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시선

   
이유미
ǻ
북노마드
   
14000
2014�� 03��



■ 책 소개

 

언제나 우리 주변에 ‘자연스럽게’ 놓여 있었기에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던 ‘사물’들.
이제 사물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당신은 ‘보지 못했던’ ‘당신을’ 바라보는 시선. 당신이 존재했던 그때, 그곳엔 언제나 사물이 함께 있었다! 연필, 머그잔, 달력, 포스트잇…… 작은 책상 위만 살펴보아도 수많은 사물들이 놓여 있다. 너무 흔하고 자연스러워서 거기에 있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들. 사물들은 늘 그렇게 ‘자연스럽게’ 우리 주변에 놓여 있다. 언제나 거기에 있었기에, 사람들은 자주 ‘그들’의 존재를 잊는다. 그런데 여기 문득 그 사물들의 존재를 ‘발견’한 사람이 있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물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아온 저자 이유미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싼 모든 사물에 감정이 있고, 그들이 겪어온 삶의 이야기가 우리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듯 사물들도 제 나름의 감각으로 세상을 지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심스레 귀를 기울여 사물들의 목소리를 엿듣기 시작했다. ‘사물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했다.

 

사물들은 당신의 모든 것을 함께 겪었다. 당신이 만났던 시간과 공간, 그때 그곳에서 당신은 보지 못했던 당신을 지켜보았다. 어쩌면 사물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사물들의 목소리를 엿듣고, ‘사물의 시선’을 통해 우리의 일상을 ‘발견’하는 이유다.

 

■ 저자 이유미
전공은 가구 디자인.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오랫동안 편집 디자인을 했다. 글을 쓰기까지 조금 멀리 돌아왔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에도 책을 읽는 시간이 가장 설?다. 틈틈이 글을 쓰다보니 현재는 글을 쓰는 것이 본업이 됐다.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된경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지금 하는 일이 마음에 든다. ‘사물의 시선’을 쓰기 시작하면서 욕실에 덩그러니 놓인 비누를 보는 것도 쓰레기통에 버려진 종이컵을 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상하게 그것들이 자꾸 나에게 말을 거는 것만 같아서였다. 그럼에도 내가 상상하고 쓴 이야기들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해주는 것이 좋아 계속 연재할 수 있었다. 지금은 온라인 편집숍 29CM(www.29cm.co.kr)에서 글을 쓰고 있다.

 

■ 차례
1) 취향, 시선을 끌다
1 저금통 …12
2 포스트잇 …16
3 장난감 …20
4 이어폰 …26
5 스티커 …32
6 샤프 …36
7 카세트테이프 …40
8 피크닉매트 …44
9 비누 …50
10 양초 …56
11 우산 …60
12 엽서 …68
13 책 …72
14 종이인형 …76
15 향수 …80
16 유리병 …84

 

2) 공간, 시선을 피하다
1 액자 …90
2 이불 …94 
3 수건 …100
4 화장대 …104
5 쓰레기통 …112
6 거울 …116
7 스탠드 …120
8 벽시계 …124
9 달력 …128
10 소파 …132
11 캐비닛 …136
12 빅쿠션 …140

 

3) 공간, 시선을 던지다
1 차 …148
2 보온병 …152
3 칼 …156
4 그릇 …160
5 종이컵 …164
6 꽃병 …170
7 머그잔 …174
8 수면안대 …180
9 지도 …186
10 스위치 …190

 

4) 그 여자, 시선을 모으다
1 핸드크림 …198
2 앞치마 …204
3 반지 …210
4 장화 …216
5 하이힐 …220
6 리사이클 가방 …224
7 양말 …228
8 귀걸이 …232
9 레깅스 …238
10 숄더백 …242
11 안경 …248
12 구둣솔 …252
13 카메라 …256
14 담요 …262
15 빗 …268
16 장갑 …276
17 초 …282  

 




사물의 시선


취향, 시선을 끌다

저금통 _ 채워지면 이별

내가 욕심쟁이인 걸까? 왜 동전이 모이면 갖고가는 거지? 그냥 갖고 있으면 안 되나? 그래, 알아. 나는 저금통이라는 걸. 하지만 모를 거야. 그동안 정들었던 동전들과 헤어지는 순간의 서운함을.


옛날부터 나는 정이 많았어. 지금은 모양이 다양해졌지만(심지어 나는 버스 모양이잖아)그전까지 우리의 상징은 ‘돼지’라는 푸근한 이미지와 동물이었어. 생각해보면 옛날에는 사람들이 참 동전을 열심히 모았어. 동전이 채워지면 바로바로 은행에 가져가곤 했어. 솔직히 그때는 동전들과 정이 쌓일 틈도 없었어. 그런데 언제부턴가 동전들과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길어졌어. 사람들이 동전을 모으지 않다보니 내 안의 동전들과 정이 깊어진 거지. 그렇게 정이 담뿍 든 내 안의 동전들을 꺼낼 때의 상실감과 허탈함이란…….


그래, 나는 이별하는 물건이야. 나와 만나게 된, 나와 특별한 인연을 맺은 동전들을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할 운명을 지닌 그런 물건. 사실 요즘은 부쩍 외로워. 며칠에 한 번씩 나에게 동전이 들어오는 날에는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하고,말이 아주 잘 통하는 동전과 헤어지는 날에는 밤세워 울곤 하지. 사람들의 손길도, 동전들의 발길도 뜸하니 그럴 수밖에.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어. 1980년에 만들어진 100원짜리 동전과의 만남을. 1980년 동전치고 엄청 깨끗해서 하마터면 말을 놓을 뻔했지만, 그 100원짜리 형님과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몰라. 물론 언젠가 그 형과도 헤어져야 하겠지. 이렇게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했으면 좀 무뎌질 만도 한데 아직도 이별이 두렵고 슬퍼. 지금까지 한 번도 저금통으로 살아온 걸 후회한 적이 없지만 정이 든 동전들과의 이별은 나를 너무 슬프게 해. 며칠 후면 내 안에 머물렀던 동전들은 다시 한 번 무리 지어 내 품을 떠나게 될 거야. 나는 또 혼자가 되겠지. 가끔 그런 꿈을 꿔. 내가 품었던 동전들이 다시 내게로 돌아오는 꿈. 그날을 꿈꾸며 오늘도 같은 자리에서 묵묵히 동전을 품을 거야.


스티커 _ 누군가의 꿈 누군가의 취향

나는 누구일까요? 나는 사람들의 취향이 정확히 둘로 나뉘는 물건이에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심지어 하찮은 쓰레기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를 보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도 있죠. 나는 그림,사진,인물,동물,입체,캐릭터,투명,반투명 등 종류도 다양해요.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구하고 싶은 내가 생기면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나를 구하려 들지요. 그렇게 나는 벽이나 다이어리에 붙여지기도 하고, 필통이나 노트북을 장식하죠.


나를 보면 그 사람의 취향을 알 수 있어요. 벽 한가운데 나를 턱하니 붙이는 사람 혹은 자신만 볼 수 있는 컴퓨터 모니터 구석에 나를 붙이는 사람 등 나를 어디에 붙이는지를 통해 그 사람이 대담한지 소심한지, 꼼꼼한지 덤벙대는지를 알 수 있죠. 내겐 메시지를 함축하는 힘이 있어서, 기타 케이스나 자동차 유리, 머그잔, 화장대 거울에 붙여져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곤 한답니다. 그때마다 나는 궁금해져요. 당신이 무슨 이유로 나를 붙였는지 말이에요. 그래서일까요. 나는 작은 것에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이 좋아요. 외진 곳에서 나를 발견하고 멍하니 웃는 사람, 내가 전하는 메시지에 잠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좋아요. 나에겐 누군가의 꿈이 담겨 있어요. 누군가의 희망과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 있어요. 지금, 당신의 주변을 살펴보세요, 내가 보이나요?


책 _ 소설에 대하여

나는 그녀의 책이다. 얼마 전 그녀의 부름(결제)를 받고 택배로 도착한 나는 한 권의 소설이다. 같은 날 나와 함께 도착한 책들은 모두 8권. 그중에서도 나는 가장 먼저 그녀에게 선택되었다. 그녀가 혼자 사는 집에는 책이 참 많다. 철학, 역사, 자기계발, 재테크 등 그녀는 다방면의 책을 골고루 읽는 것 같다. 나의 작은 바람이 있다면 그녀가 가장 먼저 읽고 나서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는 저 책장에 작게나마 보금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소설은 읽을 때뿐이라고 생각하는지 읽고 나면 늦은 밤 출출할 때 라면을 끓여먹을 때 냄비 받침으로 쓰는 등 책꽂이가 아닌 다른 곳에 나를 방치해둔다. 그런 사람에게 우리는 단지 시간 때우기용이나 어려운 책을  읽다가 잠시 쉬어가는 용도인 듯하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소설에는 다른 책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삶에 관한 이야기와 철학이 담겨 있다. 2002년 월드컵 강 신화를 일군 히딩크 감독도 ‘평소 어떤 책을 주로 읽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소설’이라고 했다. 축구 경기를 이기기 위해 전략서나 축구를 테마로 한 책을 읽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작 히딩크 감독은 소설에서 많은 것들을 배운다고 했다. 그가 훌륭한 리더십을 지녔으면서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으로 지금까지도 기억되는 것도 소설 때문인지도 모른다. 히딩크 감독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기발한 상상력과 다양한 캐릭터는 소설에서만 맛볼 수 있는 거라는 것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만나고 부딪쳐야 할 사람들을 소설에서 미리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내가 소설책이라고 해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다.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인간의 삶을 다루었다는 점만으로도 소설은 충분히 두고두고 읽을 만하며, 오래도록 소중히 간직할 만하다는 것이다.


옛 인디언 속담에 “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지 않고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신발을 신어본다’는 말 대신 ‘책을 읽어본다’는 말을 넣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소설은 그런 책이다. 당신 곁에 두고두고 읽는 책, 영원히 간직할 만한 책.



공간, 시선을 피하다

스탠드 _ 나의 빛

기다림이란 나의 숙명인 걸까. 아주 잠깐의 시간을 위해, 그녀가 잠들기 전 두세 시간, 어떤 날은 삼십 분을 위해 종일 기다려야 하는 나는 바로 스탠드다. 잠들기 전 꼭 책을 읽는 습관을 지닌 그녀를 만난 게 다행이랄까. 그녀가 하루를 정리하며 책을 읽는 순간, 나와 그녀의 거리는 30센티미터가 채 되지 않는다.


가끔 그녀가 읽는 책을 엿보기도 한다. 그녀는 주로 가볍게 읽기 좋은 에세이나 소소한 일상을 ㄹ담은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 같지만, 아무리 보아돠 이해되지 않는 어려운 책을 읽을 때도 있다. 분명한 건 그녀는 매일 밤 책을 읽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다독가라는 것. 내가 놓인 침대 옆 테이블에는 늘 서너 권의 책들이 쌓여 있다. 비록 어떤 날은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느라 책을 읽지 않는 날도 있지만, 그녀가 기다리는 전화나 메시지가 있다는 걸 알기에 살짝 눈감아준다.


누구나 감성이 풍부해지는 늦은 밤, 그래서 어떤 날은 하루종일 기다린 내 마음도 몰라주고 깜깜한 방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그녀가 야속하고 속상하지만, 주변의 모든 사물이 잠든 시간에 오직 나만 그녀를 볼 수 있다는 것에 위안을 받는다. 30센티미터, 딱 이만큼의 거리에서 그녀를 그리워하련다. 세상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사랑도 있지만, 나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응원하는 사랑도 있는 거니까. 나만의 방식으로 그녀를 사랑하기 난 그녀에게 빛이 되어주는 스탠드 그리고 그녀 역시 나의 빛이니까.


소파 _ 당신의 휴식

일단은 내게로 와서 앉으세요.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가는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단 것 같은 무게가 느껴지니까요. 자, 가방은 바닥에 내려놓으세요. 무거운 외투도 벗어서 내게 걸쳐놓아요. 잔뜩 움츠린 어깨에 올려진 인생이라는 무거운 짐을 나의 푹신한 등받이에 묻어보세요. 힘겨운 하루를 고스란히 받아들인 당신의 몸을 내 시트에 천천히 올려놓으세요.


때마침 미라의 <할렐루야>가 흐르네요. 어때요? 기분이 좀 나아졌나요? 나의 넓은 팔걸이는 당신의 양팔을 올려놓을 만큼 충분히 넓어요. 오늘 하루도 당신의 손은 많은 일을 해냈겠죠? 당신의 발은 또 얼마나 많은 곳을 걸었을까요.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당신의 가슴은 얼마나 힘겨운 하루를 보냈을까요. 내게 더 깊이 안겨보세요. 내가 당신을 안아줄게요. 괜찮아요. 가끔은 당신을 위해 조금의 사치를 부려 보아요. 당신의 휴식을 위해 온종일 기다린걸요.


이런, 잠깐의 휴식을 견디지 못하고 남은 할 일을 생각하고 있군요. 아직도 불안하세요? 눈을 감고 자신을 향해 ‘오늘도 고생 많았어’라고 토닥일 순 없는 건가요? 아, 좋아요. 그렇게 조금 졸아도 괜찮아요. 오늘 미처 하지 못한 일,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잠시 잊어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게 모든 걸 의지하고 쉬세요.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당신의 마음을 나는 잘 알아요. 그 사람이 당신을 받아주지 않아서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도. 세상이 내 맘 같지 않죠. 그러지 말고 그냥 스스로를 위로해주세요. 지금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나 혼자만의 휴식을 즐기세요. 자, 이리 와서 앉아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쉬세요. 나는 당신의 소파예요.



공간, 시선을 던지다

차 tea _ 마음을 끌기 위해

나는 마음이 먹는 음식이다. 밥만 먹고 살기에는 너무 삭막해서 누군가 고안한 마음 식량. 어떤 재료라도 내가 되려면 물기 하나 없이 바짝 말려진다. 그리고 다시 물과 만나면 독특하면서도 편안한 향기를 낸다. 나는 차갑게 즐길 수도 있지만 대부분 따뜻한 나를 좋아한다. 사람들은 나를 앞에 두고 마음을 진정시킨다. 지금까지 내 앞에서 호들갑스러운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마음 식량이어서일까. 나는 먹는 데에만 집중하는 밥이나 다른 음식과 달리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지금 눈앞의 현재는 물론 지나간 과거와 앞으로 찾아올 미래까지, 자신과 옆에 앉은 사람까지. 내가 담겨 있는 온기를 머금은 찻잔을 손에 쥐고 숨을 깊게 들이쉬면 평소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된다. 입으로 마시는 것뿐만 아니라 코로 향기를 음미할 수 있으니 어찌 나를 그냥 지나치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나를 마시는 시간을 아까워하거나 비싸다고 투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와의 만남을 고려해보는 게 좋다. 십중팔구 당신과 마주하는 그 시간을 아까워하고 다른 곳에 시선을 두는 사람일 테니 말이다.


어떤 사람은 나와 커피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고민을 거듭한다. 우리 둘 다 쉼과 여유를 안겨주지만 어떤 일로 잔뜩 화가 난다면, 혹은 곁에 있는 사람이 좋지 않은 일로 낙심해 있다면 커피보다는 내가 좋다. 혹시 아는가.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모여 핵문제를 논의하거나 시급한 국제 문제를 해결하는 회의에서 커피 대신 내가 놓인다는 것을. 이유는 하나. 나를 통해 한 번 더 생각하는 여유를 갖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속을 알 수 없는 커피와 달리 나는 투명하다. 그런데도 여러 가지 빛깔을 갖추고 있다. 나는 사람의 마음을 끌기 위해 존재하는 특별한 물이다. 입을 즐겁게 하고 코를 행복하게 하고 건강까지 챙겨주는 무엇보다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런 물건. 이 책을 읽는 당신 곁에 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정말 행복하다.


보온병 _ 나는 비록 뜨겁지만

나는 그런 물건이다.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이

진도를 팍팍 낼 수 있게 도와주고,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에게는

좋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준다.


어린아이에게는 

엄마의 온기를 전하는 마음이 되고,

외로운 노인에게는

삶의 고단함과 시름을 잠시 잊게 해주는

하얀 입김이 된다.


오랜 시간 꿈을 이루기 위해 매진하는

젊은이에게는

‘결국 잘될 거야’라고 파이팅을 외치는

휴식시간이 된다.


매일같이 꽉 막힌 도로에 나서야 하는 버스 기사에게는

언젠가 뚫리겠지, 라는 여유를 주고

그 버스를 타고 일터로 나가는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게 좋은 걸 보니 이제 가을이야, 라고

시간을 음미하게 만드는.


나는 그런 물건이다.


칼 _ 위험한 존재

조심해요! 보디시피 나는 아주 날카롭거든요. 사람들은 나를 조심조심 대하죠. 당연해요. 난 그만큼 위험한 존재니까. 그래서 난 너무 외로워요. 사람은 물론 주변의 사물도 나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하지 않거든요. 세상에서 나를 받아주는 건 오직 도마뿐. 자신에게 늘 흠집을 내는 나를 밀어내지 않고,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도마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그런 도마가 늘 고맙고 미안해서 상처를 내지 않기 위해 몸을 사리지만, 그때마다 사람들은 칼이 들지 않는다며 도마를 마구 내려쳐요. 그때마다 얼마나 도마에게 미안한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어디 도마뿐인가요. 사람들이 아무리 조심해도 가끔 나 때문에 상처를 입어요. 그날은 사람들의 짜증과 화풀이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요. 어쨌든 나로 인해 생긴 상처니까.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주세요. 나도 빨간 피가 너무너무 싫다는 것을. 그러니까 나를 사용할 때는 방심은 금물. 늘 조심조심 주의를 기울여주세요. 제발!


하지만 주방에서 생기는 상처는 이것에 비하면 약과일지도 몰라요. 나와 친구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있으니, 그건 바로 우리가 무기로 쓰일 때예요. 지구에 존재하는 나쁜 사람들에게 경고할게요. 이보세요, 난 무기가 아니라고요! 난 당신을 위해 맛있고 따뜻한 음식을 만들 때 쓰이는, 그래서 없어서는 안 될 생활용품이란 말이에요. 이런 선한 나를 사람이나 동물을 해치거나 해코지를 하는 용도로 쓰는 당신의 머릿속이나 난 정말 궁금하다고요, 라고 꾸짖고 싶어요.


알았어요. 조금 진정시키고 화제를 돌릴게요. 내가 언제 가장 행복하냐고 물으셨죠? 온 가족이 한자리에 둘러앉아 과일을 먹을 때예요. 그건 아마 친구들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나를 조심스럽게 쥐고 사과나 배를 깎아 가족에게 건넬 때 나는 정말 행복해요. 자, 이제 저는 다시 주방 어딘가로 들어가야 해요. 마지막으로 다시 당부할게요. 나를 꼭 필요한 곳에 써주세요.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분명 따로 있으니까요. 행복이라는 이름의 그곳!


안경 _ 당신을 마주보기

쉿, 조용해주세요. 유일하게 그를 마주보는 시간이 돌아왔거든요. 나는 안경이에요. 처음 내 주인을 보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해요. ‘안경 쓴 모습이 정말 잘 어울려요!’


그때마다 나는 궁금했어요. 나를 쓴 그는 어떤 모습일까. 세수할 때, 잠자리에 들 때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순간 그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지라 나를 쓴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이 그리 많지 않거든요. 어쩌다 거울을 보는 그의 모습에서 나와 함께 있는 그를 보곤 하지만 하루 중 거울을 보는 시간은 너무 짧아서 아쉽기만 해요. 비록 그의 콧등에 내가 남겨놓은 희미한 자국이 사라지기도 전에 나를 다시 올려놓는 그이지만, 내가 없는 그의 얼굴을 잠시나마 볼 수 있는 그 짧은 시간을 나는 늘 기다립니다. 이제는 습관이 되어 의식하지 못하는 듯하지만, 무언가에 열심히 몰두하다가 조금 흘러내린 나를 집게손가락으로 살짝 올리고 콧잔등을 쓱 문지르는 그에게서 느끼는 행복을 당신은 모를 거예요.


참, 며칠 전 아주 큰일이 생겼어요. 그에게 내가 아닌 검은색 뿔테 안경이 생긴 게 아니겠어요? 한눈에 보아도 나보다 세련되고, 심지어 가격까지 월등히 비싼 그 안경을 보는 순간 하늘이 무너지고 안경알이 빠지는 듯한 충격에 빠졌어요.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그는 내가 아닌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쓰고 출근했어요. 매일, 아니 매 순간 그의 콧등에 걸려 여기저기를 볼 수 있었던 내게 그의 책상 서랍 속은 비좁고 답답하기 짝이 없었어요. 무엇보다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버려졌다는 기분…….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그날 밤, 회식을 마치고 돌아왔는지 알싸한 소주 냄새와 진한 삼겹살 냄새가 밴 그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를 찾는 게 아니겠어요.


-괜히 비싼 걸 샀어. 하루 종일 무거워서 불편했네. 뿔테 안경은 프레젠테이션 때나 써야겠어.


정리하지면 매일매일 평범한 일상은 나와 함께, 나보다 세련되고 비싸게 구입한 검은색 뿔테 안경은 프레젠테이션 등 중요하고 특별한 순간에 써야겠다는 것이었어요. 잠시 나는 생각했어요. 언제나 함께하는 게 좋은 걸까, 아님 특별한 순간을 지켜보는 게 좋은 걸까.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아서, 지난 시간을 그래왔듯이 늘 함께하는 게 좋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어요. 검은 뿔테 안경 역시 자신을 특별한 날에만 쓰겠다는 그의 선택에 불만이 없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우리는 이런 말을 나누며 친해졌어요.


‘우리 이제 좋은 친구가 되자. 우리는 결국 같은 물건이잖아. 그와 함께 세상을 또렷하게 바라보는 존재, 그가 하루에 한두 번 부드러운 천으로 우리를 감싸듯 살짝 쥐고 깨끗하게 닦아줄 때가 가장 행복한 존재, 그가 뜨거운 라면을 먹을 때나 따뜻한 커피를 마실 때 우리 때문에 불편한 것 같아 미안해하는 존재,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더듬거리는 손으로 가장 먼저 찾는 존재, 특별한 날 그의 이미지를 업그레이드시켜주는 몇 안 되는 존재. 그럼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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