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한 마음

   
함민복
ǻ
대상
   
13000
2012�� 03��



■ 책 소개
함민복의 글은 꾸밈이 없고 삶의 갈피갈피에 미안한 마음이 묻어 있다. 돌에게서 <아픔>을 만지기도 하고 추석 때 고향에 못 가서 미용실에서 머리를 깎는 시인의 <아픔>을 슬며시 보여주기도 한다. ‘짝 찾는 새들의 울음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봄이 왔나 보다. 거름 퍼담는 트랙터 소리가 축사에서 들려오고 밭에 펼쳐놓은 거름 냄새가 바람에 묻어온다. 숭어 그물을 꿰매고 나무 말뚝을 깎는 어부들 마음은 벌써 만선인지 술 한 잔 뒤에 풀어놓는 우스갯소리에 터지는 웃음소리가 물고기처럼 싱싱하게 튀어오른다.’

 

■ 저자 함민복
함민복은 1962년 충북 중원군 노은면에서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시 「성선설」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96년 강화도에 빈 농가를 빌려 둥지를 튼 그는 이제 강화도 사람들과 한통속이다. 서해 바닷가 사람이 되어가며 그가 쓴 시는, 욕망으로 가득 찬 도시에서 이리저리 부딪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강화도 개펄의 힘을 전해준다. 그는 강화도의 자연과 역사와 물고기를 공부하며 지금도 조용히 마음의 길을 닦고 있다. ‘과거를 추억하나 그에 얽매이지 않고, 안빈낙도하는 듯하나 세상을 향한 따뜻한 마음과 날 선 눈초리를 잃지 않는’ 그의 글은 많은 사람들의 깊은 사랑을 받고 있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김수영문학상, 박용래문학상, 애지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21세기 전망’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 시집 『우울氏의 一日』, 『자본주의의 약속』,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말랑말랑한 힘』과 에세이집 『눈물은 왜 짠가』, 『길들은 다 일가친척이다』, 동시집 『바닷물, 에고 짜다』와 카툰시집 『꽃봇대』가 있다.

 

■ 차례
바람을 만나니 파도가 더 높아진다 
흔들린다
텃밭
늦가을 바닷가 마을의 하루
달이 쓴 ‘물때 달력’ 벽에 걸고
배가 웃었다
섬에서 보내는 편지
밤길

 

새들은 잘 잡히지 않았다 
스피커가 다르다
그 샘물줄기는 지금도 솟고 싶을까?
추억 속의 라디오
뱃멀미
내 인생의 축구
첫눈

 

통증도 희망이다 
긍정적인 밥
사람들이 내게 준 희망
고향에 돌아가리라

죄와 선물
어머니의 소품
절밥
그리운 사진 한 장

 

술자리에서의 충고 
나마자기
술자리에서의 충고
정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걸까?
폭력 냄새나는 말들
‘해안선순환도로’라는 말을 생각하며
먼지의 제왕
고욤나무 아래서
그냥 내버려둬 옥수수들이 다 알아서 일어나
팔무리
항아리

 

읽던 책을 접고 집을 나선다 
봄비
봄 산책
봄 삽화 한 장
꽃비
노루
석양주
자산어보를 읽고
수작 거는 봄
파스 한 장




미안한 마음

흔들린다

집에 그늘이 들어 아주 베어버린다고

참죽나무 균형 살피며 가지 먼저 베는

익선이 형이 아슬아슬하다


나무는 가지를 벨 때마다 흔들림이 심해지고

흔들림에 흔들림 가지가 무성해져

나무는 부들부들 몸통을 떤다


나무는 최선을 다해 중심을 잡고 있었구나

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하나까지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렸었구나

흔들려 덜 흔들렸었구나


흔들림의 중심에 나무는 서 있었구나


그늘을 다스리는 일도 숨을 쉬는 일도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이직하는 일도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고

흔들려 흔들리지 않으려고

가지 뻗고 이파리 틔우는 일이었구나


텃밭

마당에 네 평 정도 되는, 수첩만 한 텃밭이 하나 있습니다.

고욤나무 아래 송판 한 장으로 만들어놓은 긴 의자에 걸터앉아 텃밭을 바라다봅니다.


겨울

먹을 것 없는 새들 날아와 먹으라고 털지 않은 고욤이 눈 내린 텃밭에 듬성듬성 떨어졌습니다. 검고 쪼글쪼글하지만 단 고욤 알. 텃밭은 누가 봉송으로 돌린 백설기 한 켜 같았습니다.


작은 밭을 삽으로 파 일궈놓고 무엇을 심을까 즐거운 고민을 참 많이 했습니다. 신맛, 쓴맛, 매운맛, 단맛, 짠맛 나는 다섯 종류 야생초를 심어볼까. 푸른색, 흰색, 붉은색, 검은색, 황색 야채들을 오방색으로 심어볼까. 뿌리, 줄기, 잎, 열매, 꽃 중 하나를 먹을 수 있는 다섯 종류의 채소들을 심어볼까. 아니면 먹을 것을 포기하고 텃밭을 꽃밭으로 만들어볼까. 고민 끝에 고추 이십 포기, 피망 두 포기, 가지 네 포기, 토마토 열 포기, 상추 오십 포기를 심었습니다.


여름

고추야 고맙게 잘 자랐구나.

잘 자랐다고 말하고 나니까 조금 민망스러워졌습니다. 눈을 조금 돌려 바로 옆 밭 고추들과 비교해보면 제가 기르는 고추들은 순전히 애기였습니다. 밭고랑에 비닐도 안 씌우고 비료를 안 줘서 그런 것 같았습니다.


“할 수 없이 무공해야. 농사도 안 짓는 놈이 뭐 있어야 주지.”


집에 놀러온 친구들에게 이웃 밭 고추와 내 텃밭 고추가 대조되는 것 같아 우스갯소리를 던져보기도 했습니다. 고추도 그렇고 다른 열매 채소들도 처음 달린 열매를 따줘야 열매가 많이 열린다는데 따지 않았습니다. 첫 자식이 잘 커야 고추들도 스트레스 안 받고 뭐, 보람이 있어야 잘 자라고 건강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이를 ‘식물심리농법’이라고 이름 붙여보았습니다.


가지가 걱정이었습니다. 무당벌레들이 날아와 가지 잎사귀를 갉아 먹었습니다. 주렁주렁 매달린 가지와 보랏빛 가지꽃에 빠져 예쁜 무당벌레를 죽였습니다. 가지 몇 개 먹자고 무당벌레를 죽이나!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원통형 과자 ‘꿀짱구’를 낚싯줄에 꿰어 가지잎에 걸쳐놓았습니다. 개미가 모여들자 무당벌레들이 떠났습니다.


가을

조심하세요. 토마토는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향기로 경고를 합니다. “곁순을 따줘야 토마토가 많이 달리지.” 겁이 많은 토마토. 마실온 이웃 형이 곁순을 따줬습니다. 하루 내내 토마토 향기가 구구절절했습니다. 며칠 지나자 다시 곁순이 본줄기보다 더 잘 자랐습니다. 곁순을 더 잘 키우는 토마토가 잡념을 더 잘 키우는 나와 친구같아 악수도 청해보았습니다.


북상하는 태풍에 토마토 섶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고 끝물이고 해서 토마토를 베었습니다. 밑둥치를 바싹 쳤습니다. 다음날이었습니다. 토마토 뿌리마다 한 뼘 정도 되는 땅이 동그랗게 젖어 있었습니다. 누가 물을 주었을까, 살펴보다 깜짝 놀랐습니다. 잘린 토마토 줄기가 젖어 있었습니다. 토마토 뿌리는 없는 줄기를, 가지를, 꽃을, 열매를 포기하지 않았던 거였습니다. 태풍은 비켜 지나가고 한낮은 뜨거웠습니다. 토마토 뿌리를 뽑고 무를 심으려던 계획을 나는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끝내 토마토 뿌리를 뽑아낼 수 없어 무를 심지 못했습니다.


고욤나무가 잎을 다 떨어뜨리고 열매만 가득 매달고 있습니다. 식물들은, 멀어도 가지 끝인 텃밭에 열매를 가꿉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살고 사십대 중반이 되었어도 나는 아직 손길 눈길이 많이 가는 어머니의 텃밭이라는 생각을 텃밭이 길러준 한 해였습니다.


폭력 냄새나는 말들

전원마을, 푸른마을, 강변마을... 아파트 단지 이름들은 대부분 예쁘다. 그런데 그 이름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이름들이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알 수 있다. 전원마을은 전원을, 푸른마을은 푸름을, 강변마을은 강변의 풍경을 해치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해안도로를 지나며 만나는 간판들도 폭력적이기는 매한가지다. 노을횟집은 노을을, 갯벌펜션은 갯벌을, 등대편의점은 등대를 대개 가리고 있다. 풍경에 폭력을 가하면서 그 폭력성을 당당히 내세우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간판의 폭력성은 자연과 맞닿아 있는 곳에서 더 확연히 드러나지만 도회지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도회지의 간판들은 폭력성을 넘어 잔인함까지 드러낸다. 생오리 철판구이, 돼지 애기집보, 새싹 비빔밥, 불타는 닭갈비...등.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너무 잔인한 음식점 이름이 우리 주위에는 수두룩하다.


우리는 매년 여름 ‘수마’라는 말을 듣는다. 수마(水魔). 몸의 거지반이 물로 된 사람이 물에게 ‘마(魔)’란 말을 쓸 수 있을까. 아무리 물이 사람들에게 피해를 줬다고 해도 마란 말을 함부로 쓸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물길에 사람들이 살아 피해를 본 것 아닌가. 사람들이 대기의 온도를 올려놓아 물의 순환 질서를 어지럽힌 결과로 폭우 피해를 보는 것 아닌가. 설사 피해를 크게 보았다고 하더라도 마란 말을 쓰지 말고 옛사람들처럼 그냥 ‘큰물이 났다’고 해야 옳지 않을까.


나는 자연보호란 말이 자연을 얕잡아보는 발상에서 만들어진 말임을 글로 썼었다. 자연이 사람의 보호를 받을 만큼 나약한 존재인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자연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내용의 글이었다. 그 글을 쓴 후 나는 자연보호란 글만 보면 신경이 곤두섰다.


지난여름 구미 금오산에 갔었다. 시원한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계곡을 오르다가 걸음을 멈췄다. 사람들이 어디서 캐왔는지 인위적으로 세워놓은 큰 바위에 써놓은 글귀 때문이었다. ‘자연보호’란 큰 글씨는 충격이었다. 자연을 보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바위를 옮겨 세워놓고 그 바위를 정으로 쪼아 ‘자연보호’란 글씨를 새길 수 있을까. 이보다 우스꽝스러운 일이 어디 또 있을까. 그 기념비를 세운 내력에는 금오산이 자연보호 운동의 발상지라는 글귀가 자랑스럽게 적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금오산에 올라 쓰레기를 줍고 자연보호에 힘쓰라고 지시한데서 자연보호 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글귀 앞에서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서 있었다. 내 머릿속에 북한산 들목에서 보았던 바위에 써놓은 자연보호 헌장이 떠올랐다. 등산객들이 등산로를 표시하며, 자연보호란 글귀가 새겨진 표식을 철사로 나뭇가지에 붙들어 맨 것을 보았던 기억도 살아났다. 결국 철사에 묶인 나뭇가지는 성장을 못해 죽고 말 텐데...


머리가 어지러웠다. 금오산 맑은 물소리는, 사람이어서 미안한 마음을 그래도 맑게 닦아주며 흘러내렸다. 자연보호란 말의 어패를 발견한 이후 우리가 쓰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습관이 생겼다.


이러한 습관은 내 시 쓰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가령 공기총이란 시에서는 공기를 총에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점을, 식물인간이란 말을 생각하면서는 식물이란 말도 무섭게 들려올 때가 있음을, 이라크 전쟁 때는 ‘폭탄의 어머니’란 별명을 가진 폭탄을 생각하며 어머니란 말을 폭탄에도 붙이는 미국 사람들의 이질적 정서에 대해 썼다.


요즘에는 내가 세상을 느끼는 내 감각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는 습관이 생겼다. 풀을 베다가 쉬면서 맡는 풀 냄새는 정말 향기로운 것일까. 몸 잘린 풀의 냄새가 향기롭다니. 새소리가 정말 아름답게 들리는 것일까. 새소리에 나비가 놀라고, 놀란 나비가 다가오던 방향을 바꿔 실망한 꽃빛깔이 순간 옅어졌을 텐데. 내 감각에, 잔인함을 아름답게 느끼는 폭력성이 이미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썩어 내가 못 먹게 된 음식에서만 악취를 맡는 내 후각도 감각에 내재된 폭력성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증거가 되지는 않을까.


내재된 폭력성을 이마에 버젓이 다는 이 시대의 언어에서는 폭력 냄새가 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되새겨보지 않고 묵인한 결과일 것이다.


내가 쓴 시집들은 제목으로 독자들을 우롱하지는 않았을까. 내가 함부로 쓴 시 구절이 사람들 마음이나 나무들 생각이나 새들의 눈빛을 다치게 하지는 않았을지, 나 먼저 깊이 반성해볼 일이다. 


그냥 내버려둬 옥수수들이 다 알아서 일어나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사방이 조용하다. 동네 민박집에 손님들이 들지 않았나 보다. 이곳저곳에서 어둠을 오염시키며 터지던 폭죽 불빛들이 멎었고 노래를 크게 틀고 질주하는 차들도 사라졌다.


바깥마당에 나와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들어본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가 잔물결처럼 섞이며 한 방향으로 흐르는데 그 방향을 알 수가 없다. 바다 쪽으로 흐르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 바다 쪽으로 흐르고, 산 쪽으로 흐르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 산 쪽으로 흐른다. 참 묘하다.


귀뚜라미들은 온도에 따라 다른 속도로 날개를 비벼대며 소리를 낸다고 한다. 십삼 초 동안에 우는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센 다음 그 수에 더하기 사십을 하면 화씨 온도가 된다는 글을 보았었다.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제일 아름답게 들리는 온도가 몇 도씨라는 신문 기사도 보았었는데 몇 도씨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밤 기온이 내려가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쓸쓸함이 제법 묻어난다.


텃밭에서 바스락 소리가 난다. 불빛을 비추자 옥수수를 갉아먹던 쥐가 눈치를 보며 천천히 도망간다. 아니 예의상 잠시 피해주는 눈치다. 손전등을 껐다 켰다 하며 불빛을 쥐가 숨은 풀숲으로 던져보다가 쥐가 미워져 흙덩이를 집어던진다.


“쓰러진 옥수수 대궁, 그냥 내버려둬도 일어날까?”


주인집 아주머니가 주말에 와 텃밭을 가꾸며 심어놓은 옥수수 대궁들이 장마철 비바람에 일제히 쓰러졌다. 옥수수 대궁들을 줄로 잡아매며 강제로 일으켜 세우다 뿌리가 끊어져 그만두고 동네 친구 세 명에게 물어보았다. 두 명은 못 일어난다고 했고 한 명은 스스로 일어선다고 했다. 판단을 내릴 수 없어 할머니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냥 내비려둬. 옥수수들이 다 알아서 일어나. 괜히 강제로 일으켜 세우면 옥수수통 끝 알이 잘 여물지 않고 쭉정이가 돼. 주접이 든다구.”


땅바닥에 쫙 깔렸던 옥수수 대궁이 삼사 일 지나자 할머니 말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옥수수들이, 지게꾼이 지게 작대기로 땅을 짚고 일어서듯 곁뿌리를 뻗어 땅을 짚고 일어섰다. 쓰러지며 뿌리가 많이 끊어진 대궁은 비스듬히 일어섰고 그렇지 않은 대궁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를 툭툭 털고 곧게 일어섰다. 옥수수들이 대견스럽다 못해 생명에 대한 경외심마저 들었다. 해서 다가올 태풍에는 쓰러지지 않게 말뚝을 박고 줄을 띄워주었다. 옥수수들은 폭염 속에서도 등에 ‘수염 난 아이들을 업고’ 잘 자랐다. 그런 사연을 헤아릴 턱이 없는 쥐들이 쓰러지지 말라고 매둔 줄을 타고 다니기까지 하면서 옥수수를 갉아먹으니 미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마당에서 옥수수 밭으로 드리워진 고욤나무 그림자가 엉성하다. 병을 앓고 있어 이파리가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고욤나무는 이파리가 검게 타며 말라 떨어지는 병을 앓고 있다. 약을 사다가 뿌려주기도 했지만 그리 신통한 효험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병든 잎새가 다 떨어져 열매만 가득 매달고 있던 고욤나무가 다시 한 번 새싹을 틔워 새 이파리들을 달았다. 또 작년에는 봄부터 이파리를 빽빽하게 키워 고욤이 익을 때까지 잎 지는 시간을 잡아 늘리는 전략도 펴 보였다. 고욤나무는 그런 전략으로 약을 준 해보다 더 실한 열매들을 더 많이 매달았다.


자연은 자연이 알아서 치유하게 그냥 그대로 두는 게 더 낫다는 말을 실감시켜준 고욤나무 우툴투툴한 껍질을 만져본다.


집 근처에 작은 해수욕장이 하나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해안선 곡선이 예쁘게 살아 있고 환한 모래밭 끝에 검은 뻘 천팔백만 평이 장엄하게 펼쳐지는 아름다운 해수욕장이었다. 그런데 해송 지대가 깎여나간다고, 해송을 보호해야 한다고 해수욕장에 제방을 쌓았다. 그 후 해변의 모래들은 유실되기 시작했고 해안선은 단조로운 직선이 되어갔다. 모래가 거지반 쓸려나가고 뻘이 깎여나가고 다져진 요즘은 아름답던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사람들이 자연을 보호한다고 ‘오버’한 결과이다.


뻘에는 밭과 길이 있다. 바닷가 사람들은 뻘길로 들어가 뻘밭에서 조개를 캐고 낙지를 잡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뻘 체험 캠프’를 열어 아이들에게 자연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뻘밭을 마구 짓밟게 해 뻘이 죽어가고 있다. 이곳 해수욕장 뻘밭이 그렇고 바닷가 사람들은 뻘길로 들어가 뻘밭에서 조개를 캐고 낙지를 잡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뻘 체험 캠프’를 열어 아이들에게 자연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뻘밭을 마구 짓밟게 해 뻘이 죽어가고 있다. 이곳 해수욕장 뻘밭이 그렇고 인근 바다학습 체험장 앞 뻘밭이 그렇다. 더 이상 뻘밭을 딱딱하게 죽이는 일의 최선봉에 죄 없는 아이들을 자연체험이란 이름으로 내세워서는 안 될 것이다. 뻘을 체험하려면 뻘길을 만들어 뻘을 산책해보아야 할 것이다.


뻘에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체험해가야 할 아이들 손을 잡고 자랑스럽게 뻘밭으로 들어가는 어른들이 있는 한 뻘은 사라지고 먼먼 훗날, 지금의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기억을 더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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