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보통이 아니네

   
김보통 외
ǻ
생각정거장
   
14800
2019�� 04��



■ 책 소개

 

오늘도 탈탈 털렸는가?
평화로운 일상을 지키기 위한 소통 공감 프로젝트

 

보통의 삶을 추구하지만 보통이 되기도 참 힘든 세상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언제 감정이 훼손당했는지도 모르고 지쳐 퇴근한 지금에서야 뻐근함이 느껴지는가? 오늘 하루의 회포를 풀 듯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수다를 떨어보자. 그간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던 소리가 누군가의 울음인지, 웃음인지, 불평인지, 신음인지부터 알아채야 달래주든, 손을 잡든, 대신 따져주든, 위로해주든 할 수 있을 테니까. 우리 모든 보통이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세상을 꿈꿔본다.

 

■ 저자
김보통
만화가
수필가
라디오 게스트

 

저서목록
《아만자》(전5권)
《DP 개의 날》(전4권)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
《살아, 눈부시게!》

 

강선임
자유롭게 살고 싶긴 했는데, 프리랜서로 살게 될 줄은 몰랐다. 우연한 기회로 라디오 작가가 되어 , , <책처럼 음악처럼 정형석입니다>, <윤덕원의 인생라디오>와 같은 프로그램에 함께 했다. 화가 많은 성격 덕분인지 1년에 반은 일하고 반은 놀기를 반복하고 있는 진정한 프리랜서. 현재는 네이버 오디오클립 <아날로그 책 읽기>를 만들고 있다.

 

■ 차례
프롤로그

 

1부 보통이의 미래
1장 잃어버린 워.라.밸.을 찾아서
당신의 삶은 보통인가요? ┃ 일과 삶의 균형을 찾아라? ┃ 의심하며 나아간다


2장 내겐 너무 이상한 회사생활
이런 나 비정상인가요? ┃ 회사생활의 미스터리. 내 휴가는 왜 내 것이 아닌가? ┃ 회사가 어렵다는데 회식은 왜 이렇게 자주 하는 걸까? ┃ 진단명: 열정 과잉
3장 퇴사라는 꿈
퇴사는 어쩌다 꿈이 되었나? ┃ 도망치지마 vs. 도망쳐 ┃ 무소속으로 산다는 것


4장 넵병
카톡 강박증, ‘넵’에 중독된 우리 ┃ ‘NO’라고 말하지 못하는 직장인 불치병 ┃ 당신이 분노하는 것은 무엇?


5장 구르기 운동본부
다들 이렇게 사는 거지…? ┃재밌게 살고 싶지만, 돈도 많이 벌면 좋겠어 ┃ 재미라는 ‘모’를 심자


2부 이런 기대는 사치인가요?
6장 감정 노동에서 시발 비용까지
월급에 다 포함돼 있다? ┃ 단지 욱 해서 그런 게 아니야 ┃ 거스름돈 500원이십니다


7장 갑질
불공정한 게임을 하고 있다 ┃ 갑질을 갑질로 갚나요?


8장 내가 꼰대라니 …
누구나 처음부터 꼰대는 아니었어 ┃ 꼰대력 테스트


9장 주 52시간 근무제, 그리고 돈
근무 시간이 줄어든다면? ┃ 우리 시대 먹고사니즘


10장 나의 고질병
 
누구에게나 있는 ┃ 열어보자, 고질병 상담소!


11장 극혐주의
혐오를 쉽게 말할 때 생길 수 있는 것들 ┃ 파이터들의 세상에서


12장 싫어증
X이론? Y이론? ┃ 아이고, 의미 있다 ┃ 휴가가 필요해


13장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
연애는 정말 사치? ┃ 너, 나, 우리


3부 나를 지키는 법
14장 무례하시네요, 정말
관심 없는 관심, 애정 없는 애정 ┃ 나는 내가 지킨다


15장 밥상 뒤엎는 대발이 아버지,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드라마 속 남자들 편 ┃ 드라마 속 여자들 편 ┃ 요즘 남자, 요즘 여자


16장 관심병
SNS라는 새로운 동네 ┃ ‘좋아요’가 너무 좋은 사람들


17장 나를 지키는 법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 칭찬도 고래를 병들게 할 수 있다! ┃ 누가 뭐래도


18장 중간 착취자의 나라
주인처럼 일하라면서요? ┃ 우주 소속 노동자 연대


19장 페어플레이 정신
그게 ‘융통성’이라고요? ┃ 다시 보자, 페어 플레이


에필로그

 




이거 보통이 아니네


보통이의 미래

잃어버린 워.라.밸.을 찾아서

당신의 삶은 보통인가요?

새벽 6시. 알람이 울린다. 김보통 씨는 재빨리 알람을 끄고 허겁지겁 잠을 이어 붙인다. 10분 후, 두 번째 알람이 울릴 테니까... 그때까지만... Zzz. 그러나 두 번째 알람이 울려도 눈꺼풀의 무게는 여전하다. 5분만, 아니 1분만 더...Zzz. 그리고 마침내 세 번째 알람이 울린다. 김보통 씨는 온 힘을 다해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정말 지각이야!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는 길, 김보통 씨의 눈빛에는 비장함이 서려 있다. 고작 몇 분 차이로 출근길의 험난함이 엄청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만원 버스에 타고 내리는 일, 가장 적은 시간에 환승하는 일, 모든 게 다 미션이다. ‘이게 이렇게 사력을 다할 일인가’라는 생각조차 여유로 느껴지는 한 시간 남짓의 출근길.


그리고 마침내 내 책상, 내 자리에 도착한다. 김보통 씨는 그제야 한숨을 돌린다. 이제 겨우 출근을 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피곤한 거지? 하지만 메일함엔 당장 처리해야 할 업무가 한 가득이고, 팀장님은 또 회의를 하자고 하신다. 안 되겠다. 커피를 붓자.


오전 업무 시간은 그래도 정신없는 만큼 빨리 지나간다. 소중하고 또 소중한 점심시간을 알차게 쓰기 위해 다시 한 번 마음이 바빠진다. 운이 좋으면 후다닥 밥을 먹고 잠깐이나마 눈을 붙일 수 있다. 하지만 은행 업무를 보거나, 병원에 다녀올 수 있는 시간도 이때뿐이다.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서글퍼지는 고민이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 업무를 시작하면서 김보통 씨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진다. 집중해서 빨리 끝내면 칼퇴를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슬그머니 품어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희망은 6시에 가까워지면서 급격하게 옅어진다. 늦은 오후에 당장 처리해야 할 업무가 주어지거나, 야근하는 상사가 눈치를 줘서 포로 신세가 되거나, 갑자기 회식이 잡히거나... 이유는 많고도 많다. 어차피 야근인데 뭘 그렇게 서둘렀을까. 허탈한 마음으로 퇴근하는 늦은 밤. 지하철 안 사람들의 얼굴이 다 나와 같다. 그래, 다들 이렇게 사는 거지... 그런 거겠지?


특별히 불.행.하.다.고 말하긴 어렵다. 매일 출근할 때마다 괴롭지만, 요즘 같은 취업난에 그래도 밥벌이는 하고 있으니 다행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요즘 들어 부쩍 ‘이게 정말 보통의 삶일까’ 의심이 드는 건 왜일까? 문득문득 숨이 턱 막히고, 너무 힘들어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여기저기서 워라밸, 워라밸 말들은 많이 하는데 과연 내 워라밸 점수는 몇 점인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는 김보통 씨다.


일과 삶의 균형을 찾아라?

워라밸, 워크와 라이프의 밸런스를 줄여서 만든 이 말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세상을 점령했다. ‘일’하기 바빠서 ‘삶’을 돌보지 못하다니! 그건 너무 촌스러운 일이 됐다. 이제 막 일을 시작한 사회초년생도 워라밸을 찾고, 십여 년 넘게 순응하며 살아온 부장님도 워라밸을 찾는다. 심지어 고용의 주체인 기업들도 워라밸을 외친다(물론 광고에서만). 워라밸을 찾지 못하면 안 될 것 같은 압박감마저 든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자. ‘아니, 일도 힘든데 삶의 질을 높이라고?’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자. 청춘을 바쳐 취직을 하고 나면, 출퇴근을 위해 많은 시간을 길에서 보내고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며 남은 시간은 휴식을 취하기도 빠듯하다. 일만으로도 벅차니 삶은 돌볼 겨를이 없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라는 새로운 미션이 떨어졌다. 이렇게 난감한 미션이라니. 일을 줄여주면 삶의 질은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그런데 일을 줄여주기는커녕 자리보존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눈치껏 워라밸도 찾아야 한단다. 괜히 숙제만 하나 더 늘어난 것 같은 건 그저 기분 탓일까.


보통 임용고시는 ‘답 없는 싸움’이라고들 한다. 정말 소수의 자리를 얻기 위해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경쟁을 해야 한다. 너무 답 없는 경쟁이다.


그런데 이런 경쟁이 갈수록 더 보편화되고 있다. 사회학자 강수돌의 책 《어떻게 경쟁은 내면화되는가》에서는 우리 사회를 ‘팔꿈치 사회’로 설명한다. ‘팔꿈치 사회’는 1982년 독일에서 ‘올해의 단어’로 뽑혔던 말로,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은 물론이고 팔꿈치를 휘두르는 반칙도 서슴지 않아야 할 정도로 가혹한 경쟁에 내모는 사회를 말한다. 아이들은 점점 더 어릴 때부터 경쟁에 내몰리고, 짓밟히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밟고 올라설 수밖에 없다고 배운다. 이기는 것도 지는 것도 괴롭긴 마찬가지.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 울면서 달릴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런 기대는 사치인가요?

감정 노동에서 시발 비용까지

월급에 다 포함돼 있다?

‘감정 노동’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지 벌써 꽤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마트에서 계산을 하는 분들에게 의자가 주어지고, 콜센터 직원에게는 인격모독 발언을 들었을 때 전화를 끊을 수 있는 권리가 생겼다. 여전히 백화점 직원을 무릎 꿇리고, 패스트푸드점 직원에게 햄버거를 던지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분노하면서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어떤 이유에서든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라는 공감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시발비용’이라는 신조어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시.발.비.용.


비속어인 ‘시발’과 ‘비용’을 합친 이 신조어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으면 발생하지 않았을 비용’을 뜻한다. 이런 신조어가 생기고 공감을 얻게 된 이유를 알 수 있는 설문조사 결과가 있다. 직장인들의 택시 이용률에 대한 조사였는데, 하루 평균 1회 택시를 탄다는 응답이 가장 높았다고 한다. 그런데 주목할 이유는 택시를 이용하는 이유였다. 가장 큰 이유는 ‘시간 절감(37.1%)’이었지만, 그 뒤를 이은 이유가 바로 ‘직장 스트레스’였다. 평소라면 대중교통을 타거나 걸어가도 될 거리인데도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홧김에 택시를 타는 경우가 무려 28.6%나 된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는 많다.


홧김에 치킨 시키기, 홧김에 충동구매하기...재미로 승화시키긴 했지만, ‘일을 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는 정말 당연한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한다. 단순히 업무를 수행할 때 받는 스트레스 외에도 과도한 경쟁에 내몰리면서 오는 압박감, 고객이나 상사에게서 받는 모욕 같은 것들도 ‘사회생활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는 말로 받아들이곤 했다. 그리고 그 결과 “당신이 받는 월급에 모욕과 스트레스를 감내하는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는 주장까지 수긍하는 분위기가 된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그게 사실이라면 연봉 협상을 할 때 고객이나 상사에게 듣는 모욕에 대한 대가를 반영해야 한다. 얼마면 충분할까? 적당한 값이라는 게 있을 수 없다. 물론 ‘이 정도 연봉을 받으면 참고 일해야지’라는 계산치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얼마가 됐든 한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할 존중에 값을 매기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단지 욱 해서 그런 게 아니야

직장생활을 하면서 윗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아부를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선택한 생존의 한 방식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스트레스를 자신보다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푸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어쩌면 햄버거를 얼굴에 던지는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이런 부당한 화풀이가 이미 아주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신문기자가 직접 텔레마케팅 회사에 취업을 해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르포 기사를 썼다. 하루에 몇 건의 민원을 해결했는지에 따라 쪼임을 당하거나 급여가 깎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화장실 가는 것조차 매번 보고를 해야 했고, 분 단위로 체크까지 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당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안타깝지만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것이 그들의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주체는 회사다. 문제가 있으면 회사가 해결해야 하고, 그 과정에는 고객의 불만을 듣는 것도 포함된다. 하지만 제품에 대한 불만을 듣는 일은 힘들고 성과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 일은 보통 하청을 준다. 돈을 줄 테니 대신 욕받이가 되어달라는 것. 따라서 텔레마케터나 상담사들은 태생적으로 스트레스의 극한으로 몰릴 수밖에 없고 견딜 수 있을 때까지 견디다, 때로는 그 이상까지 견디다 결국 퇴사한다.


일반 회사에서 퇴사율이 높은 것은 여러 가지 문제가 된다. 하지만 하청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회사는 귀찮은 일들을 피할 수 있다. 빈자리는 금방 새로운 사람으로 채워질 것이고, 혹시 문제가 생기면 하청업체를 바꾸면 된다. 하청업체들은 일을 맡기 위해 다른 업체들과 경쟁을 하면서 단가를 나주고 기업의 편의를 위해 노력한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비용은 줄이면서 손쉽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아주 효율적인 시스템이다. 그러나 가장 약자인 감정 노동자들에게는 아주 잔인한 시스템이다. 우리는 그동안 이런 것들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것은 아닐까?


내가 꼰대라니 …

누구나 처음부터 꼰대는 아니었어

알다시피 ‘꼰대’라는 말은 은어다. 요즘엔 워낙 널리 쓰여서 몰랐는데, 원래는 학생들 사이에서 선생님이나 아버지처럼 나이 많은 남자를 가리켜 썼던 말이라고 한다. 떠올려보면 감수성이 예민하고 머리가 쑥쑥 크던 시절에는 누구의 말이든 다 간섭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런데 왜 굳이 ‘남자 어른’한테 이런 말을 쓰기 시작했을까.


간섭을 하는 것에 있어서는 엄마가 더 많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엄마와는 대화를 나누고 투정을 부릴 수도 있다. 그에 비해 아버지나 선생님은 훨씬 어렵다. 더 솔직히는 ‘두려우면서 짜증난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간섭도 간섭이지만 ‘소통불가’, ‘일방통행’이 ‘꼰대’라는 단어의 의미를 규정짓는 더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그리고 그 배경엔 ‘권위’가 있다.


사실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는 소통하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 내 생각은 맞고 너는 틀리다고 우기는 사람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서로 조심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권위가 생기면 조심성을 잃는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의심을 더 이상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내 통제하에 두려고 한다. 그래야 자신의 권위가 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회사에서는 회식이 주로 그런 용도로 쓰이곤 한다. “내 밑으로 다 집합”을 외쳤을 때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해 분위기 흐리는 사람 없이 잘 놀고, “역시 우리 팀 단합이 최고”라고 자화자찬하는 것으로 자신의 권위를 확인한다.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다.


대학교에서 선배가 후배들을 집합시켜놓고 기합을 주거나 때리는 사건이 뉴스를 통해 종종 보도되곤 한다. 인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수업 분위기가 좋지 않아서, 학과 행사에 참여하지 않아서 그랬다고 한다. 표면적인 이유가 뭐든 본래 이유는 하나일 것이다. 없는 권위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꼰대력 테스트

재밌는 통계가 있다. 직장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직장 내에 꼰대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77%가 “그렇다”고 답했다. 그런데 “자신을 꼰대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는 18%만이 “그렇다”고 답했다고 한다. 나머지 82%는 ‘나는 꼰대가 아니야’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77%와 18%를 같은 선상에 놓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격차가 너무 크지 않은지? 다른 사람들이 꼰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는 꼰대가 아니야’라고 생각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난 꼭 꼰대가 되고 말거야’ 이런 꿈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너무 무섭겠다. 아마 대부분은 잘 지내고 싶은 마음에, 또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에 대화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이나 행동이 간섭으로 받아들여지면 당황스럽고 억울할 수 있다. 그래서 “요즘 애들이 이렇다니까” 한다면? 정말로 불편해진다.


억울한 마음을 누르고 차분하게 생각해보자. 의도가 어떠했든 받아들이는 사람의 느낌이 중요하다. 적어도 꼰대 여부를 가리는 데 있어서는 그렇다. 내가 싫어했던 꼰대들을 떠올려보면 더 쉽게 알 수 있다. 싫다, 싫다 하다 닮는다는 무서운 말을 떠올려 봐도 좋다. 덕분에 조금 더 조심하게 된다면 다행이 아닐까. 꼰대로 갈 뻔 했던 길에서 다시 한 발자국 물러설 수 있으니까.


친구들과 만나면 종종 “나는 아직도 20대 같은데...”라는 말을 하게 된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서로 놀리고 깔깔거리다 보면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건 친구들 사이에 있을 때나 맞는 말이다. 지금 내 마음이 20대와 같더라도 지금의 20대와는 다르다. 상황도 다르고 사람도 다르다.


내가 그 나이를 지나왔다고 해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안타깝고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에 나도 모르게 “내 생각에는 말이야”하고 말을 보태고는 돌아서서 후회할 때가 많다. 그럼 차라리 아무런 조언도 하지 말라고? 그건 너무 각박하지 않냐고? 그렇다. 상대가 원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주 52시간 근무제, 그리고 돈

근무 시간이 줄어든다면?

2018년 7월 1일부터 주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됐다. 아직 모든 직장은 아니고 큰 규모의 회사부터 단계적으로 적용되는 중이다. 아무래도 대기업은 인원을 좀 유동적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근무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은 퇴근을 일찍 할 수 있다는 것. 무리한 야근도 안 하게 되니 당연히 좋은 거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생각 외로 의견이 분분했다. 바로 돈 때문이다. 근무 시간이 줄어들면 급여 외에 추가 수당도 덜 받게 된다. 추가 근무에 대한 대가이니 안 하면 못 받는 거지만, 월급 체계가 회사마다 달라서 전체 연봉은 비슷해도 수당의 비율이 높은 경우 타격이 더 커진다.


“시간보다 돈이 더 급하다”, “저녁이 있는데 돈이 없으면 뭐하냐”는 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해가 됐다. 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우린 원래 초과근무를 하고도 수당을 제대로 받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아예 근무시간을 줄여주는 게 맞다”는 목소리도 있다. 고용주와 노동자들의 싸움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노동자들끼리 목소리를 높여 싸우는 것 같다.


이런 뜻밖의 논쟁은 그동안 저녁이 없는 삶을 사는 대가로 얻은 데 딱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돈’뿐이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해주었다.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근무시간은 세계적으로도 악명이 높다. 멕시코를 뛰어넘어 OECD 가입국 중 최장시간을 자랑하는데 생산성은 떨어진다. 왜 좀처럼 이 불명예스러운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의아했는데 급여체계를 보니 좀 이해가 되는 듯하다.


흔히 ‘월급’ 하면 기본급을 떠올리게 된다. 성과를 떠나 정해진 시간 동안 주어진 일을 성실히 했다면 기본적으로 보장받게 되는 급여다. 원래는 이 기본급으로 어느 정도 기본 생활이 가능해야 한다. 하지만 같은 연봉이어도 열어보면 천차만별. 회사는 직원들에게 월급을 많이 주고 있다고 자랑하지만, 실제로는 낮은 기본급을 노동자들의 추가 근무 수당으로 메꾸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노동자 입장에서는 불만이 나올 수 있는 월급 체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묵묵히 자신의 시간과 노동력을 바쳐 그 빈틈을 메꿨다. 연봉 협상이라 말하지만 대개는 연봉 통보일 뿐인 회사생활에서 이의를 제기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나라가 오랫동안 ‘가장 오래 일하는 나라’라는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근무시간을 줄이려는 노력이 시작된 것은 다행이지만, 급여, 돈의 문제도 함께 개선되길 꿈꿔본다.



나를 지키는 법

나를 지키는 법

칭찬도 고래를 병들게 할 수 있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종종 나에 대해서 평가하는 말을 듣게 될 때가 있다. “누구 씨는 성격이 참 당차서 좋아”라든지 “누구 씨는 예민한 편이잖아”라든지. 그 사람이 느낀 대로 말하는 것이겠지만 좀 당황스럽기도 하다. 내가 정말 그런가? 뭣 때문에 나를 그렇게 판단한 거지? 혼자 생각해도 되는데 왜 굳이 말을 하는 걸까? 그저 그 사람의 생각일 뿐이니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려고 해도 왠지 신경이 쓰인다. 그리고 때로는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내 모습에 맞춰 행동을 하게 되기도 한다.


거절을 잘 못하는 김보통 씨, 화가 나도 꾹 참는 김보통 씨도 그렇다. “사람 참 좋다”는 칭찬마저도 이제는 부담스럽다고 하지만, 어느새 그 말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이미 ‘착한 사람 콤플렉스’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콤플렉스를 간단히 이야기하면 ‘마음 속 응어리’다. 제대로 풀지 못하고 뒤죽박죽된 채 뭉쳐져 있는 덩어리를 응어리라고 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착한 사람으로 불리지만, 착하기만 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고, 그렇지만 또 착하지 않은 행동을 할 자신은 없는 복잡한 감정이 착한 사람 콤플렉스다.


주위에서 특별히 착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착해야 한다’는 생각에 갈등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어릴 적 동생에게 장난감을 양보했을 때처럼, 착한 행동은 칭찬을 받게 한다. 누구나 그렇게 착한 행동에 대한 강화를 무수히 받으며 어른이 된다. 그러니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가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누구나 조금씩은 그렇지 않을까.


페어플레이 정신

다시 보자, 페어 플레이

2018년 러시아 월드컵 경기를 지켜보다가 “페어플레이 점수를 매긴다”는 말에 귀가 확 이끌렸다. 예선 경기를 모두 치르고 승점을 매겼는데 두 팀 이상 동점을 이루는 경우, 페어플레이 점수로 본선 진출 팀을 결정하기로 했다는 거였다. 월드컵의 의미에 어울리는 규칙이라는 생각에 무척 반가웠다. 그런데 예상 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예선 막바지 일본팀과 폴란드 킴의 경기, 일본팀이 지고 있는 상황에서 후반전 추가시간이 주어졌다.


그러나 일본 선수들은 뛰지 않고 하프라인 안쪽 자신들의 진영에 가만히 서있었다. 심판이 경기를 계속 하라는 손짓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해도 이미 16강에 진출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페어플레이 규칙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 조별리그 공동 2위에 올라 있던 세네갈보다 일본이 옐로우 카드 수가 적었기 때문이다. 스포츠 정신에 걸맞은 경기를 하라고 만든 페어플레이 규칙이 그렇게 활용되다니. 결국 야유가 쏟아졌지만 어쨌든 그 팀은 16강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 순간을 지켜보며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지금 저렇게 16강에 오른 선수들은 정말 뿌듯할까?’, ‘응원하는 사람들도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을까?’생각했다. 그러다 ‘저 선수들 중에도 이런 방식으로 경기를 끝내고 싶지 않았떤 사람이 분명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 해도 감독의 결정이나 지켜보는 사람들이 기대를 외면하는 것은 선수 개인에게 너무 힘든 선택이었을 것이다.


당장 TV를 틀어보자. 성공한 사람들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것은 둘째 치고, 그 사람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자세히 묻지도 않는다. 부나 명성을 쌓았다면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다. 약자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관심을 끌어모으는 유튜버도 억대 연봉이라며 부러움을 산다. 기업가나 정치인은 범죄 이력이 아무리 많아도 문제없이 더 출세한다. 우리는 어쩌면 은연중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명해지거나 부자가 되면 다 괜찮은 거 아닌가. 정의든 소신이든 어쨌든 지는 것보다는 이기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데 미디어도 한 몫을 하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원칙을 지키는 게 융통성 없고 손해를 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원칙을 지키고, 성실하게, 다른 사람을 배려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소심하고 융통성 없는 게 아니다. 내가 원칙을 지켜서 손해를 보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원칙을 어기고 부당한 이득을 얻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외눈박이 나라에서는 눈이 두 개인 사람이 이상한 게 된다. 누군가 분명히 잘못된 행동을 했는데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이익을 얻는 것을 본다면 ‘그렇다면 나도?’ 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다. 그런 일이 흔해질수록 규칙을 지키는 사람이 답답하고 손해 보는 기분이 들 수 있따. 이런 식으로 점점 느슨해지다 보면 우리는 어디까지 가게 될까?


페어플레이 정신을 가지는 것, 의무는 아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손해 볼 걸 감수하고서라도 무조건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먼저 달라져야 하는 것은 지독한 경쟁에 몰아넣고 승자에게만 박수를 보내는 세상이다. 지금도 자신의 경기장에서 외롭지만 당당하게 페어플레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박수받는 날이 얼른 왔으면 좋겠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