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일하며 깨달으며, 적어 내려간 일상의 언어들 속에서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다
『밑줄 긋는 여자』『혼자인 내가 혼자인 너에게』에 이은 신작 에세이. 일 년의 절반은 해외로 영업을 다니는 직장인인 저자는 다양한 경험과 생각을 일상의 언어로 풀어내는 독특한 글쓰기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오늘’이라는 일상 속에서 의미를 길어 올리는 글을 쓰고 싶다는 저자의 바람이 담겨 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두 번째 들어갈 때 이미 그 물은 흘러가버렸기 때문이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일상의 단 한 순간도, 지나치면 다시 만날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다. 그래서 저자는 일상을 꼭꼭 붙잡아 매듭을 묶어서 차곡차곡 이어 붙이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오늘의 순간도 흩어져 사라져버리지 않도록 꼭 붙잡아두는 것이다. 그 순간순간이 차곡차곡 쌓여 드디어 ‘내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 속 이야기는 <나의 일상>이라는 일일 드라마와 같다. 늘 곁에 있는 사람들, 어쩌다 마주친 사람들까지…… 그들의 웃음과 한숨, 땀과 눈물, 다정함과 외로움, 위로와 상처, 영혼의 미세한 떨림, 삶의 희망과 균열 속에서 삶의 소중한 가치를 읽어냈다. 모두가 지치고 힘든 오늘이지만 이 글을 통해 나의 일상에 타인의 일상을 보태어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래본다.
■ 저자 성수선
저자 성수선은 에세이스트이자, 삼성정밀화학에서 일하는 직장인이다. 일 년의 절반은 세계 여러 나라로 영업을 나서고, 틈틈이 다양한 경험과 생각을 담은 글을 써왔다. 독특한 시각의 에세이『혼자인 내가 혼자인 너에게』(2012)는 SNS에서 따라 쓰기 열풍을 불러왔고, 『밑줄 긋는 여자』(2009)는 독서에세이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 차례
프롤로그
1장_ 우리는 세상이 얼마나 따뜻한지 아직 다 알지 못합니다
비타민 대신 술을 먹으면 어때
양은냄비 찌개가 더 맛나 보이는 이유
일요일에 짜장면 먹고 영화 보기
사는 사람 없는 물건 팔아주기
불편한 사람을 편하게 대하는 사회
인생의 코너에 몰려 있을 때의 친구
아끼지 말고 팍팍 축복 주고받기
손뼉 말고 기립박수 보내주기
대단하지 않는 일에 바치는 평생
닭살 돋는 대화에 퐁당 빠져보기
햇빛 속에서 시를 읽는 시간이 필요해
꼬치꼬치 묻는 대신 녹즙 갈아주는 엄마
봄에는 꼭 도다리쑥국을 먹어야 해
2장_ 가끔은 펄쩍펄쩍 뛰면서 반가운 마음을 표현해보시길
장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약간은 비린 과메기 같은 사랑
‘I remember you’라는 참 좋은 말
다 같이 웃으면 얼마나 좋은데
늘 자기방어부터 하고 있지 않은지
싫다고 하면 제발 그냥 내버려두기
외롭다고 아무나 만나지 않기
왜 이렇게 남자가 없는 걸까
영혼을 담아 립서비스하기
내 술상도 남편 술상 차리듯
착한 사람, 죄책감 느끼지 말기
나이 먹어도 꼰대는 되지 말기
예측 가능한 사람이 좋아
소원을 미리 생각해놓기
《국제시장》과 신상 마스카라
가슴 뛰는 순간을 기다리며
밀가루 안 먹기 다이어트의 교훈
의외로 쉽게 풀리는 일들도 많다
내가 할 일, 네가 할 일 구분하기
여전히 아웅다웅 서로 사랑하기
힘들 때 가만히 옆에 있어줄 사람
초복에 만나 몸보신이나 합시다
물귀신처럼 잡고 늘어지지 않기
3장_ 당신에게 타박타박 걸어오고 싶은 사람이 참 많습니다
절대로 나만 힘든 게 아니다
계속 길 위에 서 있다면, 됐다
언제나 주연을 할 수는 없다
자신의 길에서 역사를 만들기
김혜자의 신발 끄는 소리가 좋다
“행복하십니까?” 묻는 이들에게
맥주맛 모르고 맥주 팔면 안 된다
하다하다 안 되면 첫차를 타기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존중하기
핑계 대지 말고 기본에 충실하기
나는 드디어 내가 되었다
진부하게 최선 다하기
흔들리지 않는 한두 개의 원칙
모내기를 하듯 시간을 심자
내가 버티는 힘 한 가지
일상이란 ‘통증’ 같은 것
작가에게는 ‘일상’도 작품
짬뽕 한 그릇도 소설이 된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헷갈릴 때
인생을 망치는 충고에 속지 말 것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울음도 웃음도 마음대로 안 된다
4장_ 당신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바로 옆에 있어요
점심시간이 지난 식당에서
뭔가 계속 안 풀릴 때
성장 중독에서 벗어나기
마음 같아서는 펑펑 울고 싶은 날
천사는 분명히 있다
약국에서 팔아야 할 음악
따귀 맞은 영혼을 위로하며
누군가를 혼자 좋아하는 심정
배려하는 이별에 대해
다음 버스는 곧, 온다
별 탈 없으면 된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갈 때
듣는 사람의 감정에 대해 1
듣는 사람의 감정에 대해 2
다시 돌아오는 사랑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리워서
인간관계의 방정식
웃고 있다고 다 웃는 게 아님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줄 뿐
외로움을 조심하기
어제의 일기를 쓰며
감정을 표현하는 미묘한 차이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걱정 마, 오빠만 믿어
희망은 홈쇼핑처럼
5장_ 서로 보듬어주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일까요
고통을 견디기 위해서
타인의 고통에 대해 1
타인의 고통에 대해 2
타인의 고통에 대해 3
타인의 고통에 대해 4
타인의 고통에 대해 5
타인의 고통에 대해 6
닥치면 다 하게 되어 있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인가
고통은 비교해서는 안 되는 것
마음만은 늘 따뜻하시기를
6장_ 제주, 일상에서 벗어난 일상
가파도 해녀의 눈물
가파도와 청담동 사이
제주에서 순대의 위치
가파도 민박집의 아이
가장 시든 야채를 사는 친구
다 가질 수는 없다
제주에도 먼지가 쌓인다
나의 일상에 너의 일상을 더해
1장_ 우리는 세상이 얼마나 따뜻한지 아직 다 알지 못합니다
비타민 대신 술을 먹으면 어때
"너 지하철역 앞에서 나눠주는 000 알지? 공짜 신문 말야."
연말에 자영업을 하는 선배를 찾아가서 7천 원짜리 백반을 먹고 있는데, 북엇국을 뜨던 선배가 말했다.
"알죠. 근데 요즘은 보는 사람도 없지 않아요? 스마트폰 때문에?"
"요즘도 아침마다 나눠줘. 000역에서 아침마다 나눠주는 여든 넘은 할머니가 계신데 매일 아침 6시부터 9시까지 세 시간씩 나눠주고 받는 돈이 얼만지 알아? 20만 원이래. 한 달에. 이 추위에. 추우니까 받는 사람도 없어. 그래서 내가 아침마다 다섯 부씩 받아서 내릴 때 버려."
난 선배의 천진한 표정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서 장난스럽게 물었다.
"혹시 아침은 안 갖다드려요?"
선배는 놀라서 밥숟가락을 놓으며 말했다.
"어떻게 알았어? 아침마다 김밥 한 줄씩 갖다드려."
아, 내 주위에는 어쩌면 이렇게 오지랖 넓고, 맨날 남의 걱정이나 하고, 돈 안 되는 일에 자기 일처럼 나서고, 비타민 대신 허구한 날 술이나 먹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걸까? 근데 어쩌랴, 이런 사람들이 좋은걸.
불편한 사람을 편하게 대하는 사회
어제, 시카고 공항에서 영화 <야반가성>의 화재 후 장국영 같은 남자를 봤다. 얼굴 반쪽이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한쪽 눈이 내려앉았고, 피부조직은 심하게 손상됐고, 심지어 오른쪽 입꼬리가 아래위로 붙어서 말을 하려면 힘겹게 왼쪽 입술을 더 크게 벌려야 했다. 그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탑승객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는 공항 자원봉사자였다.
빨간색 봉사 재킷을 입은 그는 기계로 셀프 체크인을 못하는 노인을 친절하게 돕고 있었고,(미국 국내선은 대부분 기계를 이용해 셀프 체크인을 하도록 되어 있는데, 노인들이나 외국인의 경우 사용법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노인은 전혀 그를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고 세월아 네월아, 농담 따먹기를 하며 수속을 밟고 있었다.
순간 코끝이 찡했다. 존경을 표한다, 진심으로. 한쪽 얼굴을 잃고 사람들 앞에 나서서 봉사를 하는 그의 용기에, 아무런 편견 없이 그를 대하는 노인의 해맑은 태도에, 그의 자원봉사를 장려하거나 허용한 시민단체 또는 공항당국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며 소수자를 배려하는 성숙한 시민사회의 힘에.
대단하지 않는 일에 바치는 평생
박찬일 셰프의 새로운 산문집 『뜨거운 한입』작가의 말에는 김치 하나에 밥을 고봉으로 쌓아놓고 같이 먹던 중학교 친구들 얘기가 나온다. 며칠 전, 그 대목을 읽다가 울컥, 해서 박찬일 셰프에게 카톡을 보냈다. 답장이 왔다.
"바로 그 후기가 제 얘기들의 진심이에요. 알아줘서 고마워요."
이 책의 첫 이야기에는 술꾼 남편에게 해장국으로 홍합된장국을 끓여주는 매물도 해녀 얘기가 나오는데, 저자는 그 아주머니를 이렇게 표현한다.
"한산도 출신의 그 아주머니는 돌섬 매물도에 시집와 아저씨 술 뒷바라지에 평생을 바친 것 같았다."
남편 술 뒷바라지에 평생을 바친 여자. 나도 뭔가를 위해 평생을 바치고 싶다. 남들이 보기에 대단하거나 멋있는 일이 아닐지라도. 월요일 아침에 누군가 "주말에 뭐 했어?"하면 이틀 내내 뭘 했는지 생각이 안 날 때가 있다. 나름 분주했는데 뭘 했는지 모르겠는. 죽을 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감히 말하건대 평생을 무언가에 바쳤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인생은 값진 삶이리라.
햇빛 속에서 시를 읽는 시간이 필요해
어제, 강남 교보에 들러 세 권의 시집을 샀다.
1. 리산,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
이 제목을 보고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나도 작은 사설박물관 하나는 만들 수 있겠다.
2. 김소연, 『눈물이라는 뼈』
몇 년 전 산문집 『마음사전』을 읽고 그녀의 팬이 되었다.
3. 손세실리아, 『꿈결에 시를 베다』
손세실리아 시인의 새로운 시집. 길고 어렵고 난해한 시가 아닌, 이미지로 치환되는 따뜻한 시어들.
손세실리아. 그녀는 제주 조천에서 시인의 집이라는 카페를 한다. 그녀와 나의 첫 만남은 2012년 여름휴가였다. 노트북을 들고 바다를 보며 글을 쓰려고 갔었는데, 인사 겸 몇 마디 나누다가 죽이 맞아서 그만 하루 종일 술을 마셔버렸다. 나는 노트북 뚜껑을 닫고, 그녀는 장사를 접고 술을 마셨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언젠가 인생이 방향을 잃고 있을 때, 혼자서 그녀를 찾아간 적이 있다. 그녀는 말없이 온갖 좋은 재료를 다 넣은 피자를 정성껏 구워주었다. 그러고는 강아지에게 밥을 준 주인처럼 내가 먹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말로 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
새해 첫날이다. 너무 많은 계획 대신, 조금은 천천히 갈 필요가 있다. 무리한 계획을 남발하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대신, 햇빛 속에서 시를 읽는 시간이 필요하다.
봄에는 꼭 도다리쑥국을 먹어야 해
"오늘 도다리 되죠?"
"네, 도다리랑 다른 제철 회들을 섞어서 큼직하게 한 사라로 냅니다."
"도다리쑥국도 되죠?"
"아니요, 매운탕이나 지리만 됩니다."
"좀 끓여주시면 안 될까요?"
"쑥이 없습니다. 게다가 매운탕이 더 맛있습니다."
"네...... 그래도 봄이잖아요."
"(잠시 침묵) 그러면 이따 뵙겠습니다."
지난주 울산 갔을 때 단골 횟집 주인과 나눈 대화.
도다리쑥국을 끓이려면 쑥이 있어야 한다. 치즈라면을 끓이려면 치즈가 있어야 한다. 냉이된장찌개를 끓이려면 냉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 마음을 끓이려면...... 네가 있어야 한다.
>3장_ 당신에게 타박타박 걸어오고 싶은 사람이 참 많습니다
언제나 주연을 할 수는 없다
한 선배님의 부친상에 갔다가 한때 한국의 제임스 딘이라 불리며 시대를 풍미했던, 정제되지 않은 반항아적 이미지로 수많은 청춘물의 주연을 독차지했던, 이제는 아버지나 대하드라마의 장수 역으로 TV에서 볼 수 있는 중견 배우를 봤다. 그는 옆 테이블에 앉아 육개장을 너무나 맛있게 먹었다. 어렸을 때 봤던 그의 반항아적 이미지와 육개장을 후루룩 쩝쩝, 먹고 있는 후덕한 중년 남자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오버랩 됐고, 난 그만 그가 밥 먹는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는 불쾌해하는 대신,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뭘 그렇게 쳐다봐요?"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내 몫의 육개장을 먹었다.
화양연화라는 말이 있다.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 평범한 조문객들 사이에 섞여 앉아 육개장을 먹던 그 중견 배우는 인생의 화양연화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그는 정점을 한참 벗어나 있다. 누구든 그렇게 생각한다면 인생의 내리막길을 걷게 될 뿐이다. 후배들을 모아놓고 하릴없이 무용담이나 늘어놓으면서. 하지만 화양연화가 자신의 인생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순간이라면 아마도 화양연화는 지금, 이 순간일 것이다.
인생은 길다. 언제까지나 주연을 할 수는 없다. 누구나 제일 예뻤을 때가 있다. 물리적으로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20대 때보다 지금이 더 좋다. 조금 더 겸손하게 되었고, 조금 더 삶에 감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금 더,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
인생의 화양연화는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도, 육개장을 먹던 그 중견 배우에게도.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존중하기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땅콩 리턴 현장에서 오너 따님 또는 공주님에게 쫓겨나던 사무장이 1등석 손님에게 이렇게 인사를 하고 내렸다고 한다. 무릎을 꿇고 감당하기 힘든 모욕을 당한 채 결국 비행기를 돌려 쫓겨나던 그 패닉 속에서.
"고생한 만큼 인정도 못 받는데 혼자 개고생하지 말고 몸 생각하며 살살 해라."
이런 충고를 들은 적 있다. 웃으며 들었지만 속으로 스크래치가 짝짝 일렬로 나다가 그것들이 다시 엉키면서 폭음한 다음 날의 장처럼 꼬였다.
누가 알아주지 않을 수도 있고, 누가 폄하하고 다닐 수도 있고, 누가 네거티브를 뿜을 수도 있다. 뭐, 괜찮다. 제일 중요한 건, 스스로를 향한 자존감에 생채기가 나지 말아야 한다. 쫓겨나는 상황에서도 고객 서비스를 잊지 않는 건, 실컷 고생하고 욕을 먹더라도 웃을 수 있는 건, 스스로를 존경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Respect Myself!
흔들리지 않는 한두 개의 원칙
"어른이 된 이후 항상 5~6파운드(3킬로그램 미만) 변화 안에서 체중을 유지해왔어요."
한 60대 백인 남자가 무척 자랑스럽게 말했다. 언뜻 미국인들은 매우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할 것 같지만, 중년 이상의 중산층 백인들을 보면 아주 보수적이고 스스로에게 엄격한 사람들이 많다.
스스로 정한 규칙, 스스로를 통제하기 위한 가이드라인, 스스로에게 지시하는 행동강령이 있는 사람들을 가끔보다 자주 보게 된다. 이를테면 이런......
- 커피는 아침에 한 잔만 마신다.
- 탄산음료를 마시지 않는다.
- 담배는 하루에 o개비만 피운다(시간이 정해진 경우도 있음).
- 저녁 o시 이후에는 먹지 않는다.
- 와인은 o잔 이상 마시지 않는다.
사실 좀 갑갑하고 쪼잔해 보이기는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규칙, 원칙이 있는 게 좋아 보인다. 예전에 모 탤런트와 함께 교회 수련회에 다녀온 친구가 졌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장난 아니야. 시골 학교 교실에서 몇 십 명이 같이 자는데, 윗몸일으키기 몇 백 개 하고 팩 붙이고 자."
기분에 따라, 날씨에 따라 쉽게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는 한두 개의 원칙이 필요하다. 특히, 밤에 먹지 않는 결단!
작가에게는 일상도 작품
전업작가를 만났던 적이 있다. 음...... 여기서 만났다는 말은 요즘 말로 썸탔다 뭐 이런 의미. 그 남자를 만나면서 가장 큰 문제점은 주말 개념이 없다는 거였다. 난 주말을 손꼽아 기다리는 회사원인데, 어딘가에 소속되어서 일해본 적이 없는 그는 평일이나 주말이나 그냥 똑같은 날이었다. 게다가 회사원의 시선으로 볼 때 그는 무척, 게을렀다. 하루 종~일 빈둥거릴 때도 많았다. 한번은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리모컨 찾기가 귀찮아서 하루 종일 같은 채널을 봤어."
한심하게 쳐다보는 나에게 그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 작가에게는 말이야, 버리는 시간이 없는 거야. 하루 종일 TV 본 얘기로 칼럼 썼어. 그 신문 칼럼료는 좀 되거든. 감자탕 먹을래?"
그가 한 예능프로그램에 대해 쓴 칼럼료로 우리는 처음처럼 로고가 들어간 앞치마를 하고 앉아 뼈다귀를 뜯었다. 서로 고기는 발라주지 않았다.
가끔씩 그의 말이 생각난다. 작가에게는 버리는 시간이 없는 거야. 음, 그 말이 진짜인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뭐든 넣고 비비면 되는 비빔밥처럼 뭐든 글을 쓰는 소재가 되는 건 사실이다. 버리는 시간은 없다고 말한 남자에 대해서도 쓸 수 있듯이. 생산성에 대한 강박을 좀 버리자, 라고 생각해보는 토요일 밤이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어느 저녁, 친구의 친구인 시나리오 작가가 하는 실내포차에 들렀다. 그의 장르는 스릴러이고 아직 입봉은 하지 못했다고 했다.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 난 그와 뭔가 대화를 해야 할 거 같아서 이렇게 물었다.
"사람이 많이 죽나요?"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연쇄살인이 소재지만, 인간의 존엄성이 주제입니다."
난 눈을 껌뻑하며 말했다.
"네, 그래서 사람이......."
그때 다른 손님이 그를 호출했다.
"다음에 또 얘기하시죠."
시나리오는 많고, 제작되는 영화는 드물고, 개봉되는 영화는 손가락으로 꼽는다. 세상에 쉬운 일이 없다. 연탄돼지구이가 맛있었다. 새해에는 그가 꼭 입봉하기를 바란다.
5장_ 서로 보듬어주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일까요
고통을 견디기 위해서
사람마다 고통과 모멸을 견디는 방법은 다르다.
누군가는 기도를 하고, 누군가는 술을 마시고, 누군가는 도를 닦듯이 운동을 하고, 누군가는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누군가는 혼자만의 방에 틀어박히고, 누군가는 클럽에 가서 미친 듯이 춤을 추고, 누군가는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만나고, 누군가는 질 나쁜 연애에 몸을 던지고....... 모두, 다르다.
클럽에서 춤을 추고 있다고 해서, 어깨를 흔들며 자지러지게 웃고 있다고 해서, 그게 다, 신이 나서 그러는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사람들은 자신보다 고통이 경미해 보이는 타인을 감정 없는 사람으로 취급한다.
저 멀리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끌려간 흑인 노예들은 쇠고랑을 찬 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고통을 견디기 위해서. 그리고 살집이 뒤룩뒤룩한 백인 주인들은 검둥이 노예들이 좋아서 그러는 줄 알았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2
어느 나라, 어느 도시나 역이나 터미널 주변에는 홈리스들이 많다. 얼마 전, 뉴욕의 한 버스터미널 화장실에서 일회용 면도기로 머리를 밀고 있는 흑인 여자를 봤다. 거울 앞 세면대 위에는 그녀의 것으로 보이는 잡동사니가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그 사이에는 마구 엉클어진 가발도 있었다. 아마도 가발을 벗고 흐트러진 머리를 다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알아듣지 못할 말을 혼자 중얼거렸다. 고열 환자의 열에 달뜬 신음소리 같기도 했고, 마약을 한 래퍼의 리듬을 벗어난 랩 같기도 했고, 뭔가에 배신당한 자의 통성기도 소리 같기도 했다. 그녀의 다리는 상체에 비해서 비정상적으로 말랐다. 그녀는 탄력 없는 맨다리에 긴 부츠를 신고서 면도기로 머리를 밀거나 또는 다듬기를 계속 했다. 누가 무섭다고 신고를 했는지 여자 경찰이 그녀 주위를 맴돌았고, 세면대 위에는 가발을 비롯한 그녀의 전 재산이 무심하게 흩어져 있었다.
웬만하면 가고 싶지 않은 공용 화장실이 삶의 공간인 사람들이 있다. 언젠가 서울의 oo역 화장실에 뜨거운 물이 나오자 노숙자들이 많아져서 뜨거운 물 단수를 검토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그늘은 상상보다 참혹하다. 으리으리하고 비싼 산부인과에서 태어나는 축복받은 아이들도 많지만, 지저분한 공용 화장실에서 태어나는 불운한 아이들도 있다. 그리고 그들의 출생 장소는 이렇게 기록된다. oo역 화장실 o째 칸.
타인의 고통에 대해 4
주사기를 여기에 버리지 마시오. 주사기는 세면대 옆 별도의 수거함에 버리시오.
공항 화장실에서 주사기를 버리지 말라는 문장을 읽고 한참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말이지? 설마 화장실에서 마약을 하고 주사기를 나와서 버리라는 말인가? 너무 궁금해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검색을 했다. 그리고 나의 무지함과 무심함에 스스로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당뇨병을 비롯해 관절염, 심각한 알레르기 환자들은 스스로의 팔에 주사기를 꽂아야 한다. 화장실에서 스스로의 팔에 주사기를 꽂는 누군가의 일그러진 표정, 바늘이 들어갈 때의 고통, 습관이 된 경련을 상상하니 왠지 숙연해졌다.
타인의 고통은 누군가가 배변의 쾌락을 느끼며 물을 내리는 사이에 옆 칸에서 아무도 모르게 진행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6
어제, 마트에 물을 사러 갔는데 길고 긴 흰색 리무진이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리무진의 드라이버로 추정되는 슈트 차림의 뚱뚱한 흑인 남자는 피자집 앞에 차를 세우고 피자와 콜라를 사서 다시 주차장 널찍한 곳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 피자상자를 왼손으로 받쳐 들고 오른손으로 조각 피자를 우걱우걱, 맹렬한 속도로 먹었다. 우걱우걱 피자를 먹다가 목을 젖히고 콜라를 마시고, 다시 피자를 우걱우걱.......
시간은 일요일 오후 2시. 밥 먹을 시간을 놓친 것 같았다. 점심시간이 지난 허름한 중국집에서 혼자 곱빼기 짜장면을 시켜 먹는다라기 보다 입에 밀어 넣는 인부를 보는 것 같았다. 저렇게 급하게 먹고 종일 운전을 하다 보면 걷기 힘들 정도로 살이 찌게 될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비만은 빈곤의 상징이야."
난 우걱우걱 피자를 먹는 남자를 바라보며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차에 피자냄새 뱄다고 혼나면 어쩌지?
닥치면 다 하게 되어 있다
"텍사스의 아이들은 열다섯 살이 되면 운전면허를 땁니다. 미국은 주마다 면허를 딸 수 있는 최소 연령이 다른데, 텍사스가 제일 어려요. 왠지 아세요? 부모를 도와서 일을 해야 하거든요."
오늘 이 말을 듣고, 열다섯 살의 어린 카우보이들을 떠올리니 가슴이 먹먹했다. 겉멋 들어서, 또는 어른 흉내 내려고, 놀러 가고 싶어서 몰래 부모 차를 몰아보는 게 아니라 집안일을 도우려고 일찌감치 운전대를 잡는 것이다. 트럭에 송아지도 싣고, 돼지도 싣고, 화물도 싣고, 부모님 심부름을 가는 어린 카우보이들.
내가 운전 스트레스로 징징대니까 누군가 텍사스 아이들 얘기를 하며 나의 엄살을 지그시 눌러주었다. 미국에서 운전은 생존이다. 무서워서 안 하고, 하기 싫어서 안 하고, 피곤해서 안 하고 이런 거 없다.
그 후, 미국 생활에 적응하면서 내가 운전을 못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서울에서는 하기 싫고 안 해도 되니까 못한다는 핑계로 안 했을 뿐이고, 미국에서는 운전 안 하면 물도 한 병 못 사러 가니까 씩씩하게 잘만 하고 다닌 것이다. 몇 개월 후에는 200킬로미터씩 혼자 운전하고 다니면서 이러다 버스도 몰겠다는 자신감마저 들었다. 필요하면, 닥치면, 다 ~ 하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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