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백

   
홍남권
ǻ
온하루출판사
   
14500
2018�� 08��



 

■ 책 소개


홍남권의 역사소설 시리즈


계백의 정체는 수수께끼 같다. 계백은 이름이 아니었다. 그의 본명은 백제승이었다. 우리나라에는 백제씨가 없지만 일본에는 있다. 부여씨에서 분파된 백제 왕족의 성씨이다. 그렇다면 계백은 무슨 뜻인가?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왕을 만난다’는 뜻이다. 그 근거는 ‘계백’현이라는 당시 지명이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계백은 황산벌로 향한다. 훗날 숱한 이야기를 낳은 역사적 장면이다. 황산벌에서 만약 계백이 이겼다면 그는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떵떵거리며 살았을까? 행복했을까? 아니다. 처자식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심지어 비정한 남편이라고 몹쓸 아버지라고 비난받았을 것이다.

 

의자왕은 당나라군에 대적할 인물로 친동생 부여의직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신라군에게 대적할 사람 또한 친동생처럼 믿을 수 있고 유능한 장군이어야 했다. 의자왕이 고르고 고른 사람은 계백이었다. 그런데 총사령관 계백보다 벼슬이 높은 사람이 두 명이나 있었다. 그들은 적에게 항복했다. 계백과 오천결사대는 전멸했는데. 그 두 사람이 황산벌전투 비밀의 실마리였다. 계백의 정체와 황산벌전투의 비밀을 풀어낸 작가의 탐구열과 상상력에 박수를 보낸다.

 

■ 저자 홍남권
저자 홍남권은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안시성 그녀 양만춘』 『평강 고구려의 어머니』 『계백 신을 만난 사나이』 등 장편소설과 『SE 스토리, 대지에 가치를 심는다』 『반석 스토리, 반석기초이앤씨 10년의 성장기』 등 기업스토리를 썼다.

 

■ 차례
제1장 사랑의 적
1. 뒤틀린 운명
2. 노옹과 괴동
3. 평화를 위해서
4. 온정을 실은 수레

 

제2장 거미는 싸우지 않고 이긴다
5. 거미줄 인연
6. 삼개년 대작전
7. 고구려에 소리치고 백제를 공격하라

 

제3장 황산벌의 사흘
8. 여왕 은고
9. 누가 이 아이들을 죽였나
10. 반역자
11. 오천 결사대
12. 계백, 신과 마주하다

 

제4장 부활을 꿈꾸다
13. 스스로 망한 백제
14. 벼랑 끝 여인들
15. 꿩의바람꽃

 




계백


사랑의 적

노옹과 괴동

왜국으로의 장도에 오른 계백은 먼저 금마저 쌍릉에 들렀다. 이곳에 무왕과 선화공주가 아기구덕의 쌍둥이처럼 잠들어 있었다. 계백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흙냄새가 젖처럼 달콤했다. 이 땅은 타로에게도 푸근했다. 선화공주를 모셨던 그의 어머니도 쌍릉 근처에 잠들어 있었다. 소나무 숲 오솔길을 따라 계백은 한 걸음 한 걸음 걸었다.


신라와의 국경에 이르러 계백과 타로는 옷을 바꿔 입었다. 계백이 타로가 되고 타로가 계백이 되었다. 이제 사람들의 시선은 타로에게 쏠릴 것이었다. 신분이 높은 이가 뭇시선을 받기 마련이었다.


몇 해 전 신라의 지방관원이 계백을 알아보고 환대를 한 적이 있었다. 선화공주의 아들인 계백은 신라인들에게는 신라의 아들이었다. 계백을 맞는 신라인들의 그 마음씨는 한편 고마웠고 한편 부담스러웠다. 계백은 이번 여정에선 김유신, 김알천 그리고 여왕, 이 세 명만 만나고 왜국으로 떠날 작정이었다.


계백은 손을 뻗어 하늘에서 내려오는 순백의 눈을 받았다. 세월을 거슬러 철부지 어린애가 된 듯 타로의 웃음이 싱그러웠다. 타로의 미소에서 불현 듯 계백은 지난날의 눈사람을 떠올렸다.


“그 아이는 어떻게 자랐을까?”

“그 아이라니요?”

“강수라는 아이 말이다.”


계백과 타로가 강수를 처음 만났던 십여 년 전의 그 날도 바람이 세찼다.


수염이 막 자라나기 시작한 계백은 강수의 눈에는 어른이었다. 계백을 바라보는 강수의 눈이 반짝거렸다. 불쑥 타로가 끼어들었다.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분을 말씀드리자면, 팔목구이라는 분이시다.”


계백의 본명은 백제승이었다. 계백은 그의 별칭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타로는 이 계백이라는 별칭도 곧잘 함구했다. 계백은 ‘왕을 만난다’는 뜻이라 눈치 빠른 사람들에겐 별칭도 위험했다.


부여씨에서 분파한 백제씨는 곧 계백의 신분이었다. 부여씨가 아닌 백제씨는 같은 왕족이지만 백제의 왕이 될 수 없었다.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는.


계백이 품에서 물건을 꺼내 강수에게 주었다.


“이 붓이 나보다 네게 더 잘 어울리겠다. 네 밝은 마음처럼 곧은 글을 쓰도록 하거라.”


수상쩍은 말을 남기고 떠나는 계백을 강수는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내가 임나가야인이란 걸 어떻게 알았지! 팔목구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별호는 또 뭐고!’

강수가 두 손으로 제 머리를 더듬었다. 그는 정수리 양쪽 옆으로 머리뼈가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편두의 흔적이었다. 편두는 뒤통수 뼈를 납작하게 눌러 길쭉하게 만든 머리로 임나가야의 전통이었다. 강수의 머리는 편두를 만들려다 어그러져 역삼각형이었다. 강수의 머리에 상흔으로 남은 편두는 과거가 아니라 그의 미래였다. 그의 소망은 망국 임나가야의 부활이었다.


평화를 위해서

계백이 말했다.


“참, 강수는 소문이 어떠하더냐?”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강수는 부모의 반대를 물리치고 미천한 여인과 혼인했답니다. 대장장이의 딸과 청년일 때부터 정을 통했답니다. 그걸 알고 부모가 반대를 했다지 뭡니까요?”

“그래서?”

“강수의 부모가 말하기를, ‘네 명성이 높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미천한 여인을 정식 처로 삼으려 하니 너와 나 모두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강수의 신분에 어울리는 여자를 얻으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망국의 백성이 존귀가 어디 있겠습니까? 빈천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도리를 배우고 행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리 단호하게 강수가 뿌리쳤답니다. 그 괴짜 녀석, 혼인도 꼭 저같이 했습니다요.”

“반골 기질에, 기개도 있구나.”


“왕자님! 그의 꾀와 재주가 보통이 아니옵니다. 사람들이 이르기를 신라 역사상 제일가는 신동이랍니다. 자칫 재주를 잘못 쓸지도 모를 일이잖사옵니까.”


“타로야. 됨됨이가 그의 재주보다 앞서는구나. 그의 피를 보고 싶지 않구나.”

“네, 압니다요. 알겠사옵니다요. 그런데 강수는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알아듣고 두 살 때 문자를 깨우치고, 에, 또 세 살 때 붓을 잡았답니다. 그리고요, 이건 진짜 극비인데요, 연전연패하는 신라가 지금까지 망하지 않은 이유가 강수의 심오한 지략 때문이랍니다요. 강수가 병법에도 통달해 김유신에게 미리미리 계략을 알려준답니다요.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제 방구석에서 말이옵니다. 강수를 살려둬서는 아니 되옵니다요.”


계백이 고개를 저어도 타로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나저나, 제가 저잣거리에서 호피를 다루는 갖바치에게서 들었사온데, 알천공이 호랑이 두 마리를 맨손으로 때려잡았답니다요. 알천공께서 신분도 높은 데다 완력도 세니, 뚱보 춘추공, 야심 많은 유신공, 심지어는 상대등 김비담도 꼼짝 못한답니다. 이건 진짜 비밀인데요. 알천공께서 화백회의를 좌지우지하니 나중에 신라의 왕으로 등극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옵니다.”

“그래서?”

“그래서라니요? 왕자님이 신라대왕의 사위가 되는 거 아니옵니까.”


타로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뻗으며 재잘거렸다.


“앙숙이던 두 나라 사이에 평화가 찾아오려나 보옵니다. 전쟁에 지친 서라벌 백성들이 이렇듯 말하옵니다. ‘배불리 먹는 게 첫째가는 소원. 베개 높이 베고 발 쭉 뻗고 자는 게 그 다음 소원이오.’ 아시겠지만 우리 백제 백성들도 그다지 다르지 않사옵니다요. 전쟁이 없는 왜국으로 건너가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참, 왕자님은 신라, 백제 중 어디에 신혼집을 꾸미실 것이옵니까? 예정대로 왜국에서 사시는 거도 무방할 듯하옵니다만.”


타로의 말을 들으면서도 계백은 강수를 생각했다. 강수는 조국 임나를 멸망시킨 신라의 골품에 얽매이지 않았다. 임나가라 왕족의 후예인 그의 혼인은 골품제와 신라, 나아가 세상이 정한 질서에 대한 반항이었다. 고장 난 나침반 같은 그 반항의 끝이 어디로 향할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온정을 실은 수레

매섭던 바람 끝이 무뎌진다 싶더니 해가 바뀌었다. 달빛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른 봄날, 아라는 온 힘을 다해 사내아이를 밀어냈다.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담장을 넘어 우렁차게 퍼져나갔다. 계백의 집은 아기의 탄생을 하례하는 행렬이 줄을 이었다. 의자왕이 몸소 계백의 사저에 거둥했다. 의자왕은 아기를 품에 안고 기뻐했다.


“아기의 이름은?”

“아직 짓지 않았사옵니다.”

“문우나 문효는 어떤가? 글과 벗하는 게 칼을 잡는 것보다는 나을게야. 글로 우리 아우님에게 효도한다면 더욱 좋지 않겠나.”

“대왕, 문우로 하겠사옵니다. 둘 다 좋은 이름이니, 둘째를 낳으면 그 아이를 문효라 하겠사옵니다.”


계백에게는 오천솔로 불리는 사병 오천 명이 있었다. 그의 사병은 여느 귀족의 사병과 달랐다. 오천솔은 평상시에는 각자 흩어져 생업에 종사했고 계백과는 그 인연의 끈만 유지했다. 그들은 해마다 한 차례 모여 사냥을 함께했다.


오천솔의 사냥은 원래 군사훈련을 겸한 것이었는데 근자에는 소일과 풍류로 그치고 있었다. 계백이 금마저로 이주한 뒤 전장으로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계백이 세상일과 담을 쌓자 갑갑한 것은 백제였다. 계백은 백제의 눈과 귀였고 나침반이었다. 계백의 팔목구이가 닫힌 백제는 국제정세에 점점 어두워져 갔다.


계백의 은둔 소식에 귀가 번쩍 뜨인 건 신라였다. 신라는 덩치와 힘에서 백제에 밀리고 있었다. 신라인들은 계백의 은둔을 하얀 까치가 떼로 날아든 것 같은 길조라 여겼다.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깨우치려는 듯 백제는 신라에 대대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초가을의 해가 뒷산 산마루에 설핏하게 걸려 있던 날, 아라는 계백의 둘째 아들을 낳았다. 아기 이름은 의자왕이 지어준 문효로 하였다. 의자왕이 조서까지 내리며 기뻐하였다.



거미는 싸우지 않고 이긴다

거미줄 인연

당나라의 패전 소식이 또 서라벌에 날아들었다. 물심양면 당나라 편에 섰던 신라는 경악했다. 서라벌에서는 화백회의가 거푸 소집되었다. 잦은 화백회의는 대책이 없다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새해가 다가오도록 위기를 타개할 묘책은 나오지 않았다. 날씨가 풀리면 고구려와 백제가 협공을 해올지도 몰랐다. 신라는 고구려를 배신한 괘씸죄에 걸려 었다.


김유신이 화백회의에 참석하러 사저를 나섰다. 하늘은 잿빛이었다. 그의 애마도 제자리걸음을 놓았다. 갑자기 김유신이 고삐를 반대 방향으로 틀었다. 강수의 집을 향해 말이 내달렸다. 줄을 완전히 잘못 선 게다. 이대로 화백회의에 가봤자 해답이 나오지 않을 게 뻔했다. 그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김유신과 강수는 옛 가야 사람이었다. 고향마저 가까운 둘은 태생부터 인연이 깊었다.


“이보게 강수, 계백왕자와 알천공 여식과의 혼인 소식은 들었는가? 백제가 잠잠해지겠는가?”

“재능이 제 아무리 출중해도 계백은 일개 왕자에 불과하옵니다. 춘추공을 보십시오. 보위에 오르지 못해 허구한 날 무위도식하는 춘추공이나 계백이나 매한가지이옵니다. 참, 춘추공은 오늘도 꿩고기를 드셨사옵니까?”


김유신이 가슴을 툭툭 쳤다. 김춘추가 매 끼니마다 꿩고기를 먹는다는 소문은 서라벌의 화젯거리였다.


“춘추공은 이제 틀렸어. 저렇듯 꿩고기에만 관심을 가져서야. 저 비대해진 몸을 버티는 말이 없다더군.”


강수는 꿩고기를 탐하는 김춘추의 심중을 훤히 보았다.


“춘추공이 왕이 되려면 훼방꾼 둘만 제거하면 되옵니다.”

“둘이라면, 비담공과 알천공이로군.”


김유신은 성가셨던 두통과 치통이 한꺼번에 가신 느낌이었다.


“하나를 얻으러 왔다가 덤까지 받아가니 염치가 없군. 강수, 세상이 자네를 몰라줄지라도 나는 자네 은공을 절대 잊지 않겠네.”

“제 은공이랄 게 뭐 있겠사옵니까? 유신공과 저는 이미 망해버린 가야사람이옵니다. 제가 세상에 나온 까닭은 제 이웃이 망국의 설움을 떨치게 하려는 것이옵니다. 신라가 망한다면 우리 가야인들은 두 번 죽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김유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라이닝 됐지만 다른 신라인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망국의 통렬함은 멀리 있지 않았다. 강수는 손궤 서랍을 열어 황모 붓을 꺼냈다. ‘계백, 그대 때문에 이 건곤일척의 도박판에 뛰어든 것이오. 아주 흥미진진한 판을 만들어 놓을 테니 한번 놀아봅시다.’ 강수는 계백이 주었던 그 붓을 노려봤다.


고구려에 소리치고 백제를 공격하라

647년, 선덕여왕이 운명하자 왕위를 계승하려는 암투가 벌어졌다. 유력한 후보 김비담, 김알천, 김춘추, 이 셋 가운데 김비담이 먼저 칼을 뽑았다. 김춘추와 손잡은 김알천에게 상대등 김비담이 밀렸다. 김비담이 군사를 일으켰으나 김유신이 그 세력을 제압했다. 김비담은 역적으로 몰려 일족이 멸문을 당했다. 김유신이 신라의 병권을 손안에 넣었다.


하지만 서라벌의 민심은 김춘추가 아닌 김알천으로 기울었다. 민심은 김알천의 용력과 인품을 높이 샀다. 지금 당장 보위에 오르고 싶어 하는 김춘추를 김유신과 강수가 말렸다. 김춘추가 김알천과 타협해서 승만 궁주를 보위에 올렸다. 진덕여왕이었다.


몇 해 뒤 진덕여왕이 유명을 달리했다. 왕위 승계를 놓고 신라 전체가 들썩거렸다. 피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전 화백회의는 왕위 계승자로 김알천을 추대하기로 했다. 더 이상 화백회의에 승복하지 않겠노라 작심한 김춘추가 김유신에게 속마음을 토로했다.


“오늘 이 김춘추와 천 년 역사의 화백회의 둘 중 하나가 죽소!”


김유신이 칼을 뽑았다.


“그럼, 화백회의가 죽어야지요.”


김춘추가 신라역사상 최초로 화백회의에 반기를 들었다. 김유신이 화백회의가 열리는 서라벌 남산 우지암에 군사를 풀어 우지암을 빙 둘러쌌다.


계백이 말했었다. ‘알천공, 부디 김유신을 조심하십시오.’ 김알천은 너무 늦게 계백의 충고를 생각해냈다. 김알천이 김유신의 군사들에게 외쳤다.


“나는 늙어서 정사를 볼 수 없으니 길을 터라. 집에 가서 잠이나 청해야겠다.”


군사들은 순순히 길을 열어주었다. 김알천은 천천히 산길을 내려갔다. 김알천의 등에 수십여 발의 화살이 박혔다. 그는 호랑이를 때려잡은 맨손으로 흙을 움켜쥐며 고꾸라졌다. 이내 서라벌에 김알천이 호랑이 밥이 됐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드디어 김춘추가 신라왕이 되었다. 김춘추는 그토록 염원하던 옥좌에 올랐어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그가 앉은 옥좌는 백제와 고구려의 동맹이라는 가시 돋친 방석이 깔려 있었다. 무열왕이 황금방석에 앉아있던 어느 해였다. 누워있던 가시가 불뚝 일어섰다.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이 그의 엉덩이를 찔러댔다. 무열왕은 눈 깜짝할 새에 33개나 되는 북쪽 성을 잃었다.


강수는 큰 그림을 그렸다. 세부전술까지 치밀하게 짠 다음 무열왕을 알현했다. 강수는 당나라에 보낼 국서를 품에서 꺼냈다.


무열왕은 강수가 작성한 국서를 읽어보았다.


‘천하에 그토록 이름났던 태종황제께서도 하루아침에 고구려를 멸하지 못했사옵니다. 이는 결코 천책상장이라 칭송 받던 선황제의 지략이 부족해서가 아니옵니다. 연개소문과 안시성 성주가 감히 선황제보다 뛰어났기 때문도 아니옵니다. 저 요동의 사나운 늑대 같은 고구려에 그를 따르는 충견 백제가 있어 선황제께 육로라는 외길밖에 없었던 탓이옵니다. 육로로는 백만 대군이 아니라 이백만 대군을 동원하셔도 불가할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수양제의 패인은 황상께서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계실 것이옵니다.


황제폐하께서도 삼인성호나 증삼살인의 고사를 들으셨을 것이옵니다. 금년과 내년, 내후년에 백제를 정벌한다는 조서를 내리시옵소서. 그리고 올해와 내년에 고구려에만 군대를 보내시옵소서. 그러면 내후년에 백제를 벌한다는 조서를 내리셔도 고구려와 백제는 이를 믿지 않을 것이옵니다. 두 나라를 완벽히 속여 넘기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감히 자신하옵니다.


황상을 번거롭게 하고 대당의 병사들이 피를 흘리는데 저희 신라가 어찌 가만히 있겠사옵니까. 저희 신라가 백제 군사 오만을 고구려로 이동시켜, 천자의 군대가 사비성으로 향하는 길을 텅 비게 만들겠사옵니다. 이를 이루지 못한다면 저 김춘추의 목을 폐하께 바치겠사옵니다. 지금 황제께서 보고 계신 이 글을 올린 신라태자의 목도 함께 내놓겠사옵니다. 개부 의동삼사 신라왕 김춘추.’


무열왕이 눈을 감았다. 장장 삼 년에 걸친 대작전이었다. 무열왕이 국서를 내려놓았다.


“어떻게 우리 신라가 백제의 군사를 고구려로 이동시킬 수 있다는 것인가? 그것도 오만씩이나. 우두선생, 자신 있는가?”

“감히 대왕의 목을 제 맘대로 걸었으니 은고와 연정토를 부추겨 꼭 해보이겠나이다. 이 작전은 고구려에 소리치고 백제를 공격하는 것으로 삼척동자도 안다는 성동격서이나이다.”


태자가 신라의 계책에 호응하겠다는 당고종의 국서를 무열왕에게 전했다. 야심찬 삼개년 대작전의 시작에 무열왕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김유신과 강수는 기뻐할 겨를이 없었다. 당군이 바다를 건너기 전에 백제의 힘을 분산시켜야 했다. 어서 빨리 백제의 실세인 은고를 움직여야 했다. 신라가 마음먹는다고 무조건 되는 일이 아니었다. 은고는 타국의 여왕이었고 작전은 비밀리에 진행해야 했다. 강수는 은고를 움직이려 백제의 유력한 중신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삼개년 대작전 첫해인 658년, 백제를 공격한다는 당고종의 조서에 사비궁은 난리가 났다. 백제는 바짝 긴장했으나 결국 말뿐 백제로 쳐들어오는 당나라군은 없었다. 백제는 안도했지만 고구려는 그러지 못했다. 당나라의 맹장 설인귀가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659년 당고종은 백제를 공격한다는 조서를 다시 발표했다. 그러고는 백제가 아닌 고구려를 공격했다. 설인귀가 고구려 영토 깊숙이 들어와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는 당나라로 돌아갔다.


백제는 거듭 당나라한테 속았다. 어이가 없었으나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백제의 시선과 군사력을 분산시키려는 신라의 술책이라 여겼다. 당태종보다 못난 당고종한테 겁먹을 이유는 없었다. 내년, 아니 내후년이면 천년 고목 신라는 그 허리가 꺾일 것이다.



황산벌의 사흘

여왕 은고

거칠 것 없는 은고의 욕망은 나이를 먹을수록 재물에 대한 끝 모를 탐욕으로 나타났다. 그녀의 주머니로 들어오는 수입 중에는 신라군 포로들을 노비로 팔아 챙긴 돈도 있었다. 백제 땅에 은고의 목장은 계속 늘어났다. 군마를 길러 고구려에 파는 것은 그녀의 새 돈벌이 수단이었다. 사택천복이 황금 오천 냥을 들여 귀족들에게 진미를 대접해 그의 부유함을 과시하면, 은고는 이에 질세라 한 끼 식사에 백금 만 냥을 쓴 것을 자랑했다. 상좌평 사택천복과 누가 더 재산이 많은지 서로 재보며 달포를 지새웠다. 금은보화마다 값을 매기고, 노비, 농장은 물론 목장에서 기르는 수천 마리의 마소까지 일일이 다 세었다.


660년 봄 당나라의 대 고구려 출정 소식이 바다 건너 사비성에도 전해졌다.


당나라에 있던 계백의 수하가 천장 우도에게 밀서를 보내왔다. 曾參殺人, 聲東擊西. 여덟 글자의 짧은 글이었다. 우도는 지체하지 않고 계백에게 달려갔다.


“전쟁이옵니다. 보시옵소서!”


계백의 눈과 우도의 눈이 마주쳤다.


“증삼살인이라면 세 번의 거짓말, 게다가 성동격서라면?”

“지난해와 지지난해, 이 두 해에 걸쳐 고구려를 친 것은 올해 우리 백제를 치려는 연막작전이었사옵니다.”


사비성을 향해 말을 몰아가는 계백의 가슴에 바람이 들어찼다. 뚜벅뚜벅 계백은 사비궁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의자왕에게 당나라의 출병이 백제를 향한 것이라고 아뢰었다. 사비궁은 분분한 의견으로 웅성거렸다.


사택임자가 계백의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는 김유신과의 약조를 저버리지 않았다. 사택임자가 의자왕에게 고했다.


“감히 신라가 우리를 공격하다니요! 계백왕자의 주장은 그릇된 것으로 망언이나이다.”


계백은 사택임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로지 형님 의자왕만 바라보았다.


“아니옵나이다. 신라의 음모이옵니다. 대왕, 속지 마소서. 절대로 믿으시면 아니 되시옵나이다. 요동도행군대총관은 계필하력, 평양도행군대총관은 이세적, 그런데 수군을 이끄는 신구도행군대총관은 소정방이옵니다. 소정방이 고구려 수군과 싸울 거라면 수전에 약한 그를 왜 대총관으로 삼았겠사옵니까!”


계백은 의자왕의 이마에 패인 깊은 주름과 성성한 백발을 보았다. 이미 예순이 넘은 의자왕이었다. 의자왕이 내관들의 부축을 받으며 사비궁을 나갔다.


계백은 신라군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탄현은 돌파하려면 시간이 걸리니 기습작전에는 적합하지 않은 곳이었다. 신라군은 탄현으로는 절대 오지 않을 것이라 계백은 확신했다.


그렇다면, 그래, 거기였다. 신라군은 당군과의 합류가 용이한 그곳으로 올 것이었다. 이 작전은 오래전부터 신라가 치밀하게 준비한 그림임이 분명했다. 색칠은 김유신이 도맡고 있을 터였다. 그 밑그림을 그렸음 직한 인물을 계백은 짐작해보았다. 그놈이구나! 계백은 강수의 살기 띈 눈빛을 떠올렸다. 계백의 예측대로 강수가 짜 놓은 밑그림이라면 그 채색은 핏빛으로 섬뜩할 것이었다.


계백은 천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계백은 그의 이름으로 각지에 흩어져있던 오천솔을 소집하기 시작하였다. 오천솔, 말 그대로 오천 명의 사람이었다. 은고와 귀족들은 오천솔을 계백의 가병으로 여겼다. 오천솔은 그들 스스로를 계백의 심복이라 생각했다. 그 어느 때라도 함께할 수 있는 오천솔은 계백에게는 벗이자 동지였다.


특히 우도, 정나말, 수해, 마고, 홍궁은 계백의 최측근들로 천 명을 이끌어 천장이라 불렸다. 계백은 이 다섯 명과 형제에 버금가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나라 산동에서 출발한 선단이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수천 척 군선이 고래 떼처럼 무리를 지어 바다를 항해했다. 선단은 당나라군 13만 5천을 태우고 있었다. 당나라군은 일단 덕물도에 상륙한 다음 북쪽으로 고구려를 공격하는 척하다가 남쪽으로 백제를 공격할 속셈이었다.


계백의 예상대로 김유신은 서쪽 탄현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신라군의 말머리는 북쪽을 향했다. 고구려를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려는 계략이었다. 북상하던 신라군은 일단 남천정에서 당군이 덕물도에 상륙하기를 기다렸다.


무열왕이 이끄는 5만의 예비 병력은 공격이 아닌 최후의 방어전에 대비했다. 김유신이 거느린 5만 군사가 패퇴한다면 금돌성이 신라 최후의 보루가 될 것이었다. 강수의 복안이었다.


사비성으로 향하는 신라군의 다리는 무거웠다. 그런데 백제군은 신라군의 진군을 가로막지 않고 있었다. 신라군이 전후좌우를 둘러봐도 백제군은 보이지 않았다.


660년 초가을, 때늦은 황사가 해풍을 타고 넘어와 백제 땅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사비성은 누런 흙먼지로 뒤덮일 것이었다.


누가 이 아이들을 죽였나

신라군은 북진이 아닌 남진을 하고 있었다. 비로소 백제는 당나라와 신라의 사냥감이 북쪽 고구려가 아님을 똑똑히 알았다. 신라가 탄현을 공격할 것이라 주장했던 부여성충과 사택흥수는 수치심에 입술을 깨물었다. 침묵하는 이들이 많아 사비궁 안팎은 시끄럽지 않았다.


의자왕이 명을 내렸다.


“당군은 좌평 부여의직이 맡아라.”


의자왕은 백제군 2만의 지휘를 친동생인 부여의직에게 맡겼다. 경계심이 작용한 탓이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된 데는 백제조정에 신라와 내통하는 자가 있음이었다. 의자왕은 누구를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나마 핏줄이 나을 테지만 그조차도 전적으로 신뢰하진 못했다. 신라군을 먼저 치자던 부여의직을 당군과 대적하게 했다. 경계심과 위기감 속에 의자왕은 판단력이 흔들리고 있었다. 은고가 의자왕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그럼, 신라는 누가 맡사옵니까?”


의자왕이 고개를 쳐들었다가 숙였다. 머릿속에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의자왕은 생각에 빠져들었고 신하들은 의자왕의 입만 바라보았다. 신라군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상념에 잠겨있던 의자왕이 탁자를 내리쳤다.


“계백. 그래, 계백이다.”


신하들은 극도로 날카로워진 의자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불쑥 은고가 끼어들었다.


“영명하신 판단이오시나, 그의 처가 신라인인 게 걸리옵니다. 계백왕자에게 군대를 이끌고 싶으면 그의 처자를 죽이라 명하소서.”

은고는 장군의 인사권에도 참견하고 나섰다.


“계백에게 군사를 많이 내주면 아니 되시옵니다. 그에겐 오천솔이 있지 않사옵니까? 아니, 아니지요. 그래도 불안하니 좌평 부여충상과 달솔 흑치상영을 좌장과 독군으로 삼아 그를 감시해야 할 것이옵니다. 아참, 계백이 왕자랍시고 그들의 말을 무시할 수도 있잖사옵니까. 계백에게 달솔벼슬을 되돌려주고 달솔 상영을 좌평으로 승진시키면, 상영은 계백을 독려하며 열심히 싸울 것이옵니다. 그리고 부여의직 왕자에게는 사비수에 진을 쳐서 사비성을 지키라 명하십시오.”


의자왕은 은고의 직언에 솔깃했다. 당나라군부터 끝장내자던 흑치상영을 신라군과 싸우게 하자는 방안에도 마음이 쏠렸다. 의자왕이 서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계백의 처자를 죽여야 한다는 은고의 주장까지 먹힌 셈이었다.


사비궁을 나서서 사택임자, 부여충상, 흑치상영이 밀담을 수군거렸다.


금마저 계백의 집으로 사비궁의 통첩이 날아들었다. 신라군과 싸우고 싶으면 전장으로 나가기 전에 처자식을 죽이라는 내용이었다. 통첩을 받아든 계백은 망연자실했고 오천솔은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660년 음력 7월 8일, 계백의 아내 아라가 두 아들과 함께 다과상 앞에 앉아있었다. 상에는 술병과 잔 세 개가 놓여 있었다. 문을 열고 계백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선 채로 계백은 처자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계백이 차마 입을 열지도 못하자 아라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나가 싸우십시오. 백제를 지키십시오. 제가 신라인이기에 조정에서 출전을 불허한다고 들었습니다. 임의 사랑을 간직하고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겠습니다. 이 아이들은 제가 저세상에서 돌보겠습니다. 그대를 처음 뵈었을 때부터 제 마음과 생명은 그대 것이었습니다.”


계백이 아라와 두 아들을 바라보았다. 세 사람도 계백을 보았다. 그렇게 넷은 서로에게 작별을 고했다. 아라는 두 아들에게 먼저 약을 먹였다. 쓰러진 아들들을 품에 안고 아라도 약을 마셨다. 어머니 품에 안겨 죽은 아들들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두 아들을 가슴에 안은 아라도 그러했다. 계백은 아라의 유언대로 셋의 눈을 감기지 않았다. 그는 처자의 최후를 가슴 깊이 묻었다.


반역자

황산벌은 신화 속 거인이 남긴 발자국처럼 울퉁불퉁 패인 채 한갓졌다. 높은 물마루가 휩쓸고 간 뒤 청청함만이 남아있는 잔잔한 바다 같았다. 660년 7월 9일 늦더위가 한창인 황산벌 대지 곳곳에 초록이 깊이 배어있었다. 하늘과 조화를 이뤄 대지는 더없이 싱그러웠고 아침햇살 사이사이에는 선선한 바람이 배어있었다. 황산벌을 스치는 아침 바람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밤새 이슬을 머금은 황산벌의 풀잎들은 꼿꼿하고 푸르렀다. 오만 대군과 맞서려는 계백과 오천솔의 용기처럼.


계백과 오천솔은 목장의 통나무 울타리를 뽑아 황산벌 낮은 언덕 세 곳에 진지를 구축했다. 나무그늘 아래서 오천솔은 배를 든든히 채웠다. 그들은 풀밭에 누워 하늘높이 떠가는 구름을 감상했다. 구름은 물속을 헤엄치는 대어처럼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조각구름은 끼지 않은 화창한 날씨였다. 낮술에 낮잠까지 즐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았다. 저 멀리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짤막한 감상을 깼다. 계백은 백마에 올라 신라군을 기다렸다.


신라군이 전투태세를 갖추었고 오천솔도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계백이 명적을 쏘아 올렸다. 시위를 벗어난 화살이 괴기한 울음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우우우, 오천솔이 고함을 질렀다. 오천솔과 신라군이 일시에 내지르는 고함이 황산벌을 뒤흔들었다.


신라군 진영을 파헤친 오천솔은 각개격파로 싸웠다. 포위될 성싶으면 재빨리 도망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신라군의 공세가 주춤하다 싶으면 돌아서서 다시 돌격했다. 오천솔은 손에 잡히지 않는 바람 같았다. 바람은 자유자재로 방향을 틀었다. 덩어리를 이룬 듯싶던 바람은 이내 흩어지면서 신라군의 혼을 앗아갔다. 신라군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졌다. 오천 의 기동력을 감당하지 못하자 김유신이 또 퇴각을 알렸다. 퇴각을 알리는 나발마저 주눅 든 듯 매가리가 없었다.


오천 결사대

7월 10일의 날이 밝았다. 오늘은 당군과 신라군이 합류하기로 한 날이었다.


우와아아아! 황산벌에서 오천솔과 신라군이 다시 맞붙었다. 네 차례나 만나니 서로의 얼굴이 낯익었다. 적이 적처럼 느껴지지 않았으나, 반드시 상대를 쓰러뜨려야 하는 승부였다. 오천솔과 신라군은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생각만 다졌다.


강수가 김유신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지금 저 계백의 휘하에 좌평 부여충상과 달솔 흑치상영이 있답니다.”


김유신의 눈이 빛났다.


“분명 그자들인가?”

“틀림없사옵니다.”

“사택임자에게 미리 손 써두길 잘했군. 저 계백 한 사람 때문에 대사를 그르칠 뻔했지 않은가.”

“곧 전세가 뒤바뀔 것이옵니다.”


계백, 신과 마주하다

7월 11일 새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당나라군과 신라군은 7월 10일 합류하지 못했다. 당군과 신라군이 잃어버린 하루를 계백이 가져갔다. 계백은 백제사람 모두에게 전쟁에 대비할 하루를 벌어준 셈이었다.


자정을 넘기도록 계백은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잠을 청해봤지만 또렷한 정신이 잠을 허락하지 않았다. 4전 4승을 거두었지만 계백은 고민이 많았다. 뭐지? 그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찼다. 뒤집어 생각해봐도 그것이 뭔지 떠오르지 않았다.


계백은 억지로 잠을 청했다. 날이 밝으면 싸워야 하니 눈은 붙여둬야 했다. 무거운 몸에 정신만 대꼬챙이처럼 뻗어나갔다. 놓치고 있는 게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계백은 어느 결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경계병이 아닌데도 깨어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잠을 이루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계백이 잠들기만을 기다린 사람들이었다. 달이 구름에 가린 동안 검은 그림자들이 나타나 황산벌에서 꼼지락거렸다. 부여충상과 흑치상영이 데리고 온 수족 30여 명의 움직임은 긴밀했다. 막사를 지키는 당번병은 이 아는 얼굴들에게 방심했다.

부여충상과 흑치상영과 그 수족들은 계백의 막사 안으로 유유히 들어갔다. 부여충상이 자신 있게 칼을 뽑았다. 그가 장검을 높이 쳐들었다. 그의 팔이 부들부들 떨었다. 하얗게 질린 부여충상이 질끈 눈을 감았다. 그의 손은 허공에서 내려올 줄 몰랐다. 흑치상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부여충상의 팔은 뒤로 돌아서서야 내려왔다. 흑치상영이 허리에 차고 있던 단도를 뽑아들었다. 깊이 잠들어 있는 계백의 심장에 칼을 꽂았다. 계백은 스치는 섬광에 번쩍 눈을 떴다. 흑치상영의 형상을 바라보는 계백의 눈은 그윽했다.


나를 죽이는 것은 백제인가, 신라인가. 나를 죽이는 것은 칼일 수도, 마음일 수도 있었다. 하늘이시여, 이 나라를 어찌 하시렵니까. 신이시여, 이 겨레를 어찌 하시렵니까.


눈을 부릅뜬 채 계백은 죽었다. 그의 심장이 더 이상 뛰지 않았어도 흑치상영은 계백의 목을 베었다. 부여총상과 흑치상영은 서둘러 막사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계백의 수급을 들고 야음을 틈 타 신라 진영으로 도주했다.


7월 11일 동녘이 밝았다. 오천솔은 목이 없는 계백을 발견했다.


계백의 참모 격인 천장 우도는 고민을 거듭했다. 슬픔은 전염되기 십상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는지 우도가 오천솔을 독려하고 나섰다.


“오천솔아, 전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적장을 암살해서 이기는 것 또한 승리다. 계백왕자님을 지키지 못한 우리가 죄인이다. 이 전투에서 진다면 우리는 두 번 죄를 짓는 것이다. 내가 가야할 길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 길은 오직 하나, 계백왕자를 따라 저 하늘로 가는 것이다. 오천솔아, 그대들은 어찌할 것인가?”


오천솔이 대답했다.


“우리는 죽어도 죽는 게 아니다. 우리가 죽는 날이 바로 새롭게 태어나는 날이 될 것이다. 이 땅에서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되어 계백왕자와 함께 영원히 살자!”


고개를 끄덕이며 오천솔은 결사대가 되기로 작심했다.


오천솔이 신라 진영을 바라봤다. 신라군은 화살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천솔은 신라군의 공격을 기다리지 않았고 김유신은 오천솔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수는 오천솔의 선제공격을 예상하고 땅에 미리 마름쇠를 뿌려놓았다.


오천솔이 신라 진영으로 말을 달렸다. 마름쇠를 밟은 말들이 울음소리를 내며 꼬꾸라졌다. 말에서 나뒹군 오천솔도 마름쇠에 찔려 절뚝거렸다. 그들은 창칼을 높이 쳐들고 전진했다. 어느새 사방이 신라군이었다. 오천솔은 서서히 포위되어 갔다. 중과부적이었으나 오천솔은 아무도 도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피가 튀며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팔과 다리가 잘리고 목이 부러져도 죽겠노라 다짐했던 오천솔은 흔들리지 않았다. 항복이란 말을 오천솔은 몰랐다. 결사를 맹세한 이들의 시체가 벌판에 나뒹굴었다.


오천솔의 전멸은 다른 오천솔 한 명 한 명에 대한 예의였다. 오천솔은 흩어지지 않고 같은 곳을 향하여 어깨를 부딪고 나란히 걸었다.

강수는 계백과 오천솔의 혼을 달래는 위령제를 지냈다. 계백과의 첫 만남에서 그의 죽음까지 이십 년 세월이 녹아있는 두 시진이었다.


시린 웃음과 울음이 황산벌을 떠돌았다. 강수의 웃음과 울음이 계백과 오천솔과 신라군 1만의 주검으로 가득 찬 텅 빈 황산벌에 메아리쳤다. 강수가 독백했다.


불멸의 이름은 남겼으니 계백 그대가 더 오래 사는 것입니다. 그대 계백은 그 이름으로 영원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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