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소소하고 평범한,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은 일상이 주는 감동
여느 평범한 삼십대처럼 직장생활을 하던 보통의 한 남자가 ‘지금 내가 잘 살고 있는 걸까’라는 의문을 품으면서 시작된 이야기 『방구석 라디오』. 한 번쯤 고민했으면서도 너무나 사소하다고 느껴 지나쳐버린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담아낸 책이다. 저자의 경험 속에서 건진 의미 있는 단상들과 함께 담겨있는 풍성하고 생동감 넘치는 그림은 독자들에게 잠시 동안 멈춰 있으며 생각할 시간을 만들어준다.
이 책의 글들은 포장되지 않은 담백함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간다. 하루를 그냥 흘려보낸 것 같아서 아쉬우면서도 고민스러웠던 하루가 빨리 지나가버리기를 바라는 모순된 마음, 행복하기 위해서 좋아하는 것들을 절제했는데 그게 행복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불행해지고 싶지 않았던 건지 점점 모르겠다는 생각, 누군가 진심으로 다가와 주길 바라면서도 딱딱하게 굳어버린 내 마음이 안타깝다는 고백까지… 지난 시절을 추억하는 저자의 모습은 잊고 있던 나의 일상과 솔직한 내 마음을 돌아보게 만든다.
■ 저자 모자
세상을 마음으로 관찰하는 작가. 필명 모자의 의미는 작가의 말로 대신한다. ‘모자를 좋아합니다. 모자라서 그런 가 봅니다.’ 조금은 서툴렀던 자신의 지난 과거 속에서 ‘이렇게 살아도 될 것 같다’고 느낀 것들을 담담하게 고백하는 점이 매력이다. 꾸밈없이 담백하게 쓴 그의 글이, 진심으로 당신의 가슴을 울릴 것이다. 이 책에는 평범해서 더 특별한 일상의 기억들, 잊고 지낸 추억들, 알다가도 모를 마음의 조각들, 무심코 흘려보낸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세상을 향한 독특하고도 날카로운 관찰력이 돋보인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평범해서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일상이 특별하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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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 Intro
* 일기장
1. PLAY - 평범한, 그래서 더 특별한 일상의 기억들
하루 | 적당히 | 포기하는 것들에 관하여 | 반짝반짝 | 비누의 마음 | 인연 | 하필이면 악당로봇 | 인생의 기준 | 눈을 감아 | 척도 | 적응 | 청춘 | 수면시간 총량의 법칙 | 조연 | 공통점
* 택시
2. REST - 잠깐 가던 길을 멈추고
희망 | 나사못 | 부디 우리 | 쓰다 만 노트들의 모임 | 첫 번째 손님의 법칙 | 알고 보니 1 |구름의 진실 | 알고 보니 2 | 불신사회 | 사랑들 | 알고 보니 3 | 호의를 베푼 이유 | 오늘의 운세 | 듣기 | 엄마는 실패하지 않았어 | 쉬어도 돼
* 방구석 라디오
3. REPLAY - 잊고 지낸 추억들에 관하여
비처럼 음악처럼 | 라디오 | 새벽 | 사랑 혹은 정성 | 추억이 되기까지 | 동전 | 좋은 사람 | 같은 생각 | 그래도 나는 | 강남대로 종교인 | 1권 부재의 법칙 | 이름 | 변화 | 남들 눈에 이상해 보이더라도 | 비를 맞으며 | 시간 기억 | 그때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 언어의 발견 | 오답 | 혼잣말 | 추억 듣기
* 순수
4. STOP - 가끔은 멈춰 서서
가짜 비밀 | 슬픈 영화 | 의미를 찾아내는 순간 | 숫자 1 | 선 | 너에게 | 기다림의 이유 | 의미 없는 시선 | 상처받은 내 마음에게 | 나라도 나를 | 불공평 | 책과 사람 | 살다가 | 붕어빵 | 반성문 | 특별한 나 | 정말 사랑한다면 | 직시 | 우울증 | 나는 누구인가
* 소심
5. SHUFFLE - 알다가도 모를 마음의 조각들
#Scene 1 | 사진 | 눈먼 열정 | 마음 | 물건 사용법 | 남의 사랑이야기 | 만년필 | 그래도, 사랑해 | 낡은 물건 | 지킬 앤 하이드 | # Scene 2 | 상반된 마음 | 스포일러 | # Scene 3 | 뫼비우스의 띠 |매뉴얼이 필요해 | 여유의 미학 | 모래시계 | 한정형 인간 | 페이스북 | 뫼비우스의 띠
* 나이
6. REPEAT - 오늘도 똑같은 하루를 보내며 똑딱이 시계
다시 | 해 질 무렵 | 숨겨진 것들 | 거리 | 수고했어 오늘도 | 아이컨택 | 내년을 사는 사람들 | 공감 | 사랑하기 때문에 | 바람 | 필사 | 인생은 짧다 | 선택적 망각증 | 아이러니 | 모를 인생 |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 싫은 공감
* 미니카
방구석 라디오
일기장
내가 기억하기로 나의 아버지는 수십 년 넘게 일기를 써오셨다. 물론 지금이야 나이를 먹고 더 이상 쓸 게 없어졌다고 생각하는지 그만 두신 지 오래다. 하지만 나의 어린 날, 누나와 함께 아버지의 일기를 훔쳐보는 것은 꽤나 흥미진진한 놀이였다. 부모님이 집을 비우면 우리는 이때다 싶어 아버지의 일기장을 뒤적이며 키득거렸다. 한번은 일기장에 숨겨놓았던 10만 원 짜리 수표를 발견하기도 했는데, 당시엔 보물찾기를 하다가 1등상을 발견이라도 한 마냥 쪼르르 어머니에게 달려가 고자질을 했던 것 같다. 일기장을 봤다는 사실을 제 스스로 떠들게 되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수표 말고도 일기장에는 많은 것들이 첨부되어 있었다. 예를 들자면 누나와 내가 쓴 편지라든가 아파트 분양 기사라든가 하는 것들이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다지 재밌는 내용들도 아니었다. 어렵고 힘든 시절의 일상들이 다소 과장 섞여 기록됐고, 가족들의 하루가 아버지의 관점에서 서술된 그저 그런 내용들. 글 쓰는 재주는 없었는지 기억에 남는 문장도 별로 없지만 꾸준히 탐닉했던 이유는, 아마도 아버지의 일기장에선 누나와 내가 주인공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정을 주는데 무뚝뚝했던 아버지는 일기장에서 만큼은 거침없이 사랑을 표현하였고, 나는 어리기에 그 사랑을 마음껏 쟁취하곤 했다.
내가 나이를 먹어 가면서 아버지의 일기장을 찾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중학교를 다니면서부터는 아예 관심을 끊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고등학생 때 우연히 방구석에서 먼지가 쌓여있는 아버지의 일기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그때 이후로 두 번 다시 일기장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나이를 먹고 읽은 아버지의 일기에는 아버지의 고민과 슬픔, 삶의 어려움 같은 것이 잔뜩 묻어 있었고, 그걸 다시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으니까. 어려서는 일기장의 주인공이 누나와 나인 줄만 알았는데, 사실은 아버지가 주인공이었어야 했나보다. 그리고 아버지가 주인공인 아버지의 일기는 너무 외롭고 힘들어 보였다.
이십대의 아버지가 썼던 일기를 훔쳐보던 아들은 어느덧 삼십대가 되었다. 아버지의 일기장을 훔쳐 본 죄로 사는 게 힘들다고 느낄 때면 어느 순간 아버지의 일기장이 생각나곤 한다. 내가 아버지보다 잘 살고 있는 건지, 맞게 가고 있는 건지… 그럴 때면 한없이 우울해지면서도 또 작은 위안이 되기도 한다. 사는 것은 외롭고 힘들다. 그래도 또 살아야 한다. 아버지의 일기장이 그런다.
PLAY / 평범한, 그래서 더 특별한 일상의 기억들
청춘
세상을 미워하고 방황하기만 하던 십대 때에는
스무 살이 되면 자유를 얻을 것이라 믿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기만을 바랐고,
세상에 나가는 준비 과정이 너무 길다고만 생각했다.
막상 이십대가 되어서는
제대로 된 일을 구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이 싫었다.
학교나 학원에서 자유롭게 된 사실이
나를 힘들게 했다.
그땐 차라리 다시 십대가 되어
학교에 가길 바라기도 했었고,
자고 일어나면 몇 년이 훌쩍 지나가서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고 있는 내가
되길 바란 적도 있었다.
해야 할 일을 찾지 못하고 이십대의 청춘을 방황하고 있을 때,
내가 본 어른들은 입만 열면
내 나이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들의 이십대에는 3년을 군대에서 보내야 했고
지금보다 먹고사는 문제를 더 많이 고민해야 했고
나이가 차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결혼을 해야만 했는데도
나에게 이십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어리석게도 나는
이십대의 삶이 마냥 행복할 거라고 믿었고,
어른들은 힘들었던 지난날은 잊어버렸는지
좋았던 시절이라며 이십대가 되고 싶어 했다.
어른들은 단지 청춘이라는 이유로
이십대의 아픔은 당연한 것처럼
그럴듯한 말로 포장했다.
하지만 청춘을 지나온 누구나
위태롭고, 아프고, 불안한 시기를 겪었다.
어른들이 추억하는 것과 달리
그 누구에게도 청춘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았었다.
지금의 청춘만이 슬프고 괴로운 것이 아니라.
택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마음먹으면 언제나 시작하기 전부터 부끄러운 마음과 함께 죄스러움이 밀려온다. 아버지는 나의 학창시절엔 밝히고 싶지 않은 치부였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모든 불만의 근원이었고, 좀 더 나이를 먹어서는 안타까움과 미안함으로 다가오는 그런 사람이다. 전혀 자랑스럽지 않았고 지극히 평범했기 때문에 평생 보통 사람으로 살아갈 운명인 사람. 자식에게 미안해하며 인정받지 못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 사람. 내 아버지.
가장 오래된 추억을 말해보라면, 나는 주저 없이 아버지의 포니택시를 이야기할 것이다. 동네 골목길 셋방 앞에 주차되어 있는 녹색의 회사 포니택시. 회색 벽돌집 사이의 회색 골목길 사이에서 녹색 빛깔의 택시는 유난했다. 당시의 나는 그 물건에 전혀 관심도 없었고 일말의 흥미도 없었다. 아니, 지금까지도 특별한 흥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맞겠다. 어머니의 말을 빌리자면 골목길에서 세차를 하다가 주인집에 많이 혼났다고는 한다. 아버지가 그 차를 애지중지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언제나 그 일에 열심이긴 했던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우스꽝스러운 고깔을 달고 있는 택시를 운전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으니까. 택시는 아버지의 인생을 함께했고, 또 그 자식의 인생을 함께 했다. 어쨌거나 나의 아버지는 택시기사였다. 그 낙인이, 나를 괴롭게 했다.
초등학교 일학년 때 아버지의 회사를 방문하는 숙제가 있었다. 회사에 찾아가 자신의 아버지가 하는 일을 견학하고 발표하는 과제였다. 아버지는 회사로 찾아간 자식을 굳이 뒷좌석에 태우고 영업을 하셨는데 손님들이 그다지 반기진 않는 느낌이었다. 빈 택시인줄 알고 탔는데 생뚱맞게 꼬맹이가 앉아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어린 마음에도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나는 멀미를 핑계로 얼마 못 가서 내리고 말았다. 멀미가 나는 것도 사실이긴 했다. 회색으로 칠해진 서울 한복판을 끊임없이 뱅글뱅글 돌고 있는 것이 어지럽고 답답했으니까. 다음날 학교에서 발표를 해야 했는데 내 차례가 돌아오지 않길 간절히 바랐다. 친구들의 아버지가 대단해서 비교되었기보단, 나의 아버지의 직업을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땐 그게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커가면서 생각한 건, 어린 날에 아버지의 직업을 비밀로 한 건 잘한 결정이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버지가 택시기사를 한다는 게 부끄러운 일이라 믿게 해줬고, 막상 당신 역시 택시를 운전하는 일을 자랑스러워하지도 않으셨다. 나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 왔으면서도 아직까지도 아버지가 택시 운전을 한다는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택시와 연관 된 범죄가 뉴스에 나올 때면 그것마저 부끄러웠고, 사람들이 택시에 대한 불만을 얘기하면 죄지은 사람처럼 조마조마하며 얼른 이야기의 주제가 바뀌길 바랐다.
아버지는 내가 본 평생을 택시 운전을 하며 살았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아버지의 직업을 말하지 않아도 되는 나이가 되었다. 아버지는 말해왔다. 운전하는 일은 하지 말아라, 밤을 새는 일은 하지 말아라. 나는 운전을 하지만 너는 나를 딛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라. 나는 아버지를 딛고 살아왔으면서도 그 말을 납득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탓해왔다. 왜 이렇게 살았냐고. 왜 이것밖에 못했느냐고. 그런 아버지를 비난하며 내 게으름과 무능함을 그에게 덮어씌우고 힐난하기도 했다.
세월이 여러 번 지났어도 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알게 모르게 서먹함이 남아 있다. 말로는 다 풀 수 없는 세월의 타래가 많이도 엉켜서 남은 평생에 다 풀어낼지 모르겠다. 이제는 서로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서로를 자극하지 않는 정도로만 인연을 계속하고 있다. 그것이 못내 미안하면서도 나는 그것이 효도라 믿으며 애써 덮어놓는다. 그러다 가끔 아버지를 연상해야 할 순간이 다가오면 이유 없이 복받쳐 오르기도 한다. 이를테면 자이언티의 양화대교를 들으면서 나는 다른 이들의 아련한 마음과는 전혀 다른, 뜻 모를 괴로움이 치밀어 눈두덩 언저리가 발갛게 달아오른다. 그것은 나의 이야기가 아니었지만 나의 어린 날의 이야기와 너무 닮았으니까….
REST / 잠깐 가던 길을 멈추고
호의를 베푼 이유
친구와 식당에서 밥을 먹던 중에
수세미 조각이 나왔다.
아마도 설거지를 하다가
미처 헹궈지지 못한 끄트머리가 섞여 나왔을 것이다.
친구는 기분이 상해서 직원을 부르겠다고 했고,
그 순간 나는 휴지로 수세미 조각을 감싸서 치워 버렸다.
당황한 친구는 나에게 왜 그랬느냐고 물었고,
나는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내 행동의 이유를 찾았다.
그리곤 잠시 후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살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도움이나 호의를 받았을 때가 있었을 거야.
나는 너와 함께하는 식사가 즐거워서
그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한 번쯤은 남에게 호의를 베풀고 싶을 때도 있잖아."
고맙게도 친구는 적당히 기분을 풀어주었고
즐거운 기분으로 식사를 마쳤지만,
막상 나는 잘한 일인지 계속 고민이 되었다.
분명 우리는 두 번 다시 그 식당에 찾아가지 않을 것이고,
나의 호의는 직원들에게는 고마운 일이나
식당 주인에게는 불행한 일일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정말 호의를 베풀기 위해서 그랬던 것인지,
단지 시끄러워지는 상황이 싫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내 마음이 편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풀었다고
믿고 싶었을 뿐,
내 행동은 단지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방구석 라디오
까까머리를 하던 중학생까지만 하더라도 엄마와 나는 함께하는 시간이 길었다. 마땅한 놀잇감이 없던 것도 아니었는데, 나의 어린 날은 언제나 심심하고 따분했다. 좀이 쑤셔서 가만히 있지 못하는 주제에 밖에 나가는 건 내켜하지 않는 게 꼭 겁 많은 강아지 같았다. 심심할 때면 종종 안방에 찾아가 TV를 보고 있는 엄마 곁에 누워 말을 걸곤 했다. 무뚝뚝한 엄마는 나를 귀찮아하는 것 같으면서도 투정하는 것을 일일이 다 받아 주었다. 그러면 또 나는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놀아 달라고 보채기 일쑤였고.
TV를 보는데 흥미가 떨어지면 우리는 라디오를 틀었다. 딱히 채널을 고정해 놓고 애청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수신이 잘 되도록 안테나를 길게 뽑아서 감도가 좋은 방향을 찾아 고정한 다음, 채널을 변경하는 동그랗고 작은 원형의 휠을 돌려 괜찮은 노래가 나오는 곳에서 멈추곤 했다. 라디오가 언제나 내가 듣고 싶은 노래만 틀어주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몇 번씩이나 채널을 바꿔댔다. 언제 어디서 마음에 드는 노래가 나올지 모르는 우리의 작은 라디오는, 마치 포레스트 검프에 나오는 초콜릿 상자처럼 설렘과 실망을 번갈아 주었고, 그래도 보이지 않는 라디오 속 세상을 부유하는 일상이 즐거웠다.
대낮의 라디오에는 신세대 가수의 노래들이 즐비했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은 노래들도 종종 나왔다. 나의 별들이 부르는 노래와 엄마의 별이었던 이들의 노래가 번갈아 흐르는 신기한 음악상자 덕분에 나는 자연스레 옛날 노래에 익숙해져갔다. 당시의 엄마는 라디오를 듣다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녹음을 하고는 그걸 몇 번이고 다시 들으며 공책에 가사를 받아 적기도 했는데, 그러면 나는 얼른 배를 깔고 엎드려 틀린 가사를 지적하면서 우쭐하곤 했다. 엄마는 나 없으면 안돼. 엄마는 무정하게도 귀찮으니 저리 가라고 말했지만. 그러고 나면 나는 또 가족들이 귀가할 때까지 엄마와 투닥거리며 하루를 보내곤 했다.
엄마와 내가 함께 반복하던 하루는 생각보다 빨리 끝이 났다. 고등학교 1학년을 보내는 동안 키 17센티가 훌쩍 자랐다. 키가 크고 학교와 친구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나는 차츰 바빠지기 시작했다. 나이를 먹은 후에도 여전히 라디오를 즐겨 들었지만 라디오의 위치는 어느새 내 방 머리맡으로 바뀌었고, 모르는 사이에 엄마와의 대화는 시계 바늘이 돌아가는 딱 그만큼씩 줄어들었다. 키가 너무 빨리 커버려서 그랬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은 한다.
대단치 않은 일상의 기억들인 것 같은데,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그걸 풍선처럼 마구 부풀려 나의 중요한 일부인 마냥 소중히 간직하려고 발버둥 친다. 여전히 엄마에게 잘해 주는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나는, 어린 시절 엄마와 들었던 노래가 우연히 고막을 울리기 시작하면 이내 겪은 적 없는 애절함으로 어딘가 한쪽이 아려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REPLAY - 잊고 지낸 추억들에 관하여
라디오
어릴 적 내가 음악을 듣던 수단은 라디오였다.
부족한 나의 용돈으로는 차마 가수들의 앨범을 사지 못했기 때문에
라디오는 나의 유일한 음악상자였다.
밤늦게 머리맡에 라디오를 켜놓고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면 재빨리 녹음하는 것이 좋았다.
카세트테이프에 좋아하는 노래를 가득 채워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노래 목록을 만들고 나면,
그 테이프는 나만의 보물이 되었다.
그리곤 지겹도록 같은 노래만 들었던 기억이 난다.
잠이 안 오는 밤이면
새벽까지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라디오 DJ들이 감미로운 목소리로 읽어주는
사연을 듣는 것이 좋았다.
내성적인 성격 때문인지 나는 친구가 적은 편이었고
그런 내게 라디오는 친구가 되어
매일 밤 신기한 이야기들을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이제는 라디오를 거의 듣지 않게 됐고
MP3가 완전히 자리를 잡은 이후로는
이어폰을 꼽고 노래를 골라 듣는다.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지만
밤늦게까지 잠들지 못하는 날이면,
내 옆에 라디오가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운 건 왜일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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