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EBS <명의> 김남규 교수가 말하는
‘살아 있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
대장암 명의 김남규 교수가 20년 이상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 진료실에서 겪은 삶과 죽음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꽃처럼 아름다웠던 20대 청춘이 치료가 계속됨에 따라 빛을 잃고 사그라지는 경우, 극복했다고 믿었던 병이 다른 가족에게 발병한 사연, 예비 신부의 병을 알고도 결혼을 감행한 신랑의 이야기 등 실제 사례를 통해 때로는 가슴 따뜻하고 때로는 눈물이 글썽거리는 우리네 삶을 수채화처럼 그려냈다.
단순한 진료일지를 넘어 생명의 회복과 소멸을 통해, 살아 있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을 끊임없이 자문하며 성장해가는 의사의 솔직한 내면 고백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때때로 독자들에게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 저자 김남규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후 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세브란스 병원 외과부장과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학 주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1999년 ‘연세대학교 올해의 교수상’, 2003년 ‘세브란스 최우수 임상 교수상’, 2010년 ‘최우수 연구 업적상’ 등을 수상하며 교육.연구.진료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주요 일간지에서 대장암 분야 최고의 의사로 선정되었으며 EBS [명의]에 다수 출연하기도 했다.
『당신을 만나서 참 좋았다』는 저자가 수많은 환자를 진료하면서 느낀 ‘생명론’을 담은 책이다. 회복의 기쁨에 함께 웃고, 치유 과정의 험난함에 함께 울며, 때로는 죽음을 목격하면서 그가 만난 “삶이라는 신비한 여정”을 안내하는 첫 번째 에세이다.
■ 차례
들어가며-당신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
1부 생명이라는 계절
진료실의 봄 | 아름다움에 대한 담론 | 기뻐서 혹은 슬퍼서 운다 | 사랑아, 너는 이렇게 돌고 돌아 |
마지막이 편안하게 기억되는 사람 | 잠시 멈추면 보이는 것들
2부 천국으로 가는 두 가지 질문
의사가 가져야 할 마음과 태도 | 작은 소리라도 들어줄 수 있다면 | 걱정인형 | 가장 밝은 곳에서 헤어짐을 노래하게 하소서 | 해피엔드를 위하여 | 유난히 길었던 수술실의 어느 하루| 노교수의 식지 않는 열정을 만나다 | 환자를 위한 기도 | 옛날 사진을 보다가 | 좁은 문 | 세 잎 클로버의 꽃말 | 환자가 의사에게 바라는 다섯 가지
3부 무엇이 사람을 살게 하는가
부부의 사랑 | 경(敬)의 태도를 가진다는 것 | 용서 | 말기암 환자를 대하며 | 12월 24일의 응급수술 | 사람의 인생을 보는 치료 | 저마다의 사연 | 질병을 고치고, 마음을 헤아리고, 사회를 바꾼다 | 세계 병자의 날 | 살구나무 숲 | 산 자와 죽은 자의 선물 | 회복한 이들을 향한 고마움 | 따뜻한 말 한마디 | 우리에게 예정된 시간 | 잔인했던 어느 5월 | 삶의 질
4부 소중한 것은 가까이에 있다
여름에 읽은 두 권의 책 | 혜화동의 오래된 책방 |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1 : 당신은 왜 지금 여기에 있는가 |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2 : 진실된 삶이란 무엇일까 |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3 : 다섯 가지 생각 선물 |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4 : 어려운 시절을 기억하렴 | 약이 된 휴가 | 옛글에서 얻은 마음의 위로 | 일상에서 마주한 성자 | 음악이 있는 생활 | 낯선 세계로의 외출 | 짧은 러시아 방문기 | 식탁 밑의 점잖은 개 | 돌려받지 못한 사진 | 외할머니 이야기 | 더 늦기 전에 감사와 사랑을 전하라
마치며-고통만이 사랑을 체험하게 해준다
당신을 만나서 참 좋았다
생명이라는 계절
진료실의 봄
아침에 비가 내렸다. 봄은 멀리서 이미 오고 있었다. 따듯한 기운을 뿌리며 보슬대는 비가 정겹기만 하다. 서울은 아무리 조그마한 공간이라도 건물이 들어서 있어 눈을 들어 하늘이라도 보지 않으면 마음에 여유를 갖기가 정말 어렵다. 하지만 오늘은 비가 내리는 덕에 이렇게 세상을 감상하는 짧은 휴식을 만끽하게 됐다.
진료실에도 봄은 오고 있다. 환자나 보호자의 옷차림에서도 봄내음이 느껴진다. 나 역시 겨울 내내 움츠렸던 몸이 햇빛을 받고 활짝 기지개를 켜듯 좀 활기차졌다.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아본 사람들은 흔히 두 시간 대기, 삼 분 진료라고들 말한다. 안타깝지만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짧은 시간에 환자나 보호자의 요구를 해결하다보면 그들과 교감할 시간이 거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여유를 부려서 이런저런 안부를 물어보면 환자가 전해주는 봄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남도에서 온 농사일을 하는 환자는 최근에 감자 심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감자 꽃이 피는 시기와 수확 시기가 6월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새참 때 막걸리 한 사발을 마셔도 되는지 물어본다. 요즈음 농사일을 많이 한다고 했다. 당연히 마셔도 된다고 답해주었다. 그 한마디에 환자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힐끗 보이는 옆자리 보호자의 입에서도 환한 미소가 번진다. 환자를 위로하는 따듯한 말 한마디를 고마워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을 같은 마음으로 진료하고, 개개인이 요구하는 사항을 다 들어줘야 하는 직업을 의사라고 생각하면 확실히 고달픈 일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아무리 바쁘고 여유가 없더라도 환자의 입장에서 고민하고, 해야 될 일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이날따라 꽃샘추위도 있었다. 진료실에서 가장 난감할 때는 검사 결과가 안 좋을 때이다. 특히 검사 결과 암이 재발되었을 때는 이 사실을 어떻게 전해야 하나 순간 고민될 때가 많다. 한 40대 남자 환자는 수술 당시에 전이가 있어 상태가 심각했다. 수술 후 항암치료를 시작할 때 현재의 환자 상태를 그대로 전했다가는 실망이 커서 치료 반응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항암 약물치료가 끝나고 검사 결과를 보니 암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다. 환자와 보호자는 화를 많이 내면서 그동안의 치료 과정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분명 내 기억으로는 수술 직후 보호자에게 상황을 설명한 것 같은데, 환자 입장에서는 아주 절박하다보니 이런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잘 설명하고 후속치료에 들어가도록 권유했다.
진료실에서 건강을 회복해 완치된 환자를 보는 것은 큰 기쁨이다. 반면 이렇게 암이 더 진행되거나 재발되어서 고생하는 환자들을 볼 때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한다.
가을이 가면 봄이 돌아오는 자연스러운 계절의 법칙처럼 우리 인간도 그 법칙에 겸손히 순응해야 한다는 것을 오늘 진료실에서 다시 한 번 느꼈다. 아무리 의술이 발달한 현대의학이라 한들, 이미 존재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를 수 없다. 수없이 반복되는 억겁의 시간 속 생로병사를 어떻게 잠깐 스쳐가는 삶이 다스릴 수 있겠는가. 그저 잘 회복해서 밝은 봄의 기운을 보여주는 환자들에게 감사할 뿐이고, 나는 그저 회복에 도움을 준 보조자로서 겸허한 자세를 갖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자정이 다 된 시간, 집에 들어와서 잠을 청하려는데 불 꺼진 안방으로 은은한 빛이 들어왔다. 창밖을 보니 밝은 달이 온 세상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옛사람들이 달과 교감하여 많은 문학작품을 탄생시켰다는데, 지금 이 순간 그들이 어디서 그런 영감을 얻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달빛의 은은함은 사람의 마음을 은근하게 사로잡는 매력이 있는 것 같다. 한동안 달빛 때문에 뒤척이다가 잠이 들었다.
천국으로 가는 두 가지 질문
가장 밝은 곳에서 헤어짐을 노래하게 하소서
한참 병이 진행되어 치료가 난감한 환자를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시한부라 일컫는 환자들이다. 그럴 때면 남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는 차마 하지 못하고 말을 빙빙 돌려가며 진료실 안 시간이 흐르기만 바란다.
꽃다운 나이에 암으로 고통 받는 젊은 여성부터, 부양할 가족이 많은 한 집안의 가장까지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안타까운 사례가 많다. 나 역시 이러한 상황이 힘들지만 의사이기 때문에 감내해야 할 몫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암 조기 진단율이 높아졌고, 치료법이 개선되거나 새로운 치료제가 개발되는 등 암을 치료하는 환경이 꾸준히 나아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암 환자의 생존율이 크게 향상되었다는 점이다.
대장암 재발로 5년 넘게 투병하고 있는 50대 후반의 환자가 진료실로 들어왔다. 병원에 오랫동안 다니고 있어서 환자의 상태는 잘 알고 있다. 어떤 항암제도 듣지 않고 수술도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중인데, 최근 항문이 아프고 자주 변의를 느낀다며 찾아온 것이다. 환자의 부인은 언제나처럼 다소곳이 뒤쪽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올해 6월에 검사한 CT 소견과 3개월 뒤 찍은 소견을 비교해보니 간으로 전이가 많이 진행되었고, 골반에 재발한 암 또한 많이 진행되어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어렵사리 "조금 더 진행이 되었습니다"라고 전했다. 환자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차마 그런 이야기는 못하고 단지 몸조리 잘하라고만 전했다. 특별한 처방 대신 증상을 완화시키는 대증 치료에 대한 이야기도 꺼냈다. 몸이 괜찮은지 몇 번 물으니 골프도 칠 정도로 좋다고 했다. 더 이상의 이야기는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 잠시 침묵했다. 어색한 침묵의 찰나 언젠가 읽었던 《나는 넘버 쓰리가 두렵다》라는 책이 생각났다. 더 이상의 언어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책의 저자인 최강 신부는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는 노신부님과의 만남에서 "먼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 앞에서 무슨 말이 특별히 필요하겠는가. 당신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잘 가라고? 잘 가라는 인사는 결국 잘 오라는 뜻이 내포된 말이 아니었던가. 그 말은 결코 다시 오지 않을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침묵뿐이다. 침묵 속에서 그와 함께 있는 일뿐이다. 너무나 귀한 시간이라서 차라리 거룩한 침묵 속에서 함께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느끼는 데 온 정신을 몰입하면서 보내는 것이 옳다. 이때 언어는 방해만 될 뿐이다. 만약 당신이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무 말 없이 그의 옆에 서서 함께 있음을 느껴 보라. 그 함께 있음이 얼마나 큰 기쁨이고 축복인지 맛보라"고 했다. 진료실에서 잠깐 동안의 침묵을 경험하면서 이 책이 말하는 침묵의 의미를 다시금 곱씹게 되었다.
불가피하게 자리를 비운 사이 환자가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 보호자가 대신 부고를 전하는데, 보호자의 눈물을 보면 주치의인 나를 얼마나 의지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특히 환자가 그동안 고마웠다고 하더라는 말을 전해들을 때면 내가 의사로서 헛되게 살지 않았다는 생각에 감사하게 된다. 암은 조기발견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진단이 늦어져 치료가 어렵거나 재발로 인해 고생하는 환자를 만났을 때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말벗이 되고, 동반자가 되어 함께 걸어가는 것이 의사의 또 다른 역할이라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 단지 일찍 가고 늦게 가는 시간의 차이와 자신의 남은 생이 얼마인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이다. "세상 가장 빛나는 목소리로 우리의 헤어짐을 노래하게 하소서"라는 가수 유익종의 노랫말처럼, 나의 환자들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마지막 선물은 그들의 헤어짐을 가장 빛나게 장식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무엇이 사람을 살게 하는가
저마다의 사연
환자를 치료하다보면 질병만 보면서 치료하는 것이 어쩌면 더 쉬운 것 같다. 사연이 있는 경우는 의사도 많은 부담을 안게 되고 그 상황에 안타까워한다. 더구나 재발암을 수술하는 것은 외과의사로서 부담이 많이 된다. 대부분 수술 범위가 크고 시간이 많이 걸리며 다른 분야 교수들과 협의진료로 수술을 해야 하는 합병증 위험이 높은 수술이기 때문이다. 내가 수술한 환자가 재발하여 재수술하는 경우도 있지만, 타 병원에서 수술 및 항암치료 후 재발하거나, 후배나 선배가 수술한 환자가 재발하여 다시 수술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내 은사였던 외과 명예교수의 사모님은 본인도 의사인데, 5년 전 대장암 수술을 받고 이후 간, 림프절 재발에 대한 방사선치료와 항암 약물치료를 받느라 고생이 많으셨다. 그러다 이번에 두 번째 대동맥 주변 림프절 재발이 발견되었는데, 이미 방사선치료와 수술을 받은 후라 재발 부위를 외과적으로 잘라내기가 어렵다고 판단되었지만 고심 끝에 수술을 결심했다.
대동맥 좌측에 재발이 의심되는 림프절을 절제해야 할 사항이어서 수술 전에 미리 치밀하게 계산하고 들어갔다. 하지만 유착이 심했고 제거해야 할 림프절과 신경 부분이 방사선치료 후라 조직의 섬유화 상태와 구별이 안 되었다. 더구나 주변의 장 유착이 심하고 대동맥이 들리면서 출혈되어 지혈하는 데 애를 먹었다.
수술을 마치고 퇴원한 환자가 처음 외래를 찾았다. 오전에 양전자 컴퓨터단층촬영을 했고, 수술이 잘 되었는지 수술 담당자인 내가 명예교수와 사모님 앞에서 심판받는 날인 것이다. 검사 결과를 핵의학과 교수와 전화 통화로 확인했는데, 재발된 림프절이 모두 제거된 것 같다고 통보를 받아서 정말 기뻤다. 만일 남이 있었다면 환자를 고생만 시키고 효과는 없는 수술이 될 뻔했다. 곱게 화장한 환자가 환하게 웃는 미소를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대장암이 재발해 수술 후에 입원하고 있는 어떤 목사님은 진단 당시 간 전이가 있었으나 항암 약물치료 후 치료 반응이 좋아 수술을 받았다. 이후 재발 방지를 위해 힘든 항암 약물치료도 잘 받았으나 1년 후 간, 골반 림프절 재발로 또 수술을 받았다. 중년 후반인 목사님은 본인의 암 발병 전에 그 딸이 먼저 유방암으로 치료를 받고 있었다. 딸 역시 암이 재발해 목사님의 마음고생이 심했고, 가끔씩 치료와 관련해 의사들을 원망했다. 그때마다 위로를 했는데, 가족들의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딸은 먼저 하늘로 떠나게 되었다. 딸 생각에 많이 힘들어하던 목사님은 수술 전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인간적인 고뇌가 깊이 들어간 부탁인 것 같았다. 재발된 암은 수술한 부위가 넓고 수술 전 항응고제를 복용하여 위험인자가 많았다. 수술 후에도 경과가 순조롭지 않고 더뎌서 걱정이었다. 회진 때마다 병실에서 환자의 옆을 지키는 부인과 늙은 어머니를 뵐 때마다 송구하기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항문암이 재발되어 조직검사 후에 수술 예정인 한 스님은 나를 보면 항상 합장하며 인사를 했다. 스님은 조직검사 전 한잠도 못 자고 안절부절 하며 심한 정서불안 상태를 보였는데, 때마침 마주친 때에 고개를 침상에 박고 울고 있었다. 불가에 귀의하여 모든 세속의 번뇌를 잊어버리고 중생을 불가의 가르침으로 인도해야 하는 성직자지만 병마가 스님도 무너뜨리는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회진 때 어떤 말로 위로하기보다는 그저 잠시 같이 있어주고 병은 치료될 수 있으니 안심하라는 말을 건넨 게 전부였다. 며칠 후 병실에서 방사선과 항암 약물치료를 받고 있는 스님을 마주쳤는데 많이 안정된 것 같아 보였다.
인간은 부모에게 육신을 받고 태어나 세상을 살아간다. 몸이 힘들고 아프면 영도 병이 들어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가는 동안 영육이 조화를 이루도록 관리하고 이해하는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는 한쪽이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깊이 얽혀 있어 분리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병원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느끼고 경험하게 된다.
앞서 사례처럼 인간의 영혼을 구하는 성직자들도 육체의 병 앞에서 많이 약해지고 무너지는 모습을 볼 때가 종종 있다. 영과 육신이 모두 강건하고 함께 조화를 이룰 때 우리 삶은 더욱 빛나는 것 같다. 세 명의 환자는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소중한 것은 가까이에 있다
혜화동의 오래된 책방
어제부터 내린 눈이 캠퍼스를 아름답게 하얀색으로 장식하고 있다. 창밖 풍경에 눈이 자주 간다. 은백색의 눈이 곱게도 건물과 나뭇가지에 조용히 내려앉아 있다. 신년하례식도 하고 업무가 바쁘게 진행되니 또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다.
환자의 감사카드를 받다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뭉클해진다. 여러 가지로 힘들 텐데 나를 위해 마음을 다해 편지를 쓰고 정성이 가득 담긴 선물을 보내오면 혹여 이런 것까지 신경 쓰게 한 건 아닌지 미안할 따름이다.
글자로 이루어진 것은 그것이 카드든 책이든 감정의 교류가 일어 추억이 서리게 된다. 일종의 기억 창고가 되는 것 같다. 글씨체를 보면 대강 그 사람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는 말도 상당히 일리 있다. 올해는 처음으로 직접 적은 연하장 대신 병원에서 제공하는 전자우편서비스를 이용해 연하장을 보냈는데, 전자우편으로 답장을 받기도 했지만 아직도 카드에 직접 써 보내시는 분들이 있었다. 그분들의 부지런함과 정성에는 고개를 숙일 뿐이다.
오래전이지만 미국에서 노숙자를 지원하기 위해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인문학 강의를 해주는 시도를 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 기사에서 주목할 점은 강의를 들은 노숙자의 자활이 다른 경우에 비해 빠르게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이 연구를 진행한 교수에 의하면 노숙자의 자신감을 찾아준 것이 바로 인문학의 힘이라고 했다.
최근 한 일간지에는 전문직 종사자와 기업의 임원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강의와 그들의 독후감을 소개한 기사가 실렸다. 그들의 글에는 자신을 돌아보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일련의 과정과 각오가 그려져 있었다. 인간의 가치탐구와 표현활동을 추구하는 학문인 인문학은 독서를 통하지 않고서는 안 된다.
며칠 전 K대학의 교수가 서점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글을 읽고 크게 공감했다. 나 또한 대학 앞에 자리했던 옛 서점이 식당으로 바뀐 것을 보고 애틋한 회상에 젖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초등학교 시절 친구 집에서 책을 빌려 읽고 다시 돌려주었던 기억 또한 새록새록 떠오른다. 아마도 《셜록 홈즈》나 《괴도신사 아르센뤼팽》 같은 책이었던 것 같다. 집 근처에 헌책방도 있어서 자주 들러 싼값으로 책을 빌려서 읽고 다시 갖다 주었던 기억도 난다. 그때 눈물을 훔치며 읽었던 최요안 작가의 《억만이의 미소》라는 책이 아직도 선명하다. 아마도 그 헌책방은 문을 닫았을 것이다. 더 어릴 때 기억으로는 에드몬도 데 아미치스의 《사랑의 학교》라는 책을 아버지께 선물로 받은 게 생각난다. 여동생은 중학교 때 아버지께 선물로 받은 소설 《레미제라블》을 지금까지도 보물처럼 고이 간직하고 있다.
나 역시 교수실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오래된 책 두 권이 있다. 하나는 영어로 된 구약성경인데 대학에 입학하고 생일선물로 종로서적에서 어머님이 사주신 책이다. 지금은 문을 닫은 지 오래지만, 내가 학생 때는 이곳이 많은 종류의 책을 한곳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또 하나는 본과에 들어가기 전 값비싼 원서에 쓰는 돈을 아끼고자 청계천을 돌아다녀서 구입한 중고 영문해부학 책이다. 지금도 무료할 때면 한번씩 이 책들을 펼쳐본다. 새까맣게 줄이 쳐 있는 걸 보면 당시 꽤 열심히 공부한 모양이다.
혜화동 로터리에는 동양서림이라는 오래된 책방이 있다. 어쩌다 그곳을 지나갈 때면 꼭 한 번씩은 쳐다보게 된다. 중학교에 입학할 때 어머니와 함께 영어사전을 처음 샀던 곳이다. 그 사전은 잃어버렸지만 지금도 그 시절 사전을 손에 넣고 기뻐하며 설레던 추억이 생각나서 미소 짓게 된다. 다행히 동양서림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어서 주인에게 감사하고 싶다.
요즘은 직접 글을 쓰는 일이나 책을 읽는 기회가 적어지다보니 그나마 몇 안 되는 서점이 모두 폐업해 우리 곁을 떠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책 한 권에 담긴 소중한 추억, 문화의 향기와 그 힘, 책을 읽으면서 얻는 정신적인 고양들이 이제 어디서 나올 수 있을까. 신촌 로터리의 하나 남은 오래된 서점이 존폐위기에 놓였다고 하는데 정말 서글픈 일이다. 이제 학생들은 돈이 생겨도 더는 책을 사지 않는다고 한다.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해도 인간본성을 탐구하고,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지혜의 바탕이 되는 것은 독서라고 생각한다. 그런 바탕이 없으면 다른 지식들도 결국에는 사상누각이 될 것이 분명하다.
새로운 한 해가 밝았다. 올 한 해는 각자 쌓아두었던 책을 다시 한 번 꺼내 읽어보길 바란다. 그중에 같이 나누고 싶은 책이 있다면 지인들에게 선물해도 좋을 것 같다. 그것이 우리 곁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동네책방을 살리고 우리 삶에 활력을 더하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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