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바쁘게 사느라, 그리고 나와 맞지 않아 평생 외면하고 살았던 사람, 아버지
그러나 결국 그는 나와 가장 닮은 사람이었다!
어느 날 사소한 사고에 연이어 암 선고를 받고 어머니가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폐기종 증세가 있는, 홀로 남겨진 아버지를 어찌 해야 할까. 일본 경제 부문 베스트셀러 작가 히라카와 가쓰미의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한 1년 6개월간의 부친 간병 이야기.
서로 어긋나기만 했던 아버지를 위해 본가에 나 홀로 들어가 간병에 돌입한 작가. 평생을 너무나 다르다 생각해 겉돌고 반발만 해왔던 아버지의 말년 투병 과정과 죽음을 지켜보며 새롭게 인생에 눈을 뜬다. 부모님이 생존해 계신 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일이며, 나아가서는 ‘나’와 ‘우리’ 모두에게 닥칠 일들과 생생하게 대면한다.
■ 저자 히라카오 가쓰미
1950년 도쿄 출생. 와세다대학 이공학부 기계공학과 졸업 후 번역을 주 업무로 하는 주식회사 어번 트랜슬레이션을 설립하여 대표이사에 취임하였다. 1999년 실리콘밸리의 비즈니스 카페Business Cafe Inc. 설립에도 참가하였으며 현재는 주식회사 리눅스 카페 대표이사이자 릿쿄대학 대학원 특임교수를 역임하고 있다.
저서에 《반전략적 비스니스의 권유》, 《주식회사라는 병》, 《경제성장이라는 병》, 《이행기적 혼란-경제성장 신화의 종말》, 《소상인小商人에의 권유-경제성장에서 축소 균형의 시대로》 등이 있으며 《골목길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다》, 《소비를 그만두다》는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어 이름을 알렸다.
그의 경제서는 특히 고도 경제성장기 이후 자본주의의 병폐와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거대 담론이 아닌 실천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특징적이다. 공저로는 소학교 친구인 우치다 다쓰루와 함께 쓴 《도쿄 파이팅 키즈》, 《도쿄 파이팅 키즈·리턴 나쁜 형들이 돌아왔다》 등이 있다.
■ 역자
박영준
중앙대학교 일어일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천대학교 일어일문과에서 초빙교수로 활동하며 중앙대학교 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중앙대학교 다문화콘텐츠연구사업단에 연구 교수로 재직 중이다.
송수영
대학과 대학원에서 일본 문학을 공부하였다. 《Friday》, 《Traveller》, 《여행스케치》 등의 편집장을 거쳐 현재는 출판 업무와 전문 번역에 종사하고 있다. 저서로 《어떻게든 될 거야, 오키나와에서는》이 있으며 《여행의 공간 1》, 《고운초 이야기》, 《온다리쿠의 메갈로마니아》, 《한 그릇 카페 밥》, 《캠핑 가서 뭐 먹지?》 등 다수의 번역서가 있다.
■ 차례
제1장 어머니의 죽음
제2장 쓰레기 저택
제3장 탕아의 귀환
제4장 생사를 건 도박
제5장 간병의 관문
제6장 죽음에의 친밀감
제7장 유령
제8장 북풍을 예고하는 구름
제9장 변곡점
제10장 또 하나의 세계
제11장 푸른 하늘
마지막 장 봄날 보드라운 빗속에 아버지는 돌아왔다
그 후의 일
글을 마치며
옮긴이의 말
나를 닮은 사람
어머니의 죽음
이야기라는 형식
나는 지금부터 나를 닮은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려한다. 여기서 나를 닮은 사람이란 한 달 전쯤 돌아가신 내 아버지를 말한다.
나는 본가로 돌아와 1년 반 동안 아버지를 간병했다. 매일매일 아버지를 위해 밥을 짓고, 목욕시키고, 머리 손질도 해드리며, 대소변으로 더러워진 옷을 빨았다. 그 전에, 다시 말해서 간병생활을 하기 전까지 사실 나는 아버지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또 나는 아버지가 무엇을 하고 계신지, 어떠한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지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물론 아버지가 하시는 일은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결혼하자마자 사이타마 현 야시오 촌 반바에서 오타 구의 변두리 마을로 이사했다. 나는 아버지가 주민자치회 회장직을 오래 하신 것과 뛰어난 프레스 금형 장인이며, 읍내에 있는 작은 공장의 사장인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아버지의 내면세계에 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흥미도 갖지 않았다.
내가 아버지에 대해 알고 싶다고 생각할 때는 이미 아버지가 아무 말씀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였다. 가족이나 자신이 만든 공장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왜 그토록 주민자치회 활동에 집착한 것인지, 어머니를 여읜 후 어떠한 기분으로 생활하셨는지, 그리고 빠른 속도로 압박해오는 늙음과 죽음을 어떠한 심정으로 마주했는지에 대해 이제부터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 글은 87세로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에 대해서, 그 마지막 1년 반 동안 내가 파악한 그의 내면에 관한 이야기인 셈이다. 물론 그것이 사실이며 진실이라는 보증은 없다. 인간 내면세계라는 것은 제대로 들여다볼 수도 없고 형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기술하는 것은 아버지의 과거이다. 이는 또한 그의 자식인 내가 언젠가는 조우해 똑같이 좌절하거나 곤혹스러워하면서, 극복하거나 완전히 굴복할 미래의 모습일 것이다. 다시 말해 아버지가 늙어가는 모습은 내가 늙어가는 모습이기도 한 셈이다.
어머니의 입원
2009년 늦여름 무렵부터 어머니는 다리와 허리가 아프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이 이야기는 2009년 말부터 시작해 2011년6월 아버지가 숨을 거두기까지 약 1년 반이라는 짧은 기간에 일어난 사건이 중심이다. 그사이 어머니의 입원과 그에 따른 본가 개축, 어머니의 죽음, 잇따른 아버지의 입원이 있었다. 본가는 간병용도로 또다시 개축이 이루어졌다. 이후 나와 아버지 두 사람만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어느 한 인생의 만년에 대한 관찰이며, 동시에 고령화 사회에 들어선 일본의 현실에 대한 사적 고찰이다. 글은 대단히 개인적인 체험이나 이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현실이기도 하다.
2009년이 끝나갈 무렵, 어머니가 너무나 갑작스레 먼 여행을 떠나셨다. 향년 83세였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은 사고였다. 나는 그날 밤 오사카에서 강연이 예정돼 있었다. 강연 시간이 다 되었기에 휴대전화의 전원을 끄려는 순간 벨 소리가 울렸다.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으니 어머니가 현관 끝에 발이 걸려 넘어져 대퇴골이 골절되었다는 전언이었다.
그런데도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청중에게 "어머니께서 골절상을 당하신 것 같습니다. 중상은 아닌 듯하니 당장 돌아갈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강연을 시작했다.
다음 날 오사카에서 올라오자마자 곧바로 도쿄의 병원으로 부랴부랴 달려갔더니 어머니는 웃으시면서 "일냈다"고 하셨다. 이전에도 허리가 아프다, 무릎이 아프다고 해서 몇 차례 통원 치료를 받으신 터라 다리와 허리를 치료하시라고 말씀드렸다.
순간적으로 "혹시 어머니가 이대로 집에 돌아가시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느낌이 가슴 한쪽을 싸늘하게 지나갔다.
다음 날 나는 의사에게 불려갔다. 치료법에 관해 상의할 것이 있다고 했다. 내용인즉 대퇴골 골절에 한 가지 까다로운 문제가 있다고 했다. 골절된 뼈의 일부가 으깨져 대퇴부를 절개해 골절 양 끝을 볼트로 연결해야 하는데, 접합할 부위의 골밀도가 낮아 볼트를 지탱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접합 부위 양 끝을 시멘트 같은 것으로 채워 연결하는 방법을 시도하겠단다. 골다공증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많지 않았지만 노인의 뼈가 약하다는 것쯤은 감각적으로 충분히 이해했다.
대퇴골 골절로 입원하셨으나 내 기억에 어머니가 다치거나 병원에 누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번 입원이 어쩌면 시집와 처음으로 갖는 휴식이었는지 모르겠다. 골절상 때문에 입원한 것이 휴식이라니,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장시간의 수술
며칠 뒤 병문안을 갔더니 어머니는 "여기가 천국이야"라며 찡긋하셨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세끼 식사에 목욕까지 이것저것 보살펴주는 병원이 일만 해온 어머니에겐 분명 천국과도 같았을 것이다.
의사에게 설명을 들은 다음 날 수술이 진행됐다. 1시간 정도 예상한 것이 의외로 난항이었다.
나와 아내, 큰이모와 이종사촌 형은 수술이 시작된 저녁 8시부터 수술실 앞 의자에 앉아 무사히 끝나기를 노심초사하며 기다렸다. 도중에 수혈이 필요해 수술실 문이 몇 차례 열리고 수혈용 혈액이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도대체 어디가 잘못돼 수술이 지연되는지 걱정스러웠다. 앞서 말한 의사의 설명에 따르면 수술 자체는 큰 어려움이 없으나 위험한 것은 합병증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생명에 치명적인 위험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대기하는 동안 불안감이 점차 커졌다. 수혈 거부 반응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대퇴골을 열어보았더니 분쇄 골절 상황이 예상외로 복잡해서 접합이 원활하지 않은 것일까? 무엇보다 장시간의 수술을 노인인 어머니가 잘 견뎌낼 수 있을까?
거의 한계에 이르렀다고 생각될 즈음 수술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나와 끝났습니다하고 보고했다. 수술은 까다로웠지만 성공했다고 했다. 의사는 2주일 정도면 퇴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일전에 언뜻 혹시 돌아오지 못하시는 것은 아닐까 하던 불안이 기우였다고 안도했다.
이때는 아버지도 아직 정정하셨다. 집에서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병원까지 몇 번이나 걸어서 문병을 오셨단다. 아버지는 중요한 일은 무엇이든 혼자서 결정하는 독단적인 타입이다.
불행한 퇴원
어머니의 안색도 좋고 표정도 밝아져 금방이라도 퇴원할 것 같았다. 슬슬 퇴원 이후를 준비해야겠다고 하는 참에 의사로부터 상담할 일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출혈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 이었다.
자궁에 출혈이 있는데 그쪽은 본인의 전문분야가 아니라며 대학병원을 소개했다. 그곳에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라고 했다. 며칠 후 나는 소개장을 들고 초현대적 시설의 대학병원에 휠체어를 탄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
이름을 불렸을 때 이미 어머니는 지쳐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한 차례 증상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커튼 안쪽에어 자궁 상태를 검진했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바로 "이거, 심각한데. 즉시 입원 준비......"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간단한 검사를 받을 요량으로 찾았는데 숨 돌릴 새 없이 수속이 진행되고 그대로 입원하게 되었다. 말기 자궁경부암이라고 했다. 갑작스러운 병명에 나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나는 늘 어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어머니의 병에 대해 아무 근거도 없이 그저 괜찮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실제로 만나면 어머니는 혈색도 좋고, 목소리도 크고, 늘 웃고 계셨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몇 번이나 전화를 하셔서 집안 좀 살피러 다녀가라 하셨다. 일이 바쁘기도 했지만 마주하기 불편한 아버지를 만나는 일이 껄끄러워 마지못해 한 달에 한 번 방문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본가에 머무는 것도 1~2시간 정도였다. 앞으로 부모님을 돌볼 생각이 있는지 추궁당하는 것을 내심 피하고 싶은 것이 아마도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병원을 옮긴 뒤 어머니의 증세는 날로 악화되었다. 의식이 뚜렷하지 않은 날이 이어지고 음식을 잘못 넘길 수 있어 금식 결정이 내려졌으며, 손에 구금용 장갑이 채워지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더 이상은 힘들겠다." 평생 강인하던 어머니가 처음으로 나약한 소리를 했다. 그 며칠 뒤 일요일, 어머니는 허망하게 저세상으로 떠났다.
탕아의 귀환
남자 둘만의 생활
본가로 옮겨와 살기 위해서 우선은 나의 잠자리를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본가는 2층 건물 세 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예전 공장이던 부지엔 이제 서니 하이츠라는 아파트가 들어섰고, 공장 사무실이던 곳은 현재 주민자치회 사무실이 되었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 양친이 노인끼리 병 수발을 들던 안채가 있다.
안채 1층 개축을 위해 그곳에 쌓여 있던 쓰레기 대부분을 주민자치회 방에 임시로 옮겼다. 주민자치회 사무실에 온갖 잡동사니가 빽빽이 쌓였다.
어머니가 쓰러지기 전까지 안채 2층의 방 두 개엔 아버지와 어머니의 침대가 각각 놓여 있었다. 이때 이미 아버지의 침대 옆에는 산소통과 흡입기가 자리했다. 산소통은 필립스와 계약해서 임대한 것이다. 2개월에 한 번씩 청구서가 날아오는데 매달 1만엔가량의 비용이었다.
오랜 세월 아버지는 폐기종을 앓았는데 이 때문에 심장에도 부담이 가 호흡곤란에 빠진 적도 있었던 모양이다.
부엌과 화장실, 목욕탕을 중심으로 한 1층 개조는 어머니를 위한 것이었지만 이번엔 내가 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2층의 방 두 개를 리모델링해야 했다. 두 방 모두 다다미 곳곳이 울퉁불퉁 부풀어 오르거나 움푹 파여 있어서 용케도 이런 방에서 잠을 주무셨구나 하고 그제야 처음으로 깨달았다. 어떻게까지 몰랐는지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지만 그 만큼 내가 양친의 생활에 무관심했다는 의미일 게다.
짐을 옮기노라니 방탕한 아들이 마침내 귀환하는 듯한 감회가 들었다. 학창 시절 수많은 비밀이 깃들어 있는 나의 방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본가에서 본격적으로 아버지와 둘이 살겠다는 결심은 서지 않는다. 내 방은 확보하였으나 그것은 주중에 몇 번 상태를 보러 왔다가 묵고 가기 위한 공간으로, 당분간은 도도로키의 내 방과 본가의 서재를 오가며 생활을 계속할 요량이었다.
노화의 이득
질병이득. 일전에 우치다 다쓰루, 오자지마 다카시, 마치야마 도모히로 등의 저술가와 함께 헌법 9조에 관한 책을 쓸 때, 우치다가 이 말을 이용해서 일본인과 헌법의 관계를 설명한 바 있다. 우치다는 이 말을 정신과 의학박사인 가스가 다케히코와의 대담에서 알게 된 모양이다.
나는 우치다 다쓰루의 논리적 주장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과 의사와 대담에서 배운 질병이득이라는 말을 깊이 음미하여 이를 곧바로 일본인의 정신 구조에까지 연결시킨 그의 재능에도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튼 질병이득이라는 말에는 뭔지 모를 신기한 환기력이 있다. 비단 우치다에게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끄는 무언가가 내재되어 있는 듯하다. 질병이라 하면 모든 인간이 어쩔 수 없이 겪는 네거티브한 상태로만 인식되지만 그곳에도 나름의 긍정적인 의미가 감추어져 있음을 시사한다.
인간의 불가항력적으로 질병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뭔가 이유가 있어 질병이라는 상태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설령 가망이 없는 질병이라도 거기에서 한 줄기 희망을 찾아낼 수가 있다.
원래 이 말은 프로이트가 신경증에 걸림으로써 심적 고통에서 도피하는 심리적 기제를 설명할 때 사용한 말이다. 처음 들었을 때는 단지 재미있는 사고방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버지와 2년간 함께 생활하면서 나는 이 말을 몇 번이나 곱씹었다. 때로는 상황을 납득하기 위해, 때로는 나 스스로를 안도시키기 위해. 그리고 마지막은 눈앞의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간병 과정에서 이득의 의미를 절실히 실감했다. 처음 그것을 느낀 것은 보행이 여의치 않게 된 아버지가 갑작스레 변을 보았을 때이다.
주민자치회 회장이라는 감투를 쓰고, 소방과 방법 등 활발한 지역 활동으로 경시총감상 수상 외에도 각종 명예를 누리셨으며, 마을에서 지도적 역할을 해온 아버지로서는 보행할 때마다 도움을 받아야 하고 남의 손을 빌려 대소변을 처리해야 하는 사실이 틀림없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인물이 예전의 우두머리격의 인간이 아니라 기억도 드문드문한 노인이라면 받아들이기가 한결 수월할 것이다. 다시 말해 건강하던 시절 자신의 프라이드를 지키고 위한 증상이 이즈음 나타난 기억의 상실과 단절이 아니었을까. 노화도 또 하나의 이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이상으로 그 말을 강하게 의식한 순간이 바로 아버지가 처음으로 긴급하게 입원하던 때였다. 입원 후 곧바로 아버지에게 강한 섬망이 나타났다. 섬망이란 입원 쇼크로 일시적으로 정신착란 상태가 되는 것으로 환각이 나타나고 망언이 터져 나온다. 많은 경우 이를 보는 가족이 큰 충격을 받는다.
의사는 이것이 일시적이며 노인이 입원하면 3할에서 5할 정도의 비율로 증상이 나타난다고 설명해주었다. 그럼에도 눈앞에서 육친이 정신을 잃은 상태로 큰 소리를 지르고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너무도 괴로운 일이다.
나도 처음에는 완전히 다른 인격이 되어버린 아버지를 보고 충격을 받았지만 그 모습을 관찰하는 동안 조금씩이나마 생각에 변화가 생겼다.
아버지의 섬망은 오전 중에는 비교적 평온하여 반각반수의 상태지만 야간이 되면 마치 미치광이처럼 변하기도 했다. 나는 이것을 보고 아아, 아버지가 무너지고 있구나 하고 현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한번은 잠시 정신을 차린 아버지가 "몇 개월씩 병원에 있기가 괴롭구나, 돌아가고 싶다"라고 토로하셨다. 보행이 가능하고 책을 읽거나 텔레비전 등을 볼 수 있다면 입원을 해도 한때의 휴식으로 생각할 수 있겠으나 몸이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한다면 아무리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라도 비명을 지를 것이다.
그 후 나는 정신이 돌아와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으시느니 차라리 섬망 상태로 있는 것이 당신에게 더 편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평온한 나날들
2009년으로 돌아가, 즉 어머니가 가시고 처음 몇 달간 아버지는 아직 간병이 필요한 상태는 아니어서 혼자 해나가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본가에 들어간 것은 아버지를 혼자 두면 화재, 돌발적인 사고에 대처하지 못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여위긴 해도 정신적인 불안만 극복하면 아직은 건강한 생활이 가능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우선 쓰레기를 밖에 버리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때까지 아침 식사 준비나 설거지, 세탁, 청소 식재료 장보기, 목욕 준비까지 모두 어머니가 담당하셨으므로 이 모든 일을 고스란히 내가 떠맡아야 했다.
물론 밥은 전날 밤 밥솥에 안쳐두면 자동으로 되고 더러운 옷은 세탁기로 돌리면 전자동으로 기계가 끝내준다. 목욕물도 예전처럼 풀무로 식히거나 부채질할 필요가 없이 스위치 한 번 누르면 끝이다. 세상이 편리해진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고 출근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맞추어 문을 열어둔 채 회사로 나섰다. "다녀올게요" 하고 내가 말하면 아버지는 꼭 "오늘은 몇 시에 오냐" 하고 물었다. 역시 홀로 계시는 것이 불안하셨을 것이다.
점심때는 가사 도우미가 방문해 점심 식사를 차려주고 그날의 상태를 노트에 적고 돌아갔다. 나는 회사가 끝나는 대로 집 근처 슈퍼마켓에 들러 식재료를 사와 저녁을 준비한다. 식탁 위에 준비한 음식을 놓고 가사 도우미가 기록한 것을 읽으면서 식사를 했다. 대화라고 해봤자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나?, 누가 왔나?, 몸은 어떤가? 하는 정도였다.
이렇게 간병 생활이 조용히 그리고 평온하게 시작되었다. 맨 처음 내가 놀란 것은 간병 생활에 돈이 거의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연금과 아파트 임대 수입으로 두 사람이 생활하는데 부족함이 없어서 나의 수입은 최대한 공간을 쾌적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가구와 간병용품 구입에 썼다.
아버지는 내가 만드는 식사를 맛있다, 맛있다 하며 드셨다. 그런 말을 들으면 얼치기 주부 주제에도 더 즐거워하시도록 특별한 요리를 시도하기도 했고, 저녁 식사 후 특제 디저트를 만들기도 했다.
사회와 단절된 내향적인 두 남자의 생활이 조용히 이어지면서 조금씩이긴 하지만 아버지와 대화 시간도 늘었다. 뭔가 체계적인 이야기가 오간 것은 아니다. 드문드문 옛날이야기를 하거나 향후 주민자치회 운영 계획, 아파트 주민의 일 등 아버지 신변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얼마 후 신청해둔 간병인 지원 심사를 위해 구 조사원이 방문해 간병 인증에 필요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결과는 요지원 2급이었다. 조사원이 인터뷰를 하러 오면 천성적으로 사교성이 좋은 아버지는 갑자기 활기를 되찾아 붙임성이 좋아지고 대답도 똑똑히 하셨다.
조사원이 돌아간 뒤에 "몸이 더 안 좋아 보이도록 해야죠" 하고 조금이라도 유리한 판정을 기대하던 바람을 비쳤더니 "그런가, 다음에는 그리 하마"라며 웃으셨다.
간병 인증이란 간병보험제도에서 자치단체가 인증하는 간병 기준으로, 이것을 취득하면 보조금과 공적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요간호와 요지원 두 개의 카테고리가 있으며 간호는 5단계, 지원은 2단계 등급으로 나뉜다.
요간호란 목욕, 배설, 식사 등 일상생활에 있어서 기본적인 행동 전부 또는 일부에 대해 일정 기간에 걸쳐 지속적이며 상시적인 간호가 요망된다고 판단하는 상태이다. 요지원이란 요간호 상태까지는 미치지 않지만 부분적인 간호와 지원 등이 필요한 상태를 말한다.
이때 아버지는 기억장애와 보행장애 등이 있었지만 기실 지속적인 간병은 필요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1개월 사이에 상태가 완전히 급변했다. 요지원 2가 요간호 4가 되었다가 곧바로 가장 위중한 요간호 5로 격상했다.
그 단초가 된 것이 최초의 입원이었다. 애당초 대수롭지 않은 감기라고 생각하고 입원한 아버지가 생사의 갈림길을 헤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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