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2015년 다음 카카오가 주최한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대상을 받은 청민의 신작 에세이.
누구나 혼자 있고 싶은 순간이 있다. 그가 나를 외롭게 할 때, 사랑하는 일이 내 맘 같지 않을 때, 관계 속에서 상처받을 때, 모든 것이 의미 없다고 느껴질 때. 그럴 때면 사람을 외면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삶 곳곳에는 사랑이 있다. 연인간의 사랑뿐만 아니라 가족, 친구, 그리고 우리가 스친 풍경에도 사랑이 자리해 있다. 그래서 사랑을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고 외면하려 해도 외면할 수 없다. 사랑은 수많은 이름으로 불고, 또한 수많은 이름으로 불어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처받고 힘들어도 불어오는 다채로운 사랑 앞에 마음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 저자 청민
유치한 농담, 김광석, 엄마가 물려주신 꽃무늬 스커트, 조조영화, 오래된 골목, 여름과 가을 사이, 덕수궁, 프리지아를 좋아한다.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행복하게 살고픈, 아주 보통의 청춘. 맑은 가을하늘 같은 감성으로 희망과 사랑을 쓰고 싶은 B컷 시선의 저자.
브런치 brunch.co.kr/@romanticgrey
■ 차례
끝이라는 단어
토끼와 용왕님
컨닝과 커피 한 잔
모스크바 판타지
사랑은 수많은 이름으로 불어온다
아빠가 들려준 이야기
이별 숙취
외할머니의 손
되게 웃긴 녀석
할아버지 구둣방
그 애의 바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사람
한계의 슈퍼맨
충성, 나의 제리에게
가죽과 상처
출근길에 스치는 조각
엄마의 상자
나의 동굴
작은 사랑 포장 법
내 곁에 와줘서 고마워
뺨 때기 맞은 날
백야
단골집
한여름 밤의 골목 영화제
미운 오리 새끼
오늘의 쪽지
Positives+
버스 잘못 탄 날
마음, 그 찰나의 순간
어느 여름밤의 고해성사
편지
epilogue
thanks to
사랑은 수많은 이름으로 불어온다
끝이라는 단어
언제나 그렇듯 어느 평범한 밤이었다. 대학 주변의 조용한 카페에서 친구와 지뢰 찾기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카페 바닥이 울리기 시작했다. 강한 진동이었다. 뭐야, 왜 이래, 카페에 있던 사람들이 당황한 목소리로 웅성거렸다. 여기저기서 지진이야?라는 물음표만 나올 뿐 그 누구도 확실히 지진이다!라고 말하지 못했다. 지진은 아주 먼 이야기였으니까, 이렇게 큰 지진은 바다 건너 일본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라 생각했으니까. 카페에 있던 모두에게 두려움이 내렸다. 나는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연결되지 않고 끊어졌다. 다시 전화를 걸어봐도 똑같았다. 다급한 마음에 카톡과 문자를 보냈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다. 엄마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불안했다. 한참을 핸드폰과 씨름하고 있던 중에 다시 카페 바닥이 울렸다. 조명이 흔들리고 탁자 위 물건들이 요동쳤다. 처음보다 더 크고 긴 진동에 속이 울렁이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지진이었다. 불안감이 커졌다. 내가 이곳에서 죽을 수 있겠구나. 처음 겪는 공포였고,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뭘 해야 할지도 몰랐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빠르게 나를 덮쳤다.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만약 지금 죽는다면 나는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두 번의 지진이 지나간 후, 그 질문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죽음은 상상하지 못했던 평범한 순간에 내 앞에 나타났다.
친구 차를 얻어 타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머릿속으로 무수히 떠올렸던 재난 영화의 장면들은 현실이 되지 않았다. 다행히 엄마도 무사했다. 땅이 흔들렸던 시각, 엄마는 마트에 계셨단다. 장을 보는데 마트 바닥이 두 번이나 출렁였다고. 나와 연락이 닿지 않아 엄마도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고 하셨다. 밤이 늦어서야 지진에 대한 자세한 뉴스가 보도되었다. 긴장된 마음을 풀지 못한 채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별의별 상상이 다 들었다. 마음이 뒤숭숭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죽음과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던 그날 밤,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 애는 까칠하고 무뚝뚝한 룸메이트였다. 웃으며 말을 걸어도 대꾸 한 번 없는, 내가 딱히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의 친구였다. 안타깝게도 나는 대학 시절 마지막 룸메이트로 스무 살짜리 그 애를 만났다. 그 애가 특별히 잘못한 것은 없었지만, 첫 만남부터 정이 가지 않았다. 가뜩이나 예민한 4학년 마지막 학기에 어린 친구 눈치를 살피는 기분이랄까.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는 사소한 것들이었다. 한 번씩 돌아가면서 청소를 하기로 해놓고 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것들.
우리 학교 기숙사에는 전통이 있었다. 학기 초, 한 학기 동안 사이좋게 잘 지내자는 의미로 룸메이트끼리 밥을 먹는 전통이었다. 그런데 약속 시간 삼십분 전에 문자 하나가 왔다. 언니, 저 갑자기 일이 생겨 같이 저녁 못 먹을 것 같아요. 문자에 구체적인 이유는 없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지인에게 피아노 연주를 부탁 받았는데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단다. 약속을 취소하는 이유를 설명해 줬으면 좋았겠지만 어쩌겠는가. 우리는 완전히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이었는데. 그날 일은 웃으며 넘겼지만 학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같이 밥 먹을 시간을 내지 못했다. 그 후 나는 졸업을 했고, 그 애의 존재를 잊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후배 E였다. "언니, 혹시 그 애 기억나세요? 언니 룸메였던." E와 그 애는 적당히 아는 사이였단다. "걔, 지금 교통사고 당해서 혼수상태래요. 굉장히 위독한 것 같더라고요." 멀쩡히 길을 걷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졸업하고 처음 듣는 그 애의 소식이 하필 이런 거라니. 전화를 쥐고 있던 손이 떨렸고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언니, 그 애, 부모님이랑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한 채 누워 있대요." 그 말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반년 동안 나랑 같은 방에서 지내던 친구였는데. 전화를 끊은 나는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아무렇지 않은 일상을 보냈는데 그 애는 죽음의 기로에 서 있다니. 정신이 멍해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뒤, E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그 애의 부고 소식이었다.
카페에서 지진을 겪고 나니 그 애 생각이 폭풍처럼 밀려들어왔다. 그 애가 떠나던 날, 그 애는 부모에게도 친구에게도 심지어 자기 자신과도 작별 인사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카페에서 겪은 지진이 나를 삼켰다면 나도 그 애처럼 작별 인사를 남기지 못했겠지. 끝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쉽게, 아무것도 아닌 어느 날 내게 찾아왔다. 두 번의 지진과 함께. 지진을 떠올리며 글을 쓰는 내내, 다급하게 엄마에게 전화를 걸던 순간이 떠올라 쉽게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지진이 더 세게 카페를 흔들었다면, 그래서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할 수 없었다면, 나는 내가 죽는 것과 엄마에게 마음을 전하지 못한 것 중 어느 쪽을 더 안타까워했을까.
지금 당장 해야만 하는 것들을 하나씩 떠올리다가, 끝에 가서야 생각했다. 사랑한다고. 엄마와 아빠를 정말 많이 사랑한다고. 나는 언제나, 그 말을 해야 했다.
사랑은 수많은 이름으로 불어온다
가끔 옆집 아줌마는 너희 정말 친남매 맞느냐고 물었다. 그럼 엄마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우리를 집으로 불러다가 야단을 치고는 했다. 우린 정말 박 터지게 싸웠다. 하루 세 끼 밥 챙겨먹듯 꼬박꼬박 싸우는 우리를 보고 엄마는 꼭 톰과 제리 같다고 했다. 내가 톰이고 동생이 제리였다. 동생인 제리는 나보다 3살이나 어렸고, 짜증나게 예쁘게 생겼었다. 하지만 올망졸망한 외모 뒤에 숨겨진 검은 본성은 오직 톰인 나만 알았다. 나는 제리가 싫었다. 제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싫었다. 엄마의 사랑을 빼앗아가는 것도 싫었고, 실컷 게임을 하다가 어찌 알았는지 나에게 컴퓨터를 양보해서는 "동생 내버려두고 게임만 했냐"고 욕을 먹게 하는 것도 싫었다. 엄마가 고개를 돌리면 혓바닥을 쏙 내밀고 메롱 하는 것도 싫었고, 그냥 숨 쉬는 것만 봐도, 심지어 뒤통수만 봐도 싫었다.
내가 제리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던 어느 날이었다. 수업이 끝난 제리는 빈 초등학교 운동장에 쪼그려 앉아 모래바닥을 만지작거리며 청소 당번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운동장에 있는 제리를 발견하고 짜식, 기다리는 건 생각보다 귀엽네라는 생각을 하며 그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우리 반 남자애 둘이 하이에나처럼 제리에게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 저 녀석들은 나를 약 올리다 등짝을 세게 맞고 점심시간 내내 울었던 녀석들이었다. 역시나, 하이에나들은 제리에게 겁을 주기 시작했다. 저 녀석들이 나에게 당한 걸 엉뚱한 제리에게 화풀이하는구나. 다급하게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니 마침 운동장 구석진 곳에 삽이 꽂혀 있었다. 옳다구나! 나는 삽을 들고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야! 이 자식들아!" 하이에나들은 삽을 들고 뛰어오는 나를 보고 놀라서 제리를 버려두고 도망쳤다. 제리도 나의 모습에 놀란 듯, 토끼처럼 눈을 똥그랗게 뜨고선 "누나야아." 하면서 눈물을 망울망울 만들어냈다.
십 년도 훨씬 넘은 일인데, 여전히 나는 톰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으며, 그때 제리를 살려준 것을 내내 후회하며 살고 있다.
외할머니의 손
"야야. 괜찮다." 외할머니는 괜찮다고 했다. 오랜만에 뵙는 게 반가워서, 나는 그 말에도 아랑곳 않고 사진을 찍었다. 외할머니 사진이 별로 없으니 귀찮아하실 만큼 사진을 충분히 찍어 두라는 엄마의 당부가 있기도 했고. 대문을 엶과 동시에 나는 외할머니의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 다녔다.
카메라 속의 외할머니는 내가 평소 생각하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머릿속에서 늘 한결같았던 모습의 외할머니는 어디로 갔는지 프레임 속의 외할머니는 다채로운 사람이 되었다. 시시한 이모의 농담을 듣고 피식 웃기도 하고, 농사지은 가지가 볼품없다는 말을 하면서도 비닐봉지에 바리바리 싸고, 꼬불꼬불 활개 치는 머리카락에 물을 축여 쓱쓱 넘기기도 하고. 그동안 이렇게 외할머니에게만 집중한 시간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졸졸 따라다니다가, 이상한 낌새에 놀라 외할머니의 손을 부여잡았다. "할머니, 손이 왜 그래요?" 그리고 소리를 치며 가족들을 불러 모았다. 외할머니는 별 거 아닌 일에 왜 이리 소란이냐며 내 등짝을 퍽 하고 때렸다.
자세히 보니 외할머니의 손엔 엄지손가락 세 개쯤은 되어 보이는 보랏빛 혹이 있었다. 사람 손이 원래 그런가 싶을 정도로 보라색으로 익어 있었다. 엄마와 이모는 당장 짐부터 쌌다. "아. 괜찮다는데 왜 그러느냐. 이거 그냥 요 앞에 병원 가서 주사 맞으면 된다." 외할머니는 손사래를 쳤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 우리에게 이끌려 큰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 선생님은 손을 요리조리 살피다가 "아이고, 안 아프셨어요?" 하고 물었다. 그제야 외할머니는 사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불편하고 아팠다고 털어놓았다. 의사 선생님은 외할머니의 손마디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할머님, 손을 너무 많이 쓰셨어요. 연골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 뼈끼리 부딪치면서 염증이 생긴 거예요. 손을 조금 쉬셔야 돼요."
외할머니는 손에 있는 염증 주머니를 도려내는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상처 부위에 붕대를 감고 우리 집에서 며칠을 묵었다. 집에 있는 동안은 엄마의 등쌀에 못 이겨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쉬었다. 그래도 꼭두새벽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했으며, 붕대를 감은 손이 갑갑하다고 매일같이 말했다. 이윽고 붕대를 풀던 날, 외할머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향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후 전화가 왔다. "야야, 대추 갖고 가라. 새로 땄다."
함께 대추를 가지러 내려간 그날, 엄마는 말했다. "엄마, 저번에 짜 준 참기름 애들이 너무 좋아하더라. 밥을 싹싹 비벼 먹더라니까." 그러자 삐쩍 마른 외할머니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거 별로 좋은 것도 아닌데." 외할머니는 소녀처럼 수줍게 웃었다.
나의 동굴
나는 아빠의 책상 아래 공간을 좋아했다. 어렸을 적 내게는 그곳이 동굴같이 느껴졌다. 아빠가 없을 때면 나는 종종 책상 위에 이불을 걸쳐 두고, 간이 텐트인 것처럼 작은 공간을 만들어 그 안에서 놀았다. 준비물은 간단했다. 입구를 대신할 얇은 이불, 이불이 흘러내리지 않게 고정할 아빠의 두꺼운 책들, 그리고 낡은 스탠드. 그것들만 있으면 아빠의 책상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의 동굴로 재탄생했다. 희한하게도 좁은 책상 아래에 들어가 몸을 구기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보호받는 기분이 들었다고 할까. 그 어떤 것에서도 나를 보호해 주는 방공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아빠의 책상 아래 작은 공간을 나의 동굴이라 불렀다.
당시만 해도 내 방이 따로 없었다. 나는 동생과 함께 이층침대를 썼는데, 심지어 침대는 거실에 놓여 있었다. 엄마는 커튼을 달아 거실과 침대 공간을 분리해 주셨다. 하지만 침대는 커튼을 쳐 놓아도 완전히 오픈된 거나 다름없었고, 그나마도 동생과 함께 공유하는 공간이었다. 나도 친구들처럼 방이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가끔은 커튼 속 공간이라도 혼자 차지하고 싶은 마음에, 일층에서 자는 동생을 놀래켜 부모님 방으로 쫓아내거나, 일부러 동생 위로 떨어지는 등의 심술을 부렸다. 그래서 나는 책상 아래 공간이 좋았다. 그 공간만큼은 동생과 공유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물론 엄마의 잔소리가 시작되기 전까지라는 시간 제약이 있었지만, 그 전까진 온전히 나의 동굴이었다.
책상 아래에서 내가 하는 놀이는 별 게 없었다. 엄마 몰래 과자를 가져와 먹거나, 하늘을 날고 초능력을 부리는 상상을 하거나.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상상의 나래를 펴기에 그곳은 최적의 공간이었다. 물론 나의 동굴에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기는 했는데, 환기가 잘 되지 않아 10분만 앉아 있어도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힐 만큼 갑갑했다는 거다. 그럼에도 나는 이불을 들추지 않고 꾸역꾸역 몸을 구기고 앉아 있었다. 아주 못 참을 것 같을 때만 이불을 살짝살짝 열어 바깥 공기를 쐬었다.
나이를 먹고 어느 순간부터 아빠의 책상 아래 들어가는 놀이는 하지 않게 되었지만, 나는 언제나 나의 동굴이라 이름 붙일 만한 공간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나의 동굴은 덕수궁이었다. 덕수궁 근처 고등학교를 다닌 덕분에 나는 매일 덕수궁과 마주쳤다. 덕수궁의 아침을 보며 등교를 했고 덕수궁의 밤을 보며 하교를 했다. 덕수궁의 얼굴은 참으로 다양했다. 봄이 되면 돌담길 너머까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여름엔 푸른 잎사귀들이 찬란히 빛났다. 가을에는 아주 곱게 단풍물이 들었고 겨울에는 유난히 맑은 하늘에 새하얀 달이 떴다. 덕수궁 안에는 사계절이 다 들어 있었다. 그래서일까. 덕수궁에 가면 괜찮다. 다 괜찮다. 그런 말이 어디선가 들리는 것 같았다.
스물이 넘어서 나의 동굴 역할은 텐트가 이어 받았다. 가족 여행을 가면 우리는 종종 텐트에서 야영을 했다. 처음에 나는 텐트라는 공간이 불편했다. 숨을 곳이라곤 보이지 않았고 혼자만의 공간은 전혀 없었다. 과자를 먹거나 책을 읽는 것은 고사하고 핸드폰을 잠시 만지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핸드폰의 불빛은 텐트 안을 환하게 밝혔고, 울며 겨자 먹기로 핸드폰을 꺼야 했다. 텐트에서 잘 때마다, 나는 커튼으로 가려진 이층침대를 동생과 공유하던 때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부딪치고 또 부딪치던 어느 날인가부터, 불편함은 편안함으로 예민함은 즐거움으로 바뀌었다.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는 행복도 많았다. 엄마가 끓인 찌개가 너무 싱거워 도저히 국으로밖에 볼 수 없어도, 우리는 눈치를 보면서 무조건 맛있다는 말을 했다. 퉁퉁 불어터진 라면이 너무 맛있어서 한 젓가락이라도 더 먹으려 젓가락 전쟁을 벌일 때도 있었고, 아침에 일어나 침낭을 정리하는 서로의 얼굴이 너무 못생겨 웃다가 뒤로 넘어갈 때도 있었다. 텐트 안에서는 별 것 아닌 일도 별 것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우리는 텐트에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아빠는 처음으로 아빠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했고 엄마는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말해주었다. 동생은 자신의 꿈을 진지하게 설명했고 나는 불확실한 미래가 주는 힘든 마음을 털어 놓았다. 우리는 텐트 안에서 어쩌면 평생 털어놓지 않았을 수도 있는 감정을 나누었다. 그럴 때면 텐트가 세상과 동떨어진 다른 세상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온전히 우리 가족만이 가늘고 긴 운명의 실로 연결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제야 사랑하는 사람의 품이 나의 동굴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언제나 아빠의 책상 아래 공간이나 덕수궁 같이, 혼자가 될 수 있는 공간을 찾았다. 그런데 어쩌면, 내가 숨어야 할 곳은 불편하고 답답하던 텐트였을지도 모르겠다.
단골집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단골집이란 게 생겼다. 일주일에 한 번 정해진 요일, 비슷한 시간에 가는 김밥집이 있다. 하루는 사장님께서 내 주문을 받으며 오늘도 똑같으시네요, 하고 웃으셨다. 김밥 두 줄, 쫄면하나, 돈가스 하나. 생각해 보니 어느 순간부터 사장님은 내게 이렇게 인사하셨다. "오셨네요. 오늘 너무 덥죠?" 혹은 "오늘은 쫄면 안 시키세요?" 하고. 아무 생각 없이 주문을 하다가 사장님이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생각에 깜짝 놀라 멋쩍게 웃었다. 그제야 언젠가부터 스리슬쩍 넣어 주셨던 국물이 떠오르며, 내가 이 가게의 단골이었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자주 가는 가게들이 꽤 있었다. 김밥과 쫄면은 무조건 시장 입구에 있는 고봉민김밥, 전은 시장 안의 모퉁이 집, 따끈한 어묵은 전집 옆의 부산어묵, 달달한 청포도 타르트는 도시 중심가의 디토르테, 콩국수와 칼국수는 시내 국수방, 초밥은 아주 오래된 종로초밥. 양 손에 김밥을 포장해 돌아오는 길에 자주 가던 가게들을 머릿속에 그려 보니, 어! 생각보다 꽤 많았다. 모든 가게의 사장님과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은근슬쩍 서비스를 챙겨 주는 것이 단골이었기 때문이구나.
단골집이 꽤 많다는 것을 깨닫자, 여기서 정 붙이고 살 수 있을까 고민했던 시간들이 존재하긴 했나 싶다. 내게도 단골집이란 것이 생겼고, 스치듯 지나는 인연이지만 누군가 내 취향을 기억해 주고 있었으므로. 내게 단골집이란 멋들어지게 느껴지는 단어였다. 한동네에 오래 살아서 학교 앞 문방구 아줌마와 인사하고, 슈퍼 할아버지네 손주의 건강을 묻고, 동네 친구의 동생과도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낯선 곳에 가서 어설프게 적응을 해야만 했던 나와는 달리 그들은 무엇이든 자연스러워 보였다. 언제가 되어도 돌아갈 자리가 있다는 것이 부러워서, 익숙한 공간에서 산다는 것이 너무 부러워서 어렸을 땐 눈물이 날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나는 초등학교를 세 군데나 나왔다. 고등학교는 두 군데를 나왔고. 심지어 대학교를 다닐 때도 이사를 갔다. 왜 그리 이사를 많이 다녔는지 나는 다 알 수 없었지만, 이사를 가야만 한다는 게 너무 싫었다. 좋아하는 친구들을 두고 익숙한 곳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이 적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늦은 밤 예전 학교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보고 싶다며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곤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들과 나의 관계는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슬픈 일이었다. 이사를 안 갔다면 처음부터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친구들과 헤어질 필요도 없었고.
편지
부쩍 차가워진 날씨에 옷장에서 겨울옷을 꺼냈습니다. 작은 방 여기저기에 걸쳐 놓은 옷가지엔 계절이 섞여 있었습니다. 침대 위의 반팔에는 뜨거운 태양이, 바닥에 늘어뜨린 두터운 외투에는 겨울의 한기가. 옷가지들이 머금었던 먼지가 폴폴 날려 창문을 열어 놓고 옷을 정리하다가 편지 상자를 발견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옷더미를 밀치고 노란 뚜껑의 플라스틱 상자를 열었습니다. 상자에는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받은 편지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눈에 띄는 편지 하나가 있었는데, 봉투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열아홉의 내가, 스물아홉의 너에게.
열아홉의 소녀가 무려 자신보다 열 살이나 많은 미래의 자신에게 쓴 대담한 편지였습니다.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것도 모자라 미래의 자신에게까지 편지를 썼던 모양입니다. 봉투 속에는 연분홍의 편지지 두 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깨알 같은 글씨도 빼곡하게 쓰여 있었습니다. 기껏 열아홉이 무슨 이야기를 했겠어요. 잔소리, 또 잔소리뿐이었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이 편지를 읽고도 후회하지 않는 네가 되었으면 좋겠어. 하는 잔소리들. 편지 상자가 세상의 전부인 양,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고 머물러 줘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행여 다른 이가 편지를 읽었다면 아마 전 매일 밤 이불을 발로 차며 창피해 했을 테니까요.
잔소리쟁이 편지를 침대 한쪽에 올려놓고 상자 안을 살펴보니, 과일박스만큼 커다란 상자는 벌써 편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조금만 늦게 발견했다면 아홉 살의 소녀가 쓴 편지는 사람들이 제게 보내둔 편지들에 둘러싸여 많이 답답했을 겁니다. 모서리 한쪽이 울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편지 상자에는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아서 언제 보아도 참 행복합니다. 알록달록한 편지들을 하나둘 꺼내어 보는 동안, 먼지가 폴폴 날리던 작은 방에는 잊고 지내던 마음들이 하나둘 떠오릅니다.
편지 상자에는 여행지에서 제가 저에게 보낸 편지도 꽤나 많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미래의 저에게도, 현재의 저에게도 편지를 쓰는 사람입니다. 저는 여행지의 마음을 담아 저에게 편지를 부칩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여행지의 소인이 찍힌 편지들을 받아 봅니다. 여행지에서 편지를 쓰는 건 제가 여행을 떠날 때마다 반드시 지키는 규칙 같은 것입니다. 친구들 말처럼 이렇게 귀찮은 일을 전 왜 습관처럼 하고 있는지, 때때로 스스로에게 신기할 때도 있습니다.
고백하건데 편지를 쓰는 이유는 제가 모든 것이 느린 사람이기 때문일 겁니다. 어떤 일을 배우는 것도,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는 것도, 사람을 새로 사귀거나 헤어지는 것까지도. 오죽하면 문자 메시지에 답장을 쓰는 것보다 편지 쓰는 것이 더 쉽다고 느껴지니 말입니다. 아마 말주변이 없고 대답하는 것이 느려서 그런 것인가 봅니다.
옷 정리를 마무리하고 책상 앞에 앉아 종이 한 장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느리지만, 사랑하는 청민에게로 시작하는 첫 문장을 썼습니다. 몇 년 후에 이 편지를 오늘처럼 계절이 섞인 날에 발견한다면, 창피할 수도 잔소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이 편지에 써야 할 것만 같습니다. 편지 쓰기를 포기하지 말라고, 느린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에게 마음 전하길 포기할지 말라고. 그리고 너는 느리지만 열심히 잘 가고 있으니 앞으로도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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