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가 내 삶도 한 뼘 키워줄까요?

   
곽수혜
ǻ
팜파스
   
13000
2019�� 06��



■ 책 소개

 

바닥에서 삶의 무대 중앙까지, 어른이 되어 배우는 발레

 

이 책은 발레를 하며 얻은 몸과 마음, 일상의 성찰을 담고 있다. 동시에 발레 동작의 원리, 직접 하지 않더라도 발레를 즐길 수 있는 방법까지 실질적인 노하우를 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유달리 높아 보이는 진입 장벽을 넘어 발레 클래스에 들어서면 또 장벽이 있다. 때론 쉬었고, 때론 좌절했고, 도대체 언제 클래스 등급이 올라갈 수 있을지 모른다. 이번 생에 발레리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발레를 통해 내 삶의 예술가는 될 수 있다는 현실이 당신을 발레 클래스로 이끌 것이다. 그 여정에 이 책이 함께해 줄 것이다.

 

■ 저자 곽수혜
발레 가방과 도시락 가방을 들고 출근길에 나서는 직장인. 월급날만 바라보고 사는 일상이 갑갑해 취미 찾기에 몰두했다. 스물여덟 살이었던 2016년, 발레를 만나고 취미 유랑에 마침표를 찍었다. 좀처럼 통제되지 않는 몸과 마음을 붙들고 지금도 수련하듯 발레를 배우고 있다. 발레를 하는 시간 동안 마음의 근육도, 삶의 근력도 단단해지기를 바라며 땀 흘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발레가 안겨주는 즐거움과 위로를 함께 나누고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앞으로의 꿈은 인생을 무대로 춤추듯이 사는 것이다.

블로그 petricho.blog.me
    
■ 차례
Part 1. 내가 과연 발레를 배울 수 있을까?
취미는 빈칸
발레리나와 나, 그 사이의 거리감?!
피하지 말고 견뎌야 할 아픔도 있다
취미 발레로 이끌어 준 ‘만남’들
말이 아닌 몸으로 표현하는 사람
거울 속 나와 인사하는 시간
발레는 운동일까, 예술일까?
새로운 꿈, 발레 하는 할머니
당혹감을 바탕으로 성취감을 얻으면 인생은 초연해진다

 

Part 2. 바닥에서 무대 중앙으로_발레 클래스

#Floor work
어떻게 살아왔기에 이토록 굳어 버린 걸까?_스트레칭
바르게 서는 것이 이토록 힘든 일이라니_1번 자세
발레를 발레답게, 나를 나답게_턴 아웃
갈비뼈를 닫고 내면의 중심을 잡아_풀업
‘발 모양이 왜 그래요?’라는 무의미한 질문_포인&플렉스
마음이 다치지 않는 온도_웜업
가짜는 감동을 줄 수 없다_진심과 노력
고통을 껴안아야 알 수 있는 것들_근육통

#Barre work
당신과 나의 적당한 거리_바 워크
처음인 것처럼 매일 기초를 다지는 일_탄듀
두려움을 이기려면 부딪치는 수밖에_파쎄
끝까지 버텼다면 천천히 올라와야 한다_플리에
오늘만큼의 수고를 외면하지 않았다_땀자국
아픈 만큼 이해할 수 있을까_발레 슈즈
너의 아픈 마음을 예술로 만들어라’_메릴 스트립
“선생님, 꼭 나 자신과 싸워야 하나요?”_대가

#Center work
‘나 이만큼 할 수 있어요’ 하고 싶다_아라베스크
힘을 줄 곳과 빼는 곳을 아는 일_폴 드 브라
날아오르는 힘은 내리는 힘에 있다_그랑 제떼
세상이 빙글빙글 돌더라도 시선은 한 곳에_푸에떼
어제의 나, 1분 전의 나, 나 자신뿐_몰입
“고통에 집중하지 마세요.”_토슈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연습하기_정신적인 예술
감사와 존중을 담아_레베랑스

 

Part 3. 발레리나는 아니지만, 내 삶의 예술가다
발레를 하는 시간만큼은 오로지 나 자신이 된다
되돌아보고 질문해야 ‘재충전’이다
고통의 순간에 더 뻗으면 근육이 생긴다
내 일상이 무대가 될 수 있다
변하지 않는 것 같아도, 무엇이든 남는다
앎을 삶으로, 전쟁은 계속 된다
무적의 답변, ‘바이오리듬 때문입니다’

 

Part 4. 취미 발레 풍성하게 즐기는 법
몸과 마음의 기록, 발레 일기 쓰기
세계 발레인들의 축제, 월드 발레 데이
병이지만, 작고 확실한 기쁨, 장비병
‘참 여성스러운 취미네요’에 대한 항변
오랜 세월 버텨온 본질적인 아름다움
여행지, 특히 파리에서 더 행복한 발레인
모두가 자하로바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
당신의 발레를 찾는 일  




발레가 내 삶도 한 뼘 키워줄까요


내가 과연 발레를 배울 수 있을까?

피하지 말고 견뎌야 할 아픔도 있다

어릴 때부터 나는 헤어짐에 약했다. 이별에도 쿨하고 시크하게 돌아서고 싶지만, 헤어짐을 받아들이는 일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어려운 숙제다.


동물을 좋아했던 나는 동네를 돌아다니는 고양이와 개들을 집으로 데리고 오곤 했다. 열 살 무렵,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떠도는 개 한 마리를 집으로 데려와 ‘뽀동이’라 이름 붙이고 일주일을 먹이고 돌보았다. 하교하자마자 뽀동이와 놀기 위해 총알같이 집으로 달려갔던 일주일이었다. 하지만 자유로운 영혼의 뽀동이는 스트리트 라이프를 잊지 못하고, 열린 문틈으로 다시 출가하고 말았다. 내가 뽀동이를 찾아 한동안 동네 골목을 눈물 바람으로 돌아다녔던 건 우리 가족만 아는 비밀이다


그로부터 이십 년이 넘게 지났건만 헤어짐을 인정하지 못한 어린 날의 모습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세기의 사랑을 한 것도 아니요, 별 대단한 연애는 아니었지만 결국 서먹해진 관계를 끝냈던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베개는 밤새 흘린 눈물로 축축해졌다. 퉁퉁 부은 눈으로 출근을 할 수 없어 오전 반차를 냈다. 사무실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일을 하다가도, 잠잠한 마음에 한차례 광풍이 휩쓸고 지나가면 나는 화장실로 달려가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울컥 쏟아냈다.


마음을 할퀴고 간 옛사랑을 복기하며, 왜 나는 사랑과 연애에서 실패를 반복하는가 괴로운 질문을 껴안고 발레를 하러 갔다. 사랑이 끝나면 좋았던 추억만 붙잡고, 내가 당최 무슨 실수를 저지른 것인지 현미경으로 내 언동을 추적하고 뒤져보는 게 나의 몹쓸 습관이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서투른 연애와 관계 속에서 미성숙했던 내 모습을 반성하는 것은 언젠가 찾아올 다음의 연애를 위해서라도 분명 중요한 일일 테다. 하지만 관계라는 것이 한 사람만의 잘못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에도 나는 마치 헤어짐의 원인을 홀로 짊어지고 죄인처럼 굴었다. 그것은 스스로를 깊은 감정의 수렁으로 몰아넣는 무서운 형벌이었다.


이별을 여러 번 경험했지만 여전히 내 마음은 누군가로부터 거절 받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나이를 먹어도 왜 헤어짐 앞에선 늘 고통스러운 걸까? 몇 번의 헤어짐을 반복해야 이 지난한 아픔의 과정을 무던히 견뎌낼 수 있을까?


구원의 동아줄을 붙잡는 심정으로 찾은 것이 발레였다. 이렇게라도 해서 스스로에게 내린 형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헤어짐은 실패라고 볼 수 없다. 헤어짐 끝엔 또 다른 만남이 시작되니까. 어떻게 보면 삶은 죽음의 시작이고, 만남은 헤어짐의 시작이니 만남과 헤어짐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 아닌가. 동전의 앞면, 뒷면을 분리할 수 없듯이 이 아픔의 과정을 피하지 말고 굳건하게 견뎌낼 필요가 있다. 그런 심정으로 나는 발레에 몸과 마음을 맡겼다.


발레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혹시나 헤어진 연인에게서 후회 어린 연락이 오지는 않았을까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확인해 보던 내가 어느 날은 메신저 대신 메모장을 열고 그날 수업의 내용을 생각나는 대로 적고 있었다. 무거운 형벌의 끝이 보였다. 스스로를 가두었던 마음의 감옥, 그 빗장이 어느 틈에 스르르 열리고 있는 걸까. 나는 그곳에서 걸어 나와 발레 슈즈를 신고 있었다.


거울 속 나와 인사하는 시간

발래 클래스의 기본 복장은 마치 원피스 수영복처럼 생긴 ‘레오타드’라는 연습복과 ‘타이즈’, 그리고 ‘발레 슈즈’다. 사실 발레를 시작하고 나서 이런 차림의 내 모습에 적응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다소 민망한 차림새지만 이는 발레의 동작을 정확하게 배우기 위해서다. 한 가지 안심해도 좋을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보다 타인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거울 속 내 모습은 나만 민망할 뿐, 다른 사람의 몸을 볼 겨를이 없다. 특히나 발레 수업은 훈련 강도가 높기 때문에, 남들의 몸을 평가하고 있을 만큼의 여유를 주지 않는다.


그런데도 발레 복장을 하고서 전신 거울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을 보면 가끔은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더군다나 선생님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동작에 비해, 근력과 유연성이 부족한 내가 엉거주춤 이상한 모습으로 동작을 따라 하고 있을 때면 거울 속 나를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오는 것이다. 하지만 내 몸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점에 집착하고, 내 몸을 사회적 기준에서 한참 모자라는 것으로 여기는 것도 어딘가 이상한 일이다.


그 때문에 어른이 되어 배우는 발레의 첫걸음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바닥에서 무대 중앙으로

갈비뼈를 닫고 내면의 중심을 잡아 _ 풀업

“갈비뼈 닫으세요!” 발레를 시작하면서 그간 들어본 적 없는 다양한 지시를 수업 시간 내도록 듣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는 것은 갈비뼈를 닫으라는 이야기였다. 아니, 갈비뼈에 손잡이가 달린 것도 아니고 갈비뼈를 닫으라니 기괴하고도 아리송한 이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성인 발레 수업에 임하는 수강생들의 자세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첫 번째 단계, 갓 발레 클래스에 입문한 초보자로 선생님이 외치는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단계다. ‘팔을 들어라’, ‘다리를 뻗어라’ 정도의 일차원적인 지시는 무난히 따라 하지만, ‘갈비뼈를 닫아라’, ‘풀업해라’, ‘겨드랑이 안쪽에 힘을 주어라’와 같이 생전 처음 듣는 말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몸을 가누지도, 머리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단계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어느 정도 발전하면 두 번째 단계로 접어든다. 선생님의 지시 사항이 머리로는 대략 감이 잡히는 시기다. 즉,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몸은 따라 하지 못하는 단계다. 이 단계에서의 괴로움도 만만치 않ㄴ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웃기고도 슬픈, 이른바 웃픈 현상이 발생한다. 머리로는 정답을 아는데, 몸이 따라 주지 않는 슬픔이란. 여기서 수없는 반복의 과정을 거쳐야 머리가 이해한 대로 몸이 따라 하는 단계에 이르고, 좀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쌓이면 머리가 인지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최종적인 단계로 향한다.


첫 번째 단계, 머리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단계에서 가장 난감했던 것이 풀업(pull up)이었다. 우리나라 말로 적당히 바꿀 말이 없어 풀업이라고 그대로 명하는 이 자세는 발레리나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상체를 표현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요소다.


풀업은 단어 그대로 정수리를 천장 방향으로 팽팽하게 잡아당겨 꼿꼿하고 반듯한 상체 모양을 유지하는 것을 뜻한다. 무작정 목과 머리를 위로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어깨는 아래로 내려 작용 반작용의 힘이 상체에서 강력한 에너지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때 상체를 끌어올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갈비뼈 부근 흉통이 벌어지게 된다. 풀업은 이렇게 벌어지려는 흉통을 체간과 복근의 힘으로 제어하면서 완성된다. 즉, 갈비뼈를 닫으라는 말은 허리와 목을 세우고 어깨는 내리고 체간은 조은 채로 바르고 곧은 상체를 만들라는 의미다.


풀업을 하고 있으면 우아하고 가벼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면에 강력한 에너지를 끊임없이 발산하고 있다. 풀업을 인생관으로 비유할 수 있다면, 외유내강의 자세일 것이다. 타인에 대한 유연한 자세는 그 어떠한 것에도 휘둘리지 않는 단단한 자아가 있을 때 가능하다. 누구에게나 마냥 부드럽게만 하다면 주관 없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반대로 내 생각에만 갇혀 있다면 딱딱하고 고집스러운 사람이 될 것이다. 타인에게 관대하되 휘둘리지 않고, 중심을 꽉 잡을 수 있도록 나에게는 엄격한 외유내강의 사람. 우아하지만 강한 사람. 삶에서 풀업을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마음이 다치지 않는 온도 _ 웜업

고모와 나는 세대 차이도 크고, 살아온 환경에 따라 문화 차이도 크다. 그런데도 고모를 좋아하는 건,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만의 삶을 개척했다는 점이 존경스러웠기 때문이다.


고모와 미국에서 나눈 대화 중 잊히지 않는 말이 있다.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 상대에게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주고 싶은 만큼 주고, 사랑하고 싶은 만큼 사랑하더라도, 결단코 상대로부터 그에 향응하는 무언가를 기대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기대할 것 같으면 애초에 주지 않는 게 나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시간이 지나 여러 관계를 거치며 나는 그 말을 실천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번번이 경험했다. 쉽지 않은 만큼 나와 누군가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 더없이 중요한 일이라는 것 역시 깨닫고 있다. 타인과 외부 환경에 대한 기애에 행복을 맡기는 것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내 마음의 열쇠를 쥐여 주는 일이자, 나 자신을 옥죄는 행위다. 진정 자유로워지려면 단순하고 간결한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


발레 수업에서는 본격적인 동작을 시작하기 전에 웜업을 한다. 몸에 적당한 열이 나도록 매트나 플로어에서 근력 운동과 스트레칭을 하는 시간이다. 근육이 늘어나기 좋은 온도는 39도라고 한다. 쓰지 않던 근육에 갑자기 무리를 가하면 몸에 기어코 탈이 난다. 늘어나지 못해 근육이 찢어지기도 한다. 발레 동작을 연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건강하게 발레를 지속하려면 웜업은 필수다.


근육이 다치지 않는 온도가 39도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문득 마음이 다치지 않는 온도도 있을지 궁금해졌다. 내 몸이 평소에 하지 않던 동작을 배우고 소화하기 위해 이렇게 땀을 흘리며 몸을 보호해야 한다면, 마음 역시 무언가를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온도로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누군가를 내 마음에 받아들이거나 또는 나를 누군가의 마음에 내던질 때 무작정 불타는 열의로만 행한다면 나의 마음이든, 상대의 마음이든 쉽게 다칠지도 모른다. 빠르게 탈진할 수도 있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욕심으로 열띤 마음, 주는 것만큼 받고 싶은 기대감은 차분히 내려놓고, 나와 상대의 마음의 온도를 맞춰 가는 일. 본격적으로 발레를 하기 전에 충분히 웜업을 하듯이, 내 마음을 열고 상대의 마음을 여는 데도 웜업이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고통을 껴안아야 알 수 있는 것들 _ 근육통

발레는 고통을 사랑해야 배울 수 있는 예술이 아닐까. 고통을 모른다면, 고통을 껴안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발레를 진정 알 수 없을 것 같다. 고통을 품어야만, 외로움을 견뎌야만 맺을 수 있는 아름다움의 세계야말로 발레가 자리하는 곳이다. 발레가 주는 고통은 오로지 홀로 견뎌야 하기에 외롭고 고독하다. 몸을 최적의 표현 도구로 만들기까지의 고통을 누군가가 대신 겪어 줄 수 없다. 고통을 견뎌야 하는 외로움이 어쩌면 아픔을 증폭시키는 것일지 모른다. 쉽게 내어 주지 않는 발레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순간을 아프고 외로워야 하는 걸까?


대부분 시간을 의자에 앉아서 보내는 현대인들이 중력과의 전쟁을 치러야 하는 발레를 배우기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한 아픔이 뒤따른다. 굽혀져 있던 근육이 펴지고, 약해져 있던 근육이 조금씩 힘을 갖추면서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몸의 반응이다. 평소에 쓰지 않던 세밀한 근육이 그저 발레 흉내 몇 번 낸다고 해서 생길 리 만무하다. 시간과 수고, 땀과 눈물, 인내의 고통의 값을 치러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발레를 배운 지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여전히 발레의 모든 동작이 낯설고 힘들다. 수업마다 반복해서 배우고 있지만 쉽사리 내 것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반복된 훈련을 통해 되새김질하듯 마음에 새기는 것이 있다. 이 세상에서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점이다. 그것이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이라면, 당연히 그만한 수고와 인내를 심어야 할 것이다.


삶을 고통의 바다에서 헤엄치며 숨 쉬는 법을 익히는 여정이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고통의 크기가 누군가에게는 모래알 같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바위 같을 수도 있지만,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삶은 없다. 발레를 하며 얻는 근육통이 내 몸의 근육이 조금씩 자리 잡고 있는 증거라면, 일상에서 나를 피로케 하는 자잘한 고통이 어쩌면 ‘삶의 근육통’인지도 모른다. 일상에 고통이 없다면 그저 관성대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소중한 가치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핸 고통을 적극적으로 껴안자. 희생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삶을 사랑한다면, 고통과 친숙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마치 발레처럼.



발레리나는 아니지만, 내 삶의 예술가다

변하지 않는 것 같아도, 무엇이든 남는다

숫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가 경제학을 전공했던 이유는 빈부 격차와 부의 분배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가난한 나라는 왜 가난한 것인지, 어떻게 하면 기아를 근절할 수 있을지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 관심의 연장선으로 대학을 졸업할 무렵, 국가 간 교육 격차를 줄이는 국제 협력 사업을 하는 사단 법인에서 6개월간 인턴으로 일한 적이 있다. 세상에 무언가 기여하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 하나로, 요즘 말하는 ‘열정 페이’를 받으며 좁은 사무실에서 밤낮없이 6개월을 일했다. 경제적 보상이 충분치 않아도, 워라밸이 보장되지 않아도,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노동의 동력을 가하던 시절이었다.


문제는 6개월 동안 무한 동력일 것 같던 열정 엔진에 기어코 찬물을 끼얹는 사람들을 만나면서부터 생겼다. 직원을 사유 재산처럼 이용하는 갑질하는 사람들, 좋은 일을 하고 싶다는 누군가의 선한 마음으로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 나는 신문에서나 보아 왔던 갑의 횡포를 인생 처음으로 겪고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직원들을 동원해 근무 시간에 자신의 집 정원을 꾸미기 위한 돌을 나르게 하는 간부부터 기아 근절을 논의하는 포럼에 참석하러 와서 마사지 업소를 추천해 달라고 요구하는 교수까지, 표리부동한 사람들을 마주치게 될 때마다 순진한 열정에 쉽사리 금이 갔다.


무엇보다 내 안에 선명한 날을 세우고 있던 정의감은 인턴이라는 불안정한 지위에 짓눌려 조금씩 무뎌져 가고 있었다. 결국 인턴에서 정직원으로 전환 제의를 받는 시기에 일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꿈에 조금 더 가까워졌다고 기뻐했던 나는 정확히 6개월 후,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회의로 지쳐 있었다. 대학 동기들이 하나둘 공무원 시험공부와 대기업에 취직하기 시작할 때, 나는 소중한 젊은 날을 낭비한 것 같아 스스로 초라해졌다.


그런 내게 위로가 되었던 것은 ‘퇴동 모임’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퇴사를 결정한 몇몇 동료들이 퇴사 동기가 된 것을 자축하며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퇴사가 내 인생의 실패가 아니라, 젊은 날의 도전이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한때는 울며 웃으며 함께 일했던 이들이 이제 저마다 다른 업을 찾아 각자의 인생 항로를 만들어 가고 있다.


가끔 왜 발레를 취미로 삼게 되었을까 싶을 때가 있다. 발레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발레에는 빠른 길이 없다고 한다. 단기간에 성취감을 느끼기 어려운 예술이다. 백 번 동감한다. 발레에 적합한 몸을 만드는 일은 다시 태어나는 게 빠를 만큼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몸의 세밀한 부분까지 다듬고 훈련해야 하는 까닭에 변화가 눈에 쉬이 보이지 않는다. 일주일에 두세 번, 꾸준히 시간을 투자해도 실력이 늘지 않는 것을 보면 문득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은 변화와 자극을 쉽게 느끼지 못할 때 권태감을 느낀다. 처음과 같이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한 시기를 지나고 나면 누구에게나 권태의 시간이 찾아온다. 권태의 기저에는 변화가 없는 내 몸에 대한 불만이자, 쉽게 결과를 쥐여 주지 않는 발레에 대한 원망이 있는 듯하다.


더 이상 열정이 느껴지지 않으면 발레를 그만둘 수 있다. 발레가 나를 갉아먹는다고 생각되면 다른 취미를 찾아볼 수 있다. 빠른 성취를 이루고 싶은 이들에게는 발레가 적합하지 않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 발레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변하지 않는 것 같아 보여도 내 안에 작은 변화가 시작되고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내 삶에 분명한 획을 그을 것을, 내 안에 무언가를 남길 것을 믿기 때문이다.


고로 발레를 하면서 도무지 늘지 않는 것에 대해 자책하거나 비관하지 않기로 했다. 발레에 매진하면서 땀을 흘리는 이 시간이 내게 무엇이든 남겨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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