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들려주는 조국

   
츠카 코우헤이(김봉웅)(역:김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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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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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03��



■ 책 소개
일본 청년 문화의 선두주자이며 신화적인 존재인 츠카 코우헤이! 최연소로 나오키상을 수상하는 등 수많은 문학상과 훈장을 석권한 그는 일본 현대 문화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의 또 다른 이름은 김봉웅. 재일 한국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두 개의 조국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평생 동안 ‘두 개의 조국’ 사이에서 휘청거렸다. 겉으로는 일본에서 전후 최고의 극작가로 인정받는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결코 뿌리칠 수 없는 ‘재일 한국인’이라는 딱지가 그의 전 존재를 부여잡고 있었다. 이제 그를 다시 보자. 애국심이라는 구태의연한 잣대를 넘어 고뇌하며 살아간 한 인간으로, 그 고뇌를 예술로 승화시킨 훌륭한 예술가로 그를 보자.

 

이 책 《딸에게 들려주는 조국》은 1985년 한국 방문을 배경삼아 태어나 처음 찾은 조국에 대한 이야기와 자신의 삶과 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딸에게 들려주는 편지 형식을 취하고 있는 자전 에세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일본 사회에 자신이 재일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처음 공개적으로 밝혔고, 이 책은 그의 연극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지난 3월 18일 문화방송 에서는 ‘츠카 코헤이와 김봉웅’이라는 제목으로 츠카 코우헤이를 다뤘다. 정당하지 못한 사유로 한국에서 필시 무시받고 있는 한 예술인에 대한 재평가를 제안하는 재조명이다. 이 책 역시 언뜻 유쾌함으로 포장하고 있었지만 떨칠 수 없는 슬픔의 연원을 가진 예술가, 츠카 코우헤이를 다시 보기 위함이다. 이제 그의 작품들을 좀 더 편안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우리도 즐겨보기 위한 첫 걸음이다.

 

■ 저자 츠카 코우헤이(김봉웅)
저자 츠카 코우헤이(つかこうへい; 김봉웅金峰雄)는 일본 연극계가 ‘츠카 이전’과 ‘츠카 이후’로 연대를 구분할 정도로 많은 연출가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한 극작가이자 연출가이다. 인간의 속마음을 날카롭게 관찰해 차별하는 쪽과 차별당하는 쪽의 감정을 직시하는 대사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도려내는 한편, 넓은 마음으로 인간을 상냥하게 지켜보며 깊이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작가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24살에 데뷔한 츠카 코우헤이는 데뷔하자마자 “충격적인 ‘천재’ ‘귀재’의 젊은이 출현!”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주목받았고, 시대의 총아가 되어 70~80년대에 일약 ‘츠카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1948년 후쿠오카에서 재일한국인의 아들로 태어난 츠카 코우헤이는 게이오 대학 재학 당시 학생극단 ‘가면무대’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붉은 베레모를 그대에게〉(1971)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이듬해 와세다 대학 극단 ‘잠(誓)’에서 연출가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1974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극단 ‘츠카 코우헤이 사무소’를 설립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2010년까지 35여 년 동안 연극과 영화는 물론 소설을 통해 많은 일본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갖게 해준 천재 작가 츠카 코우헤이는 2007년 일본 정부가 학문·예술·스포츠 분야에서 공적이 큰 사람에게 수여하는 자수포장(紫綬?章)을 받았다. 이는 재일한국인 최초의 쾌거였다. 그의 작품은 연극계뿐만 아니라 일본 영화계에도 큰 영향을 끼쳐 수많은 작품들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연극 <뜨거운 바다>는 츠카의 작품 《아타미 살인 사건》을 원작으로 삼은 것으로서, 1985년 국내 초연된 이후 지난 25년 동안 <뜨거운 바다> <아타미 살인 사건> <아이시떼루> <월미도 살인 사건> 등의 이름으로 각색·연출되어 여러 차례 무대에 올려진 유명한 작품이다. 그 외 작품으로는 《카마타 행진곡》 《비룡전》 《2세는 크리스천》 《이 사랑 이야기》 《청춘, 사랑의 도피 행각》 《유채꽃 이야기》 《딸에게 들려주는 조국》 등이 있다.

 

■ 역자 김은정
역자 김은정은 1968년 춘천에서 태어났고, 충주에서 자랐다. 일본 도쿄의 일본외국어전문학교 한·일통역과와 성신여자대학교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했다. 지금은 인천에서 통역과 번역 일을 하면서 외국어학원 강사로도 일하고 있다.

 

■ 차례
추천사 : 츠카 코헤이, 내 연기 인생의 하나뿐인 사랑 - 김지숙(배우)
유서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안 된다
너와 엄마만은 꼭 지켜줄 거야
아빠는 한국인이다
어머니를 위한 이름, 츠카 코헤이
아빠는 비열하고 어리석은 아이였다
사람을 차별할 수 있다니, 그런 쾌감도 없지
‘아빠’로서, ‘한국인’으로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길
눈물 흘리며 술잔 기울이던 날
‘휴전 중’인 조국, ‘소설도 검열하는’조국을 찾아
조국을 알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은 쓰레기다
너는 아빠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줄까
도심을 가로지르며 목격한 조국의 민낯
내일은 꼭 좋은 일이 있을 거야
한국말을 배우지 않은 이유
아빠는 재일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기대지 않고 살아왔다
생활ㆍ문화적인 면에서 아빠는 일본인이다
네가 상처받는 여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눈앞에 있는 사람을 믿어라
인간의 잔혹성과 생명력을 그려내는 것이 내 역할이다
사람의 따뜻한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조국이란 너의 그 아름다움이다

 

해설 : 나는 누구인가를 철저히 탐구한 자기 재생의 글 ― 하리키 야스히로(연극 평론가)
저자 약력




딸에게 들려주는 조국


아빠는 한국인이다

아빠의 필명은 츠카 코우헤이라고 한다. 본명은 가네하라 미네오 金原峰雄, 정확하게는 김봉웅金峰雄 이라고 하지. 1948년 4월 24일 후쿠오카현 카호군 카호마치 우시쿠마에서 김태열과 황명임 사이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한국인이란다. 직업은 극작가이며 소설가이지만 천직은 역시 무대연출가가 아닐까 생각한단다.


의협심은 보통 일본일보다 좀 더 있다고 생각한다. 틀림없이 이건 아빠의 재일 한국인으로서의 방어본능의 표현으로, 적어도 의리와 인정만큼은 일본인보다 더 갖고 있어야 일본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탓일거야. 그리고 의리와 인정은 아빠 체질에 썩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빠가 아직 어리고 가난했던 시절이었지.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어. “사람은 아무리 가난해도 남한테 손가락질받을 만한 짓을 해선 안 된다. 바르게 살아라.” 그런데 사업에 성공해서 수중에 돈이 좀 들어오게 되자 말을 바꿔버리시더군. “인간은 결국 돈이야. 세상 요령껏 살아라.”아빠는 할아버지의 그 엉성함이 아주 인간다워서 좋았다.


할아버지는 사교성이 좋아서 여자들한테도 인기가 꽤 많았어. 아빠가 어렸을 때 어느 날인가 부엌칼을 든 어떤 여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집으로 쳐들어왔던 일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때 부들부들 떨었던 일이 아직도 생각난다. 그리고 그 여자가 돌아간 뒤 할아버지는 아빠에게 이렇게 으름장을 놓았지. “엄마한텐 비밀이다. 알았지?” 정말 무슨 아버지가 이러냐고 생각했었는데…… 쾌활한데다 자식이라면 죽고 못 사는 분이었으니 살아계셨더라면 널 얼마나 사랑해주셨을지…….


아빠는 비열하고 어리석은 아이였다

아빠가 자란 곳은 기질이 거친 치쿠호 탄광촌의 한복판으로, 당시의 한국인 차별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는 바다에 ‘이승만 라인’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 경계선을 넘어 대한해협에서 조업하는 일본 어선을 한국 경비대가 나포하곤 했었지. 그런 뉴스가 나온 다음날은 잔뜩 기가 죽어 감히 학교에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리고 간신히 학교에 다녀온 후엔 투덜댔지. “왜 한국 사람들은 아무 죄 없는 일본 어선을 붙잡고 난리야!”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어린아이가 살아가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거라고 생각해.


그뿐만 아니라 솔직히 말하면 일본인 악동들과 합세해 마음 약한 한국 아이를 괴롭히기도 했다. 아무튼 아빠가 비열하고 어리석은 아이였던 건 확실한 것 같다. 하지만 어린 아빠의 마음속에는 ‘내 조국을 경멸이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나갈 수가 없잖아. 어릴 적 아빠에게 한국이라는 나라는 결코 자랑스러워 할 조국은 아니었어. 오히려 숨기고 싶은 나라였지…….


비굴하고 한심했던 아빠도 어른이 되면서 점점 멋진 인간이 되어갔다. ‘어른이 되면서’라는 건 키시다상이라는 연극상을 받고부터라는 뜻이란다. 그리고 나오키상을 받을 즈음에는 당당한 인격자가 되서 아빠 스스로도 깊이 감동하는 날이 적지 않았단다.


조센징인 아빠가 이렇게 우쭐대는 모습이나 기죽지 않고 당당해 하는 모습이 우익들의 눈에는 좀 거슬렸던 모양이야. 그들은 가끔 내게 전화해서는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야, 너 같은 자식, 한국으로 꺼져버려!” 그럼 아빠도 발끈해서 받아쳤지. “야, 이 멍청아! 우리도 좋아서 온 게 아니야!”아빠 같은 사람들은 스스로 원해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게 아니다. 태어나 보니 한국인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죄가 되어야 한다면, 그 세상이 잘못된 것이겠지.


아빠가 이 책을 세상에 내놓아 혹시 네가 어깨를 못 펴고 다니게 되는 건 아닌지 또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빠보다 너보다 더 괴로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걸 생각해 주렴.


‘아빠’로서, ‘한국인’으로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길

아이가 태어나면 14일 내로 이름을 지어 구청에 제출해야 한다. 아빠는 너를 한국인으로 할지 일본인으로 할지 무척이나 망설였다. 그건 네 엄마와 결혼할 때도 마찬가지였어.


할아버지 할머니는 처음 일본에 왔을 때 말도 잘 모르고 해서 질 나쁜 일본 사람들에게 속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오셨어. 그래서 아빠가 일본 여성과 결혼하는 것만큼은 허락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셨지. 하지만 주변에 일본인이 대부분이고 생긴 것도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일본인과 가까워지기가 더 쉽지. 마침 좋아하게 된 상대가 한국인이라면 참 좋겠지만 그런 일 따윈 여간해서 일어나지 않아.


게다가 아빠는 한 번 결혼에 실패한 경력이 있고, 할아버지도 돌아가신 후였고, 엄마는 미인인 데다 귀염성 있는 인상이었기 때문에 할머니는 단번에 마음에 들어 하셨다. 정작 문제는 엄마를 아빠 호적에 넣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였어. 즉, 엄마를 한국인을 해야 할까 하는 문제였다. 솔직히 한국인으로 자란 탓에 겪었던 괴로움을 잘 알기 때문에 엄마는 그냥 일본 국적으로 남겨두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지. 그리고 엄마를 한국인 호적에 올리면 너도 당연히 한국 국적을 갖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네가 커서 만일 관공서에서 일하고 싶다고 해도 그렇게 하지 못할 테고……… 그만큼 미래에 대한 선택의 폭이 좁아질 테고…….


아빠한테도 종종 귀화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한국인 젊은이가 찾아올 때가 있다. 그리고 이렇게 묻곤 하지. “당신은 전에 일본인들에게 괴롭힘당한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당신은 작가면서 일본인이 전쟁 때 얼마나 못된 짓을 했는지 왜 소설로 쓰지 않습니까?” 아빠는 그런 소설을 쓰면 꼴사나워질 뿐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딱히 본인이 강제 징용으로 끌려온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목소리를 높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아빠는 옛날에 차별받은 일을 무슨 미토코몽(도쿠가와 시대 미토번의 2대 영주)의 신분패라도 되는 양 내세우며 사는 건 남자답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설령 아빠가 아주 좋아하는 네 엄마와 성이 다르다고 해도, 아빠는 귀화할 수가 없다. 아빠의 입장이란 건 그런 거야.


엄마는 자의로 아빠를 좋아하게 되었으니 이 모든 걸 감수해야겠지만, 너는 아빠와 엄마의 성이 달라서 첩의 자식처럼 인식되는 일이 있는 것 같아 못내 측은하구나. 실제로 네가 유치원에 들어갈 때 서류심사에서 떨어지는 건 아닌가 하고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너는 영리하고 누구보다 쾌활해서 선생님들이 무척 귀여워했지. 아빠는 정말 눈물이 날 만큼 기뻤다.


조국을 알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

서울행 대한항공 65편에서 아빠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요코하마에서 무역업을 하는 박 사장이라는 쉰 살쯤 된 온후한 신사였다. 뒤쪽 좌석에는 서울로 여행 가는 여대생들로 가득했다. 박 사장이 신나게 떠들고 있는 그녀들을 뒤돌아보며 말했다. “예전에는 이렇게 젊은 일본 아가씨들과 함께 비행기를 탄 적이 거의 없습니다. 한국의 이미지가 바뀐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왜 변했을까요?”


아빠가 생각하기에는 요즘 세상은 촌스러운가 촌스럽지 않은가로 가치관이 결정되는 것 같다. 지금까지의 한국은 촌스러웠지. 하지만 지금까지 촌스러웠던 곳을 멋지게 개발할 수 있다는 좋은 점이 있다. 창고를 새로 단장해서 디스코텍을 만들어 ‘다락방’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래. 요즘 젊은이들한테는 한국 여행이 멋진 일이 되어가는 것 같다.


박사장이 아빠한테 묻더구나. “그런데 츠카 씨는 일본에 귀화하지 않으십니까?” “네…….” “어머니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도 있지만, 역시 제 고집이겠죠.”박사장이 말하더구나. “우리 큰아들 말로는 당신이 귀화하면 거기에 용기를 얻어 귀화하는 사람들도 많을 거라고 하던데요.” 아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이야기라서 순간적으로 움찔했단다. “그리고 츠카씨, 한국에서 ‘괜찮아요’라는 말에 당황하는 경우가 생길 테니 조심하세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예를 들면 악속시간에 늦거나 약속을 어기거나 해도 ‘괜찮아요’ 한마디로 그냥 넘겨버려서 화가 날 때가 있어요,” “그런가요?” “게다가 한국인들은 일본에서 자란 우리가 보기엔 정말 경박해 보일 때가 있지요. 하지만 그건 그들 특유의 붙임성 때문이라고 생각하세요.”


“5년 쯤 전의 일인데요. 제가 조상 묘지에 성묘를 하려고 시골에 갔던 일이 있었거든요. 그때 개인택시 운전을 하는 친척이 묘지까지 같이 가주었지요. 성묘를 무사히 마치고 서울의 호텔로 돌아와 수고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그 부부에게 술을 한잔 대접했지요. 이튿날 아침 날이 희뿌옇게 새기 시작할 무렵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그건 경찰서에서 걸려온 전화였는데, 그 택시기사 부부가 호텔에서 돌아갈 때 음주운전을 하다가 다른 차를 들이받고 도망쳤다는 거였어요. 제가 놀라서 잠시 멍하고 있는 사이에 전화 상대가 그 택시기사로 바뀌더니 ‘미안하지만 500만 원만 빌려줄 수 없을까요?’하는 겁니다. 제가 어디에 쓰려고 그러느냐고 물으니까 상대방과의 합의금과 경찰에게 줄 뇌물로 쓴다지 뭡니까. 저는 긴가민가하면서도 일단 경찰서로 500만 원을 가지고 갔는데,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석방됐고, 그 택시기사는 그날 밤이 되자마자 영업을 하러 나가더군요.” “일본이라면 당장 개인택시 면허가 취소됐을 텐데요?” “그들의 발상은 이런 겁니다. 딱히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니고 좀 부딪힌 것뿐이다. 영업을 정지시킨다고 해서 누구한테 득이 되겠냐? 받힌 쪽도 수리비 이상의 돈을 받았다. 경찰도 한잔 할 수 있다. 그 이상 더 좋은 방법이 있겠느냐 하는 거죠.” “그거 아주 논리적이군요.”


“그런 융통성을 ‘괜찮아요’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괜찮아요’는 결국 이 나라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겠지요. 저는 오늘날의 일본이 있는 건 말단 공무원조차 비리를 저지르지 않는 높은 윤리의식 덕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렇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참 즐거운 나라입니다. 한국에는 바쁜 일본에서 잃어버린 여유라는 게 아직 있어요. 작은 사고 정도라면 뇌물로 용서받을 수 있다니, 꽤 인간적이지 않습니까? 인간을 믿을 수 있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나요? 그야말로 ‘괜찮아요’입니다.”


너는 아빠를 자랑스럽게 생각해 줄까

그런데 비행기에서 내려 세관으로 나왔을 때 아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엄한 눈빛에 국방색 군복을 입은 헌병들이 자동소총을 어깨에 메고 어슬렁거리고 있는 거야. 아빠도 오싹했다. 세관에서 한국에 왜 왔느냐고 물어서 하와이에 갔을 때를 떠올리며 “저, 그게……사이트싱sightseeing”이라고 영어로 대답하자 “당신은 한국인이 왜 조국 말을 못해?”하며 여권을 거칠게 내려치는 거야. 아빠는 생각지도 않은 상황 전개에 놀라 뒤쪽에 서 있던 TV 제작사 팀에게 도움을 요청했지. 그런데 그들도 일본에서 아빠를 취재할 때의 그 다정하던 눈빛은 간데없이 마귀 같은 얼굴을 하고는 아빠한테 마이크를 들이미는 거야. “당신 부모는 왜 당신한테 조국 말을 가르치지 않았나요?” “이봐요, 이제 와서 그런 걸 왜 묻지요? 어제까지는 나를 조국의 자랑이네 뭐네 하며 추켜세우더니.” “여긴 도쿄가 아니라 서울이라고요.” “그건 우리 부모가 가난해서 먹고 사는 것만으로도 코가 석자라 자식한테 말을 가르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요. 그건 그렇고, 이런 한심한 얘기를 왜 하필 이런 곳에서 하게 하는 거요!” “아무리 가난해도 말 정도는 가르칠 마음만 있으면 가르칠 수 있었겠죠.” “그건 내가 게을렀던 것뿐이요. 부모님 욕은 하지 마시오! 그들은 일본에서도 충분히 비참한 꼴을 당하며 살았으니까, 알겠소?” 아빠는 가슴이 분노로 가득 차올라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아빠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말했지. “그래 이게 먼 길을 마다않고 찾아온 동포를 맞이하는 태도요? 태어난 곳이 우연히 일본이었을 뿐인 우리들한테 무슨 죄가 있다는 거요? 당신들 왜 재일 한국인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난리요? 좋아. 내 똑똑히 기억해두겠어. 이게 꿈속에서도 보았던 조국이란 거야!” “츠카, 당신 일본에서 좀 잘 나간다고 너무 뻐기는 것 아니에요?”아빠는 끓어오르는 분노로 창자가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공항 밖에서 기다리던 녹색 택시를 탄 아빠는 재일 한국인이 귀국하면 세관에서 한방 먹는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정말이구나, 하고 절절히 느꼈다. “하지만 우리도 참 난처한 존재들이군. 일본에서는 한국인이라고 차별당하고, 한국에 오면 재일 한국인이라고 괴롭힘당하고, 우리는 대체 어디로 가면 좋은 거야?”


한국말을 배우지 않은 이유

이웃 사람들까지 한자리에 모여 부어라 마셔라, 노래에 춤까지 추면서 한바탕 소란이 끝난 건 동쪽 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오기 시작할 때였다. “그런데 스케노, 한국 사람들 목청이 아주 센데? 마이크도 없이 노래를 부르잖아. 이래서는 가라오케가 유행하지 않겠는걸.” “맞아요. 천성이 축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느낌인데요.” “바로 그거야, 내가 걱정하는 게.” “그게 뭔데요?” “잘 들어, 자기가 직접 노래하고 춤추는 걸 좋아하잖아. 그런데 돈까지 내면서 남이 노래하고 춤추는 연극 따위를 보러 오겠어?” “그런 식의 발상을 보니 츠카씨는 역시 일본인이 아니군요.” “그렇군. 난 대체 어느 나라 사람일까?” “근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츠카씨는 왜 한국어를 배우지 않았어요?”


그 말을 듣고 아빠가 왜 한국어를 배우려 하지 않았는지 생각해보았다. 아빠가 고등학교 때 바보 같은 사촌이 있었는데,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해 갈 곳이 없어지자 한국으로 유학을 떠났지. 그리고 방학 때 돌아와서는 네 할아버지한테 한국말로 인사하는 거야. “안녕하세요.” “저 녀석 부모는 얼마나 좋을까. 그에 비해 너는 문학인지 뭔지 통 영문을 알 수 없는 얘기나 해대고 있으니…….”


“좋아, 의대는 내가 포기할 테니 너도 그 문학인지 뭔지는 포기해라. 이렇게 된 바에 너나 나나 조금씩 양보해서 법대에 가서 변호사나 돼라.” “법대에 간다고 바로 변호사가 되는 건 아니야.” “법대에 가는데 왜 바로 변호사가 못 돼? 넌 일본 아이들하고만 노니까 못된 물만 들어서 부모한테 거짓말할 궁리만 한다고. 더 이상 일본 아이들하고 어울리지 마!” 그때부터 아빠는 결단코 한국말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 같아. 하지만 부모한테 ‘못된 물이 들었다’는 말을 듣는 건 괴로운 일이야. 아빠도 너에게 그런 말을 하게 될 날이 올까?


아빠는 재일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기대지 않고 살아왔다

연극 연습은 여의도에 있는 제작사의 지하 연습실에서 했다. 여의도에 큰 광장이 하나 있는데 그건 고속도로가 그런 것처럼 전쟁이 터지면 제트기 활주로로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라고 한다. 거리 곳곳마다 카키색 천막을 씌운 군용 트럭들이 서있고, 화염병을 던지는 학생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이 꼭 20년 전 일본으로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아 흥분과 긴장감이 높아졌다.


기동대의 공격을 받고 도망치는 데모대의 뒷모습을 보며 아빠는 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츠카 씨, 왜 그러세요?” “나도 한국에서는 선거권이 있을까?” “없는 거 아닌가요?” “우리 재일 한국인들은 어디를 가나 어정쩡한 존재들이군. 일본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선거권은 없고…… 뭐, 선거권을 준다고 해도 투표하러 갈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막상 없다고 하니 왠지 허전해지는걸.”


아빠는 일본협정 영주라는 자격으로 일본에 살고 있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식민지 시절 동안 한국인은 일본 국적이었지만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고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된 1952년 이후 한국인은 외국인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법률 제126호에서는 ‘특별히 제정하는 법률에 따라 체류 자격이나 체류 기간이 결정될 때까지는 계속해서 일본에 거주할 수 있다’고 정했으므로 그 시시비비를 둘러싸고 한일회담에서 협의가 이루어졌지만, 결국 한일회의에 의한 ‘한일법적지위협정’에서는 자자손손 대대로의 영주는 결정되지 않았다.


그 결과 ‘2차 대전 전부터 계속 거주하고 있는 사람’과 ‘그 자녀로서 1966년 1월 17일부터 1971년 1월 16일 사이에 신청한 사람’은 각각 협정 1세대로 간주되고, 1971년 1월 17일 이후 협정 1세대의 자식으로 태어나 생후 60일 이내에 신청한 사람‘은 협정 2세대가 되었지. 이 2세대에게만 영주 자격이 주어졌다. “2세대에게만이라면, 그 2세대의 자식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만약 미나코를 한국인으로 할 경우 영주권은 없다는 얘기야.” “잔인하군요.” “하지만 한 국가의 정책으로선 옳다고 생각해. 왜냐하면 영국이나 독일 같은 나라는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아랍이나 터키인들을 불러들였는데, 그 수가 점점 늘어나 그들이 권리니 뭐니 하며 떠들기 시작하는 바람에 지금 그 처리로 골머리를 앓고 있잖아.” “그래도 재일 한국인의 경우는 다르죠. 일본이 옛날에 그만큼 잔인한 짓을 했잖아요.” “난 지금까지 그런 데 기대어 살아오지 않았어.”


네가 상처받는 여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빠가 만든 연극은 시작부터 도전적이었다. 김지숙 씨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대사 없이 듣기만 하는 이 연기에서 배우로서의 그녀의 역량을 알 수 있었다. 연극의 배경 음악은 도쿄에서 테이프를 가져왔기 때문에 전부 다시 만들어야 했다. 한국에서는 일본 강점기 때의 원한 때문인지 무대와 영화에서 일본어가 흐르는 게 금지되어 있었다. 레코드는 쉽게 구할 수 있었다. 한국 노래는 폐부를 도려내는 듯 정말 애절한 멜로디가 많아서 연극 대사도 거기에 지지 않을 만큼의 깊이를 갖게 하느라 적잖이 힘들었지. 김지숙 씨에게 어쩌면 한국인은 절망적인 슬픔이란 걸 체질적으로 좋아하는 거 아니냐고 말했더니 좀처럼 웃지 않는 그녀가 배를 끌어안고 폭소를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대곡녀大哭女’도 한국이 발상지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옛날에 이시카와현 나나오 지방에 대곡녀가 있었다고 하는데, 장례식 때 고인의 덕을 기리고 집안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능숙하게 우는 것을 직업으로 삼았던 여인들을 말한다. 아빠는 장례식에서조차 그렇게 겉치레를 중시하는 인간의 존재가 재미있어서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런 슬픈 존재에 끌리는 아빠는 역시 뿌리부터 한국인일지도 모르겠다.


미나코야, 아빠는 네가 무럭무럭 자라주길 기원하고 있다. 그리고 타인의 아픔이나 슬픔을 아는 사람이 되어주었으면 한다. 네가 상처받는 여인이 되었으면 한다. 막상 네가 상처받은 모습을 보면 아빠는 미쳐버릴 것처럼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때 아빠는 마음속으로 계속 “내일은 너를 위해 있다”고 외칠 거야. 그러니까 미나코도 상처받는다 해도 마지막에는 ‘내일은 꼭 좋은 일이 있을 거야’라고 생각해주기 바란다.


조국이란 너의 그 아름다움이다

아빠를 태운 JAL 25편은 그 거대한 독수리 같은 날개를 아침햇살에 은빛으로 빛내며 사랑스런 네가 기다리는 일본으로 향했다. 아빠 옆자리에는 창에 얼굴을 부딪칠 듯 바싹 대고 아쉬워하며 서울의 모습을 바라보는 스게노 군이 앉아 있었다. “고생 많았어.” “뭘요.” 걱정스러운 듯 아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스게노 군을 보며 아빠는 ‘자네를 데려오기로 한 내 판단을 틀리지 않았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들으니 범인 역의 최주봉 씨와 여경관 역의 김지숙 씨는 훌륭한 연기를 인정받아 우수남우상과 우수여우상을 받았다는구나. “이제 한국에서는 연극 안 하실 건가요?” “이렇게 무모한 짓을 자주 할 수 있겠어?” “하지만 전 프로듀서가 또 모셔와달라고 하던걸요.” “이봐, 일본어로 하는 연극이야. 그리고 일본 관객들도 내 연극을 기다리고 있다고.”


그때 관광 왔다 돌아가는 여대생들이 아빠한테 말을 건넸지. “츠카 씨, 우리 연극 봤어요. 말은 모르지만 박력이 있었어요. 김지숙 씨 너무 멋있어서 이제부터 팬이 되기로 했어요. 앞으로도 좋은 연극 만들어주세요.” “그래, 고마워요.” 승무원도 말하더구나. “선생님! 공연 성공하신 거 축하드립니다. 그리우실 것 같아서 화과자랑 일본차를 준비했는데 드시겠습니까?” “고마워요.” 모두 좋은 사람들뿐이다. 아빠를 아주 소중히 대해주지.


비행기는 한반도를 벗어나 새파란 동해 상공으로 나왔다. 엄마가 어젯밤 전화를 걸어와 네가 걸을 수 있게 되었다고 알려주었단다. 그리고 엄마는 “아빠, 수고하셨습니다” 하는 말을 열심히 가르치고 있다고도 했지. 파란섬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이다. 아빠는 왠지 눈물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이, 스게노! 한국 관객들이 진심으로 기뻐해주었겠지?” “그럼요, 만족스러워했어요.” “나라는 인간을 용서해주었을까?” “용서라니, 무슨 그런 말을 하세요. 배우들도 ‘또 와달라’고 했잖아요. 이른 아침부터 모두들 배웅도 나와주었고요.” “그래, 다행이야.” 녹색의 섬 그림자가 그 산뜻한 색깔을 더해가며 부쩍부쩍 가까워지고 있었다. “도착했군…….”


미나코야, 너는 파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힘껏 벌리고 희망으로 가득 찬 눈동자를 빛내며 아빠의 가슴으로 뛰어들겠지. 아빠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너를 힘껏 부둥켜안으며 말할 거야. 미나코야, 틀림없이 조국이란 너의 그 아름다움이다. 엄마의 변함없이 한결 같은 상냥함이다. 아빠가 엄마를 사랑스럽게 생각하는 그 뜨거움 속에, 나라가 있다. 두 사람이 너를 무엇보다 소중히 생각하는 눈길 속에, 조국은 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사랑스럽게 생각하는 강한 의지가 있다면,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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