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단 하나의 시

   
조서희
ǻ
아마존북스
   
13000
2019�� 05��



■ 책 소개

 

첫눈을 밟는 것처럼 맑은 시, 읽으면 마음이 행복해지는 시를 만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절망 속에 지칠 대로 지친 심신을 뉘이고 있을 때, 우리는 우연히 펼쳐 든 시집 한 권에서 위로와 희망을 찾는다.

저자는 이 책에서 사랑과 상처, 눈물과 그리움, 슬픔과 고통, 화해와 용서 그리고 행복에 관한 시를 소개하고 있다. 백석과 청마의 이야기가 있는 통영, 김용택의 섬진강 매화꽃길도 따라간다. 우리는 지금 어떤 사랑을 하고 있을까. 저자은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사랑은 이렇게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오지 않을 너를 맞이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 저자 조서희
시인, 대학교수, 문학평론가, 영화평론가

1994년 계간 「시대시」신인상 수상
2011년 올해의 최우수상 수상
2011년 시집 「소금꽃 피다」 출간
2012년 세계적 시인 초대석 초대시인
2013년 글로벌문학상 수상
2016년 전국지역신문 주관 「문화예술대상」 수상
2019년 한국예술문화복지사총연합회 주관 「평론대상」 수상

저서 시집 「소금 꽃 피다」
「세계적 한국 시선(공저)」
「그대, 봄 앞에 서다」
전 체코브르노국립예술대학 미디어문창과 학과장
전 한국방송예술진흥원 영상시나리오과 교수
전 홍익대학교와 추계예술대학교 출강
LINFIELD HIGH SCHOOL(Australia)에서 교사 역임
예술의 전당, 법원연수원 강의 외 기업체 특강 다수
거창 국제연극제 홍보대사
국제펜클럽 정회원
상해 푸단대학교 객좌교수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ACA 주임교수

 

■ 차례
프롤로그

 

1장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다
별사別辭-경주 남산·37 · 정일근
지독한 사랑의 기억
행복 · 유치환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이별 이후 · 문정희
사랑도 리필이 되나요
당신, 그려도 될까요?-To 잔느 에뷔테른. From 모딜리아니 · 윤향기
천국에서도 당신의 모델이 되어 드릴게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사랑은 이렇게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는 것
사 랑 · 박형진
한 줌 연둣빛과 세 되 향기, 다섯 섬 가슴앓이
시래기, 코다리 · 이동주
그대, 봄 앞에 서다
단추를 채우면서 · 천양희
사랑하기 딱 한 걸음
황홀한 거짓말 · 유안진
황홀하기 그지없는 거짓말
통영統營 · 백석
자다가 일어나 달려가고픈 곳, 통영

 

2장 우리는 그저 모두 상처받은 사람일 뿐
나무1-지리산에서 · 신경림
사람 사는 일이 꼭 이와 같을까만
창호지 · 민용태
구름에 포를 뜬
초원의 빛 · 윌리엄 워즈워드
영화관 밖에서 영화처럼
게발선인장 가시 · 이숙희
사랑에 늦었다는 말은 없다
시詩 · 파블로 네루다
시란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이야
효자가 될라 카머-김선굉 시인의 말 · 이종문
우리도 부모의 말년을 아릅답게 꾸며 드려야 하지 않을까
가을 엽서 · 안도현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낙타 · 신경림
우리의 고단한 삶을 위로하는
가재미 · 문태준
상실의 시간을 통해 우리가 얻는 선물
농업박물관 속 허수아비 · 이창훈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
나무 · 곽혜란
오래 입어 목이 늘어난 옷 같은
사평역에서 · 곽재구
잊혀지는 것과 사라지는 것

 

3장 슬픔을 세탁하는 방법
용서의 꽃 · 이해인
상처는 친밀감을 먹고 산다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았던 적이 없는 것처럼 · 알프레드 D. 수자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섬진강 매화꽃을 보셨는지요 · 김용택
사랑, 그렇게 와서 그렇게 지는
빨래 너는 여자 · 강은교
슬픔을 세탁하는 방법
푸른 곰팡이-散策詩 1 · 이문재
발효의 시간
매미 · 조익구
이 생애 못한 인연
산도화山桃花 1 · 박목월
봄은 2월의 베개 밑으로
당부 · 김규동
쉬어가도 좋지만 멈추지 않는
지란지교를 꿈꾸며 · 유안진
내 슬픔을 자기 등에 지고 가는 자
12 술에 취한 바다 38 수평선 · 이생진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먼저 취하고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 킴벌리 커버거
내면의 나에게 묻는 것
다시, 십년 후의 나에게 · 나희덕
FM 93.9 MHz 배미향의 저녁스케치

 

4장 이번 생은 처음이라
긍정적인 밥 · 함민복
푸른 별을 보는 동안 어둠이 무섭지 않은
의자의 얼굴 · 고은희
숨길 수 없는 세 가지
엄마 걱정 · 기형도
입 안에 도르륵 말리는 그리움
무엇이 성공인가 · 랄프 왈도 에머슨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행복해진다는 것 · 헤르만 헤세
인생의 미학은 욕심을 버리고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
양평 두물머리 · 심종덕
당신은 아무 일 없던 사람보다 강하다
첫마음 · 정채봉
이 삶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개심사 청벚꽃 · 남영은
스쳐간 인연은 피안앵으로 피어나
봄의 소식 · 신동엽
흐드러지게 피어날 연분홍 꽃비를 기다리며
섬 · 장석
아름다운 관계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
두 번이란 없다 · 쉼브로스카
이번 생은 처음이라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단 하나의 시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다

사랑 · 박형진

풀여치 한 마리 길을 가는데

내 옷에 앉아 함께 간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언제 왔는지

갑자기 그 파란 날개 숨결을 느끼면서

나는

모든 살아있음의 제자리를 생각했다

풀여치 앉은 나는 한 포기 풀잎

내가 풀잎이라고 생각할 때

그도 온전히 한 마리 풀여치

하늘은 맑고

들은 햇살로 물결치는 속 바람 속

나는 나를 잊고 한없이 걸었다

풀은 점점 작아져서

새가 되고 흐르는 물이 되고

다시 저 뛰노는 아이들이 되어서

비로소 나는

이 세상 속에서의 나를 알았다

어떤 사랑이어야 하는가를

오늘 알았다.


한 줌 연둣빛과 세 되 향기, 다섯 섬 가슴앓이

8월 한여름의 풀여치 소리는 맑고 시원하다. 시인 박형진의 ‘사랑’을 읽고 있으면 어느새 마음은 푸른 풀밭에 가 있다. 이 시는 내가 좋아하는 시 중의 하나이다. 간결하고 쉬우면서도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이 시를 읽고 있노라면 나는 한 마리 여치가 되고 바람결에 나부끼는 풀잎이 되고 지저귀는 새가 되고 흘러가는 물이 되고 뛰어노는 아이가 된다.


길을 가는데 풀여치 한 마리가 화자의 옷에 앉아 동행한다. 언제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르지만 화자는 풀여치 한 마리로 모든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존재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풀여치가 앉은 화자는 한 포기 풀잎이 되고 그 풀잎이 온전히 화자가 될 때 풀여치도 완전한 풀여치가 된다.


하늘은 맑고 들은 햇살로 물결치는 바람 속, 화자는 자신을 잊고 한없이 걷는다. 화자는 점점 작아져서 새가 되고 물이 되고 다시 뛰노는 아이들이 되어서 이 세상 속에서의 진정한 자아를 깨닫게 된다. 어떤 사랑이어야 하는가를.


만약 이 시의 제목이 풀여치라면 어땠을까. 풀여치의 심상에 한정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풀여치 얘기를 하면서 사랑이라는 제목을 단다. 제목으로 인해 심상이 더 깊어졌다. 그만큼 제목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통영統營 · 백석

옛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처럼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를 나렸다


자다가 일어나 달려가고픈 곳, 통영

통영의 봄은 참 달고 맛나다. 싱싱한 횟감은 물론 향긋한 도다리쑥국에 살이 달과 찰진 졸복국,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른다는 멍게 비빔밥까지 눈만 감아도 입 안 가득 향긋하다. 한순간 바다 속으로 미끄러진 붉은 해처럼 통영은 하늘도 바다도 사람도 사랑도 동백꽃까지도 붉디붉다. 어느새 마음은 통영 봄 바다를 향해 달려간다. 시인 백석이 통영을 “자다가도 일어나 달려가고픈 곳”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친구의 결혼식에서 우연히 통영여자 박경련을 만나 첫눈에 반한 백석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 통영으로 향한다. 하지만 방학이 끝나 서울로 돌아가게 된 그녀를 다시 만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백석은 사랑하는 여인을 그리는 울울하고 처연한 감정을 담아 <통영>을 쓴다.


미역오리처럼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죽는다는 통영 처녀들은 사실 백석 자신의 애틋한 사랑을 가리킨다. 그리고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그윽함 속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내리는 날, 그는 천희의 하나인 박경련을 만난다. 천희는 처녀를 처니라고 부르던 경상도 발음을 백석이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박경련과 재화하게 된 백석은 그녀에게 청혼을 하지만 거절당하고 만다.


“내 눈에는 박경련이 난(蘭)이로 보인단 말이야. 나는 앞으로 아름다운 것을 난이라고 부를 테야.”


박경련을 향한 백석의 애틋한 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많은 작가들이 가슴 저리게 쓰고 부르던 통영을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아름다운 곳’으로 붙잡아두고 그리워한다.


잊혀진 언어를 복원해 북방의 정서를 잘 살리는 높고 쓸쓸한 시인 백석. 해방 이후 북한을 선택해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대중화되지는 못했지만 1987년 그의 시는 해금될 때까지 오산고보 후배인 화가 이중섭, 박수근 등을 포함해 시인 김기림, 노천명, 윤동주, 신경림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백석을 만날 수 있어 더없이 행복한 곳이 바로 통영길이다. 아름다운 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통영 앞바다에선 갯바람이 바다내음을 끊임없이 실어온다. 오늘밤 자다가도 일어나 달려가고픈 곳, 그곳이 바로 통영이다.



우리는 그저 모두 상처받은 사람일 뿐

낙타 · 신경림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우리의 고단한 삶을 위로하는

서걱이는 모래사막을 느릿느릿 걸어가는 낙타를 보라. 구부정한 다리와 굳은 살 박힌 무릎, 붙인 듯 너덜너덜해진 털을 달랑거리며 터벅터벅 길을 걷는 저 낙타를 보라. 시인 신경림의 <낙타>를 읽으면 시를 동반하는 시인의 삶이 녹록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낙타는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적이 없는 존재다. 그는 세상사에 초연하려는 초월적 의지를 가지고 삶을 달관하는 존재이며, 저승길의 동반자이자 화자와 동일시되는 대상이다. 때문에 화자는 절대자, 즉 신이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고 답한다.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여기서 어리석은 사람은 화자가 추구하는 삶을 반어적으로 형상화한 존재다.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역시 화자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존재를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낙타는 등에 지고 있는 짐이 무겁고 힘들어도 기꺼이 제 등을 빌려주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 모습이 누군가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 그저 막막한 빌딩 숲속을 걸어가는 우리를 연상케 한다. 신경림의 <낙타>는 그런 우리의 고단한 삶을 위로한다. 있는 그대로의 삶에 대한 깨달음과 희구, 그 존재 자체가 바로 삶이라는 것을. 문득 오늘도 긴 속눈썹을 껌뻑이며 묵묵히 모래사막을 걷고 있을 낙타가 그리워진다.

 


나무 · 곽혜란

나무의 문을 두드리면

나무는 문을 열고

들어오라 내 손을 잡아끌지

나무는 할 말 많은

내 사정은 뒤로 하고

제 이야기에 열을 올리지

이따금 다른 나무 흉도 보면서

초저녁 별 한 잎 띄운 차 한 잔 권하네


사방은 온통 초록세상

더러는 연두색과 갈색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돈도 명예도

어디에 소용될 곳 없는 나무들의 터에서


우리는 연록빛 우러난 차 후후 불어 마시면서

오래 마주 보고 있었네


때로는 계곡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때로는 길을 묻는 바람에게 대꾸도 해주면서

나는 나무에게 나무는 나에게

그냥 오래 입어 늘어난 옷 같은 사이

별로 바라는 것도 없이


단단한 껍질을 가진 나무에게는 문이 있다네

그 문 안에는 동그란 식탁과 동그란 찻잔

동그란 사이가 있다네

우린 지금 동글동글

열매를 키우고 있다네


오래 입어 목이 늘어난 옷 같은

날선 회색 도시를 걷다가 문득 나무와 마주하면 나무는 언제든 반갑게 문을 열고 따뜻한 모성으로 우릴 보듬는다. 우리는 그런 자연의 품 안에서 동그란 열매를 키워간다. 시인 곽혜란, 그의 시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은 앞서 말한 나무의 품속과 같다. 이 시는 ‘오래 입어 목이 늘어난 옷 같은’ 나무에 우리의 실존 그리고 삶에 대한 애정 어린 눈빛과 사랑을 ‘초저녁 별 한 잎 띄운 차 한 잔 권하네’와 같이 참신한 이미지로 꾸밈없이 드러낸다.


그의 시는 철학적이다. 그래서인지 사유가 깊다. 이 시는 대체로 잔잔하게 흐르지만 우리에게 현실적인 위로와 희망을 건넨다. 시 속에서 행복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이유는 아마도 미래는 밝을 것이라는 시인의 믿음 때문일 것이다.


곽혜란 시인은 세속적 가치나 자기 성취에 안주하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다. 또한 모든 기성적 가치를 털고 넘어서기를 소망하는 자유인이기도 하다. 그에게 시란 내밀한 숙제를 푸는 도구이자 길이다. 시인 곽혜란은 그 길 위에서 자신을 삭이고, 녹이고, 꿰매고, 들여다보는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야 인간이 성숙해진다고 말한다. 그 시간을 견디면 공기처럼 가벼워진 자신이 하늘을 떠도는 것 같은 부유함을 맛볼 수 있다고. 성숙이라는 것은 자신만의 생각을 절실하게 새기고 자신의 삶과 존재를 성찰하는 시기를 말한다. 그의 시세계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닐까.



슬픔을 세탁하는 방법

섬진강 매화꽃을 보셨는지요 · 김용택

매화꽃 꽃 이파리들이

하얀 눈송이처럼 푸른 강물에 날리는

섬진강을 보셨는지요.

푸른 강물 하얀 모래밭

날선 푸른 댓잎이 사운대는

섬진강가에 서럽게 서보셨는지요

해 저문 섬진강가에 서서

지는 꽃 피는 꽃을 다 보셨는지요

산에 피어 산이 환하고

강물에 져서 강물이 서러운

섬진강 매화꽃을 보셨는지요

사랑도 그렇게 와서

그렇게 지는지

출렁이는 섬진강가에 서서 당신도

매화꽃 꽃잎처럼 물 깊이

울어는 보았는지요

푸른 댓잎에 베인

당신의 사랑을 가져가는

흐르는 섬진강 물에

서럽게 울어는 보았는지요


사랑, 그렇게 와서 그렇게 지는

반짝이는 강물 위로 매화꽃 향기가 떠오르면 섬진강에는 비로소 봄이 찾아온다. 하얀 꽃 노란 속살, 섬진강 물길 따라 흐드러지게 핀 매화는 강물도 내 마음도 금세 취하게 한다. 매화꽃 질 무렵의 하늘엔 졸음에서 막 깨어난 벚나무가 팝콘 터뜨리듯 꽃을 피워내고, 바람은 어두컴컴한 터널 안에 화사한 벚꽃 길을 연다. 햇볕에 몸을 뉘인 산비탈의 연초록 차나무는 꽃길의 끝에 서서 미움도 마음도 어지러움도 모두 반겨 준다. 붉은빛 물비늘이 강물에 젖어들 즈음엔 거랭이 들고 재첩 잡던 어부들도 노을을 낚으며 하나 둘 나루로 돌아온다.


텃밭에/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예쁜 여자랑 손잡고/

섬진강 봄물을 따라/매화꽃 보러 간 줄 알그라

<김용택의 ‘봄날’>


섬진강에 오면 처음 만나는 생경함과 인심 좋은 사람들로 마음이 포근해진다. 절제된 언어로 자연의 일부를 삶 속으로 끌어오는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왜 섬진강을 떠나지 못하는지 이곳만 오면 알게 된다.


가만히 섬진강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이 시에서처럼 ‘사랑도 그렇게 와서 그렇게 지는/출렁이는 섬진강가에’ 매화 꽃잎 한 장 술잔 위에 띄우고 ‘푸른 댓잎에 베인/당신의 사랑을 가져서는/흐르는 섬진강 물에 서럽게’ 울고 싶다. 무심히 흐르는 세월은 내게 섬진강처럼 살라 한다. 봄비의 속삭임에 더러는 피고 더러는 지는 강물도 내 마음도 꽃그늘 아래 흔들린다. 나는 그런 섬진강의 물살이 그리고 햇살이 되고 싶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 킴벌리 커버거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하루하루를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풋풋한 생명력과 탄탄한 피부를 더 가치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 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님이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깨닫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 자주 입맞춤을 했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내면의 나에게 묻는 것

상담을 하다 보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미래에 대한 염려와 고뇌로 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새내기들은 대학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졸업을 앞둔 학생들은 졸업 후 진로에 대해 고민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학생들에게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라고 말해 주곤 한다. 그것은 내가 지금에서야 깨닫게 된 소중한 진리다. 나 또한 젊은 시절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그 번뇌가 남기고 가는 것은 ‘그때 좀 더 즐기고 살 걸’이라는 후회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세월이 쌓이는 만큼 어떤 형태로든 성장한다. 그 지혜를 과거에 알았더라면 지금 우리의 삶은 훨씬 더 나은 형태로 변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성공과 실패의 과정을 수없이 거쳐 나온 해답이기 때문이다. 킴벌리 커버거의 시,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은 낡은 필름이 돌아가듯 지나간 인생에 대한 통찰과 그 속에서 얻은 지혜를 담은 시이다. 시인은 자신의 인생에서 진실로 사랑하지 못한 것들을 회상하며 못내 아쉬워한다. 그러면서도 시를 읽는 독자들은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기 바란다. 삶은 부모나 다른 누군가가 대신 살아주거나 결정해 주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이목이나 권력, 명에 등에 연연하며 살기에 우리 인생은 그리 길지 않다.


세상에는 가장 소중한 금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음식에 빠져서는 안 되는 소금, 둘째는 값비싼 황금, 그리고 가장 중요한 셋째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이다. 지금 이 순간을 열심히 사랑하고 일한다면 분명 밝은 미래가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잠시 동안만이라도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내면의 나에게 묻는 것이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

긍정적인 밥 · 함민복

시 한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처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들어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한 마음 하나 없네


푸른 별을 보는 동안 어둠이 무섭지 않은

사실보다 희망이 더 절박할 때가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절망 속에 지칠 대로 지친 심신을 뉘이고 있을 때, 우리는 우연히 펼쳐 든 시집 한 권에서 희망을 찾곤 한다. 김춘수 시인이 시작(詩作)의 이유를 자기구원에서 찾았듯, 시는 탁월한 정신적 치료제 역할을 한다. 시는 정신의 극치이고 존재의 귀착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영국의 극작가 윌리엄 콩그리브는 시를 가리켜 “모든 예술의 누이이자 모든 것의 아버지이다”라고 했다.


시인에게 있어 시는 살아가는 목표와 같다. 그는 그것을 위해 가난도 감수한다. ‘푸른 바다처럼 상한 마음 하나 없네’라고 노래하는 시인의 가슴은 너그럽고 여유롭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따르면, 시인은 모방자이자 창조자이다. 또한 있었던, 있을 수 있는 일들을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예언자적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의 가치관이 흔들리고 존엄성이 상실되는 요즈음, 이럴 때일수록 우리에겐 시가 필요하다. 시는 결국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진실로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다. 그래서 앞날을 염려하는 사람들이 한편의 시 읽기를 갈망하고, 때로는 좋은 시를 창작하려는 진지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시인 함민복은 살기 힘든 세상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는 시작(詩作)이 생계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 아쉬움을 느끼지만 작은 소득이나마 얻게 되는 것에 감사한다. 이런 시적 화자의 시선은 자신을 위로함과 동시에 그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에게도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시인은 삶의 변방에서 가난을 긍정으로 일으켜 세우는 법을 터득한다. 가난하지만 시만은 따듯하다. 김이 모락모락 하는 따뜻한 밥 한 공기처럼 아름답고도 눈물겨운 시는 긍정에서 비롯된다. 불가능이 가능이 되는 것 또한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 걱정 ·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입 안에 도르륵 말리는 그리움

책장에 꽂힌 기형도의 낡은 유고 시집 <입속의 검은 잎>을 오랜만에 꺼내 읽는다. 시집에 실린 시 중 <엄마 걱정>을 읽다 보면 그리운 엄마가 생각나 금세 눈시울이 붉어진다. 시를 좋아하고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우리 문단사에서 기억해야 할 존재, 기형도 시인.


1984년 중앙일보사에 입사, 1985년 시 <안개>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한다. 2월에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 신문사 수습 후 정치부로 배속된다. 기형도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통해 우울한 자신의 경험과 추상적 관념들을 형상화해 왔다. 그는 유년 시절의 기억이나 도시인들의 삶을 통해 비극적인 정조를 드러내고 독창적이고 개성 강한 시를 발표해 왔다. 그 중 <엄마 걱정>은 어머니를 기다리던 유년시절의 그리움을 드러내는 시이다.


<엄마 걱정>은 시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의 애틋한 감정이 잘 드러나 있다. 시적 화자는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엄마를 홀로 기다린다. 방에 혼자 남은 어린 화자는 엄마를 기다리는 동안 천천히 숙제도 해 보지만 엄마의 발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고 어두운 방에서 훌쩍거리고 만다. 먼 옛날의 기억임에도 불구하고 엄마를 기다리던 마음은 여전히 눈시울을 붉게 하는 유년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 작품은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당시의 상황과 정서를 감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해는 시든 지 오래/찬밥처럼 방에 담겨/배추잎 같은 발소리’와 같은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엄마의 고된 삶과 어린 화자의 외로움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또한 유사한 문장의 반복을 통해 리듬감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기형도의 시는 자신의 개인적인 상처를 드러내고 분석하는 데서 시작된다. 가난한 집안 환경과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 장사하는 어머니,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누이의 죽음은 기형도의 일생에 깊은 상처로 남게 된다.


스물아홉 기형도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29년이 흘렀다. 1989년 3월 7일 새벽, 서울 종로의 한 심야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된 그의 사인은 뇌졸중. 만 29세 생일을 엿새 앞둔 기형도 시인은 우리 곁을 그렇게 떠나고 만다.


기형도 시인은 살아 있을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사후에 발표된 시집을 통해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된다.


그의 시는 어둡고 우울하지만 결코 폭력적이지 않고 조용한 서정성을 느낄 수 있다. 기형도 시인은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는 독특한 시세계를 열었고 가난, 상실, 도시적 일상에 대한 부정적 인식, 실존의 부조리 등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으로 시를 쓰는 새로운 경향을 형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기형도 시인은 바래지 않는 스물아홉으로 우리 곁에 남아 빛나는 청년으로 기억될 것이다.


엄마라고 부르면 입안에서 도르륵 말리는 그리움. 그리운 그 이름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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