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소설로 되살아난 무소유의 삶과 아름다운 마무리
영혼이 스승이 우리에게 주고 간 감동의 가르침
"그분은 일상이 바로 선(禪)이었다." 그를 곁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들은 말한다. 말과 글과 삶이 하나로 일치했던 사람. 글보다 삶의 모습이 더 아름다웠던 사람. 2016년 올해로 입적한 지 꼭 6년째 되는 법정 스님 얘기다. 입적 당시 유언으로 당신이 세상에 내놓은 책들마저 모두 거두어 가신 분. 그런 가운데 법정 스님의 삶과 구도의 여정을 그려낸 한 권의 소설이 출간되었다.
백금남 작가는 법정 스님이 입적하기 5년 전부터 그의 일대기를 쓰기 시작해, 끈질긴 추적 끝에 스님의 초기작 23편을 발굴하는 데 성공했다. 이 소설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초기작들은 1963~69년 「대한불교」 신문에 법정 스님이 직접 기고한 글들이다. 워낙 초기작이어서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다가 이 소설을 통해 비로소 온전한 작품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소설에는 법정 스님의 시 12편, 불교설화 7편, 칼럼 4편이 실려 있다. 당시의 시편을 통해서 문학에 대한 열망과 산중 수행자의 고독한 내면을 엿볼 수 있으며, 부처님 전상서 등의 칼럼을 통해서는 불교계에 개혁과 성찰을 촉구하며 직설을 던지는 젊은 수행자의 결기를 읽을 수 있다.
■ 저자 백금남
저자 백금남은 한국 최고의 불교 소설가. 1985년 삼성문학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중편소설 『등대에 불 밝히기』로 KBS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장편소설 『십우도』와 『탄트라』가 잇따라 히트하면서 1990년대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 작가 중 한 명이 되었다. 2003년에는 『티베트의 영혼 파드마삼바바』로 민음사 제정 올해의 논픽션상을 수상했다. 2013년 대종상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영화 <관상>의 원작 소설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계속해서 그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궁합>과 <명당>이 영화화되고 있으며, 최근에 유마거사의 일생을 그린 장편소설 『유마』를 출간했다.
■ 차례
작가의 말
프롤로그
1장 영혼이 영글 무렵
이상한 다비식 | 원고지와의 인연 | 출가 | 스승 효봉 | 무소유 내력 | 네 손으로 태워라 | 탑전에서 | 문득 한번 웃고 머리를 돌려 서니 | 도반 | 벗의 죽음 | 데뷔 무렵
2장 무소유의 길
무라, 무라, 무라! | 현실 속으로 | 누구야, 이 작자? | 불일암 | 진정한 무소유 | 함석헌과 등불 | 거울 사연 | 스님, 한 말씀만 해주세요 | 초콜릿 하나 드릴까? | 수녀의 출가 | 너의 발을 씻어주마
3장 불 속의 꽃이 되어
인과 | 어머니 | 미소 지으며 가노라 | 자야의 사랑 | 텅 빈 충만 | 수류산방 | 연못에 연꽃이 없더라 | 해탈의 해방구 | 연꽃, 드디어 피다 | 정년이 없다 | 올챙이의 항변 | 병마 | 이제 돌아가노라 | 세상과의 이별 | 불 속에 피는 꽃
에필로그
법정 스님 행장
법정 스님 미출간 원고 목록
소설 법정: 바람 불면 다시 오리라
1장 영혼이 영글 무렵
원고지와의 인연
"날이 새면 읍내 시장에 재철이 데리고 다녀오마."
재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로도 넓고 자동차도 많이 다니고, 집들도 크고 사람들도 북적거리고, 거리마다 불긋불긋 꽃처럼 핀 간판들…. 시장통으로 접어들어 할머니가 데려간 곳은 옷 파는 가게였다. 할머니는 그곳에서 재철에게 옷을 사주었다.
옷을 사면 경품도 있다고 했다. 1등을 뽑으면 사발시계를 준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뽑은 것은 사발시계가 아닌 원고지 한 묶음이었다. 그때 재철은 몰랐었다. 자신이 평생 그 원고지를 마주하고 살 줄은. 재철은 학교에 갈 때 언제나 책 보따리에 원고지를 넣어 다녔다. 작문 시간에 그 원고지에 글을 쓰는 게 그의 자랑이었다. 선생님도 재철이 글 쓰는 재주가 있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우수영초등학교를 25회로 졸업하고 6년제 목포상업중학교에 들어갔는데, 교육제도에 따라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되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목포상고에 진학하게 되었다. 1950년 학제 개편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분리되었다. 그에 따라 목포상과 초급대학으로 승격되었는데, 상업학교 4학년을 마치자 초급대학으로 자연스럽게 진학이 되었다.
당시 목포에는 노적봉 아래 정혜원이라고 하는 포교당이 있었다. 그곳 원장님이 서웅 스님이라는 분이었다. 그때까지도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본 사리 채취 장면이 잊히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아버지만 생각하면 불 속의 스님이 생각났고, 그럼 불 속의 스님이 아버지가 되어 타고 있었다. 분명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법이다 싶었고, 인연이 이러니저러니 떠들어대다 보니 불교학생회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기회가 되면 원장인 서웅 스님에게 어릴 때 본 사리에 대해 질문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불교학생회 총무 일까지 맡게 되었다.
정혜원 잡무 일도 전쟁이 나면서 끊겼다. 동족끼리 죽이고 죽는 전쟁은 꿈이 아니었다. 죽고 죽이는 살육이 끝없이 자행되었다. 1953년 7월 27일에 휴전 협정이 조인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시국은 어지러웠다.
재철은 보았다. 한 핏줄, 같은 이웃끼리 계속해서 총부리를 마주대고 미쳐 날뛰는 모습들을. 재철은 죽고 죽이는 그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과 마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상과 이념이 무엇이기에 같은 형제와 겨레끼리 물고 뜯으며 피를 흘려야하는지,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쟁으로 자라난 인생에 대한 회의. 결연히 일어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철은 점차 결심을 굳혔다. 출가出家였다. 출가하지 않고는 책 도둑질이나 하며 살 것 같다는 절망감이 계속 그를 사로잡았다. 이 세상과의 이별이었다. 아니, 이별이 아니라 세상을 제대로 알기 위해 떠나야 할 길이었다. 가방도 없었다. 그저 보따리에 주섬주섬 쌌다. 출가를 결심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책을 싸고 있었다. 책을 가져갈 수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때 재철은 몰랐다. 그 책을 지고 산에 들어가봐야 시시하고 별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스승 효봉
그길로 재철은 고등학교 때 다니던 정혜원으로 갔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서울행 밤기차를 탔다. 서울역에 내린 그는 곧바로 봉익동 대각사로 갔다. 그를 본 스님이 빙그레 웃었다.
"아주 올라온 것입니까?"
"오대산으로 가려고 합니다. 한암 큰스님이 거기 계신다고 해서…."
"아직 모르시는군요. 한암 큰스님, 1951년 3월에 입적하셨습니다."
뒤늦게 "아!"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낭패다 하는 생각이 재철의 머릿속으로 흘러갔다. 잠시 생각에 잠겼는데, 스님이 말을 이었다.
"혹시 효봉 큰스님을 아십니까?"
"알지요. 만나 뵙진 못했지만, 판사를 하다 스님이 되셨다는?"
"그렇습니다. 그 큰스님이 마침 선학원에 주석하고 계십니다. 그분에게 한번 가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재철은 그길로 안국동에 있는 선학원으로 갔다. 그가 들어서자 지객 스님이 나왔다. 그는 뒤이어 재철에게 잠시 기다리라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솔직히 선학원으로 가보라는 스님의 말을 들었을 때 효봉 큰스님이 주석하고 있다고는 했지만 학원이란 말이 마음에 걸렸다. 사寺나 암庵 등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학원이 뭔가 싶었다. 그런데 스님이 고개를 내저었다.
"다 그만한 사연이 있습니다. 선학원이라 명명한 것은 모든 절과 암자가 왜놈들의 사찰령과 사법寺法의 직간접적인 사찰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무슨 행사를 해도 허락을 받아야 하는 마당이고 동산이나 부동산의 변동 사항까지 사찰을 받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사나 암이란 명칭을 사용하지 않은 겁니다. 전국 선원의 중심이니 그리로 가십시오. 한때 나도 그곳에서 한국 선불교의 대맥인 경허선사의 법을 이어받은 만공 스님을 모시기도 했으니까요."
만공 스님이 누구인가. 근대 불교 선종의 큰 스승 경허선사의 상수제자가 아닌가. 그리고 효봉 스님이라면 바로 그 만공 스님으로부터 선맥을 이은 사람이다.
주지는 재철에게 잠시 앉아 있으라 하고 나가더니 잠시 후 두 스님과 함께 들어왔다. 가사와 장삼을 수하고 그들은 재철의 머리를 깎았다. 그것을 보자 갑자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느닷없이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생하며 아들을 공부시키려고 노력하던 어머니. 그 노랫가락 소리.
머리를 감고 먹물 옷으로 갈아입은 뒤 늙은 스님께 인사를 드렸다. 늙은 승이 지필묵을 당기더니 흰 화선지에 무슨 글인가를 썼다. 재철이 내려다보니 法頂이란 글자였다.
"네 법명이니라. 세상 만물의 이치가 부처의 법에 있나니 그 정수리를 틀어쥔다면 바로 부처가 될 수 있으리라."
재철은 낮게 부르짖었다. 기분이 훨훨 날아갈 듯했다. 어느 사이에 가슴을 뜨겁게 하던 어머니의 모습은 눈가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2장 무소유의 길
현실 속으로
효봉 스님이 가시고 1년 후인 1967년, 법정은 새롭게 시작한다는 각오로 동국역경원 개설에 참여했다. 부처님의 말씀을 빨래판으로 두지 않으려면 어려운 한자투성이의 글을 어쩌든지 쉬운 언어로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법정은 역경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계속 글을 썼다. 타악기를 두드리듯 그동안 잊고 있던 시어가 터져 나왔다. 이상한 현상이었다. 축복처럼 머릿속에서 마구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산머리 머리마다 왜 그렇게 영롱해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나같이 그 모습이 장엄해 보였다. 이상스런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었다. 어느 날 경계 없는 마음이란 말이 입속에 씹혔다. 경계가 없으면 마음도 저절로 멸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 마음이 멸하면 경계가 없어지는 것인가? 도대체 저놈의 실상을 경계 없이 어떻게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어느 날 성철 스님에게 물었다.
"도가 뭡니까?"
"산은 산, 물은 물."
참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누가 모를까. 그런데 그 경지가 예사롭지 않다. 역설도 아닌데 역설 같다는 생각이 뭣 때문에 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사실 산을 처음 볼 때는 그저 산이다. 그러니까 산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이르면 비로소 보인다. 숲은 숲대로, 골짜기는 골짜기대로, 푸른 것은 푸른 대로, 붉은 것은 붉은 대로. 그러다가 법정은 본래라는 생각을 했다.
본래 뭐가 붉다는 것이야? 어디가 푸르다는 것이야? 색맹에게 저 붉은 것이 푸르게 보일 수가 있다면 우리 눈이 보는 것은 가상이다. 내가 붉다거나 푸르다거나 하는 것은 마음이 그렇게 볼 뿐이다.
그제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아하, 봄이 와도 봄이 오는 걸 보지 못하는구나. 여름이 가도 여름이 가는 걸 보지 못하는구나. 그저 오는가 보다, 가는가 보다 그러고만 있구나. 겨울이 가면 솜옷은 벗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솜옷을 입고 있다. 벗어던져야 하는데 벗어던지지 못하니 계절을 깨치지 못한다. 그게 미망인가? 아아, 내 마음의 봄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여전히 겨울이다. 나는 저 산을 마음으로 보지 못하고 거짓말쟁이 눈에 내 모든 것을 맡겨놓고 있다. 그러니 봄이 와도 봄을 모른다. 내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니 바로 보일 리 없다. 그저 살아갈 뿐이다.
진정한 무소유
법정의 사색은 해가 갈수록 깊어졌다. 법정은 불일암에서 어떻게 대승심에 가득 찬 글을 써내며 중질을 할 것인가 고민했다. 참선과 글쓰기가 그의 일상이었다.
그는 자신의 자잘한 일상에서 모든 불행은 소유욕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소유하면 집착이 생기고, 그 집착은 그대로 업이 된다는 진리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자신의 마음속에 있고 일상 속에 있었다. 조금만 욕심을 부리면 그것이 불행의 씨앗이 되고 업이 되었다.
반면에 갖지 않으려는 대승심을 내다 보면 자유스러웠다. 욕심을 비워버리면 그렇게 자유스러울 수가 없었다. 무쇼유. 갖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꼭 필요한 것만 갖는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비워가는 마음에 자유라는 빛을 가득 채우는 것이다.
비로소 전환의 의미를 진정으로 알 것 같았다. 난을 정성 들여 기르다 보면 이것이 내 것이구나 싶고, 애착이 생기고, 자꾸 신경이 쓰여 그것에 얽혀들었다. 물을 주게 되고, 잎을 닦게 되고, 가치를 따지게 되었다. 어느 날 난 잎을 닦다가 내가 왜 이러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버려야겠구나. 때마침 아는 스님이 찾아왔다.
이게 웬 떡이냐는 듯이 스님이 난을 안고 가버렸다. 아끼던 것이라 법정은 아쉬운 마음에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아쉬웠다. 잠에서 깨어나도 난 있던 곳으로 시선이 갔다. 그런데 그 빈 마음속으로 가득 차오르는 게 있었다. 무소유의 빛이었다. 드디어 비어도 빈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욕심을 버렸다.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욕심내지 않았다. 소유하지 않으면 마음이 맑아진다는 입에 발린 소리를 하거나 글을 쓰던 때와는 달랐다. 소유하려다 보면 불행해진다고 막연히 외치던 때와는 달랐다. 이제야 자신의 일상에서 소유라는 개념을 무소유로 전환해가는 지혜를 얻고 있었다. 맑은 가난이 넘치는 부보다 못할 게 없었다. 아니, 훨씬 값지고 고귀했다.
무소유란 소극적인 생활 태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임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깨달았다. 만족함을 모른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임을 가슴으로 깨달았다. 우리 인생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어떤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 소유물이 아니라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일일 것이었다. 그러한 일상의 깨달음들이 무소유를 주장하던 그의 의식을 눈부시게 변모시켜갔다.
이제 법정은 앵무새처럼 무소유를 주장하던 옛날의 법정이 아니었다. 일상에서 머리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글을 쓰는 인간으로 변모했다. 그러니 그의 글은 자연히 쓰는 대로 좋은 평을 얻었다.
범우사라는 출판사에 박연구라는 이가 있었다. 수필을 쓰는 이였는데 범우사에서 기획을 담당했다. 어느 날 그가 무소유 원고를 보고 책으로 내면 어떨까 싶어 법정에게 연락을 해왔다.
1976년 4월, 『무소유』 책이 출간되었다. 그동안 써온 글을 가려 뽑아 묶은 수상집으로 문고판이었다. 문고판이 인기 있을 때였다. 고속도로가 생겨 멀리 여행하는 이들이 곧잘 문고판을 들고 다니며 읽었기 때문이다.
책이 나오고 인세가 주어졌다. 인세를 받은 법정은 그길로 장준하의 집으로 갔다. 법정은 합장을 한 다음 노란 봉투를 내밀었다. 범우사에서 받은 인세였다.
"딸애 시집보내는 데 보태십시오."
장준하의 아내가 손을 내저으며 사양했지만 법정은 이미 대문을 나서고 있었다. 장준하의 딸이 시댁 예물을 장만할 돈이 없어 애태우고 있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거울 사연
선원에서 거울을 바랑 속에 넣어 왔던 법정의 비밀이 밝혀진 것은 옛날 미래사에서 같이 수도하던 도반이 불일암을 찾으면서였다. 얼마 전 그 도반은 방송인 이계진이 진행하는 <11시에 만납시다>라는 프로그램에 법정이 출연한 것을 보았다. 이계진이 법정에게 물었다.
"스님, 산중에서 홀로 사신다던데 어떻게 머리는 깎으셨습니까?"
사실 불가에서 이런 질문은 금기 사항이었다. 중이 고기 맛을 보면 법당에 파리가 남아나지 않는다는 표현이나 다를 바 없는 질문이었다. 물론 이계진이 불교를 무시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원만한 진행을 하려다 보니 나온 질문이었다. 법정은 허허허 웃어 넘겼다.
방송이 나가고 얼마 후, 옛 도반은 법정이 있는 불일암을 찾았다. 그런데 방에 들어가 보니 선원에서 가져온 거울이 벽에 턱 하니 붙어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이 거울을 지금도 가지고 있소?"
"왜, 가지고 있으면 안 되오?"
오히려 법정이 되물었다. 왜 법정이 이 거울에 그렇게 집착하는 걸까, 생각하며 도반은 무심결에 거울을 뒤집어보았다. 거울 뒷면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했다.
처음 삭발한 날.
그 아래 연도와 달과 날까지 정확히 쓰여 있었다. 처음 삭발한 날의 그 모습이 얼마나 대견하고 아름다웠으면 그 거울을 가방에 넣어 왔겠는가, 하는 생각에 도반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밤 법정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내 마음이 해이해지면 그 거울을 꺼내 보곤 했다오. 그러면 머리를 깎을 때의 신심이 칼날처럼 일어나곤 했지요."
초발심. 그 초발심을 잊지 않으려 거울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타성이란 무서운 것이다. 혼자 살면 사람은 게을러지기 십상이다. 그러면 타성이란 놈이 꼬리를 치기 시작한다. 자주성을 잃고 게으름의 늪에 갇히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래서 법정은 조금만 게을러져도 그 거울을 꺼내 보았다. 그렇게 그때의 환희가 되살아나서 절망스런 현실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는 다시 머리를 깎고 승으로서의 자세를 잊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법정은 한 번도 자세를 흩뜨려본 적이 없었다. 늘 주위를 정갈히 했으며 스님답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가사나 장삼 하나를 입어도 풀을 먹이고 주름을 칼날같이 잡았다. 혼자 산다고 방만해지고 게을러지는 자신을 그 거울로 경계했다. 언제나 그 거울에 자신을 비춰 보며 스스로를 추스르고 있었다는 말이다.
3장 불 속의 꽃이 되어
미소 지으며 가노라
불일암에 안거 중이던 1985년 겨울 어느 날,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주위에서 어서 집에 다녀오라고 재촉했지만, 법정은 "안거 중이지 않은가"라는 말로 일축했다. 다음 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법정은 이미 돌아가신 분이 내가 간다고 살아 돌아오시겠느냐며 수행을 계속했다. 그는 속으로 울었다.
아, 이제는 내 생명의 뿌리가 꺾였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더욱 설움이 북받쳤다. 그럼에도 법정은 가지 않았다. 대신 사람을 보냈다. 비정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아니, 비정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중은 안거 중에 결코 선방을 비울 수 없는 법이었다.
안거에 들어가기 전, 어머니를 모시는 동생이 직장을 대전으로 옮겼다고 해서 마침 대전 가는 길에 잠시 뵈었는데, 그대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얼굴을 보니 많이 늙으신 것 같았다. 골 깊은 주름살이 세월의 연륜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니, 어머니가 겪어온 고난의 연륜을 말해주었다. 살이 뒤틀리고 뼈가 빠지도록 온갖 수모를 겪어가며 대학 공부까지 시켜놓은 아들이 산으로 들어가버렸을 때 그 마음이 오죽했으랴.
할머니는 손자를 그리워하다 돌아가셨고, 작은아버지에게 받아쓰던 생활비도 끊겼을 것이다.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원망했을 아들을 마침내 앞에 두고도 결코 원망을 내보이지 않던 어머니였다. 그것이 부모의 사랑이요 자비가 아닐까 싶었다. 사랑은 고통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원망이 고통을 넘어 사랑이 될 때 진정한 부처의 자비가 일어나는 것일까. 어머니는 아들을 아들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스님, 집안사람 중에 부처님을 믿고 머리 깎는 사람이 나오면 삼대가 구원받는다는디, 모다 구원해주소. 이제 다 살았는데 뭘 바라겄소. 부디 부처 되어 미련한 중생을 구해주소."
어머니는 아들에게 두 손을 모았다. 법정은 그 합장을 두 손으로 안았다. 어머니의 갈퀴 같은 손이 참 억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정의 손등 위로 어머니의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1986년에 『물소리 바람소리』란 수상집을 샘터사에서 냈다. 자연으로 돌아온 후 그 자연 속에서 살아보았지만 역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더라는 메시지가 담긴 글들이었다. 그렇기에 오늘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그 삶의 한때를 사랑하며 최선을 다해야 함을, 감성 어린 언어로 직조해냈다. 바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삶의 빛깔이요 무게라고 설파했다.
법정은 진정한 사유의 기쁨이 무엇인지 묻고,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들을 통해 종교의 본질과 삶의 질을 사유했다.
이제 돌아가노라
법정은 김수환 추기경을 보내고 4월에 다시 자리보전했다. 회복된 줄 알았던 병고가 재발한 것이다. 그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제자들이 오면 따뜻하게 묻곤 했다.
"밥은 먹고 다니냐?"
"꽃이 많이 피었지?"
2010년 3월. 그동안 제자들이 극진히 보살폈으나 이미 생명의 불은 꺼져가고 있었다. 그래도 좌중을 웃게 할 만큼 의식은 말짱했다. 입적하기 이틀 전인 3월 9일, 속가 가족들이 찾아왔다. 현장 스님의 속가 어머니(법정의 사촌 누이)와 법정이 출가한 사이 어머니를 지킨 정란이 온 것이다. 현장 스님은 전남 보성 대원사 주지로, 봉은사 다래헌에 머물 때 불일암을 짓던 법정을 시봉하다가 불일암 낙성식 날 송광사 방장이자 법정의 사형인 구산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았다. 법정과는 속가에서도 조카, 불가에서도 조카가 되어 1980년대 말부터 부처님을 그리면 부처가 된다는 사불선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사촌 누이와 정란은 법정의 손을 잡고 울었다. 어머니를 지키던 정란을 법정은 정다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고맙구나. 고마워. 이 세상에 내 부모 형제 아닌 인연이 어디 있으랴. 이제야 어머니의 큰마음을 알 것 같으니.
다음 날 법정은 마지막을 예감했는지 길상사로 가고 싶다고 했다. 제자들이 그를 길상사로 모셨다. 법정은 마지막으로 길상사를 돌아보면서 문득 산으로 오르겠다고 결심하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가 언제였던가. 인생을 회의하던 시절. 참혹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 앞에 마주 서지 않을 수 없었던 시절. 그림자만 보아도 왈칵 울음이 쏟아지던 그 시절. 그 시절이 그리워 어쩌다 산을 내려가기라도 할라치면 왜 그렇게 세상이 낯설어 보이던지.
법정은 눈을 감고 가만히 지나온 길을 떠올렸다. 이 세상의 나그네가 되어 살아온 세월들. 아아, 저기 세상을 비치는 달빛.
그는 손바닥을 들어 손가락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현장 스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마지막인데 열반송 한 소절 남길 수도 있는 것을. 한 점 티끌도 남기지 않으려는 극한의 길이 눈물겨워 그는 울었다. 울면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설법문이 어디 따로 있겠는가. 언젠가 법정은 말했다. 내가 말한 모든 것 그거 다 군더더기. 이제 꽃을 피웠으니 가야지. 바람 불어 그 꽃잎 져 다시 오려면.
현장 스님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법정은 환하게 쏟아지는 달빛을 보고 있었다. 잔잔한 애상이 가슴을 재우쳤다.
그래, 저 달빛 속으로 가자. 거기가 낙원일 것이다.
너무 오래 서 있었다. 그래, 나는 입석자立席者일지도 모른다. 언제였던가. 그 외롭던 밤들. 촛불마저 꺼버리고 달빛을 의지하고 앉았을 때 어둠을 밝히던 저 달빛. 그 달빛이 물었다.
왜 앉지 않고 서 있느냐고.
그럴 때마다 세상을 향해 서 있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두 눈 형형하게 뜨고 세상을 향해 꼿꼿하게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언젠가 썼던 시를 떠올리다가 눈을 감았다. 그래, 이 세상의 나그네가 되어 세상을 향해 서서 무엇을 했던가. 정녕 무엇을 했던가. 가자, 다시 오려면. 내가 피운 저 꽃잎들, 바람 불어 지면 그 꽃잎 피우기 위해 다시 오려면.
가만히 눈을 감고 지나온 세월을 떠올렸다. 문풍지를 흔들고 들어온 바람이 가슴속으로 길길이 밀려들어 송곳 같은 날을 세웠다. 통렬한 너의 반성 없이 어디로 도망치려 하느냐는 송곳날이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래, 저 저잣거리 사람들과 내가 무엇이 달랐을까. 내가 먹물 법복을 걸치고 그들을 중생으로 보았던가. 무엄이란 말이 입속에 씹혔다.
문득 아버지의 등에 업혀 어린 날 보았던 다비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항아리 속에서 영롱하게 빛나던 수행의 결정체. 그는 생각했다. 이제 그것마저도 놓아버려야 한다고. 그것이 참다운 열반의 길일 것이었다. 참다운 적멸.
그는 천천히 숨을 몰아쉬고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내 이제 가리니 장례식을 하지 마라. 평소 쓰던 대나무 평상 위에 내 몸을 올리고 다비하여라. 다시 말하거니와 사리를 찾지 마라. 재는 강원도 오두막의 꽃밭에 뿌려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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