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이 세상에는 첫눈이 오면 공휴일이 되는 나라가 있습니다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 『인연 1, 2』 등 불교와 밀접한 글쓰기를 해온 작가 정찬주. 그가 이번에는 부탄, 네팔, 남인도, 스리랑카, 중국 오대산까지 불국을 다녀온 경험과 기록을 담아 『불국 기행』을 펴냈다.
이 책에는 세계문화유산인 보드나드 스투파, 더르바르 광장, 스와얌부나트 사원, 카샤파 왕궁터, 운강 석굴 등은 물론이고 그간 독자가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디첸포드랑 승가학교, 파로종, 질루카 사원, 아소카 스투파, 까르마이 꾸탐 사원터, 갈비하라 사원, 나후사 등 주요 불교 유적이 문화적 맥락과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오롯이 소개되어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금언처럼 사전 지식이 있어야 여행하는 곳의 역사와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
따라서 저자는 다섯 나라로 떠날 여행자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하고자 전문적이거나 학술적인 서술 대신 기초적인 지식과 감흥 위주로 이 글을 썼다. 『불국 기행』은 여행기이자 해당 나라에 대한 입문서로서 독자가 이들 역사와 문화를 미리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 저자 정찬주
1953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불교적 사유가 배어 있는 글쓰기로 오랜 기간 소설과 명상적 산문을 발표해왔다. 법정 스님은 저자를 재가제자로 받아들여 ‘세속에 있되 물들지 말라’는 뜻으로 무염(無染)이란 법명을 내렸다. 현재 전남 화순 쌍봉사 옆 이불재(耳佛齋)에서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 『인연 1, 2』, 『조선에서 온 붉은 승려』, 『다산의 사랑』, 『소설 무소유』, 『산은 산 물은 물』, 『다불』, 『만행』, 『대백제왕』, 『야반삼경에 촛불 춤을 추어라』, 산문집 『부처님 8대 인연 이야기』, 『암자로 가는 길』, 『자기를 속이지 말라』, 『선방 가는 길』, 『돈황 가는 길』, 『나를 찾는 붓다 기행』, 『정찬주의 다인기행』, 『뜰 앞의 잣나무』, 그리고 어른을 위한 동화 『눈부처』 등이 있다. 1996년 행원문학상, 2010년 동국문학상, 2011년 화쟁문화대상을 수상했다.
■ 차례
서문 | 깨달음이 있는 여행은 행복하다
첫눈이 오면 공휴일이 되는 나라, 부탄
행복지수 1위의 나라, 부탄 파로에 서다
부탄 사람들은 왜 지도자를 존경하고 사랑할까
가족 중에 한 명 출가하는 것이 최고의 공덕
‘하늘궁전’ 지상에 내려와 있었네
생로병사의 괴로움 내려놓고 ‘날마다 좋은 날’
히말라야 기운으로 축복받은 땅, 네팔
망명한 티벳 사람들의 귀의처, 보드나트 스투파
생로병사가 한데 엉켜 흐르는 바그마티강
힌두교와 불교를 공존하게 하는 쿠마리
석가족에게 파탄 땅을 선물한 아소카왕
그대 자신이 바로 한 송이 연꽃이 되라
신라 여섯 씨족장과 석탈해가 떠난 땅, 남인도
아소카왕의 혼이 깃든 남인도 케랄라주를 가다
영국인이 개발한 남인도 최대의 무나르 차밭을 가다
남인도 불교는 왜 힌두교에게 자리를 내주었을까
남인도에서 석탈해와 신라 6촌장을 만나다
마침내 황색 가사의 도시 칸치푸람에 입성하다
허황후는 남인도 사람인가, 북인도 사람인가
연꽃을 들고 절에 가는 불심의 나라, 스리랑카
부처님 가르침이 망고처럼 향기롭고 그윽한 나라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따뜻한 가슴이 없는 수행은 공허한 관념일 뿐
비는 아난의 눈물이요, 천둥은 부처님 말씀이다
“이제 한국 불교는 산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의상대사와 혜초가 순례한 불국토, 중국 오대산
연꽃이 피어나듯 순례길 걸음마다 법향에 취하다
장엄한 문수 신앙의 오대를 가다
부처님 진신사리 1과가 봉안된 대백탑
뜰 앞의 측백나무는 참된 공을 깨닫게 하네
백 가지의 감회와 오롯한 행복마저도 내려놓다
불국 기행
첫눈이 오면 공휴일이 되는 나라, 부탄
행복지수 1위의 나라, 부탄 파로에 서다
법정 스님께서 가끔 내게 말씀하신 삼소(三少)를 떠올리는 아침이다. 입안에는 말이 적어야 하고, 마음에는 생각이 적어야 하고, 배 속에는 밥이 적어야 한다. 는 삼소가 여행의 지침처럼 머릿속을 스친다. 말과 생각이 많으면 눈앞의 대상은 그만큼 멀어지는 것이 자명한 이치다. 편견과 선입견을 버려야만 대상과 하나가 되는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여행자의 배가 가벼워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고.
아침식사를 가볍게 마치고 카트만두 솔티 호텔을 나선다. 부탄으로 가기 위해 카트만두 국제공항으로 나서는 길이다. 하룻밤 묵은 기념으로 정원에서 사진을 찍는다. 어제 인천 국제공항에서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로 바로 왔던 것이다. 때마침 극락조나무가 황색 꽃을 피우고 있다. 피어난 꽃잎이 새의 형상이다. 그래서 극락조화(極樂鳥花)라 부르는 모양이다. 상서로운 일과 마주칠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부탄에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카트만두에서 비행기로 들어가든지 인도 북부 지역에서 자동차로 입국하든지. 나와 지인들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이미 비행기를 타자고 합의했다. 공항은 숙소에서 10여분 거리에 있다.
부탄 국민 97퍼센트 "나는 행복합니다"
이윽고 꼬리에 용이 그려진 드룩에어를 탄다. 드룩에어는 부탄 국영 항공사다. 남녀 승무원들이 부탄의 고유 의상을 입고 있다. 모두 우리와 같은 몽골리안이라서 정겹다. 부탄을 용의 나라 라고 하는데 내 띠가 용띠여서인지 전생의 내 나라에 가는 느낌이다. 소박한 얼굴의 승무원들만 보았는데도 왠지 기시감이 든다.
사전 지식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내게는 부탄이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몇 가지가 있다. 정말로 그런지 이번 여행에서 눈여겨볼 생각이다. 첫 번째는 첫눈이 오면 공휴일이 되는, 듣기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동화적인 나라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꽃을 꺾지 않는 나라라는 것이다. 부탄의 어느 호텔이나 여관을 가도 화병에 생화 대신 조화가 꽂혀 있다고 한다. 꽃도 살아 있는 생명이기 때문이란다. 세 번째로 부탄 사람들은 산은 경배의 대상이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 현재 부탄에는 외국 산악인에게 산길을 안내하는 가이드나 그들의 짐을 대신 지고 가는 포터(Porter)가 없다고 한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외화를 벌고자 농민들을 소집하여 외국 산악인을 위한 가이드와 포터를 시켰는데, 농부들이 농번기와 등반 시기가 겹쳐 논밭을 망친다.고 건의하자 국왕이 우리에게는 외화를 가져오는 외국 산악인보다 논밭에서 일하는 우리 농부가 소중하다.며 등산 가이드와 포터를 금지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탄에는 아직도 7000미터 이상이 되는 미답의 히말라야 봉우리들이 많다. 또 우리는 일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는 일하지 않는다.는 말이 생겨났는데 일하지 않는 사람이란 바로 산악인을 가리킨다고 한다. 네 번째는 많이들 알고 있듯이 부탄이 모든 사람들은 병원비와 교육비가 무료인 복지 극락에서 살고 있다는 점이다. 다섯 번째는 부탄 사람들은 자신의 역사와 종교, 문화적 정체성이 강하여 모두 전통 옷을 입고 전통 가옥에서 살 정도로 자부심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부탄이라는 나라가 이러하니 부럽지 않을 수 없고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조사 결과도 많다. 부탄은 국제사회에서 2011년 GNP(국민총생산) 기준으로 우리나라가 세계 31위일 때 124위였다. 국민 1인당 생산량으로만 볼 때는 최빈국이었다. 그러나 영국에 본부를 둔 유럽 NEF(신경제재단)에서 국가별 행복지수를 조사한 결과 143개국 가운데 부탄은 1위, 우리나라는 68위를 했다. 부탄 국민은 97퍼센트가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한다니 부럽기만 하다. 영국의 레스터대학교에서 2006년 실시한 국가별 행복지수 조사에서는 부탄이 세계 8위를 했고 1, 2위는 덴마크와 스위스, 미국은 23위였고 우리나라는 참담하게 102위를 했다. 국민의 행복을 계량화한 수치가 얼마나 객관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의 순위는 더 밀려났으면 밀려났지 앞으로 당겨지지는 않을 성싶다. 우리나라의 경우 2012년도에 자살한 사람이 10만 명 중 28.1명으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자살률 1위였으니 할 말이 없다. 올해도, 내년의 결과도 보나마나 그럴 것이니 끔찍하지 않은가. 입만 열면 복지를 얘기하는 정치 지도자들의 각성을 촉구하지 않을 수 없다.
부탄에는 노숙자와 거지, 우울증 환자와 자살자가 거의 없다고 한다. 물론 사람이 사는 땅이니 소수라도 있겠지만 아주 미미하여 유의미한 숫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부탄은 4대 국왕인 지그메 싱기에 왕추크(Jigme Syngye Wangchuck) 때부터 생산량을 중시하는 GNP를 버리고 그 대안으로 GNH(국민총행복)를 추구했다고 한다. 그는 GNP가 물질적 탐욕을 조장하여 빈부 격차를 심화시키고 자연을 파괴하며 인간을 황폐화시킨다고 보고 GNH를 제시했는데, 현재 5대 국왕인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추크(Jigme Khesar Namgyel Wangchuck)가 그것의 실현을 위해 네 가지 기본 정책을 펴고 있다고 한다. 지속 가능하고 공평한 사회경제 발전과 생태계 보전 및 회복, 부탄의 전통과 정체성을 실현하는 문화의 보전과 증진, 그리고 이 세 가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좋은 협치(協治)가 그것이다.
카트만두 국제공항에서 탑승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비행기는 부탄의 국제공항인 파로 공항에 착륙하고 있다. 협곡을 비집고 들어선 활주로는 우리나라 자동차전용도로 규모이고, 공항 청사도 우리나라 읍 정도의 시외버스 터미널 수준이다. 그러나 공항은 작은 궁전 같다. 역대 국왕들과 형 5대 국왕 부부의 사진이 결려 있고 광고판에 인쇄된 GNH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GNH 밑에는 국민의 총체적인 행복과 후생 수준을 구성하는 아홉 개의 규범 영역이 ①심리적 웰빙 ②건강 ③교육 ④시간 활용 및 균형 ⑤공동체 활력 ⑥전통과 문화의 다양성 ⑦생태 다양성 및 복원력 ⑧생활수준 ⑨좋은 협치 라고 적혀 있고 일흔두 가지 GNH 지표를 개발하여 2008년부터 2년마다 GNH를 조사‧발표하고 있다는 설명도 곁들여 있다.
부탄 땅을 밟는 순간 왠지 나도 행복해질 것만 같아 미소가 지어진다. 지인 중에 누군가가 부탄에 와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인구 80여만 명의 부탄은 국토가 비좁기에 이민자나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부탄 여자와 결혼하면 영주권이 주어진다고 하는데 50대를 넘어선 나와 지인들이 그렇게 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또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은 애연가들에게는 아주 불편한 나라가 부탄이라는 사실이다. 입국할 때 담배 열 갑만 가지고 있어도 5만 원 정도의 세금을 내야 한다. 담배를 피울 때마다 경찰에게 세금을 냈다는 서류를 보여주어야만 하니 차라리 담배를 끊는 게 마음 편한 나라인 것이다.
관광객 제한하여 전통 문화와 정체성을 지키는 나라
부탄에서 우리 일행을 안내할 사람은 30대 초반의 친리씨다. 친리 역시 부탄의 전통 옷 고우(Gho)를 입고 있다. 어찌 보면 고구려 수렵도 벽화에 나오는 사냥꾼 복장 같기도 하다. 부탄은 배낭족 입국을 불허하고 여행객은 반드시 가이드와 동행해야 하며 관광객의 숫자도 매년 몇 천 명으로 제한하고 있는데, 이 역시도 부탄의 문화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조치일 것이다. 관광객 유치에 목숨을 건 우리나라와 비교되는 정책이 아닐 수 없다.
친리의 안내를 받은 첫 방문지는 17세기 때 건립된 파로종(Paro Dzong)이다. 종이란 부탄을 이해하는 키워드 중 하나인데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행정 청사다. 그러나 단순히 행정의 수장만 있는 청사가 아니라 사법부와 고승이 거주하는 불교 사원이 함께 있는 부탄만의 독특한 복합 청사다. 종 내부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뉘어 행정과 사법 공간은 일반인의 출입이 자유롭고 수행자들의 수행 공간은 여행객의 관광을 제한하고 있다.
종의 또 다른 특징은 요새 기능을 한다는 점이다. 티베트의 침략에 대비하고자 높은 곳에 종을 건설하여 망루처럼 적의 침투를 감시했던 것이다. 파로종 역시 멀리서 보니 요새 같다. 성벽은 희색 칠을 했다. 전통 가옥의 형태인 청사와 사원은 일본의 오사카 성을 연상시킨다. 한편 파로종뿐만 아니라 부탄의 모든 종은 히말라야에 사는 요괴를 제압하기 위해 건립했다는데 사실은 요괴가 아니라 침략자를 상징하는 것 같다.
파로종에 올라보니 산들에 둘러싸인 파로 시가지가 한눈에 든다.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파추강 물결이 옥처럼 투명하다. 사원과 흡사한 전통 가옥의 외형이 아름답다. 가옥만 봐도 부탄의 정체성이 느껴진다. 문득 1970년대 무렵에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우리 농촌의 전통 초가를 모두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꿔버린 것이 생각나 몹시 쓸쓸하다. 지도자의 문화 의식과 안목이 얼마나 중요한지 부탄에 와서 또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파로종 현관에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친리가 희색 가사(袈裟)를 착용한다. 종에 들어설 때 남자는 전통 옷 위에 가사를 걸치는 것이 관습이란다. 가사의 색깔은 신분을 나타내는데 국왕은 노란색, 법왕은 녹색, 스님은 오렌지색, 국회의원은 파란색, 보통의 사람들은 흰색을 착용한다.
목재와 흙으로 건립된 종의 건물들은 화재에 취약할 터이다. 실제로 파로종도 1905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복원된 건물이다. 티베트 불교 승려처럼 붉은 가사를 착용한 수행자들이 간간이 옆을 지나치지만 한마디 말도 붙여보지 못하고 파로종을 나선다. 아직 부탄 불교를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다. 무얼 좀 알아야 질문할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친리가 다음 행선지를 잡기 위해 누군가와 통화한다. 친리의 휴대폰 화면에 나타난 젊은 국왕 부부 사진이 눈길을 끈다. 국왕 부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럴 수 없을 텐데, 부럽다. 도대체 부탄 사람들에게 국왕의 존재는 무엇일까?
히말라야 기운으로 축복받은 땅, 네팔
망명한 티벳 사람들의 귀의처, 보드나트 스투파
카트만두 하늘은 흐려 있다. 창에 빗방울이 하나둘 달라붙었다가는 사라진다. 손목시계는 한국보다 세 시간 15분 빠른 네팔의 시간으로 고쳐져 있다. 네팔이 내게 주는 입국 선물이다. 그러나 귀국할 때는 반납해야 할 시간이기도 하다. 세상은 무엇 하나 공짜가 없는 법이다.
다 알다시피 히말라야 산맥 아래 자리한 네팔은 여러 소수 종족들로 이루어진 나라다. 네팔 국민들은 대부분 힌두교 신자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상식의 잣대는 여지없이 빗나간다. 네팔은 힌두교 신자 몇 퍼센트, 불교 신자 몇 퍼센트라고 구분할 수 없는 나라인 것이다. 힌두교는 네팔 사람들이 삶 자체이고 그 속에서 시바, 부처 등등 무엇을 의지하고 사느냐가 다를 뿐이다. 우리들이 유교식 제사를 지내면서 가톨릭교나 불교를 믿는 것과 흡사한 맥락이다. 카트만두 세종학당의 실무를 기획하고 있는 박우석 씨의 설명도 그렇다.
"네팔 사람들은 모두 힌두교인입니다. 그러나 힌두교의 삶을 살면서도 석가모니 부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제 판단에 의하면 60퍼센트 정도 됩니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을 부디스트(Buddhist)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나라와 같은 종교 인구 분석은 네팔을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일행을 태울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우리를 안내해줄 사람은 하리씨다. 하리는 20여 년 전 대학을 갓 졸업한 뒤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한국에서 생활한 적이 있어 우리말을 잘 구사하는 편이다. 나와 지인들은 네팔에서 가장 큰 스투파 중에 하나인 탑 높이 38미터의 보드나트 스투파로 행선지를 정한다.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탑이기도 하다.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기는 하지만 우산 없이 걸을 만하다. 보드(Bodh)가 깨달음, 나트(Nath)가 사원이니 깨달음의 사원이란 뜻이다. 그러나 현장에 가보니 네팔 사람들은 그냥 보우다나트(Boudanath)라고 한다. 스투파 부근의 마을 이름이 보우다(Bouda)이기 때문이다. 여행안내서의 이름보다는 현지의 별칭이 더 정겹다는 사실은 두말 할 것도 없다.
비좁은 도로에 차와 사람이 한데 엉켜 있다. 스투파까지 더 이상 버스로 이동할 수 없다. 10여 분 걸어야 할 것 같다. 문득 붉은색 천지인 티베트에 와 있다는 착각이 든다. 네팔의 힌두교 문화보다는 티베트의 불교 분위기가 아주 짙은 지역이다. 왜 네팔 속의 티베트라고 부르는지 이해가 된다. 실제로 보우다 지역은 티베트에서 망명한 1만여 명의 난민들이 1956년부터 정착하여 티베트의 정체성을 유지해오고 있다. 1951년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하자 네팔로 넘어온 티베트 난민들 중 일부가 히말라야산맥 고산지대로 갔고, 다른 일부는 카트만두의 보우다 지역으로 살길을 찾아서 왔던 것이다. 불심 강한 그들이 보우다에 정착한 이유는 부터의 사리가 봉안된 보드나트 스투파가 결정적이었을 터이다.
보드나트 스투파의 조성 배경에는 한두 가지 전설이 있다. 하나는 천민이 왕의 허락을 받아 조성했다는 이야기다. 또 하나는 가뭄이 심하게 들어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기우제를 지내려고 하는데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어 왕이 "누구든지 얼굴을 보지 말고 머리를 자르라."는 명을 내렸던바 왕자가 한 사람의 머리를 자르고 보니 바로 자기를 사랑하는 아버지였다는 전설이다. 왕자는 슬퍼하며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탑을 쌓았는데 물 대신 이슬을 받아 조성했다고 한다. 그래서 보드나트 스투파를 이슬의 탑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전설일 뿐이다. 천민을 내세운 전설에는 정성으로 켠 등불이 바람에 꺼지지 않는다는 빈자(貧者)의 일등(一燈)처럼 순수한 마음을 강조하는 종교적 신심이 깃들어 있다. 이 전설은 왕이 고난을 당하는 백성들에게 어떤 정치를 펴야 하는지 말하고 있으며 왕의 현명한 태도를 강조하는 민초의 염원도 스며 있는 듯하다. 그런데 하리의 보드나트 조성에 대한 설명은 처음 들어보는 것이어서 귀가 솔깃하다.
"제가 본 책에는 1500년 전에 이 지역을 다스리던 릿차비족 왕조의 만데비라왕이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조성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릿차비족이 인도 북부에서 카트만두까지 올라와 살았다는 것이 흥미롭거니와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한 지 1000년이 지나도록 잊지 않고 그리워하며 존경했다는 것도 경이롭다. 인도 북부의 바이샬리 지역에서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릿차비족의 도시국가는 석가모니 부처가 그곳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몹시 사랑하여 세 번이나 찾아갔던 나라다. 부처의 이모 마하파사파티가 출가했으며, 유녀(遊女) 암바팔리가 부처에게 귀의한 뒤 망고동산을 기증했던 곳이 바로 바이샬리다.
그런가 하면 바이샬리는 부처가 자신의 열반을 3개월 전에 선언한 곳이기도 하다. 그때 릿차비족 사람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 한 슬픔을 겪었다. 나는 불경을 근거로 해서 쓴 장편소설 『니르바나의 미소』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 적이 있다.
아난다는 부처님 표정과 눈빛을 보고서는 무심하게 사물을 바라보는 코끼리 같다고 느꼈다. 릿차비족이 사는 바이샬리 마을과 거리를 바라보던 부처님이 아난다에게 말했다.
"아난다여! 여래가 바이샬리성 마을과 거리를 보는 것도 마지막이구나."
아난다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세존께서 바이샬리성 마을과 거리와 사람들을 너무도 사랑하셨음이 틀림없다.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마지막이라고 저렇게 말씀하실까.
바이샬리성 사람 중에는 망고동산을 기증한 암바팔리도 사랑하셨으리라. 나중에 출가하여 사문이 되는 암바팔리의 두 아들, 비마라와 콘단냐도 각별히 귀여워하셨을 것이다.
우주의 지수화풍을 상징하는 보드나트 스투파
이윽고 보드나트 스투파 앞에 선다. 붉은 가사 차림의 티베트 승려들과 검은 복장의 신자들이 마니차를 돌리며 코라(탑돌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한쪽에서는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 탑돌이는 시게 방향, 즉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돈다. 신이 오른쪽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와 지인들도 어떤 주술에 걸린 듯 티베트 신자들을 따라 탑돌이를 한다. 탑의 맨 하단에는 마니차를 돌릴 수 있는 장치가 설치되어 있고, 사각 기단 위 하얀 반구에는 아미타불 108분이 감실에 봉안되어 있다.
탑돌이를 하고 나서 자세히 보니 스투파는 다섯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땅을 상징하는 4각의 기단이 있고, 그 위에 물을 상징하는 하얀 반구인 쿰바가 있고, 불을 상징하며 4면으로 도니 하르미카가 있고, 바람을 상징하는 첨탑 스삐레가 있고, 상단에는 우주를 상징하는 우산 모습의 움브렐라가 있다. 부처의 두 눈 사이의 또 하나의 눈은 제3의 눈, 즉 지혜의 눈이라 한다. 물음표를 닮은 코 모양은 티베트 말로 1이라는 숫자를 상징하는데 진리는 하나라는 뜻이다. 스삐레는 열세 개의 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열반으로 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어쨌든 스투파에는 우주의 구성 요소인 지수화풍이 형상화 되어 있고, 티베트 신자들은 스투파를 거대한 탑이라 하여 초르텐 쳄포(Chorten Chempo)라고 부르고 있다. 오체투지를 하거나 옴마니밧메훔을 외며 마니차를 돌리는 그들을 보니 신심이 성지라는 성철 스님의 말씀이 가슴을 친다. 스투파 주변에는 티베트의 크고 작은 곰파(Gompa : 사원)들이 30여 개나 들어서 있다. 중국이 티베트의 땅은 점령했지만 티베트인들의 신앙심이라는 에너지로 볼 때 그들의 마음까지는 점령하지 못한 것 같다. 그들 마음의 스승은 중국의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오직 부처뿐인 것이다.
신라 여섯 씨족장과 석탈해가 떠난 땅, 남인도
남인도 최대의 무나르 차밭, 영국인들이 자국을 위해 개발
일행은 아침 일찍 무나르(Munnar) 차밭으로 향했다. 무나르의 무는 3이라는 숫자, 나르는 강의 발원지라는 뜻이라고 길잡이가 설명한다. 그러니까 무나르는 세 개의 강이 발원하는 고산중령인 것이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산길로 들어서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서행한다. 고도는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방향은 인도 남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셈인데, 벌써 멀미를 하는 사람이 속출한다.
해발 2000미터의 산자락 전체가 초록빛 융단을 깔아놓은 듯 장관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차밭 풍경 너머에는 남인도 사람들의 슬픈 식민지 역사가 차나무처럼 깊이 뿌리박고 있다. 영국이 자국의 홍차 수요를 위해 1880년부터 무나르에 차나무를 재배하기 시작한바 차와 노동력을 무자비하게 착취했던 것이다. 무나르의 차나무 수명은 40년이라고 한다. 40년이 넘으면 뽑아내고 다시 어린 묘목을 심는다고 하는데, 과연 한쪽 산자락에서는 어린 차나무들이 푸른 천을 펼쳐놓은 것처럼 자라고 있다.
미리 챙겨온 점심 도시락을 모나르 산중의 휴게소에서 먹고 나서도 서너 시간은 더 달렸지만 아직도 차밭이 굽이굽이 전개되고 있다. 차나무 세상의 별천지에 온 것 같다. 버스에서 잠시 내려 장시간 이동에서 오는 피로를 풀며 휴식을 취해본다. 때마침 찻잎이 막 피어나고 있다. 1월 초순인데 이곳은 우리나라 절기로 치자면 곡우 안팎 같다.
찻잎을 따는 노동자들이 차밭에 일렬횡대로 줄지어 수동식 기계로 가위질 하고 있다. 가위질할 때마다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차밭 골짜기를 울린다. 노동자의 일당은 8000원에서 9000원인데, 채취량으로 지불할 때는 1킬로 그램당 20루피(약 400원)를 준다고 하니 값싼 노동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일이 없어 노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차 따기는 15일만 쉬면 찻잎이 다시 올라와 1년 내내 지속할 수 있단다. 차밭의 관리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우리 일행을 물끄러미 지켜본다. 나는 인도 사내를 본 순간 또다시 달마대사를 떠올리고 만다. 달마대사를 닮은 사람과 벌써 몇 번이나 마주쳤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선가(禪家)에서의 차는 달마대사로부터 시작한다. 달마가 졸음을 참느라고 눈썹을 뽑아 동굴 밖으로 던졌는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그 눈썹이 차나무가 됐더라는 설화가 그것이다. 달마의 제자인 혜가 역시 그 차나무 잎을 달여 마심으로 해서 졸음을 극복했다고 한다. 찻잎에 정신을 맑게 하는 각성 성분이 있으니 면벽 좌선의 수행자인 달마와 혜가가 차를 마셨다는 것이 전혀 생뚱맞은 얘기는 아닐 터이다.
이윽고 일행은 해발 1370미터에 위치한, 차를 만드는 공장인 크리슈나 회사를 견학하기 위해 하차한다. 1만 1천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회사에서는 연간 2천 4백만 톤의 차를 생산하고 있다고 한다. 회사 한 곳의 차 생산량이 우리나라 여러 지역의 총생산량과 비슷하다. 홍차에 우유와 설탕을 넣은 달달한 짜이를 대접받고 나니 홀연히 피로가 사라진다. 일행 중에는 회사 구내 상점에서 선물로 가져갈 차를 사는 사람도 있다. 나는 크리슈나 회사 정원에 자라고 있는 차나무의 차 씨 몇 개를 채취하여 선물로 삼는다. 국내로 돌아가 이불재 뜨락에 심어볼 참인 것이다.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남인도 해안의 포탈라카산
일행을 태운 버스는 다시 마두라이(Madurai) 쪽으로 가는 산길을 달린다. 차밭은 줄어들었지만 대신 산자락에 보라색과 흰색의 야생화가 눈에 띄게 많아진다. 쿠른지꽃과 종꽃이다. 이곳 역시 아직은 무나르 지역이다.
마침내 일행은 인구 1만 명 정도의 마을로 들어선다. 하룻밤 묵기 위해서다. 협곡에 자리한 도시형 마을인데 한쪽 언덕에는 이슬람교도, 다른 쪽 언덕은 힌두교도와 기독교도가 살고 있다. 우리 일행이 머물게 도리 숙소는 중간 지점에 있다. 숙소 지척에 운 좋게도 카타칼리(Kathakali) 공연장이 눈에 띈다. 케랄라 지역에서 10세기경에 발생한 카타칼리는 중국의 경극, 일본의 가부키와 함께 동양의 3대 무언극으로 알려져 있는데 인도의 5대 전통 연극 중 하나다. 중국의 경극과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로 치면 처용무와 그 성격이 비슷하지 않나 싶다.
공연장에 들어가니 석유 냄새가 코를 찌른다. 자세히 보니 케랄라 지역에서 전해지고 있는 칼라리파야트(Kalari Payat)라는 전통 무술도 함께 공연하는 듯하다. 칼라리파야트의 마지막 단계는 둥근 원에 석유를 묻혀 불을 붙인 뒤 화염 속을 오가는 무술이다. 그러나 일행은 시간이 없어 칼라리파야트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무언극만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만다. 전통극의 특징은 어디나 흡사한 듯싶다. 우리 처용무도 처용의 가면을 쓰고 춤을 추어 역신을 쫓는다는 내용이고, 카타칼리도 악마가 남자를 유혹하지만 남자는 악마의 유혹을 물리친다는 내용이다. 춤을 매개로 하고 있다는 점이 유사하다.
다음 날도 일행은 아침 일찍부터 서두른다. 마두라이로 가려면 웨스트가트 오브 인디아산맥을 넘어야 하는 것이다. 버스는 차밭에 펼쳐진 안개를 헤치고 달린다. 또 몇 시간이나 달려야 점심 먹을 자리라도 찾을지 모르겠다. 큰 산맥을 하나 넘자, 완만한 구릉지대가 나타난다. 현장의 『대당서역기』를 보니 이 지역을 말라이코타국 이라고 부르고 있다. 말라이(Malai)는 타밀어로 구릉, 코타(kotta)는 지방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이 여기까지 왔다는 기록도 보인다.
성의 동쪽 멀지 않은 곳에 낡은 가람(절)이 있다. 뜰이나 건물은 황폐했으나 기초는 아직도 남아 있다. 아소카왕의 아우인 대제가 세운 것이다. 그 동쪽에 스투파가 있다. 기단은 이미 붕괴되었으나 복발은 아직 남아 있다. 아소카왕이 세운 것이다. 그 옛날 여래가 이곳에서 설법하는 가운데 대신통력을 나타내어 무수한 사람들을 제도했다.
또 관자재보살의 상주 처인 포탈라카산을 설명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가면 스리랑카로 가는 포구가 있었다고도 기록하고 있다.
말아야산 동쪽에 포탈라카산이 있다. (중략) 관자재보살이 왕래하며 머무르는 곳이다. 보살을 보고자 하는 사람은 신명을 돌보지 않고 강을 건너 산을 오른다. (중략) 관자재보살은 때로는 자재천으로 모습으로, 외도의 모습으로 나타나 기원하는 사람을 위로하고 소원을 성취시켜준다. 이 산에서 동북쪽으로 가면 해안에 성이 있다. 남해의 싱갈라국으로 가는 통로이다.
일행은 다행히 조그만 마을로 찾아들어 점심 먹을 곳을 잡는다. 대숲이 우거진 곳의 식당인데 원숭이들이 달려와 끽끽 소리치며 일행을 환영한다. 이 작은 도시도 관광지인 듯 외국인들이 간간이 보인다.
의상대사와 혜초가 순례한 불국토, 중국 오대산
부처님 진신 사리 1과가 봉안된 대백탑
오대산은 어디를 가나 문수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산 정상인 오대를 가도 그렇고, 산 아래 마을인 대회진(臺懷鎭)에 건립된 사찰들도 그렇다. 발길 닿는 곳, 눈에 띄는 곳마다 문수보살상이 조성되어 순례자들의 참배가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수행자로서 문수보살과의 어떤 감응도 없다면 무감각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일행은 비가 오락가락하는데도 불구하고 대회진의 사찰들을 순례하기로 한다. 순례도 일종의 용맹 정진이고 행선이다. 숙소를 나와 첫 번째로 간 곳은 오대산 사찰 중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규모가 큰 영취봉 현통사(顯通寺)다. 황제의 사액사찰로서 맏형 격의 절이다.
현통사는 동한 영평 11년(68)에 초창되었는데, 북위 태화 연간(477~499)에 효문제가 이곳에 들러 한 스님으로부터 산세가 인도의 영취산 같다는 얘기를 듣고 영치봉으로 개산하고 절 이름을 영취사로 바꿨다고 한다. 이후 화원사(花園寺), 화엄사로 불리다가 명나라 태조가 현통사로 사액을 내렸는데 명 신종이 다시 영명사(永明寺)로 고친 바 있고, 청나라 성조 때 다시 현통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산문을 들어서서 보니 가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설명에 의하면 전각과 당우를 합쳐 총 400여 칸이나 도니다고 한다. 일직선상으로는 관음전, 대문수전, 대웅보전, 무량전, 천불전, 동전, 장경전이 있고 좌우에 여러 당우와 승방들이 겹으로 배열된 구조다. 마친 대문수전에서는 재를 치르고 있어 밖에서 합장만 하고 회랑을 따라 천불전까지 가는데, 앞서 가던 스님들이 걸음을 멈춘다. 선불장이란 예사롭지 않은 편액이 보인다. 순례 일행은 잠깐 시간을 내어 편액 아래 앉아 10분 참선에 든다.
가만히 반가부좌를 틀고 있으니 영취봉이 응답한다. 한줄기 서늘한 바람을 보내오는 것이다.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선사가 맑은 바람이 바로 그대의 선지식임을 알고 한 자리 차지함을 탓하지 말라고 한 말씀이 홀연히 떠오른다. 지금 불어오고 있는 바람도 어쩌면 현통사를 거쳐 간 수많은 수행들의 덕화(德化)일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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