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으니까 힘내라고 하지 마

   
장민주(역:박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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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문아카이브
   
13000
2019�� 01��



■ 책 소개

 

어설픈 위로에 상처받은 보통 사람을 위한 셀프 치유 안내서

 

이 책은 우울증을 가진 저자의 내밀한 고백을 시작으로 완화되기까지 8년의 과정을 담아냈다. 우울한 감정을 폄훼하고 행복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가면을 쓴 나’가 아닌 자신의 감정에 집중하는 ‘진짜 나’로 살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준다. 또한 ‘우울증 자가 진단 검사’를 통해 독자 스스로 마음을 진단해볼 수 있으며, 부록으로 우울증에 관한 심리학적 정보와 해결책을 수록해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을 선사한다.

 

■ 저자 장민주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 고등학교 2학년 때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는 아빠와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 좀 즐겁게 살아봐”라며 긍정을 강요했던 엄마 밑에서 외롭게 자랐다. 거기다 타고난 허약 체질, 외모에 대한 열등감, 예민한 성격, 집단 따돌림, 학업 스트레스까지 더해져 우울증이 나날이 악화됐다. 숱한 약물 치료와 심리상담을 병행했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에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자신의 병을 이해하기 위해 심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우울증 8년차, 드디어 조금 다른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녀는 이 책에서 자신의 경험과 심리학을 바탕으로 우울증이 발생하는 원인과 다양한 증상, 우울증을 완화시킨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가면을 쓴 나’가 아닌 자신의 감정에 집중하는 ‘진짜 나’로 살 수 있도록 안내한다.

대만 국립성공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했으며, 지은 책으로는 심리학적 이론을 토대로 사랑과 상처, 치유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 소설 《고슴도치 소녀: 왜 아픈 건 나일까?》가 있다.
 
■ 역자 박영란
베이징어언대학교 중국어영어과를 졸업하고 국제유치원 교사로 근무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외국어교육특수대학원 국제중국어교육학과에 재학 중이며,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출판 기획 및 중국어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말하기 힘든 비밀》 등이 있다.

 

■ 차례
감수의 글_내 마음을 들여다보다
추천의 글_감정을 받아들이는 연습
프롤로그_좋아지지 않으면 뭐 어때?
우울증 자가 진단 검사

 

Chapter 1_우울은 나의 잘못으로 생긴 것이 아니다
내가 죽으면 이 세상이 행복해지겠지
행복하라고 강요하지 마
나도 모르는 새 사라져버린 기억
[심리학 속 나의 이야기 01] 감정을 숨길수록 나는 ‘가짜’가 된다

 

Chapter 2_우울의 늪에 빠지다
‘왕따’라는 말할 수 없는 비밀
여기에 내가 있어도 될까?
내게 필요한 능력, 눈치 보기
가면을 벗자, ‘진짜 나’를 찾자
[심리학 속 나의 이야기 02] 내가 멍청한 건 IQ 때문일까?

 

Chapter 3_마음이 아픈 줄도 모르고
먹어도 먹어도 어쩐지 속이 자꾸 허하다
미움받을 용기?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대로 사라져버렸으면
이번에는 나를 구할 거야
[심리학 속 나의 이야기 03]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싶다

 

Chapter 4_곁을 지켜주는 누군가가 있으니
외로움은 자존감을 갉아먹는다
처음으로 나를 구해준 사람
닫힌 마음을 조금씩 조금씩 열어보니
고양이들을 키우며 알게 된 부모의 마음
[심리학 속 나의 이야기 04] 인간관계가 너무 어렵다면

 

에필로그_‘우울한 나’도 ‘소중한 나’의 한 부분

부록_우울증에 대하여
참고문헌

 




괜찮으니까 힘내라고 하지 마


우울은 나의 잘못으로 생긴 것이 아니다

행복하라고 강요하지 마

중학생이 되고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어떻게 ‘행복’을 누려야 되는지를 잊어버렸다. 사고방식도 비판적으로 변해서 무슨 일이든 가장 최악의 상황만을 떠올렸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도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 당시에 썼던 일기를 살펴보니,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가벼운 우울증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울증 확진을 받고 본격적으로 치료받기 시작한 시기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다. 치료하고 해서 그리 거창하지는 않다. 매주 한 번씩 학교에 있는 상담실에서 상담 선생님과 면담하는 것이 전부였고, 가끔 가오슝대학 부설병원의 정신과 의사 선생님과 상담했다.


방학이 되면 정신과를 찾아다니며 진료를 받았는데, 환자가 너무 많은 탓에 대화를 길게 나눌 수 없었다. 대체로 5분이면 진료가 끝났다. 그러고 나서 수면제와 항불안제, 세로토닌을 처방했다. 우울증 환자는 뇌에 세로토닌이 적게 분비되기 때문에 그 부족함을 약물로 보충해주는 것이다. 다만 약을 먹으면 식욕이 급격히 떨어질 수 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며 계속 살아오다가, 스스로 ‘이게 우울증이 아닐까?’하고 인식하고 치료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내 증상이 우울증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나중에서야 학교에서 우연히 캐비닛을 정리하다 발견한 ‘우울증 자가 진단 검사’를 통해 우울증 수치가 위험 수준의 최고 등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부모님은 평소 우울증 환자에 대한 심한 편견을 갖고 있었다. “그냥 생각이 너무 많은 것뿐이야. 우울증은 무슨 우울증이야.”


그 후에도 꾸준히 “견디기 너무 힘들어. 제발 병원에 좀 데려가 줘!”라고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소리는 늘 똑같았다. “앞으로는 부정적인 생각을 안 하면 돼. 좀 즐겁게 살아봐!”


우리는 왜 우울증 환자에게 “긍정적으로 생각해. 조금만 힘을 내!”라고 쉽게 말할까? 몸이 아픈 사람에게는 “네 세포들이 건강한 세포를 공격하고 있잖아. 가만히 내버려두면 안 돼!”라고 말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결국 상대를 바꿔 간호사 언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언니는 나를 상담 센터에 데려가줬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엄마도 어쩔 수 없이 병원에 데려가는 데 동의했다.


사실 최근 몇 년 동안 우울증 관련한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내가 먼저 우울증에 관해 깊이 공부해서 내 상태를 확실히 알았다면, 부모님께 내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보통 사람이라면 아프고 고통스러워 눈물을 흘릴 상황에, 나는 그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슬픔을 느끼고만 있었다. ‘나라는 사람에게는 운도 따르지 않는구나’, ‘난 살 가치도 없는 사람이야’, ‘이렇게 아픈데 왜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을까?’, ‘난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구나’ 하는 생각만 했다. 이런 감정적 반응이 너무 강렬할 때면 부모님은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라 쩔쩔매시곤 했다.


어떤 날에는 수업 시간에 선생님 말씀이 무슨 얘기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 온종일 울다 결국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어 “학교 그만 다니고 싶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심할 때는 자살 충동을 느낀 적도 있었다. 작은 좌절에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참담함이 몰려와 비이성적이고 예민하게 반응했다. 정말 매 순간 진심으로 죽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부모님의 무관심, 친구들의 따돌림, 바닥이 된 성적 때문에 불투명해진 입시... 내 인생은 그 자체로 비참하고 엉망이었다. 이때 의사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회적지지’를 받을 수 있는 곳을 꼭 찾아봐. 그래야 네 상태가 좋아질 수 있어. 약만 먹는다고 절대 좋아지지 않아.”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슬프기만 했다. ‘믿을 만한 친구도, 가족도 없는데 어디에서 사회적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곰곰이 곱씹어보니, 심리상담과 약물이 일시적인 고통을 덜어줄 수는 있어도 앞으로 남은 인생을 잘 살아내기 위해서는 ‘인간관계’라는 안전한 보호막, 즉 ‘사회적지지’의 울타리가 필요하다는 의미였음을 알게 됐다.


사회는 사람들에게 ‘긍정’과 ‘외향성’을 강요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긍정적이고 활발한 모습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누구든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사람과는 교제하기 싫어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엄청난 심리적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에 며칠만 지나도 결국 지치게 되고, ‘본연의 나’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아진다. 아무리 가면을 쓰는 데 능통한 사람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가면을 쓰지 않는다. 남들에게 “나는 우울증을 겪은 이력이 있고 오랫동안 수차례의 치료를 받아왔다. 지금은 괜찮아졌지만 언제 또 재발할지도 모른다”고 태연하게 말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나를 더 이상 숨기지 않아도 되니, 좀 더 ‘나다운 나’가 된 기분이 든다.


심리 치료를 받을 때 가오슝대학병원의 한 정신과 의사가 내게 한 말이 지금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나도 너처럼 북일여고를 나왔어. 상위 1퍼센트만 입학할 수 있는 명문 고등학교이기도 했고, 정신과 의사라는 목표도 있었기 때문에 공부를 열심히 해야만 했지. 그런데 갑자기 1학년 때 성적이 크게 떨어지게 되면서 우울증이 온 거야. 그때 스스로를 참 많이 원망했었어.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처럼 또 너처럼 마음이 아픈 사람을 도와줄 수 있게 하려고 하느님이 날 훈련시킨 게 아닐까 싶어. 같은 상황을 겪어봤기 때문에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을 훨씬 잘 이해할 수 있게 됐거든.”


그렇다. 우울증을 직접 겪어봤고 심리학으로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데다 평소 글쓰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지금도 우울증과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나 감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와 도움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아가서 사회도 그러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다.



마음이 아픈 줄도 모르고

이번에는 나를 구할 거야

나는 심리학을 통해 나 자신을 좀 더 이해하고 잘 살아가고자 했다. 그래서 대학교 3학년에 올라가기 전 여름방학에 편입 시험을 봤다. 편입 시험 제도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대학교 1학년을 마치거나 5년제 전문학교를 마친 사람에게만 자격이 주어지며 시험에 통과해야 다른 대학으로 편입할 수 있다. 이 시험에 통과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며, 특히 심리학과에 들어가는 것은 훨씬 어렵다.


심리학과의 낮은 합격률만이 나를 힘들게 한 것은 아니었다. 몇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심리학과 수업은 주로 원서로 배우기 때문에 시험도 영어로 봐야 했다. 하지만 평소 영어 알레르기가 심해서 스펠링만 봐도 괜히 심장이 두근두근 빠르게 뛰고 호흡이 가빠지며 사자에게 쫓기는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편입 시험을 계기로 서로 다른 분야의 일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도서관에 가서 심리학 서적을 읽기 시작해서 나름 심리학에 대한 열정이 있다고 자신했는데도 부족한 것투성이었다. 당시 일반 심리학 도서를 최소 7권 정도 읽었고 원서 역시 1권씩은 꼭 읽으려 했었는데, 여전히 마땅한 해결 방법을 찾지 못했다. 당장에 두 달 후에 있을 시험을 어떻게 치러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따. 심해진 우울증으로 또다시 글자 한 자도 제대로 읽을 수 없게 됐다.


휴학 후 집으로 돌아와서 한 달 내내 잠을 자거나 드라마만 보고, 책은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매일매일 10회 연속으로 드라마만 보고 그에 대한 감상을 적으며 나와 대화를 나눴다. 그러면서 그동안 상한 마음을 위로하고 달래줬다.


내가 공부를 시작한 것은 6월부터였다.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딱 한 달 공부하고 심리학과에 합격한 것이다. 진짜 운이 좋았던 것일까? 어쩌면 하느님의 도움으로 합격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은 피나는 노력과 가족의 격려가 합격에 큰 영향을 미쳤다.


6월부터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6시부터 책상에 앉아 공부하기 시작했다. 점심시간과 낮잠 시간을  포함해 딱 한 시간만 쉬고, 다시 오후 1시부터 밤 10시까지 계속해서 공부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화장실과 샤워하는 시간 말고는 자리를 떠난 적이 없다.


어떻게 폐인처럼 있다가 한 달 만에 이렇게 변할 수 있었을까? 바로 우리 부모님 덕분이다. 부모님이 먼저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반에서 꼴찌를 도맡아 한 내가 어떻게 편입 시험에 합격할 수 있겠냐”고 했더니, 아빠가 자존감 상하지 않도록 나를 잘 타일러주셨다. “도전을 해야 자신을 격려할 수 있어. 적이 너무 강하다고만 생각하면 너 자신도 주춤할 수밖에 없어. 그저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것만큼 열심히 하면 돼. 네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할 수는 없으니까.”


엄마도 매일 아침 날 깨우면서 내 손을 꼭 잡고 말씀하셨다. “민주야, 넌 할 수 있어. 네가 열심히 하면 하늘도 도울 거야. 엄마도 옆에서 응원해줄게. 너도 너를 믿어봐. 그럼 시험도 잘 볼 수 있을 거야.”


혹시 부모님이 내 열등감을 없애고자 몰래 자기충족적 예언 이론이라도 배운 것일까? 자기충족적 예언은 자기 스스로 예언을 현실로 만든다는 뜻으로, 타인의 기대 수준에 자신의 행위를 맞추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특별한 지원이 필요한 장애 학생에게 교사가 어떠한 이미지를 주느냐에 따라 그들의 학업 성취가 달라질 수 있다.


아직도 그때 우리 부모님이 무슨 마음으로 갑자기 그렇게 변하셨는지 모른다. 계속해서 컨디션 난조에, 자신감은커녕 무기력감에 허덕이고 있던 때라 “노력하면 합격할 수 있다!”, “너 자신을 믿어!”라는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격려로 인해 가망은 없을지라도 끝까지 해보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생각했다.



곁을 지켜주는 누군가가 있으니

고양이들을 키우며 알게 된 부모의 마음

매주 금요일에는 아르바이트가 두 개나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13시간동안 일하고 집에 돌아오면 몸도 마음도 녹초가 된다. 피로에 찌든 나머지 씻기도 전에 거실 바닥에 그대로 누워버린다. 한기가 잔뜩 서린 장판과 피부가 맞닿으면 또다시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듯한 기분이 슬금슬금 올라온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다. 무엇 하나 소홀히 하지 않으려고 모든 틈을 메우려고 애썼지만, 여전히 내 가치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날도 몹시 무기력했고, 여느 때와 같이 나는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간 듯했다. 힘이 쭉 빠진 팔을 겨우 움직여 후배에게 문자를 보냈다.


“어떡하지, 너무 피곤해서 죽을 것 같아.”

“그럼 언니도 고양이 한 마리 길러보는 건 어때? 가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가 나한테 기대서 살아가는 걸 보면, ‘아, 나도 살 가치가 있는 사람이구나’싶은 생각이 들더라고. 가끔 와서 애교를 부리는데, 얼마나 예쁜지 몰라.”


반려동물을 기르면서 어떻게 우울증을 치료했는지 후배의 경험담을 듣다 보니 일리가 있어 보였다. 다음 날 나는 유기묘 두 마리를 바로 입양했다. 원래부터 고양이를 좋아했지만, 부모님이 고양이를 싫어하고 무서워해서 집에서는 기를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죽음의 문턱’까지 와 있는 상황에서 그런 것을 따질 새가 어디 있겠는가.


외출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고양이들이 문 앞에 나와 ‘야옹’ 소리를 내며 나를 반겼다. 내가 공부를 하고 있으면 다리에 앉아서 잠을 자고, 새벽에는 뺨을 핥아서 깨우곤 했다. 좁은 방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고, 내 안에 있던 불안함과 외로움도 조금씩 사라졌다.


무엇보다 고양이들을 보살피면서 나와 부모님의 관계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부모님은 나에게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방과 따듯한 밥을 삼시 세끼 제공해주시고 지금까지 한 번도 성적에 대한 압박을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 가족에게는 많은 갈등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상처 또한 많이 받았다. 부모님은 나에 대해 아무런 기대가 없으며, 우수한 학생은 자립심이 강한데 너는 그렇지 않다고 비난하며 수시로 나에게 상처 되는 말을 했고, 이로 인해 자존감이 매우 낮아졌다 나를 더 화나게 했던 것은 내 감정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울증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했을 때조차도 냉담하게 대했다.


“부모님도 엄마 아빠가 된 건 이번이 처음이잖아. 네 모든 변화가 너희 부모님에게도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던 것뿐이야.”


몇 년 전 어느 책에서 본 문구다. 이 글을 볼 때만 해도 ‘내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했던 걸까? 부모님도 아마 처음이어서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랐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자녀를 어떻게 양육하는지 몰랐다면 육아 관련 서적을 한 번이라도 들춰봤어야 하는 게 아닐까?’하며 원망하기 시작했다. 선인장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주인이 매일 물을 줘서 썩어버리는 것처럼, 나도 양육에 대해 무지한 부모 밑에서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이따금 했다.


아빠는 출장을 다녀올 때마다 나에게 선물을 잔뜩 사다 주시곤 했다. 대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아빠가 상해에 갔다 오시면서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가죽 지갑을 7개 정도 사다 주셨다. 복잡한 디자인을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워낙에 오래된 물품을 선호하는지라 하나를 쓰면 2~3년 정도 쓰는데, 7개나 사다 주면 어느 세월에 쓰라는 것일까? 결국 나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으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렇다고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아빠는 딸에게 어떻게 사랑을 표현하는지 알지 못해서 선물로 그 마음을 대신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 쓰지도 못할 선물보다는 작은 격려의 말이나 잠깐이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주는 것만으로 충분할 텐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어떤 사람은 내가 복에 겨운 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다른 아이가 우리 집 같은 자유분방한 분위기에서 자랐다면 나와 달리 정말 즐겁게 지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들ㄹ에게 선천적인 기질이 다르며, 부모와 자녀도 따지고 보면 독립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의 스타일에 맞춰야 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껄끄러운 사이가 된 데에는 나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으면 혼자 삭히고 말을 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내가 말을 하지 않으니 부모님은 내 감정이 어떤지 알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가족은 평생 함께하는 존재다. 누구라도 먼저 변화하고자 나서지 않는 한 관계는 절대로 개선되지 않는다. 나는 한참을 버티고 버티다가 부모님과 소통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다시 고양이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내가 기르는 고양이들은 같은 배에서 태어난 흰 바탕에 얼룩무늬 고양이다. 원래는 한 마리만 기를 생각이었는데, 입양센터에서 내가 고른 고양이가 외로움을 너무 많이 타서 꼭 다른 고양이와 함께 데려가야 한다고 했다. 외로움의 영향이 얼마나 큰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두 마리 모두 데려오게 됐다.


수고양이의 이름은 ‘취두부’다. 암코양이는 입가의 주황색 얼룩이 마치 김칫국물이 묻은 듯해서 이름을 ‘파오차이’라고 지었다. 같은 배에서 나왔지만 두 고양이의 성격은 완전히 달랐다. 취두부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뛰어나 온 지 1주일 만에 애교를 부리며 품에 안기려 한 데 비해, 파오차이는 매우 신경질적이고 항상 멀리 숨어서 지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사람에게 잘 다가오는 취두부를 더 좋아하게 됐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내가 편견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 성격은 사실 파오차이와 매우 비슷하다. 쉽게 긴장하고 불안해하며 고집도 세고 나름 독립심이 강하다. 또한 무의식중에 부모님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인간관계에 위축돼 있다고 해서 ‘사랑’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가끔은 일부러 파오차이를 더 많이 쓰다듬어주고 나 스스로 편견을 가지면 안 된다고 자각한다. 


한 번은 동물병원 의사가 유기묘들은 구충제를 복용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300위안이나 들여 약을 지었다. 집에 돌아와 약을 먹였는데, 두 마리 모두 약을 혀 밑에 숨기고 있다가 내가 한눈판 사이에 몰래 구석에 다시 뱉어놓았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너무 화가 나고 약이 올라서 혼을 냈다.


한바탕 쏟아붓고 나니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유치원 시절에 나 또한 쓴 약이 너무 싫어서 몰래 화장실 변기에 버리곤 했었는데, 나중에 엄마가 그 사실을 알고는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그리고 예전에 아빠가 농담처럼 “너 갖다 버릴 거야”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내 감정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말이었다. 어쩌면 내가 고양이들에게 한 말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


지금은 아빠가 상처를 주는 말을 해도 “방금 한 말이 나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알아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한다. 여전히 아빠는 나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모르는 듯하지만, 천천히 가다 보면 우리가 함께 지내는 방법을 찾아낼 거라 믿는다. 실제로도 미약하지만 아빠가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예전에 가족 여행을 갔을 때 “너무 피곤해서 호텔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면 아빠는 항상 “내가 너 자라고 그만한 돈을 쓰고 여기까지 왔겠니?”라고 나를 꾸짖으셨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생리통이 심하니? 그럼 좀 쉬고 있어. 아빠 혼자 나가서 잠깐 돌아보고 올게.”


며칠 전에 기분이 너무 좋지 않아 아빠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했더니, 의외의 말을 하셨다.


“실은 나도 어렸을 때 애들한테 괴롭힘을 당했었어. 너무 외로워서 혼자 지도를 들고 여기저기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녔었지. 그랬더니 마음이 좀 풀리더라. 마음이 좋지 않을 때 스스로 위로할 방법을 찾아야 해. 그런 이유로 이번에 너에게 차를 선물해줄까 싶어.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바다라도 다녀올 수 있게 말이야. 인생에 좋은 기회들이 많지만, 특히 난 너와 네 엄마를 만난 걸 감사하게 생각해. 아빠는 널 정말 많이 사랑하고 있단다.”


예전의 아빠라면 절대 하지 못했을 말이다. 고양이를 기르면서 나는 보살피는 사람으로서의 스트레스를 경험하고 있다. 우리 부모님도 나를 사랑하긴 하지만 그들 역시 나름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상처받는 것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참고로 우리 집은 가정폭력이나 학대는 없었다. 단지 직장과 학교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집까지 가져와서 이런 부정적인 감정과 부당한 갈등을 처리하는 데 있어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 것뿐이다. 모든 가정의 사정은 다르기 때문에 우리 가족들에게 일어난 일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고, 이 방법이 무조건 옳다는 것도 아님을 알린다.


다만 어떤 상황이든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 사람이 겪었을 어려움을 이해하는 법을 배울 필요는 있다. 과거의 상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허우적대는 자신과 화해하고 앞으로 다가올 행복한 날들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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