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육아

   
백서우
ǻ
첫눈
   
13000
2016�� 08��



■ 책 소개

 

함께 커나가는 삼대의 이야기

 

『삼대육아』는 시어머니와 육아를 함께하면서 생기는 다양한 일화를 엮은 에세이다. 육아라면 흔히 아이를 키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육아는 ‘아이를 키우는 것뿐만이 아닌, 가족이 함께 커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과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며 점점 엄마가 되어가는 저자, 손주들을 잘 키우고자 육아법을 공부하는 할머니, 서투르게 아이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남편까지.

 

삼대 육아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 저자는 ‘아이의 육아에만 집중된 어른들의 삶이 아닌,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가족의 삶’을 한 권의 책에 담아냈다. 동네 골목길에서 한 번쯤 마주쳤을 것만 같은 이 가족의 왁자지껄한 일상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따뜻해질 것이다.

 

■ 저자 백서우
저자 백서우는 삼류 광고쟁이로 살다 결혼과 함께 9급 공무원으로 전향해 팔자에 없다고 생각했던 공직살이 중이다. 병무청 운영 지원과에서 일하고 있으며, 두 명의 아이를 출산한 워킹맘이다. 우주에서 제일 바쁜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시어머니와 함께 살기로 결심했다. 삼대가 함께 살면서 벌어진 갈등과 이를 봉합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가족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잔잔히 전하고자 이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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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한 맺힌 은수저
여기까지 왔는데, 조금 더 놀다가지 않을래?
8년째 연애 중
무면허 엄마
나의 딸, 나의 분신
아프니까 새우다
엄마표 핫케이크, 아빠표 꿀호떡
잠 자리 독립
두 번째 엄마
할머니 싫어요
늦깎이 부성
딸자식을 키운다는 것
교육열정
가장의 무게
나를 돌아봐
동생 더 낳아주세요
삼대가 함께 모여
파파 붕어빵 미니 붕어빵
사라져라 수족구병!
아빠 육아의 힘
마인드컨트롤
매일 크리스마스
은니는 싫어요
21세기 시집살이
잠비아에서 날아온 편지
강릉 콜라보
엄마의 빈자리
꼬물꼬물 주말농장
마흔과 엄마
힐링 여행
할머니 없는 날
그땐 참 좋았지
어머님이라 부르지 말아줄래요?
은밀한, 심야의 데이트
엄마, 회사 가지 마
외삼촌의 일기
힐링 캠프
우선순위, 끝 번
그녀의 눈물
틈새 메우기
총각네 커피집
작고 낡은, 우리의 첫 자동차
소박하게 위대하게
인정의 욕구
자의적 시집살이의 서막




삼대육아


한 맺힌 은수저

상견례 가기 전날 엄마가 말했다.


"백 서방 장남이고 어머님 혼자 계신데 시집살이를 할 수도 있을 것 같구나."

"21세기에 웬 시집살이? 엄마, 걱정도 팔자요. 요즘 누가 같이 살아."


지금, 내가 그렇다. 세기가 바뀌고 시대가 변한 것과는 상관없이 시어머니와 나와 남편과 토끼 같은 두 아이는 모두 한 지붕 아래 살고 있다. 역시 엄마들의 예감은 대단하다. 매번 높은 식견에 감복할 뿐이다.


결혼할 무렵, 시어머니와 함께 살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나는 진심으로 시집살이가 어울리는 여자가 아니었다. 광고대행사에 다니고 있었고, 테이크아웃 커피로 하루를 시작했다. 주말에는 반드시 공연이나 영화를 보러 다녔으며 일 년에 한 번은 해외에 나가 번 돈을 다 쓰고 돌아왔다. 무엇보다 나는 못됐다. 못되고 게을렀다. 차려준 밥 먹고 회사만 다니면서도 엄마랑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워댔다. 그런 내가 시집살이의 고단함을 알면서도 선택한 이유는 전적으로 아이들 때문이었다. 남편은 너무 바빠 집에서 잠만 자고 출근했고, 나 역시 회사를 다니는 처지에 살림까지 하면서 아이 둘을 보살필 자신이 없었다.


"요새는 시어머니가 같이 살면서 애들 돌봐주는 집도 많다더라." 고민하는 내게 회사 선배가 던진 말이었다. 우리 어머님께서 과연 도와주실까. 수없이 고민하고 망설였지만, 이제 나는 더이상 꾸미기 좋아하고 성질이나 부리면서 회사 다니던 아가씨가 아니다. 회사원이자 아내이고 무엇보다 엄마다. 우리는 조심스레 어머님께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어머님께서는 그 옛날 국밥을 말던 거친 손으로, 내 손을 덥석 잡아 주셨다.


삼대가 같이 살면서 아이를 키우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처음 일 년은 소리 없는 전쟁 같았다. 다음 해는 폭풍 전야 같았고 실제로 폭풍이 몰아친 적도 있다. 적응한 것 같으면서도 사소한 일로 기분을 망치는 때가 많았다. 어머님과 함께 살면서 가장 마음 상했던 일을 꼽자면 놀랍게도 수저 차별이다. 시어머니는 내 엄마가 아니야. 너무 잘하려고 힘 빼지 말고 생긴 대로 살자. 나도 배울 만큼 배웠다. 남편에게 화풀이 하지 말자. 등 수없이 많이 결심하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낡은 은수저 앞에서 나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식사 시간이 되면 어머님은 반드시 은수저를 챙기신다. 그런데 당신 것과 남편 것 달랑 두 벌이다. 아버님 살아 계시고 아들 둘 낳아서 오순도순 사실 때 장만했던 살림되시겠다. 어머님이 은수저에 애착이 있으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은수저의 손잡이가 너무 휘어져 제대로 잡기도 어려울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신혼살림으로 장만했던 부부 숟가락을 슬그머니 내곤 했다.


그러면 어머님은 "아이고 숟가락을 제대로 내야지, 아범 거 어디 있노." 다그치시며 굳이 낡은 은수저로 바꿔 오게 하시는 것이다. "사십 년의 추억이 묻어 있는 은수저도 아범의 숟가락이지만 분명 부부 숟가락도 아범 거란 말이에요. 그리고 저는요?"라고 말할 수 있으면 이미 며느리가 아니다. 게다가 나는 회사에 다닌다고 아이 둘까지 맡기는 신세 아닌가. 군말 없이 두 벌의 은수저와 아이들 캐릭터 수저까지 차리고 나면, 나 혼자만 덩그러니 쇠숟가락이다. 분명 쇠숟가락인데 잔가시가 결결이 붙은 나무젓가락을 잡은 듯 서걱거린다.


시어머니와 함께 살다 보면 이런 사소한 것이 마음에 박힐 때가 많다. 내 입으로 직접 꺼내자니 자존심 상하는 사소한 것들을 한참 후에 겨우 남편한테나 던져본다.


"혼자 임금님 숟가락에 밥 먹으니까 좋냐?"

"저, 저만 먹는 거 아니잖아요. 어머니도 은수저예요."


눈치 없던 남편은 급기야 말까지 더듬으며 변명한다. 언제부터 나한테 존댓말을 썼다고. 어이가 없다.


수저 차별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게 된 어느 날, 우연히 휘어진 은수저를 손질하시는 어머님의 손을 보았다. 류머티즘으로 휘어지고 닳아진 손가락이 눈에 띈다. 오래된 은수저처럼 아무리 손질해 봐도 비틀어진 손가락은 곧추세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언제부터 저렇게 심해지신 걸까. 간혹 손님이라도 오면 흉하다며 황급히 접어 감추시기도 했고, 비오는 날이나 유난히 힘든 날은 통증이 더 심하다며 양 손의 휘어진 각도를 비교하시곤 했다. 그럼에도 나는 어머님의 손가락보다 고물 은수저에 더 관심이 갔다.


그래, 사실 숟가락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어차피 수저통에 줄줄이 꽂혀 있으면 키도 고만고만해서 전혀 티도 안 나고. 무엇으로 먹든 밥만 잘 먹으면 되지. 평생의 고향인 부산을 등지고, 짐이란 짐은 모조리 싸들고 올라오신 분이다. 손자들 키워주면 십 년은 더 늙는다고 만류하던 친구 분들과 작별하고 말이다. 친구 분들까지 뿌리치셨던 어머님이 수원까지 소중히 싸들고 오신 은수저인데, 오죽 각별할까. 그렇게 애써 내 서운함이 진정될 기미가 보일 즘이면, 어머님이 젓가락질에 대해 한 말씀 하신다.


"애미는 젓가락질이 왜 그 모양이냐, 애들이 보고 배우겠다."


시집살이란 위와 같은 일들의 반복이다. 시어머님을 이해하며 감사한 마음이 들다가도 서운하고, 좀 적응하는구나 싶으면 또 힘이 드는.


하지만 이 모든 건 내가 자초한 일이다. 안락한 결혼 생활을 위해 안정적인 직장으로 전향한 것도 나고, 자식을 낳을 거면 둘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나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누군가는 문을 열고 따뜻하게 맞아줘야 한다며 어머님을 모셔오자 한 것도 나다. 누구를 탓할 수도, 원망할 수도 없었다.


어렵게 시작된 시집살이는,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도 돌이킬 수 없었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힘들단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한 채 육아와 회사 일을 병행했다. 이 삶에 더 이상 행복은 사치 같았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우리 가족 모두는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여전히 식탁에는 두 벌의 은수저와 아이들의 캐릭터 수저, 그리고 멀뚱한 나의 쇠수저 한 벌이 제각각 놓여 있지만, 우리는 동그랗게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 각자 아끼는 수저를 들고 말이다.



무면허 엄마

"선배, 나 너무 힘들다. 아내가 둘째를 가졌어."


회식 자리에서 후배 녀석 하나가 소주 섞인 한숨을 내쉬며 글썽거린다. 두 돌배기 아들을 둔 초보 아빠인데, 기쁜 소식을 참 비통하게도 전한다.


"어머, 축하해. 좋은 일에 힘들어는 왜 붙여."

"애 엄마가 너무 짜증을 내. 천둥벌거숭이 아들 하나 돌보기도 벅찬데 임신해서 입덧까지 하니까 당연히 힘들겠지. 그래서 처음엔 계속 받아줬는데 이제 나도 더 못 참겠어. 퇴근하고 집에가면 마음 편히 쉬고 싶다고. 계속 화만 내니까 진짜 지쳐."

"어휴, 애 엄마가 한창 힘들 때야."

"선배는 그래도 짜증 안 내고 애들 잘 돌보는 것 같더만. 아내가 요즘 화낼 때 보면 연애할 때 그 여자가 맞나 싶다니까."

"어이구, 나는 더 했어. 너무 조바심 내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봐. 아이가 두 살이면 고작 2년 동안만 엄마로 산 거잖아. 이제 겨우 두 돌짜리 엄마라고."

"잠시만 선배. 여보세요. 뭐라고? 애가 어쨌다고?"


씩씩대면서 애 엄마 험담할 때는 언제고, 후배는 집에서 온 전화 한통 받더니 황급히 회식 자리를 몰래 빠져나갔다. 총총 뛰어나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 옛날 남편도 똑같았을까 싶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나는 정말 더 심했었지. 한밤중에 아이가 울기만 해도 바들바들 떨면서 애꿎은 남편한테 짜증이나 부리는 빵점짜리 초보 엄마였다.


누구나 자격 없이 엄마가 된다. 막상 엄마가 되었는데 아무런 자질이 없다. 투정이나 부리면서 학교 다니고, 공부만 하다가 취업하고 연애한다. 그러다 어느 날 프러포즈라도 받으면 못이긴 척 결혼이라는 걸 하는데, 어수룩한 살림 실력에 정신없이 헤매다 보면 덜컥 아기가 생기고, 어느새 조리원에 누워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 역시 그렇게 엄마가 되었다.


나는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육아서를 읽고 인터넷에서 각종 정보를 모으며 선행학습을 했다. 부푼 배를 안고 도서관을 쏘다니며 육아 코너의 책을 모조리 꺼내 읽었다. 하지만 아기를 낳자마자 깨달았다. 물컹거리는 신생아를 안을 줄도 모르는 현실 앞에서 책이란 그저 종이와 글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렇게 조그만 아기를 어떻게 돌봐야 하나. 조리원에서 나갈 날이 다가올수록 두렵고 막막했다.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아기를 낳고 나면 당연히 젖을 먹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젖이 돌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젖은 나오지도 않는 주제에 가슴이 엄청나게 아팠다. 힘껏 빨아도 나오지 않는 엄마 젖에 아기는 지쳤다. 기어코 인공 젖꼭지를 찾아 무는 아기를 안고 나는 좌절했다. 엄마는 고사하고 인간으로서도 회의가 들었다. 생각처럼 쉽지 않은, 아니 제대로 되지 않는 모유수유는 내 자존감마저 해쳤다. 원숭이도 제 새끼는 배부르게 먹이던데. 아, 나는 원숭이보다 못하구나. 이대로 계속 모유수유를 고수하며 아기의 배를 굶길 수는 없는 터라 마지못해 분유를 타면서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에도 본능인지 학습된 것인지, 모유를 꼭 먹여야만 할 것 같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모유에 집착했다. 흡사 젖소가 된 듯 억지로 미역국을 두 사발씩 먹으며 스스로를 사육했다. 젖이 돈다고 소문난 음식은 죄다 해먹었으며, 신통하다는 마사지도 받으러 다녔다.


숱한 노력에도 내 유축 성적은 초라했고 아기는 배가 고픈지 쉬이 잠들지 않았다. 눕히면 번쩍 눈뜨는 아기를 안고 깨달았다. 나는 다만 아기를 낳은 상황에 직면한 한 마리의 동물일 뿐 아직 엄마가 아니라는 걸. 고통 없이 얻는 것은 세상에 없다. 무려 엄마가 당연직이라고 생각한 내가 어리석었다. 엄마는 그냥 되는 게 아니라 만만치 않은 도전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를 돌아봤다.


나는 지금껏 주변을 돌보기보다는 보살핌을 받으며 겨우 살아온 인간이다. 금수저 물고 태어나 꽃길만 걸은 건 아니지만 큰 굴곡없이 자랐고 위기 없이 살고 있다. 매일같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부모님, 사람 좋은 남편 덕에 편안하게 살아왔다. 이런 내가 한 생명을 책임져야 한다. 한 사람의 지성인으로 길러내야 한다. 양육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벌벌 떨고 있는 나는, 좋은 엄마가 될 자격이 있을까. 이런 고민의 시작을 감히, 엄마의 자격이라고 여겨도 되는 것일까.


나는 엄마가 될 준비가 부족했다. 아이를 온전히 키워내려면 아이와 함께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머리를 쥐어뜯다 결국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일단 휴직을 하고 내 인생의 삼 년은 오롯이 아기를 위해 투자하기로 결심했다. 화장실에 갈 때조차 따라붙는 아기를 혼자 내버려두고 출근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집에 들어앉기는 했는데 막상 아기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막막했다. 인터넷에는 각종 육아 정보가 쏟아졌지만 내겐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이 없었다. 친정 엄마나 선배 엄마들에게 물어보면 하나같이 시간이 해결해 준단다. 이런 하나마나한 소리가 있나. 방법을 물어보는데 시간이 답이라니. (하지만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나 역시 지금 누군가 물으면 똑같이 답한다.)


나는 하루하루 낡아갔다. 그놈의 모유수유에 집착한 탓에 산후조리를 제대로 못했다. 후유증으로 몸 이곳저곳이 아팠고 가만히 있어도 발이 시렸다. 예전에는 아프면 회사를 쉬고 엄마가 끓여준 죽을 공주처럼 떠먹곤 했는데, 이제는 아무리 아파도 손에서 아기를 놓을 수가 없었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나와 불쌍한 내 아기는 신혼집 아파트에 갇힌 채 서로 어쩔 줄 몰랐고, 아기도 처음 세상에 나와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어 보였다.


옷 갈아입히다 아기 팔이 꺾일 뻔도 하고, 목욕시키다가 아기를 물에 빠뜨리기도 했다. 투명하고 얇디얇은 손발톱을 깎는 일은 최고 난이도였다. 결국 피를 보고야 말았다. 우는 게 제일 문제였다. 집이 떠나가라 우는 데 당최 어떻게 해야 그치는지 알 수가 있나. 옆집에서 인터폰으로 항의도 해대는 통에 난리가 났다. 하루 종일 시달리다 녹초가 되어 잠들면 아기는 세 시간에 한 번씩 깨서 또 울었고 나는 좀비처럼 일어나 수유를 하고 기저귀를 갈았다.


우는 아이 손 붙들고 함께 울던 날들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러는새 나는 하루가 다르게 엄마가 되어갔다. 아기를 안아 들면 힘들고 무겁기만 했는데, 힘들고 무거워서 얼굴을 살필 새도 없었는데, 점점 아기띠 사이로 예쁜 얼굴이 보였다. 아기가 무거워질수록 살이 올랐다며 기뻐했다. 이제 한 손으로 기저귀를 갈고 울음소리만 들어도 배가 고픈지 잠이 오는지 알아차린다. 신생아 목욕 수발 같은 건 눈감고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가끔 아프기도 한 아기는 아픈 만큼 더 자랐고 나는 조금씩 경험이 쌓였다. 그렇게 내가 엄마의 자격을 손톱만큼이라도 갖추었을 때, 아기는 내게 엄마라고 불러주었다.

그때는 처절했으나 이제는 아련해진 무면허 엄마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었던 후배 녀석이 또 나를 옥상으로 불러댄다. 힘들다고 투덜대며 담배나 뻐끔거릴 줄 알았더니 커피를 들이키며 이제 아이 둘 아빠니 금연할 거란다. 아내와는 화해를 했단다.


"난 사실, 우리 엄마는 항상 희생했는데 아내는 왜 이럴까, 그런 생각도 많이 했어요. 근데 그때 선배가 그랬잖아. 아내는 아직 두돌짜리 엄마라고. 생각해 보니까 내가 기억하는 우리 엄마 모습 은 엄마로서 많이 성숙했을 때가 아닐까 싶더라고. 아내가 두 살 된 엄마라고 생각하니까 좀 짠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마음 넓은 내가 이해해야지, 안 그래요?"


녀석도 이제 조금 철이 들어가나 보다. 그래, 시간이 해결해줄 거야. 한참은 힘들겠지만 너희가 조금씩 부모가 되어가다 보면 언젠가 엄마, 아빠 소리를 듣는 날이 오겠지. 그러는 나도 뭐 이제 고작 여덟 살짜리 엄마이지만.



21세기 시집살이

나는 아침형 인간이다. 새벽에 일어나 커피를 마신다. 하지만 일요일 하루는 반드시 늦잠을 잔다. 한 주의 마지막이자 시작인 신성한 날이다. 어찌 일하는 불경을 저지른단 말인가. 금세 방전되는 저질 육신과 지친 영혼은 나에게 반드시 주 1회 휴식을 강요한다. 대한민국 노동법을 보자. 아홉 시간 근무 중 한 시간의 휴게 시간과 주당 유․무급 휴일을 보장하도록 되어 있다. 무신론자에게도 안식일은 필요한 법이다. 그렇게 30년을 살았다.


아이가 신생아일 때까지만 해도 두세 번 낮잠을 자는 아이 덕분에 꿀 같은 휴식 시간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가 둘이 되고 어머님이 등장하신 후로는 신성한 나의 일요일이 사라졌다.


처음엔 눈치 없이 열시가 넘도록 일어나지 않은 터였다. 평소처럼 늦잠을 자는데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머님께서 이미 주방 일을 시작하신 것이다. 소리가 나쁜 기운을 낼 수도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달그락 달그락 소리는 점점 커지며, 내 얼굴에 소리를 끼얹는 느낌이 들었다. 바삐 몸을 추슬러 슬며시 나가 보았다. 어머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셨다. 평일 내내 아침까지 차려주는데 주말이라도 며느리가 밥을 했으면 하시는 건 당연한 바람이다. 나는 두말없이 주말 아침의 주방 일을 이어받았다. 삼십 년을 지켜온 일요일에 대한 신성 모독이지만 어차피 나는 무신론자 아닌가.


성실하게 새벽같이 일어나 밥을 하던 어느 주말,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내가 집안일 하는 동안 남편은 참으로 맛깔나게 자고 있는 것 아닌가. 출근하지 않는 휴일, 남편의 평균 기상 시간은 무려 11시였다. 내가 지친 육신으로 애들 돌보며 밥하는 동안 완벽한 쾌적함이 보장된 상태로 쿨쿨 잔다. 주말이면 평소보다 일찌감치 일어난 아이들이 칭얼대며 아빠를 찾지만, 어머님은 불같이 화를 내며 "아빠 자는 데 방해하지 말라"고 호통을 치신다. 어머님의 강력한 아들 수호로, 아이들도 나도 휴일 아침에는 남편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신은 모든 곳에 갈 수 없어 어머니를 보내셨다 했던가. 오, 신이시여. 이런 예는 빙산 위에 꽂은 하드 정도라고 해두자.


흔히 시집가면 조선시대로 돌아간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날의 시집살이는 고대와 현대의 개념이 혼재하고 있다. 바야흐로 남녀차별 가치관의 나일론 시대다.


어머님 세대의 남녀관은 대단히 독특하다. 여자도 경제력이 있어야 하지만, 집안일은 안사람이 도맡아서 했으면 한다 정도가 되겠다. 아이들 키우는 게 힘들다는 걸 잘 알면서도, 아들을 생각하면 며느리도 함께 돈을 벌었으면 하신다. 그러나 반대로 며느리의 경제 활동은 어디까지나 부수입을 버는 정도로 집안일이 우선이며, 가장의 권위도 유지돼야 한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며느리들은 하루 아홉 시간씩 일하고 집에 들어와도 잠깐 앉아 있으면 게으른 여자가 된다. 집안일은 찾으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어머님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혼돈의 시대를 지나오신 탓이다. 어머님들이 새댁일 때는 가부장제가 당연시되던 시대였다. 남자가 주방 일을 한다는 것은 당치도 않았다. 가정 일은 모조리 어머니들의 차지였다. 교육 역시도 늘 어머님들 차지로, 아이가 공부에 재능이 없더라도 혼이 나는 건 어머님들이었다. 지금은 여자들 대부분도 경제권을 갖고 남녀평등 시대가 열렸지만, 불과 수십 년 전까지도 우리가 유교의 가치 속에 살았다는 걸, 어머님과 함께 살면서 몸소 느끼고 있다.


합가 후 내가 시집살이를 하고 있구나, 느낄 때가 있었으니 바로 명절이다. 드라마에서 그리는 명절의 모습은 이렇다. 여자들이 전을 뒤집으며 차례 음식 준비에 여념이 없는 동안 남자들은 한가로이 고스톱을 치는 모습이다. 명절 끝에 부부는, 왜 친정은 늘 나중에 가야 하냐며 다툰다. 은연중에 미디어의 장면들을 접하며 명절에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정도로 짐작했었지만 합가 후 현실이 되었다.


명절에 친정을 가기 어려워진 것이다. 막 결혼했을 당시엔 친정과 시댁이 이십분 거리였다. 그땐 차례 끝나면 곧장 친정으로 가서 엄마랑 오붓하게 드라마를 보며 쉬었다. 하지만 어머님이 수원에 오신 후로 친정과 시댁의 거리는 멀어졌고 명절에 친정 가는 횟수도 자연히 줄어들게 되었다. 어머님은 가까우면 몰라도 아이들도 있는데 어떻게 명절마다 친정을 가느냐는 입장이셨다. 남편은 내가 딱해 보였는지 친정을 가긴 가야 하지 않겠냐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기도 했지만 차례 지내고 손님까지 들이닥치면 막상 잊어버리는 모양이었다.


어렵게 이번 명절에도 못 가게 되었다며 엄마에게 전화를 드리면 친정 엄마는 괜찮다며 애들도 어린데 매번 어떻게 오냐고 위로하시지만, 아쉬워하는 얼굴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몇 해를 그렇게 보내고 나서 설날과 추석 중 한 번이라도 친정에 가자고 남편을 설득했다. 무려 명절에 며느리가 용감하게도 콘도를 예약해서 여행을 기획했다. 어머님도 함께 모시고 가족 여행처럼 가기로 한 것이다. 예전 어머님 세대의 시집살이 시절엔 상상도 못했을 일이지만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지 않은가.


명절 연휴 앞뒤로 연가를 내고 차례 끝나자마자 바로 출발했다. 남편은 여기저기 맛집을 검색하며 관광 계획을 짜서 어머님을 모셨고 콘도비 아깝지 않으냐며 툴툴대시던 어머님도 못 이긴 척 따라 나서셨다. 막상 오랜만에 고향 여행이 싫지 않으신 모습이다. 명절에 굳이 역귀성을 하지 않아도 되는 부산 도련님네도 양손 들어 반겼다.


여행 소식을 들은 친정 엄마는 소녀처럼 기뻐하셨다. 나는 콘도에 짐을 풀자마자 아이들은 남편에게 맡기고 친정집으로 달려갔다. 무얼 그리 차리셨는지 밥상 구석구석 틈이 없다. 자꾸 주방으로 나서는 엄마를 억지로 앉혀 막장드라마를 같이 보며 신나게 욕했다.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시댁 식구 모신다고 전화도 잘 못하시는 엄마에게 자꾸 전화하고 찾아와서 귀찮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딸들처럼 엄마와 헤어질 생각에 아쉬워서 엄마를 크게 안아보고 따뜻한 기운이 식기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의 힘을 받아 다시 엄마로 돌아왔다.


짧지만 명절에 친정 엄마 얼굴을 실컷 보고나니 명절 끝에 시집살이라며 분노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냉정을 찾고 생각해 보면 어머님을 원망하는 일은 부질없다. 평생 손이 닳도록 자식 뒤를 닦아 주셨는데 늙어서도 손자 뒷바라지에 뼈가 시리신 할머니들에게 달라진 세월을 이유로 팍팍한 잣대를 들이대는 건 잔인한 일이다. 변해버린 시대 가치를 논하며 어머님께 남녀 차별이 어쩌니 말씀드리고 싶을 때도 있지만 꾹 참는다. 칠십 평생 그렇게 살아오신 어머님이 며느리 몇 마디로 변할 리도 없고 서로 속만 상할 것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고단한 현실에 더 고단한 몸을 이끌고 도와주시는 어머님 얼굴을 마주하면 차마 그런 말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일생에 걸친 어머님 희생 앞에 어떤 가치가 우선할 수 있겠는가.


다시 휴일 아침,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새벽같이 농장 다녀오신 어머님은 벌써 국을 준비 중이시다. 아이가 일어나자 바쁜 손을 붙들어 뜨겁게 안아주신다. 국이 끓는 동안에 손자 이야기를 듣고 계신다. 포근한 아침 풍경이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어머님은 곤히 자는 아빠 깨우지 말라고 아이들에게 당부하고 계시는구먼. 그래도 예전처럼 속에서 불이 올라오지는 않는다. 그저 황급히 바쁜 어머님을 돕는다. 며느리로서 요령이 붙은 건지, 어머님의 일생에 걸친 희생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요즘은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오히려 편하다고나 할까. 그래, 내 몸 조금 더 쓰면 이리 평화로운 가정을 유지할 수 있을지니. 휴일의 신이시여. 이제 저를 놓아 주소서. 저는 밥 하러 주방으로 가야 한답니다. 저는 무신론자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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