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인도에서 시작해 서쪽의 스페인, 동쪽의 그리스, 북쪽의 노르웨이까지 모터사이클과 함께한 성장기
저자는 어떻게 죽을까 고민하다 한 장의 사진을 보고 그곳에서 죽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저자는 인도의 라다크에서 죽지 못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자신의 뜻대로 인생을 살지 못했던 한 젊은이가 두 바퀴로 유라시아를 횡단해보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인도 여행에서 남은 300만원을 들고 영국, 프랑스, 스페인, 그리스, 헝가리, 폴란드, 라트비아, 노르웨이까지 유라시아 전역을 떠돈다. 그의 무모한 도전은 성공할 수 있을까.
■ 저자 장준영
1988년 대전에서 출생했다. 서울예대 방송영상학과를 중퇴했다. 내일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남과 같은 생각을, 남과 비슷한 삶을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오늘도 우주를 건너는 꿈을 꾸고 있다.
■ 차례
프롤로그 | 네오노마드 | 두 바퀴 | 세상의 끝
1장 서울
고시원 | 날개
2장 인도
신들의 땅, 인간의 땅, 혼돈의 땅 | 세상의 끝 | 구원 | 사막별 | 지옥 | 탈출 | 인도 여행을 마치며
3장 영국
외국인 노동자 | 조건 없는 사랑 | 떠남
4장 유라시아
주사위 | 선택 | 현기증 | 세상
에필로그
길 잃은 개
서울
고시원
나는 1988년 2월 3일 대전에서 태어나 외동아들로, 엄격하신 아버지 그리고 나에겐 상냥하고 다정했던 어머니 밑에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그리고 2001년 10월 중학교 1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을 하셨고, 아버지는 말씀하진 않으셨지만 곧바로 새어머니와 함께 동거를 하셨던 것 같다. 나는 엄마와 함께 이모집 단칸방에서 약 1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나를 키울 능력이 없던 엄마는 나를 떠나 서울로 갔고 자세히는 모르지만 교회에서 만난 남자와 가정을 꾸렸던 것 같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15살 때부터 나의 성장이 멈추었고 나만의 세계에 갇혀 지냈다. 고시원 방에 갇혀 살기 시작한 그때부터 떠나기 전 24살 여름까지 수험생활을 하였던 1년 반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3평 남짓한 고시원 작은 방에서 살았지만 불안하고 우울했던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제법 모범생으로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 당시 난 아버지가 몹시 싫었다. 조금이라도 삐뚤게 나가려고 하면 그대로 맞았고, 밟혔고, 윽박당했다. 16살 때 사춘기가 찾아오면서 멋과 이성에 눈을 떴고, 또 소위 잘 나가는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아버지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또 조그만 고시원 방에서 삼국지, 초한지 등 영웅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도 언젠가 멋지고 야망 있는 삶을 살고 싶다며 뜬구름을 꾸기 시작하게 되었다.
어느덧 고3 수능시험이 끝나고, 나에게 펼쳐진 결과는 내가 사는 지방 국립대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는 이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아버지 몰래 서울에 있는 학점은행제 기관에 지원을 하였고 그곳에 다니면서 편입을 하여 좋은 학교로 가겠다고 설득시켜 그렇게 도망치듯 대전을 떠나 서울로 왔다. 그리고 2년 후에 찾아온 편입시험 그리고 편입재수 그 결과는 참혹했다. 그 시절 나는 아주 어둡고, 좁은 방에서 살았다. 그럼, 아버지와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이 최악이었다. 23살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아버지랑 크게 다투었고 아니 일방적인 정신적 폭행에 크게 상처 입은 나는 아버지에게 의절을 선언하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날개
친한 친구랑 오랜만에 클럽을 갔고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나처럼 집을 떠나 서울에서 홀로 타향살이를 했다. 그녀는 강남에 있는 네일아트샵에서 일한다고 하였고 또 모델 지망생이었다. 우리는 일이 끝나는 새벽이면 항상 만났고, 그렇게 우리의 만남이 잦아질수록 우리의 관계는 깊어져갔다. 그리고 겨울이 지나 봄이 시작할 때쯤 우리의 위험한 동거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행복은 잠시뿐이었다.
우연찮게 그녀의 핸드폰을 보았고, 믿을 수 없는 아니 알고 싶지 않는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내가 매일 만지는 그녀의 몸엔 이미 수많은 남자들의 손길이 묻어 있었고 그녀와 내가 함께 살아 숨 쉬는 이 세상도 서로에겐 다른 세상이었다. 다시 사람답게, 정당하게 세상 살아가자고 그녀를 다독인 뒤, 나도 다시 일을 시작하였고 그녀는 번화가에 있는 화장품 가게에 취직을 하며 다시 살아가려 했다. 가게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출근 전 잘 다녀오라고 나에게 키스를 해준 것도 이상했고, 평소에 안 하던 행동을 한 것도 수상쩍었는데, 중간중간 문자를 하고, 전화를 했는데도 받지 않는 것에 불안감과 두려움에 젖어 중간에 뛰쳐나가 집으로 달려갔다. 문은 열려 있었고, 집안은 엉망에다가 키우던 강아지까지 사라졌다. 식탁 위엔 편지 한 장만 남겨져 있었다. 미안하다고, 얼굴 못 보겠다고.
도망친 그녀가 다시 간 곳은 안마시술소. 그곳에 손님인 체 가장을 하고 전화를 걸어 그녀의 신상에 대해 물어봤고 답을 들었다. 나이 빼고 정확히 일치했다. 증오와 분노에 치를 떨며 잠식되었던 밤이었다. 방안에 있는 창문을 닫고, 가스 불을 켰다. 그리고 칼로 손목을 베었는데 겁이 많아 깊게 베지 못했다. 대충 얼마쯤인지는 모르겠으나 누군가 현관을 강제로 따고 나를 흔들어 깨웠으나 못 일어났고 응급실로 실려 갔다. 알고 보니 그녀가 내가 진짜 죽을 것을 알고 경찰에 신고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그녀의 어머니한테 보냈다. 그렇게 헤어졌다.
그리고 어떻게 죽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한 장의 사진을 보았다. 굉장히 장엄하고도 고독한 그리고 적막함에 있어서 끝이라고 생각되는 곳이었다. 그 장엄한 풍경 안에 오토바이 한 대와 여행자가 있었다. 그래 저곳에서 죽자. 어디지? 라다크? 찾아보니 인도였다.
인도
신들의 땅, 인간의 땅, 혼돈의 땅
나는 2011년 8월 5일 그날 밤 인도의 수도 델리에 무참히 처박혔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그 모든 것이 두려웠다. 인도와의 첫 대면을 난 이렇게 기억한다. [밤은 칠흑같이 어둡고 어두워서 눈을 감으로 오토릭샤의 경적 소리에 청각을 잃었고, 시끄러워 귀를 막으니 사람과 동물의 오줌지린내로 인해 정신을 잃어버릴 것 같아 코를 막고 입으로 숨 쉬니, 낮 동안 작렬하는 태양 아래에 힌두의 신이 전생의 죄인들에게 벌이라도 주려는 듯한 찌는 더위와 불쾌한 습기]
거리에서 얼핏 들은 정보로 오토바이가 있는 거리로 찾아갔다. 그곳에서 맘에 드는 오토바이를 시중가의 약 3배가 넘는 돈을 지불하고 구입했다. 겨우 3일 만에 이 나라를 떠나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 마침 공항에서 보았던 미라지의 번호가 불현 듯이 기억났다. 미라지는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던 친구로 자신은 브라만이고 델리에서 30분 떨어진 곳에서 산다고 하였다.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했다. 그래서 전화를 걸어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다. 지불했던 금액은 한화로 약 100만원. 3시간의 협상 끝에 70만원 정도를 환불받았다. 그 착한 브라만 친구의 도움으로 돈도 받았고 당장 델리를 떠나 마날리로 가라는 충고도 받았다.
지긋지긋한 15시간 버스를 타고 마침내 인도의 알프스라고 불리는 마날리에 도착했다. 해발 2,000m에 있는 도시라 그런지, 시원하고 또 청명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숙소에 도착하고 연 이틀 곯아떨어지고 나서 나의 최후의 목적지인 라다크에 타고 갈 무언가를 알아보고 다녔다. 중고 매물 가격이 델리보다는 훨씬 싼 편이었다. 두 번째 바이크를 구입하고 나니 그것 또한 실수였고 패배였다. 그리고 이 두 번의 사건으로 그 이후의 삶은 무엇을 사는 행위에 대해서 사전조사와 꼼꼼하게 알아본 뒤 값을 지불하는 습관이 생겼고 그 이후에 지금까지는 사기를 당하거나 낭패를 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며칠 뒤 마침내 인도대륙 방황의 시작과 끝을 맛본 세 번째 바이크를 구입하였다.
세상의 끝
마날리를 떠나 Sollang Valley를 지나자 본격적인 오르막 구간이 시작되었다. 이제부터 옛날 히말라야의 용들이 살았던 전설의 장소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출발한 지 몇 시간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첫 번째 난관에 부딪혔다. 로탕패스라는 고개인데, 길 자체가 진흙벌이라 10km도 안 되는 거리를 서너 시간이나 걸릴 정도로 이곳 운전자들에겐 지옥과 같은 곳이다. 마침내 그 지옥의 구간 한가운데에 내가 있었고 너무 세게 스로틀을 당겼기 때문에 스타트선이 밖으로 빠져나갔고 핸들 바는 앞으로 휘어졌다. 혼자서는 빠져나가기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몇몇 인도인들이 맨발로 뛰어와 내 오토바이를 밀어주고 끓어주며 진흙 속에서 간신히 벗어나게 해주었지만, 힘을 줄수록 오토바이는 진흙수렁에 더욱더 깊숙이 박히기만 했다. 비록, 진흙 수정에서 오토바이를 빼왔지만 주행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낄롱(kilong)으로 가는 트럭을 수소문해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정체모를 트럭기사 사내와 함께 낄롱으로 떠났다.
처음 인도에서 가장 많이 느낀 점은 느림과 예측할 수 없음이었다. 예정지인 팡(Pang)에 못갈 것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갑자기 오토바이가 덜컹거리더니 엔진이 멈췄다. 기름이 다 떨어졌던 것이다. 시간을 보니 5시가 다 되었고 해는 점점 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시간이 흘렀고 밤 8시가 다 되었다. 가지고 있는 것은 초코바 4개, 물 1통, 휴지, 기름 1L가 전부였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멀리 Indian-Oil 유조차량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름을 비싸게 구입하였고, 다시 출발하였다. 몇 시간을 절벽으로 된 외길을 지나고 제법 평지 비슷한 널찍한 길을 만났다. 장관이었다. 내 존재 자체가 이렇게 작게 느껴졌던 것은 처음이었다. 한낱 인간사 그중에서도 사람에 대한 배신과 미움 때문에 여기서 죽는 것 자체가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이름 모를 장엄한 산을 바라보며 몇 시간을 지냈다.
이번에는 사막이었다. 나는 완전한 자유였다. 또 타인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이었다. 해질녘 즈음에 다행히 텐트 숙소를 발견하였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아침 일찍 일어나 라다크로 묵묵히 달려 나갔다. 구불지고 외길 낭떠러지 길이 연속으로 뱀 또아리를 튼 것처럼 저 하늘까지 치솟아 닫는 느낌이 들었다. 고도가 높을수록 구형 엔필드의 엔진이 자주 꺼졌고, 나도 지쳤다. 갑작스레 고산병이 찾아왔다. 마침내 밤 8시가 넘어서 인도 최북단 도시 라다크로 입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3박 4일 간의 정신적, 체력적 사투 끝에 찾아온 휴식. 난 라다크에 매료되어 2주 동안 머물렀다.
2,00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라다크에 와서 잠깐 머물렀던 사원이라는 헤미스 곰파라는 고대 불교 사원을 방문했던 일이다. 그곳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복장을 하고 계신 분들이 있었다. 전라남도 순천에 있는 사찰에서 오신 분들인데, 그 옛날 부처가 돌아다녔던 발자취를 좇아 수행하시는 분들이었다. 그분들 중 한 분과 이야기를 잠깐 나눴고, 내가 먼저 그 스님한테 시간 되시면 다음날 따로 만나자고 했다.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스님도 평범하게 대학 졸업 후 직장을 다녔고 또 여자를 만나 사랑도 나누셨던 분이셨다. 그러나 어느 특정한 일을 계기로 스님도 나랑 마찬가지로 죽으려고 결심을 하고 인도로 떠나셨는데…. 그 인도에서 1년 6개월의 시간이 그의 상처를 녹였고 마지막으로 다람살라에 있는 달라이라마 스님과의 만남을 계기로 모든 것을 내려놓았고 출가를 결심하기로 마음먹으셨다고 한다. 내가 출가하신 거에 대해 후회하지 않냐 묻자 스님은 지금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하셨다. 너무 부러웠다.
스님은 나에게 가지고 붙잡고 있는 고민들을 다 내려놓으라고 하셨고 모든 것을 시간 속에 던지라고 하셨다. 시간은 그 모든 것들을 녹인다고 하셨다. 상처도, 아픔도, 미움도. 그 모든 것들을 절대 우주의 진리인 시간 속에 투영시키라고. 또 사랑 받는 것에 익숙해지기보다 사랑을 주는 것에 익숙하라고 말씀하셨다.
구원
스리나가르를 거쳐 다람살라에 도착했다. 추석이 끝나고 다음날 아침 일찍 숙소에서 나와 드디어 달라이라마를 뵈러 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달라이라마의 신변에 급작스런 이상이 생겨 설법회가 취소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회견실과 응접실은 볼 수 있었다. 아주 큰 허탈감과 실망감으로 깊게 한숨을 쉬고 있던 도중, 우연히 벽면에 걸린 달라이라마의 큰 초상화를 보았고 그 밑에 그가 방문객들을 위한, 아니 나에게만 따로 말하는 것과 같은 메시지를 보았다. "용서는 값싼 것이 아니다. 그리고 화해도 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용서할 때 우리는 누군가에게 문을 열 수가 있다. 그 문을 열기 위해서는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 가장 큰 수행은 용서다."
지옥
조드뿌르에서 고아까지는 약 200km, 고아까지 가기 위해선 크게 구자라트주(州) 그리고 뭄바이를 지나고 남쪽으로 좀 더 내려가면 낙원이라고 불리는 고아에 도착한다. 2011년 9월 20일 오후 2시 나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아흐메다바드를 빠져나가고 한적한 지방도로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왕복 2차선으로 제법 큰길이었고 지나다니는 차가 없어서 아무 생각과 긴장 없이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AC/DC의 Highway To Hell을 들으며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몰려오는 엄청난 힘을 느낄 새도 없이 앞바퀴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었고 내 몸은 오토바이와 분리되어 왼쪽 가로수에 돌진하고 있었다.
나무에 부딪히기 전까지 시간이 느리게 느껴졌다. 그리고 튕겨져나와 자빠졌고 어지러움에 구토를 했다. 그리고 쓰러져 눈을 감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건 나를 향해 뻗쳐오는 검은 손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주변에서 들려오는 정체모를 소리와 소란스러움 때문에 눈을 떴고, 가장 먼저 보였던 건 벌겋게 익어 부어올라있던 나의 허벅지. 타는 목마름으로 water! water! 외쳤고, 물을 마시고 정신을 차려보니 팬티를 제외하고 옷은 다 벗겨져 있었다. 옷이 다 털렸던 것이다.
머리통을 붙잡고 일어서서 오토바이를 확인했다. 뒷부분이 찌그러져 있었고, 뒷바퀴가 분리되어 있었다. 다행히 쇠사슬로 가방과 차대를 묶고 자물쇠를 채운 덕분에 나의 카고백은 찢겨 반 걸레 상태가 되었지만 없어지진 않았다. 없어진 건 나의 허리에 차고 있었던 복대 안의 소지품이었다. 여권, 카드, 신발, 셔츠, 시계, 현금 30만원 정도.
얼마 지나지 않아 터번을 둘러싼 경찰이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나의 신상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고 진심어린 걱정을 하였다. 내가 기절한 시간은 약 20분 정도인데, 뒤에서 차량 뻑치기를 당한 것이었고 오토바이를 들이받자마자 강도들은 내 몸을 털었고 카고백을 가려가려 묶인 쇠사슬을 풀려고 시도하던 와중에 사고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달려와 준 덕분에 바로 도망갔다고 한다. 이곳은 외국인이 지나갈 일이 없었지만 현지 인도인들까지도 습격 납치해 장기적출 행위도 번번이 일어나는 지역이라고 하였다.
이 터번 쓴 경찰은 시크교도인데(이자를 씽 아저씨라 부르기로 한다) 어디서 왔냐고 물어 한국에서 왔다고 답하였더니, 씽 아저씨 친동생이 군 간부인데 고려대학교에서 태권도를 배웠고 그가 체류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친절하게 대해줬다고 들은 바 있어서 자신도 나에게 친절을 베풀고 싶다 하였다. 잃어버린 여권과 카드 문제는 뭄바이에서 해결하기로 했고 그날 밤 씽 아저씨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씽 아저씨가 뭄바이까지 가는 2등 구간 기차 티켓과 일주일 정도 체류비 등, 내가 빼앗겼던 약 30만원을 자비로 주셨다. 진심으로 그분의 도움에 감사해한다.
탈출
고아역 근처 베나울림 해변에서 오토바이가 다 고쳐질 때까지 5일 정도 머물렀다. 오토바이는 이미 팔기로 마음먹었고 사람들이 많아 보이는 광장이나 술집에 벽보를 붙여놓았다. 팔고 나면 대충 380만원의 돈이 수중에 남게 된다. 내가 진짜 원하고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여행 중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또 나의 블로그가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제법 많은 사람들의 호응과 피드백을 받으면서 일종의 성취감도 생겼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녀를 만나기 전에 일을 하면서 막연하게 하고 싶었던 것 한 가지. 오토바이 유라시아 대륙횡단
그러나 문제는 이곳이 한국이 아니라 인도라는 점.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엔필드와 서류로 인도를 벗어나 파키스탄조차도 가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준비를 하자니 군대 문제도 있었다. 만약 대륙횡단을 하고자 한다면 기간이 있을 때 한국이 아닌 밖에서 시작해야만 했다.
1. 현재 지금은 10월이라는 점. 설령 돈이 충분하다고 해도 계절상 장기간 이동을 할 수 없다. 곧 겨울이 다가온다.
2. 그리고 현재 나에게 가장 필요한 돈. 오토바이 값을 제외하고 2만 킬로를 횡단하는 데 3개월에 최소 300만원이라는 돈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돈은 한국이 아닌 어디서라도 벌면 되는 것이었고, 횡단 시작은 앞으로 6~7개월 후면 가능하다 싶었다. 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선 앞으로 6개월 동안 다른 나라에서 일을 하며 돈을 500만원 이상 모아야만 했다. 인터넷으로 유럽에 있는 나라 중 가장 오래 체류할 수 있는 곳을 알아보았다. 영국과 아일랜드였다.
영국
외국인 노동자
2011년 10월 28일. 뭄바이 발 킹피셔 에어라인을 타고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영국에 오기 전 악명 높은 영국 입국심사대에 대해 알아보았다. 편도 티켓으로는 입국하기가 힘들며, 여행자에 따라 입국 목적, 여행 일정, 숙박업소 예약권 등 심지어는 통장에 남아 있는 잔액조회까지…. 꼼꼼하게 검사한다고 하였다. 왕복항공권을 구입하지 않고, 리턴 티켓으로 11월 4일 영국에서 프랑스로 가는 유로스타 편도 티켓을 버리는 셈 치고 구입하여 갔다. 잔뜩 긴장하고 영국 입국 심사대에 올라서게 되었다. 여러 질문을 받았지만 생각만큼 빡세게 요구하질 않았고 무난히 통과하게 되었다.
이미 영국 땅을 밟는 순간 일자리를 10일 이내에 정해야 한다는 데드라인이 정해져 있으며 카운트다운은 시작되었다. 템스 강과 빅벤 그리고 런던 아이 따위는 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두 번째 방문했던 곳은 한인사회보다 런던 내에서 더 유명하다는 레스토랑엘 찾아갔다. 가게 근처에 자신의 삼촌이 살고 있는 집 방 하나를 지금 직원 둘이 쓰고 있는데 그곳에서 생활하라고 했다. 너무 쉽게 숙식 해결은 물론 일자리까지 구해 어안이 벙벙하였지만 크게 기뻤다. 돈도 한 달에 한화로 200만원 가량 숙소비를 제외하고 따로 준다고 하였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생에서 유명한 진리가 있지 않는가? easy come, easy go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어쩐지 너무 쉽게 풀렸다.
학생 비자로 이곳에 와서 일하는 종업원들은 일하는 것 자체는 합법이었지만 영국에서 정한 법정 노동시간이 일주일에 30시간 정도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비를 벌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한국식당은 법정 노동시간을 지키지 않는 대신 영국에서 정한 최저시급보다도 훨씬 아래의 시급을 받았지만 일하는 시간이 제한되지 않았기 때문에 온종일 일할 수 있었다. 이러한 학생들이나 나 같이 관광비자로 와서 일을 한 사람들이나 불법인 건 매한가지였다.
내가 영국에 체류할 수 있는 데드라인은 2012년 4월 28일까지여서 약 5개월 동안 최소 500만원 이상을 모아야만 했다. 그래서 체류했던 6개월 내내 돈에 대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장 부부는 종업원들의 신분을 이용했던 사람들이었다. 조금의 실수에도 갖은 욕설과 인격모독 그리고 폭행까지 일삼았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욕설과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고대하던 월급날이 다가왔다. 처음에 사장이랑 면접 봤을 때 한화로 200만원 정도를 준다고 하였는데 내가 막상 받은 돈은 한화로 80만원 정도 되는 금액이었다. 거기서 당장 짐을 싸서 나왔다. 여섯 째 날 새로 일을 구했다. 계약 조건이 하루 15시간 일하는 풀타임이었고, 또 일주일 중 하루 풀로 쉴 수 있는 날은 없었다. 페이는 한화로 200만원 정도 되었지만, 시급으로 따져 계산하면 5000원도 안 되는 금액이었지만 이것저것 따질 여유 따윈 없었고 그마저도 감사해야 했다. 5개월간 일만 죽어라 했다. 그저 돈만 버는 외국인 노동자에 불과했고 내가 계획했던 유라시아 오토바이 여행도 막연한 꿈만 같이 느껴진 적도 있었다.
떠남
여유돈이 넉넉지 않은 관계로 중고 바이크를 사야만 했다. 일주일 정도 알아보았고 체크리스트를 적은 다음에 쉬는 날 하루 10개의 매물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고 다녔다. 10번째 매물은 Suzuki사의 GS500 K-3이라는 모델이었는데 한눈에 봐도 상태가 좋아보였고 시승까지 했는데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또 가격도 850파운드(약 170만원)로 괜찮았다. 이제 바이크까지 구입한 이상 빼도 박을 수도 없었고, 물러설 수도 없었다. 이제 여행 준비에 있어서 필수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은 내 명의로 오토바이를 등록하는 것과 보험가입, 마지막으로 러시아 비자를 받는 것이었다.
러시아 여행사와 접촉도 해봤고 또 러시아 대사관에 직접 찾아갔지만 당시 영국에서 내가 러시아 비자를 받는 것은 불가능했다. 제3국에서 러시아 비자를 받는 것이 상당히 까다로웠는데 가장 큰 문제는 내 거주지 불명과 영국에서 내 수입을 증명할 수 없다는 문제로 다른 나라에서 알아보거나 직접 한국으로 들어가서 받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영국에서 비자를 받는 것에 대해 포기를 하였고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 알아보고 받을 수 있으면 그곳에서 받으려고 했다. 훗날 러시아 비자를 못 받았던 문제가 내 여행이 끝날 때까지 계속 따라다닐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유라시아
주사위
2012년 4월 25일, 아침 일찍 도버(Dover)항에 갈 채비를 하였다. 세 시간을 달린 끝에 도버 항에 도착하였고, 출국 수속을 끝낸 후 프랑스 깔레(Calais)행 페리에 탑승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벌써 프랑스 깔레에 도착했다. 깔레 주변의 여섯 개 소도시 이름을 차례차례 적은 뒤 주사위를 던졌다. St. Omer라는 작은 마을이 나왔고 고민할 겨를 없이 그곳을 향해 스로틀을 당겼다.
프랑스에서 나를 초대해준 사람이 있다. 그는 내가 오토바이를 타고 대륙횡단을 한다는 사실에 본인도 젊은 날에 그런 삶을 꿈꾸었기 때문에 실제 행동을 하고 있는 나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준 것에 대해 고마워 초대했다고 한다. 머물렀던 3일 내내 흰 쌀밥과 삼겹살로 배에 기름을 가득 채웠고 또 그분께서 내비게이션을 빌려주어서 이후 유럽여행을 훨씬 수월하게 했다. 그 내비게이션은 근처 캠핑장이나 숙박시설 심지어 식당까지 찾을 수 있는 기능이 탑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시 내에서 무언가를 찾을 때 유용했다.
그분의 집에서 있는 동안에 그 후 목적지를 찾아야 했고 또 떠나야만 했는데 그 근처에는 벨기에, 스위스, 스페인 등등 갈 곳은 많았으나 딱히 구미가 당기는 곳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인도에서 만났던 스페인 친구한테 연락이 왔다. 현재 프랑스에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스페인에 갈 생각이 있으면 자신한테 연락 주라며 바르셀로나에 있는 자신의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
싱숭생숭한 밤을 보내고 프랑스의 풍모를 느낄 새 없이 미친 듯이 스로틀을 당겨 마침내 바르셀로나에 있는 Sergi의 집에 찾아갔는데 예정보다 빨리 찾아간 덕분에 그곳 식구들이 깜짝 놀랐지만 이내 곧 자신의 식구인 마냥 나의 방문을 기뻐해주셨다.
그리고 Altea에서는 상익이 형 덕분에 영화 속에서나 볼법한 그런 펜션에서 5일간 지낼 수 있었다. Altea를 떠나기 며칠 전 아프리카에 대해 어설프게 알아보던 중 아프리카 여행 경비가 유럽의 1.5배에서 많게는 2배까지 든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시 대륙으로 기어올라가자니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하는 생각에 눈앞이 컴컴해졌다. 후회를 뒤로 하고 정신을 다시 차려 다시 유럽 한복판에 다가갈 효율적인 방법을 찾고 있던 중 바르셀로나에서 이탈리아 시타페치오(Citavecchio)까지 가는 페리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도버에서 깔레로 가는 페리에서보다 이탈리아로 가는 이날 마음이 더 싱숭생숭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피사를 지나 역사적인 도시 피렌체 그리고 라벤나를 비나 세계 3대 미항이라고 불리는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싶었지만 입장료가 너무 비싸 그대로 지나쳤다. 그리고 이름 모를 슬로베니아 근처 국경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이제 이탈리아를 벗어나 동유럽이 시작되는 슬로베니아라는 곳에 다가섰다. 블레드(Bled)라는 지방에 있는 저렴한 캠핑장에서 며칠 지내기로 결정하면서 그곳에서 계획을 짜야겠다고 생각했다.
선택
며칠 뒤 잠자리에 들기 전 이메일을 확인하던 중 우크라이나와 그리스에서부터 각각 연락이 와 있던 걸 알게 되었다. 먼저 우크라이나에서 연락을 준 이는 발레리(Valeri)라는 친구로, 그는 나에게 우크라이나로 오면 러시아 비자를 받게 도와줄 것이며 만일 비자 받기에 실패해 러시아에 진입을 못한다 할지라도 우크라이나에 온 것을 후회 없게 해줄 것을 약속했다. 반면 그리스에서 연락을 준 사람은 아테네에서 사업을 하고 있던 한인 사업가였는데 내가 인도에 있을 당시부터 블로그에서 댓글로 응원을 해주던 분이었다.
슬로베니아에서 우크라이나까지 약 850km, 그리스까지는 약 1,300km. 그러나 이상하게도 마음속에서 그리스로 가라고 했다.
맛있는 그리스 음식들 덕분에 2주 동안 5kg이 쪄 턱밑까지 살이 차올라 있었을 때쯤 본래 그리스에 온 목적이었던 러시아 비자를 이곳에서 못 받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인터넷을 뒤져보던 중 2011년에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러시아 비자를 받았다던 사람의 블로그의 글을 발견하였고 또 그 사람이 받았던 대행사에서 전에도 몇몇의 한국인들이 비자를 받았다는 정보도 얻었다. 목적지는 이미 정해졌다. 발트 연안에 있는 나라,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였다.
현기증
그리스를 떠난 지 이틀이 지나 해질녘 즈음에 노을이 유독 아름다웠던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 도착했다. 부다페스트에서부터 라트비아 리가까지 3일이면 갈 수 있었다. 인터넷으로 알아본 러시아 여행사를 찾아갔고 그곳 사장은 나에게 2주만 기다리면 드디어 러시아 비자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적 같은 소식을 전했다. 마침내 러시아 비자를 받기로 한 날이 다가왔고 설레임 반 두려움 반의 마음으로 여행사에 찾아갔다. 여행사 사장은 내 여권을 보여주며 처음엔 승인허가 도장을 받았는데 나중에 다시 입국금지 도장을 받았다며 거절에 대한 이유는 자신도 모른다고 하였다.
세상
6월 29일 예정대로라면 러시아에 들어갈 수 있는 날이었다. 그러나 난 북쪽으로 가는 배 안에 있고 망망대해 한복판에 떠 있었다. 아침 7시가 채 안 되어 종착지인 스톡홀름에 도착했다. 유럽 대륙의 최북단 노르드캅을 가기 전에 [인도 고야에서 만났던 친구] 알렉스의 집에서 약 6일을 머물렀다.
스톡홀름을 떠난 첫날은 [스웨덴 최북단] 키루나를 벗어난 외곽지역에 있는 무료 캠핑장에서 보냈는데 모기가 너무 많아 잠자리에 들기가 힘들었다. 둘째 날 노르웨이 국경을 지나 나르빅이라는 도시에 도착하였는데 그 도시에서부터 북극권이 형성되었고 여름에 해가 지지 않는 백야 현상이 이곳부터 시작된다고 들었다. 나르빅 이후부터 보이는 풍광은 장관이었다. 북극해를 끼며 달리는데 너무 아름답고 깨끗해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북쪽의 끝에 다다르기 5km 전부터 전방이 잘 안 보였다. 이번엔 안개가 날 가로막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멀리서 희미한 형체가 보였다. 지구본 모양의 이 물체는 북위 71도의 끝을 알리는 랜드마크였다. 드디어 그 끝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 끝은 허무 그 자체였다. 세상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낙원 또한 없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도망친 곳에는 낙원이란 없다"라고.
해안 절벽 끝에 앉아 북극해를 바라보며 지난 1년간의 여정을 되새겼다. 구원이던 행복이던 무언가를 얻으려고 했지만 사실은 얻은 게 하나도 없었다. 단지 무언가를 비워냈을 뿐. 얻음이 아니라 무언가를 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슴이 뚫린 것처럼 허했지만, 그 뚫린 구멍으로 북쪽의 바람이 관통해 나가니 시원했다. 나는 이미 이 세상의 끝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놈이고, 이 끝에 오기 전까지 길 위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내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한 무거운 마음의 짐을 벗어던지니 후련했다. 그리고 웃으며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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