을 편다. 나는 새참으로 감자를 먹는다. 검사관의 방문은 곧 잊어버린다.


유기농

클로핀에 있는 소들을 못 본 지 일주일이 넘었다. 지프가 정비소에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내가 보험에 들지 않은 딴 차를 타고 몇 번 클로핀에 갔다 와서는 녀석들이 괜찮다고 알려준다. 지프를 몰고 그곳에 올라가지 못해서 서운하다. 생각하고 사색에 빠질 좋은 기회인데.


송아지들은 살이 붙고 있지만, 역시나 날씨 때문에 발육이 부진하다. 씨가 좋지 않다는 아버지의 말이 옳은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송아지가 스무 마리 남짓 된다. 깔짚을 깔고 지켜보느라 바쁘다. 병에 걸리지 않았는지 늘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암양이나 레드의 전철을 또 밟고 싶지는 않다.


날씨가 궂지만 농장 사정은 양호하다. 다들 생기가 넘친다. 이런 날이면 농사꾼이 천직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랜 세월을 떠나 있다가 마침내 돌아와 나의 소명을 발견한 것 같다. 부모님이 영영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언젠가는 내가 이어받아야 할 것이다. 물론 몇 가지 변화는 있을 것이다. 나는 유기농 농부가 될 작정이다. 그게 미래, 적어도 내가 그려보는 미래이니까. 도시에 식량을 공급해야 한다면 최고를 공급하고 싶다.


우리 안을 걸으면서 무엇을 할지, 어떤 소를 먼저 챙길지, 어떤 새끼가 나올지 꿈꾼다. 심심풀이로 소형 덱스터 품종을 몇 마리 키울까 싶다. 덱스터는 귀여운 미니어처 소인데, 앞쪽 풀밭에서 키우면 근사할 것이다. 블랙 화이트헤드도 있었으면 좋겠다. 젖이 잘 나오고 새끼도 잘 낳으니까. 유기농을 하려면 힘이 들겠지만, 나는 각오가 되어 있다.


여자 친구 비비언에게 페이스북으로 꿈 얘길 했더니 웃음을 터뜨린다. 내가 여기 있는 이유인 글쓰기는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다. 글쓰기가 어떻게 되었냐고? 나도 모르겠다. 송아지가 5분 만에 태어나지 않듯 책도 하룻밤 새 탄생하지 않는다. 당분간은 가축들에겐 내가 필요하고 내겐 가축들이 필요하다.


소의 혁명

미국인들이 대평원을 탐사하고 롱혼과 크래커 품종을 교배하는 동안 영국에서는 세상을 바꿀 농업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혁명은 튜더 왕조의 인클로저에서 시작되었는데, 공유지를 나눠 대상 방목(목구를 띠 모양으로 세분하여 목초 생산성과 채식량을 고려하여 면적을 조절하며 실시하는 집약적인 방목법-옮긴이)과 대상 재배(띠 모양의 조직적 배치로 작물을 재배하는 것-옮긴이)를 실시하던 중세의 개방 경작 방식을 이로써 종언을 고했다.


토지에 울타리를 쳐서 공유지를 사유지로 바꿈으로써 대규모 농장이 발전할 수 있었으며, 이와 더불어 농사법이 개량되었고 토지를 소유한 농부들은 자유롭게 혁신을 시도했다. 인클로저는 처음에는 반발에 부딪혔으나 농업 생산성이 영국 인구 증가율을 앞지르면서 불만은 잦아들었다.


소가 역사의 다음 단계로 나아간 것은 한 사람의 공이다. 오늘날 로버트 베이크웰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그가 없었다면 찰스 다윈도 앨프리드 러셀 윌리스도 없었을 것이다. 최초의 고기소를 만들어낸 공은 베이크웰에게 돌아가야 한다. 디실리 롱혼은 잉글리스 롱혼 암소와 웨스트모어랜드 수소를 교배한 결과이다. 이 품종은 산업화가 진행되는 영국 도시들의 소고기 수요 증가를 감당할 수 있었으며, 19세기 초에 약 3200만 명이던 노동자 수가 두 세기 만에 2650만 명 넘게 증가하는 데 한몫했다.


베이크웰의 영향력과 발상이 어찌나 대단했던지 프랑스의 샤롤레와 잉글랜드 북동부의 소트혼을 비롯한 새로운 소 품종들이 전 세계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한 세기 뒤에 영국 품종인 헤리퍼드와 애버딘앵거스는 시장 수요에 맞게 몸집이 작도록 선택적으로 교배되었다. 이 품종들은 그 뒤로 다시 교배되어 이제는 선 키가 19세기의 두 배에 이를 정도로 커졌다.


애석하게도 베이크웰의 신품종 소와 양이 모두 계속해서 인기를 끈 것은 아니었다. 디시릴 롱혼은 오늘날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은 소고기 생산 못지않게 소 교배의 유행과 취향 변화 때문인 듯하다. 어릴 적 우리 농장의 소들은 변화의 조용한 옹호자 베이크웰이 아니었으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소들은 야생 동물이 단순히 가축화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녀석들은 우리의 필요에 맞도록 신중하게 교배되고 사육되었다.


4월

돌고돌고

이제 아침부터 밤까지 농장일로 하루가 다 간다. 아버지는 아직도 편찮다. 침실과 거실은 왔다 갔다 하지만 밖에 나올 만큼 회복되지는 않았다. 낮은 괜찮은데 밤이 문제다. 밤일이 다시 시작됐기 때문이다.


팟캐스트가 지겨워져서 이젠 오디오북을 듣는다. 이번 주는 헤밍웨이 차례이다. 오늘은 <노인과 바다>를 듣는다. 전에도 들었지만, 이곳에서 뭍에 갇혀 지내다 보니 바다 풍경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맘때 농장을 운영하는 일이 늙은 쿠바인 어부가 커다란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는 것과 비슷하다고 상상한다. 우리 앞에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채 오래도록 힘겹게 노력해야 하니까. 바다에 가본 지 여러 달이 지났다. 일을 다 끝내고 아버지가 건강하게 복귀하면 해변에 갈 작정이다.


클로핀에서 데려온 소들이 새끼 낳을 때가 다 돼서 새로운 생명이 더 태어날 예정이다. 곤포가 하루하루 줄어든다. 아직 충분히 남았지만, 사료를 사야 할지도 모르겠다. 꼴이 부족한 건 우리만이 아니다. 딴 농장들도 겨울비 때문에 애를 먹는다. 오후 5시가 되니 캄캄하다. 낮 시간은 종일 농장에서 보냈다. 친구 팀에게 전화를 걸어 수다를 떨면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패배자

농장에서 혼자 일한 지 일주일이 넘었다. 요 며칠은 버거웠다. 새끼양이 한 마리 더 없어졌고 송아지 한 마리는 폐렴이 의심된다. 날씨는 다시 습해졌고 몸은 계속 피곤하다. 아버지는 말벌에 쏘인 게 아직도 안 나았다는데, 나는 시비를 걸지 않았다. 떨어져 있으면 싸울 일도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걸핏하면 병석에서 이것저것 요구하고 나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한다.


아버지는 세 번째 새끼 양 무리를 어미들과 함께 내보낼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겠노라고 말했다. 울타리 문과 정문을 열어 새끼들과 어미들을 데리고 강변길을 따라 나머지 양들이 있는 위 땅으로 갔다. 예전에 교훈을 얻었기에 조심스레 천천히 양들을 풀어주었다.


한참 동안 비가 와서, 양사에 돌아왔을 때는 몸이 푹 젖어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나오더니 왜 양들을 풀어줬느냐고 물었다. “그러라고 하셨잖아요.” “여기 집 옆에 있는 작은 울안에 풀어놓으라는 얘기였어. 그 새끼양들은 너무 작아.” “절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녀석들을 위 땅에 데려가지 말아야 한다는 건 천치도 알아. 아직 그럴 때가 안 됐다고.”


그렇게 일이 시작되었다. 비는 더 세차게 쏟아졌으며 우리는 새로 풀려난 무리를 조금씩 조금씩 작은 울안으로 데려왔다.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래땅에 혼자 있는데 전화가 왔다. “이리 와, 멍청아! 양 한 마리가 누워 있어. 어떻게 이걸 못 볼 수가 있지? 죽기 직전이야.”


아버지가 정확히 어디 있는지 몰라서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이제는 나도 화가 치밀었다. 그날 아침 초지에 나갔을 때는 아픈 녀석이 하나도 없었지만, 내가 놓쳤을 수도 있다. 양은 소만큼 억세지 못해서 불쑥 병에 걸리기도 한다. 병이 난 것이 아니길 바랐다. 암양 또 한 마리를 그런 식으로 잃고 싶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길에서 기다리다가 트랙터에서 내리라고 고함을 질렀다. 나는 부아가 치밀었지만 꾹 참고 아버지를 트랙터 운전석에 앉힌 뒤에 아래로 내려가 울타리 문을 열었다. 아버지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바보가 그걸 놓칠 수 있지?” 문득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몇 달간 쌓인 분노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이번에는 잠자코 있지 않고 대들었다.


“대체 뭐가 문제예요? 두 주 동안 밤낮으로 여길 관리했는데 나오셔서 꼬치꼬치 흠만 잡고 계시잖아요. 우리 얘기 좀 하자고요.” “관리했다고? 엉망이잖냐. 양들을 엉뚱한 곳에 풀어놓질 않나, 아픈 녀석이 있진 않나.” “그렇지 않아요. 저는 아버지를 도우러 왔어요. 나이를 들고 계시잖아요. 혼자서는 벅차시다고요.” “아무도 네게 도와달라고 부탁한 적 없다.” “어머니가 했어요.” “그렇다면 분명히 말하는데, 난 네가 필요 없다.” “넉 달간 여기서 일했는데, 제가 필요 없다고요? 그 시간에 딴 일을 할 수도 있었어요. 글을 쓸 수도 있었다고요.” “글쓰기라고? 책 네 권을 썼지만 하나도 성공 못 했잖냐. 일자리도 없어, 돈도 없어, 네 삶은 엉망이야. 넌 실패자라고. 나이 서른에 보여줄 게 아무것도 없잖아. 농사짓느라 네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는 비난은 듣고 싶지는 않다. 난 네가 필요 없어.” “그러면 더 할 말은 없네요.” “없지.”


삶이 나를 강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그때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악수를 건네며 작별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끝난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용서하기에는, 용서에 이르는 길을 찾기에는 너무 많은 말을 내뱉었다.


나는 쏟아지는 빗속을 걸어 집에 돌아갔다. 모자가 없어져서 머리카락이 달라붙었으며 억수로 퍼붓는 겨울비에 안경이 뿌예졌다. 뒤를 돌아보니 아버지는 트랙터로 안개 속을 달려오고 있었다. 고개를 내저으며.


바다

바다가 무척 보고 싶었다. 우리는 소형 렌터카를 몰고 골웨이에서 남쪽으로 클레어주를 향했다. 단컨은 달리기 애호가이다. 우리는 어디에 차를 세우고 운동화끈을 묶으면 좋을지 둘러보기로 한다. 우리는 파노아 마을에 주차했다. 4~5킬로미터쯤 갔을 때 던컨이 입을 연다. “부모님은 어떠셔, 존?” “어 잘 지내셔. 한바탕 다투긴 했지만.” “그럴 줄 알았어. 좀 우울해 보이더니.” “감당하기 힘들었다.” “뭐, 조만간 이겨낼 테니까.”


“호주에는 언제 돌아갈 생각이야?” “잘 모르겠어. 농장일이 재미있어졌거든.” “하지만 아버지와 그런 일을 겪었으면 거기서 지내고 싶지 않을 텐데. 넌 도시에 있는 게 훨씬 나아.” “그럴지도……. 하지만 돌아와 보니 내가 아는 건 농사일이라는 걸 깨닫게 돼. 내가 언제나 알았던 것 말이야.” 우리는 한참을 말없이 달렸다. 모퉁이를 돌아 속력을 줄인 채 바닷가를 따라 달렸다. 암소와 송아지가 왼쪽에서 단품을 뜯는 것을 보자 미소가 떠올랐다. 평화롭고 한가로워 보였다.



5~6월

귀향

한 달이 지나 나의 태양의 나날이 끝나간다. 내 여정의 다음 행선지를 찾아야 한다. 비행기를 타면 아일랜드까지는 금방이다. 공항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날씨는 아름답고 주위에는 초록이 만발했다. 어디에나 생명이 있다. 가축들이 전부 초지로 나가서 마당은 고요하다.


8시에 침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아버지가 말한다. “늪지에 갈 거다, 같이 갈 테냐?” 한 달 남짓 만에 처음 들은 말이다. 이것이 화해의 제스처임을 안다. “좋아요, 갈게요.” 토탄 뜨기는 오래된 관습이다. 토탄은 식물의 잔해가 화석화된 것으로, 한때 섬 전체를 덮은 고대 숲의 흔적이다. 늪에서 토탄을 떠내어 햇볕에 마르도록 놔둔다. 그런 다음 겨울에 땔감으로 쓴다.


토탄을 떠 올려 트레일러에 싣는다. 아버지가 천천히 말을 걸기 시작한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내 글쓰기에 대해, 스페인에서 어땠는지 묻는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처럼 이야기한다. 하긴 오랜만이다.


아버지의 행동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미안하다’와 ‘사랑한다’이다. 우리는 이마를 닦고 더위에 욕을 퍼붓지만 진심은 아니다. 실은 태양이, 계절의 변화가 반갑다. 자연의 패턴은 변하지 않지만 우리는 변할 수 있다. 아버지가 말한다. “여름이 왔구나.” 내가 대답한다. “하느님께 감사할 일이죠.” 소 분만 철이 끝났다. 가축은 모두 우리 곁에 있고 가족도 모두 서로 곁에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뿐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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