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혼자 음악회

   
이현모
ǻ
다울림
   
16000
2019�� 12��



■ 책 소개


클래식 절대로 듣지 마라!
클래식보다 재밌는 클래식 이야기가 영화처럼 펼쳐진다!


클래식의 재미와 감동을 제대로 맛보게 해줄 클래식 입덕 교양서. 저자 이현모는 지금까지 누구나 재밌게 클래식을 즐길 수 있도록 강의하고 글도 써 왔다. 그는 우리가 수백 년 간 전해져온 클래식 명곡을 제대로 즐기려면 작곡가의 삶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하품 나오고 불편하게 만드는 음악회 속 클래식 명곡들을 나만의 공간으로 불러내, 작곡가들의 사생활부터 명곡 속에 숨겨 놓은 깊은 이야기를 쏙쏙 끄집어낸다.


어린이를 위한 음악회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가 사실은 음악계와 자신까지 통렬히 풍자한 곡이었고, 복수극으로만 알았던 베를리오즈의〈환상 교향곡〉속에 프랑스 혁명 이야기가 감추어져 있으며, 차이콥스키의 열렬한 여성 후원자가 〈교향곡 5번〉을 듣자마자 질투심에서 맹비난을 퍼부은 사실까지, 우아하고 고상한 줄만 알았던 작곡가와 클래식에 대한 실체를 드러내며 즐거운 클래식 세계로 안내한다.


■ 저자
저자 이현모는 연세대학교 생물학과 석사를 마치고 20여 년간 과학 대중화 사업을 했으며, 클래식을 처음 들었을 때 감동을 잊지 못하고 혼자서 클래식 음악을 공부했다. 지난 2008년부터는 클래식도 쉽고 재밌게 즐길 수 있다는 주제로 강의도 하고 집필에 힘써왔다. 또 음악을 연주회장에서 듣는 것처럼 멋진 음향으로 들을 수 있는 하이엔드 오디오 상담과 평론을 하고 있다. 저서로 『인생을 바꾸는 음악의 힘』 『하이엔드 오디오 가이드』 『클래식 사용설명서』가 있다.


■ 차례
들어가며
  나 혼자 음악회를 더 유쾌하게 즐기기


01 자신마저 웃음거리로 만든 음악가 |생상스 〈동물의 사육제〉
  나는 왕이로소이다
  가짜 사랑 놀음에 빠진 남녀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음악계
  오페라가 그렇게 좋아?
  내가 한 수 위야!
  음악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
  겉과 속이 다른 음악가
  평론가 여러분! 제발 입 닥쳐!
  음악가, 평론가, 청중의 관계
  그들만의 리그
  요건 몰랐지~
  대중의 저속한 취향
  유행만 좇는 청중
  바보들의 떠들썩한 소동


02 대포도 동원하고 종까지 울린 이유 |차이콥스키 〈1812년 서곡〉
  전쟁의 고통 끝에 마침내 일어선 분노
  보로디노 전투의 진정한 승자는?
 울려 퍼져라, 우렁찬 종소리!


03 단 네 개 음으로 운명을 바꾸다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내 삶을 송두리째 날려버리는 운명의 힘
  이제 우리 일어나 무엇이든 하자
  살아있는 현재 속에서 행동하라!
  승리는 나의 것, 마음껏 기뻐하자!


04 오페라보다 더 유명한 서곡 |로시니 〈빌헬름 텔 서곡〉
  오래전부터 누려온 평화로운 삶
  폭압의 시대가 오다
  우리가 오직 원하는 건, 평화와 자유
   독립군의 행진 그리고 최후의 승리


05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리는 막장드라마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
  아, 사랑은 달콤하지만 너무 아파요
  그녀를 본 것은 꿈일까? 현실일까?
 사랑의 나르시시즘, 다음에 오는 것은…
  죽음을 직시한 영웅을 기리다
  껍데기는 가라


06 피아노 한 대로 나폴레옹 군대와 겨루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이런 사람이 진짜 황제!
  이 순간이 영원히 이어질 것처럼…
  진정한 평화와 자유로운 삶이여! 영원하라!


07 운명에 울고 박수에 웃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내 사랑의 비극적 운명
  그 사랑 돌이킬 수 있다면
  가을 들판 바라보며 가버린 나날들을 생각하네
  칭찬받는 것은 더 없이 큰 행복


08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슈베르트 〈교향곡 8번 ‘미완성’〉
  절망 속에서 부르는 희망의 노래
  풍경을 즐기며 걸어가는 자유인! 이게 바로 나야


09 멋진 신세계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 ‘신세계’〉
  모험의 땅에 도착하다
  지울 수 없는 그 이름, 향수
  나는 추겠다. 나의 춤을!
  끝까지 해보라! 실패할 수 있지만, 승리할 수도 있다!


10 사랑에 살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달빛’〉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그리고 또 사랑해
  내 눈앞에는 오직 그대만 있을 뿐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그것은 사랑!


참고 문헌


 




나혼자 음악회


자신마저 웃음거리로 만든 음악가|생상스 〈동물의 사육제〉

‘출판 금지.’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이런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더구나 생상스 스스로도 죽기 전까지 이 곡의 출판을 거부했습니다. 13곡 ‘백조’의 출판은 허락했지만, 나머지 곡들은 절대로 출판하지 말라는 유언까지 남겼습니다. 결국 생상스가 여든여섯 살로 세상을 떠난 후 이듬해인 1922년이 되어서야 모든 곡이 공개되었습니다.


불우한 프랑스의 천재 음악가

생상스가 활동하던 무렵, 프랑스의 젊은 작곡가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로마대상을 타고자 했습니다. 이 제도는 유능한 예술가를 뽑아 로마에 유학을 보내는 프랑스 문화예술을 발전시키려는 목적으로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상스는 로마대상의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기악 음악을 좋아한 생상스는 모차르트, 베토벤, 슈만을 즐겨 연주했고, 첫 교향곡을 열여덟 살에 발표합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에서는 오페라가 가장 인기 있었고, 시류에 영합한 작곡가들은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 같은 기악곡은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작곡가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깔보며 무시했습니다. 시대를 잘못 태어난 생상스는 결국 첫 교향곡을 무명의 독일 작곡가 이름으로 발표합니다. 초연 후, 생상스가 자신의 작품임을 밝히자, 일부는 생상스가 독일 음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독일주의자’라는 꼬리표까지 붙여 비판했습니다.


생상수가 마흔한 살에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를 완성합니다. 이 곡은 나중에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너무 이국적이고 종교적’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파리 오페라계에서 상연을 거부당합니다. 이런 무시와 푸대접은 나중에 그가 보수적인 프랑스 주류 음악계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계기가 됩니다.


동물의 사육제를 작곡한 진짜 이유는?

세상에 이리저리 치이던 생상스는 복잡한 세상에서 벗어나 쉬고 싶었습니다. 그는 여행할 때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주던 오스트리아 시골 마을 쿠르딤을 다시 찾아 머물렀습니다. 이곳에서 <동물의 사육제>를 완성합니다.


생상스는 악보에 “동물원의 대환상곡”이란 부제까지 적어놓습니다. 실제로 이 곡은 동물원의 다양한 동물들을 낭만적인 음악으로 묘사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괴롭힌 세상 사람들을 동물원의 동물로 풍자하거나 조롱까지 하지요. 이 작품에는 베를리오즈, 오펜바흐, 멘델스존, 체르니, 로시니 그리고 생상스 자신의 <죽음의 춤>까지 인둉되어 있습니다. 프랑스 민요도 들어 있고요. 결국 <동물의 사육제>는 자신을 포함한 음악계 전체를 풍자한 곡입니다. 자신을 평생 ‘독일주의자’, ‘프랑스 극우 국수주의자’로 비난한 일에 대한 복수인 듯합니다.


그런데 자신을 풍자한 것은 그렇다 쳐도, 풍자당한 다른 음악가들 입장에서 볼 때 무척 불쾌할 수 있습니다. 안 그래도 궁지에 몰려 있는 상황에서 주변을 모두 적으로 만든다면 앞으로 남은 인생이 더 힘들 것임을 생상스도 충분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동물의 사육제>를 사후에 공개하라고 한 것 아닐까요.



대포까지 동원하고 종까지 울린 이유|차이콥스키 <1812년 서곡>

1812년 조국전쟁

모스크바로 가는 마지막 보루였던 보로디노를 차지하기 위한 러시아 역사상 가장 치열하고 또 많은 피를 흘린 1812년 9월 7일 보로디노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끊임없이 벌어진 싸움 끝에 러시아군이 후퇴하면서 프랑스군의 승리로 끝나버리고 맙니다.


프랑스군은 모스크바를 점령했지만 그날 밤부터 큰 불이 일어나 나흘 동안 모스크바의 대부분이 잿더미가 됩니다. 알고 보니 이 화재는 러시아가 계획적으로 일으킨 거였습니다. 그래서 모스크바는 프랑스군이 먹을 것은커녕 잘 곳도 없게 되었지요.


결국 모스크바에 입성한 지 1개월 만에 프랑스군은 퇴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던 러시아군이 불쑥 나타나 프랑스군을 습격하고 분노가 극에 달한 농민들도 반격해 왔습니다. 여기에 혹독한 겨울 추위까지 가세하여 프랑스군은 처절하게 무너졌습니다. 러시아는 프랑스군을 끈질기게 쫓아 파리까지 추격하였고 결국 나폴레옹은 화제의 자리에서 쫓겨나 엘바섬에 유배됩니다.


전쟁이 꽃 피운 예술

그 후 러시아인은 프랑스로부터 조국 러시아를 지켜낸 이 전쟁을 ‘조국 전쟁’이라고 부르며 조국 러시아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됩니다. 이 무렵 그 전까지 무비판적으로 유럽 문화를 받아들인 것을 반성하고 러시아의 전통 문화를 지키려는 슬라브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조국 전쟁’은 러시아인들에게 ‘슬라브주의’와 함께 새로운 애국의 바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은 세련된 표현과 극적인 전개로 러시아는 물론 전 세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그의 관현악 곡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세계인이 함께 공감한 이유?!

차이콥스키는 ‘조국 전쟁’을 직접 겪지 않았지만 전쟁이 인권과 자유를 얼마나 심각하게 파괴하는지, 또 억압에 저항하고 해방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개화의 물결과 맞물려 새롭게 싹트기 시작한 조국과 인류에 대한 의식과 그의 음악적 재능은 전쟁의 비참함과 분노, 싸움 끝에 이룬 값진 승리와 자유를 가슴으로 느끼게 하는 매우 감동적인 선율로 대중들의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아마추어처럼 활동한 슬라브주의 작곡가들과 달리 차이콥스키는 관현악법에서 당대 최고의 전문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 러시아음악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러시아인이라면 누구나 구체적 이미지로 떠올릴 수 있는 음향을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전쟁의 모습을 생생하게 느끼도록 대포를 동원하고 교회 종까지 울렸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온갖 음향이 세련되게 구사된 <1912년 서곡>은 차이콥스키의 관현악곡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오페라보다 더 유명한 서곡|로시니 <빌헬름 텔 서곡>

재미와 맛을 추구한 음악가

로시니는 열두 살에 유명한 <현을 위한 소나타 6곡>을 작곡합니다. 열여덟 살에 오페라 작곡가로 데뷔하여 20년 동안 총 39편의 오페라를 작곡하는데요, 한 편 작곡에 몇 주 이상 걸린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초기와 만년의 작품이 완성도 면에서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대부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음악이 가장 쉬웠던 그야말로 긴말이 필요 없는 음악 천재였지요.


그런데 로시니는 게으름도 타고났습니다. 오페라 개막일을 코앞에 닥쳐서야 겨우 작곡을 시작하곤 했습니다. 하다못해 극장주와 음악감독이 로시니를 극장에 감금시켜놓고 작곡을 하도록 하는 일이 빈번해졌습니다.


어쩌면 로시니는 이렇게 악보를 만드는 데 지쳤는지 모릅니다. 겨우 서른일곱 살에 조기 은퇴한 걸 보면 말이지요. 은퇴 후의 행적을 보면 그의 생각을 대강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흔여섯 살에 세상을 뜨기 전까지 주로 여행하며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다닙니다. 자기 이름을 붙인 요리를 선보이고 요리책까지 씁니다. 또 송로버섯을 찾기 위한 돼지 사육에도 몰두합니다. 이처럼 은퇴 후의 여정을 보면 그는 뼛속까지 자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서곡, 오페라의 축소판

오페라 <빌헬름 텔>은 로시니 최후, 최고의 작품입니다. 로시니는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프리드리히 실러의 원작을 오페라 <빌헬름 텔>로 만들었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흔한 스토리의 오페라가 대중의 인기를 끄는 이유는 빌헬름 텔의 투쟁에다 총독 게슬러의 딸 마틸다와 독립운동가의 아들 아놀트의 순수한 사랑을 같이 엮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서곡, 오페라보다 더 좋아하는 진짜 이유

도대체 <빌헬름 텔 서곡>에는 어떤 매력이 있어서 오페라보다 더 자주 연주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로는 첫째, 짧습니다. 무려 5시간이 넘는 오페라보다 10분짜리 서곡이 더 간편하게 들을 수 있지요. 둘째, 이해가 쉽습니다. 구체적인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쉽게 그릴 수 있는 폭풍우, 팡파르, 말발굽 소리, 새소리, 목가적 선율은 누구나 듣자마자 금방 알지요.


로시니는 <빌헬름 텔 서곡>을 4파트로 구성했습니다. 오페라가 4막인 것에 형식을 맞춘 것입니다. 얼마나 잘 만들었으면, 베를리오즈가 ‘이 음악은 4파트로 구성된 교향곡이다.’라고 말했을까요.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리는 막장드라마|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

셰익스피어! 해리엇! 그리고 짝사랑~

1827년 7월, 파리 오데옹 극장에서 베를리오즈는 영국에서 온 셰익스피어 극단의 <햄릿>, 더 정확히는 극에서 오필리아 역을 맡은 해리엇 때문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베를리오즈는 세 살 연상인 해리엇 스미드슨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했습니다. 그는 그녀를 한시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의 관심을 전혀 얻지 못합니다. 얼마 후 그녀는 홀연히 영국으로 돌아갑니다.


사랑과 미움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했나요? 일방적 짝사랑에 대해 아무런 보답이 없자 그는 작곡 중이던 교향곡에 복수의 내용을 넣기로 했습니다. 짝사랑과 일방적 무시의 결과물이 바로 <환상 교향곡>입니다.


집착이란 뿌리에서 자라난 것은?

해리엇이 떠난 후 베를리오즈는 새 여자를 만납니다. 마리 모크라는 피아니스트였습니다. 해리엇에게서 받은 실연의 상처에서 벗어나려는 마음 때문인지 베를리오즈는 그녀와 서둘러 약혼까지 합니다.


1830년 8월 말, 베를리오즈는 신인 음악가의 등용문인 로마대상을 받습니다. 그는 유학에서 돌아오는 대로 결혼하겠다는 희망을 품고 다음해 로마로 떠납니다. 그런데 3개월 후 마리로부터 충격적인 연락이 옵니다. 파혼 통보였습니다. 베를리오즈보다 훨씬 장래성 있는 피아노업체 플레이엘의 후계자 카미유 플레이엘과 결혼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베를리오즈는 분노의 눈물을 펑펑 쏟습니다.


프랑스혁명과 베를리오즈

그런데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에는 오로지 집요함과 증오에서 나온 복수심만 들어 있을까요? 내용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그의 내면적 성격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 상황도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혁명의 시대였습니다.


스물일곱 살의 베를리오즈가 <환상 교향곡>을 완성한 1830년은 프랑스에서 7월 혁명이 일어난 해입니다. 베를리오즈는 7월 혁명이 일어난 ‘영광의 3일’ 중 마지막 날 손에 총을 들고 개혁적 시민들과 함께 다음 날 새벽까지 파리 시내를 돌아다닙니다.


혁명의 시대는 감수성이 예민한 베를리오즈가 자신이 처한 현실을 더 깊이 보고 가슴으로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그의 작품이 개혁적인 내용과 형식을 갖추게 된 주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환상 교향곡>의 4악장 ‘단두대로의 행진’과 5악장 ‘마녀의 축제’에서 혁명적 내용을 파격적인 음향으로 표현합니다.


베토벤 교향곡과 베를리오즈

셰익스피어 연극과 해리엇이 안겨준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베를리오즈는 또 하나의 충격을 경험합니다. 베토벤의 <교향곡 3번>과 <5번>을 듣게 된 것입니다.


연속된 충격들은 베를리오즈가 목숨처럼 여기는 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고, 고상하고 우아함을 숭배하는 보수적인 음악으로부터 그가 완전히 탈피하여 마침내 이런 생각에 도달하게 합니다.


“음악이란 자신이 체험한 것을 완전하고 정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일종의 서정적인 일기이고, 논리적인 추리에 의한 고백이다.”


충격적이고 혁신적인 음향 그 자체!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은 베토벤 교향곡의 형식, 셰익스피어의 극적 상상력, 괴테의 『파우스트』라는 구체적 재료를 그만의 몽상가적 상상력이라는 불꽃으로 가열하고 1830년 7월 혁명의 용광로 속에서 융합하여 빚어낸 작품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 모든 것을 그만의 혁신적 음향으로 그려내어 한편의 환상 이야기처럼 들려주는 데 있습니다.



피아노 한 대로 나폴레옹 군대와 겨루다|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베토벤이 이 곡을 작곡한 1808년은 최악의 해였습니다. 왜냐하면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가 베토벤이 살고 있는 오스트리아 빈을 침략했기 때문입니다.


우상에서 적이 된 나폴레옹

베토벤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숭배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이 자신의 이상이었던 자유와 평등사상을 실현할 영웅이 되리라고 굳게 믿었고 나폴레옹을 찬양하는 <교향곡 3번>을 작곡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1804년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가 되자 베토벤은 크게 분노합니다. ‘보나파르트’라고 제폭을 쓴 표지를 찢어버리고 대신 ‘영웅 교향곡’이라고 바꾼 일화는 유명하지요.


일상의 행복을 염원한 2악장

베토벤은 프랑스 군대가 빈으로 쳐들어온다는데도 피난을 가지 않았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전쟁처럼 국민과 군인들은 이 전쟁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해관계가 있는 정치권의 문제로 받아들인 것이지요. 권력을 쥐고 있는 왕, 귀족들만 빈을 빠져나갔습니다. 오히려 프랑스 군대가 빈으로 진격해 올 때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적대감보다 호기심과 감탄하는 마음까지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베토벤이 나폴레옹을 모델로 <교향곡 3번>을 작곡했던 것도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전쟁은 엄연한 현실이었습니다. 거듭된 흉작에 더하여 식량은 턱없이 부족해졌고 생필품의 가격은 치솟았습니다. 프랑스 군대에 대한 섣부른 호기심은 어느덧 지독한 증오와 절망으로 바뀝니다. 또 비참함과 외로움 속에서 황홀한 과거의 순간을 간절히 갈망합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나기만을 간절히 염원하면서……. 그런 솔직한 심정을 절절히 담은 음악이 2악장 아닐까요.


최고 그 이상을 보여준 <피아노 협주곡 5번>

베토벤이 <피아노 협주곡 5번>을 통해서 꿈꾸는 음악의 세상에선 모든 악기가 평등하고 조화롭게 어울립니다. 아마도 그는 프랑스 군대와 맞서서 싸울 때 황제와 국민 모두가 평등한 관계에서 하나로 뭉쳐 힘을 합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이 곡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게 아닐까요.


혁신은 이뿐만 아닙니다. 보통 협주곡에는 카덴차가 붙어 있습니다. 카덴차란 악보에는 없지만 곡이 끝나기 직전에 피아니스트가 자유롭게 연주하며 자신의 실력을 뽐내는 기교적이고 화려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베토벤은 뒤쪽에 있는 카덴차를 없애고, 자신이 직접 쓴 작은 카덴차를 앞으로 가져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곡의 이야기 흐름과 다른 카덴차를 빼내어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내용이 곡 전체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한 것입니다.


혁신은 질적인 면뿐만 아니라 양적인 면에서도 이루어졌습니다. 베토벤은 그전까지 약 20~30분이었던 피아노 협주곡 연주 시간을 파격적으로 늘려 ‘황제’라는 이름에 걸맞게 40분이 넘는 장대한 곡으로 만들어 스펙터클한 음악 드라마를 보여 줍니다.



멋진 신세계|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 신세계>

1891년 6월, 프라하에 살던 드보르자크는 한 통의 전보를 받고 큰 고빈에 빠집니다. 뉴욕의 저넷 서버 부인으로부터 온 전보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미국에 와서 1년에 8개월간 음악 수업을 진행하고 드보르자크 자신의 작품으로 연주회도 해달라는 제안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쉰 살이 넘은 드보르자크는 낯선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이 불편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가족을 남겨두고 대서양을 건널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서버 주인은 파격적인 조건을 내겁니다. 1년에 1만 5천 달러를 지급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금액은 당시 드보르자크가 프라하 음악원에서 받는 봉급의 무려 25배나 됩니다.


마침내 그는 미국행을 결심하고, 다음해 가을 아내와 두 아이와 함께 신대륙을 향해 떠납니다.


미국 음악의 태동과 드보르자크의 임무

19세기 후반 미국 음악계는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서버 부인을 포함한 미국의 음악 지도자들은 유럽 예술 음악을 일방적으로 수입하고 따라가기만 하는 단계를 넘어 자신들만의 예술 음악을 창조하길 원했습니다.


드보르자크가 뉴욕 국립 음악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연 첫 연주회는 신대륙 발견 400주년 기념행사 중 하나였습니다. 이날 거금을 추원한 헨리 휘긴슨 대령은 환영사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드보르자크가 미국에 온 이유는 콜럼버스의 신세계에 음악의 신세계를 연결하기 위해서입니다.”


드보르자크 역시 프라하음악원에서 받는 급여의 25배를 준다는 이유만으로 미국에 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미국 원주민의 민속 음악을 알고 싶어 했고, 흑인 영가에서 귀를 기울였습니다.


드보르자크는 뉴욕 국립음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자신의 작품을 지휘하고 새로운 곡을 창작하기 시작합니다. 또 미국의 현지 음악도 채집합니다. 당시에는 녹음기가 없어서 듣는 대로 악보에 적어놓습니다.


신세계로부터 보내는 음악 뉴스

드보르자크는 고향과 전혀 다른 신대륙의 문화에 큰 감명을 받습니다. 가부장적 신분 사회에서 자란 그에게 자유롭고 평등한 미국 사회는 하나의 충격이었습니다. 이처럼 자유로운 사회와 신대륙의 새로운 음악 체험은 그의 내면으로부터 선율이 봇물이 터지듯 나오게 합니다. 미국에 온 지 3개월도 지나지 않은 1893년 1월부터 <교향곡 9번> 스케치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말에 이 교향곡을 완성합니다.


그는 이 곡의 부제를 “신세계로부터”라고 붙였는데, 이걸 줄여서 <신세계 교향곡>이라고 부릅니다. 부제가 ‘신세계’라고 해서 곡의 내용이 미국 민속 음악을 주로 인용한 것이라고 짐작하기 쉽지요. 그러나 드보르자크에 의하면 ‘신세계로부터 받은 인상’ 정도이고, 주요 내용은 고향 보헤미아의 선율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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