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같은 여자 그림 보는 남자

   
유경희
ǻ
매경출판
   
13500
2016�� 07��



■ 책 소개

 

그림은 인생이다, 그리고 사랑이다
그렇게 그림이 당신을 위로할 것이다

 

『그림 같은 여자 그림 보는 남자』는 그림을 인생으로 나눠 우리네 삶에서 큰 줄기를 이루는 사건들로 묶었다. 그 사건들은 총 다섯 종류로 나눠볼 수 있다. 그 무엇보다도 우리를 살게 하는 ‘사랑’, 때로는 희망적이기도 가끔은 절망적이기도 한 ‘인생’, 당신의 지원군이기에 때로는 쓴 소리가 더 아픈 ‘가족’, 언젠가는 찾아오지만 그 순간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성공’,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취향’이다.

 

이런 다양한 마음을 모두 모아놓고 보니 고백을 통해 각자의 모습을 한 번 더 되돌아보는 계기를, 공감대를 만들어내게 된다. 그림은 강요하지 않는다. 넌지시 일러줄 뿐이다. 그래서 그림이 결국 우리를 위로하게 된다. 무한한 해석과 이해가 가능한 그 세상에서 당신도 위로받길 바란다고.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고. 그 세계 안에서 예술과 인생에 대해 생각보자고 말이다.

 

■ 저자 유경희
처음 그림을 접한 건 다섯 살 즈음이었다. 공중목욕탕에 걸린 명화 포스터였는데 로코코 풍으로 그린 아프로디테와 큐피드 그림이었다. 숲 속에 벌거벗은 아프로디테가 살포시 누워 있고 그 주변에 아기 천사가 날아다니는 그림이었던 것 같다. 그림이란 내가 모르는 저 너머의 세계로 나를 데려다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품었다. 이 그림을 본 이후로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무모하지만 열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예술 외에는 다른 삶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삶이 예술이라는 걸 점점 더 깊이 깨닫고 있다. 한 장의 그림이 때로는 천 마디 말보다 위대할 수 있음을 알기에 예술을 바탕으로 한 공감과 치유를 나누는 ‘유경희예술처방연구소’를 세웠다. 고대 주술사들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픈 이들을 보듬었듯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우나 정신적으로는 메마르고 피폐한 현대인들을 예술과 인문학으로 껴안아주는 곳이다. 예술작품 못지않게 예술가들의 기질과 성격에도 관심이 많다.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모든 일들이 어떻게 작품 속에 반영됐는지 섬세하게 살피고 삶에 적용시켜보는 일을 즐긴다.

 

한양대학교에서 국문학을,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미학을 전공했으며,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시각예술과 정신분석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술잡지 기자와 큐레이터로 일했고 이후 뉴욕대학교에서 예술행정 전문가과정을 수료했다. 지은 책으로는 《예술가의 탄생》 《치유의 미술관》 《창작의 힘》 《아트살롱》 등이 있다.

 

■ 차례
프롤로그

 

1. 그래도 결국은 사랑이다 LOVE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 자신이 만든 세계 안에서만 사랑을 찾는 사람들
사랑과 우정의 기로에 서서 사랑했을 때 일어나는 예상치 못한 일들
눈 감은 그녀를 사랑하다 사랑과 욕망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녀는 남자를 사랑하지 않았다 여성들이 차마 말하지 못한 판타지
양로원 로맨스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인데
원하는 것을 선택한 대가 당신에게 선택권이 주어졌다면
우리 사랑 의심해도 괜찮을까 의혹을 통과한 사랑만이 살아남는다
질투는 나의 힘 질투와 욕망을 숨기지 않는 사람들

 

2. 좋은 일과 나쁜 일, 그 중간쯤에 인생이 존재한다 LIFE
아름다운 시절에 술을 마시다 술 한 잔에 담긴 사랑과 인생
고단한 당신에게 그림 한 점 당신의 오늘을 토닥입니다
부족한 삶 속에서 채우며 살다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
파산에 대처하는 당신의 자세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법
살면서 가져야 할 단 하나의 자존심 성공 이전에 신념이 먼저다

 

3. 당신의 지원군 또는 당신의 적군 FAMILY
언제나 당신을 응원하던 가장 큰 존재 아버지와 딸, 그 어렵고도 오묘한 관계
큰 나무 아래서 다른 나무는 자라지 못한다 나는 내 아이가 힘들다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애정결핍의 주범 어머니
사랑하는 사람이 적으로 변하는 순간 아내와의 사랑, 그리고 전쟁과 사랑
그때 아버지에게 말하고 싶었어요 아버지와 아들, 그 멀고도 가까운 사이
당신의 마음에도 내가 있기를 모든 반대에도 사랑을 이룬 이들에게

 

4.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그 순간 SUCCESS
끔찍한 위기를 드라마틱한 기회로 전화위복 그리고 회복탄력성을 기억하라
제2의 인생을 살다 다른 인생을 꿈꾸는 이들에게 부치는 편지
미래를 강조하는 삶은 가짜다 꽃 한 송이가 가르쳐준 인생의 진리
성공한 사람들이 진짜로 두려워하는 것 연인이자 라이벌,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이들
적들에게 창의적으로 욕하는 법 복수도 재치 넘치면 용서된다
져줄 수도 없고 이길 수도 없고 나보다 뛰어난 후배를 만났을 때

 

5. 자신만의 취향 안에서 생기는 새로운 세계 STYLE
당신이 먹는 것이 곧 당신이다 요리 잘하는 남자가 사랑받는 이유
그림 볼 줄 아는 사람, 그림 살 줄 아는 센스 취향을 가진 사람이 된다는 것
내 안의 낯선 나 아니마를 긍정해야 진짜 행복을 알 수 있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새로운 세상에서 새 꿈을 꾸는 여성들




그림 같은 여자 그림 보는 남자


그래도 결국은 사랑이다 LOVE

양로원 로맨스 _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인데

아흔을 훨씬 넘긴 나이에도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철학자 김형석 교수에게 물었다.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그는 사랑이 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현재가 당신의 인생 중 가장 행복하다고도 말했다.


요즘 양로원 로맨스가 간간히 들려온다. 몇 년 전 우연히 본 양로원 르포르타주 다큐멘터리는 흥미로웠다. 한 할머니가 그곳에서 만난 할아버지에게 차였다며 운다. 여든 넘어 처음 느껴보는 사랑의 감정이란다. 우는 할머니 말고 다른 여자를 더 좋아하는 할아버지는 양다리를 걸치고 싶었겠지만 가부간에 결단을 내라는 할머니 말에 "당신은 내 취향이 아니다"라고 에둘러 말하고 황급히 자리를 뜬다. 또 다른 사례도 이어 등장한다. 한 할아버지는 남자친구가 있는 할머니를 짝사랑한다. 그 할머니는 병든 남친 할아버지와 함께 다른 양로원으로 옮겼다. 그러자 할머니를 짝사랑하던 할아버지도 양로원을 이들과 같은 곳으로 옮겼다. 씩씩한 현대 여성에 속하는 할머니는 여전히 병든 할아버지를 배려하고 보살피며 자기를 사랑하는 할아버지와는 친구로 지낸다.


짝사랑을 하는, 조금은 더 연하인 이 할아버지의 말이 더 압권이다. 자기는 평생 찾아 헤매던 이상형의 여자를 이제 만났으니 그 할머니가 누구를 더 좋아하든 상관없다고 말이다. 자기는 그녀를 위해서 무엇을 더 해줄 수 있는지에만 관심이 있다고도 했다. 체면도 겉치레도 모두 벗어 던졌으니 이게 두려움 없는 진짜 사랑 아닌가.


화가들은 늙어서는 어떤 사랑을 했을까? 늙은 거장의 사랑은 또 어떻게 그들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을까?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예순이 넘어서야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 1541년 <최후의 심판>이 완성되었을 때 60대 중반의 그는 이후 이십삼 년동안 조각가로, 때로는 화가로 때로는 토목기사와 건축가로 밤낮없이 일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는 점차 고독해졌다. 동년배의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고 가까운 친척들도 거의 다 죽었다. 그는 유일한 상속자인 조카 로렌초에게 모든 애정을 쏟았다.


그런 말년의 미켈란젤로에게 생에 최초의 위대한 열정이 싹텄다. 그러나 그것은 이전까지 젊은 청년들에게 바친 동성애적 사랑과는 다른 종류의 사랑, 즉 지성적인 열정에 근간한 사랑이었다. 이처럼 예순 넘은 미켈란젤로가 사랑을 바친 여인은 비토리아 콜론나였다. 베네치아 화파인 티치아노 베첼리오가 그린 <우르비노의 비너스>에 등장할 만큼 유명한 귀족 여성이자 미망인이었던 콜론나에게 미켈란젤로는 깊이 빠져들었다. 그녀는 남달리 독실한 종교적 감정을 지닌 지적이고 지혜로운 여성이었다. 콜론나 역시 미켈란젤로가 받아들인 플라톤의 지혜와 신앙의 진리, 그리고 예술의 신비를 똑같이 열렬하게 찬미했다. 그러니 미켈란젤로의 예술에 대한 그녀의 찬사는 누구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영감의 근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 역시 늙은 나이에 젊은 아내를 맞았다. 원만하고 다정했던 첫 번째 부인 이사벨라 브란트가 흑사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큰 상심에 빠진 그는 외교활동에 더욱 더 전력했다. 그러나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외로움은 점점 더 커졌다. 루벤스는 자신이 독신으로 살며 금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깨달았고 태피스트리 상인의 막내딸이었던 헬레나 푸르망과 혼인한다.


쉰두 살의 루벤스와 열여섯 살의 푸르망. 그들의 나이 차는 무려 서른여섯 살이었다! 그녀는 나이만 어린 것이 아니라 북유럽의 비너스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풍만한 미인이었다. 중년 귀부인과의 재혼을 권하는 주변인들의 권유를 뿌리치면서 푸르망과 재혼할 당시 루벤스는 이렇게 말했다. "비록 중산계급 출신이지만 좋은 가정의 아가씨를 아내로 맞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귀족 출신과 결혼하라고 나를 설득하려 했지만 말입니다. 나는 널리 알려진 귀족 사회의 그 부정적 자질이 두렵습니다. 특히 여성들에게 두드러진 자만심 말이지요. 그래서 나는 붓을 드는 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을 여인을 아내로 맞기로 했습니다."


푸르망은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총명하기도 했다. 그녀는 박학다식한 루벤스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열심히 교양을 쌓았다. 그렇게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푸르망은 루벤스의 말년을 행복한 삶으로 인도했다.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귀족들의 이기심과 허영심을 충분히 경험한 루벤스는 평상시의 소망대로 평범한 아내와 평화롭고 조용한 시골에서 단란하게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생애 마지막 십 년간 사랑스런 젊은 아내의 모습을 여러 점 그렸다.


특히 <모피를 두른 헬레나 푸르망>은 그가 마지막까지 간직했던 수작이다. 한 손은 가슴에, 다른 손은 모피를 잡아 음부를 가리며 베누스 푸디카(비너스 상이 취하는 정숙한 자세를 뜻하는 미술 용어)의 포즈를 취했다. 화면 밖을 바라보고 있는 푸르망의 눈길은 자신이 사랑받고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 다소곳하고 수줍지만 동시에 당당하다.


푸르망은 십 년 동안 다섯 명의 아이를 낳는다. 마지막 아이는 루벤스가 죽은 후에 태어났다. 1640년 루벤스가 사망하자 푸르망은 남편의 재산 중 절반을 상속받았고 그 후로도 삼십삼 년을 더 살았다.


현대인의 불안과 고독을 가장 치열하게 파고든 조각가였던 알베르토 자코메티도 말년에 한 모델과 사랑에 빠졌다. 자코메티는 특별히 거리의 여자들을 사랑했다. 자코메티는 결혼했음에도 매춘부들에게 단단히 빠져 있었다. 1958년 늦가을, 50대 후반의 그는 예술가들이 독한 술을 마시고 하룻밤 정분을 나눌 상대를 찾는 몽파르나스의 한 바에서 카롤린을 만났다. 그보다 마흔 살이나 어린 여성이었다. 그녀는 불량하고 변덕스러웠으며 약간의 바람기도 있었다. 두 사람은 첫눈에 반했고 미친 듯이 서로를 사랑했다. 평범한 육체관계일 수도 있는 소소한 사건이 이 로맨스의 시작이었다.


카롤린은 처음으로 자코메티 앞에서 포즈를 취한 다음 그를 나의 그리자유(회색 계통의 채도가 낮은 한 가지 색으로만 그리는 화법)라고 불렀다. 늘 회색 먼지 속에서 작업하는 자코메티를 보고 붙인 별명인 듯하다. 애정을 담은 별명이었기에 자코메티의 마음은 금세 누그러졌다. 자코메티는 카롤린이 갖고 싶어했던 빨간 자동차를 사주었고 그녀를 데리고 루브르 박물관, 자연사박물관, 런던의 테이트 미술관에도 갔다. 자코메티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그녀에게 몽땅 보여주고 공유하고 싶었다.


당시 자코메티는 영국의 유명 화가였던 프랜시스 베이컨에게도 카롤린을 소개했다. 자코메티는 이미 부인 아네트가 있었고 추종자인 동생 디에고도 있었지만 그는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자코메티는 카롤린이 계속 후원을 받을 남자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남자들에 대해서 지독히 질투했다. 자코메티가 1962년과 1965년에 각각 그린 유화 <눈물을 흘리는 카롤린>과 <빨간 원피스를 입은 카롤린>은 미술 애호가들에게 감탄을 자아낼 만큼 독특하다. 카롤린은 자코메티의 마지막 모델이자 최후의 열정이었다.


파블로 피카소는 60대 초반에 스물한 살의 프랑수아 질로를 만나 열정적인 사랑에 빠져들었고, 급기야 일흔 넘어서는 자기보다 무려 마흔다섯 살이나 어린 자클린을 만나 결혼까지 했다. 흥미로운 것은 피카소는 여자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사조를 몰고 왔다는 사실이다. 피카소가 특별히 나이가 들었을 때 만났던 여인들이 훨씬 더 많은 영감을 준 것은 아니다. 영감의 근원으로 작동하였던 여자들은 오히려 조금이라도 더 젊었을 때 만난 페르낭 올리비에, 마리 테레즈, 도라 마르 등이었다. 하지만 늙어서 만난 여자들은 그의 창작의 불길을 죽을 때까지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만약 남녀의 나이가 바뀌었다면? 물론 미술사에서 살펴보면 마흔네 살의 쉬잔 발라동이 아들인 화가 모리스 위트릴로의 친구인 스물세 살의 앙드레 우터와 사귀었다. 심지어 아들과 더불어 세 사람이 기막힌 동거를 했다. 당시 그림을 보면 분명 그녀는 이런 관계 속에서 새로운 창작의 열정을 갖게 되었음이 자명하다.


또한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우리에겐 《연인》이라는 소설이자 영화의 원작자인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여든에 마흔 살이던 젊은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책을 썼다. 얼마 전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소설 《늙은 창녀들의 추억》이라는 책을 읽고 영화도 보게 되었다. 늙은 남자의 사랑이란 무엇인가. 나이에 지지 마라. 어쩌면 절체절명의 사랑은 아직 오지 않았을지 모른다.


당신의 지원군 또는 당신의 적군 FAMILY

그때 아버지에게 말하고 싶었어요 _ 아버지와 아들, 그 멀고도 가까운 사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즈음 근대를 살던 화가들은 아버지와의 반목과 갈등이 유독 심했다. 그들은 부모가 바라는 직업도 가지지 않았고 부모가 원하던 여자와 결혼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예술가의 부모는 은행가, 상인, 법률가 등 신흥 중산층 출신인 경우가 많았는데 그들은 자식들이 자기들처럼 법률가나 사업가가 되기를 소망했다. 더불어 여염집 규수와 결혼해 남부럽지 않게 살기를 바랐다. 그러니 당대에 화가가 된다는 것은 아버지의 삶을 거부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화가들은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그에게 저항했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화가들의 반항은 대부분 심약하고 조심스럽게 드러났다. 예술은 기본적으로 소심한 마음이 저지르는 역동적 감정의 세계다.


화가들은 왜 아버지에게 그토록 조심스러웠을까? 시대를 막론하고 아버지 세대는 자녀들을 나약하고 의존적이라고 생각한다. 자식들이 아버지 마음에 차기는 아주 어렵다. 특히 아들에게 아버지는 범접할 수 없는 큰 존재이거나 언젠가는 넘어서야 할 도전 과제이기도 하다. 혹은 어머니라는 존재를 두고 벌이는 오이디푸스적 삼각관계 속의 경쟁자일 수도 있다. 또 근대의 화가들은 자기가 하고픈 예술을 위해 능력 있는 아버지와의 갈등을 피하는 쪽으로 선회하는 경향이 있었다.


사실 현대미술의 선구자였던 폴 세잔이라는 작가의 탄생은 은행가인 아버지의 경제력 때문에 가능했다. 자수성가한 아버지의 돈이 세잔으로 하여금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실험을 지속할 수 있게 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잔은 아버지의 맘에 들지 않는 모델과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지만 그 사실을 오래도록 숨겨야 했다. 아버지가 이 사실을 눈치채고 생활비를 대폭 줄이면서 압박을 가하는데도 끝내 자신의 아내와 아이의 존재를 함구했다. 이렇듯 세잔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고 평생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그 덕분에 성취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입체파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이처럼 세잔과 마네 같은 화가들이 아버지와의 날선 대립을 피하면서 돈줄을 쥔 아버지와의 갈등을 피해갔다면 반 고흐와 살바도르 달리는 아버지와의 갈등을 첨예하게 대립시키고 이것을 시각화했다.


빈센트 반 고흐는 동생 테오를 제외한 대부분의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칼뱅교의 목사였던 아버지와의 관계가 상당히 나빴고 말년에는 아예 결별한 채 살았다. 첫 번째 이유는 아버지와의 종교적 갈등이었고 다른 이유는 여자 문제였다. 설교는 잘 못하지만 선한 목사였던 아버지는, 전도사가 되겠다고 벨기에 탄광촌에 갔지만 교단에서 파면당한 아들에게 크게 실망했다. 아버지는 극단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을 일삼는 반 고흐를 정신병원에 보내려고까지 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더욱 못마땅했던 것은 여자 문제였다. 사촌동생이나 정혼한 여자 등 사랑해선 안 될 여자를 사랑하거나, 아프고 불행한 매춘부처럼 자신이 돌봐주어야만 하는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한심과 근심을 오가며 낙담했다. 그러던 차에 아버지가 심장발작으로 사망하자 동네 사람들은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이 아들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큰 충격과 상실감에 빠진 반 고흐의 심경을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협죽도가 있는 정물>이다. 이 그림에서 성경은 탁자의 한가운데에 크고 당당하고 안정감 있게 자리 잡고 있고, 그 옆에는 성경에 짓눌린 듯 비스듬히 에밀 졸라의 <생의 기쁨>이라는 책이 작고 불안정하게 놓여 있다. 성경은 아버지를, 소설책은 자신을, 불 꺼진 초는 아버지의 죽음을 암시한다. 성경에는 <이사야서>1장 2~3절 "자식이라 기르고 키웠더니 거역을 하는 이스라엘"이라는 야훼의 말씀이 적혀 있다. 바로 반 고흐에 대한 아버지의 탄식이다.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만큼 아버지를 많이 그린 화가는 없을 것이다. 공증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지역 유지로 권위적이며 문화와 파티를 좋아하는 호사가였다. 달리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돈을 펑펑 쓰면서 아버지와 아버지로 대변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망나나짓을 저지른 것으로 유명하다. 달리는 미술사 과목의 답안 제출을 거부하는 등 파행적인 행동으로 정학 처분을 받았고 반정부활동 혐의로 투옥되어 퇴학해야 했다.


아버지와의 갈등은 보란 듯이 남의 여자를 가로채면서 더욱 파국으로 치닫는다. 달리는 초현실주의 시인 폴 엘뤼아르의 부인인 연상의 갈라와 사랑에 빠져 동거에 들어간다. 아버지는 아들이 친구 부인을 가로채는 부도덕한 짓을 저질렀다며 격분하여 먹다 만 성게껍데기를 우편으로 보낸다. 그때 달리는 아버지가 보낸 성게껍데기를 깎아 자신의 머리카락과 섞어 땅속에 묻으며 평생 정신적 족쇄였던 아버지와 절연을 선언한다.


아버지에 대한 달리의 존경과 두려움의 심경은 그의 젊은 시절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라네 해변에서 화가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초상>과 같은 작품들 속 그의 아버지를 보라. 아버지를 그린 그의 그림의 공통적인 특징은 아버지가 화면을 가득 채울 정도의 압도적인 크기로 그려졌다는 사실이다. 달리에게 아버지는 언제나 자기를 강압적으로 몰아붙이는 권위와 힘을 가진 존재였다. 게다가 아버지의 모습은 옆모습이다.


심리학적으로 옆모습은 어떤 대상이 이해되지 않는 불가사의한 존재일 경우에 그려진다. 마치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달리 또한 아버지를 증오하고 두려워했지만 자신이 어찌해볼 도리 없는 막강하고 거대한 미스터리한 존재라는 뜻이다. 달리는 아버지 초상화를 통해 권위적이고 위압적이고 명령하는 아버지 즉 강제와 억압의 표상으로서 큰 아버지를 그렸다. 이처럼 달리는 아버지를 그리면서 아버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듯 보이지만 실제 현실 속에서는 해괴망측한 행동으로 아버지의 분노를 샀다. 유아적인 퇴행에서나 나올 법한 기이한 행동이야말로 달리가 아버지의 명령과 억압에 맞서 싸우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혹시 남들에 비해 5월이 유난히 부담스럽다고 느끼는가? 그 이유가 아버지와의 불편한 마음 혹은 해소되지 않는 갈등 때문은 아닌가? 당신은 아버지를 인정하거나 이해하는가? 오늘 그저 나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인가를 찬찬히 생각해보면 된다. 아버지의 아버지는 또 어떤 분이셨는가? 모든 아버지들은 어떤 부모의 아들인 동시에 시대와 역사가 낳은 아들이다.


아버지가 어떤 부모를 두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아버지를 무작정 사랑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오늘만큼은 나와 관계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한 인간으로서의 아버지를 바라보자. 처연할 정도로 고독한 한 남자의 내면을 넌지시 응시해보자.



자신만의 취향 안에서 생기는 새로운 세계 STYLE

당신이 먹는 것이 곧 당신이다 _ 요리 잘하는 남자가 사랑받는 이유

요즘 셰프들이 대세다. 미국에서도 셰프들의 인기는 할리우드 스타 못지않다. 유명 배우들은 요리사와 친구가 되려 하고 대중은 셰프들도 연예인으로 치부한다. 그렇게 되면 요리는 차선이 되고 들러리가 된다. 때론 본업을 잊은 셰프들의 처세가 민망하기도 하고 어떨 땐 먹는 것을 가지고 너무 요란하게 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대중은 셰프의 화려한 솜씨에 환호한다. 때론 그들의 창의력이 예술을 능가할 때도 있다.


요리에 대한 관심이 왜 중요할까? 요리 잘하는 남자가 유머 있는 남자만큼 인기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삶에 스토리가 생긴다는 것이고 인생에 풍요롭고 다양한 맥락이 생겼다는 걸 뜻한다. 음식을 통해 시각, 후각, 미각 등의 감각, 취향, 여성성, 자연에 대한 시각, 문화 등 여러 가지 정보가 쌓일 수밖에 없다. 예컨대 음식과 어울리는 술 공부가 따라오게 되고 제철 식재료는 자연에 대한 섭리를 알려주고 향신료는 세계 무역 네트워크까지 공부하게 한다. 그러니 음식은 단지 먹을거리가 아니라 문화이자 스토리텔링의 무한한 보고가 된다.


무엇보다 요리는 추억이다. 여자들은 남성보다 감각에 예민하고 자극적인 음식을 아주 좋아한다. 남성들에게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면,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다면 맛있는 요리를 해주는 것이 좋다. 혹 요리를 못 한다면 멋있거나 맛있는 식당으로 데려가면 된다. 음식을 주문할 때 먹을 만큼만 시키면 안 된다.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음식을 시켜야 한다. 여자는 그것을 후한 애정 표현으로 받아들인다. 음식 앞에서 인색하면 완전 낭패다. 때론 여자들은 맛있는 디저트 가게를 알고 있거나 커피를 맛있게 탈 줄 아는 세심한 남자를 매력적으로 생각할 때가 있다.


전설적인 유혹남 카사노바는 음식에 관한 엄청난 정보를 가진 인물이었다. 카사노바의 식단은 자신의 인생의 희로애락과 흥망성쇠를 그대로 보여준다. 불확실한 천국보다는 현세의 삶을 탐닉하고 영위했던 그에게 여자와 요리는 둘도 없이 소중했다. 치즈 사전을 출판하려 했을 만큼 요리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던 카사노바는 여자를 유혹하기 위해서라도 요리가 필요했다. 그는 수많은 저작물을 남겼지만 그중에서도 음식을 이용해서 여성을 유혹한 사례들이 넘쳐난다. 그는 쾌락의 요리로 여성을 도취시켰지만 절대로 농락하지는 않았다. 카사노바는 늘 강조했다.


"아름다운 여성 앞에선 음식도 제대로 먹을 줄 알아야 한다."


카사노바는 파리에 도착한 뒤 재정 전문가가 되어 복권을 발행하고 백만장자가 된다. 그는 엄청난 돈으로 저택을 빌려 왕궁에서나 볼 수 있는 화려한 축제와 만찬을 열곤 했다. 사람들은 카사노바의 파티에 초대받고 싶어했다. 특히 카사노바의 치킨 프리카세는 소문이 자자했는데 그는 이 음식을 만들려고 특별히 어두컴컴한 방 하나를 마련해 닭을 풀어놓고 쌀을 먹여 키웠다고 한다. 닭고기는 눈처럼 하얗고 입 안에서 살살 녹을 정도로 맛있었다고 전해진다.


파티를 열기에는 그 저택이 너무 좁다고 판단한 카사노바는 당시 유명인사들을 부르봉 호텔로 초대해 만찬을 열기에 이른다. 카사노바는 손수 샐러드를 만들었고 당시 왕조차 별로 먹어보지 못한, 파리에서 최고의 진미인 철갑상어를 선보였다. 파리의 사교계에서는 그의 인기는 잠시 동안이었지만 왕가를 추월할 정도였다. 그때 선보였던 요리로는 바질 거품 스프, 치킨 프리카세(화이트소스로 졸인 고기찜 요리), 카사노바식 샐러드, 철갑상어찜, 양송이 라구(고기소스), 베네치아식 토끼 요리, 카사노바식 배 요리 등이었다.


카사노바의 식단에 성욕을 자극하는 효능이 든 음식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양파, 파슬리, 후춧가루, 굴, 마늘, 바질, 닭벼슬, 아티초크, 캐비어, 바닐라 열매와 같은 재료와 양념은 사랑의 힘을 북돋아준다고 알려져 있다.


카사노바가 특히 여자들과 먹었던 음식 중에 굴에 관한 일화는 매우 에로틱하다. 최음제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굴은 먹는 행위만으로도 유혹의 느낌을 전할 수 있다. 어느 날, 카사노바는 로마에서 세상 물정 모르는 두 여성을 레스토랑으로 초대해 굴 요리를 대접했다. 카사노바는 굴 먹는 방법을 먼저 시범으로 보여주었는데 굴 즙을 삼키지 않고 입에 담고 있는 방법부터 상대방 입 속으로 굴과 굴즙을 밀어넣는 야릇한 방법들을 가르쳐주었다. 그녀들은 굴처럼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사실이 죄악일 거라고 생각할 만큼 굴을 먹는 행위에 매혹되었다.


18세기 로코코 시대에 카사노바라는 미식가가 있었다면 20세기에는 단연코 파블로 피카소를 꼽을 수 있다. 피카소 역시 요리를 통해 여성들을 새로운 감각의 세계로 이끌었다. 생각해 보라. 음식이야말로 시각, 청각(요리 만드는 소리), 후각, 미각, 촉각 등 모든 감각을 열어놓게 만드는 과정이다. 그러니 피카소가 여성을 유혹할 수 있는 힘은 그의 탐식 혹은 미식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카소는 식사 시간을 중요한 의식처럼 생각했다. 때론 상을 차리는 가정부를 심하게 꾸짖곤 했는데, 식탁을 캔버스처럼 생각한 피카소가 가정부의 미적 센스가 형편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스페인식 볶음밥인 파에야를 좋아했던 그는 점심으로 파에야를 실컷 먹은 후 투우를 보러 가곤 했다.


독설가이기도 한 피카소는 때론 음식에 대한 혹평으로 사람들을 난감하게 만들기도 했다. 어느 날 피카소는 지인의 집에 초대받았는데 피카소가 파에야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들은 부인은 파에야를 정성껏 푸짐하게 준비했다. 주인집 여자는 음식을 먹으면서 왠지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짓는 피카소에게 물었다.


"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세요?"

"아니요, 아니요, 마담. 홍합, 로브스터, 오징어, 샤프란, 쌀 등 들어갈 건 모두 들어갔네요. 아! 그런데 요리사가 빠져 있군요!"


어떤 요리평론가의 독설이 피카소의 역설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피카소가 살던 시대는 가난이 주는 은총이 존재했던 시대였다. 음식 하나를 두고도 얼마든지 풍부한 담론을 펼칠 수 있었다. 피카소는 성공한 이후에도 화려한 식탁보다는 소박한 식탁을 좋아했다. 말년의 피카소의 부인이었던 자클린 로크는 예기치 않았던 장소, 즉, 지하실, 다락방, 작품 보관실, 비어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피카소를 위한 밤참 자리를 마련했다. 예술가의 부인다운 창의적인 면모가 느껴진다.


피카소는 거창한 식탁보다는 주방에서 먹다 남은 차가운 닭고기 요리와 채소 수프만 차려놓고도 파티를 열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아주 친한 몇몇 사람들과 추리고 추려낸 친구들과 키우던 강아지만이 피카소의 마지막 파티에 참석할 수 있었다.


손님이 도착하기 몇 시간 전 여유롭게 요리를 준비하는 시간은 황홀하다. 싱싱한 재료들을 식탁이라는 캔버스 위에 펼쳐놓는다. 세잔의 정물처럼 아주 조형적이다. 도착할 시간에 맞춰 와인을 미리 열고 혼자 홀짝거리며 음식을 만든다. 그러면 손님이 올 때쯤 약간 기분이 상승하며 자연스럽게 환대의 시간이 시작된다.


어떤 요리든 상관없다. 당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될 만한 음식을 정하자.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이야기 하나쯤 곁들이자. 또 음식을 준비하면서 느낀 감정을 살짝 곁들이자. 음식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음식에 딸린 스토리는 추억이 되고 그 추억은 바로 예술이 된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