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슬픔이 아름다워 나는 편지를 썼다

   
카마쓰 에이스케(역:나지윤)
ǻ
예문아카이브
   
12000
2018�� 06��



■ 책 소개

 

“온전히 슬픔과 마주할 때 타인과 공감하고 세상과 연결된다”

 

어둠이 있기에 빛의 존재가 살아나듯 삶에는 죽음이라는 필연이 깃들어 있다. 죽음은 절대적이며 회피할 수 없다. 그래서 슬픔은 인간이 가진 가장 보편적인 감정이다. 비단 가까운 사람의 죽음뿐 아니라 세월호나 삼풍백화점 붕괴 같은 대규모 참사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깊은 슬픔을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똑같은 슬픔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당사자가 아니면 누구도 그 슬픔의 본질에 다가갈 수 없다. 마음에 짙게 남은 상흔… 이 책은 바로 그 슬픔에 관한 이야기다.

 

일본은 동일본대지진으로 수십 만 명이 희생됐으며 아직도 그때의 시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많다. 저자인 와카마쓰 에이스케는 “슬픔을 느낄 때 내면의 자신과 조우하게 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슬픔과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면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은 슬픔을 경험한 이들에게 같은 밤을 지새웠던 인생의 동료로서, 삶을 탐구하는 평론가이자 사상가로서, 진솔하게 써내려간 공감과 위로의 글이자 슬픔에 바치는 연서다.

 

■ 저자 와카마쓰 에이스케
문학평론가. 수필가. 게이오대학교 문학부 불문과를 졸업했으며, 미타문학 편집장과 요미우리신문 독서위원으로 활동했다.

 

삶의 숙명과 같은 죽음, 슬픔, 사랑의 본질을 문학·철학적으로 고찰하고 특유의 차분하고 유려한 문체로 풀어내 새로운 반향을 일으키며 일본을 대표하는 문장가로 자리매김했다. 이 책은 아내를 잃은 작가의 담담한 고백과 함께 슬픔의 근원에 관한 깊은 사유가 편지라는 친근한 형식에 더해져 상실의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뜨거운 공감과 위로를 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7년 〈구도의 문학-오치 야스오와 그 시대〉로 미타문학 평론 부문 신인상, 2016년 〈예지의 시학-고바야시 히데오와 이즈쓰 도시히코〉로 제2회 니시와키 준자부로 학술상, 2018년 시집 《보이지 않는 눈물》로 제33회 시가문학관상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슬픔의 비의》《말의 선물》《행복론》《살아있는 철학》 등 다수가 있다.

 

■ 역자 나지윤
숙명여자대학교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학 대학원에서 국제커뮤니케이션 석사 학위를 받았다. 잡지사 기자로 일했으며 현재 엔터스코리아에서 출판 기획 및 일본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죽음을 앞둔 사람의 말》《해결하고 싶은 남자 공감받고 싶은 여자》《개의 마음》《나를 닮은 집》 등 다수가 있다.

 

■ 차례
Ⅰ_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마주치다
눈물 속에 파종하는 자, 기쁨 속에 수확하리니
누군가를 마음 다해 사랑하는 일
쌓여가는 슬픔

 

Ⅱ_내 글이 위로가 될 수 있다면
어둠 속에서 홀로 베개를 적시는 밤
슬픈 당신에게 다가오는 것
사라지지 않는 내면의 빛
그대여, 그대가 오직 진리다

 

Ⅲ_슬픔이 스미는 시간
보이지 않는 눈물
영혼에서 피어나는 꽃
읽고 쓰는 것이 주는 위로

 

Ⅳ_우리에게 축복을 내려주소서
하늘에서 온 사자(使者)

 

글을 마치며
단평(조형래_문학평론가)




너의 슬픔이 아름다워 나는 편지를 썼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마주치다

눈물 속에 파종하는 자, 기쁨 속에 수확하리니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리네요. 글 쓰는 와카마쓰 에이스케입니다. 만나 뵙고 싶다고 바라면서도 상황이 여의치 않아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도시의 하늘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별이 뜬 밤입니다. 별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지금만큼 당신에게 말 걸기 좋을 때도 없을 듯하여 용기를 내봅니다.


사람들은 슬퍼하는 이를 보면 곧잘 위로의 말을 건넵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볼 적마다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슬픔이라는 감정의 다양하고 오묘한 면모를 이해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지요. 똑같은 슬픔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으니 당사자가 아니면 누구도 그 슬픔의 본질에 다가갈 수 없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슬픔이라는 감정은 안타깝고 비참하기만 한 경험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본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슬픔은 인간이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감정 중 하나였지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작품을 읽으면 비가만큼 아름다운 시의 형태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깊은 슬픔을 노래하는 말은 깊은 아름다움마저 드러내니까요.


마음이란 펄펄 살아있는 날것인지라, 범속한 인간은 이를 제대로 다루기가 어렵습니다. 시인은 진정으로 마음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언어로 시를 써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언어의 배달부’ 같은 존재랄까요.


편지는 때때로 아무런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책과의 만남도 이와 비슷한 구석이 있지요. 사람이 책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책이 사람을 부른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방에서 홀로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지금도 어디선가 나에게 눈앞에 있는 책을 펼치라고 권합니다. 그래서 펼친 것이 바로 구양성서의 <시편>입니다.


기원전 597년에 ‘바빌론 유수’라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신 바빌로니아 왕국에 나라를 점령당한 유대인들이 적국의 수도인 바빌론을 필두로 한 지역에 강제로 이주하게 됐지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름 없는 백성들의 깊은 슬픔과 한탄, 신음이 절절히 담긴 것이 바로 <시편>입니다.


나의 세월을 연기처럼 사라지고

나의 뼈는 화로처럼 타오르고 있습니다.

나의 마음은 햇볕에 그을린 풀처럼 말라버리고

나는 빵을 먹는 것조차 잊어버렸습니다.

(…)

나는 잠들지 못합니다.

지붕 위의 새처럼 오직 나 홀로.

(…)

나는 재를 양식같이 먹고

눈물 섞인 물을 마시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머리에 재를 뒤집어쓴다”는 표현으로 망자를 향한 슬픔을 나타냅니다. 이 한 마디에서 시를 읊는 자가 고통스러운 사별을 경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토록 가혹한 시간을 견디면서 꿋꿋이 살아가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더없이 고귀하게 여겨집니다.


앞의 <시편>을 다시 읽으면서 성서를 뒤적거리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글귀가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눈물 속에 파종하는 자, 기쁨 속에 수확하리니.


당신이 아니었으면 나는 이 말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뜻깊은 말을 만나게 해준 당신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 펜을 들었습니다. 부디 건강히시길. 언젠가 꼭 만나게 되기를 기다리겠습니다.


누군가를 마음 다해 사랑하는 일

여름빛이 완연합니다. 이제 그늘 밖이 이불 밖만큼이나 힘들어지겠어요. 지난번 휴일에도 일부러 시간을 내서 강연을 찾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당신과는 초면이었지만 마치 오랜만에 재회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당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 더 감사했습니다.


그날 강연이 끝난 뒤 당신은 내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내와 한 살이던 작은아들, 그리고 부모님을 해일로 잃었습니다. 지금은 열세 살 된 큰아들과 살고 있습니다. 선생님도 병으로 부인을 떠나보냈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질문은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선생님은 다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있지 않았나요? 나는 워낙 불시에 이런 일을 당해서….”


조심스레 말을 건네는 당신의 목소리에서 긴 고민 끝에 나온 절실한 질문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니요, 아내의 죽음은 내게도 갑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지요. 아마 당신의 물음이 오래전부터 내 의식에 잠재했던 모양입니다. 일부러 수면 위로 떠올리지 않았을 뿐이지요.


아내는 죽기 11년 전에 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말년의 마지막 해에 재발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죽기 전 반년은 당장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아내는 산소호흡기 사이로 간신히 “이젠 지쳤어”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습니다.


장례식에 쓸 영정 사진도 없었습니다. 이별하기 전에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주는 일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하루하루를, 1분 1초를, 견디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힘든 투병을 이어가던 아내의 심정은 달랐습니다. 미련하게도 나는 이별한 뒤에야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아닌 나와 가족들을 위해서 버티려고 노력했다는 것을요. 유언이 되어버린 “이젠 지쳤어”라는 한마디가 모든 것을 말해줬습니다.


“그런가… 역시 그런가. 그렇군요.” 당신의 얼굴에는 슬프지만 조금은 차분한 미소가 어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역시 그런가”하고 말했을 때 나는 진실로 위로받은 느낌이었습니다. 상실의 슬픔은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18세기 영국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은 소중한 사람을 잃고 10년 뒤 이런 시를 썼습니다.


사랑을 하고 사람을 잃는 것은

사랑을 아니한 것보다 행복하리라 - 인 메모리엄

‘떠남’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행위일지도 모릅니다. 남겨진 사람은 떠나간 사람의 빈자리를 느끼며 사랑 이외의 아주 귀중한 마음을 얻게 되니까요. 남겨진 사람은 슬픔을 짊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째서 슬픔을 극복해야만 한다고 생각할까요? 어째서 나쁜 감정이라고만 생각할까요? 당신이 그러하고, 내가 그러하고,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이, 슬픔이 있기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된 것은 아내 덕분입니다. 아내가 떠난 뒤 다시 생각해보니 사랑이란 주거나 받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연인과의 이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순간에 관계가 끝났다고 해도 마음은 쉽게 정리할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럴 때는 그저 마음을 다해 사랑하면 됩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시간의 여과를 기다리면 됩니다.


짐작하건대 당신의 부인도 곁에는 없지만 당신의 사랑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껴안을 때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안겨 있을 때, 상대만이 아니라 스스로도 사랑스럽게 느낍니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실감합니다. 당신의 부인도 늘 자신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남편을 곁에서 지켜보며 따뜻하게 안겨 있는 듯한 사랑을 느낄 것입니다.


그날도, 당신은 큰아들과 행복하게 살겠노라 다짐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한 행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떠난 사람의 유일한 바람이니까요. 진심으로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나 역시 당신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행복해지겠습니다.



내 글이 위로가 될 수 있다면

어둠 속에서 홀로 베개를 적시는 밤

나는 편지를 받은 날부터 당신을 생각합니다. 의식하지 않을 때조차 마음속 어딘가에서 만난 적도 없는 당신을 생각하곤 합니다. 당신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언제가 될지 기약이 없기에 오늘은 이렇게 편지를 적어보려 합니다.


당신은 죽음 또는 상실에 대해 어떻게 느끼나요? 소중한 사람이 떠났다. 보내고 나서야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었음을 깨달았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정말 영원히 사라져버린 것일까요? 혹시 당신이 슬픈 이유는 소중한 사람이 곁에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더 이상 닿을 수 없는 곳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나는 슬픔이란 곁을 떠난 사람이 다가오는 신호라고 여길 때가 있습니다. 힘들 때 곁에서 나를 도와준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내 말을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소중한 사람들은 언젠가 우리 곁은 떠나기 마련입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이란 ‘존재가 사라졌다’가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 살아간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생이란 시련을 경험하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슬픔이나 고통이 무엇인지 책이나 공부로는 배울 수 없습니다. 직접 느껴봐야 합니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는 살아봐야 알게 되는 법이니까요. 슬픔에 빠지는 경험도 어쩌면 당신의 인생에 더없이 소중한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은 기쁨만큼이나 슬픔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 같은 밤, 비도 당신도 나도 좀처럼 잠들지 못하는 밤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부시 다카코의 시가 있어 적어봅니다.


어둠 속에 홀로 베개를 적시는 밤

숨을 죽이고

나를 부르는 수많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땅끝에서 하는 저편에서

머나먼 과거에서 희미한 미래에서

밤의 어둠 속에서 메아리치는 무언의 외침

모두 너의 동료들이다

어둠을 홀로 떠도는 자들의 목소리

침묵을 홀로 견디는 자들의 목소리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눈물 흘리는 자들의 목소리


그녀는 너무 슬프고 슬퍼 울부짖지 못하고 소리 죽여 우는 수많은 이름 모를 사람들을 ‘동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동료들’과 깊은 유대감을 느낍니다. 슬픔은 시공간을 초월해 사람과 사람을 이어줍니다. 우리가 온전히 혼자일 때 비로소 타인과 공감하고 세상과 연결되는 이유입니다.


당신의 슬픔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짊어진 슬픔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만이 아니라 미래를 살아갈 사람들을 다독이고 가야 할 길을 비춰주는 빛이 될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인 동시에 슬픈 일이기도 합니다. 언젠가는 그 사람을 잃을 테고 이별은 상상하고 싶지 않을 만큼 괴로운 일이니까요.


그녀가 시를 썼듯 당신도 무언가를 써보기 바랍니다. 시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편지를 쓰듯 마음을 전하고 싶은 사람에게 편지를 써보세요. 당신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모든 대상을 향해 진심을 전해보세요. 당신 자신을 포함해서요.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일이야말로 가장 쉬운 사랑의 표현임을 잊지 마세요.



슬픔이 스미는 시간

영혼에서 피어나는 꽃

숨 가쁘게 돌아가던 하루가 저물고 있네요. 지는 해는 열심히 살고 있다는 증거이면서 속된 공간과 나를 분리하는 중요한 알람 같기도 해요. 요금 사람들은 모두 무언가를 말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제대로 보고 듣기도 전에 입을 엽니다. 반면 말을 상실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말로 표현되지 않는 무언가에 진실이 담겨 있음을 압니다.


당신은 한센병을 아시는지요? 이 질병이 남긴 고통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듣는다’는 행위가 얼마나 의미 깊은 일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한센병은 나균(癩菌)이라는 세균에 감염되어 걸리는 질병입니다. 이 병을 앓는 사람은 손가락과 발가락, 눈과 코, 귀가 문드러지고 심하면 생명을 잃기도 합니다. 1943년 치료제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속수무책으로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불치병이었지요. 지금은 의학이 눈부시게 발달한 덕분에 한센병은 더 이상 발병하지 않습니다. 오래전 발병했던 사람들도 치유 단계에 이르렀고요.


작년 봄, 나는 오카야마 현 나가시마 섬에 있는 애생원을 찾았습니다. 이곳은 한센병 환자들이 지내는 요양원입니다. 그곳에서 남편과 단둘이 지내는 미야자키 가즈에를 만나 한나절 동안 섬을 안내받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야자키가 출간한 에세이 <기다란 길>에는 그녀가 일상에서 발견한 수많은 행복들로 흘러넘칩니다. 나는 그녀를 보며 또 한 번 깨달았습니다. 행복한 사람이란 세상이 만든 ‘행복’이라는 조건을 충족하는 자가 아니라, 그곳에서 스스로 행복을 발견해내는 자라는 것을요.


미야자키는 열 살 무렵에 한센병이 발병해 애생원에 왔습니다. 열아홉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오른쪽 다리를 잘라냈습니다. 그리고 양쪽 손가락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만을 살아갑니다. 그녀 역시 지금 이 순간만을 충실히 살아갈 따름입니다. 그녀의 이 간단한 행복의 원리, 행복은 미래가 아닌 바로 순간에 있음을 알려주고 싶어 합니다.


미야자키의 집은 소박하고 검소합니다. 그녀와 남편, 단출한 가구 몇 개가 전부입니다. 그러나 조금도 썰렁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마음으로 곱게 빚어낸 기쁨과 신뢰, 만족과 행복이 가득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매일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임을 압니다. 언젠가 사람은 헤어지고, 시간은 끝나는 때가 반드시 오기 때문입니다.


나는 가끔 살아간다는 생의 업이 ‘자신의 유골이 들어갈 정도의 조그만 구멍을 뚫는 일’과 비슷하다고 느낍니다. 작은 구멍에 영혼의 꽃을 아름답게 피운다면 그것으로 우리가 사는 의미는 충분합니다. 손바닥만 한 작은 구멍을 뚫는 것이 전부이거늘, 사람들은 늘 다른 어딘가에 인생의 의미가 있다는 듯 조바심을 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에게 축복을 내려주소서

하늘에서 온 사자(使者)

크리스마스이브의 밤입니다. 1년에 단 하루뿐인 날.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당신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당신은 크리스마스에 무엇을 할 계획인가요? 오늘만큼은 부디 마음 놓고 웃는 일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나는 여러 곳에서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캐럴>에 대해 이야기하곤 합니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었지요. 오늘은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1843년 영국에서 출간됐습니다. 영국에는 기독교인이 많지만 유대교인, 이슬람교인, 또는 영국에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켈트족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작가는 크리스마스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음을 의도한 것입니다. 작품에는 네 명의 유령이 등장합니다. 한 명은 주인공의 죽은 동료, 나머지 세 명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유령입니다. 이들은 주인공에게 전할 메시지를 가지고 차례차례 나타납니다. 디킨스를 사자와 유령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앞서 유령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원문에서 ‘Ghost’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단순한 ‘유령’이 아닙니다. 성령은 ‘Holy Ghost’라고 합니다. 짐작하건대 디킨스는 이를 염두에 둔 듯합니다.


소설은 7년 전 크리스마스에 세상을 떠난 동업자 말리가 정령이 되어 크리스마스이브 날 스크루지 앞에 나타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정령은 차분한 어조로 그에게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라고 충고합니다. 나아가 인간의 삶은 생각만 하기에는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가버리니 지금 당장 실천하라고 재촉합니다.


정령은 스크루지를 겁주기 위해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스크루지가 자신의 목소리를 영혼으로 듣고 영혼이 해야 할 일에 눈뜨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이웃을 사랑하며 더불어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니 위로, 격려, 자비를 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주저 말고 다가가야 합니다. 정령은 선행을 베풀고 싶어도 이미 죽은 탓에 가만히 지켜봐야만 할 때가 많습니다. 살아있을 때 이 사실을 깨달았어야 했거늘, 정령은 두고두고 한탄합니다.


말리가 사라진 다음 나타난 과거의 정령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불가사의한 힘을 지녔습니다. 그는 스크루지가 사회에 첫발을 내딛던 때로 데리고 가지요. 세상물정 모르는 어수룩하고 젊은 그를 사장은 따뜻하게 챙기며 가족처럼 대합니다. 크리스마스 날 사장이 스크루지에게 용돈을 건네는 모습을 보고 과거의 정령은 “인간을 감동시키는 일은 참으로 쉽군. 고작 몇 파운드로 과한 칭찬을 받다니….”하고 중얼거리지요. 스크루지는 힘줘 말합니다. 돈이 아니라 진심을 받았기에 감동했다고. 그런데 정작 그 말을 닫고 놀란 쪽은 스크루지 본인이었습니다.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인사만으로도 충분하지요. 마음 깊이 우러나온 인사는 상대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스크루지는 낯선 사람들이 지나칠 때마다 “좋은 아침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를 건넵니다. 그리고 훗날 인생에서 그 순간만큼 기분 좋은 말이 없었다고 회상하지요. 고작 인사 한마디에 과하게 의미를 부여한다고 여기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십분 공감합니다. 실제로 경험한 바가 있으니까요.


어느 겨울날 아내와 업무 차 미국으로 출장을 갔더랬지요. 아침에 몸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던 나는 호텔방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아내는 영어가 능숙하지 않았지만 혼자서 산책을 나갔습니다.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마치 다른 사람인 양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길을 건너는데 건물 밖에서 창문을 청소하던 남자가 싱긋 웃으며 “Good Morning!"하고 인사했고, 그녀도 얼떨결에 “Good Morning!"하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때 그녀에게 인사를 건넨 남자는 자신이 아내의 마음속에 얼마나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는지 모를 것입니다. 일상에서 숱하게 벌어지는 사소하고 소소한 일이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늘 그 사실을 간과하고 있지만요.


당시 그녀는 큰 수술을 치룬 뒤로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녀는 삶의 낙을 잊어버린 듯 위축됐습니다. 그런데 낯선 사람의 “안녕하세요!”라는 말 한마디가 그녀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든 것입니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부터 아내는 잠드는 것조차 괴로워할 만큼 쇠약해졌습니다. 상태가 심각하게 악화됐을 때 나는 잠시 일을 쉬고 곁에 있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평소대로 생활하라고 권유했습니다. 자기 때문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면서요. 하는 수 없이 출근 준비를 마치고 방 안을 들여다보니 그녀는 “잘 다녀와요”하며 희미하게 웃음을 짓는 겁니다.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당신은 이 지경에도 어떻게 웃음이 나와?”하고 물었지요. 돌아온 그녀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지금 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으니까.”


그녀는 내 앞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대신 작은 미소를 지어줬습니다. 그녀는 나를 힘들게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고통이 온몸을 덮쳐도 울기는커녕 앓는 소리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때로 누군가를 위해 일부러 침묵합니다. 장황한 말 대신 짧은 한마디나 미소만 건네기도 합니다. 이러한 인사는 미미해 보이지만 인간의 영혼을 흔들고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꽃을 지핍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늘에서 보낸 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요. 당신 주위에 이미 많은 하늘에서 온 사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도 언젠가 하늘에서 보낸 사자가 되어 소중한 사람을 지키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크리스마스이브가 서서히 저물어가는군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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