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방집 소년

   
정창영
ǻ
이상북스
   
14000
2018�� 11��



■ 책 소개
정창영의 장편소설 『다방집 소년』. 유난히 비밀이 많았던 저자의 어머니와 저자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부재한 아버지를 대신한 국가폭력과 다 자라지 못한 소년의 거세 공포. 떼려야 뗄 수 없는 두 남성성의 폭력적 관계를 탐구한다.

 

■ 저자 정창영
평생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한 편을 만들었지만 시나리오는 20대부터 무수히 썼다 지웠다는 반복했다. 매번 첫 열 페이지를 고치고 고치다 결국 시나리오 한 편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러다 시나리오 전 단계인 트리트먼트를 잘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주야장천 그걸 또 고치고 고쳐 썼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재미있는 스토리’를 쓰고 싶었는데 그 답을 찾기란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내 안에 쌓여 있던 이야기를 소설로 연재했다. 그리고 비로소 나만의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어쩌면 미련한 마음으로 꾸준히 ‘재미있는 스토리’를 쓰는 게 목표다.

파리 8대학 영화과 대학원 졸업 후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경계에 선 인생>을 연출했고, 2017년 SF소설 《바봇》을 썼다. 

 




다방집 소년

엄마는 내가 갓 열두 살이 되었을 무렵 신도심 개발 초기에 수도 다방이라는 간판을 달고 다방을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우리 다방집 옆에 있는 시외버스 터미널 주변에 다른 다방들이 우후죽순 생긴 것이 문제였다.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에서 읽은 바로는, 경상북도만 해도 1982년부터 지금까지 한 해에 250개씩 다방이 새로 생겼다고 하는데 경상남도 D시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여름방학 동안 나는 레지 아가씨 한 명 없이 장사를 하게 된 다방집 도련님이 된지라 어쩔 수 없이 틈만 나면 “조군아!” 하고 나를 부르는 손님들의 담배 심부름을 했고, 커피 잔이 쌓이면 열심히 설거지를 했다. 양손에 주부습진까지 생겨 상당히 우울했지만, 그렇다고 다방집 도련님 주제에 이런저런 사정을 어디다 대놓고 얘기할 형편은 아니었다.

간혹 양말을 짝이 맞지 않게 신는 것이나 구멍 난 양말을 신는 것도 그리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서울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오고 교양도 있는데다가 외모까지 출중한 여자라도 울 엄마처럼 남편 없이 전적으로 혼자 생계를 책임지며 일하는 여자들은 매우, 무지, 많이 바쁘다고 믿는 까닭에 별 말없이 그런 양말을 신고 다녔다. 어쩔 땐 짝짝이에 구멍 뚫린 양말을 신었다. ‘뭐, 어때!’ 싶었다.

문득 이렇게 효심이 지극한 아들인데도 어쩐 일인지 커오며 ‘아비 없는 후레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진짜 오늘도 그런 소리를 들었다. 오전 내내 졸다가 점심시간이 되어 도시락을 먹고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을 가려고 복도를 지나가는데 뒤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졈마! 다방년 아들인데, 즈그 아부지도 누군지 모린다카더라.”

“맞나? 누가 쟈 엄마가 전라도년이라 카던데...”

예전에 학교 친구들에게 저런 말을 들으면 좀 대들기도 했지만 주로 맞는 일이 많았다. 게다가 다방년 아들에 제 아버지 얼굴도 모르면서 괜히 친구들에게 시비를 붙여 싸움이나 하고 다닌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니 후레자식이라는 둥, 호로새끼라는 둥, 싸움이나 하는 문제아라는 둥, 뭐 그딴 소리를 하나라도 덜 들어야겠기에 앞으로 싸움은 절대 하지 않기로 다짐을 했다.

그 아이들은 그런저런 이유로 나를 혐오했고 나 역시 그 아이들은 혐오했다. 아무리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술집과 다방집을 하는 지하에 산다지만, 그런 일로 놀림을 받는 것이 억울했다. 그리고 어쨌든 사람이 그런 놀림과 협박에지지 않을 오기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생각하곤 했다.

더군다나 나는 86아시안게임이 곧 개최되고 88올림픽이 겨우 2년밖에 남지 않은 저 거룩한 서울 태생으로, 주민번호가 1,0으로 시작하는 것이 내 유일한 자랑이었다. 엄마는 서울 여자였고 나는 서울 여자의 아들이었다.

***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그 큰 잉어가 죽고 난 이후 우리 다방집에서는 더 이상 잉어를 키우지 않았다. 몇 해에 걸쳐 정성 들여 키웠고 상당한 크기로 자라 우리 다방집의 무게중심을 잡아주던 잉어였다. 그날 저녁 잉어가 죽어 있는 모습을 보고 나는 잉어가 위험에 처한 나를 구하고 목숨을 잃은 것이라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음날 새벽 일찍 나는 버스를 타고 구도심 항구 옆 바닷가 절벽 근처에 그 고마운 잉어를 고이 묻어 주었다. 당시 잉어를 묻으면서도 오른 팔뚝에 통증을 느꼈다. 팔에 난 시꺼먼 멍도 그렇고 마음속 일이 어떻게 바깥 세계에 영향을 주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점차 마음속 일이 마음속에서만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잉어를 묻고 부디 다음 생에는 바다의 용으로 태어나길 빌어주었다. 그런데 간밤의 꿈은 그 잉어가 내 기원대로 바다의 용으로 다시 태어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상서로운 꿈이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500원짜리 올림픽복권이다. 3000만 원이던 당첨금은 이제 무려 1억 원이 되었다. 예전에는 주택복권이었는데 어느 날인가부터 올림픽복권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뭐든, 그 돈이면 엄마랑 이 다방집을 벗어나 경일이네 고택까지는 아니더라도 지하가 아닌 지상에 번듯한 집, 아니 예전에 잠시 살았던 잠실의 주공아파트 정도는 다시 갖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특별한 능력이 있다손 치더라도 또 그런 능력 때문에 어떤 목마름에 시달리기는 하지만, 열일곱 살 먹은 소년이 할 수 있는 생각은 고작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늘 신기하게 생각하던 것은 어딜 가나 고양이들이 나를 반겨주었다는 점이다. 서울 하고도 잠실에 새로 생긴 주공아파트에 살 때도 놀이터에서 혼자 놀 때면 어디서 왔는지 모를 길고양이들이 같이 놀아주던 기억이 있다. 황금색 마징가제트를 한 손에 꼭 쥐고 길고양이들과 주로 코를 마주치는 것으로 안부 인사를 나눴다.

녀석들은 진정으로 내 안부를 걱정하는 듯했다. 부모 없는 아이들과 시설에서 생활할 때도 그랬고 D시로 오기 전 잠시 우리나라 제2의 조시에 있는 한 시장에서 살 때도 그랬다. 언제나 고양이들은 보이지 않게 내 주변을 맴돌았고 내게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무척이나 친절했다. 여기 D시에서도 가끔 우리 다방집으로 고양이들이 방문하곤 했다. 둘이 같이 오기도 하고 한 마리씩 오기도 했다.

간혹 오늘 같은 일요일 아침에 엄마가 레지 누나가 목욕탕엘 가서 다방집 홀에 혼자 자고 있을 때면 다방집 문을 탁탁 치고 야옹거리며 나를 깨웠다. 잠결에 문을 열어주면 한동안 다방집 홀에서 놀다가 어항 물을 할짝거리며 마시고는 나와 코를 맞추고 이 다방집을 떠났다. 그러면 기가 막히게 엄마와 레지 누나가 목욕탕 냄새를 듬뿍 풍기며 다방집 문을 열고 개선장군들처럼 들어왔다.

흔치는 않지만 고양이가 깨우지 않는 일요일도 있는데 그러면 대개 좀 더 늦잠을 잤다. 하지만 엄연한 다방집 마담인 엄마는 목욕탕엘 다녀와 일요일에도 가능한 한 9시 반이면 다방집 문을 열었다. 잠이 부족한 나는 대충 홀을 정리하고 내실 옆 쪽방에 가서 다시 잠을 청하곤 했다.

항상 특이하게 생각했는데, 엄마는 다방집 내실에서 잘 때면 언제나 내실 형광등을 켜놓고 잤다. 아무도 불을 켠 채 잠을 자라고 얘기하지 않았지만 불문율처럼 그렇게 했다. 아마도 엄마는 잠이 깼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랬는지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부터는 엄마랑 따로 자기 시작했다. 나는 불을 끄고 자는 것을 좋아했다.

뭐가 됐든 일요일 아침 9시 반쯤이면 목욕탕에 다녀온 엄마가 문을 열기도 하고, 그 전에 고양이들이 왔다가기도 하고, 일찍 잠이 깬 할아버지 손님들이 쌍화차를 드시러 와서는 문을 ‘톡톡’ 두드리기도 하기 때문에, 나는 홀에서 더 잠을 잘 수는 없었다. 간혹 엄마가 목욕탕에 너무 오래 머물다 오게 되면 내가 그 할아버지들에게 쌍화차를 만들어서 대접해야 했다. 할아버지들이나 나나 엄마를 기다리다 보면 성미가 급한 정씨 할아버지가 성화를 낸다.

“이 마담 와 이래 안 오노?”

“...”

“허허~ 쌍화차 한 잔 마실라 카니까 와이래 어렵노!”

“쌍화차 드려요, 어르신?”

“니가 끓인다꼬?”

“네.”

“자고로 차는 여자가 끓이내야 맛있는 긴데...”

“드리지 말아요, 어르신?”

“아, 아이다, 험, 험~ 다방집 3년이면 개도 커피를 끓인다카더만, 함 끓이 내봐라!”

“네!”

쌍화차! 어떻게 만드느냐면...음... 우선 엄마가 다방 물품을 주로 거래하는 재료상에서 가져온 쌍화차 원액 병을 주방 싱크대 위 선반에서 찾는다. 거기서 원액을 크게 한 숟가락 정도 떠내어 차 한 잔 정도의 물을 담을 수 있는 양은 이브리크(밑변 6센티, 높이 7센티 정도의 길쭉한 손잡이가 달린 작은 양은그릇인데, 여기에 커피도 끓여내고 유자차나 율무차, 또 생강차 가루에 넣을 물도 끓였다. 한 잔 정도의 물을 끓이기 딱 맞춤이어서 우리 다방집 만능 용기로 사용했다)에 담는다. 여기에 적량의 물을 부어 풀어주면서 2구짜리 가스렌지 위에서 끓였다.

쌍화차 원액을 풀어둔 물이 어느 정도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물을 조금 더 붓고 잣과 호두 그리고 땅콩가루를 뿌리고 나서 미리 썰어둔 대추를 넣고 물이 완전히 끓고 나면 가스레인지의 불을 끄고 설탕을 넣어 단맛을 추가해 나름 옥색 청자 찻잔인 데다가 승천하는 용 문양까지 새겨진 기품 있는 쌍화차 전용 잔에 부어 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과정이 남는데, 바로 계란 노른자 올리기 신공! 신선한 날계란에서 계란 노른자만 정확히 솎아내 쌍화차 위에 올리는 고급 기술이다. 만약 동그랗게 계란 노른자를 올리지 못하면 실패.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이건 쌍화차의 생명 같은 것이다. 화룡점정이라 하던가! 아, 초등학교 4학년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봄방학이 되기 전부터 다방집 도련님이 된 나 역시 여러 번의 실패를 맛본 끝에 쌍화차에 완벽하게 동그란 노른자를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요즘처럼 환절기가 되거나 몸이 허할 때면 나를 위해 쌍화차를 끓여 마시기도 했다. 한약 냄새가 나긴 하지만 일단 맛있고 먹고 나면 웬일인지 힘이 났다. 계란 노른자의 비린내가 싫은 손님은 노른자를 빼달라고 하면 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 다방집에 온 손님 중에 계란 노른자를 빼달라고 한 손님은 몇 해 간 본 적이 없다.

다방집 마담인 엄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무조건 큰 주전자에 물을 가득 붓고 펄펄 끓였다. 엄마가 없을 때는 내가 물을 끓였다. 다방 재료를 주문할 때면 엄마는 꼭 2킬로그램짜리 대용량 마스터 원두커피와 브랜드 원두커피를 동시에 시켰다. 이 원두가루가 우리 다방집이 돈을 버는 가장 밑바탕이 되었다. 이 커피 원두가루는 업체에서 주는 각각의 큰 원통형 깡통에 담아 플라스틱 뚜껑을 꼭 닫아서 밀폐해 보관해야 했다. 한번 개봉된 원두가루는 밀폐해 관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우리 다방집이 매번 드립 커피를 파는 건은 아니었으니 가능한 한 커피 원두 특유의 향이 날아가면 안 되기 때문이다.

매우 큰 스테인리스 주전자의 물이 맹렬히 끓어오르면 가스레인지의 불을 껐다. 그리고 업소용 대용량 플라스틱 드립퍼에 그에 맞는 대용량 종이필터를 넣고 두 종류의 원두커피 가루를 빨간색 플라스틱 컵으로 각각 두 컵씩을 넣고 끓는 물을 부어 둥근 모양의 대용량 유리 커피포트에 커피를 내렸다. 그렇게 우려낸 커피를 아까 말한 수도다방 전용 양은 이브리크에 한 번 더 끓여서 하얀색 커피 잔에 부은 후 설탕 두 스푼, 커피 프림 두 스푼을 아까지 않고 듬뿍 넣어 다방집 손님들에게 대접했다. 이것이 우리 다방집 커피 제조법이다. 손님의 취향에 따라 크림과 설탕은 더하면 더했지 빼는 법은 없었다. 이것 역시 우리 다방집의 인심이었다. 지금까지 우리 다방집 커피를 그냥 오리지널로 먹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무엇보다 우리 다방집 커피의 특징은 끓는 물을 붓기 전에 꼭 꽃소금 한 꼬집을 원두커피 가루 위에 뿌린다는 것이다.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다만 엄마는 꽃소금을 아주 조금이라도 넣었다. 물론 나도 그렇게 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우리 다방집 모닝커피는 D신도심에서 최고라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일요일 늦은 아침이면 우리나라 제2의 도시에 있는 큰 국립대학에서 강의를 하다 은퇴하고 D시의 신도심으로 이사를 왔다고 하는 팔순에 가까운 노교수님이 우리 다방집 쌍화차를 마시러 오곤 했다. 동네 다른 할아버지도 그랬지만 이분도 일요일 아침마다 똑같은 시간에 와서 똑같은 쌍화차를 마셨다. 연세를 많이 잡수셔서 그런지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고, 손에 힘이 없어 보여서 혹시라도 뜨거운 청자 찻잔을 놓치는 건 아닌지 조마조마하게 바라볼 때도 있다. 노신사는 조그만 체구에 단정하게 이발한 빽빽한 흰머리를 8대 2 가르마를 하고 보라색 보타이를 한 회색 양복을 차려입었다. 노신사가 두 손으로 뜨거운 쌍화차 잔을 들고 작고 야무진 자신의 입에 대고 마시기까지의 느리고도 정교한 손 떨림과 입을 오므렸다 펴는 행위의 거듭된 반복은 몇 천만 달러나 들인 <인디아나 존스>나 <람보> 같은 초특급 할리우드 액션 시리즈에서나 볼 수 있는 스릴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아슬아슬했다.

그래서 그 교수 할아버지가 한 주라도 안 오면 어디 아프신가 하다가 또 그다음 주에 오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마음을 놓고는 했다. 손님과 주인의 관계에서 서로 안부를 챙기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이 아니다. 그분은 전형적인 학자의 모습이었고 보통은 조용히 다방집 큰 어항 옆에서 신문이나 책이라도 읽고 계셨다. 그러면 어느새 다방집 전체로 그 지적인 분위기가 은은히 풍겨나갔다. 하필 다향만당(茶香滿堂)이라는 글자가 액자로 표구되어 벽돌 벽지를 바른 맞은편 벽 중앙에 걸려 있었다.

보통 우리 다방집의 일요일 아침을 때때로 학식 높으신 교수 할아버지와 함께 차분하게 시작한다 치면, 토요일 밤의 다방집은 그와 상반된 열기로 가득 차곤 했다. 그래서 토요일은 상황에 따라 아주 늦게까지 문을 열기도 했다. 아시다시피 몇 해 전 우리 다방집 맞은편에 소위 카바레라는 게 생겼고 이제는 제법 그 카바레에 손님들이 북적였다. 미용실에서 상당한 돈을 들여 제대로 파마머리를 한 중년의 여성들이 D시의 세찬 바닷바람을 맞으러 삼삼오오 택시를 타고 그녀들만의 해방구를 찾았다.

그러다 보니 토요일 오후 학교에서 자습을 하다가 저녁 무렵이 되어 우리 다방집에 들어서면 참 가관도 아니었다. 카바레의 댄서들이나 번쩍번쩍 윤이 나는 구두와 칼같이 주름이 잡힌 바지를 입어서 오히려 제비족임이 분명한 남자들이나 정말 춤바람이 난 중년의 여성들이 모여 진한 향수냄새와 뿌연 담배연기로 모두 함께 동화되었다. 정말이지 토요일 밤의 열기가 충만한 이 시간의 다방집은 D시에서는 자주 볼 수 없는 톡식(toxic)하면서도 매우 선정적인 장소가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한껏 멋을 내 천천히 내뿜는 여자들의 담배연기와 남녀의 눈빛이 오가는 농염한 움직임으로 아주 매혹적이면서 몽환적이기도 했다.

게다가 내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무렵부턴가 벽돌깨기나 갤러그 같은 전자오락기가 다방집에도 들어왔다. 얼마 전에는 7이라는 숫자가 나란히 이어진 줄이거나 대각선으로 이어진 줄이거나 하여튼 세 개가 연달아 맞으면 100원짜리 동전이 우수수 쏟아지는 전자 슬롯머신 같은 사행성 게임기가 슬그머니 구석자리를 차지했다. 벌금을 맞을 수도 있는데, 장사가 안 되는 탓에 엄마가 무리수를 두었다. 더군다나 매우 섹시한 금발의 여자 카우보이의 옷을 하나씩 벗기는 6단계의 카드 게임은 맞추기만 하면 배팅 액을 두 배로 만들어주었다. 물론 실패하면 배팅 액을 모두 잃었다. 이런 오락기들에서 나는 전자음과 동전 떨어지는 소리는 우리 다방집 특유의 분위기에 불법적이고 퇴폐적인 분위기까지 덧붙였다.

사내들은 뭐가 신기해서인지 돈을 딸 수도 있지만 결국 다 잃을 수밖에 없는 이 슬롯머신의 옷 벗기기 카드 게임에 빠져들었다. 당연히 손님들은 단 한 명도 끝까지 맞추지 못했고, 나는 다방집 도련님 특유의 오기와 특권으로 무수한 도전 끝에 이 게임의 끝을 봤다는 말만 해두겠다.

어쨌든 이 기계에 돈을 잃어준 손님들 덕분에 가끔 근처 신협에 십 몇 만 원어치 100원짜리를 들고 가 모두 1만 원짜리 지혜로 바꿔 오기도 했다. 그렇게 밀린 고등학교 등록금과 매일 도장을 찍어야 하는 일수를 해결했다. 고마운 일이었다.

아무리 돈을 많이 잃어서 내 등록금 해결에 도움을 준다고 해도 다방 구석에 앉아 게임기 위에 동전을 수북이 쌓아놓고 담배를 뻑뻑 피우며 슬롯머신의 단추를 연신 신경질적으로 누르는 저 사내(배씨라 불리는 사내인데 내가 좀 싫어한다. 비열한데다가 음흉한 구석까지 있어서 그가 다방집에 들어서면 괜히 긴장이 되는 인간이다)까지 더한 이 다방집이 내뿜는 토요일 밤의 열기는 D시에서 좀처럼 누릴 수 없는 환락의 축소판이었다. 결국 일주일 중 이 시간이 되면 담배연기까지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우리 다방집은 세상과는 판이하게 다른 묘한 곳으로 변했다.

아무리 곧 86아시안게임을 개최하는데다가 전 세계적으로 대한민국을 알릴 올림픽을 앞둔 덕에 주택복권 대신 올림픽복권까지 파는 나라라지만, 바닷가 소도시 다방 치고 우리 집 분위기가 너무 세련된 게 아닌가 문득 자랑스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

어느새 9월의 셋째 토요일이 되었다. 오늘 오후에 86아시안게임을 개막한다. 지난주 내내 북한에 의한 김포공한 폭탄 테러에 대한 뉴스로 신문이 도배되다시피 했다. 또 주중에는 전국적으로 성화 봉송인지 뭔지를 했다. 성화가 뭔 대수라고 이 야단법석을 피우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매일 저녁마다 성화 봉송 중계방송을 했다. 중계방송을 위해 송화 봉송로 주변은 환경미화를 빌미로 철거되는 무허가 건물들이 생겼다. 전국 곳곳에서 진행된 성화 봉송 코스 중 하필 우리 학교 앞 도로도 포함이 되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지난 화요일 아침 등굣길에서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학교 앞 도로 건너편에 엄연히 사람이 살림을 사는 비닐하루스 촌락이 강제로 철거되는 장면을 보았다.

버스가 다니는 2차선 아스팔트 도로를 사이에 두고 D시의 항구를 중심으로 한 구도심에 포함되는 우리 학교 쪽은 제법 격식을 갖춰 지은 단층이나 2층 양옥집들이 들어서 있었지만, 그 건너편에는 예닐곱 가구 정도 비닐하우스를 짓고 사람들이 살았다.

저녁때 집에 돌아가려고 비닐하우스 쪽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릴 때면, 어느 집에서 키우는 개 짖는 소리가 들렸고, 덩달아 이 집들에서 풍겨 나오는 맛있는 된장찌개 냄새로 몸을 배배 꼬며 당장 들어가 밥 한 끼 얻어먹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도 간혹 보았음을 물론이다.

아침 8시도 안 된 시간에 무슨 큰일을 하겠다고 공무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떼거지로 와 있었다. 심지어 포클레인까지 동원해 사람이 살고 있는 비닐하우스를 무지막지하게 부숴댔다. 말리던 비닐하우스촌의 남자는 공무원들에게 몰매를 맞았고 사방에서 아우성 소리가 났다. 내 나이 또래 사내아이가 맞고 있는 아버지를 말리다 또다시 매를 맞았다. 등굣길이 바빠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ep면서 저기 있는 공무원들을 깡그리 죽여버리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일었다.

그러다가 저 사람들은 그저 영혼 없는 공무원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했다. 낼모레가 추석인데 사람이 살림을 사는 집을 부수어야 하는 노예들. 갈 곳 없이 쫓겨나는 노예들. 어쩔 도리 없이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노예들. 포클레인의 굉음 사이사이 사람들의 울음소리와 비명이 난무한 가운데 나는 지각을 했다는 이유로 맞지 않기 위해 저 높은 곳에 있는 학교를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그 다음날인 지난 수요일 늦은 오후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전국으로 여러 군데에 걸쳐 성화 봉송이 이루어졌다고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추석으로 법정 공휴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교 학생들은 동해 남부지역 성화 봉속 주자가 지나가는 길에 나가 열렬히 태극기를 흔들고 박수를 쳐야 하는 박수부대로 동원되었다. 오직 이 행사 때문에 학교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들까지 모두 학교에 나왔다. 남학생들은 어제 철거된 무허가 건물들의 잔해가 치워진 공터 앞에 특히 더 촘촘히 배치되었고 여학생들은 학교 쪽에 배치되었다. 어찌된 일인지 무허가 비닐하우스에서 살던 사람들의 살림살이까지 싹 치워져 있었다. 학생들이 비에 젖건 말건 선생님들은 종이 태극기를 비에 젖지 않도록 품에 안게 했다.

나는 휴일에 학교에 나온 것도 그렇고, 쫄딱 비를 맞아서 더 화가 났지만 무엇보다 성화 봉송 주자들이 순식간에 우리 앞을 지나갔을 따름이라 매우 황당했다. 커브 길을 돌아 선두에 교통경찰 모터사이클이 보이고 나서 한 스물을 셌나? 아니, 열아홉인가? 우다다닥! 뚱뚱하고 몸이 느린 교감 선생님의 태극기 꺼내라는 말이 한타임 늦었다. 어떤 아이들은 아예 태극기를 꺼내지도 못했다. 우리 학교 민영식 교감 선생님의 난감해하는 표정이 이어졌다. 난 귀찮아서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 건너편에 전교 1,2등을 하는 교감 선생님의 딸이자 내게 손편지까지 전해 주었던 민소정이라는 여학생이 미안한 표정으로 계속 나를 쳐다봐서 신경이 쓰였다.

중계방송 차량과 카메라맨을 태운 모터사이클이 앞뒤로 따라갔다손 치더라도 도대체 왜 이런 행사에 멀쩡한 학생들이 동원되어야 하며 불과 20초도 안 되는 시간을 위해 멀쩡히 사람들이 살림을 사는 집을 때려 부숴야 했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제보다 구체적으로 체육관 같은 데서 제복을 입고 휘장을 두른 채 엄청난 조명에 그렇게도 머리가 빛나던 대통령의 얼굴이 떠올랐고, 나도 모르게 이가 빠드득 갈렸다.

한편 지난 목요일과 금요일은 추석이라 학교를 쉬었다. 우리 다방집은 명절 당일 오전만 쉬었는데, 시립 도서관 역시 연휴 때는 쉬는지라 나는 그냥저냥 새로 생긴 아파트 단지 근처 건물 2층에 있는 독서실에 가서 하루를 보냈다. 이 독서실은 365일 쉬는 날이 없었다. 다만 연휴가 짜증이 났던 것은 TV에서 하는 방송들이 죄다 86아시안게임 관련 홍보 프로그램들이어서 도저히 볼 만한 프로그램이 없었다는 점이다.

어여쁜 엄마 말고는 아는 일가친척이라고는 없던 나로서는 명절 때 다방집에서 오전이라도 조용히 지내는 게 좋았다. 의외로 명절 때 고향에 못 가는, 아니 안 가는 사람들이 꽤 있어서 명절 당일 오후에도 우리 다방집에는 제법 손님이 드는 편이었다. 그 손님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가족이라고 다 우애가 있고 화평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과 국가가 국민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 실 역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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