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추억

   
이낙연 외
ǻ
메디치미디어
   
12000
2018�� 05��



■ 책 소개

 

촌철살인으로 이름난 이낙연 총리의 칠남매가 팔순을 맞으신 어머니에게 바치는 사모곡

 

제45대 국무총리가 된 큰아들 이낙연을 비롯한 칠남매가 가난과 우환에 짓눌린 집안에서 평생을 전쟁 치르듯 사시면서 어머니를 추억하며 쓴 사모곡. 2006년 팔순을 맞이하신 어머니를 위해 칠남매가 1년 동안 각각 쓴 글들을 묶어 2007년 5월에 초판을 출간하였다. 출간과 더불어 어머니를 향한 따뜻한 마음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지혜와 유머로 일곱 자녀의 성장을 이끌었던 내용이 소문을 타면서 그해 바로 증보판을 발간했다. 출간한 지 10년이 지나는 사이 원래 출간했던 출판사 아린미디어가 문을 닫았고, 출간 당시 재선 국회의원이던 큰아들은 4선 국회의원와 전남도지사를 거쳐 촌철살인으로 국민들을 후련하게 해주는 국무총리가 되었다.

 

무엇보다 출간 당시 팔순을 넘기신 어머니 진소임 여사가 2018년 3월 25일 소천하셨다. 이에 칠남매의 바뀐 이력만 보완하여 어머니를 기리는 마음으로 책을 복간하였다. 이 책 속에는 삶이 주는 고난을 이겨내고 가족을 위해 헌신하신 칠남매의 어머니가 등장하지만, 그 어려운 시절을 함께 견디고 지혜롭게 헤쳐오신 세상 모든 어머니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 이야기의 곳곳에 박승범의 감성적인 일러스트를 담아냈다.

 

■ 저자 
이연순
1949년 음력 1월 25일 영광군 법성면 출생
일성여자고등학교 졸업
1973년 김상웅과 결혼하여 1남(김기철) 1녀(김기영)를 두다
2006년 손자와 외손자를 보다
2007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유아교육학과 중퇴

 

이낙연
1951년 음력 12월 15일 영광군 법성면 출생
1964년 2월 삼덕초등학교(16회) 졸업
1967년 1월 광주 북중학교(16회) 졸업
1970년 1월 광주제일고등학교(15회) 졸업
1974년 2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2000년 5월 2014년 5월 제 16, 17, 18, 19대 국회의원
2014년 7월-2017년 5월 제37대 전라남도 도지사
2017년 5월-현재 제45대 국무총리

 

이금순
1954년 음력 9월 20일 영광군 법성면 출생
1979년 전재규와 결혼하여 두 아들(전종운·전종완)을 두다
2003년 2월 숭실대학교 교육대학원 유아교육과 수료(교육학 석사)
20018년 현재 서울 관악구립 청능어린이집 원장

 

이하연
1957년 음력 2월 15일 영광군 법성면 출생
1969년 2월 삼덕초등학교 (21회) 졸업
1972년 1월 법성중학교 졸업
1975년 1월 법성고등학교 졸업
1985년 12월 광주시 지방공무원 임용
1997년 2월 독학으로 학사학위 취득(행정학사)
2001년 2월 호남대학교 행정대학원 수료(사회복지학 석사)
2014년 12월 지방공무원 퇴직(지방서기관)
2018년 4월 현재 전남도립대학 외래교수

 

이계연
1959년 음력 11월 5일 영광군 법성면 출생
1972년 2월 삼덕초등학교(24회) 졸업
1975년 2월 법성중학교(27회) 졸업
1978년 2월 법성고등학교(27회) 졸업
1982년 2월 전남대학교 회계학과 졸업
1984년 2월 전남대학교 대학원 수료(경영학 석사)
1999년 8월 국민대학교 대학원 수료(경제학 박사)
2007년 2월 - 2010년 1월 환화손해보험 상무
2010년 8월 - 2016년 8월 전남신용보증재단 이사장
2017년 9월 - 현재 중앙대학교 산업창업경영대학원 외래교수

 

이인순
1963년 음력 1월 29일 영광군 법성면 출생
1976년 2월 삼덕초등학교(28회) 졸업
1979년 1월 법성중학교(31회) 졸업
1982년 1월 광주여자상업고등학교 졸업
2003년 2월 방송통신대학교 유아교육학과 졸업
2018년 5월 한성대학교 행정학 박사과정 중
2018년 현재 서울 노원구 국공립 청솔창의 어린이집 원장

 

이상진
1969년 음력 3월 19일 영광군 법성면 출생
1981년 2월 삼덕초등학교 졸업
1984년 2월 법성중학교 졸업
1987년 2월 광주 동신고등학교 절업
1995년 2월 인하대학교 공과대학 졸업
2006년 11월 ‘두란노 아버지 학교 동부 26기’ 수료
2007년 3월 현재 ㈜알바트로스플러스 이사

 

■ 차례
책을 내면서
증보판을 내면서

 

큰딸 연순이의 추억
어머니의 입술 / 숭늉밥 / 팥죽 / 며느리가 나보다 행복하면 그만 / 가을운동회

 

큰아들 낙연이의 추억
어머니는 초능력자? / 음식 칭찬을 하지 않는 이유 / 딸기는 빨갛다? / 미국은 참말로 부자인갑다! / 어머니의 상실감 / 며느리를 다루는 지혜 / 참기름 불 / 어머니의 착각 / 그냥 시골 중학 다녀라 / 메주와 생영감 / 어머니의 이중성(?) / 놀라운 혜안 / 어머니도 여자이셨나 / 입원 / 저는 마마보이가 되고 싶습니다 / 81회 생신 / 어머니를 닮아가는 아내

 

둘째딸 금순이의 추억
남 주기 아까운 아이 / 친정 걱정 / 40일 기도 / 석사학위 받던 날 / 나처럼은 살지 마라 / 편도선 수술 / 아버지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

 

둘째아들 하연이의 추억
어머니의 눈물 / 나한테는 귀신이 안 보인다 / 어머니의 화술 / 말씀의 위력 / 예지력 / 넹기욘 하나 / 어머니의 ‘달’ / 모자간의 엇박자 / 외면 / 미리 주신 정표

 

셋째 아들 계연이이의 추억
통학길 / 합격했으니 워쩐디야? / 아들 셋이면 도둑 흉보지 마라 / 술 / 가난 때문에
 
셋째딸 인순이의 추억
큰딸이 예쁘다 / 어버이날 선물 / 20대와 60대 / 여장부 / 외며느리 / 바람난 사위/ 새벽장 서랍 속에서 / 아버지 탈상 날 / 마을 카운슬러 / 단무지 / 저는 공주랍니다 / 굴뚝에 바람들라 / 사위 심사 / 손녀 사랑 / 아버지의 사랑법 / 삼계탕 익기를 기다리며 / 장둥떡 / 김치맛 / 막내딸 프리미엄 / 축하는 무슨! / 고추밭의 철학 / 어머니의 낙관주의 / 며느리 사랑

 

막내아들 상진이의 추억
크먼 엄마 모시고 살께! / 해볼라먼 한번 해봐라 / 꼭 아들을 뺏긴 것 같구나 / 심야 기도 / 막내의 불효 / 어머니를 위한 기도




어머니의 추억


큰딸 연순이의 추억

어머니의 입술

2006년 1월이 어머니의 팔순이었습니다. 저희 7남매는 어머니의 팔순을 보내며, 어머니의 한없는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잊지 못할 소중한 선물을 해드리기로 했습니다. 바로 이 책입니다. 저는 이상하게도 어린 시절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입술’입니다. 그것도 예쁜 입술이 아닌, 다 헤지고 터져서 피가 나는, 계란의 속껍질처럼 하얗게 부풀어 오른 입술입니다.


50여 년 전, 제가 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는 남색 치마에 분홍 저고리를 곱게 차려 입은 여성 한 분을 집에 데리고 오셨습니다. 그때는 제가 너무 어려 그분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의 말로 표현하자면 그분은 둘째 부인, 즉 ‘작은 여자’였습니다. 어머니는 그날 밤부터 저와 동생들을 데리고 시어머님(저의 친할머니)과 방을 함께 쓰셨고, 아버지께서는 ‘작은 여자’와 한 방을 쓰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어머니는 아침 일찍 일어나 아버지와 온 가족을 위해 아침밥을 지으셨고, 제게는 아버지께 진지 드시라 여쭈라며 심부름을 시키시곤 하셨습니다.


그 후로도 어머니는 변함없이 시어머니와 남편을 공경하며 ‘작은 여자’에게도 따듯하게 대해주셨습니다.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작은 엄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이상 어머니께 죄를 지을 수 없다며 떠나셨습니다.


제가 좀 더 철이 들었을 때인가요? 어머니께 그 일에 대해 여쭈어 보았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추호의 미움도 없이 아버지께 한결같이 잘하실 수 있었느냐고.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자신이 있었다. 내게는 너희들이 있었으니까. 아버지가 언젠가는 돌아오실 것이다 믿으며 용기를 가졌다.” “너희 아버지는 전쟁통에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잃고, 다 키운 아들도 잃고, 속이 상해 허전함을 달래려고 그러셨던 게다. 너희는 아버지를 항상 존경해야 한다.” 하지만 여자로서의 어머니는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머니의 다 터진 입술이 말해줍니다.


팥죽

옛날 제가 살던 시골에서는, 어느 한 집에 초상이 나면 아무리 바쁜 농사철이라 할지라도 동네사람들이 일손을 멈추고 모두 초상집에 모여 일을 돕곤 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특히 수의와 상복을 모두 집안에서 만들었는데, 옷을 만들려면 바느질도 잘하고 재단도 잘하는 ‘솜씨꾼’이 꼭 필요했습니다. 그런 재주를 지닌 어머니는 늘 초상집을 다니시며 재단도 하고 바느질도 하셨습니다.


그 당시 초상집에서 빠지지 않았던 것은 팥죽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매번 당신 몫으로 나온 팥죽을 드시지 않고 집주인에게 “나는 안 먹을테니 우리 어머니 갖다드리게 싸주시오.”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양푼에 담아온 팥죽을 시어머니(저희 할머니)께 드렸고, 할머니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밝게 웃으며 팥죽을 들곤 하셨습니다.


옛날보다 먹을 것도 더 풍부해지고 여러모로 살기 편해졌지만, 이런 정겨운 고부간의 모습은 잘 찾아볼 수 없어 서운하기만 합니다. 요즘의 우리네 모습들이란…….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의 정겹고 따듯한 모습이 문득 보고 싶어지는 봄날입니다.


며느리가 나보다 행복하면 그만

저희 어머니는 농사철에 농사를 지으시며 틈나는 대로 열무와 배추, 들깨 등을 텃밭이나 콩밭, 깨밭 사이에 심으셨습니다. 그리고 매일 저녁에 그걸 뽑아다 손질하여 다음날 새벽닭이 울면 광주리에 담아 5km 떨어진 시장(영광 법성장터)에 내다 팔곤 하셨지요. 그래서일까요? 저는 요즘도 할머니들이 길가에 야채를 펼쳐놓고 파시는 모습을 보면, 물건값이 다소 비싸더라도 측은한 마음이 들어 사드리곤 합니다.


장사에서 돌아오신 어머니는 늦은 아침을 대충 드시고 곧장 논으로 밭으로 일을 하러 나가셨습니다. 동네사람들이 모이면 저희 어머니더러 “그렇게 입지도 먹지도 않고 자식들 가르쳐 놓아봤자 남의 딸 좋은 일만 시키는 짓”이라며 흉을 보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얘기를 들으실 때마다 어머니는 “며느리가 나보다 낫게 살면 좋은 일 아니냐?”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저도 자식을 키우다보니 아주 조금은 어머니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어머니의 마음을, 중심을 다 보셨나 봅니다. 어머니에게 착한 며느리도 주셨고, 각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나가는 자식들도 주셨습니다. 맏이인 저는, 어머니께 효도를 다하는 동생들을 보면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큰아들 낙연이의 추억

어머니는 초능력자?

가을농사를 마치면 어머니는 게를 잡으러 다니셨습니다. 이듬해 여름까지 가족들이 먹을 밑반찬을 장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잡아서 만드신 간장 게장(요즘의 간장게장에 쓰는 게보다 훨씬 작은 게였지만)은 맛이 기막혔습니다.


어머니는 새벽에 도시락을 두 개 만들어 머리에 이고 게를 잡으러 가셨습니다. 물론 모든 길을 걸어서 다니셨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걸어서 갔다가 걸어서 돌아오셨습니다. 어머니가 주로 다니신 곳은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 해변’이었습니다. 당시에 저희들은 심원이 멀다는 것만 알았지, 얼마나 먼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가본 적도 없고, 누구에게 물어본 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희 고향 주변에도 최근에는 도로가 정비되고 도로표지판이 잘 세워졌습니다. 도로표지판에 적힌 거리를 따져보니, 저희 시골집에서 심원까지는 국도로 달려도 23km나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국도가 뚫리기 전에 어머니가 다니셨을 구불구불한 길로는 대체 몇km나 됐을까요. 어머니는 그 길을 걸어서 가셨다가, 거의 얼어붙은 도시락으로 두 끼니를 잡수시고 게를 잡아 다시 걸어오셨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지금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그 괴력이 저는 지금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딸기는 빨갛다?

어린 시절, 저희 시골집 뒤안(뒤꼍)에는 손바닥만한 딸기밭이 있었습니다. 딸기 철이 되면 저희 4남 3녀 형제자매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맨 먼저 딸기밭으로 달려갔습니다. 저희들은 딸기 열매가 조금만 맺혀도 닥치는 대로 따 먹었습니다. 그러니 딸기가 제대로 굵어질 틈이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저는 느긋하게 늦잠을 자곤 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그나마 먹을 만한 딸기를 일찌감치 따 두셨다가 몰래 제게만 주셨기 때문입니다. 큰손자인 저에 대한 할머니의 편애는 아주 노골적이었거든요. 딸기에 얽힌 동생들의 설움을 제가 안 것은 한참 뒤였습니다. 농담을 은근히 잘 하는 셋째 남동생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딸기가 크면 빨개진다는 걸 나는 중학교 들어가서야 처음 알았네!”


며느리를 다루는 지혜

막내 남동생이 결혼한 직후 아버지의 기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모처럼 저희 4형제가 부부 동반으로 시골집에 모였습니다. 아버지 생전의 아픈 기억이 떠오르셨을까요? 갑자기 어머니는 며느리 넷에게 남자의 외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람피우는 것, 천하에 못난 남자들이 그런 짓 한다. 내가 낳은 자식들 중에는 그런 못난 자식 없을 것이다.”그리고 며느리들에게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겪어보니 결국은 여자 못난 탓이더라. 내가 못나서 그런 것이지야. 느그들은 그런 일 당하지 말고 살아라.” 참으로 묘한 방법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아들들과 며느리들을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마마보이가 되고 싶습니다

아버지와 제가 가장 어려운 국면에 처했을 때 가장 큰 영향을 주신 분은 바로 어머니였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학식도 논리도 아닌 ‘심지’였습니다. 요즘도 저는 어머니를 뵐 때마다 어머니의 그런 심지를 느낍니다. 제가 어머니를 뵙는 것만으로 위안과 격려를 받는 것은 어머니께서 감추고 계신 심지를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 아버지는 일흔을 조금 넘기고 작고하셨습니다. 고향에서는 아버지가 평생 야당 외길을 걸으신 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도 한 번은 흔들리셨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청년기와 중년기를 야당의 지방 당원으로 지내셨습니다. 아버지는 어떤 야당 정치인을 도우셨지요. 그 정치인의 아드님이 정치를 이어받자 아버지는 다시 그 아드님을 도우셨습니다. 그러나 그 아드님은 전두환 정권 출범과 함께 야당을 떠나 여당인 민정당에 합류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께도 민정당에 함께 가자고 권유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런 아버지를 어머니가 붙잡으셨습니다. “내가 당신을 만나 소박맞은 것도 참고, 시앗 본 것도 참았지만, 자식들을 지조 없는 사람의 자식으로 만드는 것은 아무래도 못 참것소.” 아버지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르셨습니다.


운명은 묘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장남인 제게도 비슷한 상황이 닥쳤습니다. 제가 대변인으로서 모셨던 노무현 대통령께서 민주당을 버리고 신당(열린우리당)에 동참하셨습니다. 그 무렵 노 대통령께서는 두세 번쯤 사람을 보내 저의 신당 동참을 권유하셨습니다. 저는 분당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고민했습니다. 2003년 민주당 분당 직후의 어느날 아침이었습니다.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나다. 신당 가지마라 잉!” 어머니는 그 말씀만 하시고 전화를 끊으셨습니다. 나중에 어머니를 뵙고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를 여쭈어봤습니다. “사람이 그러면 못 쓴다.”그런 어머니께서 2006년 5ㆍ31 지방선거 직후에 제게 전화를 주셨습니다. 지방선거는 제게 좋지 않은 결과를 안겨주었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은 단 한 마디였습니다. “길게 봐라.”


어머니의 그런 심지가 존경스럽습니다. 좀 더 길게 설명해주시면 좋으련만, 어머니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어머니를 뵙고 느끼는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마마보이가 되어 있습니다.


어머니를 닮아가는 아내

언제부터였을까요? 아내가 바뀌고 있습니다. 그것 참 딱한 일입니다만, 아내가 어머니처럼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내와 어머니의 결정적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투정이 있느냐 없느냐,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때때로 투정을 합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에게 투정을 하지 않습니다.


아내가 어머니처럼 되어간다고 제가 느끼는 것은 바로 그 점입니다. 언제부턴가 아내가 저에게 투정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제가 술을 마시고 밤늦게 들어가도 이제 아내는 제게 잔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제가 쓸데없는 물건을 사도 아내는 아무말도 하지 않습니다.


아내는 왜 이렇게 변했을까요? 혹시, 저에 대한 믿음이 깊어졌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것은 아니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하여튼 아내가 왜 이렇게 변해가고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내의 변화에 저는 쓸쓸해집니다. 남편에 대한 투정을 잃어간다는 것, 그것이 아내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저는 어렴풋이 알 것 같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삶은 점점 더 쓸쓸해지는 걸까요?



둘째아들 하연이의 추억

어머니의 화술

어머니의 화법은 항상 단순명쾌하고 직설적이었다. 우리 가족은 나만 빼고 모두가 교회에 다닌다. 어머니의 선언에 따라 4~5년 전부터 아버님 제사를 기독교(개신교)식으로 바꾸었다. 설날과 추석날 차례도 가정예배로 대신하게 되었다. 아버님 기일(음력 3월 28일)에는 온 가족이 서울 형님 댁에 모여서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린다.


설날과 추석에는 어머니가 사시는 고향집에 모여 차례를 지낸 다음 성묘를 간다. 처음 몇 년은 어머니가 다니시는 교회목사님을 모시거나, 광주에서 개신교 장로로 활동하시는 큰집 길연 형님에게 집도를 청하거나 했었다. 그런데 작년(2006년) 설 전잘 갑작스런 어머니의 선언. “목사님 오실 시간이 없다는데, 우리 하연이가 제일 잘 할 것 같으니 이번 설날 가정예배는 네가 집도해라.” “알겠습니다.” 거역할 수 없는 명령에 바로 복명하고, 그 길로 사무실에 나가 인터넷을 뒤져 가정예배 자료를 모아 보았다.


서울에서 허리 수술을 받으신 어머니가 고향에 내려가 다시 법성교회에 나가실 수 있게 되었다. “아들아, 엄마 몸 아파도 낼 성찬식은 꼭 가야겠는데, 네가 데려다 줄래?” 팔순 노모의 이렇듯 재치있는 화법에 어찌 거역을 할 수 있겠는가!


어머니가 내게 가정예배를 집도하라 하신 것도, 교회가는 길에 동행하게 하신 것도, 모두 “예수 믿고 교회 다녀라” 하는 말씀이었으리라. 아무래도 내가 교회에 나가야 하나 보다.


예지력

어머니 말씀의 위력은 세상사에 대한 폭넓은 통찰에서 나온다. 어머니가 대수롭지 않게 던지는 말씀 속에도 때로는 예언이나 경고가 담겨 있다. 내가 군대 가기 전에 자주 어울리던 친구들 중에서는 C군과 D군이 가장 빈번하게 왕래를 했다.


어느 날 어머니가 D군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아무리 봐도 사람이 냉정하더라.” 어머니는 ‘냉정하다’라는 말을 ‘성품이 거만하고 매정하다’라는 의미로 사용하신다. 나는 어머니 말씀에 동의했고 D군의 처신에 대해서 가끔 실망을 하면서도 40년 지기로서의 의리만 줄곧 지켜왔었다.


그런데 D군은 4~5년 전에 친구들의 공금(친목계 자금)을 유용했다. 이태 전에는 마음 약한 나를 움직여 수백만 원을 빌려간 뒤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시간을 끌더니 요즘에는 아예 소식조차 끊긴 상태이다. 이제야 하는 오래 전 어머니의 그 말씀이 ‘각별히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경고의 뜻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한편 C군에 대한 어머니의 평가는 최상의 찬사이다. “사람 참 소탈하더라.” 어머니는 ‘소탈하다’라는 말을 ‘성품이 진실하고 착하다’라는 의미로 사용하신다. C군은 항상 나를 도와주기만 한다. 2000년과 2004년 국회의원 총선거 때는 광주에 있는 직장동료들을 영광까지 데리고 와서 우리 형님을 위해 선거운동을 하기도 하고, 나의 운전사 노릇을 하기도 했다. ‘우리 형님’이 국회의원이 된 것을 마음껏 자랑하는 친구이다.


작년 어머니 팔순 때는 C군이 가족들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팔순잔치가 끝나고 나서 어머니가 C군에 대해 한 말씀하셨다. “참 소탈한 사람이야.” 그 말씀은, C군이 내 일생에 좋은 벗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라고 나는 믿는다.


외면

고향의 면소재지에 있는 중학교에 다닐 무렵, 어머니는 농사를 짓는 틈틈이 채소 행상을 하셨다. 새벽 4시반 이면 어머니는 무, 배추 같은 채소 다발을 광주리에 이고 집을 나서신다. 나는 학교에 가기 위해 7시쯤에 책가방을 들고 집을 나선다. 그리고 등굣길 중간쯤에서 빈 광주리를 머리에 인 어머니와 마주친다. 나는 습관적으로 어머니를 외면하고 말 한마디 없이 어머니 옆을 그냥 지나가버린다.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어머니는 그 장면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시는 것 같다. “법성 가서 채전 팔고 오다 하연이 얼굴만 보면 온몸의 피로가 싹 풀리더라.”


미리 주신 정표

“나하고 갈 데가 있다.” 2005년 어느 날인가 어머니가 차를 태워달라고 말씀하셨다. “오늘은 엄마 하자는 대로 해야 한다.” “반지 하나 해줄 테니 거절 말고 받아라. 어서 수정당(금방)으로 가자.” “반지요? 저는 몸에 뭘 달고 다시는 걸 싫어하잖아요.” 잠시 침묵……. “나 없을 때 엄마 생각하라고…….” “아이고,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아무 말 없이 어머니를 모시고 금은방으로 갔다.


그 후로 나는 어머니가 이별의 정표로 미리 주신 금반지를 항상 끼고 있다.



셋째딸 인순이의 추억

여장부

셋째오빠는 공부를 아주 잘했는데, 집안이 가난한 탓에 장학금에 송아지까지 주겠다는 학교 측의 제의를 받아들여 시골의 상고로 진학한 바 있다. 그런데도 국립대학에 합격했으니 시골에서는 거의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당연히 축하해야 할 일임에도 기쁨도 잠깐, 어머니는 등록금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때 난 ‘우리집은 왜 이리 가난할까? 난 절대로 능력없는 부모는 되지 말아야지. 열심히 살면 그렇게는 되지 않겠지…….’하고 철없이 생각했었다.


그러나 요즘에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는데, 별 볼일 없다. 아니, 그보다 더 못하다. 최선을 다한 삶이 이 정도구나, 결코 게을러서가 아니었구나. 하지만 그 시절에는 그걸 몰랐었다. 어쨌든 당시 우리집 상황은 난감할 따름이었다. 나 역시 속으로나마 몹시 걱정하면서 지켜봤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셋째오빠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공부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곧바로 마을에서 계를 하나 조직하셨다. 셋째오빠와 동갑(돼지띠)인 자녀들을 둔 엄마들을 모아 친목계를 조직하고, 그 곗돈으로 오빠의 등록금을 조달하신 것이다. 우리 어머니, 정말 대단한 분임에 틀림이 없다. 어머니께 그런 융통성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우리 어머니가 현대판 신사임당인 줄 알았더니, ‘과거의 장영자’였단 말인가?


새벽장

어머니는 새벽마다 열무, 무, 옥수수 등을 머리에 이고 나가서 팔고 오셨다. 오시는 길에는 늘 할머니 드실 것과 입을 것, 그리고 학교 다니는 우리 형제들의 학용품 값과 용돈을 만들어 오셨다. 난 지금도 그때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천 원짜리 한 장도 가볍게 여기지 못한다.


중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열무와 옥수수를 다 팔고 빈 ‘다라이’를 이고 오시는 어머니가 너무 부끄러웠다. 그래서 난 젊고 세련된 엄마가 되기로 했다. 그래서 일찍 결혼하고, 나름대로 자기관리를 해가며 멋도 부리며 살았다. 내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내가 딸아이의 학교에 가거나 간혹 길에서 딸아이의 친구들과 마주치면, 딸아이는 이 엄마를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요즘 내 딸에게 난 과연 어떤 엄마일까? 우리 어머니처럼, 나도 내 딸의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을까? 어머니와 비교하면 나는 ‘젊고 세련된 엄마’ 일지는 모르지만, 정말 부끄러운 따름이다. 교육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 사람을 이기적으로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닐는지…….


수능시험날 아침.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딸아이가 내게 말했다. “이 사임당님! 그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저는 지금껏 하고 싶은 것 못 해본 적 없고, 갖고 싶은 것 못 가져본 적 없이 행복했어요.” 난 정말로 부끄럽고 미안한 나머지 아이 앞에서 몸 둘 바를 몰랐다. 얼마나 부끄러운 엄마인가! 그리고 어머니께는 또 얼마나 부끄러운 딸인가! 어머니가 내게 베푼 사랑은 계산하지 않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었을 것이다. 반면, 어쩌면 나는 나의 자존심 때문에 아이에게 잘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어머니 죄송해요. 어머니께 받은 사랑을 딸에게 다 돌려주지 못하고 있어요. 저도 어머니처럼 현명하고 좋은 엄마, 지혜로운 여자가 되도록 노력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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