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탐험의 숨은 영웅, 톰 크린

   
마이클 스미스(역:서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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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울자유
   
16500
2017�� 03��



■ 책 소개

 

어느 누구보다 남극 탐험에 헌신했음에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은 모두를 위한 진정한 영웅!

 

남극 탐험하면 남극점 정복을 향해 치열하게 경쟁한 로알 아문센과 로버트 스콧, 위대한 실패로 유명한 어니스트 섀클턴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들의 위업은 그들의 힘으로만 된 것은 아니었다. 묵묵히 헌신한 숨은 영웅들이 없었다면, 그 어떤 업적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숨은 영웅들 중 하나가 톰 크린이다.

 

사실 톰 크린은 그 누구보다 남극 탐험을 많이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스콧의 1차 디스커버리 탐험대와 2차 테라노바 탐험대, 섀클턴의 인듀어런스 탐험대까지 세 차례나 남극을 탐험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톰 크린은 남극 탐험의 역사에서 위대하고도 극적인 생존 스토리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하다. 영하 61도까지 떨어지는 추위로 인해 ‘미치거나 죽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인간에게 가장 적대적인 곳에서 동료를 구하기 위해 썰매에 태운 채 160km를 이동하고, 더 이상 이동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자 홀로 56km를 더 걸어가 구조를 요청한 사나이, 그가 바로 톰 크린이다.

 

숨과 땀까지 얼어붙을 추위와 끊임없이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최악의 상황에서 목숨 외에는 버릴 것이 없는 극한의 탈출을 시도하는 그의 모습은 장엄함을 넘어 경외감으로 다가온다.

 

■ 저자 마이클 스미스
저자 마이클 스미스(Michael Smith)는 영국 출신의 저널리스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로, 극지방 탐험의 권위자로 유명하다. TV와 라디오에도 자주 출연해 극지방 탐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며, 여러 신문과 잡지에도 극지방 탐험의 역사에 대해 기고하고 있다. 저서로는 테라노바 탐험 당시 탐험대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로렌스 오츠Captain Lawrence Oates의 전기인 《잠깐 나갔다 올게요I Am Just Going Outside》, 스코틀랜드의 극지 탐험가 제임스 워디 경Sir James Wordie의 이야기인 《남극의 전사Polar Crusader》, 톰 크린에 대한 또 다른 전기인 《톰 크린의 삶Tom Crean-An Illustrated Life》, 영국 해군 장교이자 극지 탐험가 프랜시스 크로지어의 전기인 《프랜시스 크로지어 선장Captain Francis Crozier-Last Man Standing?》, 아일랜드 남극 탐험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위대한 노력-아일랜드의 남극 탐험가들Great Endeavour-Ireland’s Antarctic Explorers》, 어니스트 섀클턴의 전기 《섀클턴-인듀어런스 호의 남극 탐험Shackleton-By Endurance We Conquer》 등이 있다. 또한 어린이들을 위한 책으로 《남극 빙하 위의 사나이, 톰 크린Tom Crean-Ice Man》과 《탐험대장 섀클턴Shackleton-The Boss》을 썼다.

 

■ 역자 서영조
역자 서영조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와 동국대학교 대학원 연극영화과를 졸업하였다. 영어권 도서들을 번역하고,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한 여러 영화제 출품작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한 책으로는 《철학을 권하다》, 《공간이 마음을 살린다》, 《처음 만나는 자유》, 《우리는 개보다 행복할까?》, 《미국심리학회가 권하는 자녀교육법》, 《힐러리의 전설》, 《대립의 기술》, 《세계여행사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100》,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100》, 《탁월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가》, 《디퓨징 : 분노 해소의 기술》, 《바잉 브레인》, 《브레인 룰스》, 《줄스와 제이미 올리버의 맛있게 사는 이야기》, 《DAILY JOY : 365일 새 힘을 주는 한마디》, 《내가 말하는 진심, 내가 모르는 본심》, 《생각의 공식》, 《걱정 활용법》 등이 있다.

 

■ 차례
서문

 

1. 가난한 농부의 아들, 해군에 입대하다
2. 스콧 탐험대와의 우연한 만남
3. 남극, 그 미지의 세계로
4. 남극에서 첫 겨울을 보내다
5. 본격적으로 남극을 탐험하다
6. 스콧의 2차 탐험대 승선
7. 시작된 스콧과 아문센의 경쟁
8. 남극점 정복을 위한 준비
9. 스콧 탐험대, 최후의 여정을 시작하다
10. 지옥 문턱까지 간, 목숨을 건 경주
11. 남극 정복 팀의 비극
12. 비극을 불러온 어리석은 선택
13. 서글픈 수색에 나서다
14. 일약 영웅이 된 크린
15. 남극 빙하가 다시 손짓하다
16. 인듀어런스 호, 얼음에 갇혀 난파되다
17. 유빙에 운명을 맡기다
18. 마침내 엘리펀트 섬에 상륙하다
19.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
20. 사우스조지아 섬으로 출발하다
21. 죽음을 무릅쓴 남극 산악 행군
22. 위대한 실패가 만든 위업
23. 다시 엘리펀트 섬으로
24. 인듀어런스 대원들을 모두 구조하다
25. 마침내 고향에 돌아오다
26. 남극을 잊고, 고향에 정착하다
27. 남극 탐험의 숨은 영웅, 톰 크린

 

주석




위대한 탐험의 숨은 영웅, 톰 크린


스콧 탐험대와의 우연한 만남

디스커버리 호와 크린과의 만남

크린이 디스커버리 탐험대와 접촉하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영국 해군성은 링가루마 호와 뉴질랜드 함대에 속한 다른 군함인 리저드 호에게 디스커버리 호가 남극으로 떠나기 전에 뉴질랜드에서 가능한 모든 원조를 하라고 지시했다. 크린은 링가루마 호의 다른 수병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사적인 배가 위대한 여정을 떠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싶었을 것이다.


어쨌든 디스커버리 탐험대에 자원한 것은 크린이 자신감을 타고났고, 자신의 능력에 대해 믿음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표였다. 그런 타고난 자신감이 힘든 환경에서 자라면서 발달한 독립심과 결합하면서 매우 강인한 성품을 만들어냈다.


크린이 디스커버리 탐험대에 자원해서 갔다는 사실은 또한 남극 탐험이 초기에 얼마나 무계획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디스커버리 호에 승선했던 대다수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크린은 극지의 환경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 닥칠 혹독한 현실에 대해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았다. 그 배에 타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강한 모험심과 미지의 세계로 간다는 약속뿐이었다.



남극에서 첫 겨울을 보내다

냉혹한 남극에서 인정받는 크린

막사를 짓긴 했지만, 겨울은 디스커버리 호에서 보내기로 결정되었다. 크린은 대부분의 작업을 할 수 있는 데다 일하기도 좋아해서 탐험대의 생활에 금방 적응했고, 인기 있는 대원이 되었다. 탐험대 부대장이자 항해사였던 아미타지는 그런 크린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는 저서 《남극에서의 2년(Two Years in the Antarctic)》에서 이렇게 썼다.


"크린은 아일랜드 인으로, 재치가 넘치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차분한 성품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크린은 얼마 안 가 모두에게 신뢰할 수 있고 충직한 대원으로 인정받았다. 금방 얼음 위의 삶에 적응했고, 썰매를 아주 잘 끌었으며, 힘든 일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일랜드의 농촌에서 자란 덕에 힘든 일에는 익숙했겠지만, 그를 특히 눈에 띄게 만든 것은 적응성, 믿음직함, 유머감각이었을 것이다. 또한 장교들은 그가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남극 대륙에 상륙한 직후 첫 번째로 꾸려진 썰매조에 선정되었던 것을 보면, 대부분의 대원들보다 썰매를 끄는 요령도 빨리 익혔던 것 같다.


크린은 반 중위와 함께 썰매를 끌고 이동하는 여정을 세 차례 했는데, 탐사가 목적이기도 했고, 다른 팀들에게 보급품을 전달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 여정들은 남극 대륙에서 썰매를 끌고 이동하는 것의 어려움과 남극의 혹독한 기후로 인한 심각한 위험성을 잘 보여준 사례가 되었다. 크린은 그런 위험 속에서 몇 번이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본격적으로 남극을 탐험하다

스콧은 미지의 땅으로의 짧은 탐험 몇 가지를 계획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인류 역사상 남극점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기록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것이 이후 디스커버리 탐험대의 가장 큰 업적이 된다. 당시로서는 지구상에서 그 누구도 로스 빙붕의 지평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처음에 크린은 로스 빙붕 내륙으로 가는 첫 번째 탐험을 지원하기 위한 지원 팀의 일원이었다. 탐험 팀은 스콧, 윌슨, 섀클턴 등 세 사람이었고, 지원 팀은 세 사람이 돌아오는 길에 이용할 수 있도록 눈밭에 보급품을 놓고 오는 일을 맡았다.


실패로 끝난 첫 번째 남극점 정복 도전

사실, 미지의 세계로 위험한 여정을 떠나던 그들은 모두 완전 초보자들이었고, 최선의 이동 수단인 개썰매와 스키도 적절히 이용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결국 사람이 끄는 썰매라는 시대에 뒤진 방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썰매를 직접 끌고 가는 것은 끔찍할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 다리는 무릎까지 눈 속에 푹 빠졌고, 무거운 썰매는 자꾸만 얼음덩어리 사이에 끼어 움직이지 않았다. 지원 팀 열두 명 중 절반인 여섯 명은 11월 13일에 귀로에 올랐지만, 나머지 여섯 명은 이틀 뒤에 남위 79도 15분 지점에서 발을 멈추고 북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지점은 그때까지 인간이 도달한 남극점에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이는 어렵게 얻은 값진 성취였다.


1년 후 다시 시작한 남극 대륙 탐사

9월 중순, 크린은 반 중위를 따라 로스 빙붕의 화이트 섬 남동쪽에 보급품을 놓아두러 갔다. 9월 중순은 아직 겨울이 채 끝나지 않은 때여서 극심한 추위로 고생할 우려가 컸다. 그리고 막상 가보니 상황은 예상보다 더 좋지 않았고, 결국 엄청나게 고생을 했다.


이 탐사는 크린이 디스커버리 탐험대에서 겪은 가장 힘든 여정이었다. 팀원들은 깊은 크레바스를 피하며 가파른 산마루를 횡단해야 했다. 그래도 위험을 무릅쓰고 울퉁불퉁한 땅과 얼음 위로 썰매를 끌고 힘겹게 나아간 보람이 있었다. 역사상 최초로 로스 빙붕으로 이어지는 해안선의 지도를 정확히 그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팀이 디스커버리 탐험대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일은 배로 돌아가기 위해 북쪽으로 가던 중에 생겼다. 그들은 로스 빙붕 끄트머리에 있는 디스커버리 산 옆의 미나 곶에 스콧이 13개월 전에 설치했던 보급품 저장소를 만난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저장소는 13개월 동안 556미터를 이동한 상태였다. 이는 하루에 1.2미터를 이동한 셈이었다. 탐험대의 과학자들은 전부터 로스 빙붕이 움직이고 있다고 믿고 있었지만, 저장소가 움직였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함으로써 최초로 빙붕이 움직이는 속도를 측정할 수 있었다. 스콧은 이것이 이번 탐험의 중요한 성과 중 하나라고 말했다.



스콧의 2차 탐험대 승선

1904년 9월, 톰 크린은 문명 세계로 돌아왔다. 그는 이제 탐험대의 믿음직한 일원이 되어 있었다. 계급 차별이 엄격해 일반 사병은 장교들의 주목을 받기 어려웠던 당시로서는 쉽지 않은 성취였다.


모두가 신뢰하는 사람이 되다

스콧과 섀클턴은 그의 자질을 알아보았고, 두 사람 모두 남극으로 다시 떠날 때 제일 먼저 연락한 사람들 중에 크린이 있었다. 크린이 망설이지 않고 남극 대륙으로 돌아간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디스커버리 호가 영국으로 돌아온 지 정확히 2년이 되던 1906년 9월, 크린은 스콧을 오랜만에 만났고, 남극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갑자기 높아졌다. 스콧이 크린에게 함대에 속한 전함 빅토리어스 호에 함께 타자고 청한 것이다.


평생 뼛속까지 해군으로 살아온 스콧은 평범한 해군 병사들에게서 위대한 힘을 보았다. 그리고 디스커버리 탐험을 함께한 해군 병사 크린과 태프 에반스, 빌 래실리에게 특별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 세 사람은 스콧이 해군 병사가 지녀야 할 우수한 자질이라고 생각하는 점들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었기에, 스콧은 그들을 믿고 의지하게 되었다.



시작된 스콧과 아문센의 경쟁

동료를 구하기 위해 유빙을 건너 빙붕을 올라가다

2월 28일에 스콧은 극지방 탐험이 처음이라 경험이 부족했던 보워스에게 조랑말 한 마리를 데리고 혼자서 헛포인트로 출발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잠시 후 크린과 체리-가라드에게 조랑말 세 마리를 데리고 보워스를 따라잡으라고 했다. 스콧과 오츠, 그란은 뒤에 남아 아픈 조랑말을 보살폈다.


크린과 보워스, 체리-가라드는 빙붕 위를 행군하여 바다와 얼음이 만나는 아미티지 곶에 도착했다. 헛포인트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들 앞에 움직이는 얼음이 나타났다. 주변의 얼음이 깨지고 있다는 위험 신호였다.


세 사람은 얼음덩어리 위에 고립된 채 육식 고래의 위협을 받으면서 여섯 시간 정도를 떠다녔고, 다행히 로스 빙붕 바로 옆까지 왔다. 그렇다고 해서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빙붕의 가장자리는 4.5~6미터 높이의 얼음 절벽이기 때문에 조랑말들과 썰매를 빙붕 위로 안전하게 옮기기는 불가능했다.


심각한 위험 상황이었고 동료들은 둘 다 이런 상황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사람들이었지만, 크린은 대단히 침착하게 행동했다. 그는 다른 대원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가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빙붕 가까이로 지나가는 얼음덩어리 위로 올라가서 스키 스틱을 이용해서 빙붕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필사적인 도박이었다.


크린의 강인함이 빛을 발하다

스콧은 그때 크린을 아낌없이 칭찬했고, 그날의 사건을 일기에 적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는 바다 위에 떠다니는 유빙을 타고 먼 거리를 이동했고, 이 얼음덩어리에서 저 얼음덩어리로 계속 옮겨 다니다가 마침내 두꺼운 얼음덩어리를 발견하고는 스키 스틱을 이용해서 빙붕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실로 목숨을 건 모험이었지만, 다행히 성공했다."


보워스와 체리-가라드가 곤경에 처했음을 알리기 위해 혼자 세이프티 캠프까지 갔던 일은 크린이 역경에 처한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위험한 상황에서 홀로 움직인 첫 번째 일화다. 이 사건은 크린이 상당한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신체적, 정신적으로 매우 강인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어려운 상황에서 그의 불굴의 용기와 상황 대처 능력이 빛을 발했음을 입증했다.



스콧 탐험대, 최후의 여정을 시작하다

최종적으로 남극 정복 팀에서 제외되다

마음을 정한 스콧은 1월 3일에 폭탄선언을 했다. 그는 남극점에 자신을 포함해서 다섯 명이 가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크린, 래실리, 테디 에반스는 베이스캠프로 돌아가고, 보워스는 스콧, 윌슨, 오츠, 태프 에반스와 함께 남극점까지 240킬로미터의 마지막 행군을 함께할 거라고 말했다.


10년간 스콧의 뒤를 충실히 따라온 크린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가 특히 섭섭했던 것은 스콧이 크린을 남극 정복 팀에서 제외한 이유를 직접 설명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비통한 눈물을 흘리다

지난 두 달 동안 엄청나게 노력을 했음에도 그는 남극점을 밟으러 갈 수 없게 되었다. 10일에서 15일 정도만 더 가면 남극점에 발을 딛는 최초의 아일랜드 인이 될 수 있을 텐데, 그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에게 그런 사실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온몸이 얼어붙을 듯한 섭씨 영하 27도의 황량한 남극 고원 한가운데에서 크린은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비통한 굵은 눈물이 하얀 눈 위로 떨어졌다. 스콧은 일기에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딱하게도 크린은 눈물을 흘렸고, 래실리조차도 마음이 아파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크린은 가족들에게 당시에 눈물을 흘린 것은 자기 자신 때문이기도 했고, 스콧 때문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스콧이 남극 정복 팀에 대원을 한 명 추가한 것은 엄청난 위험을 무릅쓴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지옥 문턱까지 간, 목숨을 건 경주

괴혈병으로 무너진 에반스

그러나 여정에서 제일 쉬운 구간에 들어섰다는 안도감은 곧 흔들리고 말았다. 그때까지 정장 1,770킬로미터 동안 썰매를 끌어온 에반스가 괴혈병 증세를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에반스는 무릎 뒤쪽이 뻣뻣해졌고, 설사를 했다. 며칠 뒤에는 에반스와 남은 기간 동안 썰매를 끌었던 래실리가 텐트를 치던 중에 현기증을 느꼈다. 크린도 설사를 하기 시작했고, 수시로 설사를 하다 보니 이동 속도가 늦어졌다.


그런 상황에서도 크린만은 여전히 굳건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에반스나 래실리의 일기 어디에서도 크린이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약한 모습을 보였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괴혈병에 걸렸다는 기록도 없다. 지난 3개월 동안 에반스, 래실리와 똑같은 식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자기를 버리고 가라는 에반스의 명령을 거부하다

이틀 후,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에반스가 일어설 수 없게 되어 썰매에 그를 묶어야 했던 것이다. 헛포인트까지는 160킬로미터 정도가 남아 있었고, 그대로 가다가는 목숨을 건 경주에서 질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크린과 래실리는 3개월 반 동안 2,400킬로미터의 거리를 이동했고, 44세의 래실리는 그 기간 동안 거의 내내 쉬지 않고 썰매를 끌었다. 세 사람은 15주 동안 씻지도 못했고, 면도도, 이발도 하지 못했으며, 양치질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에반스는 자신의 상태가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두 동료에게 자기를 남겨두고 가라고, 두 사람의 목숨이라도 구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크린과 래실리는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훗날 에반스는 자신의 긴 해군 생활 중에 부하가 자기 명령을 대놓고 복종하지 않은 것은 그때가 유일하다고 회고했다.


동료를 구하기 위해 홀로 56km를 걸어가다

암울한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둘 중 한 사람이 에반스와 함께 남아 있고, 나머지 한 사람이 걸어서 56킬로미터 떨어진 헛포인트까지 가는 것이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이때 크린은 그의 생애 가장 용감한 결단을 내렸다. 헛포인트까지 혼자 걸어가겠다고 자원한 것이다.


그들은 남아 있던 식량을 크린의 주머니에 넣었다. 비스킷 세 개와 초콜릿 두 개가 전부였다. 래실리는 크린에게 마실 것을 만들어주려고 했지만, 가지고 갈 수가 없었다.


마침내 막사에 도착해, 구조를 요청하다

크린은 점점 거세지는 바람을 뚫고 힘겹게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를 덮치려고 위협하며 다가오는 눈보라를 돌아보며, 막사로 다가갔다. 그때 멀리 유빙 위에 개들과 썰매의 모습이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에 크게 안도하며 힘을 얻은 크린은 힘을 내서 막사까지 갔다. 막사에 도착한 그는 문을 열고 들어섬과 동시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극도로 지치고 너무 배가 고파서 의식이 혼미할 정도였고, 추위로 온몸의 감각이 마비된 듯했다. 운 좋게도 막사 안에는 개썰매를 모는 러시아인 디미트리와 의사인 앳킨슨이 있었다.


크린은 한 편의 대서사시 같은 그 여정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이번에도 자신이 한 일을 극도로 겸손하게 표현했고, 자신이 겪은 끔찍한 시련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

사실 엘리펀트 섬은 조난당하기에 적절한 곳이 아니었다. 이 섬은 섬들이 띠 모양으로 늘어서 있는 사우스셰틀랜드 제도에 속해 있다. 거의 대부분이 바위와 가파른 산으로 이루어져 있고, 몸을 피할 곳이나 해안도 거의 없다.


28명의 대원들이 엘리펀트 섬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지나가는 배를 우연히 만나리라는 기대도 하기 힘들었다. 그 섬은 배들이 지나다니는 항로에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외부 세계와 연락할 무선 통신 장치도 없는 28명의 조난자들은 스스로를 구조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있다가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다

이때 대원들이 나눈 대화의 주 화제는 구조였다. 도움을 받을 기대를 할 수가 없다는 건 거의 확실했다. 대원들 중 일부는 작은 배를 타고 남극해를 횡단해 안전한 곳까지 가는 긴 여정을 이기고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었다.


톰 크린은 와일드와 함께 섬에 남기에도, 섀클턴과 함께 남극해를 횡단하기에도 이상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엘리펀트 섬에 남으면 대원들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돕고, 기다리는 시간 동안 다른 대원들의 모범이 됨으로써 와일드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처음에 섀클턴은 크린에게 와일드와 함께 섬에 남으라고 했다. 자신의 오른팔인 와일드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섀클턴의 말에 따르면 크린이 데리고 가달라고 간절히 애원했고, 그래서 와일드와 상담한 후 크린을 데려가기로 약속했다.



죽음을 무릅쓴 남극 산악 행군

목숨을 건 산악 행군이 시작되다

두 번째 봉우리에서는 훨씬 더 큰 절망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풍광은 첫 번째 봉우리에서 만났던 것만큼 위협적이었고, 어쩌면 더 심할지도 몰랐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너무 위험할 수 있었고, 그들은 이번에도 발걸음을 돌려야 한다는 우울한 전망과 맞닥뜨렸다. 결국 세 사람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로 했다. 안전하게 산을 넘을 수 있는 길을 찾으려 애쓰던 세 사람에게 닥친 세 번째 좌절이었다.


설상가상, 잘못된 길로 가다

30분이 안 되어 세 사람은 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실망스런 상황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수많은 크레바스 사이에 휘말려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빙하 위를 가로질러 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스트롬니스 만에는 빙하가 없다. 섀클턴은 당시 세 사람이 느낀 실망감은 심각했었다고 기억했다.


지칠 대로 지친 세 사람은 또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야 했다. 두 시간 동안 눈밭 위를 터벅터벅 걸어 되돌아갔고, 새벽 5시 동이 틀 무렵 잠깐 멈춰 숨을 돌렸다. 잠을 전혀 자지 않은 채 26시간 동안 행군을 해왔기에, 좀 오랫동안 휴식할 필요가 절실했다.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조금이라도 온기를 느끼기 위해 한데 몸을 웅크린 채, 크린과 워슬리는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섀클턴도 졸음이 몰려왔지만, 순간 그는 그 상황에서 잠을 자면 너무나 위험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얼어 죽을 수도 있었다. 5분 뒤에 그는 크린과 워슬리를 깨운 다음, 그들이 30분간 잤다고 말했다. 그것은 두 사람의 목숨을 구한 거짓말이었다.


섀클턴은 세 사람이 여정의 마지막 단계를 잘 해낼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식사로 따뜻한 수프를 준비하게 했다. 크린이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섀클턴은 그들이 가야 할 지형을 살펴보았다. 당시 시각은 오전 6시 30분 정도였고, 하늘에서는 어두움이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순간 멀리서 무슨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기적 소리 같은 것이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극심한 피로가 그런 환청을 만들어낸 것일 수 있음을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오전 6시 30분은 포경 기지 근로자들이 공장의 기적 소리에 맞춰 기상하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각 7시, 멀리서 기적 소리가 삐 하고 울려왔다. 세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고, 미소 지으며 손을 잡았다. 그 소리는 거의 18개월 만에 그들이 듣는 문명의 소리였다.



다시 엘리펀트 섬으로

계속되는 실패 속에서도 강인한 크린

동료들을 구하려는 시도에 세 번 연속으로 실패하고, 8월 8일에 포클랜드 제도로 돌아온 세 사람을 그나마 조금 나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스콧이 과거에 이용했던 디스커버리 호가 대원들을 데리러 오기 위해 영국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착은 9월 중순은 되어야 가능했다. 섀클턴과 워슬리, 크린이 동료들을 두고 엘리펀트 섬의 해변을 떠난 지 어느새 3개월이 넘어 있었다. 엘리펀트 섬에 남아 있던 선원들은 바위로 뒤덮인 황량한 해변에서 배 밑에 웅크린 채 혹독한 남극의 겨울을 견디고 있었다. 앞으로 6주에서 8주를 더 그렇게 굶주린 상태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너무 심한 일이었다.


동료들을 구해 올 배를 찾아 헤매며 포클랜드 제도와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보낸 길고도 힘겨운 몇 주 동안, 크린은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섀클턴이 리더이긴 했지만, 당국의 관계자들과 협의를 하고 도움을 호소하는 데에는 크린과 워슬리의 도움이 무척 중요했다.


드디어 엘리펀트 섬에 도착하다

세 사람은 다시 한 번 마젤란 해협을 지나 칠레로 갔다. 그리고 섀클턴은 칠레 정부에게 옐초 호를 빌려달라고 간청했다. 세 사람의 불굴의 투지에 경의를 표했던 칠레 인들은 기꺼이 빌려주겠다고 했다.


옐초 호가 남쪽으로 나아갈 때, 바다의 상태는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2년간의 인듀어런스 탐험 기간 중 처음으로 행운이 이들과 함께한 것이다. 배가 엘리펀트 섬으로 다가갈 때, 빙하가 열리며 수로가 만들어졌다. 사방을 에워싼 짙은 안개도 그들을 단념시키지 못했고, 그들은 빙하 사이를 미끄러져 빠져나가 빙하가 없는 바다로 나아갔다.


곧이어 완벽한 타이밍에 안개가 걷히면서, 엘리펀트 섬의 황량한 절벽과 빙하가 눈에 들어왔다. 크린과 섀클턴, 워슬리는 낯익은 풍광이 보이는지, 동료들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는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해안선을 훑어보았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동료들을 찾아 이리저리 배를 움직이던 중 워슬리가 2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캠프를 발견했다. 두꺼운 눈에 덮여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구조하러 간 대원들과 구조를 기다리던 대원들은 거의 동시에 서로의 모습을 발견했다. 쌍안경을 통해 해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미친 듯 손을 흔드는 작고 검은 형체들이 보였다. 섀클턴은 움직이는 작은 형체들의 수를 셌고, 22까지 센 후 모두 살아 있다고 소리쳤다.


갑판 위에 선 섀클턴과 워슬리, 크린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대원들을 모두 구했고, 그들의 시련이 마침내 끝이 났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것은 실로 대단한 업적이었다. 워슬리는 그 순간 세 사람 모두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들 곁에서는 옐초 호의 선원 몇 명이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남극을 잊고, 고향에 정착하다

톰 크린은 해군 생활을 뒤로 하고, 가정을 꾸리는 새로운 과업에 착수했다. 거의 30년을 고향을 떠나 떠돌았던 사람에게 그것은 낯선 일이었지만, 그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준비가 잘되어 있었다.


남극보다 가족을 우선시하다

남아 있는 자료들을 보면, 아내와 가족에 대한 사랑과 아나스카울에 정착해 사는 삶에 대한 애정이 한때 자신의 집으로 생각했던 남극을 향한 열정보다 더 컸던 것 같다.


원래 그는 스콧, 섀클턴과 함께 오랜 세월 혹독한 시련을 겪었음에도 또 다른 여행을 떠날 생각이었다. 인듀어런스 탐험 후에도 크린은 모험에 대한 욕구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1920년에 그는 마음을 바꾸었다. 새로운 남극 탐험 팀을 꾸리고 있던 섀클턴이 연락을 해왔는데도, 그 결심은 바뀌지 않았다.


둘째 딸 캐서린이 태어난 1920년, 크린은 섀클턴에게 이제는 아내와 가족이 우선이라고 기분 나쁘지 않게, 하지만 굳은 결의를 담아 말했다. 그는 이렇게 간단히 말했다.


"저에겐 이제 머리가 긴 친구가 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

크린의 두 딸과 동시대 사람들은 모두 톰 크린에 대해 공통된 기억 하나를 갖고 있다. 그가 자신의 업적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특히 모르는 사람들이 그의 남극 탐험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 이것은 사우스폴 안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다 - 그는 정중하게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었다.


크린은 세 번의 탐험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해군을 제대한 후에는 지역 유명 인사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모두 피했다. 그의 야망은 남극에서의 세 차례 탐험에서 대부분 충족되었고, 평생 겪기 힘들 만큼의 고난을 모두 겪고 난 만큼 그는 조용한 삶에 만족하며 살았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