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도 마음대로 정리할 수 있다면

   
식식
ǻ
책밥
   
14000
2019�� 10��



책 소개

 

오늘의 감정은 오늘의 서랍 속으로
이번 계절에는 내 마음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불편한 구두를 신은 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 신을 벗어던지고 발을 쉬게 한다. 비를 맞고 돌아온 날이면 젖은 외투가 잘 마르게 널어놓기도 하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내기도 한다. 나의 일부가 되어 함께한 것들을 살뜰히 살피는 것이다. 저자는 옷을 정리하는 일에서 나아가 자신의 마음도 돌아보며 정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 마음이지만 결코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을 해보자고 말이다. 목적에 따라 서랍의 칸을 나누어 쓰듯 내 감정도 뭉뚱그려진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얼마든지 바로잡을 수 있고 나만의 서랍으로 넣을 수도 있다. 먼저 저자는 습기부터 제거하자고 한다. 나와 가족, 내가 선택할 수 없던 관계를 돌아보며 깊은 수심에 빠져도 스스로를 건져 올려 볕이 잘 드는 곳에 두어야 한다고.

 

양말 한 짝을 잃어버려도 혹시나 싶어 남은 짝을 잘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아직 내 곁에 남아 있는 이들을 잊지 않는 것. 빛바래고 오래된 남루한 옷에는 안녕을 고하듯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인연은 미련 없이 놓아 주는 것. 바로 저자만의 처방이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꼭 필요하지 않을까. 『감정에 체한 밤』으로 수많은 독자에게 간결한 울림을 준 저자는 『마음도 마음대로 정리할 수 있다면』에서도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를 하나둘 풀어 나간다.

 

■ 저자 식식
유독 길고 깊게 느껴지는 밤이 많았고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없는 시간을 걸었다. 내게 무언가를 쓰는 행위는 필수적이었다. 그것은 나의 일상이자 즐거움이었으나 때론 비명이기도 했다. 어떻게든 지금 느끼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었고, 활자를 쏟아 내는 일로 울음을 대신하고 싶었다. 아직도 불면 곁에 잠들고 많은 꿈을 꾼다. 그리고 지금 여기.


■ 차례
프롤로그

 

1장 습기 제거하기
2장 양말 짝 맞추기
3장 철 지난 옷 버리기  

 




마음도 마음대로 정리할 수 있다면


1장 습기 제거하기

서랍 한 칸

내 감정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걸 정리하는 것은 감정의 서랍을 만드는 일이므로 생략할 수 없다. 모든 걸 질서 정연하게 정리하기란 힘이 들고 얼마 안 가 다시 흐트러지기도 하며 때론 제 마음대로 열려 나를 골치 아프게도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어지러움을 반복하다 보면 좀 더 속도가 붙는다. 마음이 낫는 일도 빨라지는 건 아니지만 어떤 것의 제자리를 찾아 두었단 것만으로도 안심이 된다. 나도 결국엔 제자리를 찾을 거라는, 지금의 나도 시간이 지나면 서랍 한 칸에 자리 잡을 거라는 믿음, 그 하나를 붙잡는다.


무감각의 양면

생각을 비우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넘치는 만물에 대한 관심을 줄여 보기로 한 이후 왠지 무감각해진 기분인데, 이게 왜 나에게 상처가 되는 걸까. 나의 예민함이 상처를 만드는 것 같다 그것이 모난 부분이라면 없애고 싶었는데 방법이 틀렸는지도 모르겠다. 느끼며 깨닫던 것까지 사라져 버린 듯하니 말이다. 무관심이 꼭 편안함을 뜻하는 건 아니었음을, 타인에 대한 무감각이 스스로에 대한 무관심일 수도 있음을 알아간다.


보물찾기

어릴 때부터 보물찾기를 한다고 하면 나도 아주 좋은 걸 찾을 수 있으리란 식의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분명 처음 몇 번은 찾아내겠노라 다짐도 했던 것 같은데 큰 만족을 얻지 못하자 처음부터 기대 않는 걸 택했던 게 아닌가 한다. 나름 구석구석 찾아 돌아다녔음에도 무언가를 찾아낸 기쁨이 담긴 환호성은 다른 곳에서 들려오기 일쑤였기에 어린 마음에 흥미가 떨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내가 찾는 건 발견하기 아주 어려운 곳에 있을 거라고 착각했던 게 아닐까 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좀 더 마음을 편하게 먹었더라면 무언가를 찾아낼 수도 있었을 텐데. 적어도 그날의 분위기를 좀 더 즐길 수 있었을 텐데.


그러자 내 현재를 둘러보게 됐다. 지금의 내 시야도 너무 구석지거나 다가가기 어려운 곳만을 행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면서 말이다. 나도 모르게 놓치고 있는 기쁨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는 찾아내야만 한다는 강박보다는 찾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을 품을 수 있어야 할 텐데, 어떨까.


반가울 리 없는

현실이라는 건 내가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침대 옆에 앉아 있다. 꼿꼿하게 나를 기다리다 내가 눈을 뜨면 비로소 기쁜 얼굴로 다가오며 내게 “일어났어? 날 맞이할 시간이야”라고 말한다. 가장 밀어내고픈 것이 가장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이 하루의 시작이 된다.


짊어진 책장

나이를 책으로 따지자면, 그러니까 1년을 한 권이라고 치면 나는 지금 내 나이만큼의 책들을 갖고 있는 상태인데 과연 모두가 좋은 책일까. 나의 책장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보기 좋은 것들만 정갈하게 꽂히지 않았음은 안다. 보기엔 괜찮지만 읽어 보면 별거 없는 것도 있겠고, 그 반대인 것도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모든 페이지를 펼쳐 보여 줄 것은 아니지만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단 이유 하나로 일부를 처분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원하지 않아도 나의 책장은 시간에 정비례하며 채워질 것이다. 그 사실이 좋지도 싫지도 않다. 있지도 않은 손금을 칼로 그어 만들 정도의 용기가 없었던 시간이 더 많았지만 내가 아니었다고 부정할 수도 없다. 제멋대로 바래고 낡아 갈 것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 등에 짊어진 책장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이 무게는 온전히 홀로 책임져야 하는 것임을 느끼다 앞으로 채워질 것들을 그려 본다. 되도록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에 가까웠음 좋겠단 바람과 함께.


감사

좋아하는 것들로만 구성된 세상에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은 누구나 많이 해보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완전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도 상대적으로 덜 좋은 것을 기어코 찾아내 결국에는 싫어하는 것으로 규정해 버리지 않을까. 모든 건 상대적이고, 그걸 피할 순 없으니까. 싫어하는 게 잔뜩 존재하는 현실에서 언제고 끌어안을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하는 사실에 고마워하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이겠구나 싶다.


어른

어린 시절엔 지금쯤의 내 모습을 떠올리면 뭐가 됐든 되어 있을 거라 상상했었다. 어린 시선으론, 가만히 있어도 나이를 먹는 것처럼 다른 것도 알아서 따라오겠거니 했던 것 같다.


하지만 현재를 바라보면 어떠한가. 어릴 적 느꼈던 ‘어른’이란 단어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 있나. 어린 내 앞에 서게 된다면 얼마큼 당당할 수 있을까. 가끔은 정신적으로도 아직 무엇도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슬퍼 홀로 꺼이꺼이 흘러넘친다.


얕은 소음이 주는 안심

텔레비전을 보지 않아 지금은 집에 들여 놓지 않았지만, 옛날엔 혼자 있으면 늘 텔레비전을 틀어 놓는 버릇이 있었다. 어렴풋하게 들릴 정도의 음량만 고집했던 건 어쩐지 무섭기도 하고 허전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주아주 무서운 날에는 꼭 생방송으로 골라 틀어 놓기도 했따. 지구에 나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요상한 안심을 하기 위해서.


그러지 않아도

너 고생 많이 했잖아. 그렇지?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잖아. 맞지? 난 이제 네가 너를 돌봤음 좋겠어. 누군가를 미워하는 게 힘든 일이라고 해서 그것 대신 널 미워하는 일을 선택하지 않았음 좋겠다고. 굳이 용서할 필요도, 용서를 구할 필요도 없어. 하고 싶지 않고 하지 못하겠으면 하지 말아. 그것도 하나의 선택임을 알아줘. 등을 떠미는 것들은 이 세상에 너무 많아. 너까지 스스로에게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정말이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세상의 끝

언제까지고 “왜 그래, 속상했어?”라고 물어봐 주는 사람은 없다. 세상 끝까지 쫓아와 날 붙잡아 주는 사람은 없다. 모든 손을 뿌리치고 아주 멀리까지 갔다면 그곳의 적막을 홀로 감당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잠깐의 고독이 될지, 오랫동안 이어지는 외로움으로 굳어 버릴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부정하며 나아가기

어른이 된다는 건 더 많은 것들을 알아가는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그건 어렴풋하게 내린 정의였을 뿐이었다. 요즘엔 생각이 좀 바뀌어서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거나 지적 받았을 때 그걸 얼마나 수용하려고 하는가’를 기준 중 하나로 삼고 있다.


사람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순 없고 개인마다 절대 양보 못 하는 부분들이 있다. 본인이 옳다고 여겨 온 것들은 오랜 시간이 지났을수록 부정하기 힘들어진다. 사안에 따라 인생 전체를 부정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므로, 그렇기에 상대가 누군가와는 상관없이 이야길 들어 보고 내가 틀린 걸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고 받아들이려 해보는 유연성을 갖는 건 힘든 일이다.


자신의 시간을 믿지 않고 다른 이가 지나온 시간과 그 사이의 과정들도 받아들여 보며 다소 어려워도 이해해 보려 하기. 그게 어른으로 향하는 길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니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한 자신이 더 없어지는 것 같지만, 어떤 태도로 직면하는가는 중요한 지점일 거란 생각이 들어 필요하다면 익숙한 것이라도 부정하고 버리는 연습도 해나가 보려 한다. 이제까지 함께한 것들을 모두 버리겠단 뜻은 아니다. 좀 더 분명히 지켜 나가고 싶은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 말하고 싶다.


선택에는 그림자가 있어서

맘 편하게 행복하고자 하는데, 늘 거기엔 기회비용과 죄책감이 따른다. 하지만 뒤에서 들려올 발소리를 예상하는 데만 빠지면 어떤 선택도 불가능해지므로 나는 나의 일을 한다. 무엇을 하는 게 가장 좋을지는 몰라서 무엇이든 해본다.


자존감

자존감에 대한 생각을 최근 들어 다시 정리했다. 처음엔 일단 높여 두면 그대로 유지되는 거라 생각했고, 그 다음엔 왔다 갔다 하는 건 자연스러우며 최대치와 최소치가 올라간 거라 생각했다. 허나 요즘엔 내면의 무언가가 하나의 그릇이라면 자존감은 그걸 다루는 힘이라고 느끼고 있다. 메모 보드에 핀으로 꽂힌 메모지처럼 고정된 게 아니라.


내가 가진 그릇은 자의 또는 타의에 의해 옮겨지거나 엎어지거나 때론 박살날 수 있다. 살다 보면 그런 일은 언제나 생긴다. 문제는 그걸 제자리에 놓거나 치우는 것, 필요하다면 다시 마련해 두는 것인데 그때 그 과정에 들어가는 모든 에너지가 자존감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어떤 상태 자체 혹은 증상이나 모습 같은 게 아니라 다시 되돌려 놓고자 하는 체력. 모종의 이유로 어질러지고 흐트러져도 금세 정리하고 회복할 줄 아는 힘. 단순히 “난 아주 멋진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보다 조금 더 상위의 것. 어쩌다 흠칫하는 경우가 생겨도 결국엔 스스로 정리해 낼 줄 알며, 무례한 누군가가 네 그릇은 너무 별로라고 멋대로 판단했을 때 “당신이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냐”라고 할 수 있는 강도.


한 가지에 대한 정리를 끊임없이 새로 하는 건 내가 손 놓고 싶지 않은 부분이란 뜻이겠거니 하며 얼마나 잘 지켜 내고 있나 돌아본다. 뜨내기 같은 정리지만 점점 입체적으로 발전한 것 같아 흡족하다. 계속해서 견고해진다면 좋겠다.



2장 양말 짝 맞추기

테이크, 테이크, 테이크

사랑받지 못하는 것도 슬픔의 이유가 될 수 있지만, 받은 만큼 주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도 슬픔의 이유가 될 수 있어. 어떤 마음으로 여기는지 알기 때문에 괜찮다고,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하지만 그게 나를 울릴 때가 있어.


까마득한 문제 풀이

인간관계의 인과관계란 무엇일까. 어디서나 딱 떨어지는 공식 따윈 없고, 누군가 귀띔해준다 해도 모든 건 스스로 풀어야 하는 난제들뿐이며,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문제는 정확히 언제 어디서 나타나 어떻게 내게 도착한 것일까. 기척 없이 흐르는 물살에 눈치껏 몸을 던지거나 빼내야 하는 피곤함. 겨우 풀어내고도 그 몇 배만큼의 문제가 쏟아지면 미지수가 모두 사라질 날이 오긴 하는지도 미지수로 남는다.


벌어지는 틈

떠보는 방식이 아니면 대화를 하지 못하는 사람과 결국 멀어지는 건, 그가 떠본 만큼의 틈이 계속 생겨 끝내 크게 벌어지기 때문이겠지. 있는 힘껏 뛰어도 건널 수 없을 정도로 넓은 간격을 좁히기엔 너무나도 늦어 버린 때가 되면, 아무리 커다란 후회라도 접착제가 되어 주지 못하는 법이다.


관찰 혹은 염탐

사람이 얼마나 웃기고, 비열하고, 꼬여 있는 동물인지에 대해서는 굳이 타인을 오래 관찰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내 자신의 모든 생각들과 순간적인 감정들을 찬찬히 읽어 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탓해야 하는 대상을 정확히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 상해도 탓할 사람 하나 없는 일이 허다한 삶. 그 속에서 문제의 원인을 타인에게 덧씌우고픈 이기심이 고개를 드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내 탓이 아니라면 조금은 편해질 거란 꼬드김을 이겨 내는 힘이 없었다면 무엇을 더 잃었을지 알 수 없다.


난해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잠재운다. 숨만 쉬어도 흐려지는 것들이 진창인 곳에서 당장의 욕심만을 위해선 안 된다고 달래면서. 또 한 번 엿본 나의 일면을 모든 체하진 못하리라.


허망스레

안 그럴 것 같던 사람도 그런 말을 한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되는 순간, 보이진 않지만 충분히 체감할 수 있는 벽이 내 앞을 가로막는다.


왜 이 사람에게도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단 걸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을까. 내가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함께 잘 지낸 시간이 짧지는 않기 때문에? 단순히 이제까진 그 말을 들어 볼 일이 없었기 때문에?


미리 예상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아니,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런 기분까진 안 들었을까. 단순히 이 사람에게서만큼은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었던 걸까. 덧없음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결국 가득 찬 허무는 한동안 굳건했다.


흔들리는 다리

내가 해준 것들에 대해서만 따져 보기 시작하면 그 관계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니, 애초에 흔들리고 있던 것을 깨달은 시점이 그때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크게 흔들거리는 다리 위에 있는 사람이 본인의 안위를 가장 중요시 하게 되는 건 당연하다. 오래 버티고 있을수록 이 흔들림은 상대방이 만들고 있단 생각만 강해지고 만다. 거기서 커지는 분노는 다리 위에서 내려온다는 선택지를 떠올리는 걸 막는다.


톱니바퀴는 제멋대로

너는 충분히 노력했다 생각해도 튕겨져 나오는 일이 있을 것이다. 네가 못하지 않았다 생각해도 타인이 못했다 여기면 그만인 일이 있다. 생각보다 많은 것이 그런 식으로 돌아간다. 수도 없이 많은 톱니바퀴가 그리 정교하지 않음을 알게 됐을 때, 도대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 건지 신기해하는 네게 답을 주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알아서 잘 맞물려 봐라’ 기껏해야 그 정도가 다일 것이다.


여전히

어느 날은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줬던 도움, 다듬어진 말들, 표현을 고르며 말하느라 느려졌던 말의 속도 등을 떠올리며 고마워하다 난 그만큼 못해 주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이 속에서 날아들면 입이 굳게 다물어진다. 우리의 노력을 양 끝에 매달아 저울질할 수 있다면 다소 기울어져 있는 게 아닌가 싶어지는 것이다. 그들이 내게 자선 사업을 하는 건 아니니 그런 행동엔 이유가 있을 거라 여기지만, 여전히 모두의 등을 보며 걷는구나 하게 된다. 그들의 방향을, 다시금 열심히 뒤따르려 애쓴다.


사실 그대로

“사실은 이런 의미의 말이었어요.”


상대방에게 해석하는 일을 시키지 말자. 시켰다면 그대로 전해지지 않았대도


억울함에 파묻히지 말고,


설명할 기회가 항상 주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마지막엔 나와 나

누군가 나를 싫어하는 것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것은 그럴 수 있기 위해 거는 자기 최면과 비슷한 것이다. 내가 완벽하게 초연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미리 해두는 대비 같은 거랄까. 내게 향하는 증오를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상대방만 기쁘게 하는 일일뿐더러 나는 나로 살아갈 수 없게 되니까.


모두에게 사랑만 받고 싶단 욕구가 들어도, 어쩌랴. 나와 함께 끝까지 남아 있을 사람은 다른 모두가 아니라 내 자신인데.


영원하지 않은

대화에 대강 임하는데도 매끄럽게 이어지는 건 상대방이 그만큼의 수고로움을 감수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보통은 ‘우린 정말 잘 맞는 것 같아’라고 섣부른 착각을 하지만 말이다. 착각이 착각임을 깨닫는 시간이 늦어질수록 품의 웅덩이는 점점 작아지고, 결국 그것이 존재한 적도 없던 것처럼 메마른 땅이 된다. 그렇게 버석한 모래 위, 사람의 흔적조차 사라진다.



3장 철 지난 옷 버리기

이런 사람인 나

연애를 하다 보면 자신이 어디까지 쪼잔해질 수 있으며 선천적으로 얼마나 지질한 인간인지 또렷하게 볼 수 있죠. 바보 같은 면과 심술궂은 면들을 많이 만나게 되니까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냐는 말의 ‘이런 사람’이 내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적당함으로 눈 가리기

사랑받는 기분과 욕심에만 흠뻑 취하다 보면 때로 가장 아껴야 할 사람을 잠시 잊어버린다.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한껏 안일해져서 ‘이 정도만 해도 되겠지’ 하고 마는 것이다. 스스로가 얼마나 이해받고 있는지, 어떻게 계속해서 이어져 나갈 수 있는지는 알지도 못한 채 말이다. 뒤돌아보는 일 한 번 없는 사람은 자신의 발자국을 알 수 없는 법이다.


“됐어”라거나 “아무것도 아냐” 같은 말들은 미세한 상처가 되어 쌓인다. 인생을 순간적으로 크게 흔들지 않지만, 사소하게 남는 흠은 사라지지 않고 조금씩 모여 큰 벽을 이룬다. 도무지 그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숨 막힘을 동반하며 느리게 낡아 간다.


고민한다는 자체가 아직 아니란 뜻인 걸까. 그런 의문 때문에 고민에 할애하는 시간은 더욱 길어진다. 경험상 ‘끝’이란 단어가 주변을 맴돌 때마다 다는 그걸 환대하지 않았다. 아직, 아직은 아냐. 혹은, 한 번 만 더. 그런 마음으로 등을 떠밀며 “아직 아니라고 했잖아. 다음에 다시 와”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말 모든 게 끝날 시점엔 ‘끝’이란 단어의 흔적은 요만큼도 눈에 띄지 않았다. 아마도 그곳에 다시 찾아왔을 그 말을 마주치기도 전, 이미 내가 거길 떠나 버렸기 때문이리라.


무책임한 화법</P>무뚝뚝하단 말로 자신의 무심함과 무책임함을 포장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특정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이 어색하거나 잘 모르는 것과 상대방에게 조금 더 집중하고 기민하게 관찰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주 다르다.


단순히 조금 더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해내고 싶지 않아서,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아서, 전과 같은 마음이 남아 있지 않아서 한 선택들과 무뚝뚝함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무책임이란 말에 박힌 가시까지 본인이 갖기엔 두려워 비슷한 말 뒤에 숨고 싶은 이들의 화법에 끌려 나온 단어는 아닐까.


환상의 다른 말은 욕심

사람은 상대방이 어느 방향으로 노력하고 있는지에 따라 현재 모습을 받아들이려 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줘” 그 말이 머금고 있는 환상은 부담이란 녹이 되어 스며든다. 천천히 부식되어 가는 사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점점 낡고 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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