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생생한 거짓말이야

   
오재형
ǻ
이상북스
   
12000
2019�� 06��



■ 책 소개

 

공황장애, 넌 아무것도 아니야!

 

살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류의 고통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게다가 그 고통이란 것이 실체가 없다. 아무리 애써 원인을 밝히려 해도 아무것도 없다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숨 막히는 고통은 어디서 오는 걸까? 무엇일까? 공황장애를 겪은 이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그놈이 왔다!’고, 그놈 때문이라고. “공황장애란 뚜렷한 이유도 없이 갑자기 극도의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는 불안장애의 일종으로, 환자들은 심한 불안, 가슴 뜀, 호흡 곤란, 흉통이나 가슴 답답함, 어지러움, 파멸감, 죽음의 공포 등을 경험한다”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 인구의 1-3퍼센트가 공황장애를 경험한다니 남의 일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이 책은 그림을 전공하고 피아노를 연주하며 영화를 찍는 한 예술가 청년이 ‘공황장애’라는 예측불허, 통제불능의 사건을 지나온 과정의 기록이다. 저자 오재형은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온 이 공황장애란 놈 앞에서, 그 죽을 것 같은 두려움과 압박 앞에서 “몸부림을 쳤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정신과를 방문하고 한의원을 찾았다. 무속인도 만나고 북한산 꼭대기에 올라 산신령에게 절도 했다. 공황장애에 걸린 친구와 부산까지 자전거 국토 종주를 했다. 예술가로서의 직업을 치유의 방편으로 삼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공황장애에 대한 단편영화도 만들었다. 치유를 위한 그 고군분투의 과정을 그림과 글로 표현해 이 책에 담았다.

 

■ 저자 오재형
1985년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나 서울에 살고 있다. 이번 생은 운이 좋아서 대체로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사는 예술 잡상인이다. 스물 살에는 미대에 진학해서 피아노만 쳤다. 한국화 전공을 선택하고는 주구장창 유화를 그렸다. 화가로서 은퇴를 선언하고 매년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서른다섯인 현재 새로운 꿈이 생겼다. 매일 피아노를 연습하며 공연가로서의 정체성을 몸 안에 새기는 중이다. 건강한 정신과 신체는 무한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 열심히 작업하며 살고 있다. 내일이 기대된다.

 

■ 차례
프롤로그 10
그놈이 왔다 14 
원인 없는 세계에서 23 
나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28
내가 주인공인 페이크 다큐멘터리 33 
거리 두기 전략 39 
선생님, 저는 질병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42 
공황 상태 생중계 48 
공감의 조건 54
문 밖의 손님 58 
무속인의 제안 62 
산신령께 보내는 편지 67 
고통의 초상화 73 
공황 퇴치 자전거 여행 77 
영화 〈덩어리〉를 만들며 82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고통 89 
제1회 공황장애 페스티벌 94 
변기에서 온 그녀 100 
영화 〈곡성〉 113 
더 나아간 상상 116 
출구에 서서 121  

 




넌, 생생한 거짓말이야


그놈이 왔다

일요일 오후였다. 아니 화요일 저녁이었을까.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냥 특별할 것 없는 어느 날이었다. 나는 경인고속도로를 100킬로미터의 속도로 운전하고 있었고, 옆자리에는 당시 여자친구가 타고 있었다. 2주 전부터 호흡이 좀 이상하다고 싶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톨게이트를 지나자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호흡은 점점 가빠졌다. 눈을 질끈 감았다 떠 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아도 마찬가지였다. 곧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강력하고도 불길한 예감이 날 덮쳐왔다.


그 순간이었다. 내 몸으로 뭔가가 통째로 들어왔다. 쓰러지지 않을 정도의 발작이 일어났다. 급히 갓길에 차를 댔다. 휴대폰을 꺼내 119를 부르자마자 의자를 뒤로 젖히고 상의의 단추를 뜯었다. 정신이 몽롱해지고 있었다. 지금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응급실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뇌졸중을 의심했다. 불과 몇 년 전에 엄마가 집에서 갑자기 쓰러졌고, 내가 차를 몰고 응급실로 모셔갔으며, 진단 결과 뇌출혈로 판정이 났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현재 엄마는 기적적으로 몸의 90퍼센트를 회복한 상태이지만, 이런 상황에 처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죽거나 나머지 삶을 반신마비가 된 상태에서 살아간다.


뇌졸중은 가족력인 걸까? 나도 이제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거나 이대로 몸이 더 나빠져 죽지 않기만을 바라야 하는 걸까? 내 몸에 대해 한 치의 확신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지옥 같은 상상이 나를 괴롭혔다. 웬걸. 응급실에서 몇 가지 검사한 결과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휴. 일단은 다행. 그러면 무엇이었을까? 분명 뭔가가 내 몸을 관통했는데?


길 가다가 재수 없게 돌에 걸려 넘어진 것처럼 어떤 날의 단순한 해프닝이기만을 바랐던 내 생각은 완벽히 빗나갔다. 호흡이 어려운 증상은 지속되었으며 그날 이후 매일매일 듣도 보도 못했던 새로운 증상이 내 몸을 시험했다. 무엇보다 괴로웠던 것은 1초 후의 내 몸의 상태를 확신할 수 없는 극도의 불안과 공포 상태가 엄습해 올 때였다.


며칠 후 나는 다시 구급차 안에서 천장을 바라보게 되었고, 더 큰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같았다. 이상 없음. 아니, 장난하나. 정밀 검사를 받고 싶었지만 예약이 밀려 3개월 넘게 기다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3개월.


선생님, 아이고 선생님, 방금 3개월이라고 하셨나요. 제게 3개월은 죽으라고 하는 소리나 마찬가지예요. 당장 제 심장과 뇌를 샅샅이 뒤져 원인을 찾아내야 한단 말입니다. 숨이 안 쉬어지는 사람이 어떻게 3개월을 기다려요. 혹시 뒷돈이 필요한 건가요? 제시하시는 금액을 평생에 걸쳐라도 마련할 터이니 지금 당장 검사해 주세요. 제발요! 내가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드라마였다면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외쳤을 것이다. 현실은 달랐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한동안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나는 또 며칠 동안 알 수 없는 증상들을 견뎌야 했다. 그러다가, 드디어 내 안으로 들어온 범인을 발견했다. ‘그놈’이었다. 이제 의사는 필요 없었다.


원인 없는 세계에서

나는 창작을 한답시고 매일 작업실 바닥에 누워 있곤 했는데, 이제 마땅한 핑곗거리가 생겨 더욱 격렬하고도 공식적으로 바닥에 누워 지낸다. 호흡 곤란, 비현실감, 뒷골 당김, 가끔 마비 증상과 함께 심장이 자주 철렁거렸다. 다시 말하지만 이전에는 한 번도 체험하지 못했던 증상이고, 이런 내 상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가족들도 매우 당황스러워했다.


나는 왜 공황장애에 걸렸을까? 누군가는 말한다. 요즘 니가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래. 그런가? 내가 스트레스가 많았나? 아니 근데 (나 정도의) 스트레스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 이 정도면 과분할 정도로 감사한 환경에서 특별한 고민 없이 베짱이처럼 지내고 있는 건데. 이런 내가 스트레스로 공황장애에 걸릴 정도면, 오전 8시 반 지옥철에 순대 알맹이처럼 끼어 있는 출근길 모든 현대인들은 5분에 한 번씩 공황 발작을 일으켜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면 또 이렇게 말한다. 네가 모르는 무의식 속의 스트레스가 널 괴롭혔던 거야, 아니,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너는 나를 알겠느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모든 사람이 공황장애에 걸리지는 않는다. 반대로 나 같은 천하태평 베짱이도 ‘주제넘게’ 공황장애에 걸리기도 한다. 인정하긴 싫겠지만, 이 병은 증상은 존재해도‘그럴 만한’원인은 어디에도 없다.


곧 죽어 벌릴 것 같은 극도의 불안과 공포의 시간을 견뎌 낸 후 나는 밤을 새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내 안으로 들어온‘이 놈’을 앞으로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했다. 앞으로가 중요하다. 원인이 무엇이든 이제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순 없다. 대책위가 있어야 한다. 나는 블로그에 ‘공황장애’카테고리를 전체 공개로 개설했다.


이제부터 모든 증상을 기록할 것이다. 기록은 내 전문이다. 지난 10년간 내 모든 생각과 작업을 블로그에 기록해 오지 않았던가. 공황장애라고 예외가 될 순 없다. 나는 공황장애를 정면으로 마주할 것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극복할 것이다. 단순한 기록으로만 그치지도 않을 것이다. 공황장애는 내 그림과 글쓰기 작업의 일부가 될 것이다. 작가가 공황장애를 맞이하는 방식을 보여 주겠다. 적극적으로! 그리고 예술적으로!


내가 주인공인 페이크 다큐멘터리

적을 알아야 한다. 정신이 맑아질 때마다 공황장애에 관해 검색을 하고 관련 서적을 읽었다. 한 줌 위안을 주는 내용을 발견했다. ‘공황’그 자체는 장애가 아니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이 나를 안심시켰다. 사람은 누구나 긴박한 순간 공황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이는 진화론적으로도 설명이 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신체 현상이다. 다만‘장애’가 문제다.


공황장애는 “너 지금 위험한 상황이야!”라고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사기를 치는 대 신체 사기극이며, 관객이 오직 자신밖에 없는 극장에서 자기가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페이크 다큐멘터리다. 공황장애는 숙주에게 자주 거짓말을 한다. 고통스러울 때마다 매번 이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갑자기 숨이 잘 안 쉬어져도 호흡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시야가 흐려져도 시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싸한 기분과 함께 기절 충동이 일어나도 뇌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니다. 증상이 찾아올 때마다 되뇐다. 너는 거짓말이다. 너는 거짓말이다. 너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생생하게 존재하지만 결국 너는 거짓말이다, 라고.


어제부터 처방받은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외출이다. 나는 공연이나 전시를 보고 기사 쓰는 일을 정기적으로 하고 있는데, 외출 전날부터 걱정이 되었다. 혹시 공공장소에서 내가 나를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어떡하지?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다면? 이런 내 불안한 마음은 내 안의 공황장애가 더 큰 덩어리로 성장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첫 외출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만약 공공장소에서 과호흡으로 쓰러지거나 심한 공황 상태에 빠진다면 외출 자체에 대한 강력한 트라우마가 생성될 것이다.


다행히 첫 외출은 성공적이었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운이 좋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공황 발작을 처음으로 경험한 그 날을 기점으로 이 글을 쓰는 현재까지 밀폐된 공간에서 연극이나 영화를 볼 때면 약 20 퍼센트의 확률로 스물스물 뭔가가 가슴 속에서 요동친다. 그럴 때는 당장 출구를 향해 언제라도 뛰쳐나갈 상상을 하면서 그냥 견딘다. 견디자고 마음먹어서 견딜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


여러 가지 주술적인 실험을 해 보고 있다. 갑자기 내 안에 공황 스위치가 ON 되었다는 것을 알아채면 재빨리 주위를 둘러본다. 아무 사물이나 하나 지목해 그것을 의인화시킬 준비를 한다. 만약 옆에 빈 의자가 있다면 그곳에 내 공황장애를 앉혀 놓고 쓰다듬는 상상을 한다. 종이와 펜이 있다면 아무렇게나 끄적여 공황장애를 표현해 본다. 그 어떤 또라이 같은 짓이라도 내 마음에 안정이 찾아오기만 한다면, 설령 그 행위가 과학적인 근거가 전혀 없더라도 장땡이다.


실체 없는 병과 싸워서 이기는 방법 중 하나는 끝없이 내가 승리하는 시나리오를 떠올리고 상상하는 것이다. 나는 이 훈련을 자주 했다. 우연이었을까? 공황장애에 걸린 이후 나는 영화감독이 되었다.

공감의 조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위 말은 진리다. 공황장애뿐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에 적용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하나마나 한 소리다. 이미 구체적 형태로 존재하는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에게 저 문장은 진리일지언정 위로는 전혀 되지 않는다.


정신과에서 처방해 주는 약의 효능이 아직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가 없고, 약보다는 해당 주치의와의 관계가 더 환자의 호전에 유의미하다는 과학 기사를 최근에 읽었다. 이처럼 고통 받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추상적 진리가 아니라 절실한 공감이다. 가슴 속 응어리를 누군가 진정으로 들어주고 이해해 주는 것만으로도 깊은 위로를 받는 것과 같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매번 가능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공감이란 오직 비슷한 상황과 고통을 공유한 그룹 안에서만 진정으로 가능한 것이다. 실제로 내 상태를 호소했을 때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우덱은 이런 말을 했다. “임마, 정신이 허해서 그래. 나도 옛날에 힘든 적 많았거든. 그런 증상 나도 다 체험해 봤어. 근데 마음 굳게 다지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더라, 힘내 짜샤!”이렇게 말했던 내 친구 우덱은 저 말을 내뱉은 지 3개월 만에 호흡곤란 증세를 보였다. 영혼이 털리는 느낌도 받았다고 했다. 병원을 가 봤지만 이상이 없다는 진단까지, 모든 것이 공황장애의 전형적인 증상이었다.


왜 나를 이해 못해? 이런 마인드로 사람들을 대하면 되돌아오는 것은 상처뿐이다. 설령이라도 타인에게 공감을 바라지 말 것. 그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것을 재빨리 인식하면, 간혹 가까운 지인이 주는 악의 없는 상처에도 의연하게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같은 공황장애 환자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공황장애라는 큰 틀 안에 있을 뿐이지 발현되는 증상과 그것을 둘러싼 환경은 천차만별이다. 언제나 타인의 고통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런 태도를 망각하는 동시에 우리는 “내가 겪어 봐서 아는데…”라는 말을 내뱉으며 폭력을 행사하는 꼰대가 된다.


문 밖의 손님

평소처럼 방바닥에 누워 친구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내 커다란 발가락을 보았다. 불현 듯 내 몸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했다. 불안은 점점 더 큰 불안을 불러왔다. 공황 상태까지는 오지 않았지만 그날 밤 뜬눈으로 잠을 설쳐야만 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전개 과정이다. 발가락을 쳐다보는 행위와 몸이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나? 하물며 말도 안 되는 상상에 실제로 괴로워했던 내 모습은 지금도 돌아보면 스스로 납득하기 어렵다. 왜냐면 나는 발가락에 대한 그 어떤 트라우마도 없을뿐더러 몸이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살면서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공황장애의 괴로움은 이런 식이다. 일생 동안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생각에 의해 일생 동안 한 번도 겪어 보지 않았던 고통이 수반되는 것. 여기에는 어떤 논리도 이성도 의지도 작용하지 않는다. 현재 공황장애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은 공황을 대부분 이렇게 표현한다. “그놈이 온다.”


공황발작을 처음 경험한 충격적인 그날부터 지금까지의 상황을 간단히 비유해 보면 이렇다. 처음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내 방에 도둑처럼 들어와 침대 밑에서 3주가량 잠복해 있었다. 그러던 어는 날 밤, 그놈은 잠자고 있던 나를 별안간 덮쳤다. 나는 아무 저항도 시도해보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K.O. 패배를 당했다. 그 후 일주일간 나는 범인 찾기에 나섰다. 처음 며칠은 헛다리를 짚었지만 결국 유력한 용의자가 누군지 알아냈다. 나는 놈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알아내는 한편 놈을 이기기 위한 나름의 훈련도 병행했다. 그 와중에도 놈은 나를 툭툭 건드리고 괴롭혔다.


현재까지 5일 동안 잠잠한 상태다. 아무래도 어느 정도 놈을 쫓아내는 데 성공한 듯하다. 하지만 안심하기엔 이르다. 놈은 방문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라도 문이 열리면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는 놈이다. 내 목표는, 방문이 열리지 않기를 불안에 떨며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방문이 열릴 때마다 그놈과 맞장을 뜨는 것이다. 문 밖에 있다고 해서 안심하면 안 된다. 언젠가 분명 문은 열릴 것이고, 그 때가 되면 가드를 내린 채 상대방을 조롱하는 권투선수처럼 놈을 우습게 맞이할 수 있도록 훈련을 열심히 해야 한다. 이 글쓰기도 그 훈련 중에 하나다.


영화 〈덩어리〉를 만들며

증상이 점차 호전되었을 무렵 공황장애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 보기로 결심했다. 공황장애는 괴롭지만 그 현상 자체는 너무나 흥미로운 소재임이 분명했다. 서울영상미디어센터에서 ‘다큐멘터리 만들기’비슷한 제목의 4개월 교육과정에 등록했다. 좋은 선생님과 동료를 만나 즐거운 시간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자칭‘국내 최초 SF 질병 다큐멘터리’라고 요란하게 소개하고 다니는 <덩어리>라는 영화를 완성했다.


<덩어리>는 내가 알지도 못하는 여러 영화제에 초청되며 이후 ‘감독님’이라는 어마어마하고 오글거리는 호칭조차 점차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끔 해 준 영화다. 이 작업을 기점으로 내 활동 영역은 그림에서 영상으로, 갤러리에서 극장으로 옮겨 갔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기 치유로서의 의미가 가장 컸다. 나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내 안의 공황장애를 확인사살하려고 했다.


영화는 뜬금없이 UFO에 관한 논쟁으로 시작한다. 한쪽에서는 과학으로 증명될 때까지는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고, 이를 반박하는 쪽에서는 사랑도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존재하듯 UFO도 과학 밖의 미지의 세계에 분명 존재한다고 팽팽하게 맞선다. 후반부에는 나와 우덱이 등장해 공황장애를 겪으면서 일어났던 일들, 그리고 이 병에 관한 생각들을 풀어 놓으며 영화는 끝난다.


나는 영화를 만들면서 내 안에 침투한 공황장애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너를 주제로 영화까지 만들 수 있어. 넌 두려운 상대가 아니야. 나는 널 이렇게 즐겁게 가지고 놀 수 있는 사람이야. 까불지 마. 그리고 난 너를 편집 프로그램 안으로 데려와 이리저리 잘라 내고 재구성까지 할 거야. 너는 내 손바닥 안에서만 존재해, 라고.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고통

가끔 TV를 보면 공황장애 관련 뉴스가 나온다. 그러면 꼭 스트레스를 줄이고 정기적으로 운동을 해야 합니다, 라는 빤한 말을 무슨 일급비밀이라고 되는 양 근엄하게 말하는 ‘전문가’들이 등장한다. 나는 그 전문가의 세 발짝 떨어진 조언보다는 진짜로 이 병을 겪고 있는 나와 같은 환자들이 어떤 심정으로 살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공황장애를 겪는 사람들이 모인 인터넷 카페를 발병 초기부터 방문했었다.


어느 시간대에 접속해도 나 죽을 것 같아요, 도와주세요, 약을 먹어도 소용없네요, 라는 절규가 들려 왔다. 밥 먹듯이 야외에서 실신을 하고 광장공포증에 걸려 외출 자체가 불가한 사례도 드물지 않았다.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심한 증상을 겪는 이들을 지켜보며 상대적인 위안을 찾으려 했다. 직장인은 물론 입시생부터 임산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고, 이내 나는 깨달았다. 나는 애초부터 이 병을 쉽게 극복할 수 있는 환경에 있었구나. 내가 겪은 공황장애는 어디 가서 말도 꺼내면 안 될 정도로 경미한 것이었구나.


출발선이 달랐다. 일단 나는 직업에서부터 유리했다. 매일 어디론가 출근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에 비해 예술가라는 직업은 작정하고 쉬어도 당장의 타격이 없다. 또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고 고백하면 곧바로 각종 범죄에 연루된 정신질환 가해자를 떠올리며 어딘가 심각하게 문제 있는 사람 취급을 당하기 십상이어서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는 일반일들에 비하면 예술가라는 직업은 얼마나 좋은가. 어떤 예술가가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고 토로했을 때 돌아오는 반응은 no surprise다. 또 당장 일하지 않으면 다음 달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나는 평소 생존게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지 않았다.


같은 강도로 찾아온 공황장애라면, 나와 같은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빠른 시간 안에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내가 직장인이었다면 엄청난 지옥을 체험했을 것이다. 하물며 고 3 수험생과 임산부들의 호소는 나를 더욱 숙연하게 만든다. ‘진정한’고통을 받는 그들을 생각하면, 난 발언권이 없는 것 같다. 정말 그런가?


아니다. 고통에는 위계가 없다. 정작 증상이 찾아올 때면 그 누구를 떠올려도 완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직장인을 떠올려도 임산부를 떠올려도 약이 없으면 내일을 못사는 광장공포증에 걸린 중증 환자를 떠올려도 마찬가지고, 전쟁 폭격으로 매일같이 목숨이 위태로운 시리아 난민과 엄청난 해일로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인도네시아 주민들을 떠올려 봐도 그것이 지금 당장 내게 찾아온 고통을 줄여 주지는 못한다.


내 고통은 언제나 내게 절대적이다. 단 1초라도 고통을 경험한다면 그것은 엄연한 고통이다. 다른 말로 정의할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은 불공평하다. 고통은 절대적이지만 그 고통을 극복하는 조건이 모두 같지 않기 때문이다. 어쩐지 나는 누군가에게 자꾸 미안한 마음이 든다.


출구에 서서

“요즘엔 괜찮으신가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럼 나는 대답한다. 네, 지금은 괜찮아요. 그리고 꼭 이 말을 뒤에 덧붙인다. 99퍼센트는요. 극심한 공황 상태는 최근 3년간 찾아오지 않았다. 발병 초기와 비교해 지금은 일상생활에도 전혀 문제가 없다. 완치라고 불러도 될 정도다. 하지만 내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1퍼센트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최초로 발작이 일어났던 상황처럼 뻥 뚫린 도로를 운전할 때, 밀폐된 공간에서 영화나 연극을 볼 때, 커피를 마시고 난 후 종종 위기가 찾아온다. 보통 나 혼자 넘길 수 있는 정도라 설령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대가 앞에 있다 하더라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공황장애는 마치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안녕? 오랜만이야. 날 잊은 건 아니겠지? 우리가 좀 멀어지긴 했어도 가끔 저 멀리서 손 흔드는 날 보았지? 너는 모른 척 했지만 분명 나와 눈이 마주쳤잖아. 난 언제라도 널 찾아갈 수 있어. 오늘은 똑똑 노크만 해 봤어. 잊지 마. 방문을 열면 항상 내가 있어.


내 상태가 아무리 호전되었다고 해도 공황장애가 뭔지도 몰랐던 예전의 나로 완벽하게 돌아갈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인정하기로 했다. 이 덩어리는 중간에 사라져 주면 좋겠지만 어쩌면 죽을 때까지 내가 어르고 달래며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우는 아이를 한순간에 뚝 그치게 만드는 요령 있는 부모처럼 나도 공황장애를 안고 살아야 하는 법을 계속 익혀야 할 것이다. 최근 <나의 우울증을 떠나보내며>라는 책을 읽었다. 평생을 정신질환과 싸워 온 저자는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한다. “(우울증이) 아직까지도 이를테면 암 같은 명실상부한 질병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고, 또 아무리 덧없어 보일지라도 그 증상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어렵사리 배웠다.” 존중이라는 단어를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어쩌면 증오의 대상에서 존중의 대상으로 질병을 바라보는 것이 완치의 마지막 단계인지도 모른다.


어느덧 코트를 입고 외출해야 하는 계절이다. 나는 내부순환도로를 운전하고 있다. 기다란 커브 길을 돌아 앞이 뻥 뚫린 도로를 마주쳤을 때, 갑자기 가슴이 철렁거림을 느낀다. 바이킹 맨 끝자락에 서서 직각으로 땅을 향해 내려가는 기분이 몇 차례 반복된다. 가슴에 슬며시 한쪽 손을 얹고 스피커폰으로 전화라도 하는 것처럼 소리 내어 말해 본다. 덤벼라 이 자식아! 또 올 줄 알았다! 한번 붙어 보자!


효과가 없으면 태세를 전환한다. 아이 참, 자네 왔는가? 이게 얼마만이야. 오랜만인데 온 김에 좀 놀다가 가. 그래 그래 여기 앉아. 에이, 그 선을 넘어오지는 말고. 에헤헷? 그냥 거기 있어도 목소리 다 들리니까 너무 가깝게 오지는 말고. 응, 거기서 놀면 돼.


어느새 나는 무사히 집에 도착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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