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백영옥
ǻ
아르테(arte)
   
16000
2016�� 07��



■ 책 소개

 

삶의 한가운데, 기대를 잊고 실망에 지쳐가는 우리에게,
웃음과 위로를 찾아주는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 초록지붕 집의 꿈 많은 수다쟁이 소녀, 앤 셜리, ’주근깨 빼빼머리 빨강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언제 들어도 가슴 뛰는 노래의 주인공, ‘빨강머리 앤’이 소설가 백영옥과 함께 돌아왔다.

 

신작을 발표할 때마다 많은 독자들에게 큰 호응을 받고 있는 작가 백영옥에게도 빨강머리 앤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소설 속 앤이 아니라 지브리 애니메이션 속의 ‘빨강머리 앤’이었다. 작은 기쁨부터 큰 슬픔까지, 소녀시절을 수놓는 마음들을 쉴 새 없이 나누었던 앤과의 추억, 그리고 인생의 가장 힘겨웠던 고비마다 뜻밖의 위안과 웃음과 눈물을 선물한 앤의 이야기들을 이제부터 어른으로의 삶을 헤쳐가야 할, 일과 연애와 꿈의 좌절에 끊임없이 맞닥뜨려야 할 날들을 다독이는 격려의 말로 되살려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터무니없을 만큼 희망에 차 있던 앤을, 그 시절 마음에 깊이 새겼던 앤의 모습들과 함께 추억하는 일은, 우리가 한 번뿐인 삶을 사는 동안 가장 소중한 때를 놓치지 않고, 어쩌면 바로 지금쯤 돌아보아야 할 따뜻한 이야기들을 모아보는 일이다.

 

■ 저자 백영옥
서울에서 태어났다. ‘빨강머리 앤’과 ‘키다리 아저씨’를 좋아하는 유년기를 보냈다. 2006년 단편소설 「고양이 샨티」로 문학동네 신인상을, 첫 장편소설 『스타일』로 제4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 고생 끝에 오는 건 ‘낙’ 아닌 ‘병’이라 믿으며, 목적 없이 시내버스를 타고 낯선 서울 변두리를 배회하는 취미가 있다. 2007년 트렌드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담은『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를 시작으로, 2012년에는 젊은 날의 방황과 실패의 순간을 다룬 에세이『곧, 어른의 시간이 시작된다』, 2014년에는 통념을 깨며 색다른 인생을 실현하는 남성 명사들을 인터뷰한『다른 남자』를 펴냈다. 김혜수 주연의 드라마로도 방영된 소설『스타일』은 중국, 일본, 태국, 베트남 등 4개 국어로 번역 출간돼 화제를 모았다. 그 밖에『다이어트의 여왕』,『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모임』,『애인의 애인에게』등 도시 남녀의 욕망과 사랑의 외로움을 그린 소설들을 발표했다. 소설집으로는『아주 보통의 연애』가 있다. 조선일보 ‘그 작품 그 도시’, 경향신문 ‘백영옥이 만난 색다른 아저씨’, 중앙SUNDAY S매거진 ‘심야극장’, 매일경제 ‘백영옥의 패스포트’ 등 신문에 다양한 칼럼을 연재했으며, 한겨레21, 보그, 에스콰이어 등 다양한 잡지에도 책과 영화 문화에 대한 폭넓은 글을 발표하고 있다. tvN 〈비밀독서단〉, MBC FM4U 라디오 〈푸른 밤, 종현입니다〉에 게스트로, 교보문고 북뉴스 〈백영옥의 낭독〉에 진행자로 출연하며 탐독가로서 좋은 책을 소개하고 낭독하는 일에도 몰두하고 있다.

 

■ 차례
프롤로그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운 나의 앤에게

 

1장 우연을 기다리는 힘
절망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아주 특별한 능력
우연을 기다리는 힘
삶은 편도야, 앤
나와 포옹하는 법
더 이상 설레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그리스식 처방전
우리는 생각보다 불행에 강하다
마음을 물어보는 시간
아침이라는 리셋 버튼
‘아무래도 싫은 사람’ 패키지 투어
너는 꽃!

 

2장 고독을 좋아한다는 거짓말
고독을 좋아한다는 거짓말
고백의 여왕
사랑에 빠진다면
이빨가게 내 친구
우리는 전직 어린이였다
내 마음의 안전지대
어제의 카레
마릴라의 엄마 수업
사진에는 없는 사람, 아빠
여행이란 끝없이 집으로 되돌아오는 일

 

3장 슬픔 공부법
넌 내일도 실수를 저지를걸?
사람은 언제 위로 받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꿈을 이룬다는 것의 진짜 의미
지금 이별 때문에 울고 있다면……
내가 하고 있는 일
시간이 약이 아니다
마릴라가 이해되는 밤
슬픔 공부법
눈물을 멈출 수 있는 건 나 자신 뿐

 

4장 더 잘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철벽녀와 B형 남자가 만났을 때
사랑에 빠진 이유와 결별의 이유가 같을 때
더 잘 사랑할 수 있는 사람
19세기와 21세기 연애의 공통점
당신은 나를 사랑하면 안 됩니다?
실연 수당
아주 지루한 연애, 결혼!
앤에게 주는 주례사
사과할까요? 고백할까요?
침묵의 기술

 

5장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변한다
디지털 디톡스
안 되는 걸 하려니까 슬펐던 날
어른의 시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변한다
이제는 사라져가는 것들
열심히 노력했으나 진다는 것
잘 웃는 할머니로 늙는다는 것
어떻게 죽을 것인가
젊음을 삶의 맨 마지막에 놓을 수 있다면
한 번뿐인 인생이니까 더 깊게 빠져들자

 

에필로그
아직 너무 늦지 않았을 우리에게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우연을 기다리는 힘

우연을 기다리는 힘

누구에게나 빨강머리가 존재한다. 어떤 사람에게 그것은 평균 이하의 작은 키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겐 별 모양의 화상 자국일 수도, 어린 나이에 쓰게 된 두꺼운 난시 교정용 안경이나, 유난히 뚱뚱한 몸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콤플렉스라고 부른다. 하지만 콤플렉스가 외모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초록지붕 집의 매튜 커스버트의 빨강머리는 낯선 사람들, 특히 여자 앞에 서면 자꾸 작아지는 대인공포증이다. 그는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허둥지둥 숨기부터 하는 남자다.


내 어릴 적 빨강머리는 무엇이었을까. 닮지 않았으면 싶은 콤플렉스가 자식에게 유전됐을 때, 부모는 그걸 콕 집어 말할 때가 있다. 내 경우에는 아빠가 대학에만 가면 코수술을 시켜주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부터 코에 대한 콤플렉스가 생겼다. 그전까지는 나는 내 코가 납작한지도 몰랐다. 코가 납작하다고 생각하니 자꾸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생겼고, 코를 만지려고 하다 보니 손톱이 성가셔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내 경우, 안 좋은 버릇의 창세기는 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 집에는 철딱서니라고는 하나 없는 어린 삼촌들이 세 명이나 같이 살았는데, 그중 가장 콧대 높은 삼촌은 잠자는 내 코에 빨래집게를 꽂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사람을 보면 일단 코부터 쳐다보는 버릇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낮은 코는 내 유년 시절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자라면서 기이한 일이 생겼다. 신기하게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면서부터 조금씩 내 코가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여전히 내 코가 높은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어느 날부터 그냥 적당히 낮은 내 코를 인정하게 됐다. 심지어 제법 귀엽단 소리까지 들었다. 빨리 달리거나, 고개를 숙이고 오래 책을 읽으면 어김없이 낮은 코에 걸린 안경이 조금씩 밑으로 내려오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깨달았다. 누구도 내 코를 관심 있게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 말하자면 콤플렉스는 내 눈에만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었다.


그 옛날 언니가 울고 있는 내 등을 쓸어주며 "다 지나간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 뜻을 알지 못했다. 우연을 기다리는 힘, 시간을 견디는 힘, 열한 살 앤은 아직 이해하지 못했을 이야기다. 물론 내 코가 기적처럼 높아지지는 않았다. 제아무리 기다려도 앤의 빨강머리가 눈부신 금발머리가 될 리는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건 빨강머리가 싫어서 아줌마 몰래 검은색 염색약을 머리에 발랐던 앤이 온통 초록색으로 변한 머리카락을 본 후, 절규하듯 외치는 말이다.


"전 이제까지 빨강머리가 세상에서 최악이라고 생각했어요!"


머리카락이 초록색이 되고 나서야, 앤은 자신의 빨강머리가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다고 걸 깨닫는다. 시간이 우리에게 선물하는 건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똑같은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게 하는 힘 아닐까. 시간은 느리지만 결국 잎을 키우고, 꽃을 피우고, 나무를 자라게 한다. 나는 그것이 시간이 하는 일이라 믿는다. 시간이이야말로 우리의 강퍅한 마음을 조금씩 너그럽고 상냥하게 키운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거울을 보며 어느 날 당신도 이렇게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아! 정말 좋다! 까지는 아니어도,


그럭저럭,

이 정도도,

나쁘지 않아......



고독을 좋아한다는 거짓말

사진에는 없는 사람, 아빠

가끔 내 삶이 각박하고 지루해진 이유가 노트북을 사용하면서 더 이상 극장에 가지 않고, 레코드 가게에 들르지 않고, 점점 서점에 가지 않으면서부터 아닐까란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윤미네 집』을 찾아봤다. 삐삐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의 오래된 사진집이다. 『윤미네 집』의 초판은 겨우 천 부 정도를 인쇄했다. 아마추어 사진가의 작품이었던 이 사진집은 당시 사진을 전공하던 남자친구가 처음 보여주었다. 그 덕분에 나는 사진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때부터 열화당 사진문고도 사 모으기 시작했다.


1997년 가을, 교보문고에 비스듬히 주저앉아 처음으로, 듀안 마이클의 사진과 최민식의 다큐멘터리 사진집을 들여다보던 기억이 난다. 사진을 전공하던 그는 사진의 힘은 정직한 시간에서 나온다고 말했었다. 요즘처럼 너나 할 것 없이 사진을 찍는 시대엔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윤미 태어나서 시집가던 날까지라는 부제가 붙은 『윤미네 집』은 아버지의 눈으로 찍어낸 딸의 기록이다. 그 아름다운 성장의 기록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를 관통해 26년이나 지속된다. 아버지와 딸이 아니었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시간들이 이 사진집에 봉인되어 있다.


토목공학자로 경부고속도로를 만드는 현장에서 일했던 고 전몽각, 장가 안 간다고 주위에서 어지간히 면박 받던 한 청년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어려운 시절을 살아내며, 아이를 키우는 일련의 과정들... 윤미네 식구가 손톱만 한 타일이 깔려 있던 옛날식 부엌에 앉아 오순도순 밥을 먹는 모습, 어린 윤미가 뭔가 서러워 커다란 눈에 그렁그렁 눈물방울을 매달고 우는 모습, 초등학생이 된 윤미가 학교에서 상을 받고 으쓱이던 모습, 윤미의 입학식, 윤미의 졸업식, 아름답게 성장한 그녀의 결혼식까지......


아빠의 시선이 담긴 딸의 사진 속에는 옛 기억들이 띄엄띄엄 담겨 있다. 그 느릿한 시간의 간격들은 이 책의 맥박처럼 아주 천천히 뛴다. 지금처럼 사진이 넘쳐나고, 너무 많은 현재의 순간이 전시된 소셜 네트워크에서는 보기 힘든 기적 같은 호흡이다. 감정이 메마르고 가족이 그리워지는 밤이라면 나는 이 사진집을 처방전으로 써주고 싶다.


『윤미네 집』를 펼쳐보다가 나는 매튜 아저씨를 떠올렸다. 지금 시대였다면, 매튜 역시 앤의 성장을 사진으로 기록했을 거다. 앤이 처음 초록지붕 집에 오고, 앤이 자라나 시를 낭송하고, 마릴라를 도와 빵을 굽고, 섬 전체에서 1등을 하고, 대학을 가고, 사랑에 빠진 그 모든 것들을 빠짐없이 자신의 눈 속에 기록하고 싶었을 것이다.


훗날 앤은 그 사진을 보며 매튜를 추억하고,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토록 많은 사진들 속에 정작 매튜 자신의 얼굴은 없다는 걸. 그녀는 어느 가을밤의 나처럼 문득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란 어쩌면 그런 존재가 아닐까. 자신이 평생 찍은 아이들의 사진 속에, 정작 자신은 등장하지 못하는 사람.



슬픔 공부법

꿈을 이룬다는 것의 진짜 의미

앤은 대학 진학을 원했기 때문에 아저씨와 아줌마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 스스로 결정한 것이다. 다이애나는 대학 진학 대신 고향에 남는다. 앤이 원한 것은 독립된 직업이고, 다이애나가 원한 건 결혼이다. 중고등학교나 대학교 강연에 가면 꼭 나오는 질문이 있다. 저는 연기를 하고 싶은데 부모님은 의대에 가길 원해요. 사실 이 질문의 카테고리에는 이상과 현실이 있다.


K는 뉴욕의 사진학교를 졸업한 후, 라이언 맥긴리 같은 스타 사진가를 소망했다. 하지만 그의 진짜 직업은 한인 매춘 사이트에 들어가는 여자들의 포르노 사진을 찍는 일이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찍기 위해 포토숍 창이 열린 컴퓨터 앞에서 하루종일 여자들의 허리를 깎고 엉덩이와 가슴을 확대한다. G역시 뉴욕에서 설치미술을 전공했지만 낮에는 청소업체에서 일한다. C는 이미 세 권의 책을 낸 소설가지만 낮에 찜질방의 카운터에서 일한다. 그는 유수의 문학상을 받았지만 여전히 생활고에 시달린다.


꿈과 현실. 그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나는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우리의 삶이 두부를 자르듯 명확히 잘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살면서 어떤 종류의 고통을 참을 것인가. 그것을 결정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


가령 좋은 글을 쓰겠다는 건 매일 원고지를 채우겠다는 의미다. 작가가 된다는 것의 진짜 의미는 하루 10시간 이상 앉아서 글을 써야 한다는 걸 뜻한다. 글을 쓰느라 생긴 손목터널증후군, 허리디스크, 좌골 신경통을 직업병으로 달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편집자의 원고 독촉 전화와 오타와 비문을 지적하는 독자들, 출판 계약이 뜻대로 되지 않아 생기는 굴욕과 궁핍한 생활을 견디는 것 역시 포함된다.


내가 아는 작가 중, 두 가지 이상의 직업을 가진 작가는 셀 수 없이 많다. 전업작가의 길은 멀고도 험해서, 작가면서 마트 직원이거나 경비원이거나, 학원 강사이며 방과 후 글짓기 선생님이 태반이다. 가수가 되거나 화가가 되겠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연습과 가난해져도 꿈을 버리지 않겠다는 심정적 결단을 뜻한다.


무엇을 원한다는 건 그것에 따른 고통도 함께 원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꿈을 이루기 위한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모델 같은 몸매를 위해 흘렸던 땀과 허기는 마침내 거울 속의 모습으로 보상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스러웠던 다이어트를 다시 한 번 더 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 역시 글을 읽은 후 보내는 독자들의 따뜻한 메일이나 격려로 그 힘든 마감을 매번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꿈을 이룬다는 건 그런 뜻이다. 앤은 원하는 직업을 얻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사랑하는 아줌마, 아저씨와 익숙했던 고향을 떠나는 슬픔을 겪을 것이다. 다이애나는 좋은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연애의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선택할 때 망설이는 이유는 그 결정으로 지불해야 하는 몫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의 결과가 지금의 우리이며, 그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내 몫이다. 소설가 김훈이 말했다.


"물고기가 낚시 바늘을 물지 않고 낚싯밥을 먹을 수는 없다."


모든 선택은 위험한 것이다. 그것이 선택의 본질이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



더 잘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아주 지루한 연애, 결혼!

나처럼 연애소설을 다섯 권쯤 쓰면 사람들이 종종 와서 묻는다. "연애는 어떻게 해야 잘해요? 결혼과 연애는 뭐가 달라요? 결혼은 어떤 사람과 해야 하는 거죠?" 모르겠다. 사실 연애도 결혼도 살면 살수록 더 모르겠다는 말이 정확하다. 하지만 굳이 둘 다를 말해야 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결혼도 연애다. 아주아주 지루한 연애다. 우린 삶의 지루함을 즐겨야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점점 더 누군가의 사랑에 대해 판단할 수 없어졌다. 실제 연애에 대해 누가 물어도, 듣기만 할 뿐, 쉽게 충고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내 관계의 실패 목록이 백과사전만큼이나 두툼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이든 분석하고 논평하고 기록하는 것에 열성인 내 오랜 습관은 버릴 수가 없다. 어쩌면 고치지 못한 악습 덕분에 겨우 작가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소설을 잘 쓰는 법에 대해선 거의 모른다. 하루키처럼 직업인으로서 소설가가 되는 일에 대해 쓸 가능성도 지금으로선 별로 없다. 하지만 10년 동안 꾸준히 소설을 쓰면서 소설, 이렇게 쓰면 망한다!에 대해선 어느 정도의 식견을 가지게 되었다. 작가라면 한번쯤 불후의 명작을 꿈꾸지만, 나는 그런 걸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쓰는 사람의 입장에선 나는 언제나 조금 덜 실패하는 사람을 지향했던 것 같다. 어떨 때는 스스로 좀 한심하지만, 그런 마음으로 여기까지 그럭저럭 견디며 왔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세상 그 어떤 연애도, 연애를 하지 않는 쪽보다는 더 낫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실패에서 배운다(카슨 매컬러스의 소설 『슬픈 카페의 노래』의 주인공 아밀리아처럼 너무나 상심해 도저히 회복 불가능의 상태로 빠지는 경우도 있지만, 일단 그건 논외로 하자). 그러나 내쪽에선 (만약 딸이 있다면!) 하지 말았으면 하는 연애가 있다. 그게 린드 아주머니의 말이나 앤의 친구들 말처럼 상대 어머니의 종교와 아버지의 정당이 불일치하는 남자를 만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나는 어릴 적 한 남자를 만나, 그 남자만 바라보며 일평생을 사는 연애만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든 연애가 첫사랑의 변주로 진행되는 연애 말이다. 한 남자를 통해 우주를 느끼고, 한 여자를 통해 인류의 보편성을 보게 되는 위대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인간은 다양한 실패를 통해서 성숙한다고 믿는다. 연애 역시 마찬가지다.


앤은 길버트 브라이스라는 학교 친구와 한 평생 관계를 이어나간다. 하지만 그건 한 마을에서 태어나 그 마을에서 일하고, 마을 밖으로 나가는 일은 한평생 일어나지 않는 그 시절의 이상적인 사랑법이라 믿고 싶다. 앤이 유학을 가고 해외 취업을 하는 21세기에 태어났다면, 그녀는 길버트 이외에 최소한 다섯 명 이상의 남자와 데이트했을 것이다. 아니라고? 앤은 그랬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그 시절, 내 친구처럼 나는 앤을 위해 몇 명의 남자 리스트를 업데이트할 거다. 많은 남자를 만난다고 좋은 남자를 만날 가능성이 높아지는 건 아니지만 나로선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있다. 마릴라의 입장에서 말하면, 나는 내 아이에게 실패할 기회를, 그래서 그것을 가슴에 새길 기회를 주고 싶은 것이다 아이에게 실패에서 배울 기회를 조금도 주지 않는 부모만큼 잘못된 사랑은 없다고 믿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제아무리 불이 뜨겁다고 말한들, 직접 손을 데어본 적 없는 사람에게 불은 그냥 불일 뿐이다. 설혹 그때 운이 좋아 불을 피한다고 해도, 언젠가 그 불은 자식의 손에 치명적인 화상을 남길 재앙이 된다. 차라리 어릴 때 겪는 편이 낫다. 훨씬 더 낫다. 10대와 20대의 실패는 실수일 뿐이다. 정말이다. 그러니까 연애하라. 그냥 사랑하게 놔둬라. 우리 엄마 식으로 말하면 헤어질 사람들은 지들이 다 알아서 헤어진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변한다

열심히 노력했으나 진다는 것

간절함과 노력이 제대로 된 결과를 만들 것이란 기대는 어른들의 오랜 동화였다. 그것이 인간이 고집스러울 정도로 지켜낸 믿음이 아니었다면, 『연금술사』나 『시크릿』 같은 책이 전 세계적으로 그렇게 많이 팔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짐작과 다른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난다. 원인과 결과는 대부분 퍼즐처럼 맞춰지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꿈과 희망은 언제나 인기 검색어 1위. 스테디셀러처럼 잘 팔리는 단어였다. 하지만 예술 장르인 사진의 예를 들어봐도,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포토리뷰와 어워드, 페스티벌의 대다수는 예술가를 꿈꾸는 사람들이 내는 적지 않은 액수의 참가비로 운영된다. 가수가 되거나 연기자를 바라는 아이들의 꿈 너머에는 수많은 보컬 학원과 연기 학원들이 있다. 바리스타 학원, 항공 승무원 학원, 미술학원...... 꿈꾸는 청춘들 뒤에는 늘 그들의 꿈과 열정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앎을 공부로 공부를 다시 교육으로 바꾸면 벌어지는 일이다.


누군가의 꿈이 다른 누군가의 밥벌이가 되는 구조. 어른이 되며 내가 목격한 꿈은 그렇게 퇴색되어갔다. 적어도 그것이 꿈=직업이란 의미를 갖게 되는 순간 더욱 그랬다. 그러니까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자기희생을 포장하는 건 분명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소설 등단을 포기했다는 L의 말을 듣다가, 이런 말을 한 건지도 모른다.


재능은 균등히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기회는 우연에 의지할 것이다.

꿈이 악몽이 되는 건 한순간일 것이다.

간절하면 할수록 악몽의 내용은 더 끔찍해질 것이다.

예술은 불공정과 불공평의 세계이다.


중요한 건 어쩌면 노력하면 다 이루어진다!와 어차피 안 될 거니까 노력하지 마라 사이에 있는 말들이 아닐까. 꿈은 이루어진다!와 꿈은 꾸라고 있는 거지 이루라고 있는 게 아니다! 사이의 말이 아닐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 인간은 죽는다 정도가 아닐까.


한때 나는 노력이 의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늘 내 노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때마다 의지박약이라는 말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하지만 이젠 노력이 일종의 재능이라는 걸 안다. 노력은 의지가 아니다. 노력이야말로 어떤 면에서 타고난 재능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특별한 재능 말이다. 하지만 성공하기 위해 대체 얼마만큼의 노력이 필요한 걸까. 왜 이 세계의 멘토들은 그래서 죽도록 노력해 봤냐?라는 질문을 젊은이들에게 함부로 던지는 것일까. 제아무리 애쓰고 노력했는데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왜 말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은 노력 이후의 삶이다.


이렇게 말하는 게 가능하다면, 노력해서 가장 좋은 건 이기는 게 아니다. 노력해서 가장 좋은 건 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앤이 살았던 세상과 비교할 수 없이 빠르다. 미래학자들은 20년 안에 현존하는 직업의 48퍼센트가 사라질 것이라 예상한다. 나는 이토록 빠르게 변하고 불안정한 세상에서는 지속 가능한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살면서 언제나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이긴다는 건 지속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젠 이기는 법이 아니라, 지지 않는 법에 대해 익혀야 한다. 더 나아가 지는 법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나는 언제나 지는 법에 대해 알려주는 학문이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다. 마치 유도를 배울 때, 가장 먼저 익히는 게 낙법인 것처럼 지는 법, 잃는 법을 익힌다면 세상을 사는 데 확실히 도움을 줄 거라고 말이다.


앤이 말한 노력해서 두 번째로 좋은 게 지는 것이라는 말의 방점은 노력에 있지 지는 것에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앤의 말 속에는 세상에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게 있다는 걸 명확히 이해하는 사람 특유의 체념이 있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랑은 어떤가. 학 천만 마리를 접는다한들, 내게 무관심한 사람들 나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기는 힘들다. 그러니 막연한 환상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을 선택하는 편이 옳다. 실패도 잘해야 다음 성공의 초석이 될 수 있다. 지는 것 역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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