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놓고 살았다 사랑을 놓고 살았다

   
고두현
ǻ
쌤앤파커스
   
15000
2018�� 11��



■ 책 소개

 

당신의 가슴을 다시 뛰게 할 사랑과 인생의 명시

 

《시 읽는 CEO》《마음필사》 등 시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위안을 안겨주었던 고두현 시인이 이번 책에서는 ‘사랑’과 ‘인생’을 주제로 울림 있는 시 이야기를 선사한다. 명시뿐 아니라 시에 얽힌 사연과 시인들의 삶을 이야기 형식으로 친근하게 소개함으로써 독자들의 헛헛한 마음을 채워주고 다시금 심장을 뛰게 만든다.

 

1부 <유일한 사랑 & 영원한 사랑>에는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와 결혼하려다 집안 반대에 부딪혀 목매 죽으려 했던 김영랑부터 온갖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한 여인에게 평생을 약속했던 존 던까지 변치 않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이 그려져 있다.

 

2부 <격정적 사랑 & 비운의 사랑>에는 사랑하는 연인이 목숨을 끊자 그를 잊지 못해 저세상까지 따라간 세라 티즈데일, ‘맨발의 춤꾼’이자 열일곱 살 연상인 이사도라 덩컨과 불같은 사랑을 하고 헤어진 뒤 신경쇠약과 알코올중독에 시달리다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세르게이 예세닌 등 생의 한순간 뜨거운 사랑을 했지만 비극으로 막을 내린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다.

 

3부 <금지된 사랑 & 위험한 사랑>에서는 랭보와의 파멸적인 동성애로 가정 안팎의 지탄을 받았던 폴 베를렌부터 유부남 목사를 향해 연정을 키웠던 에밀리 디킨슨까지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 사랑으로 고통 받았던 시인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4부 <첫사랑 & 마지막 사랑>에는 첫눈에 반해버린 여인을 만나려고 세 번이나 찾아갔지만 끝내 친구에게 빼앗겨버린 백석, 오십이 돼서야 만난 아내와 알콩달콩 살아가는 함민복 등 아름답고 때론 눈물겨운 순애보가 소개돼 있다.

 

■ 저자 고두현
한려해상국립공원을 품은 경남 남해 금산에서 자랐다.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했다. 그의 시는 “잘 익은 운율과 동양적 어조, 달관된 화법으로 전통 시의 품격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KBS, MBC, SBS 라디오 문화 프로그램을 통해 오랫동안 시와 시인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1988년 한국경제신문에 입사해 문화부 기자와 문화부장을 거쳐 현재 논설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시에 관한 에세이집 《시 읽는 CEO》 《옛시 읽는 CEO》 《마흔에 읽는 시》 《마음필사》 《동주필사》 《사랑, 시를 쓰다》, 책에 관한 에세이집 《생각의 품격》 《교양의 품격》 《경영의 품격》 《미래 10년 독서》 《독서가 행복한 회사》 등을 펴냈다.

 

‘시와 시학 젊은 시인상’ 등을 수상했다.

 

■ 차례
머리말_ 앞만 보고 달려온 그대, 이젠 잠시 멈춰 시를 만나야 할 시간

 

1부_ 유일한 사랑 & 영원한 사랑
/사랑/
최승희를 사랑한 영랑이 목매 죽으려 했던 나무가
 모란이 피기까지는_ 김영랑
 예이츠, 그대 발밑에 내 꿈을 깔았으니
 하늘의 융단 윌리엄_ 버틀러 예이츠
 누가 알았을까, 거기서 내가 사랑에 빠질 줄
 내가 라이오네스로 떠났을 때_ 토머스 하디
 우리 사랑은 끊어지지 않고 늘어나는 금박처럼
 이별의 말- 슬퍼하지 말기를_ 존 던
 그대를 위하여서는 나를 대적하여 싸우리라
 소네트 89_ 윌리엄 셰익스피어
 신의 부름 받더라도 더욱 사랑하리다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고요?_ 엘리자베스 브라우닝
 이웃집 처녀에게 바친 존 키츠의 비밀편지
 빛나는 별이여_ 존 키츠

/인생/
다음 날을 위해 남겨 두었던 한 갈래 길
 가지 않은 길_ 로버트 프로스트
 빠삐용! 자네가 찾는 자유가 또 다른 속박은 아닐지
 드레퓌스의 벤치에서_ 구상
 대천해수욕장 포장마차에서 소주 마시다 쓴 시
 소주병_ 공광규

/여백/
꽃잎 핀 아침, 그이의 소식은
 홍시여 잊지 말라_ 나쓰메 소세키
 번개를 보면서도 삶이 한순간인 걸 모르다니
 잔나비 울음 듣는 이여_ 마쓰오 바쇼


2부_ 격정적 사랑 & 비운의 사랑
/사랑/
어떻게 줄 수 있을까, 나의 전 생애가 담긴 침묵을
 아말피의 밤 노래_ 세라 티즈데일
 루 살로메에게 바친 청년 릴케의 연정
 내 눈의 빛을 꺼주소서_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맨발의 이사도라 덩컨이 한눈에 반한
 잘 있거라, 벗이여_ 세르게이 예세닌
 괴테는 왜 그녀에게 은행잎을 보냈을까
 은행나무 잎_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그들이 미라보 다리에서 만난 까닭
 미라보 다리_ 기욤 아폴리네르
 어느 꽃의 눈물이 이토록 뜨거우랴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_ 하인리히 하이네
<닥터 지바고>를 그대로 압축한 듯
 겨울밤_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인생/
프랑시스 잠은 왜 당나귀를 좋아했을까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이니_ 프랑시스 잠
 높은 곳에서는 누구나 잘못을 빌고 싶어진다
 발왕산에 가보셨나요_ 고두현
 모든 덕목을 가졌으되 악덕은 갖지 않았던 그를 위해!
어느 뉴펀들랜드 개의 묘비명_ 조지 고든 바이런

/여백/
그대와 나 사이에 두 개의 가을
 몇 번씩이나_ 마사오카 시키
 그대 그리워져서 등불 켤 무렵
 그대 그리워져서_ 가야 시라오


3부_ 금지된 사랑 & 위험한 사랑
/사랑/
어찌하여 그대는 나를 깨우느뇨?
오시안의 시_ 제임스 맥퍼슨
26세 가정교사와 안주인의 만남
 반평생_ 프리드리히 횔덜린
 사랑은 숱한 한숨과 후회 속에서 얻어지느니
 내 나이 스물하고 하나였을 때_ 앨프레드 에드워드 하우스먼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낙엽 같아라
 가을의 노래_ 폴 베를렌
 조숙한 천재의 특별한 ‘감각’과 ‘첫날밤’
감각_ 아르튀르 랭보
‘나의 침실’ 속 마돈나는?
나의 침실로_ 이상화
 사랑이란 자기 그릇 만큼밖에는 담지 못하지
 슬픔처럼 살며시 여름이 사라졌네_ 에밀리 디킨슨

/인생/
비오는 날 듣는 통기타 소리엔 발해금의 울림이
 월광(月光) 소섬_ 고두현
 홍시 속살 같은 서해 노을
 만리포 사랑_ 고두현
 길고 아름다운 고래의 허밍에 귀를 기울이며
 고래의 꿈_ 송찬호

/여백/
꽃그늘 아래 생판 남인 사람 아무도 없네
 꽃잎이 떨어지네_ 아라키다 모리타케
 그 사람의 밤 역시 나 같았으리
 찬비 내리네_ 요사 부손


4부_ 첫사랑 & 마지막 사랑
/사랑/
산돌을 줏어다가 날마다 물 주어 기르는 마음
 첫사랑의 시_ 서정주
 첫사랑 동네처녀와 이별한 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_ 김소월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세월이 가면_ 박인환
 백석이 짝사랑했던 통영 처녀
 통영_ 백석
 윤동주가 사랑한 ‘순이’는 누구일까?
사랑의 전당_ 윤동주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국경의 밤_ 김동환
 긴 상을 함께 들 땐 보폭까지 맞춰야
 부부_ 함민복

/인생/
새해 아침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첫 마음_ 정채봉
 분꽃보다 고운 그 발, 다시 한 번 만져보고 싶네
 참 예쁜 발_ 고두현
 윔블던에 새겨진 키플링의 시
 만약에……_ J. 러디어드 키플링

/여백/
무심한 눈발만 흩날려 쌓이고
 눈 흩날리네_ 고바야시 잇사
 영화 속의 ‘대포 위 나비’ 장면을 낳은 시
 나비 한 마리_ 요사 부손




시를 놓고 살았다 사랑을 놓고 살았다


유일한 사랑 영원한 사랑

모란이 피기까지는_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비로소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최승희를 사랑한 영랑이 목매 죽으려 했던 나무가

시인 김영랑(1903~1950)의 생가가 있는 전남 강진. 거리 곳곳에 그의 시 구절을 딴 모란공원, 모란상회, 모란미용실 등이 보인다. 영랑사진관과 영랑다방, 영랑화랑도 있다. 컴퓨터가게 간판에도 시인의 이름이 붙어 있다.


군청 옆길로 걸어 올라가니 고즈넉한 초가집이 눈에 들어온다. 그의 옛집이다. 안채에 딸린 마당의 장독대도 정겨운 풍경이다. 해마다 초여름이면 마당 한 구석에 모란이 피어나는 곳. 진한 모란 향기가 시비를 감싸는 모습이 그림 같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그의 시집을 펼친다. 가는 길에 읽다가 접어두었던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꽃이 피기까지의 기다림과 낙화한 뒤의 절망감을 반복적인 리듬으로 노래한 시. 기다림이 무산된 순간의 절망을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말’ 뚝뚝 떨어지는 모란에 빗댄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울면서 그토록 기다린 ‘찬란한 슬픔의 봄’은 또 무슨 의미일까.


그의 ‘찬란한 슬픔’은 젊은 날 이루지 못한 사랑의 비극에서 비롯됐다. 상대는 훗날 한국 최고의 춤꾼으로 이름을 날린 최승희다.


최승희는 작가 최승일의 여동생이다. 영랑은 열네 살에 일찍 결혼했으나 1년 만에 상처하고, 서울 휘문의숙(지금의 휘문고)에 다니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거기에서 최승일을 사귀었다. 관동대지진 여파로 유학생활을 접고 귀국한 뒤에는 서울 나들이 때마다 최승일의 집에서 유숙했다. 그때 자연스럽게 최승희를 만났다. 최승희가 숙명여학교 2학년이었으니 열네 살밖에 안 됐지만 뛰어난 미모에 내면도 꽤나 성숙했다. 당시 영랑은 스물두 살이었다.


오빠 친구인 영랑의 시적 감수성에 최승희의 마음도 흔들렸다. 둘 사이는 마침내 결혼을 약속할 정도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두 집안은 이들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았다. 영랑의 집안에서는 “그런 경성의 신여성은 우리 가문에 필요 없다”며 손사래를 쳤고, 최승희의 집안에서는 영랑의 지방색을 들어 반대했다.


1년간의 줄다리기 끝에 상심한 영랑은 뒤랑 동백나무에 목을 매고 자살을 시도하다가 발각됐다. 영랑 생가에 장독대 쪽으로 가지를 길게 늘어뜨린 나무가 바로 그 나무다.


봄날의 풋사랑 같은 사연을 뒤로 하고 최승희는 일본으로 건너가 당대 최고 무용가의 길을 걸었고, 영랑은 그 빈자리를 시로 채웠다. 그러나 ‘찬란한 슬픔의 봄’은 해마다 그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그는 모란이 피는 5월이면 좋아하는 술도 끊고 노래도 멀리하면서 모란 옆을 지켰다. 가장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을 보면서 그 진한 향기만큼 깊은 슬픔을 혼자 견디는 모습이 애잔하다. 그는 집 뜰에 300여 그루의 모란을 심어 정성껏 가꾸었다.


1930년 박용철과 함께 《시문학》을 창간하면서 순수시의 시대를 연 영랑은 이후 20여 년간 향토적이고 미학적인 시를 잇달아 발표한 뒤 9.28 서울 수복 때 포탄 파편에 맞아 생을 마감했다.


지금도 모란이 필 무렵이면 그의 생가에 사람들이 몰린다. 초가을엔 마당가 장독대 앞에서 ‘오~매 단풍 들것네’를 읊조리며 시향에 젖는 독자도 많다. 그 속에서 최승희와의 안타까운 사연을 되새기며 젊은 날의 영랑을 떠올리는 사람 또한 만날 수 있다.



소네트 89_ 윌리엄 셰익스피어

어떤 허물 때문에 나를 버린다고 하시면,

나는 그 허물을 더 과장하여 말하리라.

나를 절름발이라고 하시면 나는 곧 다리를 절으리라.

그대의 말에 구태여 변명 아니하며.

사랑을 바꾸고 싶어 그대가 구실을 만드는 것은

내가 날 욕되게 하는 것보다 절반도 날 욕되게 아니하도다.

그대의 뜻이라면 지금까지의 모든 관계를 청산하고,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보이게 하리라.

그대 가는 곳에는 아니 가리라.

내 입에 그대의 이름을 달지 않으리라.

불경한 내가 혹시 구면이라 아는 체하여

그대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그대를 위하여서는 나를 대적하여 싸우리라.

그대가 미워하는 사람을 나 또한 사랑할 수 없나니.


그대를 위해서는 나를 대적하여 싸우리라

셰익스피어(1564~1616)의 소네트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소네트란 일정한 운율과 형식을 갖춘 열네 줄짜리 사랑 시다. 13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돼 전 유럽으로 퍼졌다.


셰익스피어가 남긴 소네트는 모두 154편이다. 이 시편들은 그의 4대 비극보다 더 애절하고 아름다워서 오늘날까지 수많은 연인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지고지순의 사랑. ‘소네트 89의 마지막 두 행은 사랑의 숭고함을 가장 뛰어나게 묘사한 절창 중의 절창이다.


’그대를 위하여서는 나를 대적하여 싸우리라./ 그대가 미워하는 사람을 나 또한 사랑할 수 없나니.‘


셰익스피어는 ’천 개의 마음을 가진 시인‘이라는 극찬을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러브 스토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564년 영국 남부에서 태어나 열세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집안일을 해야 했던 그가 열아홉 살 되던 해에 여덟 살 연상의 앤 해서웨이라는 여인과 결혼했다는 사실만 확인됐다.


그는 대학도 다니지 못했다. 그런데도 타고난 언어 구사력과 무대예술 감각으로 최고의 시인, 극작가가 됐다.


그가 《소네트 시집》을 쓴 기간은 스물여덟 살에서 서른 살까지 2년 남짓이다. 결혼한 지 10년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이 시집은 아내를 위한 연가였을까, 아니면 다른 여인에게 바친 밀어였을까.


시집 전체의 내용은 한 시인과 귀족 청년, 검은 여인의 삼각관계를 다루고 있다. 귀족 청년과 검은 여인이 시인의 영혼을 차지하려고 싸우는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로 의인화돼 있는 게 특징이다.


지금이야 소네트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지만, 1609년 출간 당시에는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 성관계에 대한 노골적인 암시 등 내용이 부도덕하다는 게 이유였다.


그가 이 시집을 출간했을 때의 나이는 45세. 헌사에 나오는 헌정 대상 인물의 이니셜 W.H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숱한 해석이 분분했지만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다. 20세기 미국 평론가 해럴드 블룸 등 세계적인 연구자들은 “셰익스피어가 천재성을 완벽하게 발휘한 작품”이라고 극찬하면서도 소네트의 주인공을 밝혀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숭고한 사랑의 원천은 지금도 마르지 않고 우리 영혼의 샘물로 찰랑거린다. ‘그대를 위하여서는 나를 대적하여 싸우리라’던 그의 절대적 사랑을 받은 여인의 정체가 그래서 더욱 궁금하다.



격정적 사랑 비운의 사랑

내 눈의 빛을 꺼주소서_ 라이너 마리아 릴케

내 눈의 빛을 꺼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아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내 팔을 부러뜨려주소서, 나는 손으로 하듯

내 가슴으로 당신을 끌어안을 것입니다.

내 심장을 막아주소서, 그러면 나의 뇌가 고동칠 것입니다,

내 뇌에 불을 지르면, 나는 당신을

피에 실어 나르겠습니다.


루 살로메에게 바친 청년 릴케의 연정

이 시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가 스물두 살 때 열네 살 연상의 여인 루 살로메(1861~1937)에게 바친 연시다.


그가 루(릴케는 그녀를 ‘루’라는 애칭으로 불렀다)를 만난 것은 1897년 5월 12일 독일 뮌헨의 한 소설가 집에서 열린 다과회에서였다. 1년 전 그녀의 에세이 《유대인 예수》를 읽고 감명을 받아 익명으로 몇 편의 시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격정에 사로잡혔다. 그녀도 열정적인 청년 시인의 감성에 매료됐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당신과 내가 보낸 어제의 그 황혼의 시간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로 시작하는 달콤한 편지를 보냈다. 처음이 아니라는 말은 책을 통해 이미 깊은 감응이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는 “그 황혼의 시간에 나는 당신과 단둘이서만 있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두 사람은 금세 가까워졌고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어릴 때부터 유약하게 자란 릴케의 모성결핍까지 더해지면서 둘 사이는 더욱 뜨거워졌다.


루는 이미 당대 최고 지식인과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북돋워주는 뮤즈로 유명했다. 제정러시아 장군의 5남 1녀 외동딸로 태어나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대학교육까지 받았고 미모도 뛰어났다. 그녀는 스위스와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을 거치며 니체와 프로이트, 융, 바그너 등 철학, 예술가들과 사랑을 주고받았고 깊은 정감을 나눴다.


릴케를 만났을 땐 독일 언어학자 프리드리히 안드레아스와 결혼한 상태였다. 특이하게 ‘성관계는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니 일종의 정신적 계약결혼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남편과의 관계가 시들해질 무렵 그녀는 릴케를 만났다.


첫 만남 이후 두 달쯤 됐을까. 릴케와 루는 뮌헨 교외의 볼프라츠하우젠에 있는 숲속 방갈로 한 채를 빌려 꿈같은 한 달을 보냈다. 빵과 채소와 달걀 등으로 최소한의 식사만 한 뒤 나머지 시간은 사랑을 나누고 풀밭을 거닐며 시와 인생을 얘기했다. 그들의 맨발과 어깨 위로 백화나무 잎과 꽃잎들이 날리곤 했다.


‘내 눈의 빛을 꺼주소서’는 이 무렵에 릴케가 쓴 시다. 눈과 귀를 막아도, 손발이 없고 입이 없어도, 심장과 눈과 뇌와 피로 당신을 사랑하겠노라는 이 숭고한 헌정시를 그는 루에게 바쳤다. ‘너는 밤과 시간에 우는 닭소리다. 너는 이슬이다. 아침 미사다. 소녀다. 낯모르는 남자다. 어머니다. 죽음이다.’라고 노래한 시 ‘너는 위대한 여명’도 이 시기에 썼다.



잘 있거라, 벗이여_ 세르게이 예세닌

잘 있거라, 벗이여, 안녕.

사랑스런 그대는 내 가슴에 있네.

우리 이별은 예정된 것이언만

내일의 만남을 약속해주는 것.

잘 있거라, 벗이여, 인사도, 악수도 필요 없느니,

한탄하지 말고 슬픔에 찌푸리지도 말게, -

인생에서 죽는다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산다는 건 역시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일이네.


맨발의 이사도라 덩컨이 한눈에 반한

러시아 시인 중에서 푸시킨 다음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세르게이 예세닌(1895~1925).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0대 후반부터 러시아 농촌의 자연과 민중을 바탕으로 한 시를 발표하며 ‘마지막 농촌 시인’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폭압적인 제정시대와 스탈린의 공포정치 속에서 ‘술과 광기로 인생을 견뎌내고’ 결국 30세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러시아혁명이 동참했지만 곧 환상에서 깨어난 뒤 “사회주의는 꿈도 없고 모든 걸 죽이기만 한다”며 절망했다. 이후 반항자가 되어 농민 전쟁을 테마로 한 ‘푸가초프’, 밑바닥 인생들의 아픔을 그린 ‘선술집 모스크바’ 등을 잇달아 썼다. 이 때문에 스탈린 정부로부터 “비속한 말과 술 취한 광인의 눈물로 얼룩져 있기에 누구의 작품보다도 해롭다”는 비난을 받았다. ‘예세닌주의’는 곧 불명예의 표상이었다.


흐루쇼프의 등장으로 러시아 동토에 해동의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까지 그에게는 ‘인민에게 유독한 작가’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녔다. 하지만 톨스토이가 그의 죽음 앞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 죽었다. 그의 시는 마치 그의 마음의 보물을 두 줌 뿌린 것과 같다”라고 했을 정도로 그의 작품은 뛰어났다.


예세닌의 삶에서 ‘맨발의 춤꾼’ 이사도라 덩컨을 빼놓을 수 없다. 러시아혁명 이후 모스크바에 무용학교를 세우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마흔네 살의 덩컨은 열일곱 살 연하인 예세닌에게 한눈에 반했다. 둘은 1922년에 결혼했으나 이별과 재회를 거듭하다 2년 만인 1924년에 완전히 결별했다.


예세닌은 신경쇠약과 알코올중독, 피해망상에 시달렸다. 1925년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그는 2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앙글르테르 호텔에 투숙했다. 3년 전 덩컨과 신혼의 꿈에 젖었던 곳이다. 27일 그는 잉크가 없다 손목을 긋고 흐르는 피로 시를 썼다. 그 시아 바로 ‘잘 있거라, 벗이여’이다. 시를 쓴 다음 날 창문에 목을 맸다(덩컨은 니스에서 새 삶을 시작하다 1927년 바람에 날린 숄이 오픈카 바퀴에 걸리는 바람에 목이 졸려 숨졌다).


덩컨과 더불어 예세닌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러시아 혁명시인이자 예세닌의 라이벌이었던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1893~1930)이다. 그는 예세닌의 시 ‘잘 있거라, 벗이여’의 마지막 구절 ‘인생에서 죽는다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산다는 것 역시 새삼스러울 거 없는 일이네.’에 ‘인생에서 죽는다는 건 어렵지 않지,/ 살아내는 것이 더 어렵다네.’로 화답해 화제를 모았다.


예세닌의 장례식장에서 흐느끼며 ‘세르게이 예세닌에게’라는 시를 낭송했던 그 또한 5년 후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모두가 혁명기의 불운한 천재들이었다.



첫사랑 마지막 사랑

통영_ 백석

옛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처럼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줏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김 냄새 나는 비가 내렸다.


백석이 짝사랑했던 통영 처녀

시인 백석(1912~1996)의 고향은 평안도 정주다. 그런데 남쪽 항구 통영을 제목으로 한 시를 세 편이나 남겼다. 그 배경엔 짝사랑하던 여인 ‘난’이 있었다.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조선일보의 《여성》에서 편집일을 하던 백석은 1935년 친구 허준의 결혼식에서 이화여고생 박경련을 만났다. 스물네 살 청년 시인은 통영 출신의 열여덟 살 처녀에게 홀딱 반하고 말았다.


조선일보에 함께 근무하는 친구 신현중이 그녀를 소개했다는 설과 신현중을 따라온 그녀를 우연히 만났다는 설이 있지만, 어쨌든 그날부터 백석의 마음은 그녀의 잔상으로 어룽거렸다.


그해 6월 그는 신현중과 함께 그녀의 고향 통영으로 향했다. 그때 쓴 시가 ‘통영’ 첫 번째인데, 시에서 ‘저문 유월’이라 했으니 아마도 비가 내리는 초여름 저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의 ‘천희’를 만나지 못했다.


이듬해인 1936년 1월에 그는 또다시 통영 방문에 나섰다. 그러면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두 번째 ‘통영’ 시를 썼다.


‘구마산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내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장은 갓 같기도 하다// (중략) 난(蘭)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는데/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중략) // 영 낮은 집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이 작품은 지금 통영시 명정동 396번지에 있는 그녀의 옛 집 맞은편에 시비로 세워져 있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는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겨울방학이어서 집에 있으리라 여겼지만 안타깝게도 개학 준비차 경성으로 떠난 뒤였다.


그렇게 쓸쓸한 마음을 부둥켜안고 그는 경성으로 돌아왔다. 그때 엇갈린 길 때문이었을까. 이후 또 한 번의 통영행에서도 결국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경성생활을 정리하고 함흥으로 간 백석은 다음 해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친구 신현중과 박경련이 결혼했다는 것이었다. 이때의 말 못할 회한이 ‘내가 생각하는 것은’이라는 시에 녹아 있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위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던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결혼식 뒤풀이에서 한 번 본 처녀에게 반해 몇 번이나 고향집을 찾고도 그 사랑을 친구에게 뺏긴 시인의 슬픈 순애보가 아릿하다.



부부_ 함민복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긴 상을 함께 들 땐 보폭까지 맞춰야

2011년 봄에 늦장가를 간 ‘강화도 시인’ 함민복. ‘부부’는 그가 마흔 즈음 노총각 시절에 쓴 시다. 후배의 부탁을 받고 총각 주제에 겁 없이 ‘밥상을 들 때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두 사람에게’로 시작하는 결혼식 주례를 했는데, 그걸 다듬은 것이다.


총각이 이런 이치를 어떻게 다 알았을까.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하고, 서로의 높낮이뿐만 아니라 걸음의 속도까지 맞춰야 하는 인생의 ‘긴 상(床)’.


신랑 신부의 성을 따면 ‘함박’인 그의 결혼식은 성대했다. 문단 안팎의 선후배 동료들이 대거 참석했다.


서른 중반부터 강화도 동막해변의 월세 10만 원짜리 방에서 바다와 갯벌의 생명력으로 자신을 단련하고, 생활비가 떨어지면 방 가운데 빨랫줄에 걸린 시 한 편을 떼어 출판사로 보내던 그가 ‘꽃보다 아름다운’ 신부를 만나 ‘세상에서 보기 드문 착한 부부’로 거듭나던 날.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라던 그에게 어머니 품처럼 둥글고 아름다운 밥상이 새로 생겼다.


그는 쉰이 돼서야 단짝을 만났다. 반세기를 돌고 만난 인연이라 더욱 애틋했다. 시를 배우고 싶어 왔다는 ‘문학소녀’와 함께 있으면 그럴 수 없이 편안했다. 마음이 맞고, 고향이 같고. 성장 과자어도 비슷했다.


“신랑 신부 나이 합쳐 100살”이라며 짓궂게 놀린 사람은 주례를 맡은 소설가 김훈이었다. 가수 안치환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의 가사를 바꿔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민복이는 알게 되지~”라는 축가로 좌중을 웃겼다.


그렇게 외로움에 쩔쩔매단 사람이 결혼했으니 이젠 형편이 좀 나아졌을까. 그는 “자다가 가위에 눌려도 깨워줄 아내가 있다고 생각하니 든든하다. 남편과 아내라는 두 개의 심장으로 살아가는 느낌이 좋다”고 말한다.


“아직 부부에 관한 시는 많이 못 썼어요. 두 편 정도 썼는데 결혼이 익숙해지고 이야기가 쌓이면 더 많이 쓰게 되겠죠. 요즘은 인삼 장사하느라 시 쓸 시간이 많지 않아요.”


그는 결혼 후 강화도 공동상가에 인삼가게를 열었다. 그도 사람인지라 다른 가게가 잘되는 걸 보면 묘한 질투심이 생길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생각한다. ‘우리가 원했던 만큼만 팔면 되는 거’라고. ‘오늘은 이만하면 됐다’고. 이런 과정을 통해 “자족의 테두리를 정하는 법과 삶의 가치관을 새롭게 하는 법을 배웠다”고 그는 덧붙인다.


사람이나 자연에 대해서도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살자고, 두 사람이 힘을 합쳐 들어야 균형이 잡히는 상(床)의 자세로 살자고 다짐한다. 그의 시가 투명한 것도 이런 심성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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