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버스 세계를 가다

   
임택
ǻ
메디치미디어
   
15000
2017�� 09��



■ 책 소개

 

쉰 전까지 오로지 가족을 위해 ‘일벌레’로 살아온 저자 임택은 쉰이 넘으면 새로운 삶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오래전부터 가족들을 설득해왔다. 그가 꿈꿔온 제2의 인생은 바로 여행작가로 살아보는 것이다. 마침내 은퇴를 앞두고 임택은 폐차를 6개월 앞둔 중고 마을버스(은수교통에서 만난 인연으로 이 마을버스에 ‘은수’란 이름을 붙여줬다)를 하나 구입한다. 마을버스를 개조해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해가며 세계일주를 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으나, 여행 전부터 헤쳐 나가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48개 나라를 여행하는 677일 내내 이들의 버라이어티한 여행기는 한순간도 평탄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다. 하지만 용기 있는 도전이 즐거운 인생을 만드는 법! 수시로 마주하는 시련과 고비를 하나씩 넘을 때마다 이들은 어느새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내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저자 임택
내 고향은 김포평야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외로운 마을로, ‘섬말’이라고도 불렸다. 어릴 적 뒷산에 오르면 들 건너 저편으로 공항이 내다보였는데, 활주로를 차고 오른 비행기가 서녘 별무리 속으로 사라지면 사람들은 먼 나라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어디론가 떠나는 비행기와 고립된 마을이 나에게 여행이라는 DNA를 심어놓았는지, 나는 늘 미지의 나라로 떠나고 싶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내가 쉰 살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이제 나에게도 인생 2모작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마을버스 세계일주 덕분에 시들어가던 내 영혼에 불이 붙었다. 여행에서 얻은 에너지와 좋은 기운을 소외되고 좌절한 이들과 나누는 것이 나의 새로운 꿈이다. 시속 60킬로미터로 정해진 길을 따라 평생을 달려야만 했던 마을버스가 자신의 한계를 뚫고 도전했던 것처럼.

 

■ 차례
프롤로그: 일단 저지르면 길이 보인다

 

PART 1 여행준비
마을버스 찾아 삼만 리
응원의 손길들

 

PART 2 남아메리카-북아메리카
마을버스, 해발 4,600미터 안데스산맥을 넘다
미소는 무한 한도를 가진 크레디트카드
잔칫집인 줄 알고 들어간 곳이 초상집
모래폭풍을 품은 우유니 사막
볼리비아에 울려 퍼진 아리랑~
“내 소원이 은수 과속딱지 한번 떼보는 거야”
강도와 협상을 하다
콩 한 줌
길 위에서 만난 천사들
때론 누군가에게 기대도 좋아
가깝고도 먼 당신, ‘경찰’
멕시코의 딸, 파비를 만나다
당신을 현행범으로 체포합니다
이제부터 날 파파라고 부르렴
이별
기적은 천사와 함께 찾아온다
“당신의 차는 뉴욕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세계의 심장, 타임스퀘어에 서다

 

PART 3 유럽-아프리카-중동-아시아
내가 바로 자동차 정비사입니다
“똥차야, 잘 가그래이”
아우토반에서의 기적과 같은 만남
“지금부터 당신은 이 버스를 운전할 수 없습니다”
한류가 맺어준 인연
사하라의 낙타와 알팔파의 공생
고난은 행복을 싣고 오는 수레다
아들의 마음, 아버지의 마음
여행이 낳은 아들과 딸
다비드와 사무엘레
당신들, 마약 가지고 있죠
한 번쯤 길을 잃어도 좋다
무식이 확신에 차면 배짱이 두둑해진다
섭섭함이 저 나무에 달린 살구 열매만큼이나 하오
한국인이라서 무료라고요
아! 북녘이 저기란 말인가
한국은 섬나라인가

 

에필로그: 실수는 있어도 실패는 없다 




마을버스 세계를 가다


여행준비

마을버스 찾아 삼만 리

마을버스 세계여행의 멤버가 확정되었지만, 정작 중고 마을버스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인터넷을 통해 손쉽게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큰 오산이었다. 게다가 폐차를 앞둔 마을버스를 찾는 일도 쉬운 게 아니었다. 중고차 수출업자들이 회사에 미리 돈을 주고 운행이 끝나기 무섭게 가져가니 중고 시장에 나올 턱이 없었다.


결국 마을버스 회사를 일일이 찾아다녀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은평구에 있는 한 마을버스 운수회사를 찾아갔다가 봉변을 당한 것이다. 넓은 주차장에는 운행 순서를 기다리는 마을버스들이 가지런히 서 있었다. 기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대기하고 있던 한 마을버스의 운전석에 올라탔다. 이리저리 핸들을 돌려보기도 하고 클러치를 밟으며 스틱을 아래위로 움직여보였다. 이때 멀리서 나를 바라보던 회사 직원이 달려 나와 내 팔을 잡고 거칠게 끌어내렸다.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나는 실수로 차에 올라탄 것을 거듭 사과하며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그때 나를 차에서 끌어내린 남자 직원이 이 회사 저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그가 여기저기 수소문해봤지만 정작 내가 필요로 하는 15인승은 찾을 수가 없다고 했다. 고맙게도 그는 자기가 아는 회사가 있으니 더 알아봐주겠다고 했다. 며칠 후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옥수교통에 곧 폐차될 차가 있다니 한번 가보세요."


인연이 없어서일까? 그 뒤로 몇 번을 찾아갔으나 옥수교통의 사장을 만날 수가 없었다. 사장에게 전화를 걸면 가격이 오르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렇게 많은 마을버스들 중에 내게로 올 중고 마을버스가 정말 한 대도 없는 걸까? 자초지종을 들은 아내가 말했다.


"그럼 나한테 말을 하지. 내가 잘 아는 언니 남편이 마을버스회사 하잖아. 은수교통이라고 서울대병원 오가는 셔틀버스야. 종로 12번 은수교통."


결국 차일피일 미루다가 구두계약만 한 옥수교통 대신 은수교통에서 마을버스를 구입했다. 9년 6개월을 밤낮으로 운행하다가 6개월 뒤면 규정상 폐차해야 하는 고물차였다. 어떻게 보면 버스도 조기 은퇴를 해야 하는 처지여서 인생 재도전이라는 이 여행의 의미와도 잘 맞아떨어졌다. 나는 은수교통에서 데려온 이 마을버스에게 은수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은수야, 우리 함께 세상을 달려보자!



남아메리카-북아메리카

마을버스, 해발 4,600미터 안데스산맥을 넘다

은수는 이 마을 저 마을 골목골목을 돌며 종로 12번 마을버스로 성실히 살아오다가 폐차 직전에 나와 만났다. 평생을 시속 60킬로미터 이상 달리지 못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던 탓에 은수의 삶은 도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지금, 그 도전을 향한 힘찬 여행길에 올라섰다.


첫 여행지는 남미 페루다. 우리는 마추픽추를 가기 위해 해발 4,600미터나 되는 안데스 산맥을 넘고 있다. 한 번도 해발 200미터 이상에서 달려본 적이 없는 은수는 며칠째 안데스의 가파른 산길을 오르느라 힘겨운 사투를 벌이는 중이다. 일행들도 모두 기진맥진한 상태다. 고도가 점차 높아질수록 고산병이 심해졌다. 다행히 다른 사람들에게 다 있는 고산증이 내게는 없었다. 운전대를 잡아야 하는 나로서는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산소가 희박해져서 엔진은 더 많은 공기를 들이마셔야 한다. 이런 환경 상태를 자동으로 조절해주는 장치가 있는데, 깜빡하고 조절장치를 바꾸어놓는 걸 잊어버렸다. 그 탓에 은수는 힘을 내지 못했다. 우리 차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겨우 시속 20킬로미터의 속도라서 하루를 꼬박 운전했음에도 가야 할 길이 크게 줄지 않았다.


3일에 걸쳐 오르막을 달리고 나서야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내리막길에서는 속도를 줄이느라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깎아지른 절벽을 따라 만들어놓은 길은 공포 그 자체였다. 왼쪽 절벽은 낙석의 위험이, 오른쪽 낭떠러지는 추락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내려오는 내내 브레이크를 밟았더니 다리에 쥐가 날 정도였다. 어떤 길은 낭떠러지와 바퀴와의 거리가 불과 30센티미터도 되지 않았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지만 되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올라온 길이 가파르고 긴 만큼 내려가는 길도 길었다. 열심히 계곡을 내려가는데, 이상한 것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길가에 빼곡하게 들어선 십자가들이었다. 처음엔 페루의 국교가 가톨릭이다 보니 이 사람들, 신앙심이 아주 깊구나. 이렇게 경치 좋은 곳에 십자가까지 세워놓다니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안데스산맥을 넘는 길이 가파르고 험해서 죽음의 도로라고 이름 붙은 산길이 많았다. 그리고 길가 절벽 끝에 세워놓은 십자가는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은 사람들의 추모비였다.


콩 한 줌 </P>에콰도르 키토에 도착한 날부터 쉬지 않고 비가 내렸다. 은수를 정비소에 맡긴 지도 3일이 지났다. 클러치를 새것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정비사의 말에 우리 일행은 어느 여행자 숙소에 발이 묶였다. J의 휴대폰을 도둑맞은 이후로 숙소에서 잠만 잤다. 3일째 되는 날 오후에서야 지친 몸을 털고 시내 산책에 나섰다. 비 때문에 허술한 옷차림에 냉기가 끼어들었다.


키토의 꼼빠니아 대성당. 빗물에 길이 매우 미끄러웠다. 슬리퍼의 끈은 이미 끊어진 지 오래고, 밑창도 다 닳아서 발을 헛디딜 때마다 몸이 기우뚱거리곤 했다. 균형을 잃고 팔을 허우적거리며 걷는 내 곁으로 한 사내아이가 따라 붙었다. 하루 종일 누군가를 기다리며 구걸하다가 먹이를 발견한 독수리처럼 내게 다가온 것이다. 지갑을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것이 이토록 자신감을 줄 줄이야. 나는 애써 모른 척하며 가던 길을 재촉했다. 하지만 아이의 손에 소매가 잡히고 말았다. 손을 살짝 뿌리쳤는데도 소년은 또다시 내 소매를 잡아끌며 애원했다.


결국 아이의 얼굴과 마주했다. 나는 호주머니를 까 보이며 다른 사람한테 가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소년의 애처로운 눈빛과 마주치자 말문이 탁 막혀버리고 말았다. 아홉 살 아니면 열 살쯤 되었을 앳된 얼굴, 화상을 입었는지 오른쪽 뺨에 아무렇게나 아문 상처가 반대편 뺨과 대비되어 선명하게 보였다. 얼마나 예쁜 얼굴이었을까. 까만 눈동자와 잘 익은 가지처럼 빛나고 아름다운 피부. 나를 쳐다보는 간절한 두 눈과 오래된 듯한 딸꾹질 소리.


매정해지자며 다짐했던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뭔가 주고 싶은데 가지고 나온 것이 없었다. 내가 줄 수 있는 거라곤 먹다 남은 튀긴 콩 한 줌뿐이었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이 많아 뜯기지 않으려고 일부러 지갑을 두고 나왔는데, 이것이 이토록 후회될 수가 없었다. 먹다 남은 콩 한 줌이라도 전해주고 싶었지만 손이 부끄러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차라리 이 아이가 구걸을 포기하고 멀리 가버렸으면 좋으련만.


어느덧 우리는 작은 광장에 다다랐다. 나는 터져서 나뒹구는 호주머니 속의 콩 봉지를 꺼내 소년이 잘 볼 수 있도록 동상 받침대에 살그머니 올려놓았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숙소로 가는 골목길을 향해 걸었다. 따라오던 딸꾹질이 등 뒤에서 멈춰 섰다. 딸꾹질 소리가 간간이 들리다 멀어져갔다. 얼마쯤 걸어가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는 젖은 동상에 걸터앉아 내가 놓아둔 볶은 콩을 먹고 있었다. 고스란히 비를 맞으며...


"당신의 차는 뉴욕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뉴욕 경찰의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다리 하나만 건너면 뉴욕인데, 바로 코앞에서 가로막힌 것이다. 남미와 중미를 거쳐 이곳까지 왔건만 뉴욕에 들어갈 수 없다니. 우리의 여행은 남미와 중미를 거쳐 이곳 뉴욕 맨해튼 타임스퀘어에서 시즌1을 마무리하고 뉴욕항에서 시즌2 유럽 여행을 위해 은수를 독일행 배에 태울 예정이었다.


"9.11 테러 이후로 외국 번호판을 단 차량은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한 뉴욕 출입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경찰과 직원의 태도는 분명했다. 중남미에서의 임기응변이 통할 리 없었다. 이때 J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형님, 신문! <버지니안 파일럿> 신문 기사요!"


버지니아 주에서 제일 크다는 <버지니안 파일럿>이라는 매체에서 오늘 아침 우리의 여행 이야기를 대문짝만하게 실어주었다. 신문을 받아 든 경찰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그러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여기 외국 번호판을 단 차가 스톤브리지를 건너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차가 아주 유명한 차입니다. 오늘 <버지니안 파일럿>에도 이 사람들이 전면에 나왔어요. 그 신문을 제가 손에 들고 있습니다. 오늘 <뉴욕타임스>하고도 인터뷰를 해야 한답니다"라고 말하며 윙크를 보냈다.


두 달 전 멕시코를 여행하던 중 <버지니안 파일럿>으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의 미국 여행 계획에 버지니아는 애초부터 없었다. 미국 동부에 있는 버지니아, 그것도 노퍽이라는 도시는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근데 이것도 운명인 건지, 차가 고장이 나면서 일정에 차질이 생겨버렸다. 서부로 가려던 계획은 중부로 바뀌었다가 곧 뉴욕으로 바뀌었다. 거짓말같이 노퍽을 지나게 된 것이다. 인터뷰는 일요일에 진행됐고, 기사는 수요일에 실린다고 했다. 다음 날 이른 새벽 우리는 뉴욕을 향해 떠났다. 아침 6시가 조금 지난 시간, 오늘 아침 신문 기사가 났다는 메시지가 왔다.


만일 이 신문이 예정대로 3일 뒤에 나왔다면 어찌되었을까? 우리의 뉴욕 입성에 큰 차질이 생겼을 것이다. 어떤 이유로 기사가 예정보다 빨리 나왔는지 지금도 알 길이 없다. 우리가 운이 억세게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누군가가 우리를 눈동자같이 지켜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유럽-아프리카-중동-아시아

내가 바로 자동차 정비사입니다

뉴욕항을 떠난 은수가 한 달여 만에 독일의 브레머하펜 항구에 도착했다. 차를 항구로 들여오는 일은 국경을 통과하는 일보다 까다로웠다. 하루면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은수는 이틀이 지난 뒤, 그것도 1,400유로의 보증금을 내고서야 풀려났다. 이런 정신없는 상황 가운데 파비안이라는 독일인에게서 계속 메시지가 왔다.


저는 파비안이라고 합니다. 브레멘에 꼭 들러주세요.


어느덧 우리 여행은 외국인에게도 상당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SNS는 우리의 정보 영토를 정신없이 넓혀놓았다. 파비안 말고도 이미 많은 사람들로부터 자기 나라에 오면 꼭 방문해달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나는 일정상 브레멘에 들르기가 어렵겠다고 여러 차례에 걸쳐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일정에 따라 오늘 중으로 암스테르담에 도착하려면 적어도 오전 중에는 출발해야 했다. 하지만 은수를 찾기 위해 보험을 들고 경찰서에 가서 공증을 받느라 출발 시간을 놓쳐버렸다. 이왕 이렇게 된 것 파비안이라는 사람을 만나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2시쯤 우리는 파비안이 알려준 브레멘의 어느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약속한 3시가 되자 하얀색 승용차 한 대가 버스 앞에 멈춰 섰다. 파비안과 마주하자 곧 코스타리카가 떠오르면서 누구 할 것 없이 환호했다.


"파비안!"

"택씨!"


지난 여름의 일이다. 파나마에서 코스타리카로 넘어가는 국경에서 파비안을 만났다. 당시 나는 동행자가 한 명 있었고, 그는 여자 친구와 여행 중이었다. 범죄가 많기로 악명 높은 파소카노아스 국경마을은 살벌함 그 자체였고, 몸을 숨길만한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멀리에서 한 쌍의 배낭여행자가 갈 길을 잃고 서성이고 있었다. 국경에서 출발하는 버스도 끊긴 상태여서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희 버스를 타고 함께 가실래요?"


그렇게 우리는 3일간 함께 여행을 했다. 아주 짧은 만남이었고, 서로 통성명을 나누긴 했지만 그의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했을 뿐이다. 우리와 헤어진 뒤로도 파비안은 SNS를 통해 우리의 여행을 주시하다가 독일에 도착한 것을 보고 연락을 해온 것이다. 파비안은 자신의 집에서 배터리 충전과 샤워를 권했다. 파비안의 배려는 우리에게 퍽 고마운 일이었다.


파비안의 차를 뒤쫓아 가고 있는데, 갑자기 은수한테 이상한 현상들이 일어났다. 실내등이 꺼지더니 이윽고 오디오 램프가 꺼져버렸다. 배터리가 빠르게 방전되고 있었다. 차가 정차했다가 다시 출발할 때마다 엔진이 힘들게 작동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택씨, 제가 고쳐드릴게요. 제 직업이 자동차회사의 정비사입니다."


파비안은 자신의 장비로 은수를 점검했다. 전기발전기가 오래되어 고장이 났으니 이 부속을 교체하면 차에는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자동차 부속이 올 때까지 꼼짝없이 브레멘에 머물러야 했다. 그래도 파비안이 곁에 있어 한결 마음이 놓였다. 내가 만약 브레멘에 오지 않고 곧바로 암스테르담으로 갔다면 어땠을까? 예기치 못한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주위를 둘러보면 도와줄 사람들이 꼭 나타났다.


아들의 마음, 아버지의 마음

17일 동안 마을버스를 타고 함께 여행한 아들 채욱이가 오늘 새벽에 네덜란드로 떠난다.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만나 바르셀로나와 프로방스 지방을 둘러보고, 모나코를 여행했다. 그리고 로마와 베로나를 거쳐 이곳 베니스까지 줄곧 함께했다.


바깥 날씨가 꽤 춥다며 한사코 나오지 말라는 아들을 굳이 따라나섰다. 버스정류장까지 족히 20분은 걸어야 하지만, 왠지 함께 걷고 싶었다. 운동도 할 겸 배웅해주겠다고 주섬주섬 옷을 입는 나를 지켜보는 아들도 내심 싫은 기색이 아닌 듯했다. 아들은 모퉁이를 돌 때마다 나를 돌려 세우고는 아버지에게 돌아갈 길을 상기시켜주었다. 훌쩍 커버린 아들이 다 큰 아버지를 걱정하고 있다. 아버지는 아들이 공항을 잘 찾아갈지 걱정이었고, 아들은 추운 겨울이 움켜쥐고 있는 동유럽의 거친 날씨가 걱정이었다.


"아버지, 이번 여행은 정말 최고였어요. 상상도 못한 여행이었고, 이 여행에서 느낀 감명은 평생 못 잊을 거예요."


말수가 적은 아들의 갑작스런 고백에 갑자기 심장이 멎는 듯했다. 17일 전 스페인 발렌시아역 광장에서 은수를 발견한 아들이 반갑게 뛰어오던 모습이 생각났다. 어찌나 반갑고 흥분되던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아들 욱이도 그랬을 것이다. 얼마 만에 맞이하는 부자 상봉이던가. 발렌시아 대로를 향해 달려오는 녹색의 마을버스 은수. 그 버스를 타고 동화 속 아이처럼 아버지가 오고 있으니 얼마나 가슴이 뛰었을까.


"아버지, 이번 여행에서 저는 아버지의 다른 모습을 보았어요. 저는 그냥 아버지니까 좋아하고 사랑하고 그래왔는데요, 이번 여행을 통해 정말 멋진 아버지를 보았어요."


감동이 밀려와 눈물이 맺혔다. 찬바람이 불자 눈이 깨질 듯이 차가웠다, 아들이 무슨 말을 더 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버지, 이제 동유럽은 무척 추울 거예요. 항상 목도리 하시구요, 잘 드시고 다니세요."

"응, 너도 남은 공부 잘 마치고 서울에 가서 보자."


허리가 긴 버스를 타고 아들은 네덜란드로 떠났다. 나는 버스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평생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은 그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한국인이라서 무료라고요?

"주몽!"

이란을 여행하면서 이 한마디만큼 파괴력 있는 말이 또 있을까? 이란 사람들이 한국을 얼마나 사모하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톨게이트의 수금원을 만나면 우리는 큰 소리로 "주몽"하고 외쳤다. 당시는 한국 드라마 <주몽>이 이란을 휩쓸고 있었다. 이 외침을 들은 검표원은 엄지손가락을 척 내보이며 그냥 지나가라는 표시를 했다. 열세 곳 가운데 무려 아홉 군데 톨게이트에서 주몽으로 값을 지불하고 통과했다.


이런 일은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만이 아니었다. 한번은 모래사막이 있는 아지드라는 남부도시로 가고 있을 때였다. 저녁이 되어 휴게소가 있는 주차장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마침 TV에선 동이가 방영되고 있었다. 여행을 떠난 지 오래되어 생소한 드라마였지만 외국인들이 한국의 드라마를 열심히 시청하는 걸 보니 그저 놀랍고 신기할 따름이었다. 일행과 함께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그때 한 이란인이 다가와 영어로 이야기했다.


"이 카페의 주인이 커피 값을 받지 않겠다고 합니다."

"아니, 왜요?"

"당신들이 한국인이라서 안 받는데요."


고마워서 콜라를 한 병씩 더 사 마시기로 했다. 주인은 콜라값도 받지 않았다. 그러더니 내일 아침 닭고기 요리를 하는데 우리도 와서 먹고 떠나라며 친절을 베풀었다. 이란인들의 한국 사랑은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했다.


이란의 남부도시 쉬라드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을 경험했다. 식당에 들어서자 신기하게도 이번에는 TV에서 <주몽>이 방영되고 있었다. 저녁을 먹은 후 나는 직원에게 평상을 가리키며 하룻밤 자고 갈 수 있냐고 물었다. 사실 여러 손님들이 식사를 하고 있어서 식당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의 답변이 돌아왔다.


"아, 물론입니다. 편하게 주무세요. 그리고 뒤뜰에 가면 씻을 물도 있으니 사용하셔도 돼요."


밥을 먹으러 온 손님들이 우리 일행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혹시 한국에서 오셨나요? 저희들 한국 너무 좋아합니다. 함께 사진을 찍어도 될까요?"

"당연하지요. 저희들이 영광입니다. 여행 중이신 모양인데, 어디에서 오셨나요?"

"저희들은 마슈하드에서 왔습니다."

"마슈하드요? 혹시 투르크메니스탄 국경에 있는 그 도시인가요? 저희도 마슈하드로 갈 겁니다."

"아, 그러세요? 괜찮으시면 저희 집에서 머무르세요. 며칠이고 상관없습니다."


마슈하드는 투르크메니스탄의 비자를 받기 위해 우리가 꼭 들러야 하는 도시였다. 묵을 곳이 마땅치 않아 고민했는데 잠자리와 먹을 것이 해결된 것이다. 부부의 아들이 베자르드가 내 토드에 가족들의 이름과 연락처를 빼곡하게 적어주었다. 그러곤 내 전화기를 달라고 하더니 자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며칠 뒤 마슈하드에 도착했으나 그들에게 신세를 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왠지 미안해졌다. 우리는 연락을 하지 않고 도시의 공원에서 잠을 자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가 마슈하드에 온 걸 알았는지 베자르드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끊고 몇 시간 후 베자르드가 친구와 함께 공원으로 찾아왔다. 차가 있는 친구까지 데리고 우리를 찾아 나선 것이다. 우리는 베자르드에게 체포(?)되어 그의 집으로 갔다. 온 가족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줬다. 새벽 한 시가 넘어서까지 접대가 끊이지 않았다.


이란을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넘치는 배려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우리나라가 동방예의지국이라면 이란은 중동예의지국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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