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삶이 될 때

   
데이비드 파젠바움(역:박종성)
ǻ
더난
   
15000
2019�� 10��



■ 책 소개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든, 누군가는 최초가 되어야 한다”
시한부 의대생의 캐슬만병 치료법 찾기

 

스물다섯의 나이에 희귀병인 캐슬만병 선고를 받은 젊은 의사가 쓴 자전적 에세이. 펜실베이니아 의과대학 교수인 저자는 의대생 시절, 병명조차 모르고 죽을 고비를 넘긴 후 간신히 병명을 알게 되지만 치료법을 몰라 다시 사경을 헤매는 일이 반복됐다. 그러나 절망의 순간에 가까스로 "누군가는 최초가 되어야 한다"는 삶의 의지를 불태워서 순순히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는 중환자실의 불운한 환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열정적이고 거침없는 태도로 자신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백방으로 찾아 나섰다.

 

이 책은 최악의 절망적인 상황을 희망적인 현실로 바꿔나가는 과정과 행동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기적을 만들어낸 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한 사람만을 위한 기적이 아닌, 수많은 희귀병 환자들에 대한 기적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저자가 체험한 병의 특성과 스스로를 실험한 치료 자료를 바탕으로 시작한 캐슬만병네트워크 (Castleman Disease Collaborative Network, CDCN)는 잘 알려지지 않은 병을 진단할 수 있는 표준적인 접근법을 고안해서, 캐슬만병 환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희귀병 환자들이 치료법을 찾을 수 있도록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모든 장기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화학치료로 빠지기 시작한 머리카락을 아예 모두 밀어버리는 순간에도 가족들과 농담을 할 정도로 대범하지만, 온몸이 부어오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여자친구의 면회만은 극구 거부하는 수줍은 소년의 마음도 품고 있는 저자는 불굴의 의지로 캐슬만병과 적극적으로 싸우고 있으며 최근 5년은 아직까지 재발하지 않고 있다.

 

■ 저자 데이비드 파젠바움
펜실베이니아대학 의과대학 최연소 교수.

 

미국국립보건원NIH의 연구기금 지원을 받는 의사이자 과학자인 파젠바움 박사

는 자신과 같은 희귀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더욱 효과적인 치료법을 찾아주기 위해 캐슬만병네트워크(CDCN)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아버지가 의사였던 파젠바움은 어머니가 뇌종양으로 돌아가시자 조지타운대학 풋볼팀 쿼터백을 그만두고 의사의 길을 택했다. 갑작스런 불치병이 찾아와 시한부 선고를 받기 전까지는, 학력과 체력 그리고 외모까지 출중했던 전도유망한 의대생이었다. 옥스퍼드대학 석사학위와 펜실베이니아대학 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난치병 연구를 모아서 치료법 개발에 속도를 높이는 방법을 찾고자 와튼스쿨에서 경영학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포브스》가 선정한 건강관리 부문 ‘가장 영향력 있는 30인의 리더’에 이름이 올랐으며 《베커스호스피털리뷰Becker’ Hospital Review》에서 건강관리 부문 ‘최고의 리더’로 꼽히기도 했다. 2016년 필라델피아 세계문제위원회가 수여한 아틀라스상Atlas Award을 받았고, 희귀병 분야 호프과학상RARE Champion of Hope science award을 수상했다. 그의 사연은 《뉴욕타임스》《리더스 다이제스트》《사이언스》에서 커버스토리로 다뤘고 《투데이》에서 방송됐다.

 

■ 역자 박종성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방송국 PD로 일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외서를 번역 소개하고 있으며, 특히 창의성과 관련된 인간의 행동, 마음, 지능에 관한 책에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옮긴 책으로 『생각의 탄생』『유쾌한 크리에이티브』『감각의 매혹』『안녕하세요, 기억력』『인간 생태 보고서』『천재의 탄생』『생각공유』『어떻게 소통할 것인가』『경제학이 풀지 못한 시장의 비밀』『아인슈타인의 보스』 등이 있다.

 

■ 차례
프롤로그

 

제1장 최초의 순간들
제2장 불시에 찾아온 이별
제3장 울지 말아야 하는 이유
제4장 무모하고 격렬한 시간
제5장 농담처럼 다가온 미지의 병
제6장 죽어가는 일에 종사한다는 것
제7장 뭔지 모를 그놈이 지나간 뒤
제8장 기나긴 추적의 서막
제9장 혼자가 아니라는 신호
제10장 또다시 폭주하는 병
제11장 아플 때 곁을 지킨다는 것
제12장 조용한 병실의 융단 폭격
제13장 전 세계에서 모인 의사들
제14장 마지막을 위한 준비
제15장 긴박한 실험은 계속되고
제16장 잠시 구름이 걷힌 하늘
제17장 또 하나의 죽음을 뒤로 하고
제18장 고통이 되돌아오는 속도

 

에필로그

 




희망이 삶이 될 때


불시에 찾아온 이별

현재의 내 모습은 이전 모습에 비하면 허깨비나 다름없다 보니 한때 벤치프레스를 170킬로그램까지 했다는 내 자랑은 거짓말처럼 들릴 것이다. 의대 친구들은 나를 괴물이라 불렀다. 의대에 들어오기 전에 대학 풋볼 선수로 뛸 때도 그 정도로 ‘괴물’ 같지는 않았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힘든 시간을 보낸 후에 나는 힘을 되찾았고 모든 문제에 정면으로 맞섰다. 나는 건강했고 잘나갔다. 멋진 여자친구 케이틀린도 생겼다. 케이틀린은 엄마의 죽음으로 내가 힘들어할 때 든든한 버팀목이 돼줬다. 그녀가 노스캐롤라이나의 롤리에서 대학의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우린 멀리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의사가 되고 싶어하는 나를 응원하고 격려했다. 덕분에 나는 내 엄마를 죽인 그 병을 절멸시키겠다는 목표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뭔가 세상을 정복해가는 느낌이었다.



농담처럼 다가온 미지의 병

롤리에서 방학을 보내고 베들레헴의 병원으로 돌아가서 순환 실습의 마지막 코스인 산부인과 외래로 이동했다. 그런데 진짜 이동이 일어났다. 내 몸 상태가 완전히 바뀐 것이다. 활기는 사라지고 엄청난 피로감에 시달리기 시작했는데 그게 갈수록 심해졌다.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카페인 정제와 에너지 드링크를 더 많이 먹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빈방을 찾아 들어가 휴대전화 알람을 7분 후로 맞춰놓고 잠을 잤다. 그렇게 쪽잠을 이어 붙여 하루 6시간 수면을 채웠다. 나는 뭔가 잘못돼 가고 있는 케이틀린과의 관계와 내 건강 문제를 제외한 나머지 것들에만 집중했다.


순환 실습 최종 시험 4일 전 아침에 깨어났을 때 내 침대보가 땀으로 흠뻑 젖어있는 걸 발견했다. 비틀거리며 싱크대로 가서 물을 좀 마시려고 하는데 내 목 양쪽에서 덩어리가 만져졌다. 화들짝 놀랐다. 거울에 비춰 보니 림프절이 커져 있는 게 보였다. 그 얼마 전에 림프종에 걸린 젊은 환자를 진료한 적이 있는데 그의 것과 똑같았다. 더 이상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몸에서 그런 게 만져졌다면 나는 그 즉시 진단 내릴 태세를 갖췄을 것이다. 감염? 단핵증? 루푸스? 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 순간, 나 자신을 보면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가 환자임을 기를 쓰고 부정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근무중인 내과의가 내게 말하길, CT 촬영 결과 전신에 걸쳐 림프절 비대가 확인됐고 혈액 검사 결과는 그 전날보다 나쁘다고 했다. 그가 보기엔 림프종이나 다른 혈액 관련 암이 아닌가 싶다고, 그러나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긴 하지만 바이러스가 원인일 수도 있으니 추가 검사를 더 해보자고 했다. 그 의사는 신속하고 전문적이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았다. 모든 징후가 악성 림프종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도 나도 그걸 알았다.


2주일이 채 지나기 전에 내 모습은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병원에 들어갈 때는 97.5킬로그램으로 거의 운동 중독자의 몸매를 하고 있었다. 그랬는데 체액으로 인해 41킬로그램이 늘었고 근육에서 23킬로그램이 빠져나갔다. 간부전이 있다 보니 혈관에서 체액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는 주요 인자가 생성되지 않았다. 그래서 복부와 다리, 팔, 심낭, 폐, 간으로 체액이 쇄도했다. 의사들은 내 혈관에 혈액이 충분히 유지되도록 수 리터의 수액을 정맥 안으로 투여했다. 그래야만 심장이 피를 신체 중요 기관으로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끊임없이 새어나갔다.



죽어가는 일에 종사한다는 것

나는 내가 앓고 있는 그 무엇이 매우 기이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한편으로 내 병의 진단이 이토록 어려운 데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되기 시작했다. 의사들이 병실에 들를 때마다 정신이 완전히 없어지는 때를 제외하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언뜻 일별할 수 있었다. 신장 전문의와 류마티스 전문의들은 내 병이 림프종이라고 생각했다. 종양 전문의들은 감염성 질병으로 봤다. 감염병 전문의들은 류마티스성 문제가 아닐까 추측했다. 중환자실 의료진은 아예 감도 잡지 못했다. 의대 친구들이 답을 찾으려고 교과서와 의학 저널을 샅샅이 뒤졌지만 나를 담당하는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결론은 “알 수 없다”였다.


케이틀린에게 내 그런 꼴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소망은 엄마와 관련된 내 경험과 관련이 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직전의 쇠약해진 모습이 내 기억 속에 지울 수 없는 화인처럼 찍혀 버렸다. 나는 내가 죽고 난 뒤 몇 년, 몇십 년이 흐른 뒤에도 케이틀린이 나를 처참하게 붕괴된 모습, 내가 기억하는 엄마 같은 모습으로 기억하는 광경을 상상했다. 그건 엄마가 남기고 싶어 했고 내가 기억하고 싶어 한 모습이 절대 아니었다. 케이틀린이 그 상태의 나를 기억하게 할 수 없었다.


케이틀린이 다녀간 후에, 내가 그녀의 접근을 거부한 후에, 가족과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한 후에 나는 죽음 속으로 가라앉을 채비를 갖췄다. 어떤 것도 그보다 나쁠 수는 없었다. 내 몸 상태는 더 악화 될 것이고 나는 죽음에 한 발 더 가까워질 것이었다. 그런데 결코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자신을 절대로 어떤 불가피성에 그런 식으로 내어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당시의 나날들, 시간들에서 기억의 편린들을 찾아 서로 맞춰보면 일종의 만화경 같은 광경이 펼쳐진다. 의식은 부서질 듯 위태위태했지만 지나온 삶, 남길 유언이나 내 사망 기사 같은 것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던 게 기억난다. 나는 한없이 병실 창밖을 응시했다. 그러면서 케이틀린과 함께할 수 있었을 것들을, 삶을 상상했다.



뭔지 모를 그놈이 지나간 뒤

어느 날 병상 곁에 있는 어떤 사물에 내 눈길이 집중됐다. 한참 보고 있다가 나는 내가 전화선을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누나들이 막 방을 나간 뒤였다. 그래서 나는 내가 혼자임을 알았다. 그 시점에는 사고의 과정은 존재하지 않고 단순한 파편들의 조합만 있었다. 나는 혼자 있다, 나는 아프다, 곧 죽는다, 날 돌보느라 가족들도 힘들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에 뭔가 변화를 줄 수 있는 물건이 저기 있다.’이런 생각의 조합은 내게 고뇌와 동시에 안도감을 가져다줬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그러나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다면 서두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거기엔 하나의 우주가 있었다. 그 우주 안에선 죽고 싶다는 생각과 전화선으로 팔을 뻗어 그걸 목에 감은 다음 눈을 감고 절대로 깨어나지 않는 행동이 서로 일치했다. 어쨌든 마침내 산지옥으로부터 풀려날 것이니까. 그러나 다행히도 그 우주는 내가 있는 우주가 아니었다. 이런 뜬금없는 자살 생각이 회복의 신호이지 않았나 싶다. 생각은 다시 가족들을 향했다. 내가 자살한다면 가족들이 얼마나 상심할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생각은 거기까지였고 그 다음부턴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알 수 없는 이유로, 나는 안정화됐다. 몸 상태가 나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간과 신장 기능 검사 결과가 개선된 것으로 나왔다. 폐와 심장 주위에 차 있던 물이 빠지고 통증이 줄었다. 혈액 기태도 작아지기 시작했다. 적혈구와 혈소판 투여 횟수도 줄였다. 구역질과 구토 증세도 가라앉았다. 5주 만에 처음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나는 걸어서 중환자실을 반 바퀴 돌았다. 나중에는 한 바퀴 다 도는 것도 가능해졌다. 펜실베이니아 병원 입원 초기에 의사들은 고용량의 코르티코스테로이드를 내게 주입했다. 이는 달리 어찌해볼 방법이 없을 때 중환자실에서 통상적으로 쓰는 방법 중 하나 다. 주입하고 즉각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몇 주간에 걸쳐 축적된 효력이 나타났고 그게 내 몸 상태의 호전과 관련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병원에서 주로 중환자실에 있다가 7주 만에 퇴원했다. 나는 어느 정도 회복됐지만, 도대체 무슨 병에 걸린 것인지에 대해선 입원 첫날보다 더 아는 게 없었다.


내게 케이틀린에 대해 생각할 게 남아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꽤 오랜 시간 거의 죽은 거나 다름없이 누워 있다가 마침내 내가 얼마나 그녀를 걱정하고 그리워하는지 찬찬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찾아왔다. 긴 입원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직후 나는 용기를 내 그녀에게 전화해서 내가 왜 빈사 상태의 모습을 끝내 보이고 싶지 않았는지 설명했다. 매우 힘든 대화였다. 내가 자신을 거부한 일로 인해 그녀가 받은 상처가 깊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괜찮다고 했다. 그런 상태의 나를 못 보게, 기억 못하게 한 이유를 다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케이틀린은 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진 않는 것 같았다. 나를 봐선 안 된다고 생각한 건 내 누나들이고 내가 누나들을 위해 변명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케이틀린과 대화를 하고 나니 내가 건강해졌다는 것 이상의 좋은 느낌이 들었다. 뭐랄까 정상적 삶으로 복귀한 것 같았다. 묘한, 그러나 예전과 같아졌다는 느낌이 참 좋았다. 우리 다시 옛날로 돌아가자는 말은 피했다. 비록 케이틀린이 할로윈 때 나를 뉴욕으로 초대했지만 말이다. 알았다고 했다. 내 건강 상태가 그걸 가능하게 할지 자신이 없었지만 초청받은 건 기뻤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시간을 낼 것을 맹세했고 당장 그렇게 하기로 다짐했다. 그러나 나를 공격한 병의 정체를 알아내는 일에는 결코 느긋해질 수 없었다. 알지 못할 병에서 알지 못할 방식으로 회복된 것을 마냥 좋아할 순 없었다. 나는 답을 원했다.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내 의료 기록들을 여기저기에 요청해서 살펴보기 시작한 건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다. 병이 저절로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게 다시 돌아오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내 생각에는 일시적 휴면상태인 것 같았다. 놈이 다시 깨어나기 전에 정체를 알아야 했다. 나는 환자이자 수련 중인 의사였고 그중 후자가 되는 쪽이 훨씬 좋았다.


그렇게 작업을 시작했다. 3천 페이지가 넘는 의료 기록을 넘겨받아 나 자신의 의료 이력을 재구축하는 일이었다. 우선 내가 겪었던 일련의 특별한 증상과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여러 질병 후보군을 살펴봤다. 그런 다음 내가 접근할 수 있는 데이터를 활용해서 각각의 증상을 평가했다. 그렇게 가능 후보군의 범위를 축소시켰다. 이는 불과 몇 달 전까지 병원 순환 실습 기간에 내가 환자들을 대상으로 자주 사용한 방법이었다. 나는 하루에 12시간 이상 의료 기록과 연구 논문들을 훑으며 내가 겪었던 것과 조금이라도 연관성이 있는 것들을 골라냈다. 그리고 거기서 어떤 패턴을 찾아내려고 했다.



기나긴 추적의 서막

3주 후 지나 누나 집에 있을 때였다. 하루 종일 엄청난 피로감을 느꼈다. 그냥 몸이 회복 중이라서 그런가 보다고 생각했다. 말이 되는 게, 죽음 직전까지 갔던 몸이 쉽게 정상으로 돌아오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잠들기 전에 나는 몸 상태가 호전되면서 작아졌던 가슴과 팔의 혈액기태 중 몇 개가 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창백한 피부에 나타난 사나운 붉은 빛을 띤 그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더 좋지 않은 건 새롭게 나타난 것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퇴원한 지 4주 만인 2010년 11월 1일 나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렉스 병원에선 고용량의 코르티코스테로이드를 다시 투여했다. 대체로 환자의 기분을 좋아지게 하고 또 가끔씩은 이름 모를 병에 차도를 가져오는 약물이라고 생각해서 그랬겠지만 별 효과는 없을 듯했다.


“좋은 소식이에요. 림프종이 아니래요. 당신은……” 여기서부터는 팩스를 읽었다. "당신은 HHV-8- 네거티브, 특발성다중심캐슬만병 idiopathic Multicentric Castleman Disease (iMCD)입니다. 개인적으로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병명이네요. 그러니 어떤 질문을 해도 난 답변할 수 없어요. 그러나 림프종은 확실히 아닙니다. 담당 의사가 다음 주에 돌아오면 자세히 설명해줄 거예요." 그녀는 웃어 보이더니 병실을 나갔다.


몇 주 동안 나는 상대의 전모를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그래야 제대로 가늠하고 게임 플랜을 세우고 물러서지 않고 싸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 상대는 이름 말고는 알려진 게 별로 없었다. 그래서 싸움에 필요한 전문성과 치료 경험을 가진 의사를 찾아보기로 했다.


곧 얼마간의 경험이 있는 듀크 대학 병원의 의사를 알게 됐다. 나는 듀크 대학 병원의 혈액학, 종양학 병동으로 옮겼다. 거기에는 7년 전과 같이 “듀크에는 희망이 있습니다"라고 쓰인 팻말이 벽에 붙어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뇌 수술을 받는 동안 대기실 벽에 붙은 그 팻말이 내게 위안을 주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아무런 위안도 주지 않았다.


매일 5명에서 8명으로 이뤄진 내과 전문의들과 수련의들이 병실에 와서 내 사례를 놓고 논의하며 나를 관찰했다. 새 담당 의료진은 코르티코스테로이드는 효과가 없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다음 방편으로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항암화학요법 약물이었다. 그들은 이 병에 관한 한 자신들의 경험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내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얼마간의 경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던 의사는 소수의 캐슬만병 환자만 다뤘을 뿐이라고 했다. 그 환자 중엔 나와 동일한 아종(subtype) 캐슬만병을 앓은 사람이 없었다. 나는 실험 대상이 된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으므로 가족들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화학요법이 실시된 후에도 내 상태는 더 악화됐다. 그럼에도 담당 의료진은 그 방식을 고수했다. 그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병원에서 서서히 회복되는 동안 나는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실 행복했다. 살아난 게 감사했다. 그리고 내가 하기로 한 일에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자기 연민이나 슬픔을 느끼는 데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벌써 11월 하순이었다. 아빠는 추수 감사절 요리를 만들어서 내 병상으로 가져왔다. 영양 보급 튜브는 제거돼 있었다. 누나들, 아빠, 우리 가족의 친구들 그리고 나는 함께 만찬을 들었다. 몇 주 만에 맛보는 진짜 음식이었다. 그 오후에는 내가 환자라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식사하고 나서 누나들과 나는 〈보랏 Borat>과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Saturday Night Live> 동영상을 유튜브로 봤다. 웃으면서 봤고 자질구레하고 시시한 것들을 화제로 수다를 떨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신호

아니나 다를까 온라인을 뒤지다 보니 지나 누나와 나는 우리가 찾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프리츠 밴 리 교수로 의학 박사인 그는 여러 국제적인 연구 기관의 회원이자 국립보건원에서 상당한 기금을 후원받으며 다발성 골수종 연구를 하는 인물이었다. 이는 연구자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캐슬만병 최고 권위자라는 평판도 얻고 있었다. 그는 아칸소대학 의대(UAMS) 교수로 있었다.


밴 리 박사와 만날 날짜가 12월 26일로 정해졌다. 나는 그때까지 PET 촬영과 골수 생검, 각종 혈액검사를 받아야 했다. 듀크대학병원에서 한 달 더 있는 동안 화학요법을 위시해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의료적 조치들이 행해졌다. 상태는 좋다고 할 수 없었다. 혈액검사 결과도 매우 나빴다. 리틀록에 가서 캐슬만병에 대해 최대한 많이 배우려면 힘이 있어야 했는데 그걸 기를 시간이 3주밖에 없었다. 내 스토리는 미지의 악마적 힘에 휘둘리는 주인공을 다룬 고난의 서사시도, 영웅담도 더 이상 아니었다. 어떤 점에선 한 고비를 넘긴 탐정 소설 같았다. 째깍거리는 시한폭탄이 내 몸 어딘가에 박혀 있고 이제 그것을 제거하는 일만 남아있었다.



또다시 폭주하는 병

나는 ‘좋은’ 강박증이 있는 사람답게 필요한 준비물을 다 챙겨 갔다. 지난 몇 달간 내게 나타난 증상들, 받았던 여러 가지 진단들, 검사 결과들을 파워포인트로 정리해서 가져갔다. 자료의 양이 많아서 100페이지가 넘었다. 밴 리 박사와 만난 자리에서 그걸 설명하려 하자 그가 다소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시계를 들여다봤다. 나는 불안해졌다. 환자이자 아직 의대생인 주제에 대가를 가르치려 들었다. 그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대신에 그는 세 시간 동안 아빠와 나와 함께 자료들을 들여다보면서 자세한 치료 계획을 내놓았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가 캐슬만병에 대한 흥미 이상의 것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그의 부인이 트리니다드 출신으로 엄마가 살았던 동네에서 성장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우리는 함께 그 섬, 제일 좋아하는 그곳의 음식, 해변을 추억했다.


문화적인 공감대가 있다는 게 위안이 됐다. 그런데 가장 고무적이었던 것은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 내 병에 관한 이 세상의 지식 전체를 망라한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지식과 그라는 인물이 모두 경이로웠다. 그는 어떤 제약 회사가 실툭시맙(siltuximab)이라는 약을 개발 중이라고 알려 줬다. 그 약은 iMCD의 치료를 위해 IL-6를 직접 봉쇄한다고 했다 (토실리주맙과 실툭시맙은 둘다 IL-6가 신호를 보내는 경로를 막는다. 토실리주맙은 IL-6끼리 묶이지 않도록 수용체를 봉쇄하는 반면에 실툭시맙은 IL-6에 직접 달라붙어 그것을 무력화시킨다). 또한 임상 실험의 2단계, 2단계의 첫 번째 과정인 iMCD의 무작위 대조 연구가 진행 중이라고 했다. 이게 성공리에 끝나면 FDA가 실툭시맙을 iMCD 치료약으로 승인할 가능성이 컸고 지금까지의 실험 경과는 고무적이었다.


첫 번째 투약을 받고 나서 희망을 품었다. 약물이 주입되는 동안 임상실험 코디네이터 한 명이 자신이 목도한, 불과 2~3일 사이에 극적으로 회복한 환자들의 사례를 아빠와 내게 들려줬다. 그녀와 담당 간호사의 말로는 실툭시맙을 투여 받은 직후에 내 IL-6 수치가 매우 높이 올라가기 시작하면 약이 효력을 발휘한다는 신호라고 했다.



조용한 병실의 융단 폭격

그날 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잠에서 깼다. 침대 시트가 흥건히 젖어있었다. 그걸 갈려고 몸을 일으켰을 때 내게 필요한 증거의 마지막 조각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혈액기태가 온몸에 돌아와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마법의 사고 회로 속으로 뛰어들었다. 재발될 수가 없어. 나는 실툭시맙을 투여 받고 있다고. 실툭시맙은 재발을 막아준다고. 밴 리 박사가 그렇게 말했어. 이상 끝. 나는 건강해.


우리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iMCD가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그 강도가 이틀 사이에 두 배가 됐다. 심지어 투약을 받고 난 뒤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 흡사 캐슬만병이 날 놀리는 듯했다. 모든 희망을 타서 주입한 약물보다 자신이 얼마나 더 강한지를 과시하는 듯했다.


내 몸은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연장전을 뛰고 있었으며 소모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최소한 나는 더 이상 경기장 밖에 있지 않았다. 이제 나는 경기에 뛰어들었고 내가 뭘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됐다. 나는 iMCD에 관한 세상의 지식을 늘리는 데 기여해야 한다.


“내가 이번에도 살아난다면 나는 남은 내 인생을, 그게 얼마나 오래갈지 모르지만 내 삶을 이 병의 정체를 밝히고 그 치료법을 알아내는 데 쓰겠어.”



긴박한 실험은 계속되고

나는 계속 면역체계가 궁극적인 표적의 근거지이자 뿌리라는 생각을 견지했다. 병이 재발하면 면역 체계가 통제 불능에 빠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면역체계 전체, 수십억 세포의 복잡한 네트워크가 통째로 과잉 활성화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 특정한 세포들이 주도적으로 iMCD의 재발과 확산에 관여하고 있을 터였다. 아직까지 그걸 알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혹시 그런 세포들이 없다 해도 다양한 유형의 세포들을 이어주는 연락망은 있지 않을까? 아니면 어떤 단일한 분자, 이를테면 IL-6 같은 것들이 iMCD를 촉발하고 진행시키는 주범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했다. 어쨌든 공격 표적을 알아내지 못하면 치료법도 없을 것이었다.


세포 연락망을 차단하는 과정을 통해 시롤리무스는 면역체계의 세포들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약해진 면역체계 세포들은 새로 이식된 장기를 공격하지도, 거부하지도 못했다. 물론 시롤리무스가 투여된 환자들은 약화된 면역체계로 인해 감염에 취약해졌다. 그러나 시롤리무스의 부작용은 당시 내가 후보군에 올려놓고 있던 다른 약들에 비하면 훨씬 덜했다. 이 약은 iMCD 치료용으로는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었다.


밴 리 박사는 나를 축복해줬다. 2014년 2월에 나는 나와 가장 가까운 실험 대상자, 즉 나 자신에게 실험을 시작했다. 나는 매달 이루어지는 정맥 내 면역글로불린(IVIg) 투여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지난번 재발 때 뭐라도 해보자는 마음에서 시작한 것인데 그걸 중단할 마음의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다.



잠시 구름이 걷힌 하늘

시롤리무스, 내가 iMCD 치료를 위해 투여 받았던 그 약이 나는 물론이고 어쩌면 다른 환자들의 생명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걸 알게 된 우리는 한편으로 다른 병의 치료용으로 FDA의 승인을 받아놓은 약들 중에 얼마나 많은 약들이 지금 당장 iMCD 환자들에게 도움이 될지 너무 궁금했다. 이런 ‘비인가’ 약을 쓰는 것은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관행이었다. 그러나 어떤 병에 이 약들을 써야 하는지, 그것들이 효과가 있는지에 대한 정보는 부족했다. 의료 시스템 안에서 향후 치료 가이드로 삼기 위한 추적조사가 전혀 안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돈이 문제였다. 우선 데이터 분석 전문가를 고용하는 데 돈이 많이 들었다. 도움을 받기 위해 제약회사와의 파트너십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대형 제약회사에서 여러 번 의사 타진을 위한 전화를 한 끝에 그들이 흥미를 갖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회사 내 북미 법인의 이사들과의 회의 자리에 나와 줄 것을 요구했다. 유럽 법인 이사들은 그 회의에 화상으로 참여할 거라고 했다. 이건 대단한 기회였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 제약회사의 회의실에서 고위 임원들과 한 차례 더 회의를 했고 그런 후 그들은 CDCN 그리고 펜실베니아대학과 파트너십을 체결해서 우리가 원하는 국제적인 캐슬만병 등록과 연구 사업을 후원하기로 결정했다. 라지는 그 두 번째 회의가 열리기 직전에 학교로 돌아갔다. 그 대신 제이슨 루스와 아서 루벤스타인이 합류했다. 회의를 마치고 우리 셋은 흥분을 애써 감추며 그 회의실과 건물을 달리듯이 빠져나왔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껑충껑충 뛰면서 기뻐했다. 아마 그 제약회사 임원들은 회의실 창문으로 그걸 지켜봤을 것이다!


2015년 1월 5일, 마지막 재발이 끝나고 제 5차 연장전이 시작된 지 딱 1년이 되는 날이었다. 나는 조심스러웠다. 지금까지 1년 정도 회복 기간이 지속될 때마다 나는 스스로를 축하해주곤 했는데, 그러다가 곧 재발을 겪은 기억이 너무도 생생했기 때문이다.


16개월째, 발병 이래 가장 긴 재발 사이 기간을 기록하는 시점에서 약한 독감 같은 증상이 나타났다. 케이틀린은 너무 걱정된 나머지 최대한 많은 시간 내 곁에 있기 위해 직장에 휴가를 냈다. 시간 여유가 생겼으니만큼 별일이 아니면 함께 어디로 여행을 가거나 재발의 기미가 보이면 바로 리틀록으로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 혈액검사 결과는 계속 아주 좋았다. 다섯 번째 재발 기간 동안 염증 표지자는 VEGF 수치 상승과 T세포 활성화를 보였지만 그 이후론 정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냥 독감이었던 것이다. 독감에 걸렸다고 나처럼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며칠 후에 케이틀린은 안심하고 직장에 복귀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드디어 가슴 떨리는 16개월의 문턱을 넘어섰다. 이제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영역에 발을 딛게 된 것이다. 나 자신이 어떤 재난 영화의 출연자처럼 느껴졌다. 계속 지하 벙커에 피해 있다가 드디어 밝은 태양 아래로 눈을 껌뻑이며 몸을 드러낸 사람과 같았다. 운석은 지구에 충돌하지 않았고 주인공 월 스미스는 살 수 있게 됐다. 내 경우엔 시롤리무스 덕분에. 그러나 이게 그 병이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재난 영화들엔 항상 속편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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