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하라 고양이

   
이용한
ǻ
북폴리오
   
14000
2011�� 01��



■ 책 소개

 

길 위에서 받아 적은 고양이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없듯이 사연 없는 고양이는 없다. 묘생도 인생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여도 그 속은 지옥 같을지 모른다. 고양이도 내색은 하지 않지만, 펑펑 울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고양이가 아니라 ‘고양이의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가끔은 즐겁고, 언제나 아픈. 끝없는 고행 속에서도 때때로 명랑한. 누군가의 눈에는 고양이가 그저 한 마리의 천덕꾸러기일지 몰라도 작가의 눈에는 이런저런 내력이 얽히고설킨, 더러 숨 막히는 일대기를 살아온, 한편의 역사이다.

 

■ 저자 이용한
지난 14년간 ‘길 위의 시인’으로 국내외 오지를 떠돌았고, 2007년 어느 겨울 밤 집 앞 소파에 앉아 있는 어미고양이와 다섯 마리 아기고양이를 만나면서 처음으로 고양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후 1년 반 동안 길고양이를 보살피고 밥을 주면서 겪은 에피소드와 길고양이 사연을 기록한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를 펴냈다. 첫 번째 고양이책의 배경에서 영역을 옮겨 시골로 온 뒤에도 계속해서 길고양이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1995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수상했다. 시집 《안녕, 후두둑 씨》, 《정신은 아프다》, 고양이 에세이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 여행 에세이 《물고기 여인숙》,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길: 티베트 차마고도를 따라가다》, 《바람의 여행자: 길 위에서 받아 적은 몽골》, 문화 기행서 《사라져가는 오지마을을 찾아서》, 《꾼>, 《장이》, 《사라져가는 이 땅의 서정과 풍경》, 《이색마을 이색기행》, 《옛집 기행》 등을 펴냈다.

 

■ 차례
머리말 | 고양이 영역지도 | 등장 고양이

 

제1부 여름·가을: 시골 고양이를 만나다
1. 먹이주기 3개월, 드디어 정체 드러낸 고양이 | 2. 낮잠의 정신줄 놓은 예 | 3. 할머니 따라 마실 가는 고양이 | 4. 센티멘털 가을 고양이 | 5. 바람이가 가져온 선물 | 6. 개울집에서 만난 길고양이 가족 | 7. 고양이의 치명적인 유혹 | 8. 궁극의 산책고양이 | 9. 고양이 싸움 한바탕 | 10. 소지랑물 먹고 사는 축사고양이 | 11. 내 새끼 핥아줄 수도 없는 어미고양이 | <포토카툰1> 길고양이 대략난감 | <포토카툰2> 궁금냥이 | <포토카툰3> 이 쑤시는 고양이 | <아포리즘1> 한 잎의 고양이

 

제2부 겨울: 고양이의 겨울나기
12. 칼바람 속에서 젖먹이는 어미고양이 | 13. 당신이 꿈꾸는 궁극의 접대냥 | 14.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갈까 | 15. 비가 오나 눈이 오나 | 16. 고양이와 함께 걷는 눈길 | 17. 폭설 뚫고 하이킥 | 18. 어느 철거고양이 식구의 겨울 | 19. 떠돌이 고양이, 골목을 접수하다 | 20. 축사고양이의 겨울나기 | 21. 새 사냥은 아무나 하나 | 22. 날아라 고양이 | 23. 고양이독립만세? | <포토카툰 4> 배웅하는 고양이 | <포토카툰 5> 무모한 도전 | <아포리즘2> 개울에서 보낸 한철

 

제3부 봄: 시간을 달리는 고양이
24. 고양이 보초 서는 까치 | 25. 못 말리는 고양이 발라당 쇼 | 26. 시간을 달리는 고양이 | 27. 길고양이의 작은 천국 | 28. 고래고양이 | 29. 꽃다지밭 산책하는 낭만고양이 | 30. 다급했던 길고양이 구조, 3일간의 기록 | 31. 바람이 결국 무지개다리 건너 | 32. 길고양이 영역다툼의 현장 | 33. 길고양이 보살피는 할머니의 손 | 34. 축사고양이가 호밀밭으로 간 까닭은? | 35. 꽃고양이 꽃발라당 | 36. 개집에 셋방 사는 고양이 | 37. 고양이의 로맨틱 꽃밭 데이트 | <포토카툰 6> 신문지 점령사건 | <포토카툰 7> 덤벼라 세상아 | <아포리즘 3> 다 지나간다

 

제4부 여름: 명랑하라 고양이
38. 개짜증 이럴 때 쓰는 말 | 39. 참호 속에 사는 고양이 | 40. 초록이 물든 고양이 | 41. 꽁치 물어 나르는 어미고양이 | 42. 이 순진한 아기고양이를 보세요 | 43. 담장 위의 고양이 모델 | 44. 봉달이는 고마웠어요 | 45. 발가락이 닮았다 | 46. “도둑괭이가 지붕에 새끼를 낳았어” | 47. 번지점프를 하다 | 48. 장독대, 시골고양이 휴게소 | 49. 마음이 콩밭에 가 있다 | 50. 월야의 고양이 산책 | 51. 고양이와 함께 시속 4킬로미터 | <포토카툰 8> 천사에서 요괴로 변신 | <포토카툰 9> 밥 먹으러 안가냐옹? | <아포리즘 4> 지붕 위에서 보낸 한철 | <아포리즘 5> 명랑하라 고양이

 

에필로그: 집으로 온 길고양이 출산기 




명랑하라 고양이


여름·가을: 시골 고양이를 만나다

먹이주기 3개월, 드디어 정체 드러낸 고양이

고양이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고양이와 인연을 맺은 지도 어느덧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녀석들은 언제나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물음표처럼 앉아 의문의 꼬리를 흔들고 있다. 지난해 봄, 도심을 떠나 시골이나 다름없는 전원으로 이사를 하면서 나는 잠시 고양이를 잊었다. 기껏해야 마당에 고수레처럼 고양이 사료 한 접시를 달랑 놓아두었을 뿐이다. 배고픈 고양이나 먹고 가라고. 그게 다였다. 그런데 고양이 한 마리가 오며 가며 그것을 먹는 것 같았다. 아침에 나가 보면 늘 접시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혹시 쥐나 족제비가 와서 먹는 게 아닐까?”


아내는 내가 엉뚱한 녀석의 배를 불리는 게 아니냐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더러 까치와 박새가 먹이 그릇을 기웃거리는 것을 목격한 적은 있다. 그렇다고 그 녀석들이 사료 한 그릇을 다 비울 만큼 뱃구레가 크지는 않을 것이었다. 아무튼 사료 먹는 고양이를 목격하지 않는 이상 고양이가 먹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먹이를 준 지 달포쯤 지났을까. 어느 날 저녁이었다. 아내는 마중하러 집 밖의 나서는데, 무언가 날렵한 그림자가 휙~ 하고 도망치는 게 보였다. 먹이 그릇이 있는 곳이었다. 고양이가 분명했다. 열흘쯤 더 지났을까. 이번에도 먹이 그릇 앞에서 황급히 도망치는 고양이를 보았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저녁이었고, 고양이 색깔이나 무늬를 식별할 수도 없었다. 녀석은 좀처럼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야말로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래 이 녀석은 이제 ‘바람이’야!”


정체도 확실히 드러나지 않은 녀석에게 나는 ‘바람이’란 이름표를 붙여 주었다. 그렇게 다시 고양이와의 질긴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다시 보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훤한 대낮이었는데, 테라스 아래 고양이 한 마리가 떡하니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언제나 옳다’는 노랑이었다. 체구는 제법 컸고, 눈매는 매서웠다. 그러나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가 재빨리 줄행랑을 놓았다. 어쨌든 이것이 제대로 된 ‘바람이’와의 첫 만남이었다. 먹이를 준 지 약 3개월 만에 드디어 녀석이 정체를 드러낸 것이다. 


다음 날에도 바람이는 테라스 아래 앉아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사료를 채워주느라 먹이 그릇 가까이 접근해도 도망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느닷없는 접근에 대해서는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듯 녀석은 “하악~ 쉑~” 하고 경계음을 날렸다. 그동안 보아온 고양이 중에 가장 무뚝뚝하고 까칠하며 애교도 없는 고양이가 있다면, 바람이 녀석이다. 3개월이나 먹이를 주었는데도 녀석은 얼굴이나 슬쩍 보여주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날수록 녀석은 우리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물론 녀석은 여전히 경계심이 심해서 먹이를 먹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행동도 보여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따. 그저 바람처럼 왔다가 구름처럼 머물고, 다시 바람처럼 사라졌다.


내가 밥 주는 모든 고양이가 발라당과 부비부비를 했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과욕이다. 아는 후배가 “밥 주는 고양이가 부비부비를 해요”라고 말할 때, 나는 짐짓 도 닦는 노인처럼 “욕망이 앞서면 구원은 멀어진다”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 녀석의 손맛이 부러워 해본 소리였다. 곰살갑지 않은 고양이에게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할머니 따라 마실 가는 고양이

우리 동네엔 마실 가는 고양이가 있다. 혼자서 동네를 떠돌거나 산책을 하는 게 아니라 마실 가는 할머니를 줄레줄레 따라가는 것이다. 우리 동네 꽃미냥, 파란대문집 달타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녀석이 강아지처럼 할머니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모습을 나는 여러 번 목격했다. 고양이가 야외에서, 그것도 사람의 뒤를 따라 마실을 간다는 건, 내가 알고 있는 고양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불러도 오지 않고, 올 테면 네가 와봐, 하는 게 고양이 습성 아니던가.


그런데 사람을 따라서 강아지처럼 줄레줄레 마실 동행을 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상황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파란대문집에 사는 할머니는 점심 무렵이나 오후 네댓 시가 되면 집에서 멀지 않은 경로당으로 마실을 가곤 한다. 이때 할머니 뒤에는 어김없이 달타냥 녀석이 동행을 한다. 녀석은 마치 할머니의 보디가드처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가는데, 갑자기 낯선 사람이 다가서면 잠시 길가의 콩밭이나 차 밑으로 피신을 한다. 녀석은 경로당까지 할머니를 배웅하고, 무사히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차 밑에서 지켜보곤 한다.


할머니가 경로당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녀석은 다시 타박타박 집으로 돌아온다. 파란대문집과 경로당의 거리는 약 50~60미터. 녀석의 마실 동행이 여기서 끝나는 건 아니다. 집으로 돌아온 녀석은 이때부터 대문 밖 길가에 나앉아 경로당 쪽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할머니를 기다린다. 살다 살다 이런 고양이는 정말 처음 봤다. 한참 동안 그러고 있다가 멀리서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면 녀석은 다시 경로당 쪽으로 걸음을 옮겨 마중을 나간다. 혼자 사는 할머니의 길동무. 그야말로 동화책에나 나올 만한 풍경이다.



겨울: 고양이의 겨울나기

떠돌이 고양이, 골목을 접수하다

유랑

골목에서 총각무를 씹고 있던 철거고양이 까뮈네 가족을 다시 만난 건 보름도 더 지난 어느 날이었다. 마을에서 뒷산으로 올라가는 언덕에서였다. 일가족은 밭 언저리 고사목 그루터기 아래 잠시 은신하고 있었다. 그동안 떠돌이 생활을 해온 탓에 녀석들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살아 있다는 것, 거듭된 폭설과 한파 속에서도 이렇게 무사하다는 것, 이 엄동설한에 한뎃잠을 자면서도 그 모진 날들을 견뎠다는 것. 나는 그게 고마웠다. 어떻게든 살아남았다는 것이 더없이 갸륵했다.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지 안 봐도 불을 보듯 뻔하다. 그동안 녀석들은 거처도 없이 떠돌며 동가식서가숙했을 것이다.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먹어야 했을 것이다. 그루터기에 올라앉은 일가족 중에서도 턱시도 녀석은 내내 내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 먹이를 내놓으라고 당돌하게 큰소리를 쳤다. 해서 나는 녀석을 그 자리에서 ‘당돌이’라고 불렀다. 반면 삼색이는 어미 뒤에 숨거나 그루터기 밑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바깥 동정을 살폈다. 눈망울이 순하게 생긴 아이. 그래서 ‘순둥이’라 이름 붙였다. 녀석들이 은신처로 삼은 그루터기야말로 야생 고양이다운 임시 거처였다. 나는 차에 둔 비상 사료 소용량 반 포대를 녀석들에게 다 내주었다. 녀석들은 그 자리에서 그 많은 사료를 절반 이상이나 먹어치웠다. 그런데 이튿날 같은 시각에 다시 그루터기를 찾았을 때, 녀석들은 또 유랑을 떠나고 없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보슬비가 내렸는데, 그루터기는 비를 막아줄 은신처가 되지 못했다. 그루터기 아래에는 먹고 남은 사료가 한 움큼 정도만 남아서 빗물에 불어가고 있었다. 철거고양이에서 유량묘가 되어버린 일가족은 지금도 그렇게 또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것이다.


정착

철거묘에서 유랑묘 신세로 전락한 까뮈네 일가족이 드디어 새 영역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새 보금자리가 생기면서 까뮈네 일가족은 평온을 되찾았다. 까뮈네 가족은 새로 접수한 영역의 헛간채 서까래와 나뭇더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이곳에서 녀석들은 해바라기도 하고, 장난도 치고, 쉬다가 침입자가 나타나면 벽체에 뚫린 구멍 속으로 숨곤 했다.


까뮈네 가족이 이 골목을 차지하기까지는 무려 한 달 반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그러는 동안 아기 고양이 두 마리가 무지개다리를 건넜고, 나머지 가족도 엄청난 배고픔과 한파를 견뎌야 했다. 길고양이 세계에서 영역이란 살아 있는 생물과도 같다.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크게 부풀기도 하고, 잘게 쪼개지기도 한다. 없던 영역에 새로 생겨나기도 하고, 있던 영역에 감쪽같이 사라지기도 한다. 어떨 때는 ‘공동 구역’처럼 중립 지대가 형성되기도 한다. 때로는 평화적으로 영역이 분배되기도 하지만, 혈투를 벌인 끝에 영역을 차지하는 일도 있다.


까뮈네 가족이 이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어떤 혈투나 협상을 벌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지금의 영역 차지가 7일 천하로 끝날 수도 있다. 그것은 자연계의 순리와도 같아서 힘의 논리가 지배할 때가 많지만, 약자에 대한 배려고 상존한다. 이를테면 길고양이 세계에서는 새끼를 낳은 어미 고양이에게 영역이나 둥지에 대한 우선권이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 또 버려진 아기 고양이가 연합하기도 한다. 길고양이 세계에도 엄연히 ‘사회’라는 게 존재한다. 아무쪼록 새로운 영역에 안착한 까뮈네 일가족의 무운을 빈다.



봄: 시간을 달리는 고양이

길고양이의 작은 천국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얼마 전 우리 동네 아랫마을에서 여러 마리의 고양이를 한꺼번에 만났다. 무려 여덟 마리의 고양이가 전원주택 마당과 테라스를 배경으로 앉아 있었다. 마당고양이가 아니라 모두 길고양이였다. 전원주택의 주인인 할머니와 아주머니 두 분 다 고양이를 좋아해 집에 오는 녀석들에게 밥을 주다 보니 지금처럼 많은 고양이가 모이게 되었단다.


때마침 할머니가 집 안에서 간식을 가지고 나오자 여기저기 마당에 흩어져 있던 고양이가 할머니에게로 몰려든다. 순식간에 간식이 동났다. 몇 마리는 먹이 그릇 앞에서 여전히 입맛을 다시고, 몇 마리는 봄 햇살이 좋은 명당자리로 뽈뽈뽈 걸어간다. 무엇보다 이곳의 고양이들은 마치 오래전부터 여기에 살았던 것처럼 전원주택의 마당과 테라스를 자유롭게 오가며 거의 상주하다시피 한다.


봄이 되면서 햇살이 좋은 잔디밭은 고양이들이 특히 좋아하는 휴게소 역할을 하고 있다. 녀석들은 여기저기 잔디밭에 널브러져 그루밍을 하거나 낮잠을 잔다. 현관 앞에 있는 나무 한 그루는 고양이를 위해 잘라놓은 것인지 천연 캣타워 노릇을 하고 있다. 고등어무늬 고양이 한 마리는 마당가 화단에서 자라는 봄 새싹을 신기한 듯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이건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꿈꾸는 진정 ‘행복한 풍경’이 아닌가. 사실 맨 처음 마당에 여기저기 누워서 한가롭게 그루밍을 하고 있는 녀석들을 만났을 때 나는 이 녀석들이 집에서 키우는 마당고양이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주인아주머니는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곳에 고양이가 드나들며 밥을 얻어먹기 시작한 것은 약 일 년 전이다.


“처음에 두세 마리가 들락날락거리더니 그중 한 마리가 새끼를 낳았어요. 그때부터 고양이가 늘어나기 시작하고, 다른 녀석들도 찾아와 지금처럼 된 거죠 뭐.”


그런데 참 희한한 것은 이곳의 고양이들은 개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끔은 개와 고양이가 함께 어울려 있는가 하면 낯선 사람이 나타날 때면 고양이들이 개집 속에 숨기도 한다. 무슨 까닭일까?


“여기에 있는 새끼들을 개가 젖을 먹여 키웠어요. 그것도 새끼를 낳은 적도 없는 처녀 개가. 그래서 그런지 고양이들도 개를 잘 따르고 사이가 좋아요.”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사실 이곳에 오는 고양이들에게 나눠주는 밥은 그리 풍족하지가 않다. 그래도 밥이나 빵, 어묵이나 계란프라이, 개 사료 등을 나눠줄지언정 그 정성만큼은 언제나 가득하다. 다른 캣맘들처럼 고양이 사료를 나눠주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고양이들은 이곳에서 마당고양이처럼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다.


“오는 고양이에게는 먹을 것을 내주고, 가는 고양이는 그냥 가게 놔둡니다.”


그야말로 오는 고양이 막지 않고, 가는 고양이 잡지 않는다. 이 때문인지 낮에는 바깥을 떠돌다가 밤이 되어서야 돌아오는 고양이도 여러 마리다.


“맨 처음 터를 잡은 고양이가 텃세 같은 걸 하지 않나요?”

“여긴 그런 건 없어요. 낯선 고양이가 와도 다들 경계하지 않는 편이예요.”


말이 필요 없는 길고양이들의 행복한 전원생활이다.



여름: 명랑하라 고양이

참호 속에 사는 고양이

축사에 살던 축사고양이는 한때 3대에 걸친 열한 마리가 한 무리를 이루어 살던 대가족이었다. 그리고 지난봄에는 무리의 수장인 대모가 또다시 새끼 여섯 마리를 낳았다. 하지만 축사는 곧 철거되었다. 이후 아기 고양이 여섯 마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는 바가 없다. 축사가 철거되면서 축사고양이들은 임시로 축사 바깥의 호밀밭에 머물렀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이마저도 사라져 무논으로 변했다.


축사고양이들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건 생존을 위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고, 어쩔 수 없는 이별이었다. 모두가 떠난 축사 자리에는 이제 연약한 여리 하나만 남았다. 폐축사에 홀로 남은 여리는 철거 뒤에 생겨난 참호 같은 구덩이를 은신처이자 임시거처로 사용하고 있다. 이 구덩이는 축사 쓰레기와 동물의 사체를 태우고 묻은 구덩이로, 대충 철판으로 덮어놓은 상태였다.


불태운 쓰레기를 땅에 묻었다고는 하나 그 구덩이가 안전할 리는 없었다. 물론 여리가 머무는 이 참호는 말 그대로 갈 곳이 없어 머무는 임시 거처이다. 폐축사 주변에 덤프트럭으로 잔뜩 흙을 날라다 쌓아놓은 것을 보면, 조만간 이곳에 흙을 덮어 ‘밭’으로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 그때까지 여리는 이곳에 머물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은 축사 자리에서 무논을 하나 건너는 길가 돌담집에 언니인 가만이가 보금자리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축사고양이가 모두 떠나자 나도 한동안 사료 배달 배송처를 정하지 못해 난감했다. 그래서 임의로 폐축사와 돌담집 사이의 논두렁 공터에 사료를 부어주곤 했다. 여러 번 그렇게 했더니 이제는 내가 나타나면 가만이는 돌담집에서, 여리는 폐축사 참호에서 나와 중간 지점인 논두렁으로 달려온다. 여리와 가만이 단둘이 논두렁에 앉아 밥을 먹는 풍경은 어쩐지 쓸쓸하다. 바글바글 모여 앉아 먹이 다툼 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가 나는 법이다.


여리는 밥을 먹고 나면 잠시 가만이와 어울려 놀거나 쉬다가 혼자서 논두렁을 걸어 폐축사로 돌아온다. 녀석이 쉬거나 낮잠을 잘 때면 어김없이 폐축사 옆 고샅에서 시간을 보낸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요즘 같은 여름 날씨에 그곳은 시원한 쉼터를 제공한다. 햇볕을 막아주는 나무 그늘이 있고, 시원한 바람이 있고, 언제라도 위험 상황이 닥치면 폐축사 참호 속으로 뛰어갈 수도 있다. 한낮의 참호 속은 찜통과도 같다. 참호를 덮은 철판은 마치 불에 달군 것처럼 뜨겁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여리지만, 폐축사에는 이제 달리 은신할 곳이 없다.


그런데도 녀석은 뭐가 그리 좋아 축사를 떠나지 못하는 걸까. 지난 늦가을 아기 고양이로 처음 만난 여리는 어느새 중고양이가 되었다. 시간 참 빠르다. 태어난 지도 거의 일 년이 되어가지만, 여전히 여리는 작고 가냘프고 여리여리하다. 녀석은 고샅의 그늘에서 한여름의 후덥지근하고 지루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누워서 본다. 대가족이 어울려 북적거리던 시절은 갔다. 시간은 흘러가고, 모든 것은 변하게 마련이다.


언제까지 행복하지도 않을 것이며, 언제까지 불행하지도 않을 것이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