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지종례

   
이경준
ǻ
푸른향기
   
14300
2019�� 06��



■ 책 소개

『쪽지종례』는 3월 개학 당일부터 학년 말까지 매주 금요일에 작성한 글로, 한 주 동안 담임교사의 입장에서 학생들의 생활 모습을 지켜본 후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주제는 주로 학업, 진로, 인성, 독서, 시험, 교우관계, 날씨와 건강 등 학교의 학사 일정과 시기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특별한 일을 겪은 학생에게 보낸 개인적인 편지, 특별한 사건을 겪은 뒤에 쓴 일지, 학부모님께 보내는 가정통신문도 일부 포함되었다.

 

1부는 중학교 3학년 학생을, 2부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쓴 쪽지종례로 구성되어 있다. 『쪽지종례』에서 글쓴이를 지칭하는 말은 ‘나’, 학생들을 지칭할 때는 ‘너’로 하였다. 저자는 교사와 학생이라는 수직적 관계가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서 수평적 소통을 하고 싶은 바람을 ‘나’와 ‘너’라고 부르는 말에 담았다. 학생 개인에게 쓰는 편지처럼 느껴지길 바라며 썼다.

 

■ 저자 이경준
고등학교 문예부에서 문학의 쓸모를 처음 생각했고, 대학교에서는 문학과 교육학을 공부하며 나의 쓸모를 고민했다. 40개월간의 군 생활 중에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 결혼하는 행운을 얻고 전역하였다. 그 후 4년간 백수 경력을 쌓았다. 임용고사에 응시하다가 답답한 마음에 썼던 시를 응모하여, 2014년 『서정시학』으로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해 겨울, 네 번째 응시한 시험에 합격하여 경기도 국어교사가 되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기 전, 학생 때 품었던 고민을 다시 했다. 문학의 가장 큰 쓸모는 마음의 결을 다듬는 도구라고, 나의 쓸모는 미래 세대의 감수성과 상상력을 길러주는 역할이라고 나름대로 정의를 내렸다. 그 후로 문학의 힘을 믿고,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교과서 바깥에 있는 생생한 문학을 접하게 해주려 노력하고 있다. 2016년에는 수업 시작 전에 새로 출간된 시집을 가져와서 시 한 편을 낭독하고, 학생들과 5분가량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2018년부터는 고등학생 5~7명과 함께 1년 간 진행되는 책수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학생들과 매달 한 권의 책을 정해서 함께 읽은 뒤, 한 달에 두 번씩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대화록을 남기는 활동을 한다. 또한 학교에서 문화예술 콘텐츠를 창작하고자 하는 학생들을 모집해서 전문가를 모시고 특강을 진행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네이버 파워블로거(책, 에세이)로 활동하며 교육 자료를 교사들과 나누고, 서평 및 영화평론, 시를 써왔다. 14,000여 팔로워를 가진 네이버포스트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 남양주 진접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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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프롤로그 - 일주일치 관심 한 장

 

1부 중학교 3학년 4반에게
첫인사 | 나는 네가 궁금해 | 각자의 리듬 | 즐거움을 퍼뜨리는 씨앗 | 김소미부터 정영석까지 | 혀끝에서 단어가 맴돈다면 | 광합성을 하는 식물처럼 | 왜 공부하는가? | 아내의 만년필 | 공부의 진짜 목적 | [가정통신문] 70점짜리 인간 | 늘 곁에 있었으면 하는 사람 | 나는 어떤 사람인가? | 공부당하다 | 아이히만이 되지 않기 위하여 | 마음을 어루만진다는 것 - 주희에게 | 늦은 밤, 살아 있는 국어 시간 | 흔들리는 일 | 사과문 | 아이는 단어를 경험하며 성장한다 | 자존심과 자존감 | 액체로 된 몸 | 성급한 판단은 위험해 | ‘절대’와 ‘당연한 것’은 없다 | 넌 꿈이 뭐니? |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 정답 자판기 | 행복과 불행을 마주하는 네 가지 태도 | 혼자만 잘살면 무슨 재미가 | 두 가지 부탁 | 네가 어른이 되어 살아갈 세상은 | 사람 사이에도 작용-반작용의 법칙이 | 우연에 기대는 사람은 | 평범함이 쌓이는 시간 | 새끼 톱니바퀴 | 초코 소라빵을 맛있게 먹는 방법 | 꽃이 저무는 자리

 

2부 고등학교 1학년 6반에게
[가정통신문] 담임 자기소개서 | ‘생각 좀’ | 호기심 많은 어른들의 세상 | 우연한 연결 | 특별한 내가 된다는 것은 | 그늘 속에서도 목련은 꽃을 피운다 | 마음을 쏟은 시간만큼 | 여행과 시도 | 네가 빛나는 자리 | 바다를 깨는 도끼 | 대화의 힘 | 아무나 행복한 세상 | 여름의 금을 밟고 | 첫사랑에 실패하더라도 | 진정한 눈은 관심어린 표정에 있다 | 좋은 취미는 대나무의 마디와 같아서 | 왜 나만 갖고 그래 | 단 한 번뿐인 삶 | [가정통신문] 다정한 자극을 주세요 | 우리 앞에 있는 흙을 차곡차곡 쌓다 보면 | 태풍이 지나가고 | 말꼴과 얼꼴 |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 너 내 동료가 돼라 | 빵 먹고 싶다 | 낱말의 온도 | 인간답게 산다는 건 뭘까 | 시험의 쓸모 | 독버섯이 가진 자기의 이유 | 느닷없이 성적표가 나와서 | 목소리 연습 | 작은 걸림돌 | 집중력 배터리와 메모 | 불완전해서 가능성이 많은 |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 떨리는 게 정상이야 | 마음을 상상하는 데에 초점을 | 천재와 바보 사이에서

 




쪽지종례


중학교 3학년 4반에게

각자의 리듬

이제 겨우 몇 사람하고만 상담했는데, 벌써 3월 중반이 넘어갔더라. 빨리 알아가고 싶은데 시간이 빠듯한 것 같다. 내가 여력이 되는 대로 교실에 불쑥 찾아가서 말을 걸 거야. 그래도 당황하지 않기를 부탁해. 다른 선생님들이 그러시더라. 우리 반은 활기찬데 가끔 그 정도가 지나치다고. 그래도 나는 조용하고 무기력한 것보다는 활기 넘치는 게 좋더라. 밝게 웃으면 곁에 있는 사람도, 주변의 공기도 포근해지거든. 교실 뒤쪽에 앉아서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은 멀찍이 교탁 앞에서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나와.


무엇이든 시간이 필요할 거야. 내가 너를 알아가는 데에도 시간이 좀 걸리겠고, 너도 활기참과 무례함의 경계를 이해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리겠지. 지금 우리는 천천히 모두와 관계를 맺고 있는 시간을 보내는 거니까, 서로가 조금씩은 서로에게 실수하는 일도 많을 거야. 그래서 나도 쉬는 시간에 교실에서 소란스럽게 뛰노는 몇몇 사람을 보고 크게 나무라지 않았거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시간과 공간을 나눠서 사용하는 일이 많아.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을 수업 시간과 쉬는 시간으로 나누고, 공간은 교실과 복도, 운동장, 화장실 등으로 나누지. 왜 이렇게 나눠서 사용할까? 시간을 나눠놓지 않으면 지각도 없고, 점심시간도 따로 없어서 좋을 텐데. 굳이 운동화로 갈아 신지 않고, 공을 차면서 놀 수 있을 텐데 말이야. 그런데 누군가 그렇게 시간과 장소를 마음껏 즐기게 되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불편해지지 않을까? 상상해보자. 너는 밥을 먹고 있는데, 어떤 친구는 네 옆에서 땀 튀기며 공놀이를 하는 거야. 너는 어떤 기분일까?


시간과 장소를 나눈 까닭은 모두 편안해지기 위해서라고 나는 생각해. ‘시간’과 ‘장소’의 규칙을 이해하고 지키는 것. 이걸 단 한단어로 말하면 ‘교양’이거든. 시간과 장소의 규칙을 잘 지키며 하는 말과 행동이 차곡차곡 쌓이면, 모든 사람으로부터 ‘교양인’으로 받아들여지게 돼. 교양인이 된다면, 어디에서도 존중받고 환영받는 사람이 될 수 있단다. 수업 시간과 쉬는 시간, 교실과 운동장에서 지켜야 하는 규칙을 지켜보자.


자리를 바꿨어. 2주에 한 번씩 바꿀 거야. 옆에 앉은 친구와 자연스럽게 친해지는 시간이 된다면 좋겠다. 아직 학기 초반이라 반 친구들과 모두 친해지기는 힘들 거야. 서두르지 말자. 우정에도 각자의 리듬이 있어. 자기만 리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거나 서두르면, 좋아하는 사람을 밀어내게 되는 일도 있단다. 나는 자연스럽게 물드는 관계를 좋아해. 어린 왕자와 사막여우가 서로에게 천천히 길들여지면서,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었듯이 너와 네 곁에 있는 친구가 소중한 사람으로 여겨졌으면 좋겠다.


왜 공부하는가?

“공부는 대체 왜 하는 거지?” 나는 대학에 다니면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 중세국어 문법을 공부하면서, 현대 소설 강의 시간에 문학 분석 이론을 공부하면서 어느 날 갑자기 먹먹해지더라. 이게 대체, 생활에 무슨 보탬이 되나 하고 말이지. 학교 안에 있는 호숫가 벤치에 앉아서 한참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큰 쓸모없다’였어. 그러다가 며칠 뒤에 책 한 권을 읽게 됐어. 나는 궁금증이 풀리지 않으면 잠이 잘 안 오거든. 도서관에서 찾은 책은 스즈키 코지의 <왜 공부하는가>였어. 그 책에서 스즈키 코지는 이렇게 말해.


미디어가 내보내는 메시지를 비판적으로 읽고 깊이 해석하는 것을 미디어 ‘리터러시’라고 한다. ‘리터러시(Literacy)’는 ‘학문(공부)이 있음. 읽고 쓰는 능력’이란 뜻이다. (...) 무엇을 위해 공부하느냐고 묻는다면, 이해력. 상상력. 표현력을 높이고 리터러시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수 있다.


바로 이해하기엔 조금 어렵지? 이 책을 읽고 나는 한 가지 답을 찾았어. 속지 않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 지금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하는 미디어는 뭘까? 아마도 유튜브, SNS일 거야. 그런데 유튜브 채널에서 소개하는 정보가 진실만 담고 있을까? 그 사람들이 진심을 담아서 말할 수는 있겠지만, 진심이 늘 진실을 바탕으로 말하는 건 아니거든.


최근에 가짜 뉴스가 나와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렴. 뉴스와 책, 사람들의 말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진짜 의도를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런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 국어 교사가 해야 할 일이겠구나-하고 나름의 방향을 잡게 됐지. 그래서 흔들리지 않고 대학 공부를 마칠 수 있었어.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과목들이 대체 삶에 무슨 쓸모가 있는지, 왜 배워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답답할 때가 있을 거야. 사실 우리가 다니는 학교는 근대에 발명된 제도거든. 산업혁명 이전에는 학교가 필요 없었어. 공부는 정말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들, 다른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 재미와 취미로 하는 것이었으니까. 공부는 ‘생각하며 노는 즐거운 일’이었어. 그게 가능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귀족들이었고. 그래서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진짜 공부’는 돈벌이가 되지 않아.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준비과정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준비이니까.


고대 그리스의 시민들은 노동을 할 필요가 없어서 고민했고, 생각했고, 대화하며 공부했어. 동양도 마찬가지였지. 공자와 제자들은 올바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묻고 답하는 시간을 보냈어. 대화를 통해 생각을 정리해보는 것, 그것이 공부의 출발선이자 진짜 정체야.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일어나고, 기계가 사람의 힘을 대신하기 시작했어. 사람이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들었지. 짐꾼 1,000 명이 몸으로 짊어지고 나르던 것을 화물 기관차 운전사 혼자 운반할 수 있게 됐어. 그런데 기차 운전사는 정확한 지식, 운전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잖아. 의사도, 교사도, 회사원도 일정한 교육이 필요하게 되었어. 거칠게 정리하면 그래서 학교가 생긴 거였거든.


이제 사람의 육체노동뿐만 아니라, 이미 단순 지식노동은 컴퓨터가 대신하고 있어. 아마 네가 일하게 될 가까운 미래에는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지금 공부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복잡한 생각을 정교하게 다루기 위해서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해. 학교에서 익히는 지식은 생각의 도구를 다듬는 일이야; 주말 이틀은 평일에 배운 내용을 요약하는 시간으로 보냈으면 좋겠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마음이 출렁거리는 시기는 누구나 있다. 출렁거림이 심하면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헷갈리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조차 모르겠다 싶을 때가 있어. 나도 그랬거든. 날아갈 것처럼 기쁘다가도, 갑자기 몸서리가 날 정도로 싫은 감정 때문에 악을 쓰기도 했지. 아마도 중학교 때였던 것 같아. 어른들은 다 안다는 태도로 나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고, 친구들과 대화를 하면서도 마음이 공허해서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던 적도 있어.


한 번쯤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슨 일을 할 때 즐거운지 슬픈지, 화는 언제 내고, 친구들을 대할 때 사람마다 다른 태도로 대하고 있지 않은지. 너의 모습을 스스로 관찰해보는 연습을 했으면 좋겠어. 자기 모습을 돌아보는 사람은 한 걸음이라도 좋은 쪽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될 수 있거든. 지금 내가 있는 곳, 나의 정체를 알아야 고칠 점을 깨닫고 장점도 발견할 수 있단다. 마음이 출렁일 때는 자신을 돌아보렴.


“너의 장점과 단점은 뭐니?”라고 물어보면,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 드물어. 학교 다닐 때, 나의 장점과 단점을 생각해 본 적이 있어. 도덕 시간에 자기를 소개하는 글을 쓰라는 숙제였는데, 일주일 동안 끙끙거렸지만 쉽게 써지지 않았어. 겨우겨우 쓰나마나한 장점들(성실하다, 착하다, 공부를 열심히 한다, 친구들과 친하다, 배려한다, 예절을 갖추려 노력한다 등)을 주절거렸을 뿐이었고, 움직이는 것이 귀찮다. 아침잠이 많다 등등)만 겨우 써냈어. 그때 깨달았던 것 같아. 나의 장점과 단점, 특기와 흥미는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보물찾기 하듯이 ‘탐색하고 발견’해야만 알게 된다는 걸.


이번 주말에는 너의 지금 모습을 살펴보렴. 지금까지 살아온 너는 ‘어떤 모습’과 ‘어떤 속성’을 가진 사람일까. 네가 잘하고 자신감 있는 것은 무엇이고, 싫은 것들은 무엇인지 종이에 낙서처럼 적어 보자. 진짜 자기의 모습을 찾는 일은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정글을 탐험하는 것과 비슷할 거야. 자기 능력을 되짚어 보고, 가지고 있는 도구를 점검해보는 시간은 삶에서 꼭 필요한 일이야. ‘나’에 대한 글을 써보거나 고민하는 것은 시간 낭비가 아니야. ‘진짜’ 나를 찾아가는 지도를 만드는 일이야.


‘절대’와 ‘당연한 것’은 없다

‘절대’는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을 준다고 해도 바꾸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랑도 변할 수 있어. ‘이거 아니면 난 끝이야’, ‘인생 망했어’라는 말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의 변명이라고 나는 생각해. 세상은 뜻대로 되는 것보다 뜻밖에 벌어지는 일이 훨씬 더 많거든. 그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분노하고 좌절하면, 인생이 너무 피곤해지지 않을까.


우리가 세우는 ‘계획’은 ‘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마련하는 거야. 그래서 우리는 평가 기준이 달라지고, 대학입시가 변화할 때마다 분노하게 되는 거지. 우리가 세웠던 계획이 어그러지니까. 나도 중고등학교 때 생각했던 진로, 계획도 많이 바뀌었어. A안에서 B안으로, 다시 C안으로 몇 차례나 말이야.


이상(ideal)과 현실(reality)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해. 지금보다 더 나은 삶과 이상을 꿈꾸지 않는 사람의 현실은 무거워. 자기 눈앞에 있는 문제들에 묻혀서, 진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어버리기도 하거든. 조각케이크처럼 작고 짧은 행복에 위로받으며, 현실 속 다른 문제를 가려버리고 말지. 우리가 이상을 꿈꾸며, 현실을 보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삶에 숨어 있는 ‘문제점’을 발견하고 해결하기 위해서야. 현실 문제에만 짓눌리면 이상은 보이지 않고, 현실 문제에서도 벗어날 수 없어.


삶에서 절대 안 되는 것은 없어. 절대 맞는 답도 없고. 현실 또는 이상, 어느 것을 먼저 보느냐는 중요하지 않아. 현실을 좀 더 보는 사람은 보다 더 꼼꼼하게 계획을 세울 수 있는 힘이 있지. 이상을 좀 더 보는 사람은 지치지 않고 계획을 실천해낼 수 있어. 밤하늘의 북극성을 바라보고, 지금 불어오는 바람과 파도가 어떤지를 번갈아 생각해보렴. ‘절대’로 안 되는 것도 없고, ‘당연한 것’도 없다. 네가 네 삶에서 확신할 수 있는 건, 네 삶에 ‘가능성’이 있다는 거야.



고등학교 1학년 6반에게

‘생각 좀’

1년은 52주, 1학기는 20주다. 이제 1주 지났으니, 앞으로 19주 뒷면 여름방학이 오겠지. 그렇게 6번이 지나면 고등학교도 졸업이고 너는 어른이 될 거야. 낱낱의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생각하면, 3년은 참 길다. 그런데 비슷한 시간과 성격을 하나의 마디로 묶어보면, 일주일은 금방 지나가는 토막이란 걸 깨닫게 된다. 시간은 사람의 마음과 하는 일에 따라 밀도가 달라진다. 고등학교에서 보내는 3년, 여유롭게 보내도 좋고 빼곡하게 보내도 좋다. 어떻게 살든, 너 스스로 당당하면 된다.


새로운 사람이 되자. 월요일부터 쉬는 시간 10분, 한 사람씩 상담을 하고 있다. 이미 한 사람도 있고 아직 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나는 과거의 네가 어떻게 살았든 많은 관심을 두지 않겠다. 오직, 고등학교 1학년 지금 네 모습으로만 네가 어떤 사람인지 느끼고 친해질 작정이다. 예전과 다른 삶을 살고 싶다면, 지금이 기회다.


어젯밤부터 읽고 있는 책이 있다. 지바 마사야가 쓴 <공부의 철학>이라는 책인데, 저자의 글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보통 공부한다고 하면, 알지 못했던 지식을 머릿속에 넣는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우리가 공부를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게 돕는다. 요약하자면, 공부는 새로운 것을 얻는 게 아니라 내 몸에 익숙해진 바보 같은 나의 모습을 잃어가기 위한 활동이라는 내용. 채우는 게 아니라, 나의 단점을 버린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해보면 어떨까.


진짜 공부는 지금까지 쌓아온 네 모습을 잃어가는 노력이다. 그래서 힘들다. 우리는 어릴 때 걸음마만 잘해도, 밥만 잘 먹어도 칭찬받고 주목받았다. 그런데 학교에서 너는 ‘당연한 인정’을 잃어버린다. 지금 살아가는 환경에 만족한다면, 깊이 공부하지 않아도 잘 살아갈 수 있다. 그 삶은, 나를 주변 상황과 사람들에게 잘 맞추는 삶, ‘공감’과 ‘좋아요’만 누르는 삶이다. 자신의 삶을 살아보고 싶다면, 지금 네 모습을 잃어버려라.


우리 반 급훈은 ‘생각 좀’이다. 네가 이 급훈에 동의했을 때, 대체로 엉뚱한 행동을 하는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싶었다. ‘생각 좀 하라’는 뜻으로, 나는 ‘생각 좀’을 다른 사람에게 여유를 부탁하는, ‘생각 좀 해볼게’라는 의미로 새겼으면 좋겠다. 문제 상황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관계를 살피고 내 처지를 돌아보는 여유를 1년 동안 습관처럼 익혔으면 좋겠다. 지금까지의 모습을 잃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을 보내보자.


그늘 속에서도 목련은 꽃을 피운다

비가 내렷다. 햇빛이 구름에 가려서 어둑해지면 당장 마음이 찌뿌듯하다. 나만 그런 걸까 싶어서 어제, 오늘 아침에는 너의 얼굴을 자세하게 살폈다. 그리고 내심 마음을 놓았다. 아무래도 우리는 지구 위에서, 같은 햇빛을 받으며 살아가는 존재여서 많이 닮았겠구나 싶었다.


농구장 뒤쪽은 햇볕이 잘 들지 않아서 늘 서늘하다. 꽃이 피기에는 참 불리한 공간이겠구나, 싶었다. 늦은 저녁, 퇴근하려고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라일락 향기가 농구장 바닥에 배어있었다. 그제야 곁에 있던 목련이 눈에 들었다. 나뭇가지 위에 리코타 치즈를 얹어 놓은 듯, 곱게 피어 있었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우리는 조금씩 햇빛을 더 받거나 덜 받기도 한다. 그래서 봄에는 한 그루 나무에서도 가지마다 꽃을 피우는 시간이 다르고, 가을에는 나뭇잎이 물드는 시간도 조금씩 다르다. 그렇지만 끝내는 모두 꽃을 피우고, 빨갛게 물든다. 우리는 같으면서도 그렇게 조금씩 다르고, 다르지만 함께 있기 때문에 아름다울 것이다.


그늘 속에 웅크려 있던 목련도 꽃을 피운다. 학교 화단 경계석 아래, 좁은 틈에서도 보랏빛 제비꽃이 피어난다. 늘 조용한 사람은 그런 목련, 제비꽃을 닮았다. 나는, 선생님들은 그렇게 피워내는 너의 모습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우리는 같은 시간대를 각자 다른 속도로 살아내고 있으니까.


세상은 네가 관심을 두는 만큼만 흥미롭다. 별일 없이 지내는 삶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네가 학교에 와서 수업을 듣고, 자유 시간에 친구들과 어울리며 보내는 삶이 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지금이 아니면 누리지 못할 소중한 시간이란 것은 맞지만, 같은 자리를 맴도는 일상만 즐기며 지내기에 세상은 정말 넓다.


나는 네가 숲과 풀벌레를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먼 곳에서 전체를 그려보는 시야는 습관으로 기를 수 있다. 우리는 자주 작은 것에 몰두하다가 가야 할 길을 잊는다. 지금-여기도 중요하지만, 가끔 멀찍이 물러서서 전체 경로와 나의 위치를 확인하지 않으면 금세 헤매고 만다.


공부 방법도 같다. 전체 목차를 훑고 머릿속에 지도를 마련해야 한다. 마치 거대한 산맥으로 이루어진 국립공원을 답사하는 일과 비슷하다. 책의 각 단원은 산맥을 이루는 하나의 봉우리 같아서, 나름의 특색이 있다. 내가 어디를 걷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너의 위치를 확인한 뒤에야 나무를 살피고, 꽃을 살펴야 한다. 눈에 띄는 것부터 정리하자. 그 뒤에 미묘하고 작은 것들까지 기록한다면, 머릿속에 산맥이 완전히 머물게 될 거다.


덧말. 너에게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실망하지 않는다. 나는 너를 그저, 앞으로 80년의 시간을 갖고 있는 무궁한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 학교,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함께 지내며 너는 언젠가 깨달을 것이다. 어떤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인지, 어떤 행동이 찬사를 받는지, 아무리 타일러도 제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가 있음도 알게 되겠지. 이제 한 달, 자연스럽게 갈라지려는 마음이 보이기 시작한다.


단 한 번뿐인 삶

한 학기 동안 수고했어. 3월부터 7월, 고작 4개월 조금 지났을 뿐인데 이 쪽지종례를 쓰면서도 굉장히 많은 일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너도 그랬겠지만, 나도 3월의 첫날은 참 많이 어색했거든. 어떤 말을 꺼내야 좋을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좋을지 고민도 많았고. 그런데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부딪히는 너를 그대로 이해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좀 편해지더라. 너는 매일, 매시간 달라지며 자라는 중이니까 고정된 모습으로 기억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최대한 너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거야. 그러다가 이렇게 여름방학을 맞닥뜨리고 말았고.


여름방학은 길지 않아서 걱정이다. 충분히 쉬기에도 부족한 게 맞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고 여름을 보내면 위태로워진단다. 공부를 잘하면 모든 게 해결되는 시대는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거야. 우리가 아무리 외우고 정답을 맞혀도 구글과 네이버를 지식으로 이길 수는 없거든.


나는 네가 고민할 줄 아는 사람이자 어른이 된다면 좋겠어.


덧말.

할 말이 많다. 그래서 쓸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사람이 행복하다. 그래서 어린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 가정을 벗어나, 타인과 관계를 맺으면서 사람은 슬픈 존재가 된다. 타인의 눈에 비치는 자신을 보고, 신경 써야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1학기가 끝났다. 나는 너를 이 사회에 잘 길들이려 노력하는 중일까, 아니면 내 목표대로 생각하는 사람을 키워내는 중일까. 고작 10개월의 만남으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의 답을 찾기 전에 먼저 쓰러질 형국이다. 바깥은 여름이고 내 안은 용광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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