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루게릭병으로 투병 중인 정태규 소설가가
안구 마우스로 한 자 한 자 써내려간 감동적인 생의 기록
보통 사람에게 글쓰기란 펜을 들고 쓱쓱 끼적이거나, 키보드를 톡톡 두들기면 되는 간단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글을 쓰다 고치는 일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눈 깜박임이 유일한 의사 표현 수단인 정태규 작가에겐 매 순간 혼신을 다해야 하는 지난한 작업이다. 놀랍게도 그는 정말 눈을 깜박여서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고 한 글자, 한 문장을 완성해 이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매일매일 조금씩 나빠지는 병. 병세를 늦추는 것이 가장 최선인 병.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관망할 수밖에 없는 병…. 그래서 가장 잔인한 병으로 불리는 것이 루게릭병이다. 병을 앓기 전 저자는 부산의 여러 고교에서 국어 교사로 재직했으며, 소설가로서 꽤 활발한 작품 활동을 보여준 작가다.
이제 그는 전신이 마비되어 먹지도, 말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호흡기를 달고 숨을 쉰다. 두 눈을 깜박이는 것 말고는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아직 깜박일 수 있는 두 눈으로 ‘안구 마우스’라는 장치에 의지해 글을 쓰고 세상과 소통하며 죽음의 문턱에서 깨달은 생의 기쁨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 저자 정태규
소설가이자 전직 국어 교사, 지금은 루게릭병으로 7년째 투병 중.
평소와 다름없던 어느 가을 아침, 출근 준비를 하던 중 와이셔츠 단추를 잠그지 못해 당황한 일이 있었다. 그 후로 점점 팔다리에 힘이 없어지고, 가벼운 물건조차 들지 못하고, 길을 걷다 푹 쓰러지는 일들을 겪었다. 그 원인을 찾아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 1년여 만에 루게릭병임을 알았다. 가혹한 운명을 탓하기도 했지만 곧 새로운 삶의 질서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병이 날로 깊어가는 과정에서도 자신에게 구원과도 같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제 그는 전신이 마비되어 먹지도, 말하지도 못하며 호흡기를 달고 숨을 쉰다. 두 눈을 깜박이는 것 말고는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아직 깜박일 수 있는 두 눈으로 ‘안구 마우스’라는 장치에 의지해 글을 쓰고 세상과 소통하며 죽음의 문턱에서 깨달은 생의 기쁨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 책은 그가 안구 마우스로 힘겹게 써내려간 감동적인 생의 기록이자 작가로서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는 작품집이다.
정태규 작가는 1958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다. 부산대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제1회 부산소설문학상과 제28회 향파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부산작가회의 회장과 부산소설가협회 회장을 지냈다. 소설집으로 《청학에서 세석까지》 《길 위에서》 《편지》가 있으며, 산문집 《꿈을 굽다》, 평론집 《시간의 향기》 등을 냈다. 페이스북 ssangbaektaegyujung
■ 그림 김덕기
1969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동양화과를 졸업했다. 독특한 화풍으로 한국 화단에서 ‘색의 마술사’라는 평가를 받으며, 그동안 30여 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밝고 경쾌한 색채로 가족의 소박한 일상을 그려 ‘행복을 전하는 화가’로 주목받고 있다.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꽃이 만발한 정원은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들은 꽃 속에서 함께하는 시간과 같다’는 그의 철학을 담아낸다. www.dukki.com
■ 차례
추천의 글
1부 영혼의 근육으로 쓴 이야기 -병상에서
단추를 채우지 못한 어느 아침
엄지와 검지의 반란
내 안의 외로운 늑대 한 마리
떠내려간 검은 고무신 한 짝
신의 충고
서 있는 것보다 중요한 것
부산에서 서울까지, 아득한 먼 길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
벌떡 일어나서 걸어라, 뛰어라!
세상에서 가장 슬픈 출판기념회와 ‘감성적인 야수’를 위한 특별한 토론회
유쾌한 방문
우체국으로 간 앰뷸런스
페이스북 스타 되다
맛에 대한 오래된 기억
아내는 힘이 세다
나를 살게 하는 것들
눈썹과 귀털
2부 모범 작문 -소설
비원秘苑
갈증
모범 작문
3부 그대 떠난 빈집의 감나무 되어 ?에세이
감나무 연가
별 이야기
아름다운 순간
초발심
갈천리에서
집을 짓는 힘
꽃에 이르는 길
아이들은 자란다!
짝사랑
청사포에서
초등학교
5월에는
함박꽃밭의 축제
에필로그
당신은 모를 것이다
영혼의 근육으로 쓴 이야기 - 병상에서
단추를 채우지 못한 어느 아침
그날도 별반 다를 바 없는 아침이었다. 압력밥솥 추가 요란하게 흔들리며 고소한 밥 냄새가 안방까지 흘러들고 있었다. 서둘러야 할 시간이었다. 부산 신정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재직 중이었던 나는 출근시간이 이른 편이어서 7시가 되기 전 집을 나섰다.
나는 양말을 신은 뒤 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장롱에서 잘 다려놓은 와이셔츠를 꺼냈다. 나는 왼쪽 팔을 꿰고 서둘러 오른쪽 팔을 꿰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힘이 없었다. 오십견이 심해졌나? 이제는 나도 늙나 보다. 그런데 단추를 단춧구멍에 끼울 수가 없었다. 오른손 엄지와 검지에 힘이 들어가지가 않았다. 왼손으로 손가락을 주무른 뒤 다시 한 번 단추를 끼워보려 했으나 엄지와 검지를 움직일 수 없었다.
아내는 고무장갑을 벗고 내 와이셔츠 단추를 끼워주었다. 나는 뻣뻣해지는 뒷목을 주무르며 속으로 다짐했다. 일도 줄이고, 술도 좀 줄이자고. 하지만 이게 시작이었음을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앞으로 매일 와이셔츠 단추를 채우지 않아도 되고, 매일 구두의 먼지를 털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날이 암살범처럼 은밀하게 다가오고 있음을.
엄지와 검지의 반란
나는 깊숙이 숨어있는 내 증상들의 원인을 찾아 이 병원 저 병원을 헤맸다. 그리고 부산대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모니터의 차트를 살폈다. 그리고 끝에 삼각형 고무가 달린 작은 봉으로 내 팔꿈치와 무릎, 발목 등을 툭툭 쳤다.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려보라고도 했는데, 오른팔이 가슴 높이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근전도 검사도 받았다. 며칠 후 검사 결과를 보더니 의사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면서 큰 병원에 가보라고 조심스럽게 권하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루게릭병이라고 하는데... 정밀 검사를 받아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진료실을 나오자 무중력의 공간에 발을 딛는 것처럼 다리가 허청거렸다. 나는 병원 1층의 중앙 로비 의자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루게릭병. 스티븐 호킹 박사가 앓고 있는 병. 희귀성 난치성 질환. 불치병. 내가 루게릭병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고작 이 정도였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이마에서 진땀이 났다. 제일 먼저 아내 얼굴이 떠올랐다. 아내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집안 경제를 먼저 걱정할까, 아니면 내 미래를 걱정할까? 아이들은 어쩌지? 직장은 또 어떻게 하나? 치료비는? 병가는 언제쯤 내야 하나? 직장을 잃고 나면 우리 가족은? 이제는 힘을 줄 수도 없는 오른손 검지와 엄지를 바라보았다. 탈진한 듯 엄지와 검지는 축 처친 채 슬픈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신의 충고
신학기가 되면서 명예퇴직을 신청했지만 신청자가 많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공무원 연금을 개혁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명예퇴직 신청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는 그럭저럭 견딜 만했는데 루게릭병 확진을 받고부터는 몸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하지만 명예퇴직이 안 되니 당분간 출근을 감행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집에서 가까운 동래원예고등학교로 전근을 해 조금은 여유가 있는 작문 과목을 맡은 것이다.
어쩌면 신이 인간에게 병을 주는 것은 너무 오만해지지 말라는 경고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돌아보라는, 그동안의 삶의 습성을 바꾸라는 충고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나는 문학박사에, 소설가에, 두 아들의 아버지에, 과분한 아내까지, 많은 것을 얻고도 더 욕심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아직 왼팔에 힘이 남아 있었고, 두 발로 걷는 데도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이미 오른손은 전혀 쓸 수 없었고, 왼손도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화장실에 가서 지퍼를 내릴 수는 있었지만 올리기는 힘들었다.
점심이 되면 나는 교문을 나와 횡단보도를 건넜다. 손에서 식판을 놓친 이후 아내는 매일 점심 도시락을 싸들고 학교 앞으로 왔다. 때맞춰 휴직을 한 아내는 출퇴근 시간에도 학교에 왔다. 아내는 온전히 나의 손발이 되어주고 있었다. 아내와 난 학교 앞 아파트 단지 내 공원에 자리를 잡았다. 바지 지퍼를 잘 올리지 못하게 되자 아내는 상의를 긴 것으로 입혀 주었다. 아내는 따뜻한 커피로 먼저 내 목을 축인 다음 김밥 하나를 입에 쏙 넣어 주었다. 우리 사정을 모르는 남들이 본다면 참으로 다정하고 행복한 부부의 모습이겠지.
벌떡 일어나서 걸어라, 뛰어라!
몸이 굳어가는 것보다는 굳어가는 몸 때문에 소설을 쓸 수 없는 게 나는 더 괴로웠다. 연하(삼킴) 장애가 심해지고 발음이 더 어눌해지면서 아내가 내 말을 받아서 타이핑하는 작업도 점점 힘들어졌다. 그 무렵 부산소설가협회 옥태권 회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를 위한 아이스버킷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2014년 여름, 하루가 멀다 하고 SNS에서 사람들이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열풍 속에 그해 9월 부산소설가협회에서 나를 위한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열었다.
해그림자가 길어지는 오후 6시쯤이었다. 부산 중앙동 40계단 아래 문인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날 나는 휠체어를 타고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그 자리에 참석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축을 받긴 했지만 걸을 수 있었고 대화도 나눌 수 있었는데, 이제 내 발음을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고맙다는 말 대신 그저 미소만 지었다. 먼저 옥 회장이 얼음물을 뒤집어쓰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정태규! 벌떡 일어나서 걸어라, 뛰어라!"
그의 목소리가 40계단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이어 다른 동료 세 명이 차례로 계단에 앉았다. 세 명의 머리 위에 얼음물이 와르르 쏟아졌다. 소매 밖으로 나온 그들의 팔뚝이 눈물 나도록 아름다웠고, 불거진 힘줄과 근육이 질투 날 정도로 부러웠다. 얼마 전까지 내 삶도 저들과 다르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카페 구석에 앉아서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누는 일, 아이들이 무심코 던진 공을 주워 다시 던져주는 일, 거실 천장의 전구를 가는 일, 자전거 페달을 신나게 밟는 일... 그토록 사소하고 대수롭지 않은 일들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삶도 있다는 것을.
안구 마우스는 기도에 대한 응답처럼 내게 왔다. 그날 후원금이 꽤 모여서 고가라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던 안구 마우스를 구입할 수 있었다. 그 즈음 구술도 점점 힘들어졌다. 그런데 안구의 움직임과 눈 깜박임만으로 컴퓨터 자판 입력은 물론, 텍스트 복사와 붙여넣기, 화면 스크롤과 확대가 가능하다니! 안구 마우스로 나는 새롭게 세상과 조우했다. 음악, 영화, 카톡, 쇼핑, 심지어 바둑까지. 무엇보다 기쁜 일은 신간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체국으로 간 앰뷸런스
루게릭 환자는 연하 기능이 떨어지면 위장에 호스를 연결하여 음식을 주입하는 위루술을 받는다. 그리고 호흡기 근육이 약화되면 목에 구멍을 뚫어 호흡기를 연결하는 기관절개술을 받는다. 이 기관절개술이 어쩌면 루게릭 환자의 마지막 수술인 셈인데, 이 수술을 받고 나면 그야말로 침대에 붙박이처럼 누워 24시간 누군가의 간병을 받아야만 한다. 나는 여기 저기 기계에 의지한 채 생명을 조금 더 연장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 답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 2015년 봄, 나는 심한 가슴 압박과 호흡 곤란으로 응급실에 실려 갔다. 숨이 넘어가자 아내는 내 허락이고 뭐고 먼저 수술부터 해달라고 요청했다. 의사들은 급하게 내 목을 열어 기관절개 응급 수술에 들어갔다.
중환자실에서 깨어나던 그때, 나는 처음으로 신을 원망했다. 차라리 깨어나지 못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픈 등과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손발의 느낌으로 내가 아직 고통스럽게 살아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신은 모든 걸 거두어 가놓고 어쩌자고 통증만 남겨놓은 것일까?
보름 후 집으로 돌아가던 날, 이제 휠체어에 의지해서도 외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집으로 가기 전 우체국에 먼저 들르기로 했다. 퇴직금을 찾기 위해서였다. 주렁주렁 호스를 매단 채로 전동 침대에 누워 외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었다.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앰뷸런스는 우체국 앞에 도착했다. 나를 대신해서 아내가 예금을 찾으러 갔었지만 우체국장은 ‘본인이 와야 한다’는 말만 번복했다. 그래서 규정대로 앰뷸런스를 타고 내가 직접 퇴직금을 찾으러 온 것이다.
그 후로 나는 은행 거래뿐 아니라 인감증명 한 장 떼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서류상으로는 존재하지만 삶과 죽음의 회색 지대에 누워 있는 사람, 동적인 세상에서 내 모든 권리는 대리인인 아내의 몫이다. 아내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고 그저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권리만 누리고 있을 뿐이다. 그해 여름, 우리 가족은 서울로 이사하기로 결정했다. 아내는 서울에서 공부하는 두 아들과 살림을 합쳐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대학 시절부터 40여 년을 살았던 정든 부산, 수많은 사람들을 뒤로 하고 나는 그렇게 패잔병처럼 서울로 떠났다.
페이스북 스타 되다
루게릭병을 앓으며 가장 두려웠던 것은 고립감이다. 세상과 나의 연결고리가 영영 끊어지고 말 거라는 것. 가족들도 지쳐갈 것이고, 지인들의 발길도 점차 뜸해질 거라는 것. 그렇게 난 내 깜깜한 육체에 갇힌 채로 영영 잊히고 말 거라는 것. 죽음도 궁극적으로는 내가 내 몸과 소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세상과 연결된 끈을 놓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러던 차에 지인이 페이스북을 해보라고 권했다. 그런데 이것이 은근히 중독성이 있었다. 온갖 정보들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글에 대한 반응이 곧바로 뜨는 것이 신기해서 댓글을 달고 읽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몰랐다. 때로는 내가 환자라는 사실도 잊었다. 그곳에서 나는 루게릭 환자가 아니라 소설가 정태규였다.
오래전에 썼던 단편소설 모범 작문을 페이스북에 여러 번 나눠서 연재했는데 예상 외로 반응이 뜨거웠다. 매회 ‘좋아요’가 300개를 훌쩍 넘었다. 페이스북 연재가 화제가 되면서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 나는 꼬박 하루 동안 답변지를 작성해서 신문사에 보냈다. 나는 인터뷰 기사를 페이스북에 공유했다. 비로소 내 상태를 알게 된 많은 이들이 응원과 격려의 메시지를 주었다. 이 새로운 관계망에서 나는 힘을 얻었다. 생명이란 소통을 통해서 확인되고 증폭되는 것이 아닌가.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에서 한 말은 전적으로 옳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아내는 힘이 세다
안구 마우스의 검색창에서 자동 완성 기능으로 저장된 ‘소변’이라는 단어를 찾는다. 그리고 초점을 맞춘 뒤 눈을 껌뻑이면 잠시 후 성우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소변통 가져다주셩
아내가 얼른 소변통을 챙겨온다. 소변을 해결하고 나니 이번엔 목에 낀 가래가 답답하다. 나는 다시 단어를 찾아 눈을 껌뻑인다.
- 석션해주셩
그러면 아내가 카테타라는 도구를 이용해 침을 제거해준다. 이렇게 시시때때로 도움이 필요하니 아내는 늘 바쁘다. 내 몸을 이리저리 돌려 눕히는 일도 만만치 않다. 낮에 의식이 있을 땐 몸이 배기지 않는다. 그러나 잠이 들면 배겨서 한 자세로 한 시간을 못 가 잠이 깨고 만다. 그때마다 이를 갈아 아내를 깨운다. 욕창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하룻밤에 여러 번 체위를 바꿔주어야 한다. 내 식사를 준비하는 일도 간단치가 않다. 의료용 유동식에 아침에는 당뇨약, 점심에는 유산균, 저녁에는 우울증 예방약을 배에 연결된 위루관에 함께 넣어준다. 그런 아내가 오늘따라 유난히 정신없어 보인다. 아침 유동식을 넣어주려고 세워놓은 전동 침대를 그대로 둔 채 방을 나가버린 것이다.
- 백 여사
애타게 찾았지만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등뼈가 아파오고 엉치뼈가 쑤셨다. 나는 이를 갈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나만의 신호였다. 아무 말도 없이 나갈 리는 없는데 이상했다. 팔과 다리가 점점 저려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목이 왼쪽으로 꺾여서 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잠깐의 방심이 내 호흡기를 막을 수도 있는데 아내는 도대체 어디를 간 것일까.
나는 글자판을 노려보며 무지막지한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아내에게 하는 욕이라기보다는 몸이 쑤시고 아픈 데 대한 화풀이였다. 그때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방금 쓴 욕들을 복사해서 붙여넣기를 했다. 두 번, 세 번. 남자 성우가 중후한 목소리로 반복해서 욕을 했다. 그러자 아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지금 나한테 욕하는 거가? 내가 왜 개고, 당신이 개지. 나는 호랑이다 아이가. 당신, 지금 나한테 죄짓고 있다는 거 모르나? 하느님이 나한테 주신 이 많은 시간을 당신이 아파서 다 가져갔다 아이가. 그것도 당신이 죄다."
아내 말이 맞다. 나는 아내의 시간을 훔치는 도둑이다. 아내의 시간을 내 병수발로 다 빼앗은 것이다. 하지만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간 사이에 내가 죽을 수도 있었다. 말다툼 끝에 아내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사람들은 가엾다고 말하는 것뿐이고, 아이들은 거들어주는 것뿐이고, 당신은 미안해하는 것뿐이지만 자신은 매 순간이 전쟁이고 현실이라고.
"사람들은 듣기 좋게 사랑타령이지만 나는 사랑 모른다. 가장 좋은 거 멕이고, 냄새 안 나게 깨끗하게 씻겨주고, 오다가다 당신 몸 저릴까 봐 자세 바꿔주는 거... 나한텐 그거 사랑이다."
모범 작문 - 소설
모범 작문
지금은 글짓기 시간입니다. 참 지겹습니다. 다른 시간도 마찬가지지만 글짓기 시간은 참 지랄같습니다. 노총각에다 별명이 ‘술귀신’인 우리 선생님은 칠판 가득 엄청 큰 글씨로 ‘제목:어머니’라고 써놓고 교단 옆에 앉아 끄덕끄덕 졸고 있습니다. 어제 또 학교 옆 골목 금산옥에서 술을 개같이 처마셨는가 봅니다.
우리 엄마는 아무리 눈을 까뒤집고 봐도 자랑할 만한 건덕지라곤 손톱 밑의 때만큼도 없습니다. 우리 엄마는 우리 동네 국민시장에서 좌판을 벌여놓고 고등어, 갈치, 꽁치 따위 생선을 팔고 있습니다. 그래서 엄마 몸에서는 언제나 들척지근한 비린내가 풍깁니다. 우리 엄마는 예쁘지도 않습니다. 아니, 예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우리 엄마만큼 못생긴 여자도 찾아보기 어려울 겁니다. 코는 납작한 들창코인 대신에 광대뼈는 불쑥 솟아 올랐습니다. 또 작은 눈은 날카롭게 치올라 붙은 데다 각이 진 턱은 어른들 말에 의하면 팔자가 더럽게 억세 보입니다. 거기다 얼굴에는 거무데데한 기미가 잘못 그린 일본 지도처럼 가득합니다. 키는 보통 여자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을 정도로 멋대가리 없이 큽니다. 남자처럼 떡 벌어진 어깨와 굵은 팔뚝하며...
그래서인지 엄마가 젤 싫어하는 텔레비전 광고는 부드럽게 생긴 여자가 부드러운 몸짓을 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여자와 커피는 부드러운 게 좋은 거 아녜요?"라고 말하는 광고입니다.
"쌍년! 부드러운 거 좋아하네."
그러나 나는 그 광고 속의 여자처럼 부드러운 여자가 좋습니다.
학교에 오기를 지독하게 싫어하는 엄마가 모처럼 학교에 오게 된 건 순전히 나의 그 막강한 주먹 실력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전전날 우리 반 반장인 상수 새끼를 묵사발로 만들어버린 사건이 일어났지 뭡니까. 그날 점심시간에 우리 반 아이들 몇은 화장실 뒤에 일렬로 늘어서 누가 오줌 줄기를 멀리 보내나 하는 내기를 했습니다. 내 오줌 줄기가 분명히 가장 길게 뻗어 나갔습니다. 그런데도 새끼는 제 것이 더 길다고 박박 우기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도 반장이라고 술귀신 선생에게 알랑방귀를 뀌어대는 꼴이 아니꼬웠는데, 자기 아버지가 무궁화 몇 개인 경찰이라나 뭐라나. 잘 걸렸지요 뭐. 앞뒤 가리지 않고 입술이 떡나발이 되도록 패주었습니다. 그러니 그게 무사히 넘어갔겠습니까.
그란 엄마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종례시간까지 기다렸다가 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엄마는 왠지 기분이 썩 좋아 보였습니다. 연방 기분 좋게 웃으며 은밀한 목소리로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니가 반장을 팼다 말이제? 그래 그놈아를 울매나 패삣노?"
"그런 며루치 같은 새끼 한 주먹감이나 되나 뭐."
"아이고 장한 내 새끼. 암믄 그래야제."
엄마는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저의 귀를 마구 잡아당겼습니다. 참 대책 없는 우리 엄마입니다.
아무튼 걱정입니다. 지금까지 쓴 걸 작문이라고 제출했다간 못된 소리만 썼다고 술귀신 선생한테 또 매타작을 당할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작문 시간을 언놈이 만들어놓았는지, 나 참 더러워서... 작문 끝.
그대 떠난 빈집의 감나무 되어 - 에세이
짝사랑
오늘도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하루가 지났다.
요즘은 세월이 너무 빠르게 흘러가는 듯하다. 세월의 속도는 나이와 정비례한다고 하니 시속 52킬로미터쯤 되려나. 일상에 파묻혀 이루어놓은 것 없이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시간들이 아깝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가족, 친구, 지인들과 함께했던 특별한 시간들을 자꾸 되돌아보게 된다. 누구를 만난 지 몇 년이 되었고, 누구누구와 어디에 놀러간 지는 몇 달이 되었으며, 누구랑 술 마신 지가 꼭 일주일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들 말이다.
이건 오래전 학창 시절에 연애하는 기분과 유사하다. 짝사랑하는 여인을 어쩌다 만나고 돌아오면, 그녀를 만난 지 스물네 시간이 지났구나, 마흔여덟 시간이 지났구나, 하는 식으로 그 시간을 되돌아보곤 했다. 그리고 아아, 마흔여덟 시간 전만 해도 나는 그녀와 함께 있었는데, 하고 되뇌곤 했다. 그건 그만큼 그 만남이 소중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나는 요즘 만나는 사람들과 어쩌면 연애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술 한잔 앞에 놓고 마주하면 괜히 기분이 유쾌해지고 가슴이 그들먹해지는 사람들. 그들과의 만남이 자꾸만 소중하게 여겨지는 요즈음이다. 이것도 나 혼자만의 짝사랑일까. 헛, 그렇더라도 어떠랴. 짝사랑은 내 전공인 것을.
초등학교
낯선 길을 지나가다도 오래된 초등학교만 보면 왠지 들어가 보고 싶다.
어제도 바람을 쐬러 교외로 나갔다가 어느 작은 해변 마을의 초등학교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차를 세웠다. 키 낮은 교사와 손바닥만 한 운동장, 운동장 바깥에 자랑스레 서있는 키 큰 플라타너스, 철봉과 그네,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동상... 봄방학 중인 교정은 아이들 그림자 하나 없이 고즈넉하게 조용했다.
앞산 언덕빼기에 마련된 스탠드에 앉아 학교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이상스레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안해졌다. 운동장 가득 평화로운 고요가 내려 있었다. 문득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교실 뒤에 걸린, 구름을 타고 가는 기차 그림, 오르간 소리, 양초 칠로 번들거리던 마룻바닥, 바닥의 옹이구멍 사이로 들여다보이던 까만 어둠과 그 어둠의 냄새, 철봉에 오래 매달리고 난 뒤 손바닥에 남아 있던 쇳내, 도시락을 까먹으러 올라가곤 하던 앞산에서 만났던 다람쥐들, 탱자나무 울타리에 달린 노오란 탱자 열매...
지금의 나를 이룬 건 그것들이었을 게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접했던 색깔과 모양과 냄새와 맛, 그것들이 지금의 나를 낳았을 것이다. 그래서 시골 초등학교는 어느 학교나 어머니의 자궁처럼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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