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어머니

   
데일 살왁(역:정미현)
ǻ
빅북
   
16800
2019�� 05��



■ 책 소개

 

글 쓰는 작가들에 쏟는 어머니의 애착과 역할, 그리고 영향력

 

만약 당신이 작가로서의 꿈을 실현시키고 싶다면 ‘어머니의 존재감’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DNA로 인하여 원초적 감성, 양가감정, 레트로적인 기시감 등은 작가의 작품에 어떤 형태로든 그대로 투영되기 때문이다. 위대한 작가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역할과 영향’은 작품 속에서 어떤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게 될까? 저마다 다르겠지만 분명한 건 특정한 부분에서 작가와 어머니는 서로 깊은 관련성을 맺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은 작가와 어머니 사이의 깊은 유대 혹은 때때로 복잡다단하게 얽힌 관계를 보여준다. 이언 매큐언, 마거릿 드래블, 앤드류 모션, 앤서니 스웨이트, 리타 도브를 비롯한 열아홉 명의 저자들이 바로 이 획기적인 책에 흥미로운 글을 보탰다. 이들은 셰익스피어부터 현대 작가에 이르기까지 여러 작가들의 위대한 문학적 소산에 끼친 어머니의 영향력을 조목조목 흥미롭게 되살려 풀어내고 있으며, 전기나 문학, 창작 전반에 관심이 있는 모든 독자들의 마음과 관심을 불러 모으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것이다.

 

■ 저자 데일 살왁
데일 살왁은 미국 서던 캘리포니아 시트러스 대학의 영문학 교수이다. 퍼듀 대학교의 자랑스러운 동문상을 수상했고, 미국 국립인문학재단에서 연구 지원을 받았다. 런던의 《Times Higher Education》과 《Times Educational Supplement》 등에 그의 글이 자주 실렸다.

저서로는 『Living with a Writer』와 『Teaching Life: Letters from a Life in Literature』, 킹슬리 에이미스, 필립 라킨, 칼 샌드버그, 존 웨인 등 여러 작가에 대한 연구서가 있다.

 

■ 역자 정미현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한양대학교에서 연극영화학을 공부했고, 뉴질랜드 이든즈 칼리지에서 TESOL 과정을 마쳤다. 오래 전에 교계신문사 기자로, 한때는 연극배우로 살다가, 지금은 번역가 겸 에이전트로 해외의 좋은 책을 찾아 소개하고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소로의 나무 일기』 『소주 클럽』 『WHY: 세 편의 에세이와 일곱 편의 단편소설』 『코리안 쿨』 『모든 슬픔에는 끝이 있다』 『중년 연습』 『여행지에서만 보이는 것들』 등이 있다.

 

■ 차례
여는 글

 

1부 작가의 어머니(Biography)
1. 가모장적인 셰익스피어의 어머니
2. 존 러스킨과 마거릿
3. 야심만만한 딸: 루이자 메이 올컷과 어머니 
4. 월트 휘트먼과 어머니 
5. 어머니의 품: 사무엘 베케트와 어머니 메이 
6. 실비아의 편지 손에 담긴 목소리와 페르소나
7. 에바 라킨의 일생
8. 로버트 로웰, 샬롯의 거미줄에 걸리다 

 

2부 작가의 회고록(Autobiography)
1. 어머니의 말: 회고록 
2. 숙명과 같은 ‘끈질긴 환영’ 
3. 엄마와의 끝없는 동행 
4. ‘그녀를 다시 내게 데려다 주오’
5. 어머니와 친구들 
6. 어머니의 책상 
7. 현명한 어머니 
8. ‘어머니는 일하러 가신다네’
9. 풀 그림자 
10. 가벳 아주머니의 책상 
11. 어머니의 장례식 안내지 

 

역자 후기 모태의 자장 안에서 평생을 서성인 작가들 
예비 작가를 위한 창작 노트

 




작가의 어머니


작가의 어머니(Biography)

가모장적인 셰익스피어의 어머니

위대한 업적의 이면을 살펴보면 재능 있는 여성의 공헌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마리 퀴리는 남편 피에르 퀴리보다 능력이나 업적에서 월등히 앞서 있던 사람이다. 엘리너 루스벨트는 정치ㆍ사회 분야에서 명실 공히 독자적인 입지를 구축하여 남편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필립 시드니가 누이동생을 위해 쓴 목가적인 산문 『아케이디아 Countess of Pembrokes Arcadia』는 여전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데, 메리 아든이 아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기여한 바를 언급하는 사람은 좀처럼 찾을 수가 없다.


셰익스피어의 어머니 메리 아든의 활기찬 성격으로 짐작컨대 셰익스피어가 대성공을 거둘 수 있던 잠재력에는 분명 어머니 메리 아든이 기여한 바가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부유한 아버지를 두었고. 비록 여덟 번째 자식이었음에도 아버지가 자신의 유언 집행자이자 제1상속인으로 지명한 딸이었다. 그녀와 남편 둘 다 문맹이었다는 견해도 있는데 이는 그들이 감당해낸 수많은 법적, 행정적 책임과 상충되는 것이다. 이 부부의 또 다른 공통점은 바로 뿌리 깊은 가톨릭 가문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전통 때문에 아든 일가는 사형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모계 쪽에 이와 같은 불행한 가족사가 있어서인지 셰익스피어가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견해를 개인적으로 드러낸 경우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사회적 지위 면에서 메리 아든은 남편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있었고 기질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확실히 기운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70여 년을 살았는데, 자녀를 여덟 명 출산하고도 남편보다 오래 생존했다. 그녀의 아들 셰익스피어가 인생과 작품에서 여성에 대한 높은 기대치를 기록으로 남긴 것을 보더라도 메리 아든은 여성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일종의 본보기가 되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가 여덟 살 연상인 여성과 결혼했다는 사실은 성적인 관계에서 여성의 우위를 받아들였음을 시사한다. 그의 『소네트집Sonnets』에 그려진 흑부인(dark lady)과의 불륜 관계에서도 남녀간에 이 정도 나이 차이가 난다. 이 작품에서 흑부인은 압도적으로 강한 주도권을 쥐고 있는 인물로 그려졌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살펴보면 그가 경험을 통해 여성에 대한 지식을 갖춘 면모가 드러난다. 그리고 재능 면에서나 업적 면에서 그와 가장 가까운 시대에 활동하던 다른 이들의 작품에서 어머니 캐릭터가 미미한 역할을 맡고 있는 것과는 달리, 셰익스피어가 그린 핵심 인물의 자리에 유독 어머니라는 역할이 굳건히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크리스토퍼 말로우나 벤 존슨의 유명한 희곡을 보더라도 어머니라는 여성의 가정 내 지위에 대하여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반면에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등장하는 수많은 어머니 역할은 가족 내에 어머니가 존재하든 부재하든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독특한 가족 구조가 형성되는 다양한 하위 범주를 만들어 낸다.


어떤 어머니는 말 그대로 너무나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하고, 또 어떤 어머니는 불행히도 존재감이 부재한 상황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사악한 어머니가 있는가 하면, 극의 줄거리 흐름상 행복한 해결책을 찾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어머니도 있다. 그리고 줄리엣이나 오필리아, 코델리아 같은 비극적인 인물에게는 든든한 힘이 되어주는 어머니가 부재하기도 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등장하는 문제의 어머니 캐릭터 중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가족의 행복, 그리고 특히 아들의 행복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어머니라는 점이 확실히 눈에 띈다. 『존 왕 King John』에서 콘스탄스는 아들 아서에게 잉글랜드 왕위가 돌아가도록 무자비할 정도로 밀어붙인다. 아들 햄릿에 대한 거트루드의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병적인 집착 때문에 햄릿은 어머니의 동태를 신경 쓰느라 머리가 복잡해지고 이성적으로 처신하는 기능에 제동이 걸려 급기야 어머니의 침실에 있던 폴로니어스를 죽이기에 이른다.


역설적으로 이처럼 남성의 자율성에 거의 병적으로 간섭하는 모습이야말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더 긍정적인 어머니 캐릭터가 지닌 특징으로 나타난다. 『끝이 좋으면 다 좋아 Alls Well』에 나오는 백작부인이 그러한 유형에 속한다. 그녀는 피후견인인 헬레나가 자기 아들 버트램을 사모하는데 아들은 이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버트램을 꼼짝 못하게 할 방법을 궁리하는 인물이다.


셰익스피어의 후반기 작품에는 이처럼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또 다른 권위 있는 어머니들이 등장한다. 아마도 1608년에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즈음이나 그 이후에 쓰였을 『페리클레스』와 『겨울 이야기』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페리클레스』를 보면 죽은 것으로 보이는 사이자가 나온다. 남편 페리클레스 때문에 바다에 수장 당했지만 다시 살아났고 자신을 구조한 사람들에게 여사제로 모셔진 인물이다. 결국 극의 말미에는 자신이 죽은 줄 알고 애도하던 남편에게로 돌아간다. 이러한 부활 장면은 『겨울 이야기 The Winters Tale』의 헤르미오네가 죽음에서 돌아올 때 한층 더 인상적인 방식으로 다시 등장한다. 또한 그녀의 부활이 그 형상에 의해 인간의 초월성을 암시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초월성은 이른바 ‘동정녀’라는 대단히 사랑받는 예술적 주제의 핵심이며 티피아노와 루벤스 같은 화가들이 선호한 주제이기도 하다.


메리 아든이 죽은 후에도 어머니 캐릭터가 부활하는 이런 패턴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 셰익스피어가 극중 인물에 맞먹는 숭배 받는 인물이 된 자신의 어머니와 같은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선택지로 그 방법을 생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작품 활동 내내 어머니라는 역할에 가장 지대한 관심을 쏟으며 인물들을 재현해냈다. 이는 생전에 활력이 남달랐던 어머니를 겪은 자신의 경험에서 구체화된 것이 분명하다.


월트 휘트먼과 어머니 

루이자는 목수와 결혼해 자식을 아홉 명 낳았다. 스물네 살 때 둘째 아이 월터를 출산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모자간에 주고받은 편지 300여 통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편지 중에 170통은 루이자가 월터에게 보낸 편지였다. 어머니와 아들은 외모가 닮았을 뿐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비슷한 면이 아주 많았다.


월트는 어머니를 숭배하다시피 했다. 그는 「포마녹에서 출발하며 Starting From Paumanok」라는 시에서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며 ‘완벽한 어머니가 키워주셨다’라는 표현을 쓴다. 그런데 어머니 루이자를 향한 열렬한 사랑이 시와는 별개로 존재했다. 그와 어머니가 아주 친밀한 관계였다는 사실은 시에서 직접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번은 그가 “‘풀잎’은 내 안에서 움직이는 그녀의 기질이 피어난 것”아리고 말했다. 루이자는 정작 자신이 진가를 알 수 없는 어떤 것에 자기도 모르게 영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월트와 루이자가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서로의 건강을 염려하는 내용이 많다. 어느 날 그가 목이 아프거나 현기증이 나서 몸 상태가 안 좋은 느낌이 든다고 어머니에게 이야기했던 모양이다. “월트야, 혹시 네가 어디 아프거나 뭔 일이라도 있으면 즉시 알려주길 바란다.”그녀는 월트에게 편지를 쓸 때 자신의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나 현기증에 대해 자주 언급하곤 했다. 그 증상으로 고통을 겪을 때와 차도가 있을 때 모두 월트에게 알렸다. 루이자는 류머티즘이 자주 도져서 한쪽 손과 팔을 못 쓸 때가 많았다. 월트는 어머니에게 쓴 편지에서 “어머니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에요. 말씀하시는 것보다 많이 편찮으신 것 같아 걱정입니다. 밤낮으로 어머니 건강에 대한 염려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네요.”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때도 어머니의 신체적인 건강과 마음 상태를 자주 언급하면서 어머니가 늘 활기차고 기분 좋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썼다.


1862년 말부터 그는 워싱턴에서 정부의 기능직 공무원으로 10년간 일하기 시작했다. 내무부의 인디언국에서 서기로 일하다가 법무장관 사무실에서 공식 문건 필경사로 일했다. 워싱턴은 전시에 중요한 도시로 탈바꿈해 부상병 수천 명을 돌보는 거대한 병원이 되었다. 주로 서기 업무를 보던 월트의 일정상 부상병 치료를 도울 짬이 나서 1863년 1월에 병원 일을 시작했다.


월트는 전시 근로에 참여하는 시간이 많아 아무리 바쁘더라도 ‘나의귀하신 분, 나의 어머니’의 건강을 늘 걱정했다. 루이자 입장에서는 아들의 사랑이 필요했고 그가 같이 있어 주길 원했다. “월트야, 에미를 보러 올 수 없겠니? 네가 올 수 있다면 정말 좋겠구나. 네가 휴가라도 내면 그럴 수 있잖니.”월트는 이따금 워싱턴에서 하는 일을 잠시 접고 어머니가 계신 브루클린, 나중에는 뉴저지의 캠던으로 가서 어머니와 함께 지낼 수 있었다. 월트와 루이자는 집에 있을 때 늘 아침 식사를 함께 했다. 월트가 이런 내용을 쓰기도 했다. “정말 최고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엄마가 만든 커피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 메밀 요리도 마찬가지고.”


월트는 문필 생활과 서기 업무에 열의를 다하던 와중에도 점점 연로해지는 어머니의 나이를 결코 잊은 적이 없었다. “사랑하는 어머니, 점점 더 쇠약해지신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밤낮으로 생각하며 산다.” 월트는 1873년 1월에 워싱턴에서 평소처럼 업무를 보다가 뇌졸중이 와서 어지럽고 구역질이 나고 부분적으로 마비되는 증세를 겪었다. 몸도 마음도 고통을 겪으며 허약해진 자신을 느꼈지만 며칠 간격으로 꼬박꼬박 차도가 있다는 편지를 어머니에게 부쳤다.


월트가 자신의 회복 가능성에 자신감이 들기 시작할 즈음 어머니는 점점 쇠약해졌다. 그는 서둘러서 캠던으로 향했고 며칠 뒤 5월 23일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가 뇌졸중을 겪은 지 넉 달 뒤의 일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워싱턴으로 돌아가 몇 주간 지냈지만 너무 우울하고 불안한 마음이 깊어져 두 달간 휴직 허가를 받아 도망쳐버리듯 캠던으로 돌아왔다. 거기서 그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사랑한’어머니의 집에서 살면서 종종 어머니의 낡은 안락의자에 앉아 있곤 했다.


이제 쉰네 살이 된 월트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깊은 상실감을 안겨주는 사건이었다. “매일 밤낮으로 어머니 생각이 난다.”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는 마음이 공허함으로 가득했다. 어머니의 죽음이 여전히 그의 마음에 선명하게 각인돼 있던 7월에는 “시간조차도 내게 드리운 암운을 전혀 거둬 가지 못하는구나.”라고 적었다. 새해가 되었는데도 월트의 마음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매일 밤낮으로 어머니 생각이 난다. …… 그 생각이 나의 남은 생을 계속 단련시키는 것 같다.”루이자가 죽은 후 1년 뒤 5월에도 슬픔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는 슬픔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어머니는 정말 유쾌한 여인이었는데…….”


월드 휘트먼은 어머니 이상의 무언가, 말하자면 다정한 버전의 또 다른 자신을 상실한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어머니와 나. 오! 우리는 멋진 친구였었지. 항상 서로의 곁에 머물러 있던 친구, 언제나 함께한 친구!”



작가의 회고록(Autobiography)

엄마와의 끝없는 동행
 

애초에 엄마와 같이 살 마음은 없었다. 그건 불가항력적인 일이었을 뿐이다. 내가 열여덟 살 때, 그 당신 내가 독립하는 게 가능했던 이른 기회가 바로 그 무렵이었다. 집을 떠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에든버러 대학교에 가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수술에 마음이 끌린 적이 없었지만 거기서 의학을 공부해서 일반의나 내과의사가 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술술 풀릴 운명이 아니었다. 열여섯 살이 되고 반년이 더 지났을 때 나는 아주 심각한 신장 질환을 앓고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나중에야 ‘신장 증후군’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는 병이었는데, 그때는‘엘리스 타입 투(Ellis Type Two)로만 알려져 있었다. 당시에는 치료법이 없어서 나를 담당한 모든 의사들이 극히 비관적인 시각으로 경과를 지켜보았다. 이렇게 어머니는 병든 딸을 책임지게 되었고 그 후 내가 회복될 때까지 오랜 세월 내 곁을 지켜주셨다. 사실 어머니가 여든 다섯의 나이로 돌아가실 때까지 나는 일평생 어머니와 함께 집에서 지냈다. 아버지 역시 돌아가실 때까지 그랬다. 


아득히 먼 그 시절에는 일반 진료를 하는 의사가 주로 집에서 따로 진료실을 두고 업무를 보았다. 말하자면 우리 가족은 일터에서 먹고 자고 한 셈이었으니 환자들의 병은 거의 대부분 가족 모두 잘 아는 주제였고 일상적인 대화의 일부였다. 우리 집에는 현실과 동떨어진 ‘사색의 공간’이란 게 아예 없었다. 창작 활동을 할 신성한 공간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런 집안 분위기 속에서도 내가 키워 나갔던 중요한 자질 한 가지가 있는데, 아무리 숱한 방해를 받더라도 글을 쓰는 법을 터득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와병 생활을 하며 어머니가 절실히 필요했던 사람은 바로 나였다. 어머니가 나이 들고 나약해져 우리의 역할이 바뀌고 내가 어머니를 돌보게 된 것은 한참 나중의 일이었다. 연로한 부모와 함께 살며 집에서 일할 때 얻는 뜻밖의 일들이 있다. 멀리 떨어져서 가족의 상충하는 요구사항에 대처하려고 애쓰느니 차라리 곁에서 살피는 보호자가 되는 편이 충격이 훨씬 덜하다는 점이다. 내가 이러한 오랜 관계 속에서 특별하게 얻었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절제된 유머 감각을 파악한 것이다. 확신컨대 이 덕분에 내 글쓰기가 지금까지 풍자의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어머니의 영향력은 아주 은근하게 작용했고 어머니의 유머는 예리한 귀에만 포착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확신이 잘 안서는 부분이 있다. 어머니가 직접적인 의견을 입 밖에 내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다양한 주제에 대한 어머니의 생각을 여전히 잘 모르겠다. 어머니는 논쟁을 매우 싫어했고, 아무리 이론적인 사안이라 해도 언쟁에 휘말리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는 누군가가 언급할 만한 내용에 대해 언제든 논의가 가능한 자문 역할에 제격이었다. 특히 의학적 문제와 약제, 물리학 분야에서 도움을 받았다. 어쨌거나 누구든 언쟁을 벌이기 마련이지만 어머니는 생전 그러질 않았다.


나는 선천적으로 직관이 뛰어난 사람과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았는데도 어머니가 모든 역경을 딛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항상 놀랐다. 그래서 나는 작품 활동을 후반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내 소설 속 가상 인물의 행동이 철저히 논리에 부합해야 하고 그들이 본능이나 직관에만 의존해서 결론을 내리지 않도록 상당히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내가 어머니 슬하에서 확실히 배운 한 가지 지혜는 바로 적당히 속임수를 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탐정 소설을 쓰는 데 아주 귀중한 자질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누구 때문인지 정확한 대상은 절대 거론되지 않았지만 나를 부엌에 들이지 않으려고 작정한 듯 음식 재료가 꽁꽁 숨겨져 있었고 조리 도구도 똑같은 장소에 두 번 이상 똑같이 비치된 적이 없었다.


나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손바닥 보듯 훤히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나에 대해서도, 나의 사고방식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범죄 소설 쓰기 원칙에 따르면 초반의 도입 부분인 3장 안에 살인범의 정체를 알려주는 충분한 단서가 제시되어야 한다는데, 나는 이 원칙을 엄격히 고수하며 글을 썼고, 어머니는 이 초반 3장을 꼭 읽곤 했다. 그러고는 살인범 이름을 종이에 적어서 내가 못 보도록 봉투에 넣어 잘 밀봉해 두었다. 몇 달 뒤 내가 정식으로 원고를 마무리한 후에 우리 모녀가 유난스레 격식까지 갖추며 함께 봉투를 개봉해서 확인해 볼 때면 어머니가 지목한 바로 그 악당이 언제나 범인으로 드러났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이런 순간이 너무나 그리워졌다.


‘그녀를 다시 내게 데려다 주오’

W.E.헨리의 작품에서 빌려온 이 제목은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보내준 책에 있는 명구의 일부분이다. 그 책은 1942년에 제인 카턴이‘엮고’파버앤파버에서 출간한 『아이의 화환 A Childrens Garland』이었다. 내가 그 해 크리스마스에 책을 받았을 때 어머니와 나는 19,000킬로미터 넘게 떨어져 있었다. <타임즈>지의 기자인 제인 카턴이 여덟 살이던 자기 딸 폴리를 위해 시와 성경구절을 모아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폴리와 남동생이 1940년 여름에 캐나다에 갔던 바로 그 무렵에 나는 남동생하고 어머니와 함께 부모님의 고향인 뉴질랜드로 향하는 훨씬 긴 여행길에 올랐다. 우리가 영국을 떠난 이유는 폭격을 피하기 위해서였기도 하고 그 위험했던 여름에 적군의 침공이 임박한 것 같아서였다. 그때 나는 열 살이었다. 어머니가 뉴질랜드에서 우리를 남겨둔 채 군대 수송선에 몸을 싣고 위험한 귀환 여정에 올라 런던에 있는 아버지에게 돌아간 지 거의 1년이 지났을 시점이었다. 이 여정은 그야말로 용기가 필요한 어려운 결정이었다. 또 다시 3년 반이 지나고 전쟁이 끝난 후에야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이 서로 떨어져 지낸 세월이 긴데도 오래도록 상처 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가족 모두 글을 쓰는 데 피해는 주지 않았다는 사실 덕분이었다. 내 남편 앤서니도 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 오랫동안 어머니를 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우리 부부는 유대감을 느꼈다. 우리 둘 다 생각하기를, 이렇게 가족과 떨어져 있었던 시기가 오히려 우리를 강인하고 독립적인 사람으로 만든 것 같다.


『아이의 화환』은 내게 특별히 중요한 책이다. 내가 아주 좋아했던 소설(메리 에블린 앳킨슨이 쓴 많은 책)과는 달리 이 책은 영문학 입문서 같은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책에서 익숙한 몇몇 시와 성경 이야기를 읽었는데 무엇보다도 훗날 일생 동안 내게 크나큰 의미로 다가올 많은 작가들의 글도 접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더 크다.


어머니가 내게 준 또 한 가지 큰 선물이 있다. 그 덕분에 나는 전기 작가로서 큰 도움을 받았다. 어머니는 내게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었고 그래서 나는 자연스레 그들을 역사책에나 존재하는 머나먼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시대에 존재하는 사람처럼 여기게 되었다.


우리는 1945년 7월 5일 선거일에 영국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우리 가족의 문제를 가볍게 언급하고 넘어갔다. ‘짐작했던 대로 우리는 다시 정상적인 가정생활로 돌아가기까지 다소 어려움을 겪었다.’나는 거의 열세 살이었고 스스로 다 자랐다고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열네 살 때 쓴 첫 소설「역에서 당신을 만나다 Meet you at the station」를 1948년에 <엠파이어 유스 애뉴얼 Empire Youth Annual> 잡지에 발표했다. 나는 이 소설을 써서 정식으로 원고료를 받았다.


이듬해인 1949년에 어머니가 유일하게 쓴 책 『뉴질랜드의 젊은 여행자 The Young Traveller in New Zealand』가 피닉스 하우스의 출간 시리즈 중 한 권으로 출간되었다. 어머니가 어떻게 의뢰를 받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오랜 세월 일기를 적으며 글쓰기에 단련된 사람이었고 어머니가 책을 낸 게 나로서는 더 없이 좋은 일이었다.


나의 첫 번째 책 『일본의 젊은 여행자 The Young Traveller in Japan』는 우리가 영국으로 돌아간 해인 1958년에 출간되었다. 우리 첫째 딸에게 바치는 책이었다. ‘일본에서 태어났고 언젠가 이 책을 읽게 될 에밀리 제인에게.’ 이 책을 필두로 그 후에 많은 책이 나왔다.


지금에야 드는 생각인데 그때부터 나의 어머니는 당신이 품었을 꿈은 제쳐두고 내가 작가로서 성장하도록 힘을 북돋아 주고 지원하는 데 전력을 쏟은 것 같다. 육아를 도와주고 내 원고를 읽어주고 내가 훨씬 수월하게 작가가 될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빚진 게 너무 많다.


‘어머니는 일하러 가신다네

나는 어머니에게 옷과 관련한 수많은 기술을 배우며 자랐다. 다림질하는 방법, 내 옷을 직접 수선하고 바느질하는 방법 같은 것……. 나와 형제자매들은 언제나 옷차림이 훌륭했고 어머니의 기적 같은 작업 성과물에는 어김없이 찬사가 쏟아졌다. 어머니는 낡은 코드 안감으로 부활절 드레스를 만드는 요술을 부리는가 하면 코트를 자그마한 블레이저와 조끼로 나누어 재탄생시켰다. 나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점차 자유를 누리게 되어 단순한 스타일에다 내 나름대로 마음껏 변화를 줄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든 결과물에 엄청 뿌듯함을 느꼈다. 친구들이 내가 그 옷들을 디트로이트 같은 어딘가 이국적인 곳에서 산 줄 알았을 때 특히 그랬다.


나의 어머니 엘비라 엘리자베스 도브는 1924년에 오하이오주 애크런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부모님은 노동자 계층이었다. 빈곤한 남부 시골 지역에 살던 미국인 수천 명이 오대호를 따라 군데군데 흩어져 있던 공장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좇게 되었고 그 대규모 이주 열풍이 낳은 산물이 바로 나의 외조부모님 같은 노동자들이었다. 4남매 주 맏이인 어머니는 공교육을 받았다. 두 번 월반한 후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았고 열여섯 살에 하워드 대학교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들어갈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놀랄 만큼 일찍 꽃피운 어머니의 재능은 안타깝게도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범죄가 만연하는 수도의 길 한복판에서 열여섯 살 소녀가 혼자서 제 갈 길을 잘 찾아갈 수 있을까? 어림도 없다! 어머니의 부모님은 다른 면에서는 다정하고 마음이 넓었지만 맏딸에게 험한 일이 생길까 두려운 나머지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어머니는 너무 어렸고 게다가 여자였다. 엘비라는 장학금을 포기해야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대학 진학을 계획 중인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다. 어머니의 모험이 좌절되었던 바로 그 나이였다. 깜짝 놀랐다. 어떻게 조부모님은 어머니가 그토록 특별한 기회를 포기하게 만들 수 있었을까? 나의 독선적인 십대의 머리로는 어머니가 경제적 생존을 위해 의지할 수밖에 없던 집에서 배운 기술조차 왠지 더럽혀진 것처럼 보였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옷 만드는 기술은 어머니가 성별 때문에 포기해야한 했던 미래를 자꾸 떠올리게 했다.


나는 70년대 초반에 싹을 틔우기 시작한 페미니스트로서 이러한 모순된 상황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했다. 나는 어머니가 잃어버린 기회가 낳은 산물이었다. 나와 같은 인종이 겪는 고군분투와 나의 조부모가 처했던 하층민의 삶과 성별의 속박을 넘어서는 끊임없는 도전의 여정에서 사다리의 다음 칸을 오르는 것은 이제 내 순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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