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것을 당신도 볼 수 있다면

   
정우성
ǻ
원더박스
   
13500
2019�� 06��



■ 책 소개

 

“가장 중요한 것은 관심”
정우성이 꾸는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꿈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로 활동 중인 배우 정우성은 2014년부터 매해 한 차례 이상 해외 난민촌을 찾아 난민을 직접 만나 그들의 소식을 우리 사회에 전해 왔다. 그가 그동안 난민 보호 활동을 하며 만난 이들의 이야기와 난민 문제에 대한 생각을 책으로 엮었다. “누구라도 난민촌에서 난민들을 만나 직접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사실과 유엔난민기구의 역할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을 것”이라는 그는 자신이 이런 확신을 갖기까지 경험한 것들을 나누고자 이 책을 냈다고 밝힌다.

 

그는 난민 문제에 대해 온정적으로만 접근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난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제 사회 차원에서 정치적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하고, 이를 위해 각국에서의 여론이 중요하며, 그러하기에 난민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 그 자체가 매우 중요한 참여라고 이야기한다.

 

■ 저자 정우성
배우. 1994년 영화 [구미호]로 데뷔하여 [비트], [태양은 없다], [무사], [똥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아수라], [강철비], [증인]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 대중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온전히 세상에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해 오던 중, 2014년 유엔난민기구 명예사절이 되어 본격적으로 난민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2015년 6월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로 임명되었으며, 매년 한 차례 이상 해외 난민촌을 방문하는 등 지속적이고 헌신적으로 난민 보호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직접 만난 난민의 이야기를 보다 널리 전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 책을 내게 되었다.

 

■ 차례
추천사 - 필리포 그란디(유엔난민기구 최고대표)

머리말
프롤로그

 

1장 너, 정말 준비됐니? - 2014년 11월 네팔
2장 명예사절에서 친선대사로 - 2015년 5월 남수단
3장 그들은 왜 유럽으로 가려 하는가 - 2016년 3월 레바논
4장 전쟁은 언제쯤 끝날까? - 2017년 6월 이라크
5장 비극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 2017년 12월 그리고 2019년 5월 방글라데시
6장 갑자기 찾아온 이방인들 - 2018년 6월 제주
7장 난민의 길을 따라서 - 2018년 11월 지부티와 말레이시아

 

에필로그
그가 본 것을 함께 바라보며 - 홍세화(장발장은행장, ‘소박한 자유인’ 대표)

 




내가 본 것을 당신도 볼 수 있다면


프롤로그

2014년 5월 15일,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와 명예사절 임명 협약을 맺었다.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가 문을 연 게 2001년인데, 연예인을 명예사절로 임명한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남을 돕겠다고 생각은 해 왔지만, 그저 막연한 수준이었다. 처음 유엔난민기구로부터 제안을 받았을 때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나한테?’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거창한 명분을 찾았다기보다는 딱히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는 게 솔직한 답일 거다. ‘그래, 지금 아니면 언제 하겠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나중에 들으니 유엔난민기구 측에서도 내가 그렇게 빨리 제안을 수락할지 몰랐다고 한다.


유엔난민기구를 통해 알게 된 사실

솔직히 제안을 수락할 때만 해도 난민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본격적인 활동을 앞두고 난민에 대한 자료를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다. 전 세계적으로 4,5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전쟁 등을 이유로 강제로 이주하는 바람에 보호를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는 내용이었다. 최근 자료를 찾아보니 이제 그 수는 7,000만 명에 이르고 있다. 7,000만 명이면 태국 인구와 맞먹고, 영국이나 프랑스 인구보다 많은 수다. 또한 유엔난민기구의 보호 대상자 수가 내가 활동한 지난 5년 사이에 무려 2,500만 명이나 증가했다. 2,500만 명이면 북한 인구와 비슷한 규모다. 게다가 이들의 절반은 어린이고, 여성과 노인 비중도 높다. 웬만한 국가 규모의 사람들이 국가라는 보호 장치 없이 세상에 내던져지고 있다. 유엔난민기구가 존재하는 건 바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유엔난민기구는 1950년 유엔총회의 결의로 설립되어, 1951년 1월 1일부터 업무를 시작하였는데, 주 업무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터전을 잃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돕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3년간 한시적으로 시작된 일이었는데, 세계적으로 새로운 난민이 계속 발생하면서 그 기간이 계속 연장되다가 2003년 유엔 총회를 통해 상설 기구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수습 차원에서, 3년이면 가능할 거라과 생각하고 시작한 일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난민? 보호 대상자?

난민을 둘러싼 개념도 조금 복잡하다. 기본적으로 난민은 ‘인종, 종교, 국정,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받는 박해를 피해 자신의 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나 ‘분쟁 혹은 일반화된 폭력 사태로 인해 고국을 떠나 돌아갈 수 없는 사람’으로, 일정한 기준에 따라 ‘난민’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위와 같은 이유로 자신의 터전을 떠나기는 했는데, 아직 국경을 넘지 못하고 자국 내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난민이 아닌 ‘국내 실향민’으로 분류한다. 또한 국경을 넘었다고 해도 일정한 절차를 거쳐 난민 신분을 인정받아야 하는데, 아직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난민지위신청자’ 혹은 ‘난민비호신청자’라고 불린다.


앞서 말한 7,000만 명이 이르는 보호 대상자 중 4,000만 명가량이 국내 실향민이고, 엄격한 의미의 난민은 2,000만 명 정도다. 이 세 분류 외에도 고국이나 고향으로 돌아간 난민 혹은 국내 실향민을 뜻하는 ‘귀환민’(고향으로 돌아간다고 바로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미 파괴된 터전이라 여전히 보호와 지원이 필요하다), 어떤 나라에서도 국적을 인정받지 못한 ‘무국적자’, 그리고 위 분류에 속하지는 않지만 보호가 필요한 ‘기타 보호 대상자’도 유엔 난민기구의 보호 대상자가 포함된다.



너, 정말 준비됐니? - 2014년 11월 네팔

2014년 5월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의 명예사절이 되고 난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캠페인 영상을 촬영하는 것이었다. 세계 난민의 날(6월 20일)을 맞아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가 서울시민청에 마련한 전시회를 찾아 인사말을 하기도 했다. 그런 일반적인 활동들 사이에 틈나는 대로 유엔난민기구에서 제공한 자료를 보며 난민 문제에 대한 공부도 해 나갔다.


때마침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에서 네팔에 있는 난민 캠프를 방문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잠을 설치다

네팔로 출국하기 전날, 채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참 오랜만에 느껴지는 긴장감이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감정인가 싶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감정의 실체를 알 것 같았다. 두려움, 솔직히 두려웠던 거다. ‘너 정말 준비됐니?’ ‘네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하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뱅뱅 돌았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네팔행 비행기에 올랐다.


처음 접하는 난민 캠프

수도 카트만두에서 네팔의 거의 동쪽 끝에 자리한 다막으로 가는 길은 육로로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비행기로 이동해야만 했다. 다막에는 주로 부탄에서 온 난민들이 보호받고 있는 벨당기 난민 캠프와 사니스차르 난민 캠프가 있었다. 이들은 부탄에 살고 있던 로트샴파트스라는 부족으로, 티베트계가 주류인 부탄에서는 소수인 네팔계 부족이었다. 이들은 1990년에 부탄 왕정의 종족 차별 정책으로 부탄에서 추방되었다가 인도를 거쳐 결국 이곳 다막에 자리 잡았다.


지금 난민 캠프에서 기거하는 사람들의 수는 대략 2만 6,000여 명, 난민 캠프를 운영하는 유엔난민기구 네팔대표부는 부탄의 정치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는 게 쉽지 않다고 보고 이들을 제3국에 정착시키는 ‘재정착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벨당기 난민 캠프에서 처음으로 난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난민들의 거처나 먹을거리는 직접 보니 말문이 막혔다. 그래도 이곳은 난민 캠프치고는 비교적 상황이 좋은 곳이라는 유엔난민기구 직원의 말에 더욱 놀랐다.


고향을 떠난 지 20년 된 할아버지

유엔난민기구의 안내로 난민 캠프 곳곳을 다니다 한 할아버지와 마주했다. 고향을 떠난 지 20년이 되었다는 할아버지는 낯선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한께 난민 캠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재정착 프로그램을 통해 다른 나라로 갔지만, 할아버지는 여전히 이곳에 머무르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죽기 전에 반드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고향으로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기 위해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계속 이곳에서 지내신다고 했다.


난민조차 되지 못한 사람들

다막의 두 난민 캠프에 말고도 네팔에는 많은 난민이 살고 있다. 그 수는 얼추 4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다막 난민 캠프의 부탄 출신 난민과 자와라켈 캠프의 티베트 출신 난민은 네팔 정부로부터 난민 인정을 받아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이다. 다른 나라 출신 난민들은 정부로부터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해 공식 캠프 역시 꾸리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카트만두와 같은 도심지에서 도시난민으로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골목 한 귀퉁이에 천막을 치고 사는, 그 어느 국가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하는 이 사람들은 식수를 구하는 것조차 무척 버겁다. 카트만두에서 만난 소말리아에서 왔다는 한 소녀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소녀는 내전으로 엉망이 되어 버린 소말리아에서는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생각에 언니와 함께 소말리아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가 어렵게 출국을 도와줄 사람을 알아봐 주었지만, 알고 보니 그는 난민의 열악한 상황을 이용해 자기 잇속을 챙기는 못된 브로커였다. 두 자매를 인도로 보내 준다고 해서 그렇게 믿고 따랐는데, 정작 그들이 도착한 곳은 인도의 성매매촌이었다. 인신매매였다. 지옥 같던 성매매촌을 탈출해 네팔까지 올 수 있었던 이는 동생뿐. 언니는 탈출하다 붙잡혔는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도망갔는지 알 길이 없다. 그 소녀는 천신만고 끝에 카트만두까지 왔지만, 삶 자체가 크게 나아진 건 없다고 했다.



명예사절에서 친선대사로 - 2015년 5월 남수단

그럼에도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삼손은 수단에서 혼자 국경을 넘어와 아중톡 캠프에서 지내고 있는 난민이었다. 삼손의 아버지는 그에게 “무력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배움뿐이다. 너는 남수단에 가서 교육을 받고 너의 꿈인 기자가 되어 지금 수단과 남수단이 처해 있는 어려움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뜻을 받아 국경을 넘어 이곳까지 온 삼손은 기자가 되겠다는 꿈을 키워 가고 있다. 그는 수단과 남수단의 상황을 전 세계에 알려 도움을 이끌어 내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생각한다. 난민 캠프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틈틈이 그곳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있다.


평생을 난민촌에서 지낸 로다의 꿈

로다는 20년 전 에티오피아의 한 난민 캠프에서 태어났다. 난민 캠프를 전전하는 삶이었지만, 대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이어 나가기도 했다. 현재는 내전으로 인해 더 이상 학업을 쌓지 못하고 있다. 그녀의 가족은 가진 것을 모두 잃은 채 국내 실향민이 되어 여러 캠프를 옮겨 다니던 중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이런 로다의 꿈은 변호사가 되는 것이다. 보다 안정적인 삶을 꿈꾸는 걸까? 로다에게 변호사가 되려는 이유를 물었다. 내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방향의 답을 돌아왔다. 로다는 여러 난민 캠프를 옮겨 다니면서 생활하다 보니 법률 지식이 필요하다고 체감했다고 한다. 자신은 물론 자신과 같은 처지의 보호 대상자들 앞에 늘 법적인 문제가 놓여 있지만, 이들에게 제공되는 법률 서비스는 늘 한정되거나 아예 없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변호사가 되어 난민 보호 대상자들에게 필요한 법률 지식을 제공하고 싶다는 게 로다의 구체적인 꿈이다.


앞서 만난 삼손이 기자가 되겠다는 이유에서도 그랬고, 내가 난민 캠프에서 만난 친구들의 장래 희망은 늘 무척 구체적이었다. 게다가 본인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닌 주변의 난민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캠프가 없어지기를 꿈꾸다

난민 캠프에서 일하는 유엔난민기구 직원들의 꿈은 난민들이 모두 고국으로 돌아가고 캠프가 문을 닫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십수 년간 이런 일은 없었다. 전쟁과 내전이 끝나는 곳은 없고, 계속해서 새로 늘어나고만 있다.


그런 현실 속에서도 한 가닥 희망을 엿보게 되는 장면이 있다. 남수단에서 만난 한 유엔난민기구 직원이 내게 자신이 눈물을 펑펑 쏟았던 장면을 들려주었다. 몇 년 전 수단과 남수단이 잠시 휴전했을 때, 난민들이 강에 보트를 띄우고 집에 돌아가는 그 모습이 그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서 꿈꿔 보았다. 삼손이 수단의 고향으로 돌아가 그 모습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는 모습을. 로다가 캠프틑 떠나는 마지막 실향민을 향해 손을 흔들며 배웅하는 모습을.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가 되다

남수단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다시 찾아온 세계 난민의 날에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로 임명되었다. 명예사절이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 차원에서 내게 부여한 직함이라면, 친선대사는 유엔난민기구의 공식 직함이었다. 그렇다고 내 역할이 달라진 것은 없지만, 그간의 활동이 유엔난민기구에도 도움이 된 것 같아 기뻤다. 내가 임명될 당시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는 안젤리나 졸리를 비롯해 11명이었는데, 지금은 전 세계에서 25명의 친선대사가 활동하고 있다. 그중에는 케이트 블란쳇이나 벤 스틸러 같은 유명 배우도 있고, 《연을 쫓는 아이》로 유명한 할레드 호세이니나 유명 판타지 소설가 닐 게이먼 같은 작가도 있다.



전쟁은 언제쯤 끝날까? - 2017년 6월 이라크

이라크는 중동 지역의 난민 문제가 집약된 곳이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전쟁, 1990년대 걸프전쟁에 이어 2003년에는 이라크전쟁이 발발했다. 미국 중심의 다국적군에 적대적인 반군의 무장 투쟁이 에어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갈등, 쿠르드족의 독립 투쟁으로 혼란은 확산되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대규모 난민이 유입되고, 이라크-시리아 이슬람국가(IS)의 출현까지 이어져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갈등 관계가 펼쳐지고 있다.


아버지 시신을 곁에 두고

살마다는 시리아에서 온 40대 여성이었다. 그녀의 딸 둘은 터키를 가쳐 독일까지 가 이제 막 난민 신청을 했다고 한다. 살마다는 나머지 아들 여섯을 데리고 이라크로 넘어와 캠프 생활을 하고 있었다. 캠프 안의 거처는 비가 새는 통에 아이들이 편히 잘 수조차 없어, 어렵사리 모든 돈으로 지붕을 새로 했다. 양철 지붕은 한낮이 되면 발갛게 달궈졌다. 열기는 집을 사우나로 만들었다. 들어서자 땀이 줄줄 흘렀다. 어떻게 이런 집에서 사느냐고 물었더니, 평소에는 아이들과 함께 집 안에 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고 했다. 밤이슬 피하는 게 어디냐는 말을 하는 것만 같았다.


살마다의 걱정 중 하나는 아이들의 기억이었다. 나흘 동안 아버지의 시신을 곁에 두고 벌벌 떨어야 했던 시리아에서의 기억이 아이들에게 평생 상처가 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날아든 총탄에 살마다는 남편을, 아이들은 아빠를 잃었다. 집 앞 거리에서 총탄에 쓰러진 아버지를 살마다와 아이들은 이틀 동안 창너머로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다 용기를 내 밖으로 나가 시신을 끌어 집 안으로 들여놓았다. 들여놓기는 했는데 무서워 나가지도 못하고 또 사흘을 시신과 함께 보냈다. 다섯째 날, 살마다는 결국 남편의 시신은 남겨 두고 아이들을 데리고 탈출했다.


어떤 사람이 눈앞에서 총탄에 죽는 것을 보는 것만 해도 큰 충격일 텐데, 그게 다른 누구도 아닌 아빠라면? 게다가 며칠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 시신을 지켜보기만 했다면? 그곳을 떠나고 싶어도 날아드는 총탄이 무서워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몇 날을 더 벌벌 떨어야 했다면? 아이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아이들이 큰 내색은 안 하지만, 살마다는 자다가 벌떡벌떡 깨는 아이들 모습을 종종 본다고 한다.


한때 난민이었던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언젠가부터 난민 문제를 우리 역사와 함께 생각하게 된다. 일제 강점기 때 한반도를 떠날 수밖에 없던 선조들, 6.25전쟁 때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 그들 역시 난민이었다. 우리를 도왔던 다른 나라 사람들의 손길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우리가 국제 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서 난민 문제에 관심을 갖고 지원해야 한다.


“난민을 돕는 게 우리한테 무슨 이득이 있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그 사람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누군가를 돕는데, 거기서 어떤 이득을 찾는 것은 순수한 마음으로 돕는 게 아니다. 난민 지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비극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 2017년 12월 그리고 2019년 5월 방글라데시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를 거쳐 콕스 바자르에 있는 쿠투팔롱 난민캠프를 찾았다. 2017년 8월에 발생한 폭력 사태로 62만 명이 넘는 로힝야족이 미얀마 국경을 넘어 방글라데시로 넘어왔다. 이미 30만 명 이상이 머물던 쿠투팔롱 난민 캠프였다. 전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난민 캠프.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곳은 식량과 식수 부족은 물론이고 위생이나 영양 결핍 등의 문제가 만연해 있었다.


2017년에는 이미 한 차례 이라크를 방문했기에 추가로 국외 난민 캠프를 방문할 계획은 없었다. 그런데 한국을 방문한 필리포 그란디 유엔난민기구 최고대표와의 만남에서 로힝야 난민들의 상황을 전해 듣고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란디 최고대표는 자신이 만난 로힝야 난민 여성 대부분이 성폭행당하고, 아이들 대부분은 부모의 죽음을, 부모 대다수는 아이의 죽음을 목격했다고 전했다. 20년 전에 일어났던 르완다 대학살보다 더 심각하다며 문제의 심각성을 한국에 널리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먼저 문제의 심각성을 두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돌아갈 고국이 없는 로힝야 난민들

그간 만난 난민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결국에는 집으로, 고향으로, 고국으로 돌아가는 게 목표였다. 이제껏 내가 만난 난민 중에서는 타국 땅에 정착하려고 했던 사람은 없었다. 일시적으로 좀 더 안전한 환경, 아이들이 충분히 교육받을 수 있는 환경으로 옮겨 갈 생각을 하더라도, 그것은 아이들이 고국을 다시 일으킬 수 있도록 준비시키기 위한 것에 가까웠다. 그래서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로서 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이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우리는 난민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만 일시적으로 이들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로힝야 난민은 달랐다. 그들은 눈앞에서 가족이 총살당하는 모습을, 갓 태어난 아기가 불타는 덤불에 던져지는 모습을 봐 온 사람들이다. 마을 주민 전체가 몰살되거나 뿔뿔이 흩어지는 상황을 반복해서 보고 겪으면서 이들은 무엇을 자신의 조국이라고 불러야 할지조차 잊은 사람들이다.


내가 만난 로힝야 난민 중 그 누구도 선뜻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지 못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떠나라는 말에 맨발로 수백 킬로미터를 걸어 이곳까지 온 이들에게 돌아갈 고향은 없었다.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가까스로 벗어났지만 언제 다시 쫓겨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들은 하루하루를 겨우 버텨 내고 있었다. 과연 이들에게 희망은 무엇일까?


그들은 왜 고통받아야 하는가?

무자비한 탄압의 원인으로 늘 언급되는 것들이 있다. 미얀마가 로힝야족에 대한 원한을 품을 수밖에 없는 많은 역사적, 정치적 이유가 줄곧 거론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미얀마 정부의 무자비한 탄압은 대부분의 로힝야 난민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저 견디기 어려운 폭력일 뿐이었다.


내가 만난 로힝야 난민 대다수는 자신들이 탄압받게 된 정치적, 역사적 배경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로힝야족 문제는 단순하게 선악을 구분하기 힘든 복잡한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로힝야 난민이 겪는 고통 그 자체는 복잡할 것이 없다. 누구라도 그들의 고통 앞에 선다면, 이 고통을 끝내야만 결론에 다다를 것이다.


그들이 탄압을 받게 된 배경에는 정치적, 역사적인 것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것도 있다. 대부분이 불교도인 미얀마에서 이슬람 교도인 로힝야족이 차별과 탄압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제까지 만나 온 다른 난민의 고통 뒤에도 많은 경우 종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종교 간의 다툼도, 종교 내부의 다툼도 있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을 달래고자 만들어졌을 종교가, 서로 사랑하고 생명을 죽이지 말라고 부르짖는 종교가 왜 이렇게 인간을 더한 고통으로 내모는지 이해하기 힘들 때가 많다. 우리가 추구하는 종교가 과연 신의 요구에 부합하는 종교인가 하는 의심도 들곤 한다.


더 큰 비극을 막고 있는 사람들

난민을 양산하는 문제에 대해 이분법적으로 선악을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이런 경우 결국은 각 정부가 입장을 조율하며 정치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그 답을 찾는 시간 동안에도 난민들의 희생은 계속된다.


누군가는 그간의 사정이나 이유를 묻지 않고 당장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호해야 한다. 유엔난민기구를 비롯한 인도주의 구호 기구들이 필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의 활동이 없다면 이 세상은 지금보다 더욱 큰 비극들로 가득 찼을 것이다.


여전히 세상에는 다른 이의 고통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그 덕에 세상이 조금씩이나마 나아지고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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