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
ǻ
첫눈
   
13000
2018�� 02��



■ 책 소개

 

나는 지금 평범하게 살고 있을까?
소설처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타인의 삶에 평가를 내릴 수 없다.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일에도 슬퍼하는 사람이 있고, 힘든 일을 겪어도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기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숨』은 늘 곁에 있었지만 주목받지 못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 저자는 우표를 사는 할아버지, 오피스텔 경비원, 폐지 줍는 할머니 등 평범해서 주목 받지 못했던 사람들을 이야기 속으로 데려왔다. 그들의 삶은 소설인지 현실인지 착각할 만큼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로 다가오기도 한다.

 

여러 번 덧칠한 수채화처럼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문장에서, 그들의 행복과 불행을 구분하지 않는 태도에서, 저자의 진정성이 엿보인다. 읽는 내내 현실인 듯 아닌 듯 착각하게 하는 점이 ‘소설 같은 에세이’라고 느끼게 할 것이다.

 

■ 저자 모자
세상을 마음으로 관찰하는 작가. 필명 모자의 의미는 작가의 말로 대신한다. ‘모자를 좋아합니다. 모자라서 그런가 봅니다.’ 지은 책으로는 『방구석 라디오』와 『숨』이 있다. 섬세한 관찰력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꾸밈없이 담백하게 쓴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평범하게만 느꼈던 일상이 특별하게 다가올 것이다.

 

■ 차례
아버지의 자격
초콜릿 장식
시간이 흐른 뒤
비눗방울과 꼬마아이
영사실에서
그가 왜 돌아오지 않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기념우표
클러치백 아저씨
겨울 바다, 아이스크림
예전에는 경비원이 아니었을
너에게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여자
그믐밤, 제페토는 없었다
그해 겨울
마을
두 개의 이름
연탄 가게 아저씨
소유하지 못하는 것들
결국 그녀는 네버랜드로 떠났다
일수
영원
창밖을 보며 우는 남자
전하지 못한 편지
은단과 담배
시를 읽어 주던 선생님
모래성
누군가의 우울이 사랑이 될 수 있을까
노트
기화
돈에 담긴 자부심
편지
일상
순수, 순정, 사랑
옥상에서 





아버지의 자격

도심 외곽에 위치한 마을버스 종점에서는 밤이면 별이 보였다. 원형 파이프 네 개를 인도에 심어 지탱하고 그 위로 아치형 천막을 덮은 작은 정류장이었다. 정류장 옆으로 문이 없는 공중전화 부스와 커피 자판기가 밭을 등지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종점에 멈추는 마을버스 노선은 두 개뿐이었고, 차고지는 멀리 떨어진 허름한 공터에 있었다. 비가 오면 낡은 천막 틈으로 빗방울이 모여 떨어졌다. 천막의 올이 몇 가닥쯤 풀려 바람에 흔들렸다.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들은 정류장 안에서도 우산을 펼쳤다. 보도블록 사이를 비집고 나온 잡초 때문인지 풀 냄새가 났다. 파이프는 빗물에 녹이 슬어 기댈 수 없었다. 정류장의 모든 것은 외로웠다. 어떤 것도, 어느 누구도, 기댈 곳이 없었다.


정류장을 마주보는 작은 가건물에 위치한 편의점은 자정이 넘으면 손님의 발길이 끊겼다. 막차를 탄 손님들은 편의점에 들러 술과 담배를 샀다. 마른안주를 사들고 집으로 향하는 이들은 말이 없었다. 그들은 새벽이 찾아오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빠르게 걸으면 새벽이 오지 않을 것처럼 도망치듯 걸었다. 손님이 모두 떠난 편의점에는 밤새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날벌레가 불빛이 환한 간판에 부딪쳐 몇 번이나 바닥으로 추락했다. 길고양이가 떨어진 벌레를 주워 먹지 못하게 소시지를 사 줘야 하는 날도 있었다. 배가 부른 고양이는 편의점 입구에 드러누워 한껏 게으름을 피우다 떠났다. 청소를 하고 물건을 정리하는 내내 산골 어느 마을에 홀로 남겨진 것 같았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시간을, 새벽이 오는 것을 기다리며 보냈다. 멀리 어둠을 뚫고 그가 편의점에 들어올 때까지.


그는 언제나 컵라면 값으로 천 원짜리 한 장을 맡기고 떠났다. 차갑고 쓸쓸한 새벽의 공기가 천 원짜리 지폐에도 묻어 있었다. 그가 차고지에서 마을버스를 끌고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에겐 취향이 없어서 아무거나 내밀어도 곧잘 먹었다. 라면이 설익거나 불어도 상관하지 않았다. 첫차로 배정된 날이면 운전석 창문으로 손을 내밀어 인사만 하고 떠나는 그에게, 컵라면을 어떻게 할지 물을 수 없었다. 가끔 기분이 내키면 종이컵에 믹스 커피를 타서 건넸고, 대가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핸드폰에 담긴 아기 사진을 보여 주었다. 아기의 눈동자가 그를 닮아 진하고 맑았다. 한쪽에만 있는 볼우물이 아내를 닮은 것 같았다. 성별을 알 수 없어 감상을 전하기 어려웠다. 그는 곤란해 하는 모습을 즐겼다. 끝내 가르쳐 주지 않는 아기의 성별을 캐묻지 않았다. 새벽 네 시에 살금살금 집을 빠져나오는 버스기사는 웃을 일이 별로 없을 것만 같았다.


밤늦게까지 운행을 하는 날이면 동네 어르신을 부축해 주고 얻은 과일을 나눠먹기도 했다. 봇짐을 들어다가 자리에 올려 드렸더니 그러면 자기는 어디 앉아서 가냐고 오히려 역정을 내더라. 지팡이 짚은 노인네가 버스에도 잘 못 오르길래 안아주다시피 해서 태워줬다. 고맙다면서 귤이 담긴 봉지를 통째로 내밀기에 세 개만 꺼내고 돌려줬다. 같은 과장 섞인 무용담을 한차례 풀어 놓고는, 아내가 기다린다며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뒷모습이 제법 그럴싸해 보였다. 눈을 쓸고 있으면 그것도 제대로 못 하냐며 빗자루를 빼앗아 시범을 보이고, 비가 오면 파라솔을 함께 정리해 주는 사람.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담배를 피우며 그는 종종 이직을 하고 싶다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아는 사람이 이번에 광역버스 회사로 이직을 했는데 월급도 두 배쯤 받고 휴게 시간을 무조건 이십 분씩은 보장해 주더라 대우를 받고 일할 자격이 충분했다. 는 부러움 섞인 말이었다. 전해들은 그의 월급은 터무니없이 적었다. 배차 시간이 짧고 인원이 부족해 화장실도 못 가고 운행을 해야 할 때도 있었다. 큰 회사는 경력이 있어야만 일을 할 수 있다며, 그는 시간이 빨리 가길 바랐다. 아기가 크기 전에 자신도 광역버스 운전기사가 되고 싶다고. 아기에게 해줄 수 있는 건 해주고 싶다고. 그는 해주지 못할 것들을 미리 걱정했다. 그러니 담배 하나만 달라는 농담도 잊지 않았다.


아쉽게도 편의점이 문을 닫는 바람에 그를 오래도록 볼 수 없었다. 마지막 날에도 그는 컵라면을 먹고 떠났다. 커피와 담배를 받아들고 미소 짓는 그의 눈동자가 진하고 맑았다. 사진 속 그의 아기는 걸음마를 하느라 의자를 잡고 서 있었다. 부디, 그가 늘 입에 달고 살던 광역버스 회사로 이직했길 바란다. 배차 시간이 길어 마음 편히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는, 월급이 두 배나 돼서 가족과 함께 살 집을 마련할 수 있는, 복지가 좋고 잘릴 걱정이 없는, 그런 회사로.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의 아기가 커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던 모든 날이 행복했다. 그리고 그는 좋은 대우를 받고 일할 자격이 충분했다.



시간이 흐른 뒤

큰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둘째를 씻기는 그녀는 삼십대 중반이었다. 씻기 싫다고 앙탈 부리는 작은아이를 억지로 끌고 와 옆에 앉혀 놓고, 미리 솥에 끓여 놓은 뜨거운 물을 찬물과 섞어 온도를 맞췄다. 빨간 대야에 담긴 물을 휘휘 저으며 찬물을 조금씩 더하는 동안, 뜨거우니 아직 들어가지 말라고 아이에게 몇 번이나 주의를 줬다. 일전엔 아이가 멋모르고 뜨거운 물에 발을 담가서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그때 그녀는 아이를 들쳐 메고 오백 미터는 떨어진 소아과를 향해 허둥지둥 뛰었다. 아이가 목청껏 울어서 속이 쓰렸다. 언젠가는 보일러가 있는 집에서 살고 싶었다. 그녀에게는 미지근한 물이 나오는 샤워기가 절실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그러듯 그녀는 풀빵과 동네 슈퍼에서 파는 작은 카스텔라를 좋아했다. 베이커리에서 만든 롤 케이크나 카스텔라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것을 처음 맛보게 된 십여 년 후의 일이다. 물론 그녀가 사는 작은 동네에도 양과자를 파는 제과점이 있었다. 특별한 날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제과점에서 파는 팥빙수를 먹으러 갔다. 아마 두어 번 정도였지만. 한여름에도 제과점은 은행처럼 선선했다. 우유와 팥만 올려 주는 시장 빙수와 달리 제과점의 팥빙수에는 알록달록한 젤리와 연유, 후르츠 칵테일이 듬뿍 올려져 있었다.


아이들이 간식을 먹고 싶다고 졸라대면 그녀는 할 수 없이 시장으로 향했다. 낡은 시장 건물 일 층의 떡볶이 집은 환갑이 한참 지난 할머니가 동네 장사를 하는 곳으로, 떡볶이뿐 아니라 각종 건어물과 팥빙수도 함께 팔았다. 그 집은 정방형의 공간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평범한 가게 중 하나였다. 가게의 상호가 희고 길쭉한 플라스틱 판에 대충 적혀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건물 안의 상호는 모두 그런 식으로 적혀 있었다. 누런 장판을 덮은 긴 테이블에 앉으면 할머니는 쑥색 접시에 떡볶이를 가득 담아 줬다. 깔끔한 성격의 그녀는 할머니가 설거지를 깨끗하게 하는지 걱정이었다.


떡볶이 집의 위생이 별로라는 이유로 그녀는 그곳을 내켜하지 않았다. 한번은 할머니네서 산 당면에서 바퀴벌레가 나온 일도 있었다. 그녀가 봉투를 열자 바퀴벌레 여러 마리가 쏟아지듯 나와 곳곳으로 도망갔다. 그녀는 기겁하여 할머니에게 찾아가 따졌지만 할머니는 그런 그녀를 나 몰라라 했다. 고작 그깟 일로 떼를 쓰냐며 태연하게 굴었다. 그녀에게는 엄청난 충격이 할머니에겐 그깟 일이었다. 그러나 아이들 때문에라도 그녀는 종종 떡볶이 집을 찾았다. 근방의 떡볶이 집이라고는 위생이 별로인 그 집이 유일했고, 동전 하나로 두 아이가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곳도 그 집이 유일했다. 다행히 할머니는 그녀의 어린 아이들을 많이 예뻐했다. 큰애가 둘째의 손을 잡고 떡볶이를 먹으러 가면 할머니는 접시가 넘칠 정도로 떡볶이를 담아 줬다. 그녀의 두 아이는 백 원이던 떡볶이 가격이 삼백 원, 오백 원이 될 때까지 할머니네서 떡볶이를 사 먹었다.


그녀는 지긋지긋한 서울을 하루 빨리 떠나고 싶었다. 마침 노태우 정부는 집값 안정화를 위해 신도시 개발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서울에 인근한 분당과 일산에 수십만 가구를 조성하여 집값 폭등을 막으려는 계획이었다. 그녀와 남편은 작은 아파트를 분양 받으려고 꾸준히 청약 저축을 넣었다. 매회 빠짐없이 분양 신청을 했지만 신도시에 아파트를 사려는 사람은 너무 많았다. 남편은 신문에 난 아파트 분양 기사를 꼼꼼히 스크랩했다. 노트의 두께가 서너 배가 되고 분양 공고가 십 회에 이르러서야 그들은 일산의 작은 아파트를 분양 받을 수 있었다. 열 병합 발전소가 있어서 연탄을 때지 않아도 따뜻한 물이 나오는 집이었다. 갚아야 할 융자가 수십 년 치 쌓여 있었지만 그녀의 남편은 비교적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집을 사랑했다. 더 이상 이사를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커다란 소파도 거실에 가져다 놓았다. 단칸방에서 자던 아이들에게 방이 생겼고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샤워기도 생겼다. 이제야 아이들에게 부모의 도리를 다한 것 같았다. 작은 아파트는, 그녀와 남편에게는 아이들이 클 때까지 살아도 될 만큼 커다란 집이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남편의 일 때문에 그녀의 가족은 집을 떠나야 했다. 외환위기를 겪으며 사는 것은 더 힘들어졌다. 삶은 그녀의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몇 번의 크고 작은 부침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때마다 그녀는 나이를 먹었고, 조금씩 희미해졌다. 그녀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줄어들고 누군가의 엄마로 기억되는 일이 잦아졌다. 아직 그녀의 삶을 다 산 것도 아니었는데, 그녀는 엄마가 되었다.


이십여 년이 지난 어느 날, 그녀는 묵은 짐을 정리하다 아이들의 유치원 시절이 담긴 비디오테이프와 플레이어를 발견했다. 오래된 비디오테이프에는 유성 매직으로 아이들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녀는 아이를 졸라 비디오를 틀었다. 낡은 플레이어가 요즘 시대의 와 연결된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자꾸만 웃음이 났다. 조악하게 편집된 비디오에는 아이들의 어린 시절이 담겨 있었지만, 아이들 말고도 젊은 시절의 그녀가 있었다. 포켓에 청색 무늬가 덧대진 주황색 체크남방과 청바지를 입은 그녀는 늘 같은 차림이었다. 그녀의 아이는 계절마다 유치원복을 갈아입고 선생님은 매번 유행하는 스타일의 옷을 입었지만 그녀의 옷은 변하지 않았다. 비디오 속의 그녀는 영원히 늙지 않겠지만, 그 시절 그녀는 비디오 밖에서도 시간의 흐름을 모르고 살았다. 아이가 봄 소풍을 가면 한 벌뿐인 주황색 체크남방을 잘 다려 입고, 여름이면 체크 남방의 소매를 걷어붙이고 하면서.


지나가버린 추억이라며 그녀는 웃었다. 웃음 뒤로 세월이 따라왔다. 세월 뒤로 가난이 따라왔다. 가난 뒤로, 다시 나이를 먹지 않는 세월이 따라왔다. 그녀는 비디오가 참 재밌다며 아이들과 웃었다.



영사실에서

영사실 창가에서 내려다보는 상영관은 어둡고 고요했다. 객석에 앉은 이들은 미세한 빛을 머금은 스크린에 집중했다. 그들은 등 뒤의 존재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객석의 모든 좌석은 스크린을 향했고 관객들의 시선 역시 스크린을 향했다. 백지처럼 희고, 커다란 스크린이었다. 영사기의 램프가 점화되고 빛을 뿜어내면 필름에 갇혀 있던 배우의 얼굴은 스크린에 가닿았다. 손가락 두 개로 가려지는 작은 필름과 연관 지을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예쁜 얼굴이었다. 영사기는 굉음을 내며 필름을 무섭도록 빨아들였고, 플래터에서 풀려나온 필름은 영사기를 거쳐 수줍게 다시 플래터로 돌아왔다. 끊어질듯 휘청이면서 영사기로 빨려 들어가는 필름을 지켜보거나 창에 비치는 영화를 보는 일이 썩 근사했다. 창에 맺힌 화면은 수면에 비친 풍경처럼 흐리고 번져 알아볼 수 없었다. 전구의 불빛에 의지해 영사실을 돌아보다 지치면 작은 창 너머로 관객들의 영화를 훔쳐보았다. 뒤를 돌아보는 이가 없어서 그들의 영화를 훔치는 것은 자유로웠다. 영사기사는 가장 뒤에서 영화를 보는 사람이었고, 가장 늦게 영화관을 나서는 사람이었다.


텅 빈 상영관에서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누군가의 삶에 몰래 초대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개입하거나 말을 걸 수는 없지만 엿보는 것만은 허락된 사관처럼. 혹은 누군가의 주마등을 대신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흑색의 상영관에서 빛나는 것은 오로지 스크린뿐이었고, 빛을 뿜어내는 만큼 배우들의 삶은 밝아 보였다. 그는 스크린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존재였으나 훔쳐볼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스크린에서 밝게 빛날 기회가 있었대도 상영관에서 훔쳐보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주목받지 않는 삶을 살려고 영사기사가 되었으니까. 그는 어둠의 밀도가 적당한 공간을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영사실은 건물 밖으로 난 창이 없는 까닭에 밀봉된 것 같았다. 점멸하는 수십여 개의 신호들과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기계의 소음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불을 끄면 점멸하는 신호들이 별 같았다. 노란색의 별과 붉은 색의 위험 신호. 별과 별과 별이 아닌 것을 구분하느라 줄곧 기기를 둘러보았다. 별이 붉게 타버리지 않길 바라는 게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청소를 게을리하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먼지들이 뭉쳐 굴러다녔다. 먼지 덩어리는 사막을 구르는 회전초를 연상시켰고, 보고 있노라면 사막에 홀로 떨어진 조난자 같았다. 사박사박. 모래를 밟는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그는 쓸쓸히 걸었다. 그곳은 너무 고독해서 생각이 많아지는 공간이었다. 거기서 그는 몇 번이고 등대지기를 떠올렸다. 바다의 모서리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그는 한 번도 등대지기를 본 일이 없었다. 바닷가에서 우연히 등대를 발견한 것은 몇 번 있었지만 그게 어느 바다였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등대에 낙서를 하거나 사진을 찍었다. 아마도 여행지에서 우연히 발견한 기념비나 풍경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등대지기를 마주치더라도 알아볼 수 없으니, 등대지기는 그들의 세상에서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평생 엇갈려서 살아가느라 존재를 인식할 수 없는 존재. 그게 등대지기와 영사기사의 공통점이 아닐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밤이면 등대지기는 무엇을 할까. 달. 별. 구름. 바다. 수평선. 바닷가에는 추억이 될 것들이 많지만 등대지기라면 창에 비친 자신을 보는 일도 있지 않을까. 검게 일렁이는 바다와 창에 비친 자신이 겹쳐 보이면 그것만큼 고독하고 아름다운 게 또 어디 있을까. 그는 창에 비친 자신과 어두운 상영관을 겹쳐 보다가 영사실의 문을 잠갔다. 바깥은 어두웠고 노랗고 반짝이는 별이 많았다.



겨울 바다, 아이스크림

낙엽을 털어낸 가지에 서리가 내려앉은 어느 날, 나는 그녀와 함께 겨울 바다를 보며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다. 어떤 아이스크림을 먹을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장소가 유리창에 습기 가득 찬 카페가 아니길 바랐다. 히터의 열기로 아이스크림이 금세 녹아내리는 자동차 안이 아니길 바랐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자는 이야기 대신 그녀를 데리고 강화도로 향했다. 겨울의 자동차는 유난히 덜덜거렸고 손이 차가운 그녀는 기어를 잡은 내 손 위에 살며시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그녀는 목적지를 모르고도 내게 웃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바닷가에는 우리처럼 겨울 바다를 보러 온 여행객 몇몇이 전부였다. 그들이 남긴 발자국이 만을 따라 이어졌다. 겨울 바다가 쓸쓸한 이유는 다만 찾는 사람이 적어서일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전혀 쓸쓸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잠깐 바다를 보는 중에도 그녀의 머리카락은 바닷바람을 따라가려는 듯 찰랑였다. 코끝은 빨개졌고 손은 피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차가웠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따뜻한 캔 커피가 아닌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먼저 다 먹은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자는 말을 하면서.


스산한 느낌마저 드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오랫동안 냉동실에 갇혀 있던 아이스크림보다도 바람이 차가워서, 아이스크림은 시간이 지나면서 표면이 하얗게 얼어갔다. 찬 음식을 못 먹는 그녀는 절반을 남겼고 나는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도 끝까지 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놓지 않았다. 유난하게 추웠던 겨울 바다에는 바보 같은 짓을 하는 우리를 보며 신기하게 여길 사람조차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도 그날의 내가 그녀에게 무슨 소원을 말했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진짜 소원은 함께 겨울 바다를 보며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이었고, 내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소원은 이루어졌다.


*


기껏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밤, 나는 그녀와 함께 갔던 바다를 다시 찾았다. 거리는 텅 비어 흔한 택시조차 보이지 않았다. 빗방울은 차창에 부딪혀 분산됐다. 달을 닮은 가로등 불빛이 빗방울에 닿아 갈피없이 번졌다. 비에 가려 표지판이 흐릿했다. 정체된 도로를 지나듯 천천히 강화도로 향했다. 나의 밤은 길었고, 내게는 찾아야 할 것이 있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팔월의 해변은 시끄러웠다. 세 시의 바다는 지옥의 입구처럼 캄캄했다. 번개가 섬광탄처럼 짧은 빛을 뿜을 때마다 바다는 개펄과의 경계를 잠시 잠깐 보여 주었다. 천둥이 치는 바다는 기괴했고, 기괴한 만큼 매력적이었다. 만약 그곳에 작은 쪽배라도 있었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단테를 따라 지옥으로 향했을 것이다. 사람을 홀리는 바다. 그게 폭우가 치는 바다를 향한 유일한 감상이었다. 수평선을 때리는 빗줄기가 우산에도 들이쳤다. 나는 수평선 아래 깊은 바다 속에 잠긴 것처럼 무거워지는 우산을 들고 해변을 걸었다.


어쩌면 바닷가에 그녀가 남긴 아이스크림이 아직도 남아 있지 않을까. 차가운 바닷바람 때문에 녹지 않은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스크림을 찾으면 다시 소원을 빌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망연히 고개를 숙여 몇 시간이고 아이스크림을 찾았다. 그러나 걷고 또 걸어도 끝내 표면이 하얗게 언 반쪽짜리 아이스크림은 찾을 수 없었다. 바다에는 오래전 잃어버린 누군가의 추억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빈 바다가 쓸쓸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믐밤, 제페토는 없었다

하필이면 달도 없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가로등 없는 주택가 골목길에는 차들만 남아 잠들어 있었다. 그날은 유난하게도 밤의 기운이 거리를 짓눌러댔고, 길고양이의 발소리마저 먹어치운 적막이 거리를 지배했다. 나는 잘 아는 길을 잃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혹시라도 밤거리를 깨울까 걱정되어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고 괜스레 핸들을 잡은 손에만 힘이 들어갔다. 차는 골목길을 느릿하게 유영했다. 낮게 깔리는 전조등 불빛이 아스팔트의 진득한 질감을 반복해서 그렸다. 길은 마치 상어의 뱃속으로 이어지는 통로 같았지만 끝에 다다를 때까지 제페토 할아버지를 만날 수 없었다. 그 대신 나는 골목길 모퉁이에서 폐기물 수거함을 헤집는 노인을 만났다.


그녀의 그림자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듯 전조등의 불빛을 빨아들였다. 그러나 주변의 어둠을 먹고 진하게 착색된 그림자는 전혀 빛나지 않았다. 낡은 누빔 옷과 회백색으로 얼룩진 운동화, 희끗한 머리카락은 더 이상 반짝일 수 없을 정도로 바랜 듯 보였다. 곁에는 동네 주민들이 버리고 간 폐품과 종이상자와 쓰레기봉투와 옷가지 같은 것이 수북했다. 나는 그것들 중 하나가 그녀의 소유일 거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폐품을 뒤적이던 손을 들어 천천히 전조등 불빛을 가렸다. 그리고 고요히, 아주 고요히, 일어섰다. 몸의 골격을 하나씩 추켜세우는 동작이 너무 섬세하여 마치 늙음을 연기하는 짙은 회색의 발레리나 같았다. 음악이 흐르지 않는 캄캄한 무대에서 자동차 조명을 스포트라이트 삼아 춤추는. 나는 감히 그녀의 무대를 지나칠 용기가 없었다.


짧은 공연은 고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검은색 모노드라마. 단막극의 주인공은 회색의 발레리나. 라르고 혹은 렌토로. 아주 느리게, 아니면 무겁게. 관객이 없는 무대에서 그녀는 거리낌 없이 춤을 추었다. 그녀가 폐지를 골라내 뭉툭한 손으로 고이 접는 동안 무대를 침범하는 이는 없었다. 나는 전조등 불빛에 그녀를 가두고 무대를 훔쳐보았다. 이윽고 공연의 막이 내리자 그녀는 종이상자가 켜켜이 쌓인 유모차를 밀어 천천히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무대의 결말은 아낌없이 완벽했다. 새 생명이 앉을 자리는 나무의 주검으로 채워져 있었다. 어둠의 끝에는 제페토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


유모차에 담긴 어떤 이의 삶은, 그믐에 기대어 종이를 그러모으는 것으로 결말을 맞이해야만 하는가. 그녀는 흩어지는 삶을 대신할 용도로 폐지를 주웠는가. 진정 담고자 했던 세상은 어디로 갔는가. 폐품이 대신 차지해버린 삶의 자리를 언제고 감당해야만 하는 건가. 그녀의 유모차는, 그녀에게 휴식인가 족쇄인가. 생의 끝자락에 다다른 자의 단막은 심오하였고 나는 어느 것도 추측할 수 없었다.


*


달이 뜨지 않은 밤이면 유모차를 밀던 왜소한 뒷모습이 다시 떠오른다. 나는 잠시간 그녀를 그리다가, 괴로워하다가, 그믐을 핑계 삼아 제멋대로 그녀의 에필로그를 잇는다.


날도 어두운데 밤늦게 어딜 다녀오셨어요.


아이고, 동네 시끄럽다. 날이 하도 갑갑해서 잠깐 마실 다녀온 걸 가지고 유난 떨고 그러냐. 어여 들어가자.


어머니, 힘드신데 자꾸 이런 거 주우러 다니지 마세요. 저 정말 속상해요.


신경 쓰지 마라. 원래 사람이 일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더 아픈 법이다. 그깟 것 좀 한다고 몸이 닳는 것도 아니고. 느이 시아버지는?


아버님은 벌써 주무세요. 오자마자 어머님 어디 가셨냐고 여쭤 보셨어요.


기껏 동네방네 찾으러 다녔더니만. 하이고 팔자도 좋네.


달이 뜨지 않은 밤. 그녀는 손주 과자 값이나 벌 겸, 날이 갑갑해서 바람이나 쐴 겸, 집에서 벌써 자고 있는 남편을 찾을 겸, 유모차를 끌고 나왔을 것이다. 며느리는 그녀를 걱정하고 손주는 과자를 사주는 할머니를 좋아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마음대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대가로 어제보다 한 뼘 즈음, 어쩌면 두 뼘 즈음 코가 길어졌을 것이다. 그날 그 밤, 역시 제페토는 없었으니까.



마을

그 마을은 낮은 산이 울타리가 되어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는 하나였다. 시멘트를 부어 만든 신작로를 따라 조금만 걸어도 어느새 풍경이 초록으로 변했다. 경계를 알리는 장승이나 비석조차 없어서, 이쯤 왔으면 도착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면 거기가 마을의 시작이었다. 마을은 측량하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 경계를 가늠하는 지점이 제각각이라 오십 미터에서 백 미터쯤 커졌다 작아졌다. 신작로 주변으로 간판이 부식되어 잘 보이지 않는 슈퍼가 있었다.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는 채 한 발자국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내부가 좁았다. 문소리를 듣고 나오는 주인 할머니의 나이는 도통 추측할 수 없었다. 떠듬떠듬 말하는 통에 대화를 하기 어려웠다. 방언인지 불경인지 모를 것을 읊는 할머니의 치아 몇 개가 어느 해 태풍에 쓸려갔다고 들었다. 갈무리되지 않은 바람이 할머니의 입속에 머물다가 쉬익, 쉬익, 소리를 내면서 빠져나왔다. 파는 물건보다 안 파는 물건이 더 많은 곳이라 슈퍼보다는 점방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내게는 그 점방이 마을과 마을이 아닌 곳을 가르는 경계선 같았다. 불분명하고 불확실한 마을이었다.


점방을 지나면 여름에도 물이 잘 흐르지 않는 개울이 나왔다. 퇴적된 모래에 이름을 알 수 없는 풀이 종류별로 자랐다. 낮에는 누군가 곁에 흑염소를 두어 마리 매어 놓았다. 염소는 풀과 물과 목줄을 씹으며 주인을 기다렸다. 하관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뛰는 게 엉성한 짐승이었다. 그것들은 간혹 메에에, 하고 길게 울었다. 지나쳐 갈 때까지 울음이 끝나지 않아서 나까지 덩달아 메에에, 하고 울기도 했다. 돌아보는 염소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동자 깊숙이 까만 흑요석이 박혀 있었다. 눈을 마주치면 빗질이 안 된 염소의 등을 쓰다듬고 싶었다. 손가락에 검은 털이 엉키면 그게 나의 눈썹인지 염소의 수염인지 묻고 싶었다. 개울 양 옆으로는 익지 않은 벼가 셀 수 없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만 아직 뻣뻣한 모가지가 간신히 기울었고 논 위로 낮게 날던 잠자리들이 휘청거렸다. 열댓 마리인가를 세다가 그만두고 고개를 들자 잠자리가 별보다 더 많았다. 검지를 높이 들면 나뭇가지로 착각한 녀석이 손가락 끝에 앉았다. 살며시 날개를 잡아도 아무런 느낌이 나지 않았다. 잠자리가 떠난 손가락 끝에 코가 찡할 정도로 매운 냄새가 남았다. 날려 보낸 것이 빨갛고 예쁜 고추잠자리였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논이 끝나는 곳엔 작은 밭과 오이 농사를 하는 하우스가 열을 지어 늘어섰다. 길가에는 용처를 알 수 없는 크고 작은 농기계와 부속이 방치되어 있었다. 벗겨진 도장의 틈으로 녹이 피었고 여기저기 깎이고 눌린 자국이 보였다. 주변으로 풀이 자라고 흙이 덮여 궁색해 보였으나, 그것들은 길가에 버려졌다기보다는 길가에 보관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원래 그 땅에 살던 작은 생물들은 농기계를 미워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저 타고 넘거나 잠시 쉬어갈 뿐이었다.


점방과 개울과 논밭을 모두 지나고서야 돌멩이로 담을 쌓은 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주먹보다 크고 머리보다 작은 크기의 돌을 짜 맞춰 놓은 모양이 제법 견고했다. 담을 붙들고 늘어지는 호박넝쿨이 을씨년스러웠다. 파란색 철문에는 파란색 사자가 문고리를 물고 있었다. 흔들면 으르렁거리는 대신 끼이익 소리를 냈다. 철문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났다. 끼이익, 낡은 소리를 토해내는 대문을 지나면 한때는 커다랗던 작은 마당이 나왔다. 마당 한편에는 감나무가, 감나무 옆으로 작은 들꽃이, 꽃나무 곁에서 풀이, 한참 익어가고 있었다. 장독대는 아담해서 독을 몇 개 놓을 수 없었지만 된장과 고추장의 진한 냄새가 마당까지 퍼졌다. 장독 뚜껑을 눌러 놓은 돌이 제멋대로 생겨서, 동네 강아지들이 가끔 짖었다. 다른 한쪽에는 큼지막한 돌절구와 공이가 놓여 있었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면 절구는 연못이 되어 고요해졌다. 절구 안에 들어가 공이에 잔뜩 얻어맞으면 뽀얗게 탈색될 것 같다는 생각을 마루에 앉아 몇 번인가 반복했다. 종일 처마 끝에 고인 빗물이 공이질하듯 쿵덕쿵덕 소리를 내며 쏟아졌다. 마루에 앉아 기둥이나 서까래를 보고 있노라면 날벌레와 풀벌레가 끊임없이 찾아왔다. 나나니벌은 집 안 어딘가로 계속 파고들었고 호박벌과 풍뎅이가 벽과 몸싸움을 하면서 순찰을 돌았다. 방아깨비나 메뚜기나 여치 같은 것들은 구분 없이 마당을 휘젓고 다니다가 인사 없이 떠났다. 가끔은 끄덕거리며 전진하는 사마귀와 마주쳤고, 앞다리를 들고 위협하는 자세가 가여워 멀찍이 비켜주었다. 마루에선 시간이 느리게도, 빠르게도 흘렀다.


노을이 질 무렵 굴뚝으로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한겨울에는 길고양이가 아궁이 깊은 곳에서 불을 쬐다가 털이 까맣게 그을리고 나서야 후다닥 뛰쳐나온다, 라는 이야기를 듣느라 까만 가마솥이 더 까맣게 그을었다. 가마솥으로 지은 밥은 어쩐지 윤기가 돌았다. 마루에 앉아 서대조림과 김치와 반찬 두어 가지와 밥을 입에 넣으며 별을 보았다. 가로등이 금세 꺼지는 마을에서는 풀벌레가 밤새도록 별을 보며 울었다. 재래식 화장실에 들어가기 두려워 풀밭에 오줌을 누고 캄캄한 방으로 들어가면, 누군가의 발을 밟아도 그게 발인지 꼬리인지 울음주머니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창호지 너머의 달빛은 너무 아련했다.


*


당신은 이곳에서 만 일 가까이를 살았다. 당신의 어머니는 삼만일 가까이를 살았다.


모녀는 제철에 맞는 나물을 캐려고 소쿠리를 머리에 이었을 것이다. 화로에서 익은 감자를 꺼내다가 귓불을 잡았을 것이다. 기운차게 당신을 쫓아다녔던 수탉에게 모이 주는 일은 당신의 몫이었을 것이다. 밭을 매거나 오이를 따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제는 막아 놓은 우물터에서 빨래를 하던 어머니는, 칠남매의 키가 자랄수록 왜소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섧게 우는 날이 있었을 것이다. 오빠들에게 골라주고 남은 감의 떫은맛이 기억나는 날도 있었을 것이다.


당신이 머물던 자리에는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다. 방치되었다가 쓰러지다가 허물어지다가 희미해진다. 한줌의 기억에 의지해 나는 당신의 집을 그려 보았다. 어쩌면 파란색 철문의 문고리를 물고 있는 짐승은 사자가 아니라 호랑이 혹은 독수리나 기린일지도 모른다. 아궁이에 올라가 있던 것은 가마솥이 아니라 커다란 돌절구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쓰다듬어 주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당신의 등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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