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잘 지내는 중입니다

   
김쾌대
ǻ
상상나무
   
13000
2019�� 03��



저자 김쾌대
1967년 서울 출생. 대학에서 무역학을 전공하고 대기업 해외관련 업무를 하다가, 캐릭터 라이센싱과 IT 웹 개발 벤처회사를 창업해서 운영했다. 사업이 망한 이후 콘텐츠 마케팅 기획 프리랜서로 활동했지만, 돈을 거의 벌지는 못했다.  

 

나이 오십에 접어들면서 심근경색으로 응급실에 실려 갔고, 골든 아워를 놓치지 않아 죽지 않고 생환했다. <산티아고>라는 이름으로 SNS와 팟캐스트 방송을 하며 폐쇄적이고 비관적인 삶의 태도를 버리고 사람들과 교류하며 지내다가 글 쓰는 작가로 인생 2막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고 2년 동안의 준비과정을 거쳐 첫 책을 쓰게 됐다.

 

생각보다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일들이 너무 많은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저자는 말한다. 자기 자신과 주변을 새롭게 발견하기, 가족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를 통하여 현재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은 내일을 준비할 수 있지 않을까.

 

든든한 아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고, 조금은 특별한 딸아이에게 정성스러운 요리를 해 주는 것처럼, 자신만의 레시피로 따뜻한 밥을 짓듯 글을 지으면서 독자들과 더불어 함께 가고 싶은 것이 저자의 바람이다.

 

■ 차례
첫 번째 이야기
# 1-1 혼밥 이야기
# 1-2 싸구려 수건과 결별하기
# 1-3 청소를 하다가
# 1-4 고기가 진리였는데
# 1-5 새벽 빨래방에서
# 1-6 왼손으로 밥 먹기
# 1-7 고수부지의 하늘
# 1-8 초라하게 느껴질 때
# 1-9 라면 끓이기
# 1-10 남성용 보정속옷 착용기
# 1-11 꼰대로 사느니
# 1-12 새로운 도전_여행
# 1-13 새로운 도전_독서
# 1-14 새로운 도전_팟캐스트
# 1-15 카페에서 글쓰기
# 1-16 슬럼프를 벗어나려면

 

두 번째 이야기
# 2-1 내 마음속의 연탄재
# 2-2 아빠, 허무해
# 2-3 사진을 배우고 싶어
# 2-4 성인식 선물
# 2-5 차마 깎지 못한 연필
# 2-6 친구 같은 사이
# 2-7 식당보조 생활
# 2-8 현장에서 배운 것들
# 2-9 부부라는 이름
# 2-10 아버지, 흔들리는 촛불처럼
# 2-11 만년 소녀, 어머니
# 2-12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 2-13 뮤지컬이 아니었다면
# 2-14 즐거운 요리
# 2-15 소확행 모임
# 2-16 차오르는 사랑

 

세번째 이야기
# 3-1 이끼와 활력
# 3-2 돈 때문에 두려워질 때는
# 3-3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 3-4 비록 유리 멘탈일지언정
# 3-5 뭔가에 중독되는 진짜 이유
# 3-6 수조에서 벗어나기
# 3-7 관습을 넘어서는 중입니다
# 3-8 노화와 맞서는 중입니다
# 3-9 죽음을 예비하는 중입니다
# 3-10 인생 2막 준비하기
# 3-11 은하수를 바라보며
# 3-12 연기를 하면서 얻은 것
# 3-13 나에게 사과하기
# 3-14 딸아이와 함께 하는 바리스타 수업
# 3-15 해돋이를 바라보며

 

에필로그




생각보다 잘 지내는 중입니다


혼밥 이야기

여러분은 혼밥 좋아하시나요? 저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혼자서 밥을 먹었어요. 좋아해서라기보다는 편했기 때문에...


어릴 적 부모님께서 너무 많이 다투셨기 때문에 늘 조금은 주눅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어요. 밥을 함께 먹으면 금방 친해지고 마음을 여는 사이도 될 수 있는 것 같은데 말이죠.


철도 일찍 들어 조숙했어요. 삼 남매의 첫째라서 동생들을 이끌어야 하는 처지였고, 반에서도 반장이나 부반장을 맡으며 늘 책임감을 느끼는 환경에서, 혼자 밥을 먹을 때 짐을 벗고 해방된 느낌이 들었나봐요. 예전에는 혼자서 밥을 먹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무리에 섞이지 못하고 소외되었기 때문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바라봤지만 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서 밥을 먹는 걸 즐겼어요.


이제 시대가 바뀌고 혼밥의 시대가 온 것 같네요. 사방을 둘러보면 1인용 먹거리가 차고도 넘쳐서 고르는 데도 힘들 지경이에요. 이렇게 많은 제품이 쏟아져 나온다는 건 혼자서 지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뜻이겠지요. 그 사람들이 집밥을 그리워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오히려 더 좋아졌어요. 혼밥의 매력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당하게 간섭받을 필요도 없고, 대신에 불필요하게 누군가를 참견할 이유도 없다는 점이 아닐까 해요. 게다가 요즘 나오는 먹거리들이 간편하고 맛도 제법 좋은 편이라서 만족도가 높기도 합니다.


그렇게 나름 혼자서 밥을 잘 먹고 지냈는데 요즘은 문득 자문하곤 해요. ‘혼밥 하면 혼자라는 말에 온통 신경을 쓰느라 혹시 밥(을 먹는다)에 무심했던 건 아닐까...’ 우리가 누군가에게 “언제 밥 한번 먹자”라고 할 때, 그건 단순히 만나서 음식을 위장 속에 채우자는 뜻은 아니잖아요. 거기에는 밥을 먹으면서 사는 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말 못할 심정도 나누고, 고민거리도 털어놓자는 뜻인데 제가 살면서 그런 인간적인 교류를 소홀하게 생각한 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1인용 제품들에서 문득 비인간적인 느낌이 들어서 씁쓸하기도 해요. 말 그대로 음식에서 사람 냄새가 많이 없어져 버린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요. 아마 그릇이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플라스틱 용기, 비닐봉지, 종이팩, 나무젓가락 등이 주는 산업용품의 재질감 때문에 소비자인 역시 산업사회의 한 부품이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집밥이라는 게 단순히 집에서 먹는 밥이라는 뜻은 아니잖아요? 거기에는 음식을 장만하느라 새벽부터 일어나신 어머니의 졸린 하품과 시간 맞춰 음식이 탈 새라 쫄 새라 뒤척인 손길과 음식이 다 만들어지면 많이 먹고 힘내서 열심히 살아가라는 정성스러운 염원이 담겨서 나오는 거잖아요. 오직 합리성과 가격 경쟁력만을 위해 만들어진 일회용 용기에는 그런 사연이 없죠. 마치 흙과 쇠가 뜨거운 온도를 지나 도자기 그릇들과 숟가락, 젓가락으로 완성되는 것처럼 음식들에도 그런 사연이 녹아들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을 하고 나서 어느 날은 일회용 즉석 음식들을 꺼내서 밥그릇과 국그릇, 그리고 커다란 접시에 골고루 담아서 먹어 보았습니다. 용기 하나 바꿨을 뿐인데 보다 인간적이고 정성스러운 느낌이 들어서 지금까지 될 수 있으면 꼭 그런 식으로 먹곤 해요. 가뜩이나 졸혼을 하고 혼자서 지내는 형편인데, 행여 간편하다는 이점에 매몰되어 그렇게 확보된 남은 시간 동안 기계문명의 부품처럼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싶지 않아서 말입니다.


어떠세요? 혹시 시간이 된다면 한번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새벽 빨래방에서

빨래방에 가 보셨나요? 저는 빨랫감들을 모았다가 2~3주에 한 번씩 가는데 주로 새벽에 갑니다. 붐비는 시간에는 대기하며 기다리는 시간이 아깝거든요. 어떤 날은 늦은 시간에도 사람들이 붐비는 날이 있는데 그분들을 보면서 도시는 쉽게 잠들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도 해요. 하늘에서 멋진 자태를 뽐내며 빛나는 별은 아니어도 텅 빈 거리를 외롭게 밝히고 있는 가로등처럼 자기 자리에서 각자의 삶을 묵묵히 그리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름 모를 사람들이 곳곳에 참 많이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혼자되고 나서 처음에는 바지런히 빨래방에 드나들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게을러지더군요. 쌓여가는 빨랫감을 아침저녁으로 쳐다보면서 ‘가야 하는데, 가야 하는데...’, 생각만 할 뿐 행동을 안 하는 심리는 도대체 뭘까요. 예전에 아내가 빨래를 쌓아놓은 걸 보면서 답답했는데, 지금 제가 그러고 있네요.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일이 하나 있었어요. 장마철이라 잔뜩 밀린 빨랫감을 들고 갔더니 그 새벽에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더라고요. 눅눅한 계절에 사람들 심리가 다 비슷한가 보다 하고 대기하는데, 하필이면 그날따라 다섯 평 빨래방을 꽉 채우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중년 아재들이었습니다. 그게 뭐 대수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심야의 아재들 행색이 이상하게 남루해 보였습니다. 그때 벼락같이 제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스치며 지나쳤어요. ‘아, 지금 누가 보면 나도 저런 모습이겠구나....’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 보면 의협심에 사로잡혀 의기양양하던 돈키호테가 ‘거울의 기사’와 마주쳐서 거울에 비친 자기의 초라한 진짜 모습을 보고 쓰러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제가 그런 심정이 아니었나 싶어요. 갑자기 목구멍으로 뜨거운 뭔가가 울컥 올라와서 얼른 밖으로 나갔어요. 급하게 담배를 꺼내 피우는데 갑자기 장마철 소나기가 마구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처마 밑에서 시커먼 하늘을 보며 연기가 퍼지는 걸 바라보는데 눈물도 좀 흘러 내렸습니다. 담배 연기가 독하고 매워서 그랬겠지요.


살다 보면 자신의 처지가 구겨진 빨랫감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너무 초라하게 보이고 나를 둘러싼 주변의 환경이 누추하게 느껴지는 그런 날이 있잖아요.


그러다 문득 뮤지컬 <빨래>가 떠올랐습니다. <빨래>는 서울의 변두리에서 하루하루 고단하게 살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인데요. ‘열심히 살아가려고 하니까 옷이 더러워지는 것이고, 살아있으니까 빨래를 하는 것’이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저에게 정말로 큰 힘과 위로가 되었던 기억이 나네요.


오늘도 힘들고 고된 하루를 마치고 또 씩씩하게 빨래를 하고 계실 여러분께 제가 제일 사랑하고 아끼는 바로 그 뮤지컬에 나오는 노래의 한 구절을 꼭 소개해 드리고 싶네요.


“빨래가 바람에 제 몸을 맡기는 것처럼

인생도 바람에 맡기는 거야

시간이 흘러 흘러 빨래가 마르는 것처럼

슬픈 네 눈물도 마를 거야. 자, 힘을 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우리는 가족을 통해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는 것 같아요. 그리고 세상에 완벽한 가정은 없기 때문에, ‘완전한 사랑’을 늘 이상향처럼 가슴속에서 그리면서 그런 사랑을 해보고자 갈구하는 건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보자면 사랑만큼 공평한 건 없는 듯합니다. 모두가 부족하게 시작한다는 점에서요.


저 같은 경우는 애정의 ‘부족’보다는 ‘과잉’이 문제였기 때문에 어떤 대상에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의사와 무관하게 혼자서 애정 공세를 펼치다가 지치는 경우죠. 항상 제가 손해는 보는 것 같아서 그만둬야지 하면서도 그게 잘 안 됩니다. 사실 단순히 손해를 본다는 정도의 계산이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진짜 문제는, 상대방의 태도 때문에 제가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는 사실이에요. 눈을 돌려 주변을 돌아보면 저와 같은 사람들을 위한 책이나 강연이 차고 넘칩니다. 일종의 관계 심리학 상담인데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서 ‘혼자_잘해줘서_상처’나 ‘외로움_홀로_강해지기’ 등의 키워드로 검색을 하면 제목만 봐도 가슴이 설레는 책들이 수도 없이 결과 창에 뜨는 걸 확인할 수 있고, 유튜브에서도 어렵지 않게 전문가들의 훌륭한 강연을 찾아서 볼 수 있습니다.


한때는 그런 책이나 강연들을 찾아서 열심히 마음을 추스르고 멘탈을 강하게 하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납니다. 거기에서는 ‘더 강해져야 한다’는 메시지가 핵심이었고, 그게 잘 안 되는 이유는 ‘낮은 자존감’이라고 하더라고요. 잘해주는 상대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 가치가 입증되는 현상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으니까 ‘혼자의 힘으로 일어서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깊은 감명을 받고 한동안은 자신감을 회복하고 나름 감정조절을 하려고 노력을 했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면서 그 이전보다 더 의기소침해지곤 했어요.


그러기를 반복하다가 어느 날 문득, 갑자기 우스운 생각이 들더라고요. 생각해보세요. 자존감이 낮은 게 문제인 건 확실한 것 같은데 자존감을 키우라는 말에 흔들리며 그걸 또 키워보겠다고 아등바등 매달리고 있는 제 모습이야말로 자존감 없는 사람의 전형적인 사례 아닌가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전문가들은 해결책의 시작을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는데 저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다시 ‘괜찮은 무엇’으로 바꿔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 모습을 돌아보면서 무엇을 인정해야 하는지 살펴보기 시작했어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으려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행동을 어리석다고 판단하는 대신, 그냥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게 해답이 아닐까 했어요.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고 더 강해지겠다는 멘탈보다, 비록 못나 보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 멘탈이 더 강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오르는 사랑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최상의 가치는 모두 다른 것 같아요. 돈, 권력, 명예, 정의, 자아실현 등 세상에는 참 멋진 것들이 많죠. 여러분은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사랑을 믿고 바라보며 길을 걷고 싶습니다.


사랑에도 그 종류와 결이 다양하여 어떤 사랑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애인이나 배우자에 대한 사랑, 후배나 동료들을 향한 사랑, 사회의 소외계층을 향한 사랑, 반려동물에 대한 사랑, 참 다양한 사랑이 있죠. 대상을 놓고 보면 몸 하나로 부족할 정도로 많은 사랑을 얘기할 수 있네요. 세상 모두를 끌어안고 갈 수는 없을 텐데 누구를 선택해서 가야 할까요?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젊었을 때부터 제가 참 막무가내로 ‘사랑을 사랑’했던 것 같아요. 제 앞으로 다가오는 대상들을 부여잡고, 그게 사람이던 일이던 이념이던 사물이던 그냥 막 사랑하겠다며 사력을 다해서 살았다는 뜻이에요. 한마디로 ‘타오르는 사랑’입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건 낮은 자존감과 자신감의 결여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니까 대상을 앞에 두고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그런 자신의 신념이나 이상을 관철시키겠다고 밀어붙이는 모습이죠. 겉으로 보면 열정적인 모습이었어요. 내면에서는 불안하고 초조하고 무엇인가에 쫓기는 것 같으니까 그게 죽기보다 싫어서 진력을 다해 사랑해 보겠다고 발버둥을 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랑은 결국 허무한 결과로 이어지곤 했어요.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혼자서 불태우는 사람에게 누군들 곁에서 함께 있어주고 싶었을까요. 혼자서 배신감으로 슬퍼하다가 다시 새로운 대상을 만들어서 그 허무함과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지난날이었네요.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타고 남은 연탄재처럼 버려져 지내다가 심근경색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네요. 가족들이 있었고, 저를 아껴주시는 분들이 계셨고, 아직은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하늘의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합니다.


요즘은 아침마다 평생을 먹어야 할지도 모르는 심장약을 삼키면서 다짐하곤 해요. ‘다시는 타오르는 사랑을 하지 말고 차오르는 사랑을 하면서 살자’고요. 차오르는 사랑은 맹목적으로 달려들지 않는다는 것이고,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고, 상대방을 응시한다는 뜻이고, 사랑하면 할수록 텅 비는 느낌이 아니라 충만한 마음이 벅차오른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사랑을 하기 위해서 제게 가장 필요한 것은 ‘나 자신을 먼저 받아들이고 아끼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사랑하는 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닐까 해요.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숨기고 싶은 은밀한 곳까지 너무나 속속들이 꿰뚫어서 알고 있기 때문이죠. 기준이 높을수록 자신에게 엄격하게 되고, 그렇기에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아요. 다름 아닌 제가 바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안도현 시인은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에서,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냐며 연탄재를 함부로 차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분의 다른 시에는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이라는 구절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불같이 타올라 결국 연탄재처럼 되고, 그것도 모자라 그런 자신을 부숴 누군가가 미끄러지지 않는 길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너무 아름답고 숭고하게 느껴집니다.


앞으로 남은 생을 살면서 저도 그런 사랑을 실천하며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스스로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차오르는 사랑의 시작점은 바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겠다고요.


돈 때문에 두려워질 때는

우리가 살아가는 곳은 자본주의 사회이고, 여기서는 경제 활동이 중요하죠. 문자 그대로 자본, 즉 돈이 중심이 되어 사회의 시스템이 유지, 운영되는 사회이기 때문에, 어느 시점에서부터는 돈을 벌어야만 생활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누가 얼마나 돈을 버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지닌 가치가 평가되기도 하죠. 그건 마치 수조 속에도 비싼 생선과 상대적으로 저렴한 해산물이 나뉘는 것과도 비슷한데요, 크게 보면 모두 수조 속에 갇힌 신세라는 걸 생각하면 좀 서글프고 우습기도 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우리가 유능한 사회구성원임을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돈을 벌려고 하고, 그게 여의치 않으면 두려워집니다.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걸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돈 버는 일에 능숙하지 못한 저는 늘 마음 한편이 무거웠습니다. 자신감이 떨어졌다고 해야 하나, 좀 주눅이 드는 편이었어요. 그래서 주변에서 치열하게 돈을 모으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을 보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존경스러운 마음과 감탄이 섞인 찬사가 올라오곤 했죠. 최근에 알게 된 젊은 작가분은 밀린 학자금 대출을 상환하기 위해 매달 구독료를 받고 독자들에게 매일 글 한 편씩을 보내시기도 하시더라고요. 건강한 삶의 모습이랄까, 참 멋진 모습이어서 그 작가분의 글마저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소개되는 유명 맛집의 사장님들을 봐도 돈을 많이 버는 모습보다는, 뭔가 자신감 있고 당당한 모습이 보기에 참 좋았습니다.


돈을 버는 일에 약하면 자신감이 떨어진다고 했는데, 돈을 관리하고 운용하는 것마저 알뜰하지 못하면 그때는 자책감이 들곤 하죠. 저는 돈을 지출하는데 너무 무계획적이어서 이제는 고치려는 생각마저 포기하다시피 했어요. 돈이 많아서 걱정 안 하고 펑펑 쓰는 건 결코 아니고요. 단지 ‘가랑비에 옷이 젖는 줄 모르는’ 것처럼, 야금야금 빚이 조금씩 조금씩 늘어나는 형편입니다. 알뜰하게 쓰고 남겨서 저축한다는 일은 언감생심이고요. 적은 돈이라도 허투루 여기지 않고 소중하게 모아뒀다가 목돈으로 만들어서 손자의 등록금에 쓰라고 보태 주시는 저희 어머니 앞에서 항상 죄송하고 송구스럽더라고요. 다름 아닌 그런 분의 자식으로 어쩌면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지내는지 반성도 많이 했습니다.


계속 이래서는 안 된다는 비장한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어느 날은 금전 출납과 관련된 가계부 앱을 남몰래 깔아 보기도 했는데, 한두 달 동안 해보다가 그냥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설명에서는 현명한 소비생활을 도와주는 강력한 예산/통계 기능을 제공한다고 적혀 있었는데 제 마음 깊은 곳에서 현명하고 싶은 욕구가 없거나, 저 같은 게으름뱅이를 고칠 만큼 앱이 강력하지 못했던 모양이에요. 주변에 좋은 본이 되어 주는 분들이 많은데 제가 그분들을 닮지 못하는 건 돈에 대한 제 마음가짐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돈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어릴 때부터 뿌리를 내리다 보니 성장하면서도 금전에 관련해서 건강한 가치관을 형성하지 못한 것 같아요.


다행히도 이제는 돈을 건강하게 활용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는 우연한 기회에 기부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돈에 관한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해가 지나면서 어려운 사람을 돕는 행위를 하면 할수록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보상이 뒤따르는 걸 체험하고 지내고 있어요.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서 처음에는 쓰고 남으면 기부를 한다는 자세였지만 이제는 저 나름대로 소액투자금을 적립한 통장을 만들고 그 범위 내에서 주변에 어려운 사람에게 직접 기부를 합니다.


자기계발서 어딘가에서 ‘부자들은 좋은 지갑을 가지고 다닌다’는 말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돈에 대한 태도가 긍정적이라는 뜻이겠지요. 돈이라는 게 과연 무엇인지 그 본질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꼭 필요한 자리에 놓이게 되면 세상을 아름답고 의미 있게 만들고 무엇보다 돈을 운용하는 사람들에게 돈으로 살 수 없는 ‘자부심’과 ‘자긍심’을 선물한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런 자세로 지낸다면, 돈이 우리에게 주는 ‘두려움’과 ‘자책감’을 떨쳐 버리고 어느 정도는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평생을 어려운 사람을 위해 기부를 하시다가 돌아가신 어느 할머니께서 유언처럼 남기신 말씀이 점점 더 크게 와닿는 요즘입니다.


“돈은 똥이야. 쌓이면 악취를 풍기지만 뿌리면 거름이 되잖아.”


은하수를 바라보며

원고 작업을 위해 지방으로 여행을 가게 되면, 일부러 시간을 내서 꼭 밤하늘을 바라봅니다. 별들이 빛나는 광경을 마음에 담으려고 하는 거죠. 도시에서는 별을 보기 힘드니까요. 운이 좋아 하늘이 맑은 날 밤이면, 빼곡하게 펼쳐지는 별들의 장관에 감탄하게 되는데 하얀 달도 도시의 불빛을 받으며 봤을 때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경이롭게 보이는 순간이 많아서 참 좋습니다. 우주가 만들어 내는 창조적인 풍경은 하도 숭고해서, 글을 쓰면서 창작행위를 하는 저에게 말 없는 웅변처럼 다가와 하염없이 겸손하게 만들곤 합니다.


‘우주’라는 말이 <집 우, 집 주>라는 사실이 참 오묘한 것 같습니다. 영어에서는 코스모스나 유니버스라고 하는데 ‘집’과 비교하는 구조와 체계, 그리고 그 속에 흐르는 질서를 강조하는 건 비슷하지만, 결정적으로 인간과의 친밀성에서는 집이라는 말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서양에서는 우주와 인간을 분리해서 생각하지만, 동양에서는 친화적으로 연결해서 천체를 대우주, 사람을 소우주라고 부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그렇게 치면 우리가 비록 몸은 월세 단칸방에 살고 있을지 몰라도 정신만큼은 자기 자신이라는 집의 주인이라고 여기며 살아가도 좋지 않을까요? 네, 우리는 어느새 건물주가 되는 겁니다. 낮은 자존감으로 ‘집’을 황폐하게 만들지 말고 자존심을 가지고 소중하게 꾸미면서 살아야 할 것 같아요.


밤하늘의 별을 살피다가 요즘은 가능하면 꼭 은하수를 챙겨서 보려고 해요. 어렸을 때는 직접 보지 못하고 동요로만 배웠던,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가 하얀 쪽배를 타고 항해를 한다는 바로 그 은하수 말이에요. 제 눈에는 은하수가 하늘의 흉터처럼 보여서 더 애틋한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마치 생명이 위태로워 흉부 수술을 한 사람의 가슴의 절개 자국이 난 듯 보여서, ‘하늘도 말 못 할 사연 하나쯤은 있는가 보다’라고 생각해요. 수도 없이 많은 별이 모여 은하수를 이룬 것처럼, 제 삶에도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잊히지 않고 남아서 사연의 강으로 흐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그건 비단 저뿐만 아니라 밤하늘의 은하수를 바라보는 모든 분의 이야기가 아닐까요?


여러분들과 인연의 끈으로 만나게 된 이 행성에 오늘도 어김없이 밤이면 은하수가 흐르고, 아침이 오면 바로 그 하늘에서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바람이 불어오면 그 해를 받아 바닷물 위에서 반짝이던 햇살이 흔들립니다. 인생은 그렇게 우리가 서 있는 땅을 시시때때로 흔들어 대곤 하지만, 우리는 어느 시인이 말했던 것처럼 ‘흔들리면서도 줄기를 곧게 세우고, 바람과 비에 젖으면서도 따뜻한 꽃잎 피우면서’ 은하수에 쪽배가 가듯이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며, 순간순간 사랑하며, 매일매일 자신을 넘어서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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