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이미 충분합니다

   
안젤름 그륀(역:김현정)
ǻ
쌤앤파커스
   
14000
2019�� 07��



■ 책 소개

 

후회도 불안도 없이, 오늘을 최고로 행복하게 사는 법

 

‘사제를 치유하는 사제’, ‘유럽인들의 정신적 아버지’로 유명한 세계적인 영성작가 안젤름 그륀 신부의 신작. 이 책은 여러 매체로부터 ‘불만족이 유행병처럼 번지는 시대에 꼭 필요한 처방’이라는 호평을 받았고, 이 책을 주제로 한 그의 대중강연도 인기가 높다. 부족해서가 아니라 ‘만족하는 법을 몰라서’ 괴로운 사람들에게 안젤름 그륀 신부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타인에게, 신에게 왜 만족하지 못하는지 명쾌하게 밝히고, 내면(마음)과 외면(행동)의 일치로부터 긍정적인 변화가 시작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어제를 후회하고 내일을 걱정하느라 오늘이 불행한 사람, 밑 빠진 독처럼 욕심이 멈춰지지 않는 사람, 만족할 줄 몰라 늘 소진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가만히 덮어주는 따듯한 위로와 충고가 가득한 책이다.

 

■ 저자 안젤름 그륀
‘사제들을 치유하는 사제’, ‘유럽인들의 정신적 아버지’, ‘유럽에서 가장 존경받는 행복 멘토’로 불리는 우리 시대 최고의 영성작가. 그의 책들은 전 세계 30여 개국에서 1,500만 부 이상 판매되었고, 언어와 종교의 경계를 뛰어넘어 수많은 독자들의 영혼에 깊은 감동과 울림을 주었다.

 

1945년 독일 융커스하우젠에서 태어나 뷔르츠부르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성 베네딕토회 뮌스터슈바르차흐 대수도원에 들어가 신부가 되었다. 성 오틸리엔과 로마 성 안셀모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전공해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뉘른베르크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 후 철학과 신학, 경영학을 분석심리학에 접목하여 대중강연과 상담을 해오고 있다. BMW, 보쉬, 바이엘, 다임러벤츠 등 〈포춘〉 선정 500대 기업에서 조직갈등을 해소해주는 인기 상담가로 유명하다. 현재는 뮌스터슈바르차흐에 있는 베네딕토회 수도원의 원장을 맡고 있으며, 영성지도와 강연,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황혼의 미학》, 《삶을 놓치지 마라》 등이 있다.

 

■ 역자 김현정
이화여자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독일 예나 대학에서 수학했다. 현재 번역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출판기획 및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마음의 상처와 마주한 나에게》, 《복종에 반대한다》, 《혼자가 더 편한 사람들의 사랑법》 등 다수가 있다.

 

■ 차례
시작하며 _ 후회도 불안도 없는 하루

 

1 결코 끝나지 않을 헛된 싸움
2 오늘 당신이 선물로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3 부족해서가 아니라 만족하지 못해서
4 가득 채우지 않아 더 충만한 기쁨
5 행복에 정답이 있다면
6 당신은 이미 충분합니다
7 더 가지고 싶은 마음 멈추기
8 온전히 받아들인 것만 바꿀 수 있습니다
9 소진된 마음을 채워주는 것은 온유함뿐
10 행복한 사람은 주어진 것을 최고의 것으로 만듭니다
11 불만 바이러스로부터 나를 지키는 법
12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서
13 이 세상에서 당신이 맡은 배역은 무엇입니까?
14 마음속 그림자와 화해하기
15 신은 당신을 만족스럽게 지으셨습니다
16 본래의 나 자신과 좀 더 가까워지도록
17 단 하나의 햇살 속에서

 

마치며 오늘만 최고로 행복하게

 




당신은 이미 충분합니다


오늘 당신이 선물로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인들은 ‘적은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말 속에는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삶의 기술’이 담겨 있습니다. ‘적은 것에 만족한다’는 것은 체념적인 자세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성공할 능력이 없어서 혹은 여유를 부릴 정도로 돈을 많이 벌지 못하니까 적은 것에 만족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만족은 마음이 평화롭다는 신호입니다.


저는 제가 마시는 물, 제가 먹는 빵에 만족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만족은 제가 정말로 물 한 모금을 즐기면서 조심스럽게 마실 때, 갈증이 풀리는 시원함을 느낄 때, 신선하고 맑은 물을 마시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행복한 일인지를 느낄 때만 생깁니다. 빵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빵의 맛을 충분히 느끼고 즐길 때만 빵에 만족할 수 있습니다.


만족은 언제나 감사할 줄 아는 마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으며, 점점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로마 철학자 키케로는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이 ‘후마니타스’, 즉 인간성에 위배된다고 보았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지금 이 순간에 나에게 무엇이 주어졌는지를 인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기회를 그냥 지나쳐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잠시 멈추고 내가 무엇을 선물로 받았는지를 생각해보고 깨달으면 감사하는 마음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갑자기 감사할 수 있는 무수한 기회를 발견하게 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정신수양의 핵심으로 생각한 수도사 데이비드 스타인들 라스트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 3단계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멈추세요! 둘러보세요! 행동하세요!” 이것이 바로 감사의 3단계입니다. 멈추세요! 그렇지 않으면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당신에게 주어진 ‘감사할 기회’를 지나치게 됩니다. 둘러보세요! 그래야 기회를 포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움켜쥐고 행동하세요! 마지막 단계는 앞의 두 단계와 똑같이 중요합니다. 데이비드 스타인들 라스트는 행동이 그렇게 어렵고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감사를 표현하는 행동은 “감사함을 무언가로 만드는 것이며, 삶에 도움이 되도록 그 기회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저에게 상처를 준 누군가의 말에는 감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상처를 준 말에 침착하고 너그럽게 반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데이비드 스타인들 라스트는 감사함에 대해 저술한 자신의 저서에서 옴람 미카엘 아이반호프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마술지팡이를 얻은 것과 같다.”


감사함은 슬픔과 상심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내가 감사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정말로 항상 존재합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서 다른 사람들을 향해 다가가 그들을 기쁘게 해줄 수 있는 이러한 새로운 나날이 늘 감사합니다.


독일어로 ‘감사하다danken’과 ‘생각하다denken’은 단지 철자 1개만 다릅니다. 영어도 ‘감사하다thank’와 ‘생각하다think’가 비슷하죠. ‘감사하다’라는 말은 ‘생각하다’라는 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올바르게 생각하는 사람이 감사할 줄도 알기 때문이지요. 감사함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해 올바르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감사함을 모르는 사람은 깨어 있는 생각을 할 수도 없습니다.


감사하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만이 올바른 생각을 합니다. 올바르게 생각하는 사람, 깨어 있는 정신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마음만이 우리 인간에게 꼭 맞습니다.


목사이자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조하여 말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나의 과거는 깊은 어두움으로, 알 수 없는 수수께끼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떨어진 것과 같다.” 다시 말해 우리가 과거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과거의 의미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면 무든 것이 이해하기 어렵고 알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됩니다. 감사함은 우리에게 과거를 해명해줍니다. 그러면 그 과거는 비로소 진정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지요. 과거가 우리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미 충분합니다

우리는 국가나 사회, 직장에 대해서만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종종 자신에 대해서도 욕심을 부리지요. 자신에게 지나치게 높은 기대를 갖고 거기 맞추도록 스스로를 다그칩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항상 기뻐야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고, 매사에 성공해야 하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아야 합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왜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러한 지나친 요구를 하는 걸까요?


이러한 지나친 요구는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기대를 갖는 것은 정상적인 일입니다. 자녀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부모는, 자녀가 아무것도 못할 거라고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그런 부모는 없겠지만요. 어쨌든 자녀가 부모의 기대를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그 과도한 기대는 자기 자신을 향한 내적 요구가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평생 스스로에게 과도한 마음의 짐을 지우고 삽니다.


몇몇 사람들은 제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쉴 새 없이 자기 자신을 몰아붙여 뭔가를 해야 했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자란 사람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항상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을 갖고, 무슨 일이든 대단한 성과를 거두어야 한다는 요구를 자기 자신에게 하게 됩니다. 그들은 놀거나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시간낭비라고 느끼고, 어떤 일이든 성과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단 1시간도 오롯이 자신을 위해 자유롭게 쓸 줄을 모릅니다.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우울증 치료 전문가인 다니엘 헬은 자기 자신을 향한 지나치게 높은 이러한 요구가 우울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합니다. 그는 우울증이 ‘도움을 요청하는 영혼의 외침’이라고 했습니다.


영혼은 한계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는 요구를 하게 되면, 영혼은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렇게 영혼이 요동치는 것, 즉 우울증에 걸린 것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경우 우울증은 자신을 향한 지나친 요구와 작별해야 한다는 경고등 기능을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완벽할 수도 없고, 성공할 수도 없습니다. 항상 용감할 수도 없고, 어디에서나 잘 적응할 수도 없으며, 매순간 침착할 수도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자신감에 가득 차 있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어도 됩니다. 온전한 자기 모습을 허락한다면 삶에도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주어진 것을 최고의 것으로 만듭니다

만족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긍정적으로 반응합니다. 말하자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비록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이 아닐지라도) 최고의 것으로 만듭니다. 예를 들어 하이킹하는 날 비가 와도, 날씨를 불평하기보다 빗속을 걷는 능력이 생겼다며 좋아합니다. 어떤 상황이든 자신에게 좋은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한편 휴가지에 가서도 집에서 먹는 것과 똑같은 것을 먹고, 집과 똑같은 편안함을 요구한다면 ‘포만한 만족’이 생겨납니다. 새롭고 낯선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이지요. 포만한 만족은 우리를 편협하게 만들고, 좋은 만족은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줍니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다른 나라에서 혹은 휴가지에서 경험하는 새롭고 낯선 모든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흠뻑 받아들입니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일할 때도 남다른 태도와 마음가짐을 보입니다. 어떤 회사에 들어가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금세 그만두는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들은 직장 분위기가 좋지 않다면서 얼마 못 가 그만둡니다. 매우 흔한 경우입니다. 만약 몸이 아파서 업무를 계속 할 수 없고 그 때문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면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적절한 수순입니다. 하지만 금세 그만두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런 경우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회사에 들어가서 처음에는 동료들이 너무 좋다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합니다. 하지만 고작 며칠 후에 동료들이 융통성 없고 고루하며 자신에게만 못되게 군다고 불평합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따돌림을 당했다고 생각합니다. 회사 사람들이 자신을 받아들여주지 않았다고 한탄하면서 말입니다.


이처럼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새로운 환경에서도 항상 같은 상황을 경험합니다. 즉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회사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몰상식하다고 비난합니다. 심지어 이성 동료를 다짜고짜 적대시하거나, 팀원들의 태도가 글렀다고 욕합니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빨리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는 일단 한번 둘러보고 자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먼저 받아들입니다. 그들과 잘 어울리려고 노력합니다. 먼저 그렇게 노력해보고 나서, 그런데도 정말로 잘 안 될 때에만 이곳에서 계속 일할 것인지 아닌지를 고민합니다. 그러다 보면 문제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파악하고 해결해,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스스로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절대로 찾지 못합니다. 그런 일자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어디에서도 그의 마음이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서

콕 집어 말할 수 없지만 뭔가가 답답하고 불안하고 불만족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되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불만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이유가 존재합니다. 사람이나 사물, 상황에 대한 불만은 그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불만의 근원적인 이유는 바로 자기 삶에 대한 욕심과 미움입니다.


삶에 불만을 가진 사람은 ‘되는 일’보다는 ‘안 되는 일’에 더 집중합니다. 좋은 점보다 싫은 점에 집착하고, 편안한 점보다 거슬리는 점을 더 잘 찾아냅니다. 예컨대 이웃이 너무 시끄럽고 자꾸 찾아온다고, 너무 호기심이 많고 쉴 새 없이 말을 건다고 불평합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정이 많고 붙임성이 좋은 그저 사람 좋고 친근한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이웃의 경우에도 불평합니다. 불친절하고, 무뚝뚝하고, 무신경하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자기 삶이 불만스러운 사람은 세상 모든 것에 대해 불평하고 비난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도, 직업이나 경력도, 회사에서 처한 상황도 모두 불만입니다. 가족이나 배우자, 친척 역시 생각만 해도 짜증스럽습니다. 물론 살다 보면 누구나 불만을 가질 만한 이유들을 항상 만납니다. 친척들 사이에서, 회사에서, 인생사에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옵니다. 누구에게나 흔히 일어나는 일이죠. 하지만 문제는 ‘나에게 주어진 그 일들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입니다. 어떻게 반응할지는 누가, 무엇이 결정할까요? 바로 나의 마음입니다. 마음가짐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반면 매사에 만족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도 만족합니다. 물론 그 역시 기대만큼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있고, 종종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하지만 재빨리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발견합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들의 삶과 연관시켜서 바라봅니다. 그래서 “나는 삶이 만족스러워. 나는 건강해.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어. 나에게는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직업과 직장이 있어. 나는 나를 지탱해주는 신앙에 감사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속 그림자와 화해하기

우리는 살면서 여러 가지 상황이나 사건과 마주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에 대해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들을 가집니다. 이는 여러 심리학 학파들의 중요한 연구주제가 되었습니다. 카를 구스타프 융은 이러한 관념들을 ‘환상’과 관련지었습니다.


융은 인간은 항상 양극적으로 구조화된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마음속에 서로 상반되는 양극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사랑과 공격성, 이성과 감정, 신뢰감과 불안감, 믿음과 불신, 질서와 무질서 같은 양극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스스로에 대해 만들어놓은 이상형에 매달릴 경우, 이제껏 의식하지 못했던 대극이 마음속 그림자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마음속의 그림자는 우리에게 파괴적인 영향력을 미칩니다. 이 그림자가 마음속에서 튀어나와 우리의 약점을 외부에 폭로할 거라는 불안감에 휘둘리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걱정하고 두려워하게 되죠.


때문에 진정한 내면의 만족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의 어두운 면, 즉 마음속 그림자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마음의 평정을 얻게 됩니다. 반대로 그림자를 숨기고 억누르면 언젠가 폭발할지 모르는 화약통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융은 자신의 그림자를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융은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 자신의 우울한 인생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는 본연의 자신으로 돌아가 스스로를 받아들일 수 있었고, 자신과 화해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그가 경험했던 불행한 상황, 사건들과도 화해했다.”


자신과의 화해는 자신의 그림자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융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그 시기에 어떤 상처를 경험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구체적인 자신의 개인사와 화해하는 것이 우리의 숙제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면의 상처들은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성녀 힐데가르트 폰 빙엔이 말한 것처럼 상처가 진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상처로 인해 자신의 진정한 능력에 닿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되면 이제 더 이상 과거를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과 평화롭게 화해합니다. 그리고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의 삶을 만족스럽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 일어난 모든 일이 현재의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과거에 감사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본래의 나 자신과 좀 더 가까워지도록

종교적 삶에는 기본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받아들인 것만 변화시킬 수 있다는 원칙입니다. 나 자신이 거부한 것은 나에게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내가 사랑과 겸손의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만 변화할 수 있고, 변화합니다.


우리를 내면의 평화로 이끌어주는 또 다른 영적 기본 원칙이 있습니다. 바로 ‘변화’ 대신 ‘변신’이라는 원칙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분노하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삶의 방식이나 먹는 방식, 생각하는 방식까지도 끊임없이 ‘변화’시키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변신’은 좀 더 온화합니다. 변신은 내 안의 모든 것이 그대로 있어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변신’의 목적은 내가 점점 더 나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변신의 과정은 내 안에 존재하는 것을 솔직하게 들여다보기, 하느님과 관계 맺기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모든 것이 그대로 존재해도 괜찮습니다. 아무것도 밀쳐낼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제가 살고 있는 외부적 여건이나 습관을 바꾸는 것이 변신의 과정에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저 자신을 변신시킬 수 있도록, 좀 더 본연의 저와 가까워지도록 제 삶의 조건들을 바꾸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불만을 갖게 되는 본질적인 원인이 또 하나 드러납니다. 우리가 불만을 갖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만들어주신 이미지와 자신의 야심을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완벽하기를 하느님께서 바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종종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하지만 이 구절의 번역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리스어 ‘텔리이오이’는 ‘완벽함’, ‘무결함’, ‘완전함’이 아니라 ‘온전함’으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또한 그리스어 ‘에세스데’는 “너희는 완전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너희도 온전하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우리를 부담스럽게 짓누르는 요구가 아니라 ‘약속’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처럼 마음속의 선과 악에, 이 세상의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우리의 선한 마음을 비춘다면, 우리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느님처럼 온전하고 완전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내적 분열이 사라집니다. 또한 모든 것, 모든 사람을 선하게 대하는 마음가짐을 통해 자신의 결함에 대한 불만이 사라지면서 내면의 평화가 생겨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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