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그의 인생 이야기

   
슈테판 폴라첵(역:주랑)
ǻ
이상북스
   
15000
2019�� 03��



■ 책 소개

 

반 고흐와의 새로운 만남!
지독한 가난과 외로움, 거절의 연속이었던 그의 삶을 소설적 이야기로 재구성하다

 

기자 출신의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폴라첵은 예민한 감수성과 해박한 지식을 토대로 반 고흐에 대한 전기 자료와 막대한 문화, 역사, 사상 관련 자료들로 그의 생애를 재창조했다. 저자는 주로 실제 예술가의 생애를 다룬 작품들을 발표했는데, 일상의 소소한 대화를 살려 이야기를 꾸려 나가는 재주가 특출하다.

 

이 책은 반 고흐의 유년기부터 장례식이 치러진 그날 1890년 7월 29일까지의 삶 전체를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낸다. 반 고흐 삶의 주요 순간들을 주변 인물들과의 대화를 통해 풀어냄으로써 그의 운명과 광기 그리고 정열이 더욱 온전히 전해진다. 그래서 사뭇 진지하고 어두운 그림자만 드리웠을 것 같은 비운의 화가의 삶을 조금은 편안하게 하나의 인생 이야기로서 마주할 수 있다.

 

■ 저자 슈테판 폴라첵
저자 슈테판 폴라첵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기자이자 작가이다. 1930년에 첫 소설을 발표한 이후 주로 실제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 형식의 평전을 많이 발표했다. 그의 작품은 특히 대화가 많은 것이 특징인데, 이 책 『빈센트』에서도 반 고흐의 남겨진 편지와 비평 글들을 토대로 소소한 대화 장면을 실감 있게 되살려냄으로써 지금까지 주로 인도주의자 혹은 예술의 순교자로만 기술되던 반 고흐의 세속적인 면까지 속속 드러냈다. 능란한 대화 기술과 세심한 이야기를 조화롭게 꾸려 나가는 작가의 솜씨로 반 고흐의 일생을 새롭게 만나볼 수 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에서 예비장교로 세계대전에 참가하기도 했던 폴라첵은 전쟁 후 런던에서 무국적 망명자로 살다가 사후 자신의 바람대로 유태인 묘지에 묻혔다.

 

■ 역자 주랑
역자 주랑은 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했고, 대학 졸업 후 출판사 편집부에서 십 수 년간 근무했다. 지금은 프리랜스 편집자 및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 차례
00. “이제… 돌아가도 좋다고 말해 줘요”
01. “난 천성이 악하고 비열한 인간이야”
02. “나는 왜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지 못할까”
03. “아무튼 난, 그림은 그릴 수 있을지 모른다”
04. “어떻게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05. “이렇게 섞으면 섞을수록 색채의 변화는 무궁무진하다”
06. “내가 도달한 곳은 기껏해야 가련한 딜레탕트에 불과한 걸까?”
07.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노랑이야!”
08. “오직… 그림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어”
09. “우리 인생은 늘 예상보다 가혹하지요”
10. “형은 이제야 그토록 원하던 평화를 얻었네”  

빈센트 반 고흐 연보

 




빈센트 : 그의 인생 이야기


나는 왜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지 못할까

빈센트가 머무는 몽마르트의 방은 쾌적했다. 그곳에 그는 렘브란트의 염가판 동판화나 그 복사판을 몇 장 걸어두었다. 특히 <얀 식스의 초상> 앞에서 빈센트는 곧잘 깊은 생각에 빠져들곤 했다. 또 방 한 쪽에는 기도 책상을 사다놓았다. 빈센트는 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처럼 목사가 되어야 했을까? 아니면, 생활을 위해서라면 남을 속이는 일도 마다않는 상인으로 충실히 살아가야 하는 걸까? 화랑에서의 모든 일들이 그에게는 속임수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교활하면 교활할수록 존경받고, 돈을 많이 벌면 벌수록 더 일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화랑의 총책임자로 일하는 부소와 발라동은 구필의 사위로 대단한 수완가들이었다. 그들은 가난한 화가들의 그림을 턱없이 싸게 사서는 돈 많은 손님들에게 매우 비싸게 팔아넘겼다. 굶주린 화가에게는 그림값으로 20프랑도 안 되는 돈을 주고, 그것을 150프랑 넘는 값에 팔아 치우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빈센트는 진저리를 쳤다. 게다가 부소는 마치 자신이 하나님이라도 되는 듯한 표정으로 가난한 화가들을 대했다.


빈센트는 갑자기 교회에서 조용히 기도하며 생활하는 아버지가 부러워졌다. ‘아버지는 미술이 이런 식으로 모독당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아니,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줄 모를 것이다. 인생 위에 높이 솟아오르려면 날개가 있어야 한다. 기도와 인내와 신앙이라는…. 아버지에게는 아버지 인생의 빛인 성경이 아버지에게 날개를 부여했다.’


그날 빈센트는 온종일 그 생각만 했다. 밤이 되어 테오에게 편지를 쓸 때도, 장화를 닦고 있을 때에도. ‘신에 대한 믿음이 있고, 그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신앙심이 있는 사람이야말로 예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신앙이다.’


그는 도저히 그림 장사를 참아낼 수 없었다. 화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잠자코 넘기기 어려웠다. 엊그제도 가슴에 훈장을 잔뜩 단 장교에게 시시한 그림을 비싼 값에 팔았다. 빈센트는 그 수단 좋은 판매원과 그를 칭찬하는 부르동을 참을 수 없었다. 모두 한통속이 되어 남의 돈을 빼앗고 있다고 생각하니 밤이 되어서도 울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미술상이 아니라 강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빈센트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저는 공부를 많이 해서 될 수 있는 목사는 도저히 못 될 것 같습니다. 이제 보니 제 머리는 학문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저는 제가 보잘것없는 인간인 것을 알기에 겸손하게 살아가려 합니다. 정식 목사는 될 수 없으니 선교사가 되어 보리나주의 가난한 갱부들에게 설교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증명서도 필요 없고,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알지 못해도 됩니다. 그저 석 달 동안 브뤼셀의 신학교에서 공부하면 됩니다. 그곳은 수업료가 전혀 없으니 먹고살 수 있는 최소한의 비용만 있으면 됩니다. 이것이 가장 좋은 방법 같습니다. 끊임없이 고뇌하는 인간인 저로서는 역시 가난하고 고뇌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무튼 난, 그림은 그릴 수 있을지 모른다

빈센트는 브뤼셀의 고물상에서 스케치북을 한 권 사 두었다. 오래된 네덜란드제로, 그림 그리기에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스케치북에는 모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이 갱부들의 모습과 기계와 풍경을 그린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이 그림들은 모두 어떻게 그려진 걸까? 누가 마술이라도 부린 걸까? 아니다. 그건 얼토당토않은 생각이다. 그럼 누구일까? 나? 아니다. 나는 화가가 아니다. 나는 그림을 그릴 줄 모른다. 하지만 나도 예술이란 걸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다, 주제넘은 생각이다. 나는 그저 여기 앉아 여러 떠오르는 걸 휘갈겨 그렸을 뿐이다. 그것으로 화가라도 된 줄 생각하는 나는 정말이지 바보다. 그렇지만 나는… 아무튼 그림은 그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빈센트는 브뤼셀 상부로부터 호출 통보를 받았다. 돈이 떨어진 그는 빵 굽는 여자 집의 셋방에서 저녁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당신은 잘못된 행동을 했소. 갱부들에게 그리스도인다운 인내를 가르치는 대신 그들을 선동했소. 그리고 그들이 파업을 일으켰을 때 그들의 뒤를 밀어주었소.”


빈센트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갱부들은 너무 가난해서 끼니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옷이나 신발을 살 돈이 없어 너덜너덜해진 것을 겨우 걸치고 삽니다. 그들이 갱도에서 목숨을 걸고 일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의 고된 노동은 오직 탄광업자들의 이익을 위해서입니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입니다. 당신이 증명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불평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절대로 그런 일을 그대로 넘길 수 없습니다. 말이 안 됩니다. 도저히 방관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입 닥치시오. 그리고 앞으로 이런 일을 다시 만들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당신은 이제부터 설교를 할 수 없소.”


빈센트는 틈나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종이는 너무 비쌌고, 캔버스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게다가 그림을 그리려면 물감과 붓도 필요했다. 무얼 하나 하려 해도 필요한 물건투성이인 이 세상이 참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섞으면 섞을수록 색채의 변화는 무궁무진하다

빈센트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인물화는 좀처럼 마음먹은 대로 그릴 수 없었다. 몇 번을 다시 그려도 생기가 생겨나지 않았다. 특히 손과 손가락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이 어려웠다. 한 장 한 장 그려나갈 때마다 빈센트의 그림 솜씨는 나아졌지만, 그만큼 그는 자신의 솜씨가 부족하다는 것을 더욱 또렷이 느꼈다.


‘역시 미술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했어야 했나, 교수들을 멸시한 것은 어리석음의 소치였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석 달 동안 100장의 그림을 그렸다.


‘색을 혼합하는 일은 얼마나 신비하고 매력적인 일인지… 황색과 짙은 보랏빛을 섞고, 거기에 검정색과 흰색을 섞으면 갖가지 회색이 만들어진다. 온갖 색들을 어둡게 할 수도 밝게 할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색조를 내게 할 수도 있다.’


물론 그는 마음껏 색의 혼합을 시도해 볼 수 없었다. 그렇게 하려면 엄청난 돈이 필요했다. 정말이지 울화가 치밀 정도로 많은 돈이 들었다. 아무리 먹을 것을 절약해도 물감 값은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그의 그림은 한 장도 팔리지 않았다. 어쩌다가 다른 화가의 작품과 교환이나 할 수 있을 뿐. 테오가 파리에서 아무리 빈센트의 그림을 팔아보려고 애써도 번번이 헛일이었다.


‘언제쯤 돈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대도시에 가면 무슨 수가 생기지 않을까? 초상화라도 그리면 꽤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있을 텐데… 돈 많은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면 어떨까? 앙베르는 어떨까? 그곳에 가면 미술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 드는 돈은 또 어떻게 마련한단 말인가. 다른 화가들과 아틀리에를 같이 쓰며 모델도 공동으로 사면 어떨까? 이 계획에 대해 테오는 어떤 말을 할까? 그리고 그 애는 또 돈을 보내줄까?’


테오는 이번에도 돈을 보내왔다.



내가 도달한 곳은 기껏해야 가련한 딜레탕트에 불과한 걸까?

빈센트가 파리로 오자 테오는 새 집을 얻었다. 빈센트에게는 그림을 그리기 위한 아틀리에가 따로 필요했고, 그 외에도 테오와 빈센트가 함께 지내기 위해서는 빛이 잘 드는 방이 둘 또는 셋쯤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테오가 말했다.


“매주 금요일마다 몽마르트의 카페 프랑수아에 화가와 시인들이 모이는데, 거기 한번 가보면 어떨까? 파리의 화가들과 사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 나도 종종 가거든. 내일 같이 가보자.”

“내가 어떻게 모네나 피사로, 르누아르, 세잔 같은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겠니? 그들과 나는….”

“형, 형도 충분히 그들과 어울릴 수 있어. 안 될 이유가 어디 있어?”


그는 언제나 고갱의 그림에 대해 경탄했다. 그의 그림 속에는 빈센트 자신이 도저히 해낼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빈센트가 지닌 것보다 훨씬 고귀한 것처럼 보였다. 고갱의 그림은 내면에 고요한 빛을 가득 품고 있었다. 빈센트는 고갱이 지닌 그 정적에 도저히 이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정말로 확고하게 대지를 밟고 서 있었다.


빈센트는 점점 침울해졌다. 로트렉이나 베르나르 같은 사람들에게도 찾아가지 않고 그림 그리는 일에만 열중했다. 테오는 그런 형의 그림에서 풍기는 심각한 우울함이 걱정되었다. 차라리 형의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 상대가 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빈센트는 테오가 집에 있을 때에도 방 한구석에서 파이프를 문 채 생각에 빠져 테오가 말을 건네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테오는 그런 침묵이 견디기 어려웠다.


빈센트의 상태를 걱정하던 테오는 안면이 있는 젊은 의사에게 4-5일에 한 번씩 방문 진료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의사는 빈센트를 진찰한 후 빈센트가 없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증세가 복잡해 보입니다. 당신 말에 의하면 형님의 소년시절은 마비성 치매나 정신분열증 징후를 보입니다. 물론 이것을 부정할 만한 요인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젊을 때 광신적 경향이 있었다는 점과 생각이 깊고 말이 없는 스타일이라는 점, 또 타인에게 헌신하는 경향성이 짙다는 점 등이 모두 마비성 치매의 징후입니다.”


테오는 빈센트가 정말 몹쓸 병에라도 들었을까 봐 걱정이 태산 같았다.


‘오늘은 형이 조금 쾌활하다. 보통 밤보다는 아침에 활기가 더 있다. 어제보다 오늘 식사도 더 잘한다. 그런데 술을 마시는 건 좋은 징후일까, 나쁜 징후일까? 요즘 형은 예전보다 더 노란 빛깔에 심취한다. 이렇게 밝은 빛깔을 선호하는 건 형이 심리적으로 안정되어 가고 있다는 징후 아닐까?’


테오는 빈센트의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했다. 빈센트의 우울함은 차차 사라지는 것 같았다. 빈센트는 다시 카페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리고 에밀 베르나르로부터 아스니에르에 있는 그의 부친에게 놀러오라는 초청도 수락했다. 테오는 이제 형이 살아났다고 생각했다. 그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마음을 놓았다.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노랑이야!

아를의 여인들은 아름다웠다. 빈센트는 이틀 동안 벌써 그림을 석 장이나 그렸다. 다시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어두운 그림자가 깨끗이 사라졌다. 아를의 아름다움은 그에게 경이로움을 안겨주었다.


빈센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늘 테오의 편지를 가져다주는 소크라테스처럼 생기고 웬만한 철학자 따위보다는 확실히 현명한 우체부 롤랑과 언제나 웃는 얼굴의 잡화상 마르지오, 전에 배우 노릇을 했다며 능청스럽게 점잖 빼며 익살스런 이야기만 하는 주정뱅이 정도였다.


“롤랑, 난 늘 자네를 철학자라고 생각했어. 자네 머리는 정확하고… 또 자네 머리는 소크라테스처럼 생겼으니까. 자네가 처음 내게 편지를 가져왔을 때, 난 자네라는 인간을 정확히 알 수 있었지. 고갱도 아마 자네를 만나면 좋아할 걸세.”

“고갱? 그게 누군가?”

“전에 내가 말했잖아. 친구가 오길 기다린다고. 바로 그 친구야.”


고갱이 왔다. 바로 얼마 전 편지에 병이 났다고 전해 왔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는 운동선수처럼 크고 건장한 몸집에다가 생각도 행동도 매우 건강한 편이다. 그는 실제적이고 빈틈없으며, 생활력도 왕성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그는 물건 값이 가장 싼 도매상을 찾아냈고, 손수 나무로 그림틀도 만들었다. 무슨 일이든 직접 했다. 그리고 여러 방면의 사람들과도 이내 친해졌다.

고갱이 도착한 바로 그날부터 둘은 함께 일을 시작했다. 포도 산에서 포도 따는 사람들을 그렸는데, 빈센트는 고갱의 작품에 감탄했다. 자기에게는 없는 점을 고갱의 그림 속에서 보고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제재(題材)를 정리하고 분류할 때의 냉정과 세밀한 배려, 그림에 나타나는 아주 선명한 느낌 등이었다. 빈센트는 고갱의 작품을 열광적으로 찬양했다.


하지만 빈센트는 고갱이 자기의 그림에 대해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아서 감정이 상했다. 고갱은 오랫동안 빈센트와 이야기하면서도 그의 그림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빈센트의 작품에 대해서는 마치 그 존재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였다. 빈센트는 마음이 몹시 불편했지만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고갱의 태도는 매우 삐딱했다. 그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물론 드가나 모네, 피사로, 세잔 같은 대가들에 대해서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폴이 그 조롱하는 듯한 말을 하기 시작하면 빈센트는 뛰쳐나가 버리고 싶었다. ‘이 고갱이라는 놈은 악마다. 이놈은 도대체 왜 모든 것에 대해 이토록 헐뜯기만 하는 걸까.’


두 사람은 이젤 앞에 앉았다. 빈센트는 손을 떨면서도 두 시간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고갱이 일어서며 말했다.


“그런데 자넨 대체 무얼 그리는 거야, 빈센트.”

“자화상.”

“그래?”

“왜 맘에 안 들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왼쪽 귀를 잘못 그린 것 같아서….”


“이렇게 그리면 돼. 내 귀는 이렇게 생겼어!”


빈센트는 악을 썼다.


“자네 생각은 참 독특하군.”


고갱은 이렇게 말하면서 모자를 썼다.


“어딜 가려고?”

“점심 먹으러.”


빈센트는 가스등을 켜고 자화상 앞으로 다가갔다. ‘이 귀가 내 귀와 다르다고? 하늘에 하나님 한 분만이 계신 것과 같이 이 귀는 이렇게 생겨야 한다. 그것이 진실이다. 그런데 고갱은 왜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까? 하지만 고갱은 훌륭한 예술가다. 그에 비해 난 아무것도 아니다. 내 그림을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도 없다. 난 엉터리 화가에다 미친놈이다. 고갱은 축복받은 존재인 데 반해 난 저주받았다. …그러니까 잘라버려야 한다. 이 귀를 그림에서 없애버려야 한다. 없애야 한다.’


그리고 그는 나이프로 자신의 귀를 거침없이 베어냈다.


우리 인생은 늘 예상보다 가혹하지요

테오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일 아침 빈센트가 리옹에 도착한다는 전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보호자 없이 형이 여기까지 혼자 올 수 있을까…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형을 혼자 보낸다고 했을 때, 괜히 그러라고 했어.”


요한나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남편을 다독였다.


파리의 테오에게 온 지 사흘째 되는 날, 빈센트는 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벌써부터 파리의 시끄러운 생활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빈센트는 자기 방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가만히 있으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7월도 다 지나가는 무렵이라 한길은 후텁지근하게 더웠지만 방 안은 서늘했다.


‘늘 이렇게 상쾌하면 얼마나 좋을까. 조용하고 서늘하고… 그리고 머리에 떠오르는 오만 가지 상념을 쫓아버릴 수만 있다면 완벽하게 행복할 텐데. 조용하고 서늘하고 아무 생각이 없는 무념무상의 상태… 눈앞에서 노란색과 까만색 반점이 어른거린다. 또 발작이 오려는 걸까.’


빈센트는 종이를 집어 써내려갔다.


“친애하는 고갱… 내가 자네와 친구가 되어 자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네. 떳떳치 못하게 살기보다는 차라리 정신이 멀쩡할 때 죽어버리는 편이 낫겠어.”


빈센트는 편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도대체 왜 이따위 편지를 쓴 걸까. 권총 자살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런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나는 절대로 내게 총을 겨눌 수 없다. 그런 비겁한 말을 하는 넌 누구냐! 이리 나오너라. 누구냐고! 내 욕을 하는 비열한 녀석, 당장 이리 오너라.’


빈센트는 권총을 자신의 심장 가까이에 대었다. ‘나는 도저히 내 자신에게 총을 쏠 힘은 생기지 않는다. 난 단지 자살하겠다는 생각을 희롱하는 것이다. 또 나를 깔보는구나. 넌 누구냐! 난 비겁한 놈이 아니다. 비겁하지 않단 말이다.’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무시무시한 천둥소리와 함께 갑자기 하늘이 내려앉고 대지가 흔들리고 청색과 회색이 하나가 되어버리는 듯했다. 빈센트는 쓰러졌다.


다음날 아침 테오가 왔을 때, 빈센트는 자고 있었다. 가셰 박사는 침대 옆에서 밤을 새운 듯 창백해진 얼굴이었다.


테오와 가셰 박사가 방으로 들어갔을 때 빈센트는 눈을 떴다.


“그… 작은 아이, 빈센트는….”

“잘 있어요.”


테오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애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알리지 마라….”

“네, 약속할게요.”


빈센트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한참 후 다시 깼다.


“내 그림을… 내 그림과 파이프를 좀….”


테오와 가셰 박사는 빈센트의 그림들을 가져와 벽에 걸었다.


아를의 노란 집과 의자, 전원 풍경, 정물화와 초상화 등의 그림이었다.


“많군….”


빈센트가 중얼거렸다.


“이제… 돌아가도 좋다고… 말해 줘요.”


빈센트는 이렇게 말하고 온몸을 심하게 떨었다.


“에크시투스!”


가셰 박사가 말했다.


“뭐라고요?”


테오가 물었다.


“죽었단 말이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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